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가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길하고 음울한 기운으로 휩싸여있고 소노 시온의 도쿄가 온갖 범죄와 폭력과 사회 병리 현상이 들끓는 카오스라면 이치카와 준의 도쿄는 전철로 통근을 하고 가게를 열고 산책을 하며 사람들이 생활을 일구어가는 터전이다. 이때 물론 이치카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오즈를 참조하며 은근히 그의 적자가 되고 싶어한다. 오즈의 시그니처중 하나인 지상으로 달려가는 전철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도쿄3부작'의 마지막편 <도쿄야곡>(1997)은 과거의 연을 묻어두고서 모른척 하려하지만 여전히 얽매여있는 중년의 세 남녀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과거를 전해 들으며 옆에서 지켜보는 젊은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오사와의 죽음 이후 마을을 떠났던 코이치가 이십년만에 돌아온다. 거리를 두고 데면데면 하려 하지만 코이치와 과거 그의 연인이자 생전에 오사와의 아내였던 타미 그리고 코이치의 아내 히사코까지 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어져있다. 예를 들어 타미가 오사와를 간병하다가 결혼하게됐다는 사실을 아사쿠라가 사진관에서 알게되는 장면이 지나면(정확히는 그 바로 뒤에 코이치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타미가 전화로 전해 듣는 장면이 지난 후) 이번엔 시아버지와 코이치의 깁스를 풀기위해 들른 병원 진료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히사코의 옆모습이 보인다. 짝사랑하던 남자의 결혼식이 열리던 날 타미의 가게에서 열린 피로연 자리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레코드 가게 아가씨의 에피소드도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서 기능한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을 거치는동안 정작 만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고 곧잘 어울리지만 그들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은 타인이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반부에 아사쿠라는 직접적으로 히사코에게 묻는다. 오사와에겐 따로 연인이 있었고 타미도 그를 좋아하지않았는데 둘은 왜 결혼했나요? 오사와를 정말 좋아했던건 당신 아니었나요? 당연히 대답을 들을리는 만무하다.

 

남편이 죽은지 이십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가 운영하던 가게와 마을을 떠나지못하는 타미, 그렇게 오래 떠나있었으면서도 결국 돌아와 다시 그녀와 얽히고마는 코이치, 집을 떠나있는동안 남편이 어떻게 살았는지에는 관심없다며 강한 척하지만 타미와 마찬가지로 가정도 마을도 떠나지못하는 히사코까지, 오사와의 존재와 그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철저히 사로잡힌 그들에게 현재란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물론 마을을 떠나는 것. 코이치가 오랜 세월을 보내긴했지만 결국 돌아옴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면 이번에는 당연히 타미의 차례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쿄가 아닌 장소에서 새출발하는 그녀의 밝고 힘찬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치카와 준의 영화를 본다는건 결국 풍경과 사물만 담겨있는 정물샷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인물을 바라보는 화면으로부터 무엇을 볼 것인가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들을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변별점이 된다. 상투적인 줄거리도 그래서 특유의 이러한 연출법과 결합하면 그 함의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요모타 이누히코는 다큐멘터리처럼 찍힌 인서트 샷들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93년작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서 그 장면들을 환자들이 입원 전 자신들의 일상을 회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전혀 극화되지않은 다양한 실제 삶의 정경들이 담긴 그 시퀀스들은 러닝타임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뿐만 아니라 인상적으로도 깊이 각인되는데, 이를 과거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치카와 영화에 대한 요모타의 '노스탤지어적 시선'이라는 관점은 견지된다. 반면 나는 이것이 회고라기보다는 환자들이 병원 밖 활기찬 저 삶의 풍경들로부터 서서히 죽음으로 건너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극의 세계와 논픽션인 실제 삶의 현장, 또 병원 안 환자들과 실외에서 야외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대조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를 서서히 그러나 또렷하게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처음 보자마자 결말이 훤히 보일 것 같은 줄거리임에도 이러한 연출로 인해 낡아보이지않는다는 점에서 이치카와 준은 (cm감독답게) 자기만의 분명한 영상 어법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의 느낌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노력, 인물을 향해 들어갈 땐 아주 가까이, 떨어질 땐 멀찌감치 떨어지는 특유의 시점샷에 더해 이 영화는 서민들이 모여사는 상점가 분위기 묘사가 특히 발군이다. 첫장면을 포함한 영화의 초반부 타미의 깃사텐의 분위기를 어떻게 그리는지 보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바둑을 두거나 차를 마시거나 혼자 책을 읽는 손님들이 각자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레코드 가게, 사진관, 서점, 그리고 코이치가 운영하는 전자제품 대리점까지 여러 종류의 상점과 그곳의 손님들의 묘사도 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즈를 향한 오마주가 있다. 한낮과 해질녘의 강가, 가로등이 켜진 거리, 가게 앞에 세워둔 간판들이 들어찬 골목, 수많은 전깃줄이 뒤얽혀 어지러운 전신주같은 정지된 스틸샷에서 그는 오즈를 향한 경외를 숨기지않는데 맨마지막에 이르면 툇마루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는 코이치를 흡사 오즈와 거의 같은 높이의 다다미샷으로 포착하기까지 한다.

 

이렇듯 형식에서 오즈를 의식하고 내용적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그다지 결말이 궁금하지않은 무난한 드라마를 연이어 발표하던 8,90년대의 이치카와 작품들을 요모타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 그러나 재생과 회복 혹은 억압과 해방은 거의 모든 영화에 해당하는 주제이자 사실상 모든 이야기의 원형 같은 것인지라 이러한 분류는 얼핏 게으른 비평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힘차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타미를 보여주며 끝나는 이 영화에 그리고 '도쿄 3부작'에 일관되는 두드러진 공통점인 것은 맞다. 마지막에 마을을 떠나는 두 인물이 타미와 아사쿠라라는 점은 자못 대조적인데, 한 명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위해서이지만 다른 한 명은 끝까지 마을과 사람들에 어울리는데 실패한 채 이방인으로서 밀려난다는 인상을 남긴다. 


작년에 나온 <동경남매> dvd와 초기작들과 미완성 유작을 모아놓은 박스셋, 그리고 최근 크라이테리언에서 hd로 복각한 <회사 이야기>(1989)처럼 최근들어 이치카와의 영화들이 천천히 다시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훗날 전작을 일별하는 것이 가능한 가운데 더 합당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도쿄야곡>이 보통사람들의 소탈한 생활, 노스탤지어적 시선과 정경 묘사, 인물들이 겪는 작지만 큰 상실, 또 그만큼의 재생과 회복이라는, 이전과 이후의 장편과 cm을 통해 꾸준히 변주해온 소재와 양식이 담긴 대표작 중 한 편임은 분명하다. 이후 1999년작 (제목에서부터 <도쿄 이야기>를 연상시키는)<오사카 이야기>까지 이러한 상실과 회복 또는 억압과 해방이라는 플롯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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