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나 하나로 끝나지않고 내 자식에게까지 유전될지 모른다는 염려는 자신의 삶을 징벌로, 또 수치로 여기게끔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스틸 앨리스>를 보는내내 '유사 가족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심상하게 보기는 어려웠다. 화면을 바라보는 내내 지금의 내 처지와 비교하고, 또 내 입장을 주인공에 대입해보는 음울한 상상을 드문드문 이어가느라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불현듯 주의를 돌리게 한 대목이 있었다. 앨리스가 알츠하이머보다 차라리 암에 걸리는게 더 나았을거라는 말을 하는 부분이었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수전 손택은 결핵, 암 그리고 글을 쓰던 시점에서 급부상하던 에이즈까지 세 종류의 질병과 그들에 얽힌 은유를 비롯한 문학적 상상력을 따져묻고있다. 두 편의 글로 이루어진 그 책의 전반부에서 손택은 결핵과 암을 비교하는 가운데 본인 역시 당시 투병 중이던 암에 달라붙은 오명과 낙인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데, 그녀에 의하면, 암은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과 정념을 억압한 결과로 간주되며 그래서 무려 '발암성 성격유형'이라는 범주까지 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 은유는 말할 것도 없이 곧 암환자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그 결과 결핵과 달리 암은 수치스러운 질병이 되었고 곧 신체나 병리학과는 전혀 관련없는 분야에까지 부정적이고 불길함을 뜻하는 은유로서 퍼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그런 부정적 은유나 상상을 무시하듯 암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의 쇠약을 더 수치스럽게 여긴다. 암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활용해 후원금도 받을 수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그간까지의 인생과 정체성 자체를 뒤흔드는, 더 치명적인 정신의 쇠퇴를 야기하므로 숨기고싶은 부끄러운 질병이 되는 것이다. 육체보다 기억과 마음을 포함한 정신의 쇠락을 더 치명적으로 여기는 이런 시각이 혹시 새로운 은유는 아닐까.

처음 손택의 책을 읽었을 때 선뜻 이해가 되지않던 대목이 정념을 억압한 결과로서의 암이라는 낙인이었다. 우리 식으로 말해 `화병'이라는 건가. 아니면 에이즈와 유사한 성적 함의를 암에 붙인걸까. 손택이 글을 쓰던 시점에 암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으로 급부상한 에이즈에 달라붙어있는 성적 타락에 대한 징벌이라는 은유에 대응하기위해 다소 무리한 주장을 하고있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도 치매가 어떤 은유를 함축하는 질병인 것처럼 등장한다. 앨리스의 알츠하이머 발병은 가족력을 통한, 즉 유전자에 이미 기입되어있던 잠재적 병인이 때가 되어 발현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징벌이 아닌 운명으로서의 질병은 손택의 설명대로라면 결핵의 비극적 드라마라는 은유와 얼마간 유사하고, 드라마 작가들이 여주인공을 곧잘 백혈병 환자로 설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암에 비해서 투병과정에서 환자의 외양상 변화가 덜하거나 더 극적으로 보이고 그런만큼 비극적 성격은 더 도드라지게하기 때문이다. <스틸 앨리스>의 원작 소설과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공유하면서도 그녀의 공적 자아를 부각시키는 것과 긴밀하게 연동하면서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앨리스가 원했던대로 암에 걸렸다고한들 본질적으로 달라질건 별로 없을 것이다. 앨리스가 겪는 고통의 본질은 육체냐 정신이냐의 차원보다는 기억력, 언어구사능력, 인지능력의 퇴화 등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있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보다 그 고통으로 인해 변해갈 자신의 삶을 상상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공포가 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꾸만 모든 것이 발병 이전 그대로이길, 또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길 바란다. 남편은 미네소타로 떠나는 대신 자신의 곁에 머물고 딸은 자신의 오빠와 언니처럼 학업을 마친 뒤 전문직을 갖길 원한다. 이런 반응에는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삶이 평범한 이들에 비해 결코 쉽게 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 즉 뉴욕에 사는 중년 백인여성 교수의 삶이란 사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저명한 언어학자일 뿐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을 보란듯이 뒷바라지하고 키워낸 사람이 그 삶을 가능케한 이성과 정신력의 쇠퇴를 막지 못하고 받아들여야한다는 것만한 공포는 없을 것이다. 기실 앨리스가 겪는 불안과 공포에는 주체성의 차원을 넘어서 기억을 잃었을 때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느냐는 한층 더 진지한 물음이 들어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을, 또 그의 불안과 공포마저 특권화하려하면서 영화는 알츠하이머라는 소재가 갖는 이야기의 보편성에 대한 공감을 자꾸 뒤로 밀쳐놓게한다. 발병부터 투병과정 내내 내 삶의 주체성은 물론 정체성마저 의심하게한다는 점에서 육체가 아닌 정신을 무너뜨리는 질병이 불러올만한 사유와 고민마저도 누구나 똑같이 공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은 결국 질병 앞에 평등해지고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이 마지막에서도 볼 수 있듯 알츠하이머는 불치병이긴하지만 당장 시한부로 여생을 가시화하고 제한하지 않는대신 망각에 의한 정신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성격을 변질시킨다. 결핵이 나약하고 비극적인 수동성을 표상하고 암은 정념을 억압한 결과이며 에이즈가 비정상적 성행위에 대한 심판이라는, 손택이 말하는 '은유'는 결국 병이 아닌 환자를 향한 편견과 차별을 내포하는 우회적인 문학적 수사로서 그들을 비난하는 기능을 한다 (물론 나중에 손택은 이런 은유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전유한다). 그런 식의 비난과 경멸이 알츠하이머에도 가능할까. 의지나 행위와는 무관한 유전이라는 이름의 운명의 결과라는 점에서 환자를 비난하는 은유는 적용되기 힘들지도 모른다. 다만 손택의 은유가 알고보면 병 자체에 관한 은유가 아닌 것처럼, 내가 영화를 보면서 저건 새로운 은유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병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몰락을 육신의 몰락보다 더 안좋은 것으로 여기는 앨리스의 반응이었다. 과거만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재까지 삭제함으로써 삶 전체를 영도로 밀어넣는 알츠하이머를 바라보는 시선, 즉 신체활동이 일순간 정지함으로써 죽음을 맞는 대신 시간을 두고 서서히 정신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이전까지의 나와의 연속성을 잃고 낯설어져가는 환자를 바라보는 (환자 본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제대로 거동을 못하고 누군가의 수발을 받더라도 최후까지 지키고싶은, 가장 마지막 남은 한줌의 존엄인 명징한 정신과 마음마저 가져가버리는 이 질병은 그렇다면 한 개인에게 두번의 죽음을, 그리고 진정 가장 비참한 죽음을 가져오는건 아닐까. 내 병이 가족 친구 친지등 주변의 사람들에게 지우는 불안과 고통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쩌면 자신이 지금 죽어간다는 사실마저 인지하지못한 채 죽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니고 뭘까. 투병하는 현재마저 망각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죽음조차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갖지못하게 하는 질병. 그렇다. 앨리스가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은 결코 특정 개인이나 계층이 전유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지만 또한 동시에 모두 죽음 앞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싶어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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