폭포를 보러가다(2014)
지난 2년간의 연말포스팅에서 오키타 슈이치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직업 세계를 연거푸 묘사한다고 말했었는데 본인도 이런 지적을 알고있는지 이번에는 남성이 전면 배제되고(단역의 두명과 약간 비중있는 가이드 역까지 총 세명이 나오긴한다) 특정 직업과도 무관한, 중년 주부들의 가을 단풍 여행이라는 소재로 신작을 완성했다. 한계상황 하에서의 군상극, 즉 인물들을 한정된 시공간 안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코미디를 관찰한다는 플롯은 유지된다. 그러니까 인물의 성별만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일본영화 특유의 학원스포츠만화적 정서, 즉 다같이 힘을 내서 열심히 해보자는 식의 작위적인 드라마가 없고 한정된 공간에 있다보니 점차 인물간의 허물과 장벽과 내숭이 사라지면서 솔직한 대화와 행위들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긴했다. 한국 아줌마들을 보는듯한 느낌도 살짝 들고. 상영시간도 짧고 전반적으로 소품같은 인상이지만 괜찮은 우회전략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될 때 제목이 <에코테라피 여행>이었는데 내 생각에 힐링 영화란 자고로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하게 있어야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힐링영화는 아니다. 머리카락,얼굴,옷에 흙이 묻는건 물론이고 시간이 갈수록 인물들 외양이 점점 더 추레해져가는데 힐링 영화란 이런 식의 고생의 경험이 배제됨은 물론 기획에서부터 염두에 없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장 긴 하루(1967)
히로히토가 순전히 일본 국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성단'을 한 것으로 묘사하는 가증스러움으로 인해, 이 영화가 겉으로나마 미구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한다해도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어전회의에 참석한 각료뿐만 아니라 히로히토 스스로도 폐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면책을 포함 철저히 자신의 지위보전에만 매달렸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기록이 말하고있는 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히로히토 보호의 주장을 육군대신인 아나미가 주로 하는 것으로 처리되어있고 히로히토 본인은 자신의 앞으로의 지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국체호지파가 계획한대로 철저히 수동적인 천황상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목소리만 나올뿐 얼굴은 전혀 나오지않는데 그런 점에서 2015년 리메이크판에서는 유명 배우인 모토키 마사히로가 히로히토를 연기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하겠다. 감독이 위험을 감수한만큼 과연 그에게 어떤 드라마를 부여했을지 궁금하다. 하긴 1967년판에서야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히로히토를 일개 배우가 연기한다는건 불가능했을테고 거기에 더해 영화 제작 시점으로부터 불과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만큼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67년작을 생존해있던 실제 히로히토가 과연 어떻게 봤을지 일견 궁금해졌다. 다시금 말하지만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 도요시타 나리히코의 <히로히토와 맥아더>를 읽어보면 본편에서 히로히토의 처신에 대한 묘사가 사실에 어긋남을 알 수 있다.

 

회사 이야기(1989)
버블이 터지기 직전, 아직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 보장되던 80년대 말, 청년시절엔 미국의 재즈음악을 논하고 직접 연주까지했으나 경제부흥시기 샐러리맨이 되고 큰 위기없이 안정적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가면서 정년을 맞게 된 세대들의 애수가 그려진다. 이야기는 성긴 편이지만 이치카와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연출과 편집은 유지된다. 전체적으로는 cf에 익숙한 연출스타일이 장편 영화의 서사를 끌어가는데 있어 부분적으로 벅차보이는 면에서 초기작답지만 어쨌건 이치카와의 작품을, 그것도 초기작을 hd로 감상했다는데 나름 의의가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81)
고바야시 카오루는 <소레카라>에서 발연기를 시전한 바 있는데 그보다는 볼만하다. <소레카라>보다 3년 전에 나온 이 영화는 젊은 감독의 치기도 패기도 다 있는데 뭔가 좀 지루하다. 하긴 원작 자체가 토막난 에피소드들의 자잘한 나열처럼 되어 있긴한데 영화도 뭔가 좀 아마추어스럽다. 그가 80년대에 쓴 어느 에세이에 후배인 이 영화의 감독과의 추억이 언급되어있다.

 

백엔의 사랑(2015)
안도 사쿠라는 2014년 제목에 숫자가 들어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본편은 친언니가 연출한 <0.5미리>보다 훨씬 미덕이 많은 영화인데 우선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관찰자이자 가이드 정도에 머물렀던 <0.5미리>에 비해 본편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진짜 주인공이다. 타인을 변화하도록 돕는 인물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변하는 인물.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젠더를 이분화하고 양쪽 세계를 범주화한다. 이치코가 뛰쳐나가기전에 살던 집은 아버지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식물에 가깝고 엄마와 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 주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집을 뛰쳐나가 그녀가 본격적으로 프리터 생활을 시작하자 집 바깥은 남성과 그들의 가치로 규범화된 세계인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의 직원들 그리고 그녀가 매혹된 권투라는 스포츠와 도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남성적 세계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만나는 여성은 편의점 물건을 도둑질해가는 중년 여성과 남자친구를 빼앗은 여자 정도인데 이치코는 앞의 여자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지만 그런 그녀도 마지막 순간엔 남성과 싸우기보다는 그 세계에서 아예 탈출해버린다. 이치코가 결국 이 남성 세계에서 버텨내지못한다는 것은 마지막 시합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명시된다. 권투 영화에서 더 이상 새로운 뭔가를 보여준다는게 불가능함을 알고있었던듯 감독은 남성세계에서 승리는 하지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낙오하지않고 버텨내려는 여성의 몸부림을 격투 스포츠를 가져와 돌파해내려한다. 

 

0.5미리(2014)
'금수저' 감독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만든 영화. 실제로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인 두 배우가 드잡이를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노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소외된 그들과의 소통을 하려한다는 주제는 마지막에서 방향을 튼다. 

 

음악(1972)
거세공포, 네크로필리아, 근친상간, 살인충동 등등 프로이트를 처음 읽고 흥분한듯한 미시마 유키오의 기초 정신분석학강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감독의 일생(1975)

영화감독을 소재로 한 다큐는 거의 예외없이 다 재미있다. 정작 그 감독의 연출작은 재미없을지 몰라도. 올해 본 영화감독 다큐로는 알트만, 조도로프스키, 니콜라스 레이, 로만 폴란스키, 허우 샤오시엔,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가 있었는데 이 미조구치 다큐의 경우, 잘 나가다가 말미에 연출자이자 인터뷰어인 신도 가네토가 인터뷰이인 대배우 다나카 기누요에게 미조구치와의 연애사를 계속 캐묻는 장면이 너무 집요해 보였다. 존경심을 담은 인터뷰어에서 돌연 파파라치로의 변신을 보는 기분. 하긴 애초에 여기서 신도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의 인터뷰어나 화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중간중간에 스스로 인터뷰이만큼의 자기 서술을 집어넣고 있다.

 

밴쿠버 아사히/우리 가족(2014)
<밴쿠버 아사히>의 경우, 이민사를 마치 피식민역사처럼 그리는걸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난감하게한다. 1년동안 두 편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아무래도 무리수가 보이는데 <우리 가족>에서 그 밑천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말해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족드라마의 외양을 뒤집어쓴 부조리극같은 느낌. 의사는 치매에 걸린 엄마가 어떻게 1주일 안에 죽는다고 진단을 내리는가? 갑자기 영화의 줄거리는 왜 집안의 불안한 재무상태를 해결하려 뛰어다니는 것으로 바뀌는가? 그래서 장남의 왕따 경력은 도대체 지금 줄거리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술집에서 갑자기 만난 여자는 무슨 기능을 하는가? 가장 어이없는건 결말부에 이르러 갑자기 광속으로 술술 풀려가는 갈등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며느리의 갑자기 달라진 태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의사의 등장, 갑자기 상냥해진 며느리에 앞에서 여전히 흰소리만 계속하는 아버지까지. 훈훈한 가족드라마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부분부분이 다 넌센스하다.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서 무려 5위. 이 감독은 과대평가받는 면이 분명 있다.

 

만(1964)/열쇠(1959)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의 영화 두 편. <열쇠>는 언젠가 케이블 심야시간에 97년작도 봤더랬다. 다니자키 영화에 최적일듯한 마스무라 야스조가 원작에 전혀 손을 대지않고 거의 그대로 옮긴 반면, 원작의 주제의식까지 바꿔버릴 정도의 권선징악적 결말을 택한 이치가와 곤의 대조가 확연히 대비된다.

 

호텔 하이비스커스(2004)
한 국민국가내 소수자들의 로컬성을 내세운, '내수용 영화'가 아닌 '로컬 시네마'. 하지만 특수성과 로컬리티를 내세울수록 그것이 공감을 얻기보다 자기특권화에 의한 고립이라는 원하지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않은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남자의 일생
전형적인 순정만화의 전형적 실사화. 철학을 가르친다는 중년의 주인공은 정작 철학의 철자도 입밖으로 꺼내지않고 두 주인공의 동기와 행동들은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않는다. 젊은 여성들의 중년남에 대한 그쪽의 인기와 무관하지않다고 하더라만 그런거 모르는 입장에서는 술술 '그냥' 넘어간다. 

 

남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2008)
<니시노 유키히코의 사랑과 모험>을 보고나서 이구치 나미의 전작을 찾아보고 싶어서 본 영화. 전대미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류영화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여성캐릭터가 나온다. 특히 처음 아틀리에에 둘이 있을 때의 나가사쿠 히로미의 연기는 압권.

 

지도 없는 남자 (1972)
'시대를 앞서가는' 것보다 당대와 발을 맞추는 동시대적 감각이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얼굴>(1967)에서 일본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았던 감독의 72년작. 야쿠자물같은 통속범죄물이 유행하던 시기에 나왔지만 그런 류의 영화들보다 더 '멋이 있다'. 갈수록 더 갈라파고스화 되어가는 일본 영화를 보면 이런 동시대성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 

 

바느질 위의 인생 (2015)
해피해피 브레드도 그렇고 (해피해피 와이너리는 못봤다) 이 영화까지 보고나니 이 감독에 대해 어떤 감이 선다고할까. 치유계 영화의 형식과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페티시화되어 알맹이는 쏙 빠진채 '폼'과 껍데기만 있는 영화. 플롯은 커녕 줄거리랄 것도 없고 국적불명같은 장소와 공간(심지어 시간도) 위 에서의 '연기'만 있다. 보고나서 나카타니 미키의 단발이 잘 어울리더란 인상만.

 

사무라이 반란(1967)
<할복>과 마찬가지로 계율, 명분, 위신, 체면, 전통 등등에 의해 생기는 부조리를 다룬 '옛날이야기'같은건데 다만 감독이 자신의 연출력으로 이를 긴장감 팽팽한 두시간짜리 드라마로 끌어간다. 기실 <할복>이나 본작이나 다 같은 이야기이다. 가치관 차이에 따른 부조리해보이는 갈등이라고 요약은 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극의 시공간 위로 근대 이후의 인간이 떨어져서 생기는 일종의 문화지체에 따른 갈등이 본질. 즉 사극 무대에 페미니스트, 인권보호주의자, 인종차별반대 운동가 등의 활동가가 떨어지는 격이다. 여기서 주인공인 미후네 도시로의 가문은 처음부터 줄곧 멸시당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았던 아버지가 돌연 전향해 아들과 뜻을 같이한다. 국가가 아닌 자신이 모시는 군주로부터의 명령만 따르던 자가 돌연 이제는 군주도 버리고 자기 가문의 명예를 더 중히 여기는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의 아버지는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 조금 더 먼 미래 혹은 아예 전형적인 근대인에 가깝다.

 

라운드 어바웃 미드나잇 (1999)
재즈 선율을 배경으로 한밤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낭만적인 활극. 도시의 밤 분위기를 재현하고 싶었했음을 이해하는 관객은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액션 장면 연출은 좀 허술하지만. 사나다 히로유키와 무려 이가흔이 나온다. 사나다의 립싱크와 핸드싱크가 꽤 그럴듯해서 연습을 열심히 했음이 보인다.

 

리얼 술래잡기(2015)
노골적으로 게임 진행방식을 빌려와놓고 나중에 이것을 대단한 반전인냥 풀어내는건 좀 안일하지않은가. 이름과 캐릭터의 변화보다 복장의 변화에 주목할 것. 남성이 주도하는 현실세계에서 여성이 늘 경계하는 강간의 공포를 비유해서 게임화(그걸 다시 영상화)했다. 맨마지막 장면, 그렇게 러닝타임내내 피칠갑을 하던 영화가 맨 마지막에는 순백의 설원에서 핏자국하나없이 미츠코가 일어나 달려가는 엔딩을 통해 '남성'이 만들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계의 이름 그 자체가 곧 '남성'인 그곳에서 끝까지 피를 보지않고 즉 남성에게 처녀성을 뺏기지않은 채 탈주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자결함으로써 얻은 도주라는 것이 함정. 최근 몇년간의 소노 시온 영화들이 전부 남성영웅의 구원 서사로 일관했다는 점을 의식한듯 그것을 뒤집는 척한다. 남성 감독이 창조한 '남성' 세계의 구성원들이 만든 가짜 세상에는 여성들만 존재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처음엔 소녀나 여성이 등장하는 장르물의 클리셰처럼 진행하다가 뒤집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여성을 살육하는 남성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 여성이란 그저 남성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만든 캐릭터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대등한 주체간의 대립일 수가 없고 그저 전체와 무(無)라는 절대적 비대칭 관계로서의 남녀관계를 은유한다. 최근 2년 사이 쏟아져나온 소노 시온의 범작도 되지못하는 태작들의 연속 속에서 그나마 옛날 느낌이 살아있다. 근데 영화감독이라는 사람들은 피묻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에 대한 로망이 다들 있나보다.

 

신주쿠 스완 (2015)
그러나 전술했듯 소노 시온의 최근작들은 편협한 내 눈으로 보기엔 거의 다 범작 이하. 그중 이 영화는 올해 본 최신 일본영화 중 최고 망작. 극단적 통속성을 밀어붙이면 대개 둘 중 하나의 효과가 발생한다. 누구나 다 아는 통속성이기에 더 진하게 전해지는 진정성 아니면 그 익스큐즈된 이해로부터 기인하는 안전함이라는 표피로의 퇴행. 

 

바다와 독약 (1986)
그해 키네마준보 1위작인데 결말부에 그냥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서 구구절절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문학작품의 영상화로는 명백한 실패. 인권이 무시되며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 해지는 전시 상황이다보니 전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그것도 다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거 같긴하지만. 

 

취업전선 이상없다(1991)
1990년대 초 그러니까 잃어버린 10년 아니 20년이라는 일본식 장기불황이 시작되던 즈음 구직시장에 뛰어든 대학졸업반 청년들의 구직활동을 다룬 영화. 그다지 심각하지않고 상업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선을 절대로 넘지않는다. 우리의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는 기분으로 그때 90년대 패션과 헤어스타일, 화장법 따위를 의사고고학적 취향으로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이쪽은 '재연'이 아니라 실시간이지만. 춤추는 대수사선으로 브레이크하기 이전의 오다 유지가 주인공이고 요즘은 경찰청수사1과9계로 알려진 하다 미치코도 나오는데 메인여주는 와쿠이 에미. 이분은 최근 들어 어머니 배역을 시작했다.

 

엔딩노트(2011)

유한계급 사모님의 나이브한 현실인식을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의 진중했던 미망인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러브 앤 피스(2015)

보고나서 적었던 메모들. 1.남녀주인공의 흰머리. 남주의 흰머리는 그가 데뷔하고 성공하면서 조금씩 사라지는데 여주는 그대로. 생활의 각박함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듯. 2. 남자주인공은 펑크락커로 데뷔해 점차 글램락 스타일로 변신해감. 3. 마츠다 미유키는 최근 몇년간 실제로 반전반핵 활동가로서 살아왔는데 그런 면모가 본작의 짧은 출연에 반영되어 있음. 4. <지옥이 뭐가 나빠>에서 나오던 '그 노래'를 극중 밴드인 레볼루션q가 부름. 5.최악의 건축물 중 하나라는 도쿄도청을 파괴하는 막판의 클라이막스는 쾌감을 준다기보다 그 조악함때문에 패러디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온화한 일상(2012)
신랄한 반어적 제목. 전혀 온화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하고도 어째서 계속 온화한 일상을 사는 척 할 수 있느냐는 되물음.

 

후쿠후쿠장의 후쿠짱(2014)
이번에도 주류에서 벗어난 소외된 괴짜,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운 이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평범하지 않은, 뭔가 좀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이고 동시에 외로운 사람들.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괴상함은 더욱 괴상해보이는데 이들을 향해 감독은 연민일 수도 있고 애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동료이고 친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대한다. 일단 주인공이 연기를 잘해.


계엄령(1973)
자막이 영 엉터리인지라 애로우에서 나온 새 박스셋의 자막으로 다시 보고 싶다. 무려 기타 잇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2.26 쿠데타를 주도한 젊은 황도파 장교들에게 그가 그저 사상적 배경과 영감을 제공한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가운데 본원으로서 공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이 영화를 보고야 알았다. 총살도 그래서 당한거였음.

 

비상선의 여자(1939)
하스미 시게히코가 뽑은 올타임 아시아 탑텐 중의 한 편. 같은 어둠을 안고 있는 하층계급의 두 남녀 중 남자가 자기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여성에게 끌리면서 생기는 관계의 균열에서 비롯하는 멜로와 서스펜스의 조우. 익숙히 보아온 이야기의 초기 버전을 직접 확인할 때의 재미와 쾌감이 있다.

 

대살진(1964)

일년 전에 나온 <13인의 자객>(1963)과 사실상 똑같이 후반부가 전개된다. 그런데 각종 덫과 부비트랩 및 비밀장치등을 준비하고서 꽉 짜인 계획 하에 적을 한 공간 안에 몰아넣은 뒤 그 안에서 살육전과 학살을 하는 전작에 비해 본편에서 무사들은 무계획과 막무가내로 그냥 적들에 돌진한다. 물론 이런 무대책은 결국 그들의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처음 정치적으로 각성된 주인공에 비해 끝까지 정치로부터 물러서 방관하는 입장을 보이던 인물이 처참하게 죽은 그들의 시체를 본 뒤 주인공의 손에 들려있던 칼을 잡고 대신 나서 기어이 못다한 그들의 목적을 완수한다. 바로 이걸 보여주고싶어서 감독은 일부러 전작과 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대응을 보여준게 아닐까. 외부에서 거리를 둔 채 방관하던 사람들(백성 일반)의 분노와 정치적 각성 그리고 이를 통한 행동을 촉발한다는 결말.

11인의 사무라이(1966)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하듯 <13인의 자객>의 비공식 연작으로 볼 수 있지만 이번에는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대목들도 있다. 비오는 낮시간의 살육전, 대의를 위해 뭉친 무리에 끼어든 실력을 감춘 방랑무사라는 설정. 앞에 이미 <13인의 무사>와 <대살진>에서 보여준 게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 없었을텐데 여기서는 규칙과 변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탄다. 13인의 자객이 철저하게 짜여진 규칙대로였고 <대살진>이 아무런 계획없이 임시변통으로 혹은 막무가내로 돌진해들어갔다면 이번에는 그 둘을 잘 버무려서 처음에는 계획을 치밀하게 짠 매복전을 계획하다가 그 계획이 버려지고 주군의 할복을 목격한 뒤에 다들 분노하고 흥분한 상태로 대강의 동선과 계획만을 임시로 짠 뒤 적에게 향한다.  <7인의 사무라이>도 생각나긴하지만 어쨌든 활극 연출에 있어서 쿠도 에이이치는 개싸움의 면모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남는게 없고 그저 죽음이라는 관념만이 남는듯 처절하게 싸우다 모두 다 죽고마는 전장의 살벌함은 뒤에 페킨파가 영향은 안받았겠지만 여하튼 그가 처음은 아니었음을 알게 했다. (이 3부작이 와일드번치보다 앞서 나왔으므로)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2015)
히마이즈미 세이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이한 목소리라서 1인 2역을 한게 티가 난다. 두번째 노인 역할에서는 <이키루>의 그네 장면을 오마주 하고 있다. 전작과 플롯상의 유사점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는데 이를테면 모든 사건의 시작은 하나의 짝사랑이고 그를 도와주려다가 앨리스는 자신이 오인당하거나 오인을 해서 엉뚱하게 말려든다는 플롯이 반복된다. 전작의 인물들이 거의 다 목소리에 참여했고 잘 나가는 쿠로키 하루가 합류. 이미 촬영이 끝난 이와이 슌지의 차기작인 실사영화에선 주연이다. '아리스'는 성이고 '하나'는 이름이라는걸 이제 알았네. 하여간 이와이 슌지의 소녀만화 감성은 독보적인거 같음.

 

묵동기담/애처 이야기/오니바바/호쿠사이 만화
올해 본 신도 가네토 영화들. <호쿠사이 만화>는 보면서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짙어지길래 연극 원작이 아닌가 했는데 맞았다.


쓰루하치 쓰루지로(1938)
왠지 기시감을 느끼게하는 줄거리였다. 철저히 비즈니스적 관계로 협업하는 남녀가 있다. 일하는 공적 세계에서는 최상의 파트너십을 구사하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만 사적으로는 늘 투닥거리는. 하지만 사실 보이지않는 남녀간의 애정의 선이 미묘하게 걸쳐져있고 둘은 공적 세계와 사적세계 간의 경계를 외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결국 어떤 계기로 결별을 하게되는데 여자는 부자 남편을 만나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하지만 직업 세계에 끝까지 남은 남자는 조금씩 전락을 하게되고 그런 부침을 보지못한 주변인들의 노력으로 두사람이 다시 합작을 하고 여자도 다시 자신의 기예를 통해서 사적 세계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 남아있을 때 느끼지못한, 한때 잊고있었던 전문가로서의 희열을 되찾지만 남자는 불안정하고 임시적이고 찰나같은 인기로 굴러가는 이 직업세계에 여자를 다시 발들이게 할 수 없어서 매정하게 여자를 내쫓는다. 비즈니스로 맺어진 남녀의 애매모호한 애정관계를 조명하는 이런 줄거리의 영화나 드라마를 숱하게 봐온거 같은데 하여간 이렇게 아주 원형적인 이야기를 딱딱 떨어지는 반듯한 연출로 끌어간다.

 

오하루의 일생(1952)
산쇼 다유와는 반대의 결말. 남성들에 의해 착취되어 전락하는 여자의 일생을 쫓는다는 점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게 한다. 배우자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되고 부정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 착취를 전면에 드러낸다. 남성은 그녀를 이용하고 버리거나, 그런 악의는 없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곤란에 빠뜨리는 존재로만 나온다. 철저하게 남녀의 대칭 정확히는 대립으로 가장한 종속이 계속되는데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성별, 연령, 계급이라는 요소가 더 부각된다. 본편에서 근대적인 로맨스를 꿈꾸었던 오하루는 최초에는 계급에 의해 부정된다. 무엇보다 그녀가 분란을 일으킬 때마다 집 그러니까 본가로 되돌아온다는 설정이 반복되는데 그 집이 결코 안식처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다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최초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장소로서의 의미가 있다.


밝은 미래(2003)
hd로 복각된 버전을 10년만에 다시 보는데 마츠야마 켄이치가 체 게바라 군단 중 한명이며 아사노 타다노부의 동생이 카세 료인줄 이제야 알았다. 고화질로 다시 보니 hd가 아닌 sd 디지털 카메라의 질감이 더 생생하다.

마호로 역전 광소곡(2014)
1편과 드라마까지가 좋았지. 막판 버스 납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도 안되고 어색하고 도무지 설명도 납득도 안됨. 이 영화 개봉 바로 석달 전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 원작의 tv드라마 <베드로의 장렬> 의 첫회 버스 납치 시퀀스가 몇 배는 더 훌륭하다.

나의 하와이 산책(2014)
이 감독은 두 편 연속 카세 료를 여주가 스쳐가는 남자 중 한명으로 만든다. 전체적으로는 sp같고 하와이 풍광을 큰 화면으로 본다는거 빼곤 딱히 내수용 영화로서도 메리트가 없어 보인다. 정규앨범에도 실린 다케우치 마리야의 엔딩곡만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취우(1956)
권태기에 빠진 부부의 무료한 일상과 생활에 대한 묘사는 교본으로 삼아야할 정도로 전형적인데 그 속에서 삐쭉삐쭉 튀어나오는 갈등을 돌출시키는 디테일한 표현이 나루세답다.  

 

꿈과 광기의 왕국(2013)

왕국의 몰락의 전조를 기록했다는 의의가 있는 다큐멘터리

 

료마 암살(1974)
료마를 혁명가라기보다는 한량에 호색한으로 묘사한다.

 

누드의 밤: salvation(2010)
아주 표준적이고 전형적인 일본식 착취영화를 본 느낌. 93년 1편 볼 때는 그렇게 못 느꼈는데 여기서는 아주 노골적이다.

 

제대로 전해(2008)
소노 시온이 만든 '가족영화'. 악취미넘치는 막판의 클라이맥스를 만들기위해 앞쪽의 줄거리가 '억지로' 짜여있는듯 하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1986)/ 20세기 소년 독본(1989)
하야시 가이조 영화 두 편. 노스탤지어, 예능인, 유희, 유랑극단, 무성 영화에 대한 경배라는 공통점.

대유괴(1991)/에부리만씨의 우아한 생활(1963)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두 작품. 전자는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로 알려져있고 후자는 당대에 유명했던 에세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만 빛난다(2014)
키네마 준보 1위라는게 좀 놀라웠다.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다는 우리나라의 모 독립영화의 영향이 좀 보이고. 아무래도 주류 일본 영화에서는 좀체 보기 드문, tv 드라마스러운 연기와 연출상의 억제가 보이긴한다(어차피 지금 일본영화와 tv드라마는 그다지 잘 구분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어느 선을 넘지 않고 딱 멈추려는 태도가 덜 보이고 그나마 좀 '세보이는' 척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 그들에게는 신선해보였을지 모르겠으나 이것도 이쪽에서 볼 때는 다분히 작위적으로, 그래서 위선이 아닌 이번엔 위악을 택한건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빠를 찍으러(2012)
줄거리만 놓고보면 지극히 tv드라마스러운데 정작 보고나면 그렇지 않다.

 

내 남자(2013)

<성소녀>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떻게 될까. 앞의 책은 읽었으나 정작 이 영화의 원작은 아직 못 읽었는데 나름의 반전의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영화와는 자못 인상이 다르다고. 

 

기온의 자매들/오사카 엘레지(1936)

전자가 후자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어쩔 수 없이 부박한 삶을 살게되는 여성들의 통속적 비극성에 대해 이렇게 질박한 원형을 제시한 감독의 영향력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뒤늦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원작의 감동이 몇배로 더해 전해진다.

 

아내의 마음(1956)

인물들이 딱히 뭔가를 하지않고 갈등만 점점이 쌓여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풀려버린다. 무위의 해결이라고 해야할까.

 

백치(1951)
하라 세츠코의 재발견. 등장인물 중 검은 옷을 입은 영화 속 그녀만 무비스타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대작을 영화화하겠다는 야심에 비해 정작 결과물은 줄거리를 쫓아가는데만도 허덕인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거장의 빈틈을 엿보는 기분.


침묵(1971)
마틴 스콜세지의 리메이크작이 내년 개봉예정인데 시노다 마사히로의 71년작을 먼저 봤다. 아무래도 일본인 배역보다는 메인주인공인 포르투갈 신부 역을 하는 서양 배우의 비중이 훨씬 크고 중요한데 본작에서는 그 점이 살짝 아쉬웠다. 시노다 마사히로 영화는 작가주의라기보다는 웰메이드 상업영화에 가까워서 왠만해서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기가 조금 힘든데(적어도 내게는 그렇다는 말) 이 영화도 그랬다.


연옥 에로이카(1970)

금발 가발을 쓰고 벽에 기댄 오카다 마리코는 동시대 서구 모더니즘 영화에 나오는 서양 여배우같다. 구체적인 외양이 유사하다는게 아니라 안토니오니 영화 속 모니카 비티를 연상시키는 그런 느낌이랄까. 오랜기간 협업한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배우만이 뿜어내는 아우라.

 

바닷마을 다이어리
개봉하던 날 봤는데 고레에다마저도 만화원작 실사화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역력히 보인다. 즉, 긴 호흡의 장편만화의 자잘한 에피소드를 어떻게든 2시간내외의 장편 안에 다 욱여넣으려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이걸 장편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2012년의 <고잉마이홈>말고 이 만화를 렌도라로 직접 각색 연출했으면 어떨까싶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게 단편적 에피소드들을 쭉 늘어놓은 장편영화인지라. 감독 본인은 관광엽서같아 보이고 싶지않았다고 했으나 여지없이 고쿠라쿠지 역 나오고 <최두사>에도 나왔던 신사 앞 철길도 나오고 에노시마 바닷가도 나오고 나올건 다 나온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부정과 결여로 오즈의 영화를 서술하는데 단호히 반대하면서 그 대신 풍부하게 뻗어나가는 다층적 의미와 세부에 주목해야한다고 했다. 그의 용어를 빌자면 '내러티브 구조'와 '주제론적 세부'의 불일치와 균열을 즐겨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민한 관객은 부정과 결여로 오즈를 보려는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동경의 황혼>의 여주인공 아키코의 줄곧 어두운 표정 또한 다른 요소들과 함께 이 영화를 부정과 결여로 서술하기위한 근거로 삼는건 편리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그런데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고, 인물들의 말과 표나는 갈등이 적고, 이야기의 기복이 없으며 이야기가 가정 밖으로 나가지않는다'는 등 디테일한 외재적 구성요소상의 부정과 결여가 아닌, '내러티브 구조'상의 부정성까지 과연 부정해야할까. 또 그게 가능할까. 부정적인 것을 제외하고나면 거의 할 말이 없는 영화인데도 말이다.

 

오즈의 팬이라면 <동경의 황혼>이 그의 필모중 드물게도 한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교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일본영화의 대표적인 상투형의 대사인 "아, 날씨 좋다"가 나올 일이 없는 것이다. 하스미의 설명에 따르자면 오즈는 한여름 햇빛의 영화인데 본작엔 그게 없다. 또 하나의 결여. 그동안의 필모로부터의 변별점은 이만이 아니다. 류치슈와 동반 출연하는 영화에서는 <맥추>에서처럼 딸이 아닌 여동생으로 나오더라도 '대개'(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했듯 오즈 영화는 일반화가 성립하는듯 하다가도 예외가 늘 있기 때문) 결혼을 주저하는 적령기 미혼 여성으로 나오던 하라 세츠코가 본편에서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갓난아기와 함께 아버지와 동생이 사는 본가로 돌아온 유부녀를 연기한다. 아버지의 '강권'(류 치슈의 영화 속 언동으로 보면 선뜻 납득은 안되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으로 결혼한 그녀와는 반대로 오즈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할 적령기 미혼 여성인 동생 아키코는 과거의 막내딸들과 달리 현재 자유연애중이며 나중에 혼전임신까지 하게된다.  

<만춘>이후 오즈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가족애의 단속적 유지와 그에 의한 가 (재)구성, 그리고 정확히 그 거울상으로서 자식의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등으로 붕괴하는 가족상이라 축약할 수 있다면 <동경의 황혼>은 이러한 가족 붕괴 서사의 정점에 있다. 끝내 아키코는 자살하고, 자매의 친어머니는 끝까지 두 딸로부터 어떠한 용서나 이해도 받지 못한채 홋카이도로 떠난다. 가족의 붕괴라는 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은 부부관계 묘사가 거의 배제되어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별거중인 타카코와 그녀의 남편 누마타는 영화 내내 단 한번도 만나지않으며 대신 장인과 사위의 짧고 어색한 대화가 이를 대신한다. 마찬가지로 타카코 자매와 친모 야마다 이스즈는 각자 한번 이상 대면을 하지만 정작 류 치슈와 그녀는 만나지않는다. 아내가 도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류 치슈는 아예 찾아가 볼 생각 자체를 하지않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유일하게 제시되는 부부관계는 친모와 그녀의 현재 남편뿐인데 이들에게는 생계를 위한 부박한 일상에 대한 묘사가 있을 뿐 부부간의 애정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비정함이 단순히 러닝타임이나 플롯상의 편의 때문일까. 오즈는 이 영화에서 작정하고 가족간의 심리적 물리적 격절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한마디로 이 가족의 모든 여성들, 즉 타카코와 아키코 자매 그리고 이들을 버리고 떠난 친어머니까지 세 여인은 모두 배우자와 연인간의 관계에서 실패한다. 친모는 과거 함께 도망갔던 남자와도 헤어지고 현재 남편과는 마작집을 운영하는 영락한 신세가 되어있다. 타카코의 남편 누마타는 아내와의 재결합에 대한 의지가 없고 아키코는 시내 곳곳을 떠돌며 남자친구를 찾아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오즈는 마침내 중절수술을 위한 사전상담을 마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키코를 보여준 바로 다음 타카코의 갓난쟁이 딸 미치코를 보여주는 잔인한 대조를 주저하지않는다. 영화는 이렇듯 세 여인에게 가멸차며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하라 세츠코는 50년대 초 나루세 미키오의 <산의 소리>와 <밥>에서 남편과 갈등하는 아내를 연기한 바 있다. 그 두 편에서 부부간의 갈등(엄밀히 말하자면 대등한 주체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제 하의 억압에 가깝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화되다가 마침내 파국 아닌 파국을 맞게되는데 오즈는 나루세의 저 두 편을 통해 하라 세츠코에게서 어떤 새로운 면모를 찾은듯하다. <동경이야기>이후 4년만에 출연하는 오즈의 연출작인 본편에서 가출한 아내를, 그리고 이후의 두편 <고하야가와 가의 가을>과 <추일화>에서는 남편과 사별한 중년 여성을 연기한다. 그렇게 오즈 영화속 하라는 결혼적령기 미혼여성부터 미망인까지를 커버하는데 미혼 여성일 때 그 선택이 주체적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결혼을 통해 본가를 떠나 새로운 집으로 들어갔다면, 중년의 하라는 남성에 얽매이지않고 최대한 독립적이 되려 노력한다. 이러한 대조 사이에 57년작 <동경의 황혼> 속 타카코가 있다. 여기서 그녀는 결혼적령기에 이른 성년의 자식이 아닌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사별하지는 않았으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이미 균열이 시작된 젊은 아내를 연기한다. 필모그래피가 늘어감에 따라 배우와 그의 배역도 동일 캐릭터는 아니더라도 점차 나이를 먹고 일관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일견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비슷해보일지라도 동일한 상황과 설정과 성격의 배역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이는 류치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성(정확히는 배우자)과의 실패한 관계라는 면에서 타카코는 본편에서 가장 분열적인 결말을 맞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오즈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이듬해 오즈의 첫 컬러영화인 <피안화>로 두번째 출연한다) 아리마 이네코는 어떨까. 류치슈의 차녀, 그러니까 하라 세츠코의 뒤를 이어 적령기에 이른 미혼의 막내딸 역할이지만 아리마의 '아키코'는 하라의 미혼 시절 캐릭터인 '노리코'와는 다르다. 남자친구를 찾아 아파트, 마작집, 카페, 술집, 라면집, 그러다가 뜻하지않게 경찰서로 그리고 산부인과까지 쉬지않고 러닝타임내내 아키코는 찌푸린 표정을 한 채 도쿄시내를 떠돈다. 전후민주주의의 풍조 속에서 가난하지만 한껏 얻은 자유를 주체하지못하는 젊은이들의 초상에 대한 오즈의 관찰은 주인공 아키코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술과 커피를 파는 가게 '에투알'에서 스케치되는 젊은 연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삐걱거린다. 두 명중 하나가 약속에 늦거나 겨우 만나도 대화는 권태에 빠져 이별을 예감하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어서 결국 두 사람 중 하나는 그 자리에 없거나 곧 사라지고만다. 아키코를 포함한 젊은 연인들은 다들 이렇게 틀어져있다. 젊은이를 향한, 그리고 더 넓게는 조화하지않고 갈등하는 이성 연인들이라는 냉소적인 시선은 본편 내내 관철되고 있다. 부정성은 일관한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이들을 미심쩍어하는 시선은 아키코로 하여금 <만춘>이후 오즈의 가족영화의 여주인공들이 그동안 관객으로부터 얻었던 이해나 배려를 받지못한 채 극에서 퇴장하게 한다. 아키코는 아버지는 물론 언니와도 교감하지 못한 채 남자친구를 찾아다니고 급기야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식이 절대로 아닐거라는 믿음을 친모로부터 확인받으려다 부정당하자 그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늘 타인을 먼저 배려하던 하라의 '노리코'와는 달리 아키코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실패한 채 고립되고 마치 그 징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극적인 퇴장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다른 인물들의 행동도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그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타카코다. 친모에게 아키코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모든게 당신 탓이에요'라고 말하는 타카코는 과연 온전한 진실을 보고 있는걸까. 그 후 타카코는 양친의 사랑을 고루 받지못한 것이 아키코의 고통의 원인이었을거라고 태연하게 아버지에게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양친의 사랑을 받지못한건 타카코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키코의 심적 고통의 이유는, 부친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정한 자식이라 착각하고 싶어한 마음이 혼전의 자식을 잉태한 현재 자신의 처지와 오버랩되면서 대를 이어 이어지는 어떤 불가항력적 운명이 자신에게 가해지고있다고 느꼈던 때문이 아닐까. 가장 근본적 원인을 굳이 찾자면 편부 슬하의 양육이 아니라 부정한 자식이라는 부정적 상상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타카코는 동생의 죽음을 온전히 친모의 탓으로, 그래서 양친에 의한 자녀 양육이 옳다는 결론을 지어버린다. 정작 미치코는 부정한 자식이 아님에도 말이다. 타카코의 알듯모를듯한 결심에는 이러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자식은 양친이 함께 키우는게 맞는거 같다며 남편에게 돌아가겠다는 타카코의 대사는 그래서 일관된 캐릭터의 성격으로부터 내재적으로 나온 판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젊은이를 향한 냉소적 시선과 함께 정상가족에 대한 오즈 본인(또는 각본가 노다)의 생각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정경으로 회귀하는 엔딩은 일반적으로 모든 갈등이 어떻게든 봉합되었으며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는 믿음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평일 오전 아버지의 출근 준비를 보여주는 본편의 엔딩 역시 이제까지의 부정성이 일단락되고 거기에 더해 일말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까마귀 울음소리가 화면과 소리를 채우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그것 못지않게 이 엔딩은 음울하다. 진심인지 강요된 착각인지 알 수 없는 타카코의 결정을 환기함과 동시에 전복해버리는 잉여의 장면이 이물처럼 잔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하기 전 아버지는 방 한켠에서 타카코가 두고 간 미치코의 딸랑이 장난감을 발견한다. 당연히 이는 일차적으로는 타카코와 미치코가 정말로 이 집을 떠났음을, 그리고 아버지만 홀로 집에 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그동안 오즈의 가족 영화에서 부모는 자식의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그들과 별리를 행하고 홀로 집에 남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결혼이 아니라 한 명은 죽음으로, 그리고 다른 자식은 남편이 사는 집으로의 '귀가'를 위해 또다른 '출가'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아버지 홀로 남는다. 그런데 돌연 떠나간 사람의 유류품이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이 영화에서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주점 장면에서 술집 여주인은 류 치슈에게 그의 사위인 누마타가 언젠가 그곳에 들렀다가 모자를 두고갔음을 알려준다. 그러자 그는 그럼 또 오겠군요라고 말하지만 이후 그런 장면은 나오지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다면 이 영화를 열고 맺는 오프닝과 엔딩에는 앞으로 타카코가 함께 살아갈 가족 구성원 두 사람이 어딘가에 두고 간 소유물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의례로서의 결혼식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족을 애초에 별로 의식하지않는듯한 여주인공 아키코는 이전작들로부터 구분되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정상성을 구성하는 제도와 의식의 규범성을 승인하는 본편의 표면에 바로 이 두 곳의 잉여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편부 슬하에서 자란 동생의 어두운 내면과 그로인한 비극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제라도 남편에게 돌아가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타카코의 결정은 선전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러나 오즈 야스지로라는 일본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이 연출한 작품의 여주인공이 내릴법한 결정치고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퇴행적이며 회피적이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를 감안해 현재 시점에서의 과도한 비판을 지양한다하더라도 일단 너무 손쉬운 결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화의 앞뒤에 배치된 두 물건이 타카코의 결정을 은유적으로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언급되는 술집에 두고 간 누마타의 모자가 타카코가 기다리는 집, 즉 가정에 안착하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면 엔딩에서 미치코가 아니라 당연히 타카코가 두고갔을 장난감은 그녀 본인도 미처 깨닫지못하고 있을 진심을 무심하게 보여준다. 전술했듯 오즈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모녀 어느 쪽에도 이성과의 순조로운 관계나 해피엔딩을 허락하지않는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세 명중 마지막까지 도쿄에 남은 타카코에게 작은 희망을 남겨둔거라고 보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타카코가 아버지에게 한 말과 달리 내심으로는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겨진 장난감은 앞으로도 그들의 부부관계가, 그리고 온전한 정상핵가족의 성립이 쉽지 않으리라는 암시라면 말이다. 타카코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만이 언해피한 결말을 맞이하는게 아니라 일말의 희망을 안고 돌아간 타카코마저도 딸의 양육이란 목적만을 위한 가정의 임시적 유지가 쉽지 않으리라는 암시를 은근하면서도 명백한 수미상관으로 남겨둔거라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프닝에서 누마타의 모자에 관한 언급은 이후 줄거리 전개에 하등 아무런 영향이나 기능을 하지않는 텅 빈 대사가 되어버리고만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어떠한 일말의 희망의 기운도 남겨놓지않은 채 가족 붕괴라는 이 영화의 서사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제도로서의 결혼과 정상가족의 규범성을 설파하면서도 한 편의 서사로서 조역은 물론이고 주요캐릭터들에게조차 끝까지 이를 획득하지못한채 실패하게 함으로써 부정성을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작가로서의 전략일까. 카메라는 움직이지않을지도 모른다. 드러나는 인물간의 갈등도, 사건도 적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듯 이야기의 외부와 내부 혹은 겉과 속이 균열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다층적인 서사야말로 오즈를 보는 재미다. 부정성을 애써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가주의의 일환으로서 기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물론 하스미의 말대로 작가의 전략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봐야'한다. 영화는 표층으로만 존재한다는 믿음, 그것은 홀로 외떨어져 덩그러니 남아 더 도드라져보이는 남겨진 물건과 말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겉을 유심히 바라볼 때 짐짓 다른 말을 하는 안이 비로소 들여다보인다.

2013년 1월 18일 tv tokyo에서 방송된 드라마 <마호로역전번외지>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중 한명인 교텐은 카페의 카라오케 기계 앞에서 시비가 붙어 드잡이를 하는 두사람을 보며 "오시마 나기사냐"하고 외친다. 과거 오시마가 동료로부터 마이크로 얻어맞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을 빗댄 것이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이 짧은 장면은 그러나 뜻하지않게 아마 앞으로 종종 회자될 처지가 되는데 일차적으로는 그 방송일로부터 바로 사흘전인 1월 15일에 오시마 나기사가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정말 '공교로운' 그 무엇이 되기위해서는 결정적으로 한가지가 더 필요한데 그건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대사를 한 교텐 역의 마츠다 류헤이가 열여섯살 때 출연한 영화 데뷔작을 연출한 이가 바로 오시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 잠깐 스쳐가는 그 짧은 장면은 대략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듯하다. 자신의 은인과도 같은 노감독의 이름을 그다지 별로 중요하지도, 큰 의미도 없는 장면에 유머를 가미하기위해 입에 올렸으나 정작 그 타이밍이 실로 좋지 않았다고. 실제로 방송이 나가고 난 뒤 현지에서 이와 관련한 약간의 구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교로운 타이밍은 결코 의도한다고 될 리도 없고, 특히 이런 경우는 그 의도를 품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좋지않은 타이밍의 문제로 치부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 되버린, 누구도 예상치못한 결과를 낳은 우연.

 

<고하토>(1999)에서 마츠다 류헤이는 막부말 실제 있었던 남성 사무라이 집단인 신선조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는 미소년 무사인 카노를 연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장르물보다는 정극에 출연하며 연기를 인정받긴 했으나 열혈의 액션 배우로 주로 기억되는 그의 아버지인 마츠다 유사쿠와는 시작이 달랐던 셈이다. 이후 이십대 초반에는 연애물이나 코미디에 종종 나오던 류헤이는 서른 줄에 접어들 무렵 출연한 마호로 연작에서 데뷔 때와는 180도 다른 '예수룩' 혹은 '거지룩'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우라 시온 원작의 마호로 연작은 첫번째 소설과 영화의 경우 버디무비의 외양을 하고서 사실은 비슷한 내적 상처를 안고있는 두 남자가 함께 지내며 조금씩 치유를 해가는 휴먼 드라마에 가까웠으나 드라마와 속편이 나오면서 흔한 장르물로 조금씩 변해간다. <고하토>에서의 마츠다가 집단 내의 모호한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마호로 연작에서 그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듯한) 다음 행동이 쉽사리 예측되지않는 괴짜를 연기한다. 어쨌든 그렇게 2세 배우로서 많은 기대를 받던 신인 연기자의 데뷔작이었던 영화는 반면에 만년의 오시마에게는 86년작 <막스 내사랑>이후 무려 13년만에 연출하는 장편이었다. 영화로부터 티비로 미디어의 중심이 옮겨감에 따라 과거 스튜디오 시스템을 경험한 나이든 감독들에게 연출 기회는 자연히 줄어들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도 <감각의 제국> 이후 긴 법정 투쟁을 거친 끝에 80년대 그는 마치 영화에 대한 티비의 승리를 상징이라도 하듯 티비 와이드쇼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오랜 기간 출연하면서 잠정적 은퇴 혹은 공적 은둔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그리고 90년대 유일한 연출작이자 동시에 유작이 된 그 영화에서 오시마는 마츠다 외에 과거 각각 그의 조연출이자 출연 배우였던 최양일과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젊은 배우들인 아사노 타다노부와 다케다 신지를 기용했는데 칸느에서 공개됐을때 서구 비평가들로부터 과거만큼의 호의적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이 영화에서 오시마는 막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도전한다거나 과거처럼 비정상적 성애 묘사에 대한 욕심보다는 동질성을 결속력의 핵심으로 둔 공고한 집단 내부에서 그 동질성이 도전받으면서 생기는 내부의 혼란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집단의 질적 변화와 회복을 조명하고 싶었던듯 하다. 당연히 여기엔 단순히 일개 남성 집단을 넘어 강력한 동일성에 의해 존립하여 법, 사상, 관료제 등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 공동체를 겨냥한 비판의 의도가 깔려있다. 기획 당시 이미 발병한 뇌일혈로 조감독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완성된 (이후 사망까지 오시마는 줄곧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는 당시 그의 몸상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액션이 가미된 장르물로서의 사극이라기보다는 (오시마의 주 종목인) 정적인 심리극에 가깝게 완성되었다. 

 

오시마는 <윤복이의 일기>, <교사형>, <돌아온 술주정뱅이>, <일본춘가고>등 여러 편에서 일관되게 한국과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삽입한다. 딱히 지한파라거나 애정이 있어서라서라기보다는 자국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고려했을 때 전후 일본의 최대 약점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을 전략적으로 선택한거라 보는게 맞을 것이다. tv 다큐 <잊혀진 황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재일조선인출신 상이군인들이 일본 정부에 보상해달라는 청원을 하기 위한 가두 행진 과정을 담고 있다. 이 다큐에서 오시마는 주관을 가능한 배제한 채 그들의 비참한 삶을 그대로 쫓아가며 보여주는데 <윤복이의 일기>에서와 같은 한껏 감정이입된 노골적인 내레이션은 일절 없지만 '자,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래도 일본 정부는 계속 모른척 할 것인가'라며 직격으로 추궁하는듯 생생한 리얼리티를 얻어낸다.

 

오시마와 한국의 연은 생각지않은 방향으로도 이어진다. 요모타 이누히코의 <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 중 두 곳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부인은 작년 파리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다며 일본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감스럽게도 감독의 이름은 잊었지만 농촌에서 삼각 관계를 바탕으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후일담으로 망령의 출현을 다룬 그 작품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감독이 아직 국제적으로 무명이었던 시절에 찍었던 어느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생김새는 거의 식별이 불능하다는 인종학적 사실을 역이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작품 속에서는 동해를 건너 밀항해 온 한국의 탈주병과 일본인들이 우연히 해수욕을 같이 즐기고 있었다. 한국의 탈주병과 일본인들이 우연히 옷을 바꾸어 입는 모습이 시간적 계기를 무시하고 집요하게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제작 스탭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임의로 인터뷰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지리멸렬한 채 영화는 끝난다. 감독이 직접 참가해서 "당신은 한국인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과격한 공격성과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한다고 나는 약간 요설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부인은 이 영화의 착상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174

영화감독인 오시마 나기사가 1985년의 양상대담 석상에서 '바카야로'라고 소리쳤을 때 한국측의 거부반응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역사적 사정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한국어의 문맥에서 단순한 바보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08

첫번째 인용에서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지않고 있는 두 편의 제목은 각각 <백주의 살인마>와 <돌아온 술주정뱅이>로 오시마가 자신의 제작사인 '창조사'를 통해 가장 왕성히 활동했던 60년대 연출작들이다. 전자는 수많은 컷분할과 편집에 의한 과감한 몽타주 기법의 활용으로 서구에서 유명하고 후자는 원문에 나와있듯 세 명의 한량이 해변에서 한국의 탈영병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벌어지는 초현실적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있다. 당시에 주류 감독으로서는 줄곧 가장 급진적 비판자의 위치를 점하면서 오시마의 작품들은 심미적 완결성을 일정부분 포기한 듯한 면이 없지 않다. 촬영과 미술 등의 외재적 형식은 플롯과 내러티브를 전달하기위한 도구 정도로 종속되어있는듯하고 이런 점은 할 말이 많은 영화일수록 더하다. 그래서일까. 60년대 그의 영화들은 은유와 알레고리와 숨겨둔 의미를 해독하기위한 퀴즈나 암호같아 보인다. 두번째 인용의 경우, 정확히 어떤 tv 프로의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지 부가 정보가 전무한 탓에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80년대, 그러니까 자의인지 타의인지 영화를 거의 만들지 않은 채 활동 거점을 tv로 옮겼던 당시 오시마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역으로 가늠케하는 해프닝으로 보인다. (마츠다 류헤이도 한국인을 할아버지로 둔 '혼혈'임을 감안하면 한국과의 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생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았던 탓인지 지금 류헤이를 가리켜 '쿼터 한국인'쯤으로 여기는 촌스러움은 다행히 양국 어느 쪽도 없는듯)

 

그러니까 우연이란 서로 관련이 없는 혹은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두 개 이상의 일이 실제로 동시에 일어나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사건으로 서사화 되었을 때 그 공교로운 타이밍과 낮은 개연성, 그리고 특이성에 놀라워하는 반응을 개념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 배우보다는 신인이나 비 전문배우(가수같은 다른 분야의 연예인)를 주연으로 기용하고 그 대신 아내를 포함한 자신의 '사단'으로 조연을 꾸려 경력이 일천한 주연배우를 받치는 형태의 캐스팅을 선호하던 오시마는 유작에서도 연기 경험이 전무한 마츠다 류헤이를 단번에 주연으로 데뷔시킨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나 두사람의 인연은 좀 기이한 모양새로 다시 이어졌다. 관전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가십에 그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이 해프닝을 다시 돌아보면 결국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의 과거 인연이라는 요소 단 둘이 합쳐진 자체로는 별다른 울림이 없지만 여기에 오시마의 사망일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이 겹치면서 '우연'으로서의 의미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연을 결정하는건 타이밍 뿐일까. 일반적인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는 별개의 사건을 기어이 인과적인 것으로 인지하게될 때 ('여기엔 확실히 보이지않는 뭔가 있는게 분명해. 아무 이유없이 이럴리 없어. 결국 이렇게 됐을 수 밖에 없는 일이야. 피할 수는 없었어'라는 식의) 그것은 마술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절묘한 동시발생(concurrence)의 타이밍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걸까. 하지만 우연은 결코 동시발생이나 일치한 대상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적 격차를 두고 완성되는 우연도 있기 때문이다. 줄곧 한국과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언급하던 감독이 어느 순간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일거에 강한 반발을 얻을 때의 아이러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주목해야할건 실시간이나 동시발생같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낮은 개연성,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의 난처함 때문에 서로 무관한 대상을 인과적인 것으로 부득불 설명하려 들 때 마주하게되는, 무지의 대상을 어떻게든 설명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흥미로운건 인과율(그렇다면 실제로는 동시발생하는 타이밍의 확률)에 대한 경탄보다는 어떻게든 그것을 인과로서 받아들여 납득하려는 이들의 반응이다. 일방향적 시간의 흐름과 두 사건의 동시적 발생이 아니라, 선후를 조정함으로써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는 관점이야말로 우연의 실체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저 관점의 문제일 뿐이라면 같은 사안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다. 타이밍을 떼놓고 생각하면, 아니 오히려 그 타이밍까지 감안할 때 마츠다 건은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 교텐의 대사는 무례나 실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않으며 오히려 그 동시발생 타이밍의 공교로움이 어떤 분위기를 전조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 해프닝이야말로 차라리 진정 오시마에게 걸맞는 전별 의식이라고 볼 수는 없는걸까. 자신이 데뷔시킨 젊은 배우가 드라마에서 별다른 뜻없이 본인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만약 그 장면을 생전의 오시마가 봤다면 정작 그는 의연하게, 오히려 즐기지 않았을까. 우연을 우연으로 만드는건 개별 사건간의 내재적 관계가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예측불가능한 우연적인 반응, 바로 거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종이달>의 원작 소설은 사실 장편으로서는 다소 미흡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신문 사회면에 종종 보도되는 은행원의 공금횡령이 대개 불륜이나 치정을 그 원인으로 두거나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에 착안한 원작은 그래서 이 단순한, 차마 줄거리라고 할 수도 없을 최소한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변주하고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앞으로의 전개가 뻔히 예측이 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가는 주인공인 리카의 주변인물을 여럿 배치해 그들이 기억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또한 그 주변인물들마저도 현재 리카와 마찬가지로 금전으로 인해 이런저런 문제를 겪는다는 공통점을 갖도록했다. 주인공의 이야기만으로는 중편 정도가 될 이야기가 장편 소설로 거듭나게 된데는 이런 구성이 있다. 


반면 영화화를 하면서 제작진은 이런 헐거운 구성방식을 버리고 더 꽉 짜인 기승전결의 플롯을 위한 각색을 했고 원작보다 훨씬 긴장감있는 이야기로 거듭났다. 그런데 현재 일본 영화의 단점 중 하나인 원작에 지나치게 충실한 영상화 방식을 포기함으로써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야기하고자하는 바가 조금 다른 결과물을 얻었다. 가장 큰 변화는 원작의 각 장에서 화자로 기능하던 리카의 주변인물들을 모두 없애고 그 대신 등장한 은행 동료인 아이카와와 스미라는 두 여성 캐릭터로, 이들은 끝까지 보면 각각 결국엔 리카와 비슷한 처지이거나 그녀가 미처 깨닫지못했던 점(이를테면 실제 그녀의 욕망)을 깨닫게 하는, 원작의 어떤 주변 인물보다 덜 기능적이고 더 뚜렷한 성격의 인물들이다. 


원작은 한 은행원이 돈을 다루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것에 매혹되어 횡령액을 키워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공력을 들이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리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않은 주변 인물들의 현재 처지까지 더해지면 원작의 초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완전히 사로잡고 헤어나오지 못하게하는 화폐의 권능을 그리는데 맞추어진듯 보인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심사는 주인공이 돈을 왜 횡령했느냐보다는 그 돈으로 뭘 하는지, 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큰 액수를 횡령해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에 있다. 특히 90년대 중반 버블이 꺼진 뒤 신용카드가 보급되고 자산 운용이 중요해지는 등 자본주의 재편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소비 풍습이나 소비 문화에 대한 갖가지 묘사가 꽤 상세하다. 반면 영화는 원작에 나온 여러 횡령 수법과 누가 지갑을 열고 돈을 쓰느냐가 왜 중요하며 어떤 의미인지(남편과 고타와의 관계 내에서 그녀의 지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리고 인물들이 '돈질'에 탐닉하는 과정에 대한 핍진한 묘사보다는 리카의 횡령의 동기를 밝히고 이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클라이맥스인 스미와의 대화 장면에서 영화는 리카가 지금 벌이는 이 모든 일이 어릴 적부터 이어진 일관된 행동의 연속인 것처럼 설명하려한다. 어린 시절 수녀의 물음에 현재의 리카가 대답하는 방식의 편집에서 보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 역시 원작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변용된 대목으로, 원작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구호모금에 앞장섰던 리카의 학창시절 이야기는 리카 자신보다 그시절 학교 친구의 회고를 통해 주로 서술되고 있는데 그만큼 착했던 아이가 지금 왜 그렇게 됐는지는 친구들도, 심지어는 정작 리카 본인도 알 수 없는, 그러니까 그녀의 성격의 일면을 드러내는 일화 정도로 머무는데 반해서(영화에서는 초반부에 스미가 그녀의 이런 성격을 꼬집는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나오는 이 과거의 에피소드는 현재의 동기를 설명하려는 허위의 알리바이임과 동시에 원작과는 자못 달라진 주제 즉 진짜와 거짓, 진실과 허위, 진심과 위선의 미묘한 경계를 강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즉, 그녀는 과거나 지금이나 본인은 진심에 솔직했다고 굳게 믿는다. 진심으로 타국의 불우한 어린이를 구하고 싶다면 그 액수는 클수록 좋은거 아닌가. 학생의 용돈 수준으로는 부족할게 아닌가. 등록금이 없어 곤란한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구멍난 액수는 백화점에서 고객의 돈으로 구입한 화장품처럼 나중에 채워넣으면 깔끔하게 처리되는거 아닌가. 거기에 더해 그녀는 처음으로 고타와 밤을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러한 자신의 진의를 알아주지않는 타인들(은행 직원과 고객들)이라면 이제부터는 그저 이용 대상일 수밖에 없다.  


돈이란 스미의 말대로라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알 수 없는, 귀가하는 새벽녘에 리카가 우연히 바라본, 손으로 지워버린 가짜 달처럼 그 실체가 모호한 대상이다. 한편 리카의 말대로라면 돈은 누구의 것이든 다 똑같은 것이긴 하지만 누구든 다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그녀는 애써 모른척한다. 즉 이 지점에서 이미 리카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고 실제로 그 욕망을 충족하기위해 직접 나섰으면서도 진심과 선의로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영화와 소설의 근본적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비판이라기보다는 그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인간군상에 관한 소묘나 풍자에 가까웠던 소설은 영화로 건너오면서 엉뚱한 것에 진심을 쏟은 혹은 자신의 진심과 선의를 끝까지 착각했던 한 개인을 쫓아간다. 영화의 에필로그도 이런 함의를 위해 바뀌었다. 과연 리카는 과거 자신이 후원했던 아이와 재회한거라 생각했을까. 그렇다면 자신의 진심과 선의가 꼭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지않는다는 점에 대해 뒤늦게라도 아니면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았을까.

질병이 나 하나로 끝나지않고 내 자식에게까지 유전될지 모른다는 염려는 자신의 삶을 징벌로, 또 수치로 여기게끔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스틸 앨리스>를 보는내내 '유사 가족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심상하게 보기는 어려웠다. 화면을 바라보는 내내 지금의 내 처지와 비교하고, 또 내 입장을 주인공에 대입해보는 음울한 상상을 드문드문 이어가느라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불현듯 주의를 돌리게 한 대목이 있었다.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보다 차라리 암에 걸리는게 더 나았을거라는 말을 하는 부분이었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수전 손택은 결핵, 암 그리고 글을 쓰던 시점에서 급부상하던 에이즈까지 세 종류의 질병과 그들에 얽힌 은유를 비롯한 문학적 상상력을 따져묻고있다. 두 편의 글로 이루어진 그 책의 전반부에서 손택은 결핵과 암을 비교하는 가운데 본인 역시 당시 투병 중이던 암에 달라붙은 오명과 낙인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데, 그녀에 의하면, 암은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과 정념을 억압한 결과로 간주되며 그래서 무려 '발암성 성격유형'이라는 범주까지 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 은유는 말할 것도 없이 곧 암환자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그 결과 결핵과 달리 암은 수치스러운 질병이 되었고 곧 신체나 병리학과는 전혀 관련없는 분야에까지 부정적이고 불길함을 뜻하는 은유로서 퍼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그런 부정적 은유나 상상을 무시하듯 암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의 쇠약을 더 수치스럽게 여긴다. 암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활용해 후원금도 받을 수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그간까지의 인생과 정체성 자체를 뒤흔드는, 더 치명적인 정신의 쇠퇴를 야기하므로 숨기고싶은 부끄러운 질병이 되는 것이다. 육체보다 기억과 마음을 포함한 정신의 쇠락을 더 치명적으로 여기는 이런 시각이 혹시 새로운 은유는 아닐까.

처음 손택의 책을 읽었을 때 선뜻 이해가 되지않던 대목이 정념을 억압한 결과로서의 암이라는 낙인이었다. 우리 식으로 말해 `화병'이라는 건가. 아니면 에이즈와 유사한 성적 함의를 암에 붙인걸까. 손택이 글을 쓰던 시점에 암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으로 급부상한 에이즈에 달라붙어있는 성적 타락에 대한 징벌이라는 은유에 대응하기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고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치매가 어떤 은유를 함축하는 질병인 것처럼 등장한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 발병은 가족력을 통한, 즉 유전자에 이미 기입되어있던 잠재적 병인이 때가 되어 발현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징벌이 아닌 운명으로서의 질병은 손택의 설명대로라면 결핵의 비극적 드라마라는 은유와 얼마간 유사하고, 드라마 작가들이 여주인공을 곧잘 백혈병 환자로 설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암에 비해서 투병과정에서 환자의 외양상 변화가 덜하거나 더 극적으로 보이고 그런만큼 비극적 성격은 더 도드라지게하기 때문이다. <스틸 앨리스>의 원작 소설과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공유하면서도 그녀의 공적 자아를 부각시키는 것과 긴밀하게 연동하면서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앨리스가 원했던대로 암에 걸렸다고한들 본질적으로 달라질건 별로 없을 것이다. 앨리스가 겪는 고통의 본질은 육체냐 정신이냐의 차원보다는 기억력, 언어구사능력, 인지능력의 퇴화 등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보다 그 고통으로 인해 변해갈 자신의 삶을 상상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공포가 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꾸만 모든 것이 발병 이전 그대로이길, 또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길 바란다. 남편은 미네소타로 떠나는 대신 자신의 곁에 머물고 딸은 자신의 오빠와 언니처럼 학업을 마친 뒤 전문직을 갖길 원한다. 이런 반응에는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삶이 평범한 이들에 비해 결코 쉽게 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 즉 뉴욕에 사는 중년 백인여성 교수의 삶이란 사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저명한 언어학자일 뿐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을 보란듯이 뒷바라지하고 키워낸 사람이 그 삶을 가능케한 이성과 정신력의 쇠퇴를 막지 못하고 받아들여야한다는 것만한 공포는 없을 것이다. 기실 앨리스가 겪는 불안과 공포에는 주체성의 차원을 넘어서 기억을 잃었을 때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느냐는 한층 더 진지한 물음이 들어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또 그의 불안과 공포마저 특권화하려하면서 영화는 알츠하이머라는 소재가 갖는 이야기의 보편성에 대한 공감을 자꾸 뒤로 밀쳐놓게한다. 발병부터 투병과정 내내 내 삶의 주체성은 물론 정체성마저 의심하게한다는 점에서 육체가 아닌 정신을 무너뜨리는 질병이 불러올만한 사유와 고민마저도 누구나 똑같이 공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은 결국 질병 앞에 평등해지고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이 마지막에서도 볼 수 있듯 알츠하이머는 불치병이긴하지만 당장 시한부로 여생을 가시화하고 제한하지 않는대신 망각에 의한 정신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성격을 변질시킨다. 결핵이 나약하고 비극적인 수동성을 표상하고 암은 정념을 억압한 결과이며 에이즈가 비정상적 성행위에 대한 심판이라는, 손택이 말하는 '은유'는 결국 병이 아닌 환자를 향한 편견과 차별을 내포하는 우회적인 문학적 수사로서 그들을 비난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나중에 손택은 이런 은유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전유한다). 그런 식의 비난과 경멸이 알츠하이머에도 가능할까.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한 유전이라는 이름의 운명의 결과라는 점에서 환자를 비난하는 은유는 적용되기 힘들지도 모른다. 다만 손택의 은유가 알고보면 병 자체에 관한 은유가 아닌 것처럼, 내가 영화를 보면서 저건 새로운 은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병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몰락을 육신의 몰락보다 더 안좋은 것으로 여기는 앨리스의 반응이었다. 과거만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재까지 삭제함으로써 삶 전체를 영도로 밀어넣는 알츠하이머를 바라보는 시선, 즉 신체활동이 일순간 정지함으로써 죽음을 맞는 대신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정신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이전까지의 나와의 연속성을 잃고 낯설어져가는 환자를 바라보는 (환자 본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제대로 거동을 못하고 누군가의 수발을 받더라도 최후까지 지키고싶은, 가장 마지막 남은 한줌의 존엄인 명징한 정신과 마음마저 가져가버리는 이 질병은 그렇다면 한 개인에게 두번의 죽음을, 그리고 진정 가장 비참한 죽음을 가져오는건 아닐까. 내 병이 가족 친구 친지등 주변의 사람들에게 지우는 불안과 고통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쩌면 자신이 지금 죽어간다는 사실마저 인지하지못한 채 죽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니고 뭘까. 투병하는 현재마저 망각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죽음조차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갖지못하게 하는 질병. 그렇다. 앨리스가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은 결코 특정 개인이나 계층이 전유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또한 동시에 모두 죽음 앞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싶어하므로.

노무라 요시타로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여덟 편을 영화로 연출했다. 그중 아래 세 편의 영화들은 온전한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수사극이나 범죄극에 더 가깝고, 온기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정한 원작과 달리 멜로드라마적 관습에 기대고 신파적 감동을 끌어내는데 집중한 각색을 취한다는 차이가 있다.

 

1. 모래그릇(1974)

트릭과 동기 중 후자에 집중하는 사회파 미스터리 작품답게 영화판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동기가 되는 범인의 과거가 밝혀지는 길고 긴 후반부. 반면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되는 현재 시점에서 발생한 최초의 살인 사건의 경우, 그 범행과정이 전혀 재연되지않는다. 앞에 말한 긴 후반부에서는 단연 카토 요시의 명연기가 빛을 발하고 범인역의 카토 고는 최근 <배를 엮다>(2013)의 노 편집자로 나온 바 있다. 

 

2. 影の車 그림자의 차 (1970)

아래 나오는 <귀축>과는 정반대의 설정으로 아이가 성인 남자를 죽이려한다는 이야기(원작은 읽어보지 못했다). 고향에서 알고지냈던 여인과 우연히 재회한 후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은 자신에게 적의를 품은 그녀의 어린 아들로부터 살해 위협에 빠진다. 과연 이것은 그의 기우이고 환상일 뿐일까. 영화는 살해 위협에 대한 남자의 망상보다는 고도성장기 변모하는 일본의 도시생활을 묘사하는데 더 공을 들인다. 여행사에서 바쁘게 일하는 주인공은 그만큼 레저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도시 생활상을 반영하고 신식 아파트에 살면서 그 안에서 꽃꽂이 강좌를 여는 그의 부인은 정년 이후 남편이 수령할 연금에 큰 기대를 하는, 종신고용시대 봉급생활자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또한 여행업과 마찬가지로 당시 부흥하던 보험업에 종사하는 여주인공은 바쁘게 사람을 만나 영업을 하러다니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연을 접한다. 또 그녀는 남자 주인공과는 달리 외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직접 때야하는 낡은 목조주택에 살고있다. 이렇듯 각각 삶의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그들의 직업, 주택의 종류, 아이의 유무 등 두사람은 여러모로 대조적이고 보험 사기 에피소드를 삽입하며 이후 사건을 암시하는듯하지만 이런 흐름들이 결말에 이르면 하나로 응집되지 못한채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3. 귀축(1978)

국내에 번역이 되어있다. 자식 셋을 모두 기어이 죽여버리는 말그대로 '귀축'인 부부에 대해 분량이 그다지 길지않은 원작 단편에서는 부부의 배경이나 드라마가 많이 할애되지않는데 반해서 영화는 연기파 배우가 맡은 탓인지 남편의 성장기를 비롯한 삶의 이력을 (플래시백이 아닌 대사를 통해) 추가함으로써 그가 저지르는 행위의 잔혹성에 일말의 개연을 부여하려함과 동시에 역설적 비극성을 강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범인을 특정할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데서 돌연 끝을 맺어버림으로써 여운과 함께 통쾌함을 주었던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는 원작에 없던 신파적 결말을 집어넣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자 특징. 영화가 소설보다 훨씬 더 대중적 파급력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원작에서 묘사된 부부의 잔인한 범죄행각도 한층 유순하게 바뀌었는데 막내 갓난아기의 경우 미필적 고의임을 더 분명히 암시한다. 원작이 얼마나 대담하게 쓰였는지를 다시금 생각케하는 대목. <모래 그릇>에서 선량한 경찰을 연기했던 오가타 켄이 여기서는 우물쭈물하기만하는 무능력한 남편을, 이와시타 시마가 아내를 연기하고 젊었을적 오타케 시노부가 끝부분에 여경으로 나온다.

1989년, 헤이세이 원년에 모리타 요시미츠는 <사랑과 헤이세이 플레이보이>를 내놓았다. 주인공 캐릭터보다 더한 바람둥이의 삶을 실제로 살고있었던 이시다 준이치라는 배우를 기용한 그 영화에는 전문직 독신남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80년대 버블 경제 시기, 총사회의 유한계급스러운 분위기 속에 구현되고 있었다. 그 영화와 비교해봄직한 2014년작 <니시노 유키히코의 사랑과 모험>도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매력을 극대화한 영화다. 그말고 다른 어떤 남자배우가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 속에서 그는 유연하게 여성들을 쥐락펴락하는 플레이보이를 연기한다. 니시노 유키히코는 오는 여자 막지않고 가는 여자도 붙잡는 타입의 바람둥이다. 하지만 <헤이세이 플레이보이>의 주인공이 낮에는 치과의사로, 밤에는 클럽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주체하지못하는 척하면서 별다른 고민없이 피상적인 관계를 허겁지겁 갈아치우고있다면, 하나같이 죽자사자 매달리는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니시노 유키히코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니시노는 철저하게 객체로만 그려지고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와 숨겨두었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도록하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어떤 욕망과 본심을 가지고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 모른다. 유의할 것은 바로 이 영화의 액자식 구조. 어린 미나미와 나츠미 모녀와 니시노가 만나는 첫번째 씬 이후, 사춘기가 된 미나미 앞에 니시노가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 그 다음 둘은 장례식이 열리는 니시노의 본가로 향하는데 그곳은 중반 이후 영화의 거의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 도쿄에 위치한 아파트와는 대비되는 대저택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연히 미나미가 만난 사람. 그곳에서 미나미는 조문을 온 사유리라는 여인으로부터 니시노의 연애담을 듣게 된다. 그런데 같이 장례식장까지 왔건만 도착 이후부터 니시노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혼자가 된 미나미는 니시노 본인이 아닌 사유리로부터 그녀 자신을 포함해 니시노가 거쳐간 여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니시노의 종적에 대해서 미나미가 하나도 의문을 품지않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그 이야기를 다 듣고나면 다시 맨 처음에 나왔던 해변의 카페에서 미나미와 나츠미 그리고 니시노가 오랜만에 재회를 한다. 이렇게 보면 크게 이 영화가 사유리의 회고를 중간에 놓고 앞뒤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3막 구성임을 알 수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는 (유령일지언정 어쨌든) 니시노가 실제 나타나지만 중간의 회고에서는 이야기속 인물로 니시노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혹시 사유리로부터 전해들은 니시노의 그 모든 이야기가 실은 전부 거짓은 아닐까. 니시노가 직접 전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못했던 이야기를 사유리가 대신 전하는건 아닐까. 사유리와 미나미의 첫만남, 그리고 이후 니시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다소 급하게 전개된다는 것, 또 사유리의 이야기대로라면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연적관계인 마나미와 카노코, 타마와 스바루가 정작 장례식장에서는 친밀해보인다는 점은 이런 의심을 더하게 한다. 한마디로 사유리는 '미덥지못한 화자(unreliable narrator)'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회상이 정말 전부 거짓이라면 사유리의 의도는 뭘까.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함으로써, 혹은 니시노의 부탁을 받고 그가 하고싶었던 가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그렇게 사후일지라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시노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유리의 회고를 전부 괄호친 다음 그녀의 이야기가 아닌 일반적인 3인칭 시점에서 니시노가 자신의 속내를 직접 밝힌 거의 유일한 대목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는 첫번째 카페 장면이다. 거기서 그는 나도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해서 딸을 낳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나츠미는 단번에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나츠미만이 니시노의 인생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또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을 무심히 발설한다. 앞의 그 대목에서 그녀는 당신은 여자들의 욕망에 전부 반응하려한다며 니시노의 삶을 진단하더니 마지막에는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대사를 하는데 미나미에게 하는 코이(恋)와 아이(愛)는 다르다는 말이 그것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코이는 연애, 아이는 사랑이라고 하면 적당할까(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으로 번역됐다). 이 대사의 앞뒤를 되짚어보면 나츠미는 자신에게 니시노는 '첫번째 연애'였지만 연애란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미나미를 낳은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제일 중요했다고 말한다. 둘의 차이가 미묘한 탓에 정확히 이해되지않지만 나츠미의 저 두 개의 대사로 미루어보면 '코이'와 '아이'를 각각 남녀 사이의 에로스에 기반한 '연정'과, 헌신과 애착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사랑 정도로 쓰고있는듯 보인다. 즉 남녀간의 이성애에 기반한 정념은 일시적이지만 자신은 그 대신 핏줄로 이어진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 헌신과 애착이라는 더 영원한 것을 택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모든 여성들의 욕망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애쓰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도 한 여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싶었던, 즉 코이가 아닌 아이를 원했던 니시노의 좌충우돌하는 연애담과 얼핏 허무하게 보이기까지하는 죽음은 그의 삶에 대한 우회적 조롱 내지는 냉소로 보인다. 어떤 식으로든 끝날 수 밖에 없는 코이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조금은 우스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한 남자와 그와의 코이를 과감히 끝내고 아이를 택한 여자,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인 또다른 한 어린 여자가 니시노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는 세 인물들이 각자 느끼는 깨달음과 미련과 후회가 미묘하게 교차한다. 그런데 저들 중 나츠미의 말을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는 미나미를 보면 그녀 역시도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코이를 선택할 것임을, 아니 어쩌면 이미 선택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듯하다.


단정하고 깔끔한 화면과 함께 제목에서 연상되는 귀여운 연애담인척하는 영화는 그러나 이렇게보면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원작자와 감독 모두 여성이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점에 초점을 맞춘 진정한 의미의 여성영화"라는 글을 봤다. '진정한 여성 영화'란 (그런 게 진정 있다면) 과연 어떤 영화일까. 거칠게 말해 가부장제나 성차별을 비판하며 여성들의 독립적 가치관과 주체성을 재현하려는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표명하거나, 또는 성정치는 크게 의식하지않지만 여성의 실제적 욕망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서사로 나누어진다면(물론 이 둘은 구분이 되지않는 경우가 많을테지만) 이 영화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않는듯하다. 한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 등장인물들의 욕망은 실현되지않고 남성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은 뭔지도 제대로 알지못한채 여성들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어처구니없이 죽고만다. 여성 캐릭터중 니시노와 진정 연애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녀들은 니시노에게 하나같이 맹목적으로 매달리지만 그렇게되기까지의 과정과 마음의 변화같은 것은 잘 보이지않고 그저 빠르게 등장했다가 다음 인물의 등장을 위해 빨리 퇴장한다. 그렇게 다소 소모적으로 기능하는 캐릭터들이 계속 스쳐지나가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 속에 영화는 결국 코이에 앞서는 아이를, 연애의 불모성을 역설한다. 이쯤되면 반로맨틱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야하는거 아닐까. 


사족. 하스미 시게히코가 2014년 베스트 텐에 올린 세 편의 일본영화 중 한편으로(나머지 둘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세븐스 코드>와 만다 쿠니토시의 <독스 웨이>) 어딘가에 직접 평도 썼다는데 찾지를 못했다. 한번 읽어보고 싶음.

리틀 포레스트
나같이 뼛속깊은 도시 사람으로서는 약간은 신기하게 봤다. 다시금 확인한 바가 있다면 시골 사람들은 확실히 '일을 만들어서 한다'는 느낌이랄까. 젊고 힘있을적 엄마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다. 굳이 딸기를 사서 몇시간씩 졸이며 잼을 직접 만들거나 나는 입 한번 대지않던 청국장이나 가지볶음같은 '슬로우푸드'를 철마다 꼭 한번 이상은 만든다거나 심지어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 상추까지 키웠던 적도 있었다. 시골에서 나고자란 엄마로서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걸까. 영화는 최소한의 이야기 전개를 위한 드라마의 흔적만을 남겨놓고 대부분을 요리하는 장면으로 채워나가는데 이렇게 앙상한 드라마가 의외로 그 앙상함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낳게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왜 집을 나갔는지는 전혀 궁금하지않지만 왜 이치코는 유우타를 집으로 부르면서 키코가 모르도록 걸어오라고 했을까라든지 왜 갑자기 둘의 대화는 불현듯 뚝 끊어졌는가 같은 것들. 어쨌든 후속편도 개봉하면 보게되겠지.

도보 7분
현재 보고있는 1분기작중엔 단연 가장 흥미롭다. 드라마적 서사의 개연성이나 작위성같은걸 일부러 자꾸만 벗어던지려고하기 때문인데 이번 6회에서도 그저 두 여배우가 한자리에서 이어가는 시시껄렁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대화로만 30분 러닝타임의 3분의 1이상을 끌어간다. 2회를 보면서 자매가 왜 저렇게 이상한 대화를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기실 대화 내용은 전혀 이상할게 없으나 이상하다고 느낀건 굳이 드라마에서 보여줄 가치는 전혀 없어뵈는 평범한 일상의 대화였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 히키코모리인 여주가 내적으로 전혀 성장하지않는 결말을 취한다면 가장 이상적일듯한데 그건 그저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데이트
지금 내게 가장 흥미로운 작가는 사카모토 유지가 아니라 바로 코사와 료타다. 단연코. 연애가 '능력'으로 간주됨에 따라 만성연애부전 혹은 불능이 만연한 시대에 연애부적격자 두 명을 붙여놓고 케미를 만들어내는 그 방식도 그렇지만 다른 것보다 '고등유민'이라는 또 하나의 사회 현상을 이 연애 소동극에 무리없이 유연하게 끼워넣고 있다는 점이 발군이기 때문이다. 저성장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신인류라할 잉여, 백수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지도 모를 이 신 종족을 희화하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극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등장인물들도 악인이 전혀 없이 하나같이 다 호감가는 인물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러고보면 소세키가 특히 요즘들어 더 여러모로 쓰이는 허울좋은 구실을 하나 만들어줬구나싶다.

24시간 플레이보이
원제목은 "사랑과 헤이세이의 플레이보이"쯤 될거같다. 80년대후반 버블이 터지기 일보직전의 그 긍정적이지만 흥청망청하는, '1억총중류' 캐치프레이즈가  마침내 실현된듯한 전 사회의 유한계급스러운 분위기가 120% 구현되어있다. 동시대나온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ova를 실사화한거같기도하고. 시티팝이나 j-aor과도 물론 맥을 같이한다. 검색해보니 남주역을 한 배우는 주인공캐릭터보다 더한 플레이보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듯. 80년대의 모리타 요시미츠는 이렇듯 감각이 넘치는 감독이었다. 90년대 후반이후 만년까지의 필모를 보면 도저히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안습이지만.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무런 정보없이, 그저 작년에 나온 감독의 최신작의 반응이 좋다고해서 찾아봤는데 꽤 늦은 나이에 내놓은 장편극영화 데뷔작이다. 코미디는 황당무계하나 단순히 개그 차원을 넘어 감독이 자기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애정을 갖고있음이 보여서 좋았다. 이는 감독의 전반적인 인간관이기도 하겠지만.

 

폭스캐처

그저 하나의 가설을 제시할 뿐이란건 알지만 그럼에도 한켠으로는 그래도 납득할만한 것이길 바랬는데 역시나 감독의 견해에 이심전심을 하게되면 충분한 설명일테고 그렇지않은 내게는 약간 뜬금없다고 느꼈다. 씬마다 장소와 시간을 비교적 충실히 고지하던 영화는 (심지어 88 서울 올림픽 장면에서 경기장만 봐도 알 수 있는데도 굳이 자막을 첨가하는 친절을 보였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 사건이 있기 전까지 8년간의 공백에 대해서는 슬쩍 모른척 의뭉을 떠는데 정작 살인이 벌어진 96년에 둘 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해서 설득력이 확 떨어졌다. 88년에서 사실상 모든 이야기가 종결되고 (96년 사건당시 배경으로는 달랑 러닝타임 마지막 10여분동안만 주어지는 상황에서) 그것만 가지고 8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범행과 이으려고 한다면 더 구구한 산문적 설명이 있어야하지않았을까. 영화에 나온대로만 본다면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낀데 따른 듀퐁의 우발적 범행인데 영화는 그걸 가문 내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개인적 열등감과 슐츠 형제와의 감정의 골에서부터 생겨난 은원에 의한 것처럼 제시하고있다. 범인이 사망한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명확한 진실을 알 수는 없을테고 이런 류의 사건이 늘 그렇듯 가설과 가설들 사이에서 좀 더 그럼직하다는 개연성과, 짐작들에 기댄 또다른 가설과 말들이 나올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가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길하고 음울한 기운으로 휩싸여있고 소노 시온의 도쿄가 온갖 범죄와 폭력과 사회 병리 현상이 들끓는 카오스라면 이치카와 준의 도쿄는 전철로 통근을 하고 가게를 열고 산책을 하며 사람들이 생활을 일구어가는 터전이다. 이때 물론 이치카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오즈를 참조하며 은근히 그의 적자가 되고 싶어한다. 오즈의 시그니처중 하나인 지상으로 달려가는 전철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도쿄3부작'의 마지막편 <도쿄야곡>(1997)은 과거의 연을 묻어두고서 모른척 하려하지만 여전히 얽매여있는 중년의 세 남녀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과거를 전해 들으며 옆에서 지켜보는 젊은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오사와의 죽음 이후 마을을 떠났던 코이치가 이십년만에 돌아온다.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 하려 하지만 코이치와 과거 그의 연인이자 생전에 오사와의 아내였던 타미 그리고 코이치의 아내 히사코까지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어져있다. 예를 들어 타미가 오사와를 간병하다가 결혼하게됐다는 사실을 아사쿠라가 사진관에서 알게되는 장면이 지나면(정확히는 그 바로 뒤에 코이치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타미가 전화로 전해 듣는 장면이 지난 후) 이번엔 시아버지와 코이치의 깁스를 풀기위해 들른 병원 진료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히사코의 옆모습이 보인다. 짝사랑하던 남자의 결혼식이 열리던 날 타미의 가게에서 열린 피로연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레코드 가게 아가씨의 에피소드도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서 기능한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거치는동안 정작 만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고 곧잘 어울리지만 그들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은 타인이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반부에 아사쿠라는 직접적으로 히사코에게 묻는다. 오사와에겐 따로 연인이 있었고 타미도 그를 좋아하지않았는데 둘은 왜 결혼했나요? 오사와를 정말 좋아했던건 당신 아니었나요? 당연히 대답을 들을리는 만무하다.

 

남편이 죽은지 이십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가 운영하던 가게와 마을을 떠나지못하는 타미, 그렇게 오래 떠나있었으면서도 결국 돌아와 다시 그녀와 얽히고마는 코이치, 집을 떠나있는동안 남편이 어떻게 살았는지에는 관심없다며 강한 척하지만 타미와 마찬가지로 가정도 마을도 떠나지못하는 히사코까지, 오사와의 존재와 그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철저히 사로잡힌 그들에게 현재란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물론 마을을 떠나는 것. 코이치가 오랜 세월을 보내긴했지만 결국 돌아옴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면 이번에는 당연히 타미의 차례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쿄가 아닌 장소에서 새출발하는 그녀의 밝고 힘찬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치카와 준의 영화를 본다는건 결국 풍경과 사물만 담겨있는 정물샷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인물을 바라보는 화면으로부터 무엇을 볼 것인가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들을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변별점이 된다. 상투적인 줄거리도 그래서 특유의 이러한 연출법과 결합하면 그 함의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요모타 이누히코는 다큐멘터리처럼 찍힌 인서트 샷들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93년작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서 그 장면들을 환자들이 입원 전 자신들의 일상을 회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전혀 극화되지않은 다양한 실제 삶의 정경들이 담긴 그 시퀀스들은 러닝타임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뿐만 아니라 인상적으로도 깊이 각인되는데, 이를 과거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치카와 영화에 대한 요모타의 '노스탤지어적 시선'이라는 관점은 견지된다. 반면 나는 이것이 회고라기보다는 환자들이 병원 밖 활기찬 저 삶의 풍경들로부터 서서히 죽음으로 건너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극의 세계와 논픽션인 실제 삶의 현장, 또 병원 안 환자들과 실외에서 야외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대조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를 서서히 그러나 또렷하게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처음 보자마자 결말이 훤히 보일 것 같은 줄거리임에도 이러한 연출로 인해 낡아보이지않는다는 점에서 이치카와 준은 (cm감독답게) 자기만의 분명한 영상 어법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의 느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 인물을 향해 들어갈 땐 아주 가까이, 떨어질 땐 멀찌감치 떨어지는 특유의 시점샷에 더해 이 영화는 서민들이 모여사는 상점가 분위기 묘사가 특히 발군이다. 첫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초반부 타미의 깃사텐의 분위기를 어떻게 그리는지 보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바둑을 두거나 차를 마시거나 혼자 책을 읽는 손님들이 각자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레코드 가게, 사진관, 서점, 그리고 코이치가 운영하는 전자제품 대리점까지 여러 종류의 상점과 그곳의 손님들의 묘사도 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즈를 향한 오마주가 있다. 한낮과 해질녘의 강가, 가로등이 켜진 거리, 가게 앞에 세워둔 간판들이 들어찬 골목, 수많은 전깃줄이 뒤얽혀 어지러운 전신주같은 정지된 스틸샷에서 그는 오즈를 향한 경외를 숨기지않는데 맨마지막에 이르면 툇마루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코이치를 흡사 오즈와 거의 같은 높이의 다다미샷으로 포착하기까지 한다.

 

이렇듯 형식에서 오즈를 의식하고 내용적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다지 결말이 궁금하지않은 무난한 드라마를 연이어 발표하던 8,90년대의 이치카와 작품들을 요모타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그러나 재생과 회복 혹은 억압과 해방은 거의 모든 영화에 해당하는 주제이자 사실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 같은 것인지라 이러한 분류는 얼핏 게으른 비평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힘차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타미를 보여주며 끝나는 이 영화에 그리고 '도쿄 3부작'에 일관되는 두드러진 공통점인 것은 맞다. 마지막에 마을을 떠나는 두 인물이 타미와 아사쿠라라는 점은 자못 대조적인데, 한 명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위해서이지만 다른 한 명은 끝까지 마을과 사람들에 어울리는데 실패한 채 이방인으로서 밀려난다는 인상을 남긴다. 


작년에 나온 <동경남매> dvd와 초기작들과 미완성 유작을 모아놓은 박스셋, 그리고 최근 크라이테리언에서 hd로 복각한 <회사 이야기>(1989)처럼 최근들어 이치카와의 영화들이 천천히 다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훗날 전작을 일별하는 것이 가능한 가운데 더 합당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도쿄야곡>이 보통사람들의 소탈한 생활, 노스탤지어적 시선과 정경 묘사, 인물들이 겪는 작지만 큰 상실, 또 그만큼의 재생과 회복이라는, 이전과 이후의 장편과 cm을 통해 꾸준히 변주해온 소재와 양식이 담긴 대표작 중 한 편임은 분명하다. 이후 1999년작 (제목에서부터 <도쿄 이야기>를 연상시키는)<오사카 이야기>까지 이러한 상실과 회복 또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플롯은 이어진다.

역시나 2014년의 베스트같은건 아니고 이런저런 이유로 보고나서 어쨌든 기억에 남은 점을 적어둔 메모들

 

도모구이
구구히 전승되는 남성들의 폭력이 여성에 의해 손이 묶이거나 잘려버리는 식으로 일시적으로 중단되며 쇼와시대가 끝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뿐. 현재 개헌에 목숨을 걸다시피한 일본 우경화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묶인 손이 풀리면 언제라도 곧 재개될 남성 폭력, 즉 국가 폭력.

 

일본의 밤과 안개
올해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이자 가장 충격적인 라스트 씬. '정치 영화'는 과연 고리타분한 형식으로만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고전 영화의 날카로운 반격.

 

그여름 나의 누이
제작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너무 밀착되면 문제작은 될지언정 보편성을 가진 걸작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 1972년은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 영토로 귀속된 해인데 그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듯 같은 해에 나온 이 영화는 줄거리에서 이미 노골적인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오키나와로부터 자신이 이복오빠라고 주장하는 이의 편지를 받고서 도쿄에 살던 소녀가 오키나와로 건너온다. 남자의 아버지로 의심되는 두 남자가 도쿄에 사는 판사와 오키나와의 경찰 서장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보다 직설적이기도 어렵다. 법과 치안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구식민지에 행한 침략과 착취라는 뻔하지만 그래서 더 당당한 알레고리.

 

잊혀진 황군
<일본의 밤과 안개>와 함께 나에겐 오시마의 베스트. 전쟁은 끝나도 가해 책임에 대한 부정과 은폐 그리고 회피는 2차, 3차 가해를 가한다.


전신소설가

후지타 쇼조는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의 후반부에서 이노우에 미쓰하루를 두고 비록 제명과 탈당선언이 있긴했지만 사상사적으로는 비전향이라 볼 수 있다면서 상당량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의 작품, 사상과 생애를 우호적으로 조명하고있다. 물론 그 글은 하라 가쓰오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발표되기 훨씬 이전에 쓰인 것으로 훗날 후지타가 이 다큐를 봤다면 (후지타가 2003년에 작고했으므로 충분히 보고도 남았으리라)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궁금해졌다. 하라는 여기서 이노우에가 밝힌 자전적 생애에 관한 진술, 즉 후지타도 책에서 언급한 탄광촌에서의 성장과 의식화, 그리고 재일조선인 소녀에게 품었던 연정같은 것들 대부분이 허위이고 날조임을 밝혀낸다. 영화 내적으로는 (요모타 이누히코의 설명에 따르면) <가라가라 신군>에서처럼 작가와 대상간의 팽팽한 긴장이나 갈등, 그리고 연출자의 직간접적 개입 같은 방법이 아닌, 편집에 의한 입체적인 작품을 완성하고있다. 진짜와 가짜, 소설가와 혁명가, 견결한 신념을 갖춘 거짓말쟁이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감독 본인은 한번도 직접 얼굴을 내밀거나 목소리를 내고있지않음에도 이노우에의 발언 바로 뒤에 그의 거짓말을 밝히는 다른 이들의 증언을 붙이는 식으로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그럼에도 결코 비난하는 투의 주관을 드러내지않는 태도가 돋보인다. 폭로 저널리즘 따위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이노우에의 허위를 비난하거나 진상을 밝히는데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만약 이 영화의 목적이 이거였다면 거짓말을 밝히는 것으로 영화는 거기서 끝났어야했다.) 그렇다면 카메라 앞에 선 이노우에라는 이 모순적 존재는 도대체 뭘까라는 궁금증을 두고, 마치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의 완결된 소설같은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이노우에와 거기에 도전하면서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자신만의 이노우에라는 한 편의 텍스트를 새로이 써나가는 하라, 두 명의 예술가간의 조용한 대결과 긴장이 영화를 관통하고있다.

 

만화잡지 따윈 필요없어
80년대 버블시기 일본의 소비 및 유흥문화, 그리고 물질 및 생활 수준등이 비교적 잘 기록되어있다. 플롯은 매우 엉성하지만 (우치다가 직접 썼다고함) 이 때 우치다의 무표정 연기를 훗날 기타노 다케시가 자신의 것으로 재전유한듯하다. 우치다 유야 영화에는 매번 기타노 다케시가 신스틸러로 나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스틸 수준이 아니라 아예 클라이맥스에서 영화를 장악해버린다.

 

토일렛
치유계 영화의 분위기와 정서는 그저 로컬하고 특수한 것일까. <카모메 식당>의 감독이 전작의 분위기를 일본이 아닌 서구에서 또 한번 재현하려는 이 시도는 그런데 묘한 지점에서 충돌한다. 이미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삶이 넉넉한 곳에서 치유계 영화는 그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 핀란드와 캐나다, 북유럽과 북미의 차이는 또 어떤가. 세 명의 등장인물들의 어색한 젓가락질과 손발 오그라드는 '에어 기타'연주가 극명하게 대답하고있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천연 꼬꼬댁)
역변 이전 '리즈 시절'에 찍었다는 따위는 다 필요없고 이 영화에 나오는 성인 배우까지 다 합쳐도 제일 뛰어난 연기를 카호가 보여준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본지라 그녀가 이 정도로 섬세한 연기가 가능한 배우인줄은 몰랐음.

 

장례식
내게는 이타미 주조의 감독 데뷔작인 이 영화가 그의 최고작. 이후에 나온 모든 연출작을 다 합쳐도 이 한편에 못 미침.

 

스펙 완결판
만화와 아니메가 발달한 나라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사례. 작가(츠츠미 유키히코)가 프랜차이즈를 이어가면서 그동안 하고싶었던거 다 풀고가겠노라는 자의식이 만개한 작품. 관객 반응 따위 생각않고 그냥 나하고싶은거 다 해보련다 이런 작정이었던거같다

트릭 라스트 스테이지
트릭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신인 나카마 유키에와 주목받지못하고 잊혀져가던 아베 히로시 두 사람을 지금의 위치에 있게해준 출세작이다. 이후 두 배우 모두 진지한 정극에 꾸준히 출연하면서도 무려 십년이 넘게 단속적으로 이어진 이 시리즈를 계속할 수 있었던건 이 프랜차이즈가 두사람을 '입신'하게 한 작품이기 때문이었을텐데 어쨌거나 이 극장판은 확실히 길었던 프랜차이즈의 한 단락의 끝맺음을 하기도했고 아니기도하다. 또 한번의 속편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역시나 있었기 때문. 엔딩은 역시 언급 안 할 수 없는데, 츠츠미 유키히코는 자신이 이끌었던 장기 시리즈 두 편을 거의 동시에 같이 끝내면서 남주인공보다는 여주인공에게 더 감사와 애정을 표한다. 여기서는 앞에 언급한 <스펙>에서만큼의 자의식 표출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정반대로 마지막 편 치고는 이야기의 스케일이 단출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다 패턴화가 되있는 시리즈라하더라도 새로운 구석이 몇쯤은 있어야했다. 해외로케임에도 거의 티도 안나고. 그래봐야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비 도시지역으로 들어가는 설정이긴하지만, 동굴 안은 아예 일본에서 찍었을거같고. 그러고보니 연예계를 은퇴해버린 1시즌의 야베 부하 이시하라가 잠깐 나온다는 사실은 워낙 엔딩 자체가 인상적이라 덜 언급되는듯.

이사
태풍클럽이 소마이 신지의 80년대 최고작이라면 역시 90년대 최고작은 이 영화다. 90년대 이후로는 소마이의 연출편수가 적긴하지만. 계속 언급되는 불의 이미지는 소녀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한다. 교토라는 공간을 잘 활용한 아름다운 로케이션. 


하시구치 료스케 영화들
과작(寡作)의 작가이긴하지만 그의 영화들은 미묘하게 계속 이어지는 설정들이 있다.

우드잡
늘 일본 영화에 불만이었던 것이 원작이 없으면 영화를 못만드는 고질은 그렇다쳐도 거의 각색이 없다시피 원작을 그대로 영상화하는건데 이 영화는 다행히도 처음부터 끝까지 각색 작업을 거치면서 더 재밌어졌다.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볼 때 관객들이 빵 터졌던 부분들도 대개는 다 원작에 아예 없던 부분(요키가 나카무라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뛰어오는 장면이라든가 요키가 자고있는 유키의 베개를 걷어찬다거나, 그리고 제일 크게 관객들이 웃었던 노동요를 부르는 부분)이고 기본적 인물 설정도 꽤 과감하게 바뀌었다. 감독이 직접 했다는 각색은 쳐낼건 쳐내면서 더 효율적으로 거듭난 셈인데 잘빠진 기성품을 뽑아낼 줄 아는 중견 감독의 존재가 왜 중요한지 보여줬다하겠다. 원작에서 빠진건 노코와 산타와 유키간의 우정같은 것들, 그리고 클라이맥스 에피소드도 잔가지를 상당 부분 쳐내고 핵심만 남겨놨다. 나가사와 마사미의 후줄근한 츄리닝 패션은 덤. 미우라 시온은 <배를 엮다>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취재를 바탕으로 특정 직업세계에 뛰어든 초심자의 수행기 겸 관찰기를 그려낸다.

 

여름의 끝
올해 본 일본 영화중 단연 투톱은 이 영화와 <일본의 밤과 안개>다. 후자가 그 스토리 전개 방식, 그리고 그것이 무려 1960년에 가능했다는 사실 두가지가 충격이었다면 2013년작인 이 영화는 그와는 정반대로 흔해빠진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영상에 홀렸다. 오시마가 자신의 비판적 문제의식의 제기를 스토리와 플롯 그리고 미학적 완성도보다 앞세우는 감독이라면 이 영화는 스토리는 너무나 통속적인데 그것을 탐미주의적인 영상으로 극복해내고있다. 사소설적 풍경을 영상으로 확인한 기분.

 

리버
14분의 첫 롱테이크와 마지막 5분의 롱테이크. 엄청난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너무 그대로여서 이해할 수 없고, 더 낯설어진 세상을 부유하는 주인공의 첫번째 롱테이크.

익스트림 스키야키

시끌벅적한 20대 시절의 여행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30대, 그것도 오랜 우정을 이어온 30대 남녀들의 아무 계획없이 떠나는 근교로의 밍숭맹숭한 여행. (결코 홍상수같은걸 상상하면 안된다.) 보면서 한번쯤은 해봐도 괜찮겠다싶더라는.

산딸기
니시카와 미와의 데뷔작. 반전이 무척 인상적이라 전반부의 늘어짐을 만회하고도 충분히 남는다.

백설공주살인사건
출연배우의 '급'과 비중을 헤아려 캐스팅만 보고 범인 때려맞히게되는 추리영화의 단점을 비슷한 중량감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많은 캐릭터를 출연시켜 빠져나간 케이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발생하는 그들간의 시기 질투 열등감 같은 것들을 줄곧 다루어왔던 미나토 가나에의 그간 작품들과 별 다른건 없다. 사적 세계와 공적 세계가 불분명하게 겹쳐있는 상황에서 여성간의 보이지않는 반목까지 겹친다. 유년기의 경험과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못한 채 성인이 되고나서도 늘 그때의 경험에 현재 상황을 대입해버리고마는 주요 등장인물의 사연은 누구라도 유년기를 완전히 빠져나오기란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영화 자체는 미나토 원작의 각색물이라고는 하나 예의 나카무라 요시히로 영화답게 나쁘게 말하면 무색무취하고 좋게 말하면 그냥 말끔하고 준수하다. 연출자만의 개성이랄게 전혀 없음

도플갱어
돈과 권력은 나에게 달라던 도플갱어의 바람대로 원본인척 하던 도플갱어는 맨마지막에 돈과 여자주인공을 얻고서 유유히 사라진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별다른 세팅을 안해도 괴상하고 낯설게 보이게하는 로케이션 헌팅과 독창적 공간 연출과 활용 그리고 과학기술과 이공계 페티시인데, 아무것도 아닌듯 하지만 자세히보면 괴상하고 이상한 공간활용법이 여기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운명이 아닌 사람
우치다 켄지의 장편데뷔작인데 그 후에 나온 두 편보다 훨씬 재밌다. 일본 감독들은 다작이 일반적인데 이 감독은 그에 비하면 엄청난 과작의 작가. 꼬인 플롯을 기반으로 폭력적이지않은 코믹 스릴러를 주종으로 한다. 검색해보니 이 영화가 과거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적이 있었다고. 

 

작은 집

이 영화를 들고 베를린 영화제에 갔을 때 야마다 요지가 아베 정부의 우경화 흐름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면 그 발언이 작정하고 나온 꽤 의도적인 제스처로 보이는 면이 있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다키의 인식에는 몰역사적인 나이브함이 있고, 거기에 다키의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집 사모님도 당시의 급박한 전황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랑놀음에 빠져있는데 이는 긴자 백화점에 들어온 신상품에 열올리는 그와 같은 계급의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것이기도하다. '말하는' 자와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를 풍자함으로써 당시 직접적으로 전쟁과 연관되지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그 '무관함'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보면 그렇게 냉정한 인식과 판단을 하는 (야마다와 나카지마라는) 두명의 작가가 있다. 즉 현재 시점에서는 냉철한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하는 또다른 '무관한' 이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프로덕션이 주도하는 최초의 기획물로서의 한국 로맨틱코미디라는 모 영화가 개봉한 1992년, 일본에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얽힌 삼각관계를 다룬 이 작품이 나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두 인접국가의 시간적 격차를 생각해봤다.

도쿄 오아시스 (재감상)
도시에 있으면 세상 넓은 줄을 모른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는 도시라는 거대한 섬에서 고립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알듯모를듯한 관계의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만났다 헤어지고는 다시 어디론가 간다. 도시라는 이 거대한 섬에서.

 

나는 진심을 다하지않았을뿐
뒤늦게 하고싶은 걸 찾아낸 남자, 원하는걸 참고있는 남자, 뭘 하고싶은지조차 모르는 남자까지 세 사람의 좌충우돌기.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원하는 것 자체가 큰 심적부담과 죄책감이 되는 상황에 대해서.

한여름의 방정식
후쿠야마가 어린 남자아이와 엮인다는 점에서, 또 낳은 정과 기른 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떠올리게했다. <용의자 X의 헌신>도 그렇고 드라마와 영화판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유머는 배제되고 훨씬 진중함.


지옥의 경비원
살인마 역할을 하필 고독한 미식가의 마츠시게 유타카가 해서 영화가 그닥 무섭지는 않았는데 그 점을 차치하고라도 영화 자체가 호러치고는 안 무서운 편. 서른 살도 되기전 이십대 후반의 마츠시게 상이 나온다는.

핑퐁
과연 모든 스포츠가 스포츠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스포츠 영화의 서사 동력인 승부를 가르는 세계관 자체를 걸고 넘어지는 스포츠 영화. 그깟 공놀이를 두고 죽고사는 것처럼 전존재를 거는걸 이해할 수 없어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도전-실패-부활'이라는 뻔한 서사가 되풀이되긴하지만 여기서는 어쨌든 승부의 세계 그 자체가 고민의 대상이 된다.

토키와장의 청춘
내가 좋아하는 이치카와 감독은 '곤'이 아니라 '준'임을 다시금 확인한 영화. 마침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라는 책을 통독한 다음인지라 자연스레 이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책은 엄한 소리가 태반을 이루긴 하지만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고민과 꿈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사는 공동체에 대한 저자의 전망이 실제로 현실화된 영화 속 회고는 맘에 들었다. 물론 이런 공동체에서는 서로를 응원하기도하지만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유로 절망하는 이가 생기고 떠나는 이가 생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고생을 같이 견디면서 젊은 날을 보내고 한발한발 나아간다. 일본 만화 역사의 파이어오니어들이 한창 열심히 수련하던 시기에 대한 묘사인지라 어쩔 수 없이 애틋한 면이 있다. 실화를 극화할 때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라 소설,에세이,르포 등의 원작을 다시 각색하는 방식을 택하는 일본답게 이 영화 역시 원작은 nhk 다큐이고 제목도 그대로 빌어왔다.

안즈코(1958)/산의 소리(1954)
올해 본 나루세 미키오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두 편이다. 아직도 보지못한 그의 영화가 있긴하지만 (나루세 미키오는 엄청난 다작의 작가임). 두 편 모두 가족 제도로부터 억압받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커리어 내내 여성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나루세는 여기서 한마디로 가부장제로부터 억압받는 여성 주체를 50년대치고는 꽤 입체적으로 다루고있다. 이 정도로 세심하게 여성 주인공이 처한 억압적 환경과 그로부터 분투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현재 일본에서 나오고있는지 잘 모르겠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오키나와가 배경이면 어쩔 수 없이 관습적으로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으려든다. 게다가 최양일은 이후에도 <a사인 데이즈>에서 또 한번 오키나와로 갔었으니까. 그럼 여기서 오키나와는 뭘까. 미개척된, 앞으로 정복하고 개발해야할 사업의 대상이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있기에 온갖 음모가 피어나는 장소라는 스테레오타입이긴한데 그 점을 빼면 딱히 로컬적 특수성같은게 전면에 부각되지않는다. 하드보일드라는 점에 너무 기대를 했는지도.

아키츠 온천
요시다 기주의 대표작. 60년대 일본 시네마스코프 영화 분위기가 물씬하다.

로빈슨의 정원
야마모토 마사시의 1987년작.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시절의 덕을 입었달까, 한창 같이 부흥하던 독립영화계의 패기가 돋보인다.

도쿄 매리골드
3부작 이후 또 한편의 '도쿄' 연작이라고 해야할까. 다나카 레나와 키키 키린이 모녀로 나오고 이치카와가 연출한 아지노모토 조미료의 연작 cm은 98년부터 총 5년동안 계속됐는데 그 와중에 이치카와는 이 두 사람의 모녀 설정을 그대로 이어가는 장편 영화를 구상했고 이를 위해 하야시 마리코의 단편을 직접 각색해 연출한 것이 바로 이 영화다. 해외에 있는 여자친구와 장거리 연애중인 남자와의 짧은 1년여간의 씁쓸한 연애 이야기는 여전히 이치카와적인 온갖 클리셰들로 넘쳐난다. 대사를 하는 와중에도 배경음악은 쉬지않고 흘러나오고 위에서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는 부감샷이 씬과 씬을 구분짓는다. 하야시 마리코의 평소 글과 비교하면 영화는 무척 순화된 편으로 이치카와 준의 영향이 더 크다. 순간순간 보이는 다나카 레나의 얼굴은 앳되고 앙상한 줄거리를 분위기로 끌어가는 연출에는 기복이 없다. 특히 에리코가 출연한 극중 cm은 영화로 전향한 이후에도 틈틈이 cm 연출을 계속해온 그의 감각이 빛바래지않았음을, 또 장편 영화들에서 일관된 그 '이치카와스러움'의 정수를 짧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에리코 모녀가 같이 미소시루를 요리하고 먹는 장면은 조미료 광고의 확장판격으로 원작 cm의 카메라 구도, 배경음악, 두사람의 대화가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오사카 이야기
이치카와 준의 연출, 이누도 잇신의 각본 그리고 이케와키 치즈루의 장편 데뷔작이다. 마고코로 브라더스의 히트곡 endless summer nude가 인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료마의 처 그녀의 남편과 정부

이치카와는 시대극에서마저 자신의 연출스타일을 견지한다. 원작이 미타니 코키의 희곡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미타니 사단인 스즈키 쿄카와 나가이 기이치가 나온다. 보니까 굳이 료마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는 네남녀의 애정소동극. 동서고금의 각종 극형식에 대한 박식함과 함께 늘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싶어하는 미타니 코키 스타일의 극본에 이치카와의 연출이 더해졌는데 과시적 스타일과 화려함에 반하여 늘 (헛)소동극으로 끝나는 미타니 코키의 전형적인 극작술.

 

고레에다 히로카즈 초기 다큐멘터리들

네 편 다 소재나 주제도 특이하고 작품 자체로도 뛰어나게 잘 만들었는데 특히 <그가 없는 8월이>는 계속 보고 있기 어려운, 마음 아프게 하는 한 편이었다. 고레에다의 초기작이 사실상 이 네 편으로부터 종합적으로 영감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tv 방송 목적의 다큐멘터리가 어느 정도까지 드라마로서의 서사를 갖출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로 비교와 대조를 통해 다큐를 마치 드라마처럼 플롯을 짜나간다.

지옥이 뭐가 나빠

소노 시온도 이제 미이케 다카시처럼 되어가는구나. 과연 미이케의 오늘이 소노의 내일이 될까.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
재밌게 전개되다가 마지막 옥상에서의 클라이맥스에서 김이 새버렸다. 거기서 그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거 같긴하지만. 후속작인 <종이달>이 기대된다.


11.25 결단의 날
전작은 좌파감독으로서의 자기반성이란 점에서 이해가 되지만 정반대편을 다룬 이 영화에서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입장 표명이나 태도도 보이지않고 철저하게 재연에만 충실한 것은 어떤 의도이고 어떤 효과를 낳고 있을까.

 

에로틱한 관계

우치다 유야 영화에는 꼭 기타노 다케시가 신 스틸러로 나온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아예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파리 올로케이션으로 낭만적 탐정물을 만들고 싶어했어했던거 같은데 전부 백인들 사이에서 딱 이 셋만 동양인인데도 별 어색함이 없다. 만년작들이 워낙 진지하고 밀도가 높아서 그렇지 와카마츠 코지는 본디 이런 장르 영화에 정통한 감독이긴하다. 시기상 미야자와 리에의 최전성기 시절이 담긴 작품이기도.

 

lie lie lie
사기꾼이 예술가가 되는 순간

 

책읽기 좋은 날

<장서의 괴로움>에 이 영화 속 책장에 대한 언급이 나오길래 다시 한번 찾아봤다. 자살에 어떤 숭고한 미의식을 부여한, 그리고 (누구의 표현을 빌면) '기괴한 정신주의'를 가진 일본에서나 나올 수 있는, 그리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겨우 납득할 수 있는 결말. 서구에서라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거같은 줄거리 전개였을거같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유명한 영화인데 어째 이번에 처음 봤다. 어떤 면에선 러브레터보다 훨씬 재밌었다. 에구치 요스케 빼고 다들 외국어대사를 자연스럽게 하더라는. 혼종성에 대해 감독이 나름 깊이 고민했구나하는게 느껴졌다. 

 

룸메이트
그냥 <사이코>의 또다른 번안판. 스포나 반전같은거 잘 못맞추는 편이지만 절반도 보기전에 반전이 뭔지 훤히 보였다. 아무리 전개를 위해서라지만 대충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태반인, 날림으로 만든 장르 영화

 

몬스터즈

<룸메이트>와 마찬가지. 클라이맥스는 어이가 없을 정도. <우드잡>을 언급하면서 중견 감독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지만 반대로 점점 시시해져가는 중견 감독을 보는건 그래서 배로 괴롭다.

 

after school
데뷔작보다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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