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의 머릿속은 지금 너무 복잡하다. 과연 그날밤 일은 사고였을까? 아니면 자기같은 프로페셔널에 의한 고도의 계획적 살인이었을까? 이제 그는 왠지 수상스러워보이는 의뢰인의 아버지 (그러니까 작업대상)의 보험중개인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급기야 그의 집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의문은 조금씩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브레인은 이제 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과연 그의 의심은 맞는걸까? 그가 저지른 단 한가지 실수는 곁에 자신의 의심을 확인해줄 주변 사람이 전무하다는 것, 즉 그가 철저히 혼자였다는 것이다. 설사 그의 팀원들이 살아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그는 그 누구도 믿지않는, 철저히 혼자인 남자였으니까.

<conversation>의 홍콩식 리메이크쯤될까. 수사하는 자, 혹은 감시하는 자의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이야기. 이미 <conversation> 자체가 <blow up>의 할리우드적 변주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accident>까지 이 세편의 영화를 서로 찬찬히 대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듯하다. 첫번째 '작업'을 끝낸 다음 일상으로 복귀하는 고천락의 행적을 뒤쫓는 장면을 보고있으면 <conversation>의 진 핵크만을 떠올리지않기가 어렵다. 혼자서 음모론을 구상하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망연자실해하는 일련의 과정은 특유의 비약과 허장성세로 가득찬 홍콩식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미국이나 유럽의 작가주의 스릴러들을 떠올리게하고 특히 흡사 안토니오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마지막 엔딩 컷은 무척 인상적이다. 출연 배우가 적은 대신 그 모든 배우들이 비중은 적더라도 다들 자기만의 확실한 분량을 갖고서 서로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데 그래도 역시 두 주인공인 고천락과 임현제가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고천락은 <흑사회>연작에 버금갈 정도로 멋있게 나온다. '미친듯이' 영화를 빠르게 찍고 있는 배우인지라 그의 영화를 다 찾아보는건 애초에 힘들긴하지만 어쨌건 들쑥날쑥한 그의 필모중에서 내가 본 중엔 외모와 연기 모두 거의 최상의 수준을 보여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전언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다시금 곰곰이 되짚어보게한다. 그럼 지금 나와 당신의 관계는 그저 가까이 있기때문에 유지되는걸까. 질문을 바꿔보기. 그럼 나는 과연 진정으로 당신을 좋아하는걸까 아니면 매일 가까이 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좋아한다고 믿게된 것 뿐일까? 만약 한동안 떨어져있더라도, 그럼에도 계속 좋아하게될까?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그사람을 좋아하게된걸까? 이 질문들 앞에 영화의 여자주인공 펄도 쉽사리 대답하지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때부터 다녔던 병원 의사를 찾아가 묻는다. 나는 일찍이 당신과 우리 엄마가 서로 사랑했다는걸 알고있었요. 그런데 언제부터였나요? 그는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가까이 곁에 있다고해서 타인을 제대로 알리는 만무하고 저마다 나름의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의심하고 험담한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되 심리적으로 경계하고, 또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거리만큼 혹은 그 이상 더 심정적으로 가까워지지못해서 애를 태우기도한다. 친밀함이란 그래서 복합적이다. 몸의 친밀과 마음의 친밀, 그 상이한 거리간의 긴장이 나와 당신의 관계를 정한다.

차안, 엘리베이터, 식당, 사무실등 대부분의 이야기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실내극의 형태를 띠고있지만 사실 유심히 살펴보면 그 좁디좁은, 영어제목처럼 '밀실공포증'(claustrophobia)를 일으키게하는 좁은 실내와 실외 공간이 인물간의 관계와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아마 현대 생활에서 가장 좁은 실내 공간일 차안에서 시작한다. 카풀하는 다섯명의 직원들의 퇴근길에서 시작해 모두 내리고 남녀주인공 둘만 남는 첫번째 장으로부터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몇개의 챕터를 보여준다. 맨마지막 장, 첫번째 장으로부터 1년전으로 돌아간 영화는 좁은 실내가 아닌 탁트인 회사의 옥상에서 끝을 맺는다. 가장 친밀한 사적 공간일 차 안에서 시작해 옥상이라는 전면 개방된 공적 공간에서 처음으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여주며 끝나는 이야기.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운 차안에서 파국을 맞이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을 거슬러 마지막 옥상에서는 서로 안 지 얼마되지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눌때 가장 친밀해보이는 역설적 순간으로 바뀐다.

실내에서는 어색하기만하다가 비로소 바깥으로 나왔을때 허물없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친밀의 역설적 성격은 손님과 승객으로 처음 알게된 택시기사와 펄의 두번째 만남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반대로 사적 공간에서 늘 다투던 연인이 공적인 자리에서 타인들 앞에 애정을 과시하는 장면은 줄곧 tv와 영화에서 보아온 클리셰다. 또 숨겨왔던 애정 관계가 공적으로 밝혀진 이후에 감소하는 친밀감, 아니면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권태와 그 처방으로서의 전술적인 격리(separation)같은 뻔한 이야기들은 어떤가. 그렇다면 친밀함을 나와 당신 둘만의 온전한 심정적 거리를, 정념의 정도를 가리키는 지표라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지않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관계를 맺고있는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나 또다른 인간관계등 그들의 외부,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감정적 변곡선을 가리키는, 결코 단순히 두 개인 사이의 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않는 엄연한 사회(학)적 개념인 것이다. 구조와 개인 혹은 환경과 개인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표상하는 한가지 유용한 개념으로서의 친밀함, 기든스나 벡같은 사회학자들이 친밀함의 구조적 변동같은 것에 그토록 천착했던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친밀'이라는 원제에 엉뚱해보이게도 밀실공포증이라는 영어제목을 붙인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었을지 모르겠다.

사족. 시간을 점점 거슬러 올라가는 챕터 구성은 <박하사탕>에서도 볼 수 있긴한데, 뒤늦게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 있는 해롤드 핀터의 희곡 <배신>을 알게됐다. 영화버전을 보고나니 안서가 이 희곡에서 영향을 받은건 분명해보인다. 멜로드라마의 특성상 이러한 역순 구성은 파국과 이별에서 시작해 첫만남에서 끝이 나는 탓에 관계의 허망함, 피상성 그리고 인물들의 위선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내금연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세상에서 이제 흡연자들은 그렇게 건물 밖으로 아니 세상 밖으로 불가피하게 밀려나온다. 쾌적한 건물 안으로부터 시끄럽고 번잡한 거리로, 그건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치 현대 문명의 '바깥'에 처한 미개인의 처지로 몰린 흡연자에 대한 은유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한다. 너희 흡연자들은 당연히 이 '문명'안에 있어선 안돼. 너희들은 현대의 미개인이니까. 흡연을 위해 밖으로 나올때마다 이런 종류의 이물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랄까. 하는 일도 다르고 그전에는 서로 전혀 알지못하던 낯선 타인들이 흡연을 위해 한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들고 안면을 트고 잡담을 나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지명과 춘교도 그렇게 만난다. 이 영화는 불같은 연애의 한복판도, 지리한 권태도, 장황하거나 아니면 감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별도 아닌 연애의 시작점을 다룬다. 지명보다 연상인 춘교에겐 이미 5년째 같이 살고있는 애인이 있다. 이십대 시절에 숱하게 거쳤을 밀고당기기의 필요를 느끼지못하는 그녀는 보다 직접적이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관계의 이니셔티브를 선취한다. 서로의 담배불을 붙여주는 사이로 시작해 두사람은 담배를 매개로 관계를 확장해나가고 조금씩 천천히 연인으로서의 관계 전환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 )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던 생각은 이런 거였다. 같은 기호를 공유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 이상의 새로운 관계의 진전이 진정 가능한걸까? 그건 충분조건이 되는걸까? 그럼 같은 기호를 공유한다는건 도대체 뭘 의미하는걸까? 영화는 두사람을 포함해 주변의 인물들, 그러니까 다른 흡연 친구들이나 전 애인의 인터뷰를 중간중간 보여주는데 거기서 그들은 한결같이 내내 사랑의 불능성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려고하는 지명과 춘교 두사람 사이의 본래 스토리와는 정반대로 어긋나며 이탈하고있는 이 가짜 인터뷰들이야말로 팡호청이 진짜 하고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영화 말미 이제 두사람은 금연을 다짐하기에 이른다. 두사람을 만나게했던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했던 공통의 기호가 사라진 바로 이 시점에서 이들의 사랑은 진짜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두사람을 매개해왔던 바로 그것이 사라진 지금, 두 사람의 연애는 어떻게 될까?

 


허관영, 허관걸 두 동생이 모두 출연하지않는 허관문의 첫 연출작이자 두번째 80년대 연출작인 teppanyaki (철판소)는 그 제목과는 크게 상관없는 줄거리를 가지고있다. 그동안 그의 영화들이 특정 직업세계를 배경으로 개별 에피소드의 병렬적 모음이었던 반면 이 영화는 철판요리사인 주인공 허관문 개인의 직업과는 연관없는 '사적 모험'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허관걸의 노래로 시작하는 오프닝만 없는게 아니라 그동안 견지해온 허씨 형제 영화의 서사적 전통과도 일정부분 단절하고있는 것이다.

허관문이 처음 자신의 두 동생을 데리고 <귀마쌍성> (1974)를 만들었을때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지금처럼 번영하는 아시아의 금융허브 이전의 홍콩, 그러니까 대륙으로부터의 피난민 및 이주민과 영국인 그리고 그외 온갖 외지인이 끝없이 몰려들던 대륙끝에 위치한 자그마한 영국식민 도시에서 먹고살기위해 악다구니를 벌여야하는 노동계층들의 팍팍한 삶을 코미디로 위무하겠다는 목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토로부터 구분되는 광동어 영화의 독자성을 구현하겠다는 것일테다)는 그래서 당시 홍콩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돈과(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두기봉이 <탈명금>을 괜히 만든건 아니다.) 또 하나 당시 홍콩인들에게 익숙한 소재였던 도박을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귀마쌍성>의 히트 이후 계속된 삼형제의 합작은 그렇게 '서민'을 위로하는 포복절도의 코미디라는 목표를 단 한번도 놓지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허관영과 허관걸이 모두 빠져버린 이 영화에서 그리고 전성기였던 70년대를 보낸 후 80년대에 허관문은 비로소 처음으로 철저하게 한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있으니 <철판소>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다름 아닌 중년의 위기 바로 그것이다.

제법 유능한 철판요리사이기는하나 무서운 장인이 소유한 식당에서 그를 사장으로 모시고 집에서는 거기에 더해 장인만큼이나 악독한 그의 딸이자 부인 곁에서 한시도 편치않은 허관문은 식당에 찾아온 손님이자 연예인인 엽청문에게 몰래 연정을 품는다. 그리고 그 이후는 장인과 부인 몰래 어떻게든 외도에 성공하려 애쓰는 허관문식 코미디의 연속이다. 당시로선 동시대 영화였을 인디아나 존스 패러디를 보면 허관문의 코미디 감각이란 것이 얼마나 기민하고 또 영리한지를 다시금 확인하게된다.

결국 그의 외도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위기를 맞는듯하지만 어찌어찌해서 상황은 좀 이상하게 역전된다. 그가 직업과 가정 모두를 버리고 떠나자 그제야 장인과 부인은 그를 찾고 그는 결국 다시 가정과 일터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은 좀 괴이하다. 술에 취한채 집에 돌아온 그의 앞에서 장인과 부인은 싹싹 빌고 그렇게 허관문은 자신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드디어 승인받게된다. 뭔가 갈등이 끝을 맺긴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봉합된 균열. 과연 그의 가부장으로서의 앞날은 순탄할 것인가. 누구도 그렇다고 말하지못할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이야기의 틀, 즉 영리하고 잇속셈도 빠르지만 알고보면 허당인 허관문, 그와는 반대로 멍청하고 덜떨어진 허관영, 잘생기고 인기도 많고 무술까지 잘하는 허관걸 이렇게 삼형제가 좌충우돌하며 어떤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다는 식의 허씨 형제 코미디는 여기서 중년의 위기에 봉착한 한 남자의 딱한 사정을 늘어놓는 것으로 바뀐다. 이건 허관문 본인의 개인적 경험의 반영일까? 홍콩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홍콩 밖에서 주목을 받기시작한 80년대에 정작 허관문의 영화는 이렇게 낯설게 시작한다. 70년대 작업들에서만큼 크게 웃기는 대목도 적고 매너리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그 때, 70년대 그의 영화에서 넘쳐나던 긍정적 기운과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렇게 80년대 홍콩 영화계의 융성과 반비례하는 허관문 영화의 퇴조의 기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몇년 후 홍콩 영화계는 주성치라는 새로운 희극지왕을 얻게되나니 왕위계승이 얼마 남지않은 시점의 징후로서의 영화.

<일개자두적탄생>

세계가 주목하는 몇안되는 (한때는 유일했던) 홍콩의 영화작가 두기봉의 밀키웨이 이미지의 97년도 창립작품. 별볼일없는 홍콩의 건달들은 본토와 대만 둘 중 한곳으로 건너가 한탕할 계획을 세우고 영화는 그들의 두가지 선택을 모두 보여준다. 홍콩판 인생극장? (우연인지몰라도 비슷한 시기 기네스 팰트로의 <슬라이딩 도어즈>도 있었다.) 홍콩 반환시점인 97년에 만들어진, 홍콩에서 상상하는 중국과 대만에 대한 나른한 백일몽. 이건 홍콩 탈출에 대한 강박일까 아니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도저한 패배주의의 무의식적 표출일까? 두기봉과 위가휘의 밀키웨이 이미지는 그렇게 시작부터 징후적이었다.

 

<공주복수기>

설렁설렁 만든 것 같아도 그 안에 온갖 상징과 장치들이 해석을 기다리고있는 것이 바로 팡호청 영화의 특징이고 이 작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옛날 여자친구와 현재 여자친구가 의기투합해 한 남자에게 복수를 시도한다. 과연 여성간의 연대는 가능한 것일까? 인터넷에 누드사진이 올라 직장까지 잃은 영화 속 종흔동의 캐릭터가 몇년 뒤 그대로 그녀의 실제 현실이 됨으로써 이 영화의 다층성은 더 복잡해졌다.

 

<사대천왕>

미남배우 오언조의 무려 감독데뷔작. <스파이널탭>의 홍콩버전. 전부 서른줄을 넘긴 오언조와 그의 친구들은 뒤늦게 보이밴드를 결성해 데뷔한다. 홍콩쇼비즈니스 업계의 이면을 까발림과 동시에 연예인들의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노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의도는 어느 것 하나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신인 감독으로서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공식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그럭저럭 활용하고있다. 장학우, 양천화, 사정봉 등의 인터뷰 내용을 어디까지 사실로 볼 것이냐에 따라 영화의 스토리텔링과 영화 바깥의 사실간의 상호작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종무염>

밀키웨이 이후 두기봉의 필모에 대한 내 식대로의 평가는 이렇다. 최고 걸작은 단연 <흑사회>연작이고 가장 급진적이고 괴이한 작품은 무려 시체가 총을 쏘는 <진심영웅>이고 가장 돌발적인건 제목처럼 <비상돌연>이고 (영어제목이 expect the unexpected), 가장 폼을 많이 잡은건 <방축>이고 가장 실망스러웠던건 <복수>,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는 단연 <문작>이다. 그러나 가장 웃긴 두기봉 영화는 바로 <종무염>이다. 난 이 영화에서의 매염방만큼 익살맞은 여배우의 연기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영화로선 파격적일만큼 긴 러닝타임을 갖고있지만 (무려 120분을 상회한다.) 매염방과 장백지 정수문 세 여배우와 임설 등 조연들의 연기는 홍콩식 앙상블 연기의 어떤 경지를 시전한다.

 

호텔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그의 모습은 흡사 첩보원을 방불케한다. 엘레베이터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다른 층수를 누르고 본인이 내리기 전에는 그 위의 층 버튼을 누르는걸 잊지않는다. 혹여나 누구와도 시선을 부딪치지않으려 조심조심 그렇게 그는 콜걸이 기다리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일이 끝난 후 옷을 입고 떠나려는 그에게 갑자기 그녀가 도와달라고한다. 살짝 당황하던 그는 그 내용인즉슨 본토에서 와 광동어를 잘 알아듣지못하는 탓에 대신 휴대폰 심카드 충전을 도와달라는 부탁임을 알고는 안도한다. "난 또 당신을 구해달라는 말인 줄 알았잖아요" 요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는 자책과 함께 웃어넘기며 그는 그녀의 핸드폰을 손에 든다. 몇번의 입력실수가 이어지고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무미건조하기 짝이없던 섹스보다 오히려 이 짧은 찰나의 순간 두사람은 진정으로 가까워진듯 보인다. 그렇게 충전이 끝나고 그는 호텔방을 빠져나온다. 늘 일(?)을 해야하는 탓에 한번도 제대로 홍콩구경 한번 해보지못하고 초저녁 잠시 시간이 나면 늘 가곤했다는 호텔건너편 국수집에 그도 들러 고기국수를 사먹는다. 그는 어쩌면 그녀를, 그녀의 말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정말로 자신의 지금 처지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말하고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크리스마스엔 집에 누워 tv나 보는게 최고,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랬다. 일부러 크리스마스 정서와는 정반대에 있는 감옥영화 두편을 연달아봤다. 자끄 베케르의 <구멍>과 마이클 파스벤더가 나오는 스티브 맥퀸 감독의 <헝거>.

한 편은 탈옥영화이고 나머지 한 편은 감옥내 투쟁기인데 영화의 스타일만큼이나 감옥의 분위기도 확연히 대조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한 <헝거>에 나오는 북아일랜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재소자로부터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대우를 박탈한 잔인한 국가기계로서 극이 전개되면 될수록 관객인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면 <구멍>에 나오는 감옥은 주인공의 탈옥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아케이드 게임의 스테이지로서 맘껏 스릴을 선사했다. 마룻바닥을 파고 지하로 내려간다음 그 안에서 미로같은 터널을 지나 하수도관과 연결된 거대한 벽 앞에 부딪히자 다시 한번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며칠동안 벽을 뚫어서 외부와 연결되는 과정은 매 스테이지를 클리어해가며 진행되는 비디오 아케이드 게임을 연상케하고 자질구레한 살림살이와 다섯명이 어울리는 모습 속에 마치 다락방처럼 아늑한 분위기까지 나는 감방 내부, 그리고 교도소장과 교도관, 그리고 재소자 간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는 영화에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멍>은 지금 내가 보고있는 동세대의 현대 영화가 과연 무엇을 놓치고있는지(혹은 포기하고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했다. 며칠전 우연히 <본 얼티메이텀>을 다시 보게됐는데 초반 워털루 역에서의 추격씬을 보면 뉴욕 cia건물에서 그곳 상황을 일일이 보고받고있는 부국장이 이를테면 '빨리 저 전화 도청해봐' 혹은 '화면 확대해봐'같이 명령을 내리고 그 밑에 요원들이 키보드 몇번 두드려 명령을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저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위도와 경도까지 깔끔하게 처리된다. 한마디로 말해 요즘 나오는 스릴러가 재미없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저 컴퓨터의 존재다. 주인공이 기껏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란게 빠른 시간 내에 적의 컴퓨터에서 자료를 훔쳐내 복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대 영화의 주요 클리셰가 된지 오래. csi가 이런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컴퓨터가 중요한 일처리는 다하고 주인공들은 나중에 폼만 잡는게 바로 그것이다.(특히 마이애미) 컴퓨터는 빠르고 정확하다. 당연히 모든게 일사천리다보니 영화 속 캐릭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선이든 악이든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요컨대 현대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더이상 노동을 하지않는다. 노동이 배제된 영화, 그리고 그 징조를 지금 <아바타>같은 영화를 통해 선체험하고있다고 말한다해서 이게 오버일까. (이건 지금 이 포스팅에서 내가 말하려는 원래 의도와는 다른 층위의 얘기긴하다. <아바타>는 단순히 탈노동이 아니라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탈노동 혹은 무노동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조건을 생생하게 재현하기때문이다. 이걸 가능케하는 핵심은 탈현실이 아니라 초현실 아니면 무현실쯤 되려나.)그런 점에서 <구멍>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서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노동'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꿈쩍도 하지않고 버티고서서 찍어낸 일련의 육체의 움직임, 그러니까 주인공들이 쇳덩이로 마룻바닥과 벽을 뚫고 그러면서 생긴 돌덩이들을 자루에 쓸어담고 먼지를 닦아내는 이 모든 과정을 계속 봐야만한다. 그것도 무려 두번씩이나. 쇠줄로 창살과 문을 잘라내고는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작업이 계속될수록 얼굴과 옷은 엉망진창이 되어가며 심지어 돌덩이에 깔려 죽을뻔한 위기도 겪는다. 게다가 다섯명 중 이 무식하기 짝이없는 탈옥계획을 주도하는 이는 무려 오른손 엄지와 집게가 두마디씩이나 잘려있다! 아마도 평생을 이런 식으로 자기 손으로 뭔가를 부수고 깨나가며 살아왔음을 몸소 증명하는 이 남자가 그 손으로 벽을 부수고 모래시계를 만들고 해머대용으로 쓸 도구를 만들고 쇠막대를 구부려 열쇠를 만드는 장면은 영화에 숭고하기까지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쇼생크 탈출>의 줄거리를 주인공 팀 로빈스가 동료와 교도소장을 이십년동안 이리저리 속이면서 야금야금 벽을 뚫어 탈출한 얘기라고 정리한다면 <구멍>은 "도대체 그 벽은 어떻게 뚫은건데?"라는 질문에 답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탈옥의 과정을 밀도있게 묘사해냈음에도 결말에 이르러서는 탈옥에 성공하기위해서 진정 뭐가 제일 중요한지에 대해 얼음장처럼 시니컬하게 대꾸하는걸 보면 이 영화가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의 것임을 확인케한다.

이 영화의 감옥이 꽤나 자유스러워보여서 현실적인 느낌은 덜하다고 말했는데 알고보니 장 피에르 멜빌이 지은 스튜디오에서 촬영한거라고한다. <구멍>이후에 나온 멜빌의 영화들도 이 영화처럼 노동을 재현하는데 힘쓰고있다는 점이 특기할말하다.  

발표된 시공간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헝거>와 <구멍>이 공유하는, 아니 모든 감옥영화들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이라면 자유를 포함한 일체의 권리가 박탈당한 그 험악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만을 믿고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고 의지한다는 점일텐데 <헝거>의 재소자들은 감옥, 그리고 넓게는 국가에 저항하기위해 세수를 포함한 일체의 씻기와 이발 그리고 심지어 옷마저 거부한채 자신들의 육신 자체를 인질삼아 저항을 계속한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 전개를 거부하는 좀 이상한 스토리 진행구조를 갖고있다. 대사 몇마디없다가 급기야는 중간에 죽고마는 어느 교도관의 아침출근 준비로 영화를 시작하고(당연히 사전 정보없는 관객으로서는 이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된다.) 진짜 주인공이 어쩌다 이곳 감옥에 들어오게됐는지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않으며 영화가 중반도 한참 넘어선 다음에야 비로소 단식투쟁이 시작된다. 마치 시즌제 드라마에서 초기 몇편을 뚝 떼어놓고 중간쯤부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를 재편집한 꼴이라고할까. 따라서 마이클 파스벤더의 숨막히는 단식투쟁 과정과 앙상한 육신의 비주얼이 압도적이긴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시작하는 부분은 주인공 바비가 단식투쟁의 명분을 대외에 알리기위해 평소 알고지내던 가톨릭 신부와 면회하는 장면부터인데 장장 십분동안 단 한번의 편집도 없이 전개되는 두사람의 길고 긴 대화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수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도 모배우가 이십여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줄이면서 루게릭병환자 연기를 했다고해서 화제였는데 <헝거>를 보고있으면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식욕을 참아가며 살을 뺀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잘 알지만 그럼에도 감량자체가 중요한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헝거>에서 마이클 파스벤더는 말그대로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식사는 커녕 제대로 서있을 수 조차 없고 욕창은 나을 기미가 없고 급기야는 몸 위로 이불조차 제대로 덮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지금 내가 보고있는게 극영화인지 스너프필름인지 헷갈릴 지경인데 이 영화 자체가 또 하나의 연장된 투쟁의 도구인게 아닐까라는 의심 혹은 강한 확신을 들게한다. 무릇 배우는 자신의 육체를 마음대로 부릴줄 알아야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배우도 자신의 육신을 자의대로 컨트롤해내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파스벤더를 포함해 재소자로 나오는 모든 배우들은 아예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카메라 앞에서 포기해버린다. 그러자 이들의 육신은 영화 안에서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질감을 얻는데 성공한다. 얼굴의 멍자국, 말라붙은 피, 음영이 드리운 근육, 푸석한 피부, 아무렇게나 짤린 듬성듬성한 머리칼까지. 상황이 이렇게되자 고문을 당하고 강제로 샤워를 당하는 동안 발악하고 기절하는 그들의 육체는 이제 더이상 본인의 것이 아닌게 되어버린다. 영화의 역사에서 배우의 육체를 훈육하고 고문하는 수난극은 짧지않은 계보를 가지고있는데 이 영화는 육체의 수난이란 것이 영화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결코 소비되고 현시되는 물건으로서의 전시품이 아니라 분명히 또다른 대사이자 나레이션이며 그 자체로 주인공인 그런 육체, 문자 그대로 '저항하는 육체'를 매우 강성한 어조로 생생하게 현시하고 표상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대사가 많지않음에도 이만큼 선동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저녁엔 <500일의 섬머>를 두번째 봤다. 국내개봉이 예정되어있고 미국에서의 반응이 좋아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국내에도 이 영화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던데 영화 속 섬머를 두고 나레이션이 하는 말처럼 내가 보기에는 just a movie였다.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섬머가 아니라 톰이고 섬머는 영화내내 하나의 대상으로서 타자화되어있다. 그녀의 내면이나 속내를 파악할 길은 없고 그저 500일동안 톰이라는 남자가 어떻게 혼자 북치고 장구치면서 자기만의 판타지를 만들고 또 허물어가는지 지켜본다. 어렸을적 <졸업>을 본 이후 운명적인 사랑의 신봉자가 된 그는 어느날 사장의 새 비서로 고용된 섬머를 보고는 바로 저 여자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고는 연애를 시작하지만 결국 헤어지고만다는게 기본 줄거리. 18세기 이래로 지속되어온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인 하늘이 정해준 단 하나의 연인이라는 로맨티시즘을 견지하는 톰은 섬머와의 이별을 통해서 간신히 그 개념을 버리는가싶은 반면, 오히려 그것에 회의적이었던 섬머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되면서 '운명적 사랑'의 신봉자로 거듭남으로써 톰의 너무 늦은 사춘기가 일단락짓는걸로 영화가 끝나는가 싶지만 에필로그에 오면서 모든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 영화를 내가 아는 몇몇 지인들에게 추천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 영화에서 단순한 레퍼런스 이상으로 기능하는 미국 대중문화, 특히 영미권 팝음악과 영화 <졸업>의 의미 때문에 선뜻 추천이 꺼려졌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노래와 뮤지션이 각 장면에서 갖는 의미와 미국인들에게 <졸업>이란 영화가 갖는 상징성을 사전에 알지못한다면 이 영화를 어쩌면 반도 이해못한거라 할 수 있기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실로 저열한 취향을 갖고있는 내 주위의 어떤 이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다고 치자. 톰과 그의 친구 매켄지 그리고 섬머가 대화를 하는가운데 섬머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이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좋아한다고 하고나서 잠시 뒤에 화면이 바뀌면 매켄지가 술에 취해 가라오케 기계를 붙잡고 born to run을 부르고, 그리고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듯 톰이 픽시스의 here comes your man을 부르고, 스미스의 there is a light never goes out과 please please please, 아니 그 이전에 스미스라는 밴드의 특징 그리고 톰이 조이 디비전의 <unknown pleasures>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우울한 영국팝을 여전히 사랑하고있음을 보여준다든지 하는걸(그리고 무엇보다 패트릭 스웨이지의 she's like the wind가 있다.!) 내가 계속 옆에서 말해준다면 과연 그 저열한 취향의 소유자는 가만있을까. 시끄럽다면서 나보고 짜증을 내거나 영화관람을 중간에 그만두고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강변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혀.

심야에는 ebs에서 앨버트 피니가 스크루지로 나오는 70년작 <크리스마스 캐롤>을 해줬다. 근대 잉글랜드(그러니까 빅토리아시대 정도쯤)를 배경으로한 사극을 볼때마다 특히 bbc에서 만든 드라마들을 볼때마다 실로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데 도대체 그 실체가 뭘까하고 생각해봤다. 조선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볼때는 그렇지않은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앨버트 피니도 참 장수하는 배우구나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천연덕스럽게 자국리그 우승팀을 월드챔피언으로 호명하는 미국 야구의 명성을 유지시키는 선수공급처 중 한 곳이다. 알버트 푸홀스나 매니 라미레즈 같은 슬러거들도 유명하지만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2009년 기아 타이거스를 우승으로 이끈) 아킬라노 로페스같은 파이어볼러를 배출하면서 "도미니카에서는 말도 배우기전에 공부터 잡는다"는 속설을 왠지 사실로 믿고싶게끔 할만큼 휼륭한 투수들을 배출해내고있다.

라이언 플렉과 안나 보든의 신작 <슈거>의 주인공 미구엘 '슈거' 산토스도 그런 도미니카 공화국의 젊은 투수 유망주 중 한 명이다. 캔사스 시티 로얄스가 도미니카 현지에 운영하는 야구 아카데미에 소속되어있던 산토스는 아이오와의 싱글 A로 승격되어 그토록 고대하던 미국땅을 밟게된다. 데뷔하자마자 빠른 강속구로 인정을 받지만 타지생활의 외로움과 언어불통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미숙함등이 겹치면서 점차 피칭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미국의 메이저리그 무대는 잘 짜인 고도의 피라미드 건축물에 가깝다. 루키리그부터 시작해서 싱글, 더블 트리플 에이로 이어지는 팜시스템은 빅리그라는 화려한 무대를 유지하기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인력시장이자 말 그대로 질좋은 농장(farm)이라 할 수 있다. 상품의 질에 따라 개별 농산물이 판매되는 장소가 천차만별이듯 마이너리그에서 빅리그로 '콜업'되는 선수들은 소수이고 대개 자신의 모든 선수 경력을 그곳에서 마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대부분의 중남미 선수들의 목표는 그래서 메이저 콜업이다.

승자가 아닌 패자를 다루는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따라 산토스가 실패하고 절망하는 결말을 택하는 우를 범하는대신 현명하게도 영화는 산토스가 미국의 심장부이자 미국 야구의 핵심지역중 하나인 뉴욕에서 자신이 가깝게 느끼는 유색인종 커뮤니티에 자연스레 편입되어가는 매우 자연스럽고 리얼한 결말을 제시한다. 더이상 직업으로서 야구를 하지않지만 그대신 그는 치열한 승자독식주의의 피라미드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즉 빅리그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둔 사람들과 함께 마운드를 벗어나 실제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렇다. 애초부터 이 영화는 야구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스튜어트 홀은 이민자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일차적으로는 학술적이고 또 다소간 은유적이지만 그 언설 안에는 신산한 이민자의 삶과 정처없이 유랑하는 이산의 운명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이민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차지했던 지위를 타향에서 유지할 수 없다. 새로운 공간적 경계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불안정한 정치적 법적 지위를 감내하면서 그들은 어떻게든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려 애쓰지만 언제나 모든 것은 유동적이고 아슬아슬하다. 디아스포라를 얘기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현재 상황을 만든 역사나 배경만은 아니다. 현재 그들의 이산이 어떠한 모양새를 하고있느냐야말로 더 중요한 지점인 것이다. LA의 코리아타운,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 대학로의 필리핀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과연 지금 그들의 고향에서 살고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민족성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까. 그렇지않다면 그들은 어떻게 살고있을까. 좀더 높은 임금을 찾아,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국경을 넘은 소수자이자 이주노동자는 토착 주류세력과의 긴장속에서 나름의 순응전략을 선택하게되고 그 결과 본래의 것과는 뭔가 조금 다른 민족문화와 의례 형식 그리고 내용으로 나타날 것이다. <슈거>는 새로운 공동체에 편입되는 딱 그 지점까지만을 보여준다. 이제 산토스의 신분은 합법적 이주노동자에서 불법체류자로 바뀌었다. 앞으로 그는 어떤 삶을 살게되는걸까?


1968년, 영국프로축구 2부리그 최하위를 달리던 더비카운티의 새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이언 클러프는 리그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킴은 물론, 71-72시즌에는 급기야 1부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보드진과의 불화 끝에 라이벌인 리즈 유나이티드로 옮긴다. 그러나 시즌 개막후 충격의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끝에 단 44일만에 감독직에서 해임된다.

위대한 영국인 축구감독 중 한 명인 브라이언 클러프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겪은 44일을 사실과 픽션을 섞어 구성한 데이비드 피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the damned united>는 또 한편의 영국산 축구 영화이지만 피치 위가 아닌 터널 뒤의 또 다른 전쟁을 조명한다.

화려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뒤에서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감독과 보드진간의 갈등, 감독과 선수간의 불화, 그리고 라이벌간의 경쟁까지 여러 층위의 갈등이 겹쳐지고 이 알력다툼 속에서 클러프는 결국 홀로 남겨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무시한(혹은 그랬다고 굳게 믿는)리즈의 감독 돈 레비를 향한 막연하고 원초적인 적의가 그를 위태롭게 만든 주범이다. 국가대표팀으로 옮기면서 클럽을 떠났다고는하지만 리즈 유나이티드는 여전히 레비의 소유물이다시피한데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않은 라이벌 팀으로 옮겼으니 클러프로서는 제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격이다. 입심좋고 영리하며 유능하지만 그 능력 이상만큼의 야망을 품은 독불장군 클러프는 그렇게 값비싼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겨우 현실감각을 되찾는다.(그리고 그의 진정 위대한 업적은 사실 이 이후에 이루어진다.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 재임기간동안 만들어진 47경기 연속 무패기록은 훗날 아스날에 의해 깨지지만 지금의 챔피언스리그격인 유로피언 컵 2연패는 지금껏 그 어느 팀도 깨지못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맡기도했다.) 

원작은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기록과 사실에만 기반하지않고 당시의 소문들, 관련된 이들의 의견 그리고 무엇보다 클러프라는 캐릭터를 무척 입체적으로 그려냈는데(아직 읽어보지못했고 기사에 따르면 그렇다고한다.) '실화 중독자' 피터 모건은 영욕이 확연히 대비되는 68년 더비카운티 시절과 74년 리즈에서의 44일이라는 두개의 시간대를 시종일관 교차함으로써 이야기에 탄성을 부과하며 논픽션을 픽션화해내는데 성공하고있다. 이미 시작과 끝을 다 알고있는 이야기임에도 두 시간대의 극명한 이야기 대조가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게만드는 것이다.

마이클 쉰의 연기는 리차드 프로스트와 토니 블레어 그리고 이번에 브라이언 클러프까지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인물들임에도 서로 어느 정도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이게 피터 모건과의 합작 때만 그런건지 잘 모르겠다.(모건과 함께하지않은 쉰의 출연작을 아직 본 적이 없으므로.)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속으로는 원대한 야망을 갖고있는 불같은 성격의 이상주의자로서의 실존인물 연기라는, 결코 흔치않은 독창적이고 꽤나 도전적인 자신만의 연기 영역을 스스로 개척한 셈이다.

시장에 걸린 판돈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는만큼 요즘보다 과거의 축구계가 더 관대했노라고 그동안 막연히 짐작했지만 클러프의 44일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의 차원을 떠나 맹목적인 승부 집착으로 축구판이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겠구나라는 인식교정과 함께 자연스레 지난 08-09시즌 초반의 토트넘과 후안데 라모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나를 비롯한 안티토트넘팬들은 라모스를 내쫓기위해 토트넘 선수들이 의기투합한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들을 놀려댔는데 영화에서 리즈 선수들이 구단주에게 클러프를 씹어대는 장면을 보고있자니 어쩌면 그때 우리가 떠든게 괜한 유머나 음모론만은 아니겠구나싶었다.

사실 이 영화는 경기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경기 전후의 라커룸이나 경기시작전 터널 안까지만 보여주고 가장 궁금한 경기결과는 자막처리하거나, 당시 자료화면과 배우들의 연기를 포레스트 검프식으로 합성해 후딱 지나가버린다. 

지난 한 주동안 <야구란 무엇인가>와 <머니볼>을 읽으면서, 또 지난 몇년간 지치지않고 아스날 팬질을 하는동안 천문학적 판돈이 걸린 거대스포츠시장에서 성공과 실패의 성과는 결코 어느 한두가지의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했다. 사실 그전까지 스포츠에 철저하게 무지했던 시절에는 아무리 그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해도 역시 스포츠는 두뇌보다는 어디까지나 육체와 육체의 물리적인 충돌이며 최종 심급에서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거기에 더해지는 약간의 운이었노라고 넘겨짚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피터 모건도 스포츠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클러프의 실패일지 명세서를 복기하면서 스포츠 기자나 감독같은 업계종사자의 시각보다는 여전한 실화중독자로서의 면모와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하는데 매진하고있다. <더 퀸>과<프로스트/닉슨>의 작가 아니랄까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않는 두 중심인물간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고(꽤 영국적인 방식) 경쟁자를 향한 적개심을 연료로 삼아 주인공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또 한편의 살리에리 증후군 영화처럼 만들었다. 원작소설의 관점이 크게 다르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클러프의 실패원인은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을게다. 일단 44일이란 기간은 적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 아닌가. 두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쓴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긴하지만 그래도 매작품마다 이렇듯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고있는 피터 모건의 극작술은 (파트너인 마이클 쉰처럼)연출자보다는 작가인 자신을 훨씬 도드라지게한다.(스티븐 프리어즈와 론 하워드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려는건 아니다.) 마치 "이거 내가 쓴 시나리오야'라며 낙관을 떡하니 찍는듯한 레비와 클러프의 마지막 tv토크쇼 장면이라니.

마지막으로 딴소리 한마디, 당시의 리즈 유나이티드는 사실상 돈 레비의 수렴청정이 여전히 진행중인 클럽이었다. 이적하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해도 동료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운 이가 맡았던 클럽으로 향하는 그 심정이 나로서는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클러프의 행보를 최근시점으로 끌어와 비유하자면 2000년대 초반 리그 자체를 양분했던 벵거와 퍼거슨이, 혹은 05-06시즌 무리뉴와 퍼거슨이 당시 최대라이벌이었던 상대방 클럽으로 이적하는 정도 되려나.

영화의 제목을 세심히 봐야한다. two lovers는 두쌍의 연인이 아니라 영화 속 남자주인공 레너드가 사랑하는 두 명의 연인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그 흔하디흔한 삼각관계 연애담인건가하면 그렇지는않다. 이 두 명의 여인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그저 두 여자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며 저울질하기바쁜 남자 주인공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요샛말로 고도의 어장관리중인 바람둥이의 얄팍한 연애 어드벤처? 그러나 또 그렇지만도 않다. 영화속 'two lovers'는 곧 'two worlds'인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레너드는 한겨울 강물에 뛰어든다. 사람들이 겨우 구해내고 정신을 차리자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누군가 저사람 일부러 뛰어들었다고하자 내가 언제 그랬냐며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아버지의 세탁소에서 일하며 부모와 함께 뉴욕의 아파트에서 살고있는 레너드는 한마디로 정신이 불안정한 남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자신의 결함때문에 약혼이 파경을 맞은 후 곧바로 자살을 기도했던 전력까지있다고하지만 왠지 이 모든 설명에 그다지 믿음은 가지않는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같은 시기에 두 여인이 다가온다. 아버지의 세탁소를 (거창하게 말해서) 인수 및 합병하려는 인근의 대형 세탁소 체인점 오너의 딸 산드라와 자신과 같은 아파트 건물에서 홀로 살고있는 매력적인 금발 여인 미셸이 그들이다. 두 여인 모두 그에게 호감을 갖고있고 레너드는 두사람을 만나면서 실로 간만에 행복을 느끼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는가운데 두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결단의 시간이 다가온다.

레너드는 미성숙한 청년이다. 흡사 10대 청소년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어지러운 방안의 풍경과 즉흥적이고 기복이 심한 감정변화는 그가 정상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기가 쉽지않음을 보여준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있는 것이(아마도 전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라는 설정 역시 그가 논리나 이해보다는 즉물적인 것에 더 친화적임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두 여인의 존재는 레너드의 향후 인생의 진로에 대한 선택지를 은유하는데 철저히 부모님과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 위치하는 산드라와 우연이긴하지만 레너드가 한명의 개인으로서 주체적으로 관계를 맺은 미셸의 등장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산드라와는 주로 레너드(가 아닌 그의 부모)의 집이나 그녀의 집에서 만나는데 반해 애니와는 나이트 클럽이나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아파트 옥상에서 주로 대화를 나눈다. 레너드는 산드라의 다정다감함을 좋아하지만 그러면서도 상사와 불륜을 맺고있는 미셸을 단호히 거부하지도못한채 점차 혼란스러워하는데 산드라가 선물한 장갑을 낀 손으로 미셸과 통화하는 장면은 이 혼돈의 절정을 표현한다. 

미셸이 상사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레너드와 미셸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로하지만 동시에 산드라의 아버지 마이클은 산드라의 행복을 위해 레너드에게 두사람의 결혼을 권유함과 동시에 자신의 사업체 양도를 제안한다. 유사 이래 모든 로맨스의 남자주인공들(특히 우리나라 주말연속극의 남자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누구와 짝을 맺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어떤 인생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로 수렴한다. 그렇다면 이 닳고닳은 레퍼토리를 그 수많은 레퍼런스들로부터 구분하게하는건 남자주인공 캐릭터의 변별력일 터인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영리하게 계산되어있다. 위장된 로맨스 서사 아래 제임스 그레이는 기실 레너드라는 남자가 도저히 벗어나지못하는 그 무엇(운명이라는 단어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섣불리 쓰기가 꺼려진다.)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영화가 그려내는건 로맨스가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바꿀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래서 철저하게 종속되는 개인인 것이다. 지금까지 일관되게 천착해온 범죄 스릴러 장르를 버린 제임스 그레이의 급격(혹은 과격)한 선회에 과한 비중을 두는 반응은 그래서 오진이다. 이전까지도 그레이의 영화에선 범죄보다 가족이 우선이었고 기실 그것이 그를 장르 감독으로 분류할 수 없게한다.(정말 그랬다면 그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그토록 번번이 초대를 받지는 못했으리라.) 러시아 마피아건 아니면 뉴욕시 경찰이건 면면히 내려오는 핏줄의 점성과 가족사로부터 벗어나지못한채 다시금 깊이 얽매이고마는 개인의 거대 서사로의 회귀야말로 제임스 그레이의 전매 특허가 아니던가. <two lovers>또한 (역시 그의 모든 주인공들처럼)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못하고있다. 

레너드는 한시도 부모의 눈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시에 가까운)로부터 벗어지못한다. 어머니는 방문 밖에서 아들의 전화통화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사소한 행동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않는다. 안그래도 자그마한 레너드의 아파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파티를 하면서 더욱 비좁아 보이는데 그 안에서 어디 한 곳 시선 둘 데가 없어 당황하는 레너드의 표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폭발하기 일보직전처럼 보인다. 이 지점까지오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레너드가 미셸과 떠난다는건 온전한 그의 독립을, 산드라와 결혼하는 것은 지금의 가족으로도 모자라 더 큰 가족으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세탁소라는건 예나 지금이나 일종의 가내수공업이라는 점 또한 빼놓으면 안되겠다. 

어찌보면 너무나 단순명쾌해보이는 이 간단한 도식을 두고 제임스 그레이는 뻔한 통속 로맨스가 아니라 흡사 유럽의 아트하우스 무비처럼 보이게하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곳 뉴욕엔 이미 실패한 연애를 그리는데 도통한 작가가 한 둘이 아니다. 유럽에서 꾸준히 관심을 받고있는 미국 작가주의 감독은  전형적 미드식 로맨틱 코미디의 홈그라운드 뉴욕을 마치 6,70년대 모더니즘 영화 속 유럽의 도시처럼 탈바꿈시키려고한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간이 물리(그리고 물질)적으로도 부모에 종속되어있는 모습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자신의 행적은 물론이고 속내까지도 숨기거나 속일 수 없는 비좁고 어두운 아파트를 보고있으면  그가 같은 뉴욕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인테리어>나 <9월>같은 고전적 실내극 연출가로서의 우디 앨런이나 존 카사베츠(혹은 다른 뉴욕 토박이 작가들 전부)에 빚지고있음을 짐작케한다. 

피닉스는 십여년간 이어온 제임스 그레이와의 파트너쉽의 결실을 비로소 맺고있다. 그 어느때보다 차분한 그는 자신이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주연급 배우와는 차별화된 연기 영역을 갖고있는 배우임을 온전히 증명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향후 배우생활을 이어감에 있어 이러한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받쳐줄 그레이같은 연출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자벨라 로셀리니는 젊은 시절과는 확연하게 인상이 달라졌는데 곱게 나이를 드셨다는 표현 외에는 다른 표현이 잘 생각이 안날 정도로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원숙하게 연기한다. 아들에 대한 굳건한 사랑과 이것이 과잉보호로 보이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그녀의 표정과 연기는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장면,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레너드를 보고있자니 그레이가 무척 잔인해보인다. 낭만주의에 기반한 서사적 로맨스의 환상이란게 대개는 이렇듯 철저한 자기 기만에 기반한 실체없는 무엇일지 모른다는 속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화법이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결혼은 어쩌면 차선일지 모른다는 냉소? 잔인하지만 무릇 대개의 사실이란게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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