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구체적인 글쓰기 회피 행동과 심리를 저렇게 솔직하게 쓴 글은 처음 봤다. 산만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셀프 임상 기록이라할만한 서술은 그 자체로 이 책의 자유로운 구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자잘한 일상의 기록이자 글 쓸 장소를 찾아 유럽 곳곳을 떠도는 여행기이며 동시에 그토록 본문에서 내내 쓰려고했던 최초의 목표인 D.H 로렌스(에 관한 비학술적) 연구까지 세 가지 주제가 한 권의 책 안에 번갈아 쓰여있다. 가히 회피 전략의 구체적 사례라 할만하다. 이 책 전체가 로렌스 연구를 조금이라도 쓰지 않고 뒤로 미루려는 과정의 기록이자 동시에 그 결과인데, 정작 쓰려고 했던 책은 쓰지 못했지만 그 대신 조금은 엉뚱한, 그러나 결코 그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단언은 또 할 수 없는 타협의 결과물이 나온 셈이다. 전업 작가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사는 꼴이나 생각이란 것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공감과 함께 일말의 안도를 느끼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tv를 보고 싶은 마음에 대해, 최초의 계획에 실패하게 된 구구한 이유에 대해, 어떤 글을 쓰지 않으려고 단행본 한 권 분량의 다른 글을 써내는 아이러니에 대해. 

써야하지만 쓸 수 없었던 이유와 과정, 즉 글을 쓰는 데 실패하고만 변명을 한 권 분량의 새로운 글로 써내는 기력과 기지와 기민함은 어쩌면 배워야 할 교본처럼 보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정해진 단계일테니까. 그래서 모든 작가가 어쨌든 한 번은 똑같이 써먹을 수 있는 소재일테니 말이다. 글쓰기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작가 아니던가.   

(적어도 정신분석이 도입된 근대 이후부터) 자아의 양면성이나 숨겨진 무의식을 은유하는 기호로 쓰였다는 점에서 범죄 가해자인 (주로 남성) 예술가와 그 작품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괴물들』(2024, 을유문화사)은 그 제목에서부터 모종의 결론을 예상하게 한다. 중반쯤부터 전개되는 페미니즘 주장들이 별권의 책으로 써야할 이야기를 끌어온 것처럼 보이는 점만 빼면 비윤리적 창작자와 그 사람이 만든 작품을 분리하는게 가능한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해 말을 돌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명확하게 답하는 점은 본서의 가장 큰 미덕이다.  

 

우디 앨런과 그의 작품에 관한 남성 비평가와 저자 간의 대화에서 보듯 주로 남성(평론가)은 작품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비평가인 저자가 그 반대를 외칠 것이라 짐작되지만 정작 본문을 읽어보면 비윤리적 창작자가 만든 작품을 '수용'(소비와 감상을 포함하는 용어로서)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들에 납득할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고, 그러한 주장들의 근거를 하나하나 논파해나가는 과정이 책의 내용이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작품에 묻은 창작자의 추문이라는 얼룩은 예술가라면 사실 누구도(심지어는 일반인도) 피할 수 없다. 모든 예술가에게 열린 가능성이다. 시시콜콜한 온갖 트리비아들이 켜켜이 쌓여 데이터베이스를 누적하는 인터넷 시대에서 어느 예술가의 팬이라면, 그러니까 결코 상호 호혜적이지 않은 일방적이고 비대칭적인 감정이 교환되는 팬과 창작자의 관계, 이 책에서 말하는 이른바 유사 사회적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 속성상 얼룩에 의한 상처를 팬은 피할 수 없다. 미학적 경험은 그 본질적 속성상 감정에 의한 주관적 경험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늘 가변적이고 예상이 어렵다. 무엇보다 인간은 늘 일관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언제나 책임을 완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래서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예술가를 향한 넘치는 감정적 투사와 숭앙은 '천재'라는 수사를 부여하지만 이는 수용자의 '길티 플레저'를 달래거나 면책할 요량의 문학적 수단일 수 있다. '천재니까 괜찮아' '천재는 한번쯤 봐줄 수 있지' 같은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보이콧이라는 형태의 소비 행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건 뒤에서 이익을 챙기는 다른 누군가의 전략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예술가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괴물일 수 있다. 윤리의 회색지대로 다같이 뛰어들자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덕이 아닌 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사랑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기꺼이 대중의 눈에 자신이 괴물로 보이는 일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예술작품과 그 미를 향한 사랑을 보여준 나보코프처럼 말이다. 

 

예술 애호가로서의 열렬함과 진지함은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어렵게 한다. 데더러의 핵심 주장도 이러한 열정을 옹호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우선, 자본주의 하에 살면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정, 즉 광의의 투표 행위로서 소비가 생산자(창작자)에게 유의미한 효과(응징이나 지지)를 가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자본주의의 기만이라고 역설한다. 기후 변화는 개별 소비자들이 탄소 발자국을 따져 농산물을 구입하고 분리 배출을 잘하고 플라스틱을 사용 안하면 해결되는 일일까. 이 책의 본연인 문화나 예술쪽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나왔던 저자의 의문을 반복하자면, 폴란스키 영화를 친구 소유의 물리매체를 빌리거나 친구 집에서 같이 보거나 계정을 공유해서 본다면 내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괜찮은걸까. 한 장 한 장 논의를 쌓아나간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은 당연히 뒤에 나오지만 책의 초반부에 이미 은근하지만 또렷이 적시됐었다.  

 

"이 과정에서 항상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가?" 31p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 꼭 그래야 할까?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 온 아픈 일들과, 위대한 예술이 주는 자유와 미학과 장엄함과 기이함을 못내 경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긴장이 도사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감정적 질문이다." 102p

 

젠더본질주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일반적(내지는 보편적) 괴물성을 돌아봐야한다는 주장은 짐짓 수용자의 과오와 허물을 환기함으로써 '나쁜' 창작자의 면책을 구하려는 수사학적 획책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굳이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더라도 괴물을 변호할 방법이 없었을까. 바로 여기에 저자의 영민한 전략 내지 전술이 있다. 괴물 창작자가 아니라 그 작품의 감상을 거부하지 않는 수용자를 변호하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고, 그 변호의 핵심에는 소비와 감상의 혼동이라는 오류가 있다. 예술 작품의 감상이 금전 소비 행위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살면서 저도 모르게 저지른 착각과 오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구분해야할 것은 괴물 작가와 그 작품(만)이 아니라 소비와 감상이다. 그동안 예술의 문제라 생각했던 것을 사실은 경제의 문제, 즉 소비의 차원으로 접근해왔다는 주장은 그간의 관성적 사고를 각성하게한다. 이를테면 쁜 연예인을 향한 캔슬 컬처가 선한 혹은 좋은 연예인이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는 또다른 환상일 뿐이라는 주장이 그러한데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투사하고 소비하는 패턴은 결국 그 누구도 쉽게 충족시키지 못할 높은 윤리적 잣대를 요구하는 심리적 가학이나 허위적인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사적 이슈에 휘말린 작가와 그 작품 감상을 피하면 그 손해는 과연 그 작가에게만 발생할까. 감상을 통해 얻을 수 있(었)을 정신적 만족감,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있는 작품과 그 수용을 통한 만족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얻는 손실은 어떠한가.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유무형의 손실은 어떤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보전할 수 있을까. 감상시에는 윤리나 도덕보다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너무 나이브하거나 비윤리적인걸까. 아니면 창작자에게 돌아갈 금전적 손익(같은 부차적) 계산보다는 감상이라는 행위가 본디 가리키는 충실한 감정적 몰입에 의한 작품의 미학적 본질 판단이라는 근본적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걸까. 

 

소비와 감상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을 거부하고, 예술품의 내재적 가치를 최우선시하고 인정하겠다는 뜻일테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예술품이 어느 순간(완성 직후 혹은 일정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창작자와는 구분되는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를 갖는다는 가정에 연원할 것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와 무관한 새로운 의미나 해석이 수용자의 감상으로부터 나오기도하고 미술품처럼 작가가 사망한 뒤에도 꾸준한 관심과 지지를 받으면서 오랜 시간을 거치며 소유자가 지속적으로 바뀌거나(여기서도 등장하는 '소유'라는 자본주의 관계) 상업 영화처럼 꾸준히 리마스터나 재개봉, 리이슈, 또는 몇(십) 년 만의 공개 전시처럼 새로움을 더해 다시 한번 시장에서 ‘재판매’된다. 도난 및 손실과 그 복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온갖 일화, 소문, 유언비어 등의 ‘이야기’와 서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작가와 분리된 작품 고유의 역사가 쌓이면서 독자성이 강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작품과 작가의 분리는 가능하지 않을까. 

 

창작자를 향한 비난까지 덮어쓰기에 아까운 양질의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모두가 공유하지 않는 나만의 개인적인 기준에 의한 것일지언정,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개성과 독자성이 인정되는 작품이 있다. 이러한 가치들이 이른바 '작품성'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는데 때로는 작가를 향한 추문과 비난마저 작품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즉 작품에 투하되거나 반영되는 '작가성'에는 그 작가에 대한 부정성까지도 포함된다. 더 자세히 보면 작가성이라는 관념부터가 작품으로부터 역으로 추출된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전기적 연구는 생애적 접근으로부터 작품의 생성 과정을 유추하지만 반대로 작품 분석을 통해 거꾸로 작가의 사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인의 내면(적 경험)을 유추해 '저자'라는 존재의 서사를 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품이 작가를 만든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부터 작가라는 관념이 사후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작가는 작품과 불가분한 부수적 존재일 수도 있지만, 작가에 우선하는 작품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는 고유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체적 인물이 아니라 쓰기(내지는 창작)의 주체라는 익명의 존재를 지시하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에서 당연히 개별적이며 또한 독립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제는 예술품에 대한 사랑이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하지만 증오와 혐오가 세상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어가는 지금, 예술의 지위는 실로 위태롭다. 딱히 모자란 부분 없이 매끈하지만 그렇다고 특출난 곳도 별달리 보이지 않는, 그래서 모난 구석이 없어서 고른 지지를 얻어내는 작품들이 대중 예술의 주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작금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작품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대상화, 다시 말해 세간의 평가, 제도권 언론과 직업 평론가의 비평, 시장 매출과 제작 비용, 순익에 대한 쇄말적 관심 등을 즉시 폐기하고 수용자의 특수한 심미적 기준에 의한 주관적 판단을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이렇게 될 때 작품은 비로소 그 수용자만이 진정으로 '소유'하는 세상에 유일한 그 무엇이 된다. 다양성의 전제 조건은 고유성의 인정이다. 저자의 소유권보다 작품 고유의 침해받지 않는 내재적 권리, 즉 특정인이나 사물 내지 관념에 귀속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침해받을 수 없는 독자성과 고유성을 인정한다면 이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폐기 이전에 작품의 실존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사전 작업 아닐까.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나 자신만이 한 작품의 미추, 선악, 질적 우열을 판단하고 호오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독선이라기보다는 (주관적) 비평의 시작이고, 그렇게 서로 다른 판단을 하는 개인들간의 상이한 의견들이 공론장에 펼쳐짐으로써 예술의 다양성과 생태계는 보장받는다.  

 

조지 오웰은 혐오스러운 인간이 동시에 걸작을 만드는 재능있는 예술가일 수 있으며, 한 명의 예술가는 예술가이자 동시에 시민이기에 도덕적 책무로부터 면제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통해, 재능과 도덕이라는 두 덕목, 바꿔 말해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두 가지 주체의 양립 가능성 여부를 가늠함으로써 작품과 작가의 분리 (불)가능성 그리고 작가의 도덕적 책무를 논하는 전통적 입장을 취한다면, 데더러는 같은 주제에 대해 작가가 아닌 독자,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로 논의의 초점을 바꾸는 결단을 행한다.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자기 만족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때까지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타인의 감상을 통해 작품성이 완결된다는 점에서 작품의 작가로부터의 분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작품은 무한에 가까운 의미를 품은 잠재적 가능태이고 그 의미에는 '작가'라는 이름의 '관념'도 포함된다. 이렇게 볼 때 '작가'는 작품에 사후적으로 수반되는 부수적 존재이며 그래서 창작자와 그 결과물은 서로 다른 운명을 개척해간다. 그 상호간 독립적 운명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 앞에 선 우리가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온전한 감상자가 되는 것, 그러니까 '가성비'나 '효용'을 찾는 소비자이기를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의란정미(1987)
히치콕 오마주라는 말을 듣고 찾아봤다. 현기증과 이창을 적절한 배합으로 섞어놓은 결과, 이야기는 알아서 착착 진행되기 때문에 전개상 특별한 부분은 보이지 않으나 종초홍의 초반부 분위기와 연출이 킴 노박을 오마주하는 잡지 화보처럼 매끈하다. 액션물도 제법 찍었지만 멜로와 로맨스가 양범 감독의 주종목이긴한데 검증된 원작을 두어서 그런지 본작에서는 연출의 밸런스가 한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였다.
 
the duke(2020)/ le week-end(2013)
2000년대 중반인가 일요일에서 월요일 넘어가는 새벽에 모 지상파에서 국내미개봉 영화들을 틀어줬던 시기가 있었다. <인더베드룸>(2001)을 그렇게 처음 봤는데 <타이타닉 타운>(1998)이라는, 있는 줄도 몰랐던 영화를 인상적으로 봤었다. 감독은 그 영화를 만든 이듬해 차기작 <노팅힐>의 대흥행으로 할리우드로 넘어갔으나 딱 한 편만 만들고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꾸준히 활동을 하다가 커리어를 마쳤다. 영어를 쓰긴 하지만 로컬 지향이 강한 유럽 영화가 국내에 소개되기는 어려운 탓에 한동안 (적어도 내게는) 잊혀진 감독이었는데 그러던 중 우연히 케이블에서 본 <르 위켄드>(2013)가 너무 재미있어서 감독의 필모를 검색하다 직접 찾아본 게 <the duke>(2020)였다. <타이타닉 타운>까지 포함해 작고 소박하지만 중견 배우들의 실속있는 연기로 꽉 채워진 중급 규모의 드라마 장르를 꾸준히 이어온 감독의 내공이 여실히 증명된 작품들이었다. 2000년대에 나온 다른 영화들도 보고 싶어졌다. 
 
지하철의 소녀(1960)
이렇게까지 재기발랄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인줄은 몰랐다. 직전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던 감독이 차기작으로 이렇게 귀여운 영화를 만들었을 줄이야. 한국에서는 외설적으로 들리는 주인공의 이름 때문에 영화 자체가 온전히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형국이 어쨌든 계속 이어지는 듯.
 
시대혁명(2021)
삼중국을 바라보는 외부(자)의 복잡하고 모순된 시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화제의 이 다큐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에 한국의 민중 저항사로부터 홍콩의 시위자들이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 성패의 차이는 결국 양국간 정치, 사법, 행정 시스템에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birth(2004)
주인공의 헤어스타일 그리고 다 큰 성인 남녀가 로비에 유니폼을 차려입은 콩시에르지를 둔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설정은 <로즈마리의 아기>를 의도적으로 연상되도록 하고 있는데 중반부까지는 분위기나 전개마저 비슷하게 몰고가긴 하지만 결국 너무 싱겁게 풀리면서 직전까지의 흥미를 완전히 탕진한 후 지리멸렬한 결말로 이어진다. 속이긴 했지만 감정만은 진짜라는 설정을 리얼하게 끌고가고 싶었다면 두 주인공 간의 섹스씬이 들어갔어야 할테지만 윤리적인 이슈 때문에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보니 영화가 그럴싸해보이는 분위기와 껍데기만 남은 허풍선이 과자처럼 되어버렸다.
 
푸른 산맥/ 속 푸른 산맥(1949)
패전 후 미군정시기, 이른바 GHQ 시대를 은유하는 우화처럼 보인다. 간접 통치시기, 그러니까 자생한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이식된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연습해야했던 또는 연습하는 척 해야했던 전후 일본인들에 대한 자조적 우화.

포커페이스
올해의 드라마. 노란색 크레딧에서부터 형사 콜럼보에 표하는 오마주나 나이브스 아웃에서 이미 선보였던 거짓말에 반응하는 신체라는 설정을 한번 더 틀어서 끌어오는 재치도, 그걸 매회 에피소드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방식도 보면서 내내 즐거웠다.

Holdovers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 리스트에 올라갈 한 편. 휴가 기간에 떠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이라는 초반 설정의 흥미만으로 장편 영화 한편을 끝까지 끌고갈 수는 당연히 없는데 뒷부분의 드라마가 점점 더 탄탄하게 전개되더니 마지막은 울림이 크다.

Perfect Days
'완벽한' 영화를 본 기분. 카세트로 음악을 듣고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중고서점에서 책을 사고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 상가 단골 식당에 들러 저녁을 해결하는, 작금의 그것과 완벽히 정면으로 배치되는 라이프스타일의 꼼꼼한 묘사는 노스탤지어를 논하는 수준을 넘어 꽉 차있는, 진정으로 밀도 높은 일상의 영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과거였다면 아무것도 아닌 흔하디 흔한 일상일텐데도 뭐든지 손가락 놀림 몇 번으로 해결되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직접 발품을 팔고 팔을 움직여야하는 그 양태가 몹시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인공이 가장 손을 열심히 쓸 때가 휴대폰 조작이 아니라 말그대로 '매뉴얼 레이버'를 할 때라는 것도 지금과는 확연히 변별되는 라이프스타일 아닐까.
 
Beautified realism: making of flowers of shanghai(2021)
촬영마저도 즉흥적으로, 단연코 배우와 배우의 연기가 최우선인, 사전에 계획된 촬영 동선 따위 일절 없이 배우들의 연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그 반응으로서, 촬영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포커싱하는 방식의 몹시 직관적인 촬영 방식. 이는 곧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 붉은 풍선 등 리핑빙과 함께한 작품들이 다 이런 식인데 이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작품이었던 <해상화> 촬영이 허우와 리 두 사람 모두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밀레니엄 맘보(2001)
첫인상과 완전히 달라진 영화. 근 이십년만에 다시 봤는데 이렇게 분명하고 심플한 구조의 영화인줄 전혀 몰랐다. 굉장히 지루한 영화라는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는데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자객 섭은낭>도 지금 보면 다르려나). 왕가위 영화 속 양조위만큼이나 강한 존재감의 허우 샤오시엔 영화 속 서기는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선 볼 수 없는 연기를 매번 보여준다. 위에 리핑빙 다큐에서 한 말을 이어서 부연해보자면, 허우의 연출론이자 촬영론, 즉 배우와 그 연기가 무조건 연출의 최우선이라는 점은 할리우드와의 결정적 차이이자 다른 어떤 감독들로부터도 구분짓는 그만의 독보적 방법론일 수도 있겠다. 더이상 그의 신작을 보기가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점이 아쉽다.
 
hidden city(1987)
몇 년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됐다. 늘 지나다니지만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면 공간에 대한 조명이라는 점에서 도시 비평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개되는 음모의 정체만을 놓고 보면 다른 폴리아코프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코멘터리이기도 하다. 스릴러건 드라마건 내가 본 이 감독의 영화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High Plains Drifter(1973)
집단 공유 아예 후반에는 대놓고 선도자, 영도자에 의한 혁명에 대한 은유로 보였다. 훔쳐서 숨겨놓은 황금 때문에 저지른 법 집행관 살인 및 은폐와 그 사실을 공유하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플롯이 자본주의적 병폐에 대한 비판처럼 보였다는 말인데 이스트우드의 평소 성향으로 보면 너무 선무당 잡는 해석이긴하다. 귀환한 사자에 의한 징벌.
 
성항기병 2(1987)
줄거리나 전개는 몹시 구태의연한데 1편에서 봤듯 속편에서도 이어지는 유머가 일절 없는 비정한 스토리 전개 및 이에 상응하는 건조하고 사실적인 폭력 묘사와 액션이 너무 인상적이다. 역시나 마지막 10분 클라이맥스 액션씬 때문에 영화 전체가 몇 등급은 올라가면서 구원받고 있는데, 홍콩의 도시 건조환경의 특징, 즉 실내뿐 아니라 건물과 건물 바깥 외부와의 관계에서마저도 이어지는 비좁음, 복닥복닥하고 오밀조밀한 공간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액션 설계와 액션 연출의 창의성이 빛을 발한다. 십 이년 쯤 뒤에 나온 <순류역류> 같은 영화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님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The Stranger(1967)
비스콘티 필모중에서 가장 무미건조하고 특색없는 영화가 아닐까. 그의 전작을 다 본건 아니지만. 

Teachers Lounge(2022)
작년 리스트에 살짝 언급만 됐는데 어쨌건 비교적 최신 유럽 영화 중에서는 가장 재밌게 봤다.
 
이블데드트랩2(1992)
임신과 낙태에 대한 격렬한 양가감정의 고백, 선망과 공포가 공존하는 가운데 분열되어가는 정신을 그려내고 있다.
 
백만냥의 항아리(1935)
어쨌든 고전 영화를 보면 이렇게 저렇게 느끼는 바가 있는데 이런 식의 여유로움과 넉살이야말로 동서의 고전 영화들이 공유하는, '클래식'만이 갖는 품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호도문(1996)
요즘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저예산의 중급 규모의 진지한 드라마들이 많은 듯한데 90년대 중반에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두 장르인 액션이나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이렇게 담담하지만 동시에 안정적인 드라마가(허안화 작품이 아님에도) 있었음을 삼십여년 가까이 흐른 뒤에 뒤늦게 보면서 발견의 재미를 또한번 느끼게 해준 한 편이었다. 
 
Twilight of the Warriors: Walled In (2024)
홍콩 영화사상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고 하는데 각각 한때 실재했던 공간과 80년대 스타일 액션이라는 두 가지 노스탤지어가 결합한데 따른 효과가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재밌게 봤고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한껏 과장된 액션 연출이 오히려 시원시원하게 느껴졌다. 속편 제작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처음보다 좋은 반응이 나올까 싶지만 이건 뭐 당연한 업계의 속성인지라.
 
니노치카(1939)
그레타 가르보의 캐릭터가 흥미로워서 줄거리는 거의 의식하지 않으면서 순전히 연기 보는 재미로 끝까지 봤다. 지금도 줄거리는 거의 기억 안남.
 
아푸 3부작
2024년은 드디어 3부작 시청을 완결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메이트완(1987)
이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고 심각한 드라마인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그러니까 노동사라는 것, 노동자의 저항사라는 건 동서고금할 것 없이 이토록 처절하고 잔인하고 심각했다는 것, 먼훗날 보면 21세기의 첫 사반세기도 이 영화를 보는 지금의 내 시점처럼 얼마나 야만적으로 보일런지. 
 
Rattle and hum(1988)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올라가는 겨울 동안 가장 많이 돌려들었던 음반 중 하나가 조슈아 트리였는데 이 영상은 이제야 처음봤다. 이 판을 처음 들었을 때 '아 이런 기분이었었지'하고 실로 오랜만에 감개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최전성기 공연이 이 정도였는데 사십여년 가까이 지난 요즘도 메탈리카와 마찬가지로 규모나 분위기가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는게 실로 대단하다. 아레나 공연이 가능한 몇 안남은 락밴드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The Substance
<Phase IV>(1974) 가 가장 인상깊게 본 옛 장르물이라면 신작 중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장르물은 이 영화가 되겠다. 두 편 다 멍하니 화면을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감상한다'는 의식 같은 것 없이.
 
Door (1988)
후기 쇼와 스릴러라고 해야할까. 일본의 (현재까지 시점에서 보자면) 마지막 호경기 시절을 증언하는 아카이브 중 하나일수도. 막 준공된 고급 아파트에 입주함으로써 '공인된' 중산층으로 편입된 젊은 주부가 외부에서 들이닥친 침입자로부터 받는 공격에는 당연히 계급적 갈등이라는 맥락이 삽입되어있긴한데 그것이 갈등으로 전면화하는 원인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동시대 도시 사회의 흔한 문제들, 이를테면 익명성이나 피상적 인간관계와 그로 인한 불안 등이 촘촘히 배치되어있다.
 
Going in Style(1979)
즐겁게 본 '옛날' 영화 되겠다. 너무 재밌게 봐서 리메이크작까지 찾아봤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는데, 원작에서는 '늙음'에 대한 애상이랄까 애수, 은은하고 완만한 슬픔이 배면에 제대로 깔려있고 그런 분위기가 맨 마지막 엔딩까지 계속 유지된다. 배우들의 연령은 리메이크작도 원작 못지않게 높긴하지만 원작의 배우들이 아무래도 훨씬 더 리얼하게 약하고 초라해보이고 외로워보인다는 점이 이러한 분위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The Inglorious Bastards(1978)
80년대말 아니면 90년대 초 토요명화로 초반부를 봤던 기억이 있고, 타란티노가 스펠링을 비틀어서 자기 영화의 제목으로 삼았을만큼 좋아하는 전쟁영화라는 것도 알고 있긴했는데 제대로 본 건 어쨌든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르도 배우들 조합도 언어도 줄거리도 죄다 '하이브리드'인데 그게 다 섞이고보니 너무나 '장르적'이 됐다는 점, 그리고 이런 '너무 장르'적인 영화에 대한 타란티노의 선호가 다시 본인의 작품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재현되는지까지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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