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기밀당안(1993)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막나가는, 일부러 갈데까지 가보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악취미의 영화를 봤다. 노약자는 보호된다는 일반적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일부러 잔인하게 어린 아이를 죽이고, 죽고난 뒤의 장면을 보여주는. 
 
혈세홍화정(1990)
미리 탄환을 몰래 빼놓은 줄도 모르고 그 빈 총을 겨눴다가 기만 당했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사망하는 장면은 3년 뒤에 나온 <칼리토>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의식을 했을까 아닐까.

다동과 치쿠와(1998)
이치카와 준 감독의 전작 관람을 완료했다. 전작들과는 물론이고 전체 필모에서도 단연 튀는 작품임은 확실하다.  
 
도쿄남매(1995)
이번에 다시 보면서 생각해본 건 맨마지막 장면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을 등진 듯한 격조한 집을 벗어나겠다는 오빠의 그 선택에 대하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배용균 감독 작품 두 편. 유튜브 덕에 보게 됐는데 후자의 경우, 당시의 동시대 세계 예술영화의 자장 안에 오롯이 위치지어지는 일편이었다. 
 
메모리(2023)/선다운(2021) 
미첼 프랑코 감독의 영화 두 편. 전자를 먼저 본 뒤에 감독에 흥미가 생겨 후자를 찾아봤는데 훨씬 인상깊었다. 
 
마테이 사건(1972)/살바토레 줄리아노(1960)
프란체스코 로시 영화 두 편. 주연 배우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전적으로 의지해 끌고가는 서사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낮은 목소리3: 숨결(1999)

어느 책에서 위안부 할머니와 청각장애인 딸의 대화 장면에 관한 설명을 보고서 찾아봤는데, 직접 보니 단연 가장 인상깊은 대목이자 하이라이트였다.   
 
cloud(2024)
구로사와 기요시의 본작에서의 목표는 일본 영화에서 총격전을 한번 제대로 연출해보겠다는 야심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예의 그렇듯'정상'으로부터 살짝 빗겨난 낯선 줄거리 전개 속에서 펼쳐지는 총격전은 어색하기만하다. 가레스 에반스의 havoc(2025)이 같은 목적 하에서 '과잉'의 슛아웃을 보여줬다면 본작에서는 기능부전의 억압된, 억눌린, 제한된 총격전이 펼쳐진다. 카타르시스나 흥분이 전무한 냉정하고 무감한 총격전. 

 

requiem for heavyweight(1962)
젤소미나의 영혼을 가진 잠파노의 이야기라고 할까. 앤소니 퀸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이것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하다. 무려 로드 설링이 각본을 썼지만 의외의 반전 같은 예상된 기대와는 거리가 먼 정통적인 진중한 드라마. 무엇보다 재키 글리슨과 미키 루니의 연기가 퀸에 못지않아서 영화를 튼튼하게 떠받친다.
 
독설변호사(2023)
역대급 흥행을 기록한 본작의 홍콩 내 흥행은 법치주의라는 명분과 현실 간의 간극을 반영하는 걸까. 아니면 액션과 코미디라는 홍콩 영화의 양대 기둥을 버리고, 법정극이 수반하는 밀도 높은 각본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의지하는 진중한 정극 드라마의 수요를 증명하는건 아닐까.   

 
mad fate(2023)
유내해와 위가휘 각본의 고질이라면 떡밥 수습이 안된다는 수준을 넘어선 모순과 공백 내지는 설정 오류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걸 그럼에도 넘어가게 하는 꽤나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모호하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줄거리인데 본작에서도 여전하다. 분주히 뛰어다니며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딱히 그걸 이치에 맞게 설명하기는 뭔가 어려운, 그렇지만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하는 흡입력이 유지된다.    
 
죽어도 좋은 경험(1990)
제작 당시에는 결국 미개봉이었다는데 삼십년도 더 지나 화질 복원과 함께 개봉하게 됐다. 삼십오 년 전 서울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큰 반면, 정작 교환 살인이라는 플롯은 후반으로 가면 지리멸렬하게 늘어진다. 
 
찬란한 내일로(2023)

공산주의를 향한 갈구와 미약한 희망 
 
베이징 워터멜론(1989)

노스탤지어와 선의가 물씬한 '착한' 영화.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극 형식을 파괴하는 시도까지 하면서 나타나는 대목에서 새로운 시도를 결코 주저하지 않는 오바야시 특유의 대담함과 그 용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 폴 디렉터스 컷(2006/2025)

처음 본거라 최초 개봉판과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으나 다소 작위적인 줄거리나 플롯 때문에 심드렁했지만 미장센의 탁월함은 듣던대로였다. 

 
물 안에서/수유천/탑/우리의 하루
<우리의 하루>가 근작 중에는 가장 공감되는 작품이었다면 <탑>은 가장 인상깊었다.
 
Tales from the Darkside(1990)
아서 코난 도일과 스티븐 킹의 원작을 둔 앞의 두 에피소드와 달리 오리지널 각본인 마지막 에피소드는 정작 우리에게도 익숙한 설녀 전설 내지는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를 살짝 로컬라이징만 한 수준이라 이 각본을 어떻게 쓴건지 그 사정이 알고 싶어졌다.
 
달글리시(2021~2024)
결국 올해의 드라마는 이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달글리시 시리즈가 (내가 알기로는) 단 한 편인지라 매 에피소드를 쫓아가며 챙겨봤다. 아주 정석적인 후던잇 플롯이고 매 에피소드마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반전도 인상적이었다. 그외 올해 본 시리즈의 어너러블 멘션은 다음과 같다. 더 스튜디오, 핫스팟, 번화, 더 피트, 보쉬, 언내추럴(2018), 젠틀맨. 
 
독립시대(1994)/마작(1996)
양덕창의 영화 두 편을 꽤 오랜만에 다시 봤다. <독립시대>는 현대 대만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 묘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너무 고전적이고 익숙한 이야기. 반대로 <마작>이야말로 90년대 동시대 자본주의와 그 영향에 대한 감독의 관점이 들어갔다 할 수 있는데 마지막에 한 가닥 희망을 남겨놓는 듯한 엔딩이 살짝 불균형적이고 불안한 듯해서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만천과해(2023)
<인비저블 게스트>의 대만판 각색인데 반전이 너무나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라 하겠다. 
 
Dead in a week or your money back(2018) 
아마도 2024년 말부터 해서 여러번 돌려본 영화 중 한 편일듯 하다. 이유를 딱히 설명을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저렇게 방황하는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여전히 강하게 끌린다.  
 
유령작가(2010)
클레어 데더러의 책을 읽다가 언급이 되길래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2025년 다시 본 이 영화는 한국인 입장에서 무척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그를 찾아서(2025)
언제나 한 발 이상 앞서가는 감독답게 헤어조크는(이 작품의 연출자는 아니다) ai가 작성한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에 '출연'한다. 올해 본 가장 괴이한 영화.
 
니아짱(1958)
가장 이마무라스럽지 않은, 마치 고용감독이 아닌가 싶은 영화였다. 서경식은 자신의 유년기 시절 개봉했던, '자이니치'가 주요 배역으로 나왔던 두 편의 영화로 <큐폴라가 있는 마을>과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그닥 만족스럽지 않은 딱 그정도의 영화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자이니치가 주인공인데도 민족 문제는 일절 언급되지 않고 그저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최하층민으로서만 재현된다. 주인공이 딱히 자이니치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갈등의 본질은 그대로인 채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음에도 급작스럽게 봉합해버리고 끝내는 결말의 납득이 어렵다.
 
혈매귀(1988)
픽픽 죽어나가더니만 주인공 한 명 남고 다른 모든 주요 출연진이 전부 사망한다. 
 
배를 엮다
2024년 nhk판 드라마를 봤는데 꽤 흥미롭다. 원작을 읽었지만 기억이 거의 없고 영화판과 비교해보자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쳤는데 그 바뀐 지점들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일단 그 비교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우선 주인공이 마지메가 아니라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원작에 없던 신입 여자 직원으로 바꾸었고 자잘하게 거의 모든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향후 이야기 전개, 그리고 배역간 관계가 거의 다 바뀌어있다. 시간적 배경도 원작처럼 90년대가 아닌 동시대로 바뀌어서 e북과 종이책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 같은 것들도 삽입되어있다. 
 
양조위의 감옥풍운(1997)/ 애니멀 팩토리(2000)/ brown bunny(2003)
이 세 편은 올해 본 깜짝의 수확이라 하겠다. 브라운 버니는 문제의 그 '장면'을 빼고보면 내 눈엔 충분히 잘 만든 영화였는데 로드 무비 장르의 외로움과 쓸쓸함, 상실감을 제대로 구현해냈다. 무신경한 국내 개봉 제목인 <양조위의 감옥풍운>은 영어제목이 <china midnight express>인데 그만큼 가혹한 투옥 환경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또다른 감옥 영화인 애니멀 팩토리는 그 리얼리즘적 접근이 주류 할리우드 영화스럽지 않아서 좋았다. 
 
첫번째 키스(2025) 
중반부까지는 익숙한 타임트래블, 타임슬립, 슬립스트림 등등으로 불리는 그 장르 공식을 따라가긴하는데, 왜 가장 쉬운 해결책을 놓고 어려운 길을 가는걸까 의아했으나 결국 후반부에서의 진짜 의도했던 멜로 내지는 로맨스에 의한 감동을 끌어내기 위한 설정이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의아함에 대해 더 말해보자면 <러브레터>(1995)에서 서로 다른 동명의 두 사람 중에서 A로 시작은 했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가면 그 중심이 B로 이동하듯이 이 영화도 그래서 중반부까지의 칸나와 후반부의 칸나는 사실상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고 그럼 중반부까지의 칸나는 대체 어디로(어떻게) 간(된)거야라는 의문은 불문에 부쳐진다. 그 외 다른 설정오류도 있겠으나 이 부분이 가장 내게는 의아했다. 어쨌든 시간여행물은 이러한 패러독스 문제를 피해가지 못하는듯. 
 
퍼스트 카우(2019)/마스터마인드(2025) 
켈리 라이카트 영화 두 편. 연말에 본 영화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는데 이 작품들도 그래서 그런가 왠지 영화 자체가 연말에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얼마 뒤에 나이브스 아웃 3편으로 조쉬 오코너의 연기를 연이어 보게 된 셈이다. 
 
초콜릿 고마워(2000)/사기(1997)
샤브롤 영화 두 편. 아무래도 샤브롤은 스릴러라기보다는 심리 연출에, 더 정확히는 심리 중에서도 '악의'를 드러내고 가시화하는데 탁월한 연출가인 것 같다. 
 
coup de chance(2023) 
무대가 파리일 필요가 없는 걸 넘어 오히려 뉴욕이어야 잘 어울리긴 하겠는데 그래도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가도 영화 자체가 <매치 포인트>의 재탕 느낌이 강하다.  
 
men from the gutter(1983) 
강력한 폭력 묘사로 플롯의 단순함을 극복한다. 러닝 타임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전혀 접점이나 연결점이 없는 별개의 두 사건을 한 수사팀이 담당한다는 설정아래 진행되는데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앞에 말한대로 위력적인 고어한 폭력 묘사로 줄거리의 단순함과 식상함을 정면 돌파해낸다. 

작가의 구체적인 글쓰기 회피 행동과 심리를 저렇게 솔직하게 쓴 글은 처음 봤다. 산만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셀프 임상 기록이라할만한 서술은 그 자체로 이 책의 자유로운 구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자잘한 일상의 기록이자 글 쓸 장소를 찾아 유럽 곳곳을 떠도는 여행기이며 동시에 그토록 본문에서 내내 쓰려고했던 최초의 목표인 D.H 로렌스(에 관한 비학술적) 연구까지 세 가지 주제가 한 권의 책 안에 번갈아 쓰여있다. 가히 회피 전략의 구체적 사례라 할만하다. 이 책 전체가 로렌스 연구를 조금이라도 쓰지 않고 뒤로 미루려는 과정의 기록이자 동시에 그 결과인데, 정작 쓰려고 했던 책은 쓰지 못했지만 그 대신 조금은 엉뚱한, 그러나 결코 그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단언은 또 할 수 없는 타협의 결과물이 나온 셈이다. 전업 작가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사는 꼴이나 생각이란 것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공감과 함께 일말의 안도를 느끼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tv를 보고 싶은 마음에 대해, 최초의 계획에 실패하게 된 구구한 이유에 대해, 어떤 글을 쓰지 않으려고 단행본 한 권 분량의 다른 글을 써내는 아이러니에 대해. 

써야하지만 쓸 수 없었던 이유와 과정, 즉 글을 쓰는 데 실패하고만 변명을 한 권 분량의 새로운 글로 써내는 기력과 기지와 기민함은 어쩌면 배워야 할 교본처럼 보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정해진 단계일테니까. 그래서 모든 작가가 어쨌든 한 번은 똑같이 써먹을 수 있는 소재일테니 말이다. 글쓰기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작가 아니던가.   

(적어도 정신분석이 도입된 근대 이후부터) 자아의 양면성이나 숨겨진 무의식을 은유하는 기호로 쓰였다는 점에서 범죄 가해자인 (주로 남성) 예술가와 그 작품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괴물들』(2024, 을유문화사)은 그 제목에서부터 모종의 결론을 예상하게 한다. 중반쯤부터 전개되는 페미니즘 주장들이 별권의 책으로 써야할 이야기를 끌어온 것처럼 보이는 점만 빼면 비윤리적 창작자와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을 분리하는게 가능한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해 말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명확하게 답하는 점은 본서의 가장 큰 미덕이다.  

 

우디 앨런과 그의 작품에 관한 남성 비평가와 저자 간의 대화에서 보듯 주로 남성(평론가)은 작품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비평가인 저자가 그 반대를 외칠 것이라 짐작되지만 정작 본문을 읽어보면 비윤리적 창작자가 만든 작품을 '수용'(소비와 감상을 포함하는 용어로서)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들에 납득할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고, 그러한 주장들의 근거를 하나하나 논파해나가는 과정이 책의 내용이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작품에 묻은 창작자의 추문이라는 얼룩은 예술가라면 사실 누구도(심지어는 일반인도) 피할 수 없다. 모든 예술가에게 열린 가능성이다. 시시콜콜한 온갖 트리비아들이 켜켜이 쌓여 데이터베이스를 누적하는 인터넷 시대에서 어느 예술가의 팬이라면, 그러니까 결코 상호 호혜적이지 않은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인 감정이 교환되는 팬과 창작자의 관계, 이 책에서 말하는 이른바 유사 사회적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 속성상 얼룩에 의한 상처를 팬은 피할 수 없다. 미학적 경험은 그 본질적 속성상 감정에 의한 주관적 경험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늘 가변적이고 예상이 어렵다. 무엇보다 인간은 늘 일관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언제나 책임을 완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래서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예술가를 향한 넘치는 감정적 투사와 숭앙은 '천재'라는 수사를 부여하지만 이는 수용자의 '길티 플레저'를 달래거나 면책할 요량의 문학적 수단일 수 있다. '천재니까 괜찮아' '천재는 한번쯤 봐줄 수 있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보이콧이라는 형태의 소비 행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건 뒤에서 이익을 챙기는 다른 누군가의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예술가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괴물일 수 있다. 윤리의 회색지대로 다같이 뛰어들자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덕이 아닌 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사랑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기꺼이 대중의 눈에 자신이 괴물로 보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예술작품과 그 미를 향한 사랑을 보여준 나보코프처럼 말이다. 

 

예술 애호가로서의 열렬함과 진지함은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어렵게 한다. 데더러의 핵심 주장도 이러한 열정을 옹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우선, 자본주의 하에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정, 즉 광의의 투표 행위로서 소비가 생산자(창작자)에게 유의미한 효과(응징이나 지지)를 가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자본주의의 기만이라고 역설한다. 기후 변화는 개별 소비자들이 탄소 발자국을 따져 농산물을 구입하고 분리 배출을 잘하고 플라스틱을 사용 안하면 해결되는 일일까. 이 책의 본연인 문화나 예술쪽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나왔던 저자의 의문을 반복하자면, 폴란스키 영화를 친구 소유의 물리매체를 빌리거나 친구 집에서 같이 보거나 계정을 공유해서 본다면 내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괜찮은걸까. 한 장 한 장 논의를 쌓아나간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은 당연히 뒤에 나오지만 책의 초반부에 이미 은근하지만 또렷이 적시됐었다.  

 

"이 과정에서 항상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가?" 31p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 꼭 그래야 할까?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 온 아픈 일들과, 위대한 예술이 주는 자유와 미학과 장엄함과 기이함을 못내 경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긴장이 도사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감정적 질문이다." 102p

 

젠더본질주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일반적(내지는 보편적) 괴물성을 돌아봐야한다는 주장은 짐짓 수용자의 과오와 허물을 환기함으로써 '나쁜' 창작자의 면책을 구하려는 수사학적 획책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더라도 괴물을 변호할 방법이 없었을까. 바로 여기에 저자의 영민한 전략 내지 전술이 있다. 괴물 창작자가 아니라 그 작품의 감상을 거부하지 않는 수용자를 변호하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고, 그 변호의 핵심에는 소비와 감상의 혼동이라는 오류가 있다. 예술 작품의 감상이 금전 소비 행위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살면서 저도 모르게 저지른 착각과 오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구분해야할 것은 괴물 작가와 그 작품(만)이 아니라 소비와 감상이다. 그동안 예술의 문제라 생각했던 것을 사실은 경제의 문제, 즉 소비의 차원으로 접근해왔다는 주장은 그간의 관성적 사고를 각성하게한다. 이를테면 나쁜 연예인을 향한 캔슬 컬처가 선한 혹은 좋은 연예인이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는 또다른 환상일 뿐이라는 주장이 그러한데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투사하고 소비하는 패턴은 결국 그 누구도 쉽게 충족시키지 못할 높은 윤리적 잣대를 요구하는 심리적 가학이나 허위적인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사적 이슈에 휘말린 작가와 그 작품 감상을 피하면 그 손해는 과연 그 작가에게만 발생할까. 감상을 통해 얻을 수 있(었)을 정신적 만족감,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있는 작품과 그 수용을 통한 만족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얻는 손실은 어떠한가.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유무형의 손실은 어떤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보전할 수 있을까. 감상시에는 윤리나 도덕보다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너무 나이브하거나 비윤리적인걸까. 아니면 창작자에게 돌아갈 금전적 손익(같은 부차적) 계산보다는 감상이라는 행위가 본디 가리키는 충실한 감정적 몰입에 의한 작품의 미학적 본질 판단이라는 근본적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걸까. 

 

소비와 감상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을 거부하고, 예술품의 내재적 가치를 최우선시하고 인정하겠다는 뜻일테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예술품이 어느 순간(완성 직후 혹은 일정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창작자와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를 갖는다는 가정에 연원할 것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와 무관한 새로운 의미나 해석이 수용자의 감상으로부터 나오기도하고 미술품처럼 작가가 사망한 뒤에도 꾸준한 관심과 지지를 받으면서 오랜 시간을 거치며 소유자가 지속적으로 바뀌거나(여기서도 등장하는 '소유'라는 자본주의 관계) 상업 영화처럼 꾸준히 리마스터나 재개봉, 리이슈, 또는 몇(십) 년 만의 공개 전시처럼 새로움을 더해 다시 한번 시장에서 ‘재판매’된다. 도난 및 손실과 그 복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일화, 소문, 유언비어 등의 ‘이야기’와 서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가와 분리된 작품 고유의 역사가 쌓이면서 독자성이 강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작품과 작가의 분리는 가능하지 않을까. 

 

창작자를 향한 비난까지 덮어쓰기에 아까운 양질의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지 않는 나만의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일지언정,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개성과 독자성이 인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러한 가치들이 이른바 '작품성'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는데 때로는 작가를 향한 추문과 비난마저 작품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작품에 투하되거나 반영되는 '작가성'에는 그 작가에 대한 부정성까지도 포함된다. 더 자세히 보면 작가성이라는 관념부터가 작품으로부터 역으로 추출된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전기적 연구는 생애적 접근으로부터 작품의 생성 과정을 유추하지만 반대로 작품 분석을 통해 거꾸로 작가의 사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인의 내면(적 경험)을 유추해 '저자'라는 존재의 서사를 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품이 작가를 만든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부터 작가라는 관념이 사후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작가는 작품과 불가분한 부수적 존재일 수도 있지만, 작가에 우선하는 작품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는 고유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체적 인물이 아니라 쓰기(내지는 창작)의 주체라는 익명의 존재를 지시하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에서 당연히 개별적이며 또한 독립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제는 예술품에 대한 사랑이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하지만 증오와 혐오가 세상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어가는 지금, 예술의 지위는 실로 위태롭다. 딱히 모자란 부분 없이 매끈하지만 그렇다고 특출난 곳도 별달리 보이지 않는, 그래서 모난 구석이 없어서 고른 지지를 얻어내는 작품들이 대중 예술의 주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작금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작품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대상화, 다시 말해 세간의 평가, 제도권 언론과 직업 평론가의 비평, 시장 매출과 제작 비용, 순익에 대한 쇄말적 관심 등을 즉시 폐기하고 수용자의 특수한 심미적 기준에 의한 주관적 판단을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이렇게 될 때 작품은 비로소 그 수용자만이 진정으로 '소유'하는 세상에 유일한 그 무엇이 된다. 다양성의 전제 조건은 고유성의 인정이다. 저자의 소유권보다 작품 고유의 침해받지 않는 내재적 권리, 즉 특정인이나 사물 내지 관념에 귀속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침해받을 수 없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인정한다면 이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폐기 이전에 작품의 실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사전 작업 아닐까.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나 자신만이 한 작품의 미추, 선악, 질적 우열을 판단하고 호오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독선이라기보다는 (주관적) 비평의 시작이고, 그렇게 서로 다른 판단을 하는 개인들간의 상이한 의견들이 공론장에 펼쳐짐으로써 예술의 다양성과 생태계는 보장받는다.  

 

조지 오웰은 혐오스러운 인간이 동시에 걸작을 만드는 재능있는 예술가일 수 있으며, 한 명의 예술가는 예술가이자 동시에 시민이기에 도덕적 책무로부터 면제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통해, 재능과 도덕이라는 두 덕목, 바꿔 말해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두 가지 주체의 양립 가능성 여부를 가늠함으로써 작품과 작가의 분리 (불)가능성 그리고 작가의 도덕적 책무를 논하는 전통적 입장을 취한다면, 데더러는 같은 주제에 대해 작가가 아닌 독자,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로 논의의 초점을 바꾸는 결단을 행한다.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자기 만족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때까지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감상을 통해 작품성이 완결된다는 점에서 작품의 작가로부터의 분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작품은 무한에 가까운 의미를 품은 잠재적 가능태이고 그 의미에는 '작가'라는 이름의 '관념'도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작가'는 작품에 사후적으로 수반되는 부수적 존재이며 그래서 창작자와 그 결과물은 서로 다른 운명을 개척해간다. 그 상호간 독립적 운명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 앞에 선 우리가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온전한 감상자가 되는 것, 그러니까 '가성비'나 '효용'을 찾는 소비자이기를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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