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헤이세이 원년에 모리타 요시미츠는 <사랑과 헤이세이 플레이보이>를 내놓았다. 주인공 캐릭터보다 더한 바람둥이의 삶을 실제로 살고있었던 이시다 준이치라는 배우를 기용한 그 영화에는 전문직 독신남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80년대 버블 경제 시기, 총사회의 유한계급스러운 분위기 속에 구현되고 있었다. 그 영화와 비교해봄직한 2014년작 <니시노 유키히코의 사랑과 모험>도 다케노우치 유타카의 매력을 극대화한 영화다. 그말고 다른 어떤 남자배우가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영화 속에서 그는 유연하게 여성들을 쥐락펴락하는 플레이보이를 연기한다. 니시노 유키히코는 오는 여자 막지않고 가는 여자도 붙잡는 타입의 바람둥이다. 하지만 <헤이세이 플레이보이>의 주인공이 낮에는 치과의사로, 밤에는 클럽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주체하지못하는 척하면서 별다른 고민없이 피상적인 관계를 허겁지겁 갈아치우고있다면, 하나같이 죽자사자 매달리는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니시노 유키히코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니시노는 철저하게 객체로만 그려지고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와 숨겨두었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도록하는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어떤 욕망과 본심을 가지고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 모른다. 유의할 것은 바로 이 영화의 액자식 구조. 어린 미나미와 나츠미 모녀와 니시노가 만나는 첫번째 씬 이후, 사춘기가 된 미나미 앞에 니시노가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 그 다음 둘은 장례식이 열리는 니시노의 본가로 향하는데 그곳은 중반 이후 영화의 거의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 도쿄에 위치한 아파트와는 대비되는 대저택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아니라 그곳에서 우연히 미나미가 만난 사람. 그곳에서 미나미는 조문을 온 사유리라는 여인으로부터 니시노의 연애담을 듣게 된다. 그런데 같이 장례식장까지 왔건만 도착 이후부터 니시노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고 혼자가 된 미나미는 니시노 본인이 아닌 사유리로부터 그녀 자신을 포함해 니시노가 거쳐간 여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니시노의 종적에 대해서 미나미가 하나도 의문을 품지않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그 이야기를 다 듣고나면 다시 맨 처음에 나왔던 해변의 카페에서 미나미와 나츠미 그리고 니시노가 오랜만에 재회를 한다. 이렇게 보면 크게 이 영화가 사유리의 회고를 중간에 놓고 앞뒤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3막 구성임을 알 수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는 (유령일지언정 어쨌든) 니시노가 실제 나타나지만 중간의 회고에서는 이야기속 인물로 니시노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혹시 사유리로부터 전해들은 니시노의 그 모든 이야기가 실은 전부 거짓은 아닐까. 니시노가 직접 전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못했던 이야기를 사유리가 대신 전하는건 아닐까. 사유리와 미나미의 첫만남, 그리고 이후 니시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다소 급하게 전개된다는 것, 또 사유리의 이야기대로라면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연적관계인 마나미와 카노코, 타마와 스바루가 정작 장례식장에서는 친밀해보인다는 점은 이런 의심을 더하게 한다. 한마디로 사유리는 '미덥지못한 화자(unreliable narrator)'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회상이 정말 전부 거짓이라면 사유리의 의도는 뭘까.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함으로써, 혹은 니시노의 부탁을 받고 그가 하고싶었던 가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그렇게 사후일지라도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시노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유리의 회고를 전부 괄호친 다음 그녀의 이야기가 아닌 일반적인 3인칭 시점에서 니시노가 자신의 속내를 직접 밝힌 거의 유일한 대목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는 첫번째 카페 장면이다. 거기서 그는 나도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해서 딸을 낳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나츠미는 단번에 불가능하다고 단정해버린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나츠미만이 니시노의 인생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또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을 무심히 발설한다. 앞의 그 대목에서 그녀는 당신은 여자들의 욕망에 전부 반응하려한다며 니시노의 삶을 진단하더니 마지막에는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대사를 하는데 미나미에게 하는 코이(恋)와 아이(愛)는 다르다는 말이 그것이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코이는 연애, 아이는 사랑이라고 하면 적당할까(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으로 번역됐다). 이 대사의 앞뒤를 되짚어보면 나츠미는 자신에게 니시노는 '첫번째 연애'였지만 연애란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미나미를 낳은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제일 중요했다고 말한다. 둘의 차이가 미묘한 탓에 정확히 이해되지않지만 나츠미의 저 두 개의 대사로 미루어보면 '코이'와 '아이'를 각각 남녀 사이의 에로스에 기반한 '연정'과, 헌신과 애착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사랑 정도로 쓰고있는듯 보인다. 즉 남녀간의 이성애에 기반한 정념은 일시적이지만 자신은 그 대신 핏줄로 이어진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 헌신과 애착이라는 더 영원한 것을 택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모든 여성들의 욕망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애쓰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도 한 여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싶었던, 즉 코이가 아닌 아이를 원했던 니시노의 좌충우돌하는 연애담과 얼핏 허무하게 보이기까지하는 죽음은 그의 삶에 대한 우회적 조롱 내지는 냉소로 보인다. 어떤 식으로든 끝날 수 밖에 없는 코이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조금은 우스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한 남자와 그와의 코이를 과감히 끝내고 아이를 택한 여자,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인 또다른 한 어린 여자가 니시노와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는 세 인물들이 각자 느끼는 깨달음과 미련과 후회가 미묘하게 교차한다. 그런데 저들 중 나츠미의 말을 듣고 난 뒤 눈물을 흘리는 미나미를 보면 그녀 역시도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코이를 선택할 것임을, 아니 어쩌면 이미 선택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듯하다.


단정하고 깔끔한 화면과 함께 제목에서 연상되는 귀여운 연애담인척하는 영화는 그러나 이렇게보면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원작자와 감독 모두 여성이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점에 초점을 맞춘 진정한 의미의 여성영화"라는 글을 봤다. '진정한 여성 영화'란 (그런 게 진정 있다면) 과연 어떤 영화일까. 거칠게 말해 가부장제나 성차별을 비판하며 여성들의 독립적 가치관과 주체성을 재현하려는 정치적 태도와 입장을 표명하거나, 또는 성정치는 크게 의식하지않지만 여성의 실제적 욕망과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서사로 나누어진다면(물론 이 둘은 구분이 되지않는 경우가 많을테지만) 이 영화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않는듯하다. 한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여성 등장인물들의 욕망은 실현되지않고 남성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은 뭔지도 제대로 알지못한채 여성들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어처구니없이 죽고만다. 여성 캐릭터중 니시노와 진정 연애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녀들은 니시노에게 하나같이 맹목적으로 매달리지만 그렇게되기까지의 과정과 마음의 변화같은 것은 잘 보이지않고 그저 빠르게 등장했다가 다음 인물의 등장을 위해 빨리 퇴장한다. 그렇게 다소 소모적으로 기능하는 캐릭터들이 계속 스쳐지나가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양 속에 영화는 결국 코이에 앞서는 아이를, 연애의 불모성을 역설한다. 이쯤되면 반로맨틱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야하는거 아닐까. 


사족. 하스미 시게히코가 2014년 베스트 텐에 올린 세 편의 일본영화 중 한편으로(나머지 둘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세븐스 코드>와 만다 쿠니토시의 <독스 웨이>) 어딘가에 직접 평도 썼다는데 찾지를 못했다. 한번 읽어보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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