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글쟁이는 얼마나 만족하는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

 

"이즈음 나는 일본 '쇼와' 시대의 사건이 '메이지' 시대의 사건과 대응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동안 1930년대에 일어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그와 같은 관점에서 일본 근대사에 관해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 70쪽의 연표에 제시한 것처럼 사건까지 이 정도로 평행하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역사의 반복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와 반복』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60년 내지는 120년을 주기로 역사가 반복된다면서 메이지와 다이쇼를 합친 기간의 역사가 쇼와에서 재연된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사실 합치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디어의 발상과 이를 풀어나가는 전개 때문에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근대일본의 담론공간이라는 가설,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고유명이 갖는 의미의 차이에 대한 설명 등은 흥미롭기도 했고 딱히 코멘트할 역량도 없지만, 가라타니마저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떤 강고한 사고의 단면에 대해서는 확인하고 싶다.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근대일본의 담론공간'이란 각각 국권과 민권, 아시아와 서양을 축으로 사분할한 관점에 의한 근대 이후 일본의 역사 이해를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문제의식은 패전 이후 일본이 담론장의 좌반부 전체 그러니까 아시아와 관련한 담론을 아예 "잘라내버"렸다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의식 아래'에 놓"았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아시아라는 대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줄곧 일본에게는 단순히 중요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연대감'도 있었으나 러일전쟁 이후부터 그 연대감을 상실하면서 아시아주의는 결국 제국주의와 합쳐졌는데 그 결과가 패전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후부터는 의도적으로 아시아를 잘라내버린 채 담론장을 형성해왔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일찍이 이런 류의 주장은 가라타니가 인용하고있듯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기가 막힌 문장으로 전한 바 있다.

 

"대동아 전쟁의 침략적 측면은 아무리 강변해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침략을 증오한 나머지 침략이라는 형태를 통해 나타난 아시아적 연대감까지 부정하는 것은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렇게 되면 일본인들은 끝까지 목적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인들이 느끼는 심리적 약점과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방어기제가 다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의도와 결과의 분리,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지지 않을 수 있는 양립적 태도의 견지 같은 것 말이다. 이를 좀더 정교하게 마치 하나의 사상처럼 개념화한 것이 바로 '이중성격'이다. 복고와 유신, 존왕과 양이, 쇄국과 개국, 국수와 문명 개화, 동양과 서양의 이항대립을 두고 어디를 택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이 대립을 해결할지의 문제는 메이지 이래 줄곧 일본의 궁극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아포리아'이며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자칭 우호적인 연대감 같은 태도와 그들이 실제 벌인 일, 즉 그들이 벌인 전쟁에도 이런 이중성격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자 동시에 '대동아 전쟁', 즉 서양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 우익의 레퍼토리를 전쟁의 '이중성격'이라며 처음 언급한 곳은 전시 기간에 열렸던 '근대의 초극' 간담회인데(72p), 가토 슈이치가 전쟁 이전부터 행해진 일본의 식민지배를 시야에 넣지 않은 채 '15년 전쟁'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듯 가라타니 고진도 이 이중성격을 선뜻 인정한다. 혹자는 이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이 아니라 다케우치 요시미를 비롯해 그가 인용하는 문헌의 저자들의 것이라 반박할 수도 있겠으나 가라타니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이중성의 '해부는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그것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을 긍정하고 다른한편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72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주창했다. 그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이고가 주장한 것은 서양열강에 의한 식민지화를 피하기 위해서 조선이 개국하고 근대화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트로츠키나 게바라가 각각 유럽이나 중남미 나라들의 혁명없이 그들의 혁명이 존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 닮아있다. 혁명수출이야말로 혁명의 방위였다. 메이지 시대에 아시아의 나라들을 서양열강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해방하는 것 즉 메이지유신을 수출하는 것은 그대로 일본 자신의 방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즉 국권에 대항하는 자유민권,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아시아주의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75

 

자국의 식민지화를 피하겠다고 타국을 '개국'하도록 강하게 압박한다는, 자국의 방위를 위해 타국을 '해방'시킨다는 발상에 대해, 또 식민지화를 혁명에 비유하고, '개국'과 '해방'이라는 단어의 '창의적'인 선택에 어떠한 모순이나 부조리도 느끼지 않은듯 태연하게 쓰는데서 가라타니의 '이중성격'도 보이는듯하다. 아시아의 해방과 연대를 일본은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런 주장을 거듭 볼 때면 다음과 같이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와 전쟁을 벌이기 훨씬 전부터 인접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행한 식민지배를 가라타니는 모르는 걸까. 그럴리는 절대 없다. 그럼 왜 모른척 하는걸까. 식민지배라는 사실과 아시아 해방 이라는 명분간의 모순에 대해 그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은 괜한 트집이라고 할 수 없다. 아예 가라타니는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서 가치판단을 배제한 무심한 예언자의 어투로 제국주의를 역사의 필연이라 유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제국주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무의식이자 반복강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션=스테이트는 그 자신을 부정하고 '제국'으로 향하려는 동기를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네이션=스테이트 그 자체의 반복강박이다. 40

네이션=스테이트에 선행한 '제국'의 틀이 다른 형태로 부활한다. 44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국민이나 영토를 이어받고 있다. 그때문에 국민국가를 넘어서려는 운동은 절대주의국가를 넘어 어떤 의미에서 구세계제국의 원리를 회복하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 실제로는 그것은 네이션=스테이트의 연장으로서의 제국주의이다. 59 

 

이를 향후 재연(반복)될지 모를 제국주의에 의한 전면전을 경계하고 근심하는 표현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보다는 합리화나 변명에 더 가까운건 아닐까. 담론공간의 좌반부, 즉 아시아주의의 부활을 은근히 바라는듯한 뉘앙스까지 보노라면 아찔하다. 그 바람을 한마디로 요약한 '자기구제'라는 표현에 대해 독자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를 보면서 나는 잠깐동안 '역사가 정말 반복하는건가'라며 자문해보기도 했지만 곧 그게 아니라 사실은 '역사의 반복'이라는 이 아이디어 자체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견하는 계시적 주장이 아닌 처음부터 과거를 합리화하고 미래를 선취하기위한 자기충족적 발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이션=스테이트가 있기 전에 그 선행으로서 제국주의가 있어야하고 그렇게 태어난 네이션=스테이트가 다시 제국주의로 회귀한다는 이 반복의 논리는 긴 시간을 판돈으로 건 내기다. 맞는지 틀리는지 단시간내에 증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점쟁이나 할 법한 그런 내기.

그의 주장대로 역사가 반복된다면 그 '아시아주의'는 또 다시 제국주의와 결합하는게 아닐까. '아시아주의'가 진정 제국주의의 반대말일까.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던게 아닐까. 질문은 이어진다. 제국주의의 도래는 필연인가. '필연'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목적론적 사고에는 제국주의를 가능케하는 지정학적 조건에 대한 상세한 고찰이 수반되어 있을까. 담론공간의 좌반부를 회복한다는 자기구제가 아시아주의의 부활이라면 그 주체는 일본인가. 즉 가라타니가 말하는 '아시아주의'는 이번에도 아시아 전체가 아닌 일본에 의한 일본의 아시아주의인가.

이렇게 거대한 인식의 간극을 매번 확인할 때마다 '과거사 청산'이나 '역사의 화해'같은 야심찬 어젠다들이 한낱 구호나 캠페인 이상은 될 수 없겠다는 우울한 예상을 피할 수 없다. 어떠한 견해와 입장과 태도를 '의견'이 아닌 '진실'로 확신할 때 거기에 대화와 토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언젠가부터 '팩트체크'라는 단어가 제법 친숙해졌지만 팩트(fact)는 아무리 모아본들 진실(truth)이 아니며 진실이 되기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더해져야 한다. 진실이란 아마도 여러 팩트들간의 관계로부터 형성되는 구조와 맥락에 대한 이해 속에서 도출될테고, 바로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믿음, 해석, 주관' 등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그 무엇이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일텐데 '전체화' 혹은 '총체화'의 성질이 그렇듯이 이는 부분과 전체, 구성요소와 완성품의 관계가 처음부터 아니었음을 점점 더 절절하게 깨닫는 것이다. 저마다의 '진실'이 대립할 때 한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실'이나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므로. 그런 점에서 반복되는 것은 그냥 역사라는 개념이 아니라 역사를 생성하는 힘과 주체와 주관임을, 저자의 의도와는 다소 무관하고 엉뚱한 결론이지만 이 책에서 얻은 내 나름의 '진실'이라 하겠다.

가라타니 고진은 연호 사용으로 인해 서력을 사용하는 외부와의 관계를 망각했던 착각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를테면 메이지 20년대와 30년대가 서양의 '세기말'이었다거나 다이쇼 시대가 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과 동시대라는 것을 미처 연계해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의도적이라며 정곡을 찌른 이가 있다. 장기 '쇼와'를 비판한, 1979년에 쓴 <'쇼와'란 무엇인가: 원호 비판>에서 후지타 쇼조'전후 30년'이 아니라 '쇼와 50년'이라 명명하는건 그저 일본인에게만 의미있는, 따라서 일본 바깥 세계와의 공명이나 연대 그리고 책임을 망각하는 일임을 암시하며 글을 시작한다. 

 

 

이처럼 현재의 역사적 위치는 측정하는 시간의 척도를 어떻게 선택할지는 보편적인 진실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혹은 다시 은폐하는가에 관련되는 근본적인 정신 태도의 문제다.

                                                                                      <'쇼와'란 무엇인가: 원호 비판>(『정신사적 고찰』 중 165p)

 

 

후지타가 보기에 쇼와가 50년 이상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히로히토가 단죄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전 시점에 일본이 할 수 있었던 세가지 선택 즉 천황제 폐지, 그 차선으로서의 히로히토의 폐위, 그리고 그마저도 안됐을 경우 최소한 연호라도 교체를 해야했으나 이 중 어느 하나도 택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쇼와가 50년 이상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연호란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나 정치적 사태를 국가가 인지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시간을 분절해내는 엄연한 정치적 행위였기때문에 천황의 생몰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바뀌어온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존재"였다. 메이지 직전의 연호들, 즉 '분카, 분세이, 덴포, 고카, 가에이, 안세이'를 거치는 동안 단 두 명의 천황이 재위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는 자명하다. 그런데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연호는 "사태에 대응하는" 그러니까 "세계의 사태와 주술적으로 '교감'하는 독자적 정치 기능"을 잃고 일세일원, 그러니까 그저 천황의 생몰을 구분하는 무기적 신호로 변질되고만다. 그 결과 생전에 천황의 시호가 내려지지 않음에도 그의 사망에 의해서만 바뀌는 연호가 사실상의 시호처럼 쓰이게 되어버렸다.

 

그 결과 쇼와라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시간 감각을 소구하게 되었다. 전전과 전중, 전후를 관통하는 일본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을 점유하는 연호가 됨에 따라 그 사용자간에 모호한 시간 감각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누군가 '그리운 쇼와'라고 말할 때 그것이 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고 전쟁을 벌이던 전전과 전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경제부흥으로 물질적으로 여유롭던 전후를 말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시대 구분이라는 연호의 일차적 기능에 있어서 이는 분명 실패다.

 

그렇다면 후지타가 비판한 쇼와가 아닌 헤이세이는 어떨까. 베를린 장벽이 붕괴됨으로써 냉전이 끝나고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본격화된 1989년에 시작함으로써 헤이세이는 나름 세계사와 연동하는 지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버블 경제가 막을 내리고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장기 경제침체를 앞둔 직전의 시점이기도 하다. 또한 냉전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 담론에 가려져있던 소수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직접 발언하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의의 희생자인 위안부의 실명 증언이 처음 나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역사 수정주의와 우경화가 30년 내내 이어져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떠받치기위한 더욱 강고한 일본의 대미종속과 개헌 시도 등이 병행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두 번의 대지진과 옴진리교같은 테러 또한 있었다. 헤이세이(平成)라는 기표가 뜻하는 바가 별로 이뤄지지않은 시대였던 셈이다.

 

쇼와처럼 연호를 교체했어야 마땅할 정치적 과실이 아키히토에게 없는지 몰라도 유신 이후 최초의 생전 퇴위가 상징천황으로서 그 상징마저도 짊어지기 버거워 내린 선택이라면 이는 후지타가 말한 자기 정재성이나 사태에 대한 대응의 결과라 판단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징 천황이라는 지위를 고려해 퇴위를 아베 정권에 대한 나름의 수동적 투항이라 보는 논평도 가능은 하겠으나 지나친 상상력과 의미 부여에 가깝다. 지금 아키히토의 퇴위를 둘러싼 일본 내외의 담론이 허황하게 보이는 면도 여기에 있다. 1월1일로 날짜가 바뀐다고 해서 당장 개인의 삶의 실질이 격변하지는 않음에도 신년에 맞춰 새로이 각오를 다지듯이 새 연호를 맞는 일본 국민들의 심정에 미치는 감회는 실재하고 존중해야하지만 실권 없는 상징일 뿐인 인간의 교체와 그에 맞추어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는 기표만 바뀐 또다른 상징 기호의 교체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담으려는 일 자체가 넌센스같아 보인다면 그건 새 연호의 한자 선택과 풀이, 나루히토에 대한 인물평, 향후의 정국 전망 등 지금의 관행적 보도 속에 정작 뭔가 빠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전 퇴위로 인해 연호가 그저 천황의 생몰을 표시하는 기호가 됐다는 후지타의 비판은 이제 철회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를 기회로 연호를 계속 써야하는지, 연호가 과연 필요하긴한지, 그리고 더 나아가 천황제 존속 여부 같은 더 근원적인 논의에 대한 소식은 듣기 힘들었다. 아베는 이번에도 기민하게 개입하여 자신의 정치적 과실을 얻는데만 주력하는 듯한데 연호 교체를 개헌과 어떻게든 연계지으려는 그의 발언은 후지타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연호의 새로운 쓸모를 보여주는듯하다. 그동안 사물이나 사태에 대응해 연호가 바뀌어왔다면 아베는 거꾸로 새로운 연호 교체에 맞추어 정치적 사태를 도모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권자가 상징만을 가진 자를 농락하는 양상이랄까.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는 개인들의 감개와 무관하게 권력이 왜 그렇게 "시간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하려하는지, "'시간'의 국가적 영유"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는 지금이야말로 적기가 아닐 수 없다. 천황기관설 논쟁, 국체명징운동, 2.26사건, '성단'이라는 표현, '패전'과 '항복'이라는 표현이 없는 종전조칙, '인간 선언' 그리고 그 선언을 하고도 지속적으로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했던 히로히토까지 이 모두는 민주주의 체제보다 위에 놓인 천황제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키히토가 아무리 반전과 평화를 지향해도 정작 집권세력이 그를 방패막이 삼아 자신들의 우경화를 밀어붙일 수 있던 것도 실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천황과 무관한 천황제가 있기에 가능하다(링크).

 

어쩌면 훗날 역사는 나루히토의 인품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레이와를 개헌에 의해 평화 헌법이 폐지된 시대로, 아시아의 비극이 재연된 시대로 기억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새 연호의 한자에 관한 뜻풀이와 의미에 대한 해석보다는 새로운 연호를 맞은 일본이 과연 폐쇄적인 시간이 아닌 외부 세계와 연계된 보편적 역사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더 가깝다. 매일 사용하는 사이에 자명하게 되어버리는 "인습의 근본적 성질을 성찰의 울타리 밖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닉슨 하원의원은 미국에서 잘 성장한 이민자의 아들이자 미국인 자본가에 의해 아들처럼 여겨지며 하버드에도 입학할 수 있었던 사람이 왜 미국 경제 체제에 불만을 갖는지 물었다. 
  내가 한 대답은 온전히 나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겐 그 무엇도 온전한 나의 것이 없다. 나는 나의 영웅이었던 케네스 휘슬러가 아주 오래 전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해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휘슬러는 폭력 혐의로 기소된 시위자들에 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재판관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고, 명망가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 같은 사람이 왜 노동 계급에 헌신했는지 물었다. 
  내가 휘슬러로부터 훔쳐 닉슨에게 했던 대답은 이랬다. "왜냐구요? 산상수훈을 따른거죠 의원님"
  녹음된 레코드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 파티에 모인 사람들로부터 정중한 박수가 나왔다. 
  굿바이. 
                                                                                                                       -월터 F 스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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