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를 보러가다(2014)
지난 2년간의 연말포스팅에서 오키타 슈이치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직업 세계를 연거푸 묘사한다고 말했었는데 본인도 이런 지적을 알고있는지 이번에는 남성이 전면 배제되고(단역의 두명과 약간 비중있는 가이드 역까지 총 세명이 나오긴한다) 특정 직업과도 무관한, 중년 주부들의 가을 단풍 여행이라는 소재로 신작을 완성했다. 한계상황 하에서의 군상극, 즉 인물들을 한정된 시공간 안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코미디를 관찰한다는 플롯은 유지된다. 그러니까 인물의 성별만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일본영화 특유의 학원스포츠만화적 정서, 즉 다같이 힘을 내서 열심히 해보자는 식의 작위적인 드라마가 없고 한정된 공간에 있다보니 점차 인물간의 허물과 장벽과 내숭이 사라지면서 솔직한 대화와 행위들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긴했다. 한국 아줌마들을 보는듯한 느낌도 살짝 들고. 상영시간도 짧고 전반적으로 소품같은 인상이지만 괜찮은 우회전략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될 때 제목이 <에코테라피 여행>이었는데 내 생각에 힐링 영화란 자고로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아하게 있어야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힐링영화는 아니다. 머리카락,얼굴,옷에 흙이 묻는건 물론이고 시간이 갈수록 인물들 외양이 점점 더 추레해져가는데 힐링 영화란 이런 식의 고생의 경험이 배제됨은 물론 기획에서부터 염두에 없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장 긴 하루(1967)
히로히토가 순전히 일본 국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성단'을 한 것으로 묘사하는 가증스러움으로 인해, 이 영화가 겉으로나마 미구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한다해도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어전회의에 참석한 각료뿐만 아니라 히로히토 스스로도 폐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면책을 포함 철저히 자신의 지위보전에만 매달렸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기록이 말하고있는 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히로히토 보호의 주장을 육군대신인 아나미가 주로 하는 것으로 처리되어있고 히로히토 본인은 자신의 앞으로의 지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국체호지파가 계획한대로 철저히 수동적인 천황상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목소리만 나올뿐 얼굴은 전혀 나오지않는데 그런 점에서 2015년 리메이크판에서는 유명 배우인 모토키 마사히로가 히로히토를 연기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하겠다. 감독이 위험을 감수한만큼 과연 그에게 어떤 드라마를 부여했을지 궁금하다. 하긴 1967년판에서야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히로히토를 일개 배우가 연기한다는건 불가능했을테고 거기에 더해 영화 제작 시점으로부터 불과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만큼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67년작을 생존해있던 실제 히로히토가 과연 어떻게 봤을지 일견 궁금해졌다. 다시금 말하지만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 도요시타 나리히코의 <히로히토와 맥아더>를 읽어보면 본편에서 히로히토의 처신에 대한 묘사가 사실에 어긋남을 알 수 있다.

 

회사 이야기(1989)
버블이 터지기 직전, 아직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 보장되던 80년대 말, 청년시절엔 미국의 재즈음악을 논하고 직접 연주까지했으나 경제부흥시기 샐러리맨이 되고 큰 위기없이 안정적으로 회사 생활을 이어가면서 정년을 맞게 된 세대들의 애수가 그려진다. 이야기는 성긴 편이지만 이치카와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연출과 편집은 유지된다. 전체적으로는 cf에 익숙한 연출스타일이 장편 영화의 서사를 끌어가는데 있어 부분적으로 벅차보이는 면에서 초기작답지만 어쨌건 이치카와의 작품을, 그것도 초기작을 hd로 감상했다는데 나름 의의가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81)
고바야시 카오루는 <소레카라>에서 발연기를 시전한 바 있는데 그보다는 볼만하다. <소레카라>보다 3년 전에 나온 이 영화는 젊은 감독의 치기도 패기도 다 있는데 뭔가 좀 지루하다. 하긴 원작 자체가 토막난 에피소드들의 자잘한 나열처럼 되어 있긴한데 영화도 뭔가 좀 아마추어스럽다. 그가 80년대에 쓴 어느 에세이에 후배인 이 영화의 감독과의 추억이 언급되어있다.

 

백엔의 사랑(2015)
안도 사쿠라는 2014년 제목에 숫자가 들어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본편은 친언니가 연출한 <0.5미리>보다 훨씬 미덕이 많은 영화인데 우선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관찰자이자 가이드 정도에 머물렀던 <0.5미리>에 비해 본편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진짜 주인공이다. 타인을 변화하도록 돕는 인물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변하는 인물.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젠더를 이분화하고 양쪽 세계를 범주화한다. 이치코가 뛰쳐나가기전에 살던 집은 아버지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식물에 가깝고 엄마와 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 주도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집을 뛰쳐나가 그녀가 본격적으로 프리터 생활을 시작하자 집 바깥은 남성과 그들의 가치로 규범화된 세계인 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의 직원들 그리고 그녀가 매혹된 권투라는 스포츠와 도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남성적 세계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만나는 여성은 편의점 물건을 도둑질해가는 중년 여성과 남자친구를 빼앗은 여자 정도인데 이치코는 앞의 여자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지만 그런 그녀도 마지막 순간엔 남성과 싸우기보다는 그 세계에서 아예 탈출해버린다. 이치코가 결국 이 남성 세계에서 버텨내지못한다는 것은 마지막 시합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명시된다. 권투 영화에서 더 이상 새로운 뭔가를 보여준다는게 불가능함을 알고있었던듯 감독은 남성세계에서 승리는 하지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낙오하지않고 버텨내려는 여성의 몸부림을 격투 스포츠를 가져와 돌파해내려한다. 

 

0.5미리(2014)
'금수저' 감독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만든 영화. 실제로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인 두 배우가 드잡이를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노인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소외된 그들과의 소통을 하려한다는 주제는 마지막에서 방향을 튼다. 

 

음악(1972)
거세공포, 네크로필리아, 근친상간, 살인충동 등등 프로이트를 처음 읽고 흥분한듯한 미시마 유키오의 기초 정신분석학강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감독의 일생(1975)

영화감독을 소재로 한 다큐는 거의 예외없이 다 재미있다. 정작 그 감독의 연출작은 재미없을지 몰라도. 올해 본 영화감독 다큐로는 알트만, 조도로프스키, 니콜라스 레이, 로만 폴란스키, 허우 샤오시엔,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가 있었는데 이 미조구치 다큐의 경우, 잘 나가다가 말미에 연출자이자 인터뷰어인 신도 가네토가 인터뷰이인 대배우 다나카 기누요에게 미조구치와의 연애사를 계속 캐묻는 장면이 너무 집요해 보였다. 존경심을 담은 인터뷰어에서 돌연 파파라치로의 변신을 보는 기분. 하긴 애초에 여기서 신도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의 인터뷰어나 화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중간중간에 스스로 인터뷰이만큼의 자기 서술을 집어넣고 있다.

 

밴쿠버 아사히/우리 가족(2014)
<밴쿠버 아사히>의 경우, 이민사를 마치 피식민역사처럼 그리는걸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난감하게한다. 1년동안 두 편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아무래도 무리수가 보이는데 <우리 가족>에서 그 밑천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말해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족드라마의 외양을 뒤집어쓴 부조리극같은 느낌. 의사는 치매에 걸린 엄마가 어떻게 1주일 안에 죽는다고 진단을 내리는가? 갑자기 영화의 줄거리는 왜 집안의 불안한 재무상태를 해결하려 뛰어다니는 것으로 바뀌는가? 그래서 장남의 왕따 경력은 도대체 지금 줄거리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술집에서 갑자기 만난 여자는 무슨 기능을 하는가? 가장 어이없는건 결말부에 이르러 갑자기 광속으로 술술 풀려가는 갈등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며느리의 갑자기 달라진 태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 의사의 등장, 갑자기 상냥해진 며느리에 앞에서 여전히 흰소리만 계속하는 아버지까지. 훈훈한 가족드라마의 외양을 하고 있는데 들여다보면 부분부분이 다 넌센스하다.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서 무려 5위. 이 감독은 과대평가받는 면이 분명 있다.

 

만(1964)/열쇠(1959)
다니자키 준이치로 원작의 영화 두 편. <열쇠>는 언젠가 케이블 심야시간에 97년작도 봤더랬다. 다니자키 영화에 최적일듯한 마스무라 야스조가 원작에 전혀 손을 대지않고 거의 그대로 옮긴 반면, 원작의 주제의식까지 바꿔버릴 정도의 권선징악적 결말을 택한 이치가와 곤의 대조가 확연히 대비된다.

 

호텔 하이비스커스(2004)
한 국민국가내 소수자들의 로컬성을 내세운, '내수용 영화'가 아닌 '로컬 시네마'. 하지만 특수성과 로컬리티를 내세울수록 그것이 공감을 얻기보다 자기특권화에 의한 고립이라는 원하지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않은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남자의 일생
전형적인 순정만화의 전형적 실사화. 철학을 가르친다는 중년의 주인공은 정작 철학의 철자도 입밖으로 꺼내지않고 두 주인공의 동기와 행동들은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않는다. 젊은 여성들의 중년남에 대한 그쪽의 인기와 무관하지않다고 하더라만 그런거 모르는 입장에서는 술술 '그냥' 넘어간다. 

 

남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2008)
<니시노 유키히코의 사랑과 모험>을 보고나서 이구치 나미의 전작을 찾아보고 싶어서 본 영화. 전대미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류영화에서 좀처럼 보기드문 여성캐릭터가 나온다. 특히 처음 아틀리에에 둘이 있을 때의 나가사쿠 히로미의 연기는 압권.

 

지도 없는 남자 (1972)
'시대를 앞서가는' 것보다 당대와 발을 맞추는 동시대적 감각이 더 뛰어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얼굴>(1967)에서 일본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았던 감독의 72년작. 야쿠자물같은 통속범죄물이 유행하던 시기에 나왔지만 그런 류의 영화들보다 더 '멋이 있다'. 갈수록 더 갈라파고스화 되어가는 일본 영화를 보면 이런 동시대성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 

 

바느질 위의 인생 (2015)
해피해피 브레드도 그렇고 (해피해피 와이너리는 못봤다) 이 영화까지 보고나니 이 감독에 대해 어떤 감이 선다고할까. 치유계 영화의 형식과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페티시화되어 알맹이는 쏙 빠진채 '폼'과 껍데기만 있는 영화. 플롯은 커녕 줄거리랄 것도 없고 국적불명같은 장소와 공간(심지어 시간도) 위 에서의 '연기'만 있다. 보고나서 나카타니 미키의 단발이 잘 어울리더란 인상만.

 

사무라이 반란(1967)
<할복>과 마찬가지로 계율, 명분, 위신, 체면, 전통 등등에 의해 생기는 부조리를 다룬 '옛날이야기'같은건데 다만 감독이 자신의 연출력으로 이를 긴장감 팽팽한 두시간짜리 드라마로 끌어간다. 기실 <할복>이나 본작이나 다 같은 이야기이다. 가치관 차이에 따른 부조리해보이는 갈등이라고 요약은 할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사극의 시공간 위로 근대 이후의 인간이 떨어져서 생기는 일종의 문화지체에 따른 갈등이 본질. 즉 사극 무대에 페미니스트, 인권보호주의자, 인종차별반대 운동가 등의 활동가가 떨어지는 격이다. 여기서 주인공인 미후네 도시로의 가문은 처음부터 줄곧 멸시당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았던 아버지가 돌연 전향해 아들과 뜻을 같이한다. 국가가 아닌 자신이 모시는 군주로부터의 명령만 따르던 자가 돌연 이제는 군주도 버리고 자기 가문의 명예를 더 중히 여기는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의 아버지는 당대의 사람이 아니라 조금 더 먼 미래 혹은 아예 전형적인 근대인에 가깝다.

 

라운드 어바웃 미드나잇 (1999)
재즈 선율을 배경으로 한밤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낭만적인 활극. 도시의 밤 분위기를 재현하고 싶었했음을 이해하는 관객은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 액션 장면 연출은 좀 허술하지만. 사나다 히로유키와 무려 이가흔이 나온다. 사나다의 립싱크와 핸드싱크가 꽤 그럴듯해서 연습을 열심히 했음이 보인다.

 

리얼 술래잡기(2015)
노골적으로 게임 진행방식을 빌려와놓고 나중에 이것을 대단한 반전인냥 풀어내는건 좀 안일하지않은가. 이름과 캐릭터의 변화보다 복장의 변화에 주목할 것. 남성이 주도하는 현실세계에서 여성이 늘 경계하는 강간의 공포를 비유해서 게임화(그걸 다시 영상화)했다. 맨마지막 장면, 그렇게 러닝타임내내 피칠갑을 하던 영화가 맨 마지막에는 순백의 설원에서 핏자국하나없이 미츠코가 일어나 달려가는 엔딩을 통해 '남성'이 만들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세계의 이름 그 자체가 곧 '남성'인 그곳에서 끝까지 피를 보지않고 즉 남성에게 처녀성을 뺏기지않은 채 탈주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자결함으로써 얻은 도주라는 것이 함정. 최근 몇년간의 소노 시온 영화들이 전부 남성영웅의 구원 서사로 일관했다는 점을 의식한듯 그것을 뒤집는 척한다. 남성 감독이 창조한 '남성' 세계의 구성원들이 만든 가짜 세상에는 여성들만 존재한다. 각 스테이지마다 처음엔 소녀나 여성이 등장하는 장르물의 클리셰처럼 진행하다가 뒤집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여성을 살육하는 남성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 여성이란 그저 남성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만든 캐릭터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 애초부터 대등한 주체간의 대립일 수가 없고 그저 전체와 무(無)라는 절대적 비대칭 관계로서의 남녀관계를 은유한다. 최근 2년 사이 쏟아져나온 소노 시온의 범작도 되지못하는 태작들의 연속 속에서 그나마 옛날 느낌이 살아있다. 근데 영화감독이라는 사람들은 피묻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에 대한 로망이 다들 있나보다.

 

신주쿠 스완 (2015)
그러나 전술했듯 소노 시온의 최근작들은 편협한 내 눈으로 보기엔 거의 다 범작 이하. 그중 이 영화는 올해 본 최신 일본영화 중 최고 망작. 극단적 통속성을 밀어붙이면 대개 둘 중 하나의 효과가 발생한다. 누구나 다 아는 통속성이기에 더 진하게 전해지는 진정성 아니면 그 익스큐즈된 이해로부터 기인하는 안전함이라는 표피로의 퇴행. 

 

바다와 독약 (1986)
그해 키네마준보 1위작인데 결말부에 그냥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서 구구절절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문학작품의 영상화로는 명백한 실패. 인권이 무시되며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 해지는 전시 상황이다보니 전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그것도 다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거 같긴하지만. 

 

취업전선 이상없다(1991)
1990년대 초 그러니까 잃어버린 10년 아니 20년이라는 일본식 장기불황이 시작되던 즈음 구직시장에 뛰어든 대학졸업반 청년들의 구직활동을 다룬 영화. 그다지 심각하지않고 상업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선을 절대로 넘지않는다. 우리의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는 기분으로 그때 90년대 패션과 헤어스타일, 화장법 따위를 의사고고학적 취향으로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이쪽은 '재연'이 아니라 실시간이지만. 춤추는 대수사선으로 브레이크하기 이전의 오다 유지가 주인공이고 요즘은 경찰청수사1과9계로 알려진 하다 미치코도 나오는데 메인여주는 와쿠이 에미. 이분은 최근 들어 어머니 배역을 시작했다.

 

엔딩노트(2011)

유한계급 사모님의 나이브한 현실인식을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의 진중했던 미망인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러브 앤 피스(2015)

보고나서 적었던 메모들. 1.남녀주인공의 흰머리. 남주의 흰머리는 그가 데뷔하고 성공하면서 조금씩 사라지는데 여주는 그대로. 생활의 각박함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을 보여주고 싶었던듯. 2. 남자주인공은 펑크락커로 데뷔해 점차 글램락 스타일로 변신해감. 3. 마츠다 미유키는 최근 몇년간 실제로 반전반핵 활동가로서 살아왔는데 그런 면모가 본작의 짧은 출연에 반영되어 있음. 4. <지옥이 뭐가 나빠>에서 나오던 '그 노래'를 극중 밴드인 레볼루션q가 부름. 5.최악의 건축물 중 하나라는 도쿄도청을 파괴하는 막판의 클라이막스는 쾌감을 준다기보다 그 조악함때문에 패러디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온화한 일상(2012)
신랄한 반어적 제목. 전혀 온화할 수 없는 사태를 직면하고도 어째서 계속 온화한 일상을 사는 척 할 수 있느냐는 되물음.

 

후쿠후쿠장의 후쿠짱(2014)
이번에도 주류에서 벗어난 소외된 괴짜,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운 이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평범하지 않은, 뭔가 좀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이고 동시에 외로운 사람들.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괴상함은 더욱 괴상해보이는데 이들을 향해 감독은 연민일 수도 있고 애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동료이고 친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대한다. 일단 주인공이 연기를 잘해.


계엄령(1973)
자막이 영 엉터리인지라 애로우에서 나온 새 박스셋의 자막으로 다시 보고 싶다. 무려 기타 잇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2.26 쿠데타를 주도한 젊은 황도파 장교들에게 그가 그저 사상적 배경과 영감을 제공한 것에 그치는게 아니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가운데 본원으로서 공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이 영화를 보고야 알았다. 총살도 그래서 당한거였음.

 

비상선의 여자(1939)
하스미 시게히코가 뽑은 올타임 아시아 탑텐 중의 한 편. 같은 어둠을 안고 있는 하층계급의 두 남녀 중 남자가 자기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여성에게 끌리면서 생기는 관계의 균열에서 비롯하는 멜로와 서스펜스의 조우. 익숙히 보아온 이야기의 초기 버전을 직접 확인할 때의 재미와 쾌감이 있다.

 

대살진(1964)

일년 전에 나온 <13인의 자객>(1963)과 사실상 똑같이 후반부가 전개된다. 그런데 각종 덫과 부비트랩 및 비밀장치등을 준비하고서 꽉 짜인 계획 하에 적을 한 공간 안에 몰아넣은 뒤 그 안에서 살육전과 학살을 하는 전작에 비해 본편에서 무사들은 무계획과 막무가내로 그냥 적들에 돌진한다. 물론 이런 무대책은 결국 그들의 패배로 끝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처음 정치적으로 각성된 주인공에 비해 끝까지 정치로부터 물러서 방관하는 입장을 보이던 인물이 처참하게 죽은 그들의 시체를 본 뒤 주인공의 손에 들려있던 칼을 잡고 대신 나서 기어이 못다한 그들의 목적을 완수한다. 바로 이걸 보여주고싶어서 감독은 일부러 전작과 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대응을 보여준게 아닐까. 외부에서 거리를 둔 채 방관하던 사람들(백성 일반)의 분노와 정치적 각성 그리고 이를 통한 행동을 촉발한다는 결말.

11인의 사무라이(1966)
제목에서부터 짐작 가능하듯 <13인의 자객>의 비공식 연작으로 볼 수 있지만 이번에는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대목들도 있다. 비오는 낮시간의 살육전, 대의를 위해 뭉친 무리에 끼어든 실력을 감춘 방랑무사라는 설정. 앞에 이미 <13인의 무사>와 <대살진>에서 보여준 게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 없었을텐데 여기서는 규칙과 변칙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탄다. 13인의 자객이 철저하게 짜여진 규칙대로였고 <대살진>이 아무런 계획없이 임시변통으로 혹은 막무가내로 돌진해들어갔다면 이번에는 그 둘을 잘 버무려서 처음에는 계획을 치밀하게 짠 매복전을 계획하다가 그 계획이 버려지고 주군의 할복을 목격한 뒤에 다들 분노하고 흥분한 상태로 대강의 동선과 계획만을 임시로 짠 뒤 적에게 향한다.  <7인의 사무라이>도 생각나긴하지만 어쨌든 활극 연출에 있어서 쿠도 에이이치는 개싸움의 면모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남는게 없고 그저 죽음이라는 관념만이 남는듯 처절하게 싸우다 모두 다 죽고마는 전장의 살벌함은 뒤에 페킨파가 영향은 안받았겠지만 여하튼 그가 처음은 아니었음을 알게 했다. (이 3부작이 와일드번치보다 앞서 나왔으므로)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2015)
히마이즈미 세이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이한 목소리라서 1인 2역을 한게 티가 난다. 두번째 노인 역할에서는 <이키루>의 그네 장면을 오마주 하고 있다. 전작과 플롯상의 유사점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는데 이를테면 모든 사건의 시작은 하나의 짝사랑이고 그를 도와주려다가 앨리스는 자신이 오인당하거나 오인을 해서 엉뚱하게 말려든다는 플롯이 반복된다. 전작의 인물들이 거의 다 목소리에 참여했고 잘 나가는 쿠로키 하루가 합류. 이미 촬영이 끝난 이와이 슌지의 차기작인 실사영화에선 주연이다. '아리스'는 성이고 '하나'는 이름이라는걸 이제 알았네. 하여간 이와이 슌지의 소녀만화 감성은 독보적인거 같음.

 

묵동기담/애처 이야기/오니바바/호쿠사이 만화
올해 본 신도 가네토 영화들. <호쿠사이 만화>는 보면서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짙어지길래 연극 원작이 아닌가 했는데 맞았다.


쓰루하치 쓰루지로(1938)
왠지 기시감을 느끼게하는 줄거리였다. 철저히 비즈니스적 관계로 협업하는 남녀가 있다. 일하는 공적 세계에서는 최상의 파트너십을 구사하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만 사적으로는 늘 투닥거리는. 하지만 사실 보이지않는 남녀간의 애정의 선이 미묘하게 걸쳐져있고 둘은 공적 세계와 사적세계 간의 경계를 외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결국 어떤 계기로 결별을 하게되는데 여자는 부자 남편을 만나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영위하지만 직업 세계에 끝까지 남은 남자는 조금씩 전락을 하게되고 그런 부침을 보지못한 주변인들의 노력으로 두사람이 다시 합작을 하고 여자도 다시 자신의 기예를 통해서 사적 세계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 남아있을 때 느끼지못한, 한때 잊고있었던 전문가로서의 희열을 되찾지만 남자는 불안정하고 임시적이고 찰나같은 인기로 굴러가는 이 직업세계에 여자를 다시 발들이게 할 수 없어서 매정하게 여자를 내쫓는다. 비즈니스로 맺어진 남녀의 애매모호한 애정관계를 조명하는 이런 줄거리의 영화나 드라마를 숱하게 봐온거 같은데 하여간 이렇게 아주 원형적인 이야기를 딱딱 떨어지는 반듯한 연출로 끌어간다.

 

오하루의 일생(1952)
산쇼 다유와는 반대의 결말. 남성들에 의해 착취되어 전락하는 여자의 일생을 쫓는다는 점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릴 수 밖에 없게 한다. 배우자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되고 부정된다는 점에서 가부장제 착취를 전면에 드러낸다. 남성은 그녀를 이용하고 버리거나, 그런 악의는 없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곤란에 빠뜨리는 존재로만 나온다. 철저하게 남녀의 대칭 정확히는 대립으로 가장한 종속이 계속되는데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성별, 연령, 계급이라는 요소가 더 부각된다. 본편에서 근대적인 로맨스를 꿈꾸었던 오하루는 최초에는 계급에 의해 부정된다. 무엇보다 그녀가 분란을 일으킬 때마다 집 그러니까 본가로 되돌아온다는 설정이 반복되는데 그 집이 결코 안식처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다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최초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장소로서의 의미가 있다.


밝은 미래(2003)
hd로 복각된 버전을 10년만에 다시 보는데 마츠야마 켄이치가 체 게바라 군단 중 한명이며 아사노 타다노부의 동생이 카세 료인줄 이제야 알았다. 고화질로 다시 보니 hd가 아닌 sd 디지털 카메라의 질감이 더 생생하다.

마호로 역전 광소곡(2014)
1편과 드라마까지가 좋았지. 막판 버스 납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도 안되고 어색하고 도무지 설명도 납득도 안됨. 이 영화 개봉 바로 석달 전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 원작의 tv드라마 <베드로의 장렬> 의 첫회 버스 납치 시퀀스가 몇 배는 더 훌륭하다.

나의 하와이 산책(2014)
이 감독은 두 편 연속 카세 료를 여주가 스쳐가는 남자 중 한명으로 만든다. 전체적으로는 sp같고 하와이 풍광을 큰 화면으로 본다는거 빼곤 딱히 내수용 영화로서도 메리트가 없어 보인다. 정규앨범에도 실린 다케우치 마리야의 엔딩곡만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취우(1956)
권태기에 빠진 부부의 무료한 일상과 생활에 대한 묘사는 교본으로 삼아야할 정도로 전형적인데 그 속에서 삐쭉삐쭉 튀어나오는 갈등을 돌출시키는 디테일한 표현이 나루세답다.  

 

꿈과 광기의 왕국(2013)

왕국의 몰락의 전조를 기록했다는 의의가 있는 다큐멘터리

 

료마 암살(1974)
료마를 혁명가라기보다는 한량에 호색한으로 묘사한다.

 

누드의 밤: salvation(2010)
아주 표준적이고 전형적인 일본식 착취영화를 본 느낌. 93년 1편 볼 때는 그렇게 못 느꼈는데 여기서는 아주 노골적이다.

 

제대로 전해(2008)
소노 시온이 만든 '가족영화'. 악취미넘치는 막판의 클라이맥스를 만들기위해 앞쪽의 줄거리가 '억지로' 짜여있는듯 하다.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1986)/ 20세기 소년 독본(1989)
하야시 가이조 영화 두 편. 노스탤지어, 예능인, 유희, 유랑극단, 무성 영화에 대한 경배라는 공통점.

대유괴(1991)/에부리만씨의 우아한 생활(1963)
오카모토 키하치 감독의 두 작품. 전자는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로 알려져있고 후자는 당대에 유명했던 에세이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만 빛난다(2014)
키네마 준보 1위라는게 좀 놀라웠다.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다는 우리나라의 모 독립영화의 영향이 좀 보이고. 아무래도 주류 일본 영화에서는 좀체 보기 드문, tv 드라마스러운 연기와 연출상의 억제가 보이긴한다(어차피 지금 일본영화와 tv드라마는 그다지 잘 구분이 안되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어느 선을 넘지 않고 딱 멈추려는 태도가 덜 보이고 그나마 좀 '세보이는' 척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 그들에게는 신선해보였을지 모르겠으나 이것도 이쪽에서 볼 때는 다분히 작위적으로, 그래서 위선이 아닌 이번엔 위악을 택한건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빠를 찍으러(2012)
줄거리만 놓고보면 지극히 tv드라마스러운데 정작 보고나면 그렇지 않다.

 

내 남자(2013)

<성소녀>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떻게 될까. 앞의 책은 읽었으나 정작 이 영화의 원작은 아직 못 읽었는데 나름의 반전의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영화와는 자못 인상이 다르다고. 

 

기온의 자매들/오사카 엘레지(1936)

전자가 후자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어쩔 수 없이 부박한 삶을 살게되는 여성들의 통속적 비극성에 대해 이렇게 질박한 원형을 제시한 감독의 영향력이 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뒤늦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원작의 감동이 몇배로 더해 전해진다.

 

아내의 마음(1956)

인물들이 딱히 뭔가를 하지않고 갈등만 점점이 쌓여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풀려버린다. 무위의 해결이라고 해야할까.

 

백치(1951)
하라 세츠코의 재발견. 등장인물 중 검은 옷을 입은 영화 속 그녀만 무비스타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대작을 영화화하겠다는 야심에 비해 정작 결과물은 줄거리를 쫓아가는데만도 허덕인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거장의 빈틈을 엿보는 기분.


침묵(1971)
마틴 스콜세지의 리메이크작이 내년 개봉예정인데 시노다 마사히로의 71년작을 먼저 봤다. 아무래도 일본인 배역보다는 메인주인공인 포르투갈 신부 역을 하는 서양 배우의 비중이 훨씬 크고 중요한데 본작에서는 그 점이 살짝 아쉬웠다. 시노다 마사히로 영화는 작가주의라기보다는 웰메이드 상업영화에 가까워서 왠만해서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기가 조금 힘든데(적어도 내게는 그렇다는 말) 이 영화도 그랬다.


연옥 에로이카(1970)

금발 가발을 쓰고 벽에 기댄 오카다 마리코는 동시대 서구 모더니즘 영화에 나오는 서양 여배우같다. 구체적인 외양이 유사하다는게 아니라 안토니오니 영화 속 모니카 비티를 연상시키는 그런 느낌이랄까. 오랜기간 협업한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 배우만이 뿜어내는 아우라.

 

바닷마을 다이어리
개봉하던 날 봤는데 고레에다마저도 만화원작 실사화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역력히 보인다. 즉, 긴 호흡의 장편만화의 자잘한 에피소드를 어떻게든 2시간내외의 장편 안에 다 욱여넣으려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이걸 장편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차라리 2012년의 <고잉마이홈>말고 이 만화를 렌도라로 직접 각색 연출했으면 어떨까싶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하는게 단편적 에피소드들을 쭉 늘어놓은 장편영화인지라. 감독 본인은 관광엽서같아 보이고 싶지않았다고 했으나 여지없이 고쿠라쿠지 역 나오고 <최두사>에도 나왔던 신사 앞 철길도 나오고 에노시마 바닷가도 나오고 나올건 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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