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공 늪으로부터 승천하는 무엇(?)


이미 언급했듯 <시효경찰>2기 마지막 에피소드의 마지막 개그와 <인스턴트 늪>의 클라이맥스는 사실상 동일하다. 전자에서는 흙이 담긴 항아리에 물을 부었더니 갑자기 뭔가가 튀어올라갔고 영화에서는 말그대로 인스턴트 늪을 만들었더니 그 안에서 아예 용한마리가 승천을 한다.


2. 곤자부로라는 이름의 검은 토끼

인스턴트 늪 (2009)

오레오레 (2013)


3. 찾아온 손님을 의심하며 노려보는 료칸 주인과 자칭 위장 스파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아타미의 수사관 (2010)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 (2013)


3.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 (2013)

직접 들어보면 같은 비브라 슬랩인데 어쨌든 위에는 저렇게 번역이 되어있다.


4.아무 이유없이 옆에 있는 사람 밀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아타미의 수사관 (2013)


5. 에릭 사티 gnossiennes no.1


아타미의 수사관 (2010)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 (2013)


6. 동굴 속 집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시효경찰 2기 (2007)


7. 노란 시계

오레오레 (2013)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 (2013)

<오레오레>에서 저 시계는 수많은 '나' 사이에서 진짜 히토시를 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소품인데 드라마에서는 그냥 단순 악세서리 이상은 아닌듯. 


8.어설픈 1인2역

시효경찰 2기 (2007)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 (2013)



이들말고도 어렴풋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찾아야하는지 기억이 나지않는게 있고 (후세 에리의 원맨개그같은 것들), 물론 자세히 보면 이들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장면장면이 똑같은건 아니지만 <아타미의 수사관>과 <도감에 실리지않은 곤충>은 둘다 after life라는 소재를 다루고있고 <아타미의 수사관>과 지금 하고있는 <변신 인터뷰어의 우울>은 에릭 사티의 음악뿐만 아니라 수상한 미스테리 사건을 풀기위해 남녀콤비가 도쿄에서 시골마을로 내려온다는 기본 설정이 동일하다. 물론 이야기는 단순히 사건 조사만이 아니라 수상한 마을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렇게 꾸준히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다는게 아니라 도대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뭔지, 그리고 같은 설정이지만 각각의 맥락에서 어떻게 다른 함의를 갖는지 하는 것일텐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러닝타임을 채우기위해서인거 같기도하고. 하지만 이렇듯 자기만의 인장을 매번 분명하게 새겨넣는건 그저그런 고용감독이나 극작가가 아닌 '오테르'로 기억되고싶다는 강한 열망의 표현이 아닐까하는 짐작

최근 유튜브에서 가장 자주 검색했던 키워드중 하나는 80년대 일본 cm이었다. 내 십대시절을 관통한 90년대도 아니고, 출생 이전인 70년대도 아닌 유년기를 보낸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실 꽤 오래됐는데 운좋게도 유튜브 덕분에 80년대 일본, 그러니까 곧 꺼질 버블 경제의 최정점을 찍고있던 그 시기 일본의 물질문화와 도시 풍경같은 것들에 완전히 매혹당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유년시절 '일제'라는 기표가 상징했던 최고품질, 최첨단 그리고 세련됨같은 것들이 바로 당대 물질문명의 종합전시장이라할 cm에 집약되어있는데 지금와서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볼때마다 촌스러웠으나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싶다는 아련한 향수와 미화된 감상의 연쇄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쉽지않은 것이다. 아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쇼와의 추억'이란 것도 이렇듯 풍요로웠던 한 시기를 향한 그들의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가리키는 말일텐데 그러나 이제는 결코 일본이라는 한 국가로 한정할 수 없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의 일반화된 변화를 시정적으로 함축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실제로는 식민지배,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패전, 그리고 미국의 승인과 보호 아래 진행된 경제개발이라는 전후 쇼와의 역사적 사실들은 소거된 채 그저 모두가 중산층을 꿈꾸었고 또 실제로 가능했던, 그래서 아름다웠던 추억으로만 기억된다. 최근에 본 어느 일본영화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그야말로 총집약되어있었다. 오즈 야스지로의 트레이드마크라할 흑백의 다다미샷과 이후 그의 칼라영화에서 곧잘 인서트 컷으로 보여주었던 60년대 거리풍경이 렌즈의 심도나 화면의 색감에서 실제 오즈의 영화와 매우 흡사하게 찍혀있음은 물론이고 생활 소품, 의상, 세트들도 매우 세심하게 배치되어있어 마치 배우들이 실제 쇼와시대로 돌아가 찍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다. 시대는 훨씬 이후이긴하지만 최근 4분기에 시작한 어느 심야드라마는 아예 80년대 이후의 일본 사회를 전자오락의 변천사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패미콤으로 대변되는 가정용 전자오락기와 오락실, 또 팩맨, 드래곤퀘스트 혹은 슈퍼마리오같은 비디오 게임을 가지고도 이제는 과거를 회고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들은 또한 전자게임으로만 한정되지도않아서 크라프트베르크, ymo, 피치카토파이브같은 당대의 대중음악들 또한 꾸준히 언급되고있다.


향수라는 감정이 대개 현재 내 삶이 부박할수록 더욱 부채질되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그리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과거는 아름답고 현재는 고통스러우며 미래는 불안한 법이니까. '격차사회'를 살아가는 현재의 일본인들이 미국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떠오르는 태양'이던 그 시절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작금의 대중문화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렇듯 유행과 풍속의 온갖 기표들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채워지고있는 것에는 주목하지않을 수 없다. 다분히 퇴행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기억의 방식이 비단 일본만의 것도 아니다. 이전까지 공적담론 상에서 한국의 1980년대가 광주, 6월항쟁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 kal기 폭파등으로 주로 기억되었다면 이제는 서울올림픽, 프로야구 선수, 이문세와 조용필같은 가수들을 비롯한 대중예술인들의 이름과 몇몇 가요와 영화의 제목으로 호명되는 것이 익숙하게, 아니 차라리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기때문이다.


역사가 제도나 규범, 질서같은 외재적 현실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서사를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그것은 곧 인간이 자신들의 외부에 놓인 세상을 어떻게 인지했으며 이에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에 대한 기록이자 질문이며 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행위하는 인간이야말로 비로소 역사의 주인공 그러니까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풍속과 유행으로 기억되는 과거 안에서 그들은 그저 한때를 풍미했던 유행의 소비자이자 온갖 오락거리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고만다.


다시 말해 최근의 80년대를 다룬 대중문화는 시대정신이 아닌 풍속을 보여준다. 일세를 풍미했던 예술작품을 오늘의 시점에서 대한다는 것이 곧 당대와 현재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를 확인하는 가운데 결국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행위라면 작금의 대중문화는 예술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예술작품이 나온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재현하는데 집중함으로써 비판적 인식을 위한 어떠한 인지적 거리도 확보하지못한채 오히려 향수라는 애틋한 감정만을 동반한채 과거에 함몰하게 만들고있다. 그 어떤 재현도 모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완벽한 과거로의 회귀나 복원 하여튼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 모든 재현 (represent)에는 필연적으로 현재(present)가 배태되어있기때문이다. 과거를 보는 시점에는 설사 그것을 인식하지못한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현재가 개입한다. 과거의 유행과 풍속을 재현하는 시각에는 이미 현재의 유행과 풍속이 암묵적으로 들어있을 수 밖에 없다. 선택과 배제, 분류와 위계, 숭앙과 혐오가 끊임없이 길항하며 과거는 재구성되어간다. 이를테면 80년대를 조용필과 이문세로, 90년대를 서태지로, 혹은 90년대를 얼터너티브의 시대로, 60년대를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시대로 분류하고 기억하는 것이 그 예다. 의식하지못한다 하더라도 일관되게 현재가 과거 안에 각인되고 투영되고있음을 인지하지못할 뿐이다. 이것을 누군가는 포스트모던의 특성이라 설명하며 노스탤지어라 명명하기도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두가지 길항하는 요소들을 통한 과거의 재구성이 과연 무엇을 놓치고있느냐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가 들고나는가운데 취사선택된 것들로 재구성된 뭔지모를 무언가를 과거라고 지칭할때 거기엔 현재가 추인하고 선호하며 인지하는 것들이 늘어서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 안에는 현재로부터 탈락되고 무시됐으며 혐오의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부정되어온 것들이 다시한번 결락된다.


재현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아니 좁혀졌다고 믿을수록 실제로 남는 것은 향수가 아니라 어리둥절함이다. 거기엔 그 시절을 실제로 살았던 이들의 삶의 궁지와 도저히 길이 보이지않는 당대의 시대적 난점이 완전히 빠져있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모순과의 지적, 정치적, 윤리적 대결을 벌여야했던 치열함은 빠진채 그때 우리는 모두 촌스러웠고 어설펐지만 순수했고 순정했으며 또 진심이었다고 환기하는 그 집단적 환상의 향유가 현실의 질서를 온존하려는 이들에게 더할나위없는 알리바이가 되고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무한히 다양한 사건들로 가득찬 시대를 더이상 추상적이고 지적인 것과의 긴장 속에서 혹은 정치적인 것과의 대결 속에서 상상할 필요가 없게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시대는 유행의 집합이며 풍속의 카탈로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이상 덧붙일 말이 필요할까.


지금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살고있는 누군가가 훗날 한 20년쯤 뒤 2013년을 kpop이 전세계를 휘저었고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해로만 추억한다면 어떨까. 또 2013년의 한국 정치가 최초의 여성대통령의 패션과 외국어실력으로만 기억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있을까. 유명한 책제목을 빌어 장난을 치자면 이쯤되면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건 풍속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풍속화라 부를만하다.  

시작은 2003년도 3분기에 NTV에서 방영했던 연속드라마 <수박>이었다. 우리나라에 리메이크까지 됐던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전학생>(1982)의 여주인공으로 데뷔했지만 이후로는 주로 조연에 머물렀던 고바야시 사토미 (미타니 코키와의 결혼과 이혼으로도 알려져있을지모르겠다.)의 tv 드라마 주연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서른넷의 노처녀 주인공 하야카와가 우연한 기회에 여성 전용 성인기숙사로 거처를 옮기고 그 구성원들과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변화를 맞는다는 내용의 여성 시청자를 타겟으로한 드라마였다. 과장된 캐릭터 설정이나 얽히고 설킨 복잡한 인간관계, 그로 인한 극단적 갈등구도, 그리고 터부에 대한 과감한 도전 등 이른바 막장의 요소가 전면 배제된 채 그 자리를 채운건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러나 일본드라마가 잘 해내는 특화된 어떤 정서, 즉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고 명명했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 대한 묘사와 그러한 일상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기어이 어떻게든) 찾(아내려하)는 일본 특유의 정서였다. 드라마 종영으로부터 3년 후 오기가미 나오코라는 여성 감독이 저 멀리 핀란드를 배경으로 내용은 다르지만 <수박>에 나왔던 세명의 여배우를 데리고 드라마와 유사한 분위기와 메시지를 공유하는 <카모메 식당>을 만들었고 이후 고바야시를 중심으로 일군의 배우들이 계속 함께하는 일련의 이른바 '치유계'영화들이 계속 제작됐다. 고바야시와 모타이는 90년대 초반 후지 티비에서 장기 방영했던 심야 시트콤 <역시 고양이가 좋아>를 통해 오랫동안 호흡을 같이해온 콤비였는데 <수박> 부터는 두사람 외에도 이치카와 미카코와 (거의 반 고정인) 남성멤버인 미츠이시 켄과 (그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나오는) 카세 료 등이 꾸준히 동반출연하고있다.

요리를 하고 그 음식을 맛보고 산책을 하며 주위 풍경을 즐기고 또 얼핏보면 하나마나한 별 의미없는 대화를 통해 친교를 쌓는(이런 종류의 무용한듯한 대사들이야말로 일본 특유의 것이라 할만하다. 사실상 텅빈 내용의 대화이기때문에 발화자의 말투, 억양, 몸짓, 표정같은 것이 중요한데 이것들을 한국어로 재연하면 뭔가 어색하기때문이다.) 인물들의 행위는 한 편의 극에서 인물간 대화를 끌어내기 위한 배경이나 인서트컷은 될 수 있을지언정 너무 흔하고 사소한 나머지 그 자체로 주제나 메인 소재가 되기 힘들다고 여겨져왔다. 하지만  그 흔해빠진 일상의 풍경들이 보는 이에게 정서적으로 소구하는 바는 결코 작지않다. 돈이나 물질적 부유함보다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값비싼 재료가 아닌 늘 가정에 구비되어있는 식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음식과 그 음식들을 서로 나누며 확인하는 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우리가 알고있는 치유계 영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영상물의 거개다. 치유되기위해서는 헛헛한 마음뿐만 아니라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야한다는 점에서는 꽤 유물론적인.

하지만 스토리텔링과는 상관없이 시청자를 충족시키는 치유계 영화의 정서적 안정감이 마음에 들긴하면서도 어딘지모를 어색함을 한번도 느끼지않은 적이 없다. 내심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영화들에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당하지 않겠다는 결심 비슷한 것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 어색함의 정체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 속에 '사람'은 있을지언정 '세상'은 없기 때문에, 즉 지나치게 살균된 인공적 세계가 표상하는 낯선 편안함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고바야시 사토미가 나오는 일련의 치유계 영화들은 점점 더 인위적인 마치 그들만의 폐쇄적인 유토피아처럼 되어갔다. 2010년 작인 <마더 워터>는 그 정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영화는 작은 동네에서 자족하는 자영업자들의 세계에 대한 소묘다. 두부가게, 카페, 목욕탕, 바, 목공소등을 운영하는 영화의 인물들은 다른 가게 사장님들을 자신의 손님으로 맞으면서 또 때로는 자신이 그들의 손님이 되기도하면서 그렇게 서로 자조하며 하루하루를 영위해간다. tv나 휴대폰을 쓰는 장면이 나오지않다보니 이들이 마을 밖의 세상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주지않을 뿐더러 위에 말한 주요 등장인물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잘 나오지도 않는다. 시장과 카페와 술집에서 간혹 나오긴하지만 손님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않으며 그나마도 전문 배우가 아닌 것이 확연히 티가 난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 속 세상이 이렇듯 단단하게 구축된 그들만의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바에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자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인데 이때마저도 새로운 손님의 목소리는 화면 밖에서 보이스 오버로만 들린다.(사실 이 새로운 손님은 영화 맨 첫장면 강가에서 아기 옆에 앉아 뒷모습만 보이던 여성으로 이 영화 이전에 나온 고바야시의 치유물 연작인 <수영장>과 2013년작 tv드라마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에 나왔던 배우다) '어서 오세요'라고 하지만 인물들이 다같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인사하는 마지막 숏은 환영한다기보다는 마치 관객이 불청객이 된듯한 느낌을 전한다. 이렇다보니 스튜디오 촬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케 장소인 동네 자체가 하나의 인공 세트처럼 보이기까지한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논리부터 벗어나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협동조합 구성원들이 바라마지않는 이상향적 세계의 묘사일 수 있겠지만 내 눈에 이 영화는 자본뿐 아니라 정치, 이념, 기술 (최근 일본에서 숱하게 만들어지고있는 포스트 311 영화들), 그리고 타인의 어떠한 간섭으로부터도 벗어나 내가 하고싶은대로 살면서 동시에 나와 뜻이 맞는 이들과 계속 함께 하고싶다는 소박하지만 애초부터 불가능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못한 애어른들의 꿈이 구현된 예로 보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들이 실제로 일종의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특기할만한데 고바야시를 비롯해 위에 언급한 배우 무리와 3명의 여성감독들의 협업 하에 모두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실제로도 서로 이미 잘 아는 익숙한 이들과의 협업 하에서 만들어지는 고바야시의 치유계 영화들은 뒤로 갈수록 점차 스토리텔링이나 기승전결의 전통적 서사 구조를 지켜야한다는 의무 혹은 강박으로부터도 '치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작인 <수박>과 <카모메 식당>을 최근작들과 비교해보자. 한줄로 요약될만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세편의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붙여놓은 <렌타 네코>나 등장인물간의 갈등이나 특별한 사건이 전혀 없이 무려 50분짜리 에피소드가 네 편이나 전개되는 <빵과 스프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하기좋은 날>을 보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극형식의 영상물의 등장이라할만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하는걸까.

 

현대인의 삶이 갈수록 사소한 것에 집중되고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구상에 벌어지는 수많은 자잘한 사건과 희비극들에 공감하기보다는 오늘 나의 피로를 어떻게 풀 것인지, 또 불안하기 짝이없는 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고강도의 노동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가운데 휴식을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여유와 자원은 넉넉지않다보니 평소 자신의 일상을 더욱 더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꾸미려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나말고 저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 무슨 취미를 가지고있으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가에 대한 관심이 영화와 방송까지 옮겨진데는 물론 절대적 수준에서의 물질적 발전이 선행된 덕분이지만 그 뒷면에는 저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점점 더 사소한 것에 집중하고 있을때 그러한 개인들의 주위를 결코 사소하지않은 것들이 둘러싸고있음을 알아채기란 어려운 모양이다. 현재 전세계 대중문화를 점령하다시피한 서사는 단연 절멸에 대한 공포와 근심으로 요약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단순히 인류의 부정적 상상만이 아닌 실제 우리의 삶 안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현실이 되어가고있다. 그렇다면 치유계 영화들은 그 반대편에서 그러한 부정적 상상을 달래거나 지연시키기위한 해독제 혹은 마취제로서 기능하고있을까. 하지만 치유계 영화들을 유심히 봤다면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치유계 영화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이면이라면 어떨까. 마음씨 따뜻한 이웃들의 예의와 배려로 가득한 안온한 세계의 안락함은 자꾸만 지금 내가 사는 세계의 불편함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킨다. 내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고 내 주위의 이웃은 저렇게 친절하지않으며 그저 어두운 동네골목이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언제 나에게 해를 입힐지 모르는 미지의 타인일 뿐이다. 이 영화와 드라마들이 늘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상정하고 그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 안에는 내게 익숙한 사람들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상부상조하는 장소나 공간에 근거한 공동체를 당신이 마지막으로 경험해본게 언제였던가. 아니 그래본 적이 있긴 있었나. 무엇보다 지금 '공동체'란 얼마나 낯선 단어인가. 나빠지는 세상에 대한 근심과 불안 그리고 절멸에 대한 공포와 생존에 대한 강박이 제거된 저 밝고 깨끗한 동네는 그래서 절대로 도래하지않을 유토피아일수도, 혹은 지금의 세상이 철저히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다음 모든걸 새로 시작한 이후에야 가능할지모를, 그야말로 절멸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한 예지적 풍경일지도 모른다. 지진과 원전사고 등으로 지난 몇년동안 절멸의 공포를 가장 생생하게 경험했을 일본에서 치유계 영상물의 유행은 그래서 징후적이다. 날로 세상은 험악해져가는데 어쩌자고 저들은 저렇게 태연히 무사태평한 세상을 그릴 수 있느냐는 물음은 그래서 사태의 표면만을 만지는 피상적 비판이긴하나 일면 타당하다. 왜 저들은 분노하는대신 친절하고 상냥한가. 왜 비판하는대신 서로를 격려하는가. 그건 분노나 비판보다도 생존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갈급한 최우선적 과제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어떠한 비판이나 힐난, 질문도 하지않는 대신 서로를 북돋우며 앞으로 나아가기.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이라는 묵시록적 순간을 선체험하는지도 모를 몹시도 불리한 조건 위에 놓인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극복하기위한 초월적 상상의 결과물이 바로 '치유계' 문화의 정체가 아닐까. 굴복하거나 절망하지않는 대신 현실에 대한 기민하고 적극적인 상상과 타협의 산물로서의 도착적인 디스토피아 상상력의 현실태. 그렇다면 '힐링'이란 곧 멸망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인, 그러나 동시에 적극적인 멸망에 대한 상상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파생한 부가물이다.

 

그렇다. 일본에서 건너온 저 영화들은 내게 일종의 길티 플레저다. 흐뭇하면서도 불편하고, 꺼림칙하지만 동시에 즐긴다. 또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지도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저 영화나 드라마들을 꾸준히 찾아보는건 저들이야말로 현재 내가 겪고있는 내적 모순을 가장 간명하게 드러내보이기때문이다. 나의 '조용한 생활'을 위해서는 나의 외부로부터의 모든 소란과 잡음으로부터 기꺼이 눈감을 수도 있다는 소극적 안락함의 추구는 저 영화들을 통해 '그렇게해도 괜찮다'는 간접적 추인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저 인공적 세계에는 결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 또한 다시한번 자명해진다. 그러나 쾌락과 불편함을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마음의 정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처한 그리고 앞으로 더 끔찍해질 현실에 대해 역설적 환기를 통해 조금이라도 예비를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큰 비용지불은 아니지않을까.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 (이 예고편 상에서는 후반부쯤인데 자세히 나오지는않는다. 당연한거지만)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장면은 사실 <시효경찰>2시즌 마지막 에피 그 중에서도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개그였다. 미키 사토시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이렇게 드라마와 영화에서 미묘하게 변주되어 반복되는 아이디어들이 꽤 된다. 이걸 자기표절이라고 매몰차게 몰아붙이기도 좀 그래보이는데 하여간 이 영화나 <시효경찰>을 다시 볼때마다 여전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시효경찰>에서 처음 볼때 참 뜬금없다 싶었던지라 이게 무슨 의미일까하고. 하긴 <시효경찰>의 개그들이 뜬금없지않았던게 있더냐마는.

비록 보잘것 없는 삶일지라도 거기에 난데없이 틈입하여 잡음을 넣고 소란을 만드는 방해자는 늘 있게마련이다. 살인 누명을 쓴다거나 존재여부조차 몰랐던 자식이나 가족의 빚쟁이가 찾아오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은퇴한 노년의 교수는 비록 성적 관계까지 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정확하지는않지만) 어쨌건 젊은 여자에게 돈을 지불하고서 잠시동안만이라도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하지만 그 하룻밤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이들이 사방에 출몰한다. 쉴새없이 전화로 원고를 독촉하는 편집자, 카센터에서 만난, 아마도 자신의 정체를 탄로내고말 기억도 나지않는 옛 제자, 처녀시절부터 지금까지 붙박이처럼 늘상 창문가에서 교수의 출입을 지켜보고있었을 옆집의 여자 스토커 (키아로스타미는 의도적으로 꽉찬 정면클로즈업으로 잡음으로써 이 여자를 '공포'스럽게 보이도록했다.) 비단 교수만이 아니다. 결국엔 만나지못하고마는 상경한 할머니의 연이은 전화메시지도 아키코의 죄책감을 증폭시키는 외부로부터의 방해자로서 기능한다.


무엇보다 두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결정적인 인물은 아키코의 남자친구 아키다. 오프닝에서 목소리는 들리지않지만 아키코를 의심하는 그의 전화로 인해 그녀는 곤란해한다. 아키코를 귀찮게하는 남자친구의 전화통화를 보여주는 이 첫씬은 앞으로 이 영화가 뭘 말하려하는지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조금만 더 앞으로 돌아가보자. 그러니까 맨 첫장면, 카페 안 풍경을 바라보는 화면 위로 통화하는 아키코의 목소리가 보이스오버로 들린다. 즉 여기서 카페 내부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못한채 들려오는 불균질한 외부로부터의 목소리는 바로 아키코의 것. 이미 약속을 했지만 갑자기 상경한 할머니로 인해 '손님접대'를 하지못하겠다는 그녀 역시 사장에게는 자신의 사업에 대한 갑작스런 방해자일 것이고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않는다고 투덜대는 남자친구에게도 마찬가지.


이렇듯 영화는 이미 익숙한 그래서 사전에 계획한대로 흘러갈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조금씩 틀어지는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멀리서 크게 보면 그들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훼방꾼이라는 점이다. 교수는 아침에 아키코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싶어하지만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으로인한 거짓말들이 축적되면서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일을 흘러가게한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모두 선의에 의해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자신이야말로 아키와 아키코 두사람, 어찌보면 그리 심각할 것도 없는, 잠시 관계가 삐걱거리는 정말 흔해빠진 연인 사이에 느닷없이 불쑥 끼어든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못하는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철저히 자신의 세계만은 지키려고한다. 외부로부터 방해받지않겠다는 등장인물들의 의지는 이어폰, 전화선 차단, 계속 올리는 자동차의 창문 등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나 가소로운지, 내가 주도한다고 믿는 나의 일상과 삶이 외부로부터의 아주 작은 균열에도 깨어질 수 있음을, 또 나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균열을 일으키는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닫지못함으로써 겪는 곤란함은 맨 마지막 장면에서 우스꽝스럽게 재현된다. 의도된 일탈, 그러나 되찾기는 쉽지않은 일상의 균형 그리고 그 균형을 유지하기위해 요구되는 삶 속의 긴장에 대해서 키아로스타미는 늘 그래왔듯이 현자처럼 한편의 작은 우화를 보여준다.


서경식 선생에 따르면 재일조선인은 조국, 고국 그리고 모국이 각각 다른 이로 정의된다. 정규교육과정 내내 단일민족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긍지같은 치열한 국민화 과정을 거친 끝에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정의내리는데 어떠한 거부감도 없는 '우리'로서는 재일조선인들의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러한 분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을 심적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는 짐작도 어렵다. 


태어나지도 유년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던 북한으로 '귀국'했던, 즉 모국도 고국도 아니지만 북한을 조국으로 택한 오빠가 병을 치료하기위해 고국(고향이 있는 나라라는 의미에서)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로 또다른 '귀국'을 한다. 이 두 번의 귀국 아니 정확히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오빠의 세 번의 '귀국'은 한 개인에게 국가란 결코 불변하는 귀속지위가 아니며 어쩌면 하나의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산자가 이주한 국가로부터 새로운 시민권을 발급받는 따위의 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여권상의 국적이 어디로 기입되어있는가와 상관없이 법적으로 자신의 주권이 행사되는 국가, 실제로 현재 살고있는 국가 그리고 그 개인이 심적으로 애착을 갖고있고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국가가 서로 상이한 개인에게 국가는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를 묻는 질문 앞에 서로 다른 상황과 맥락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기위해 내세우는 임의적인 준거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국가나 가족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봉사하기위해 고안된 개념이자 허구적 구성물이라는 맑시즘이나 탈근대 이후의 여러 상대주의적 견해들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하더라도 그들이 한 개인의 실존을 구속하는 가장 결정적인 실제적 기제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혐오한다고해서 또 부정한다고해서 그 바깥으로 빠져나오기란 그 안으로 편입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렵다. 감시자의 말처럼 어쨌거나 오빠와 자신은 주인공이 싫어하는 그 나라에서 죽을때까지 살아야하고, 오빠의 바람처럼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위해 여행가방을 들고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실존은 여전히 둘 혹은 세 나라의 경계 안에, 또 그 안에 살고있는 가족들의 안위에 비끄러져 매어있을 수 밖에 없지않을까.


자식의 병 하나 제대로 고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이념과 당의 지시에 충성할 것을 그 자식에게 지시하는 아버지, 전혀 원하지않았던 (것 같이 보이는) '귀국' 이후 가족과 국가 두 개의 공동체 그 어디에도 밀착하지못하지만 동시에 그 둘에 강하게 묶인 채 그 좁힐 수 없는 거리에서 비롯하는 압박감을 제대로 표현조차 하지못하는 오빠, 이 두사람을 보며 단호히 에고이스트가 되고자하는 주인공의 선택은 일견 당연한듯 보이기도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라면 어떨까. 결국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그렇게 에고이스트로 남고 싶어했으나 끝내 가족과 국가 그 어느 쪽도 넘어서지못하는 혹은 넘어설 수 없는 개인들의 무력함 바로 그것이었다.


이념이나 국가가 아닌 가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이야기라는 감독의 말에서 이념과 국가 공동체가 개인과 가족에게 짊어지게하는 무게만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족 역시 국가만큼이나 무거운 공동체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사상을 강요한 것을 넘어서 아들에게 '귀국'이라는 결단을 하게 한 그 선택에 대한 비판 혹은 비난은 일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가족은 국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국가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다. 그것은 가족과 국가중 개인의 운명에 누가 더 강한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한 개인이나 가족이 자신들의 둘레 바깥에서 사람이 아닌 법, 정치, 국가같은 비인격적 주체로부터의 어떠한 보호나 안정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떨까. 국가를 가족이 머무는 그때그때의 장소나 거처로 여길 수 밖에 없게만드는, 국가를 단지 서류상에 기입된 이름 중 하나로 인지하게하는, 소속되고 권리를 보호받는 실재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가져보지못하고 상상하지 못하게만든 현실을 따져 묻지않을때 가족'과' 나라 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개인'이 되지못한 이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십대시절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그깟 가족따위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바람과 가족으로부터, 또 국가로부터 벗어난 온전한 개인으로 살겠노라는 염원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놓여있다. 국가나 이념, 민족같은 온갖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구속되지않는 개인이 되기위해 필요한 조건은 아무런 사상도 갖지않고 모든 공동체를 부정한 채 백지같은 내면을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 구속이야말로, 또 그것을 가능케하는 조건이야말로 진정 필요하고 그건 아마도 국가와 가족 사이의 변증법과 그로부터 출현하는 개인이 되는 일일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나빠지고만 있는지 몰라도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지못한 탓에 국민도, 무국적자도, 그렇다고 난민도 아닌 애매모호한 위치에 처한 이들은 갈수록 늘어나고만 있다. (분쟁지역에서 일상화된 물리적 공격이나 테러위협을 받지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불안정한 지위를 일종의 반영구적 제도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바로 재일조선인일 것이다.) 결국 그 누구도 국가를 부정할 수 없으며 국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살기란 불가능하다는게 아니다. 국가가 필요한 이유는 나를 '국민'으로 만들어주기때문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국가에 속한 국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사명감을 강요하는 그런 국민주의가 결국 어떤 패악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다만 동질화함으로써 오히려 개인화가 가능케하는 기제로서의 국가의 역할은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즉, '국민'이 아닌 '개인'의 출현을 가능케하는 것이 국가이기때문이다.


가족이 성인이 되기 이전까지 한 개인을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의 정체를 처음 고민하게하고 개인성을 발견하게한다면 국가는 그 내부의 수많은 차이로 위계지어져있는 이들을 국민이라는 이름하에 동일화함으로써 이후 그들이 그 지점에서부터 비로소 개인성을 실현할 수 있게한다. 간략히 말해 이것이 개인을 만드는 가족과 국가의 변증법이라면 이러한 양 축이 무너질때 개인은 역설적이게도 가족과 국가로부터 종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평소 크게 불편하지는않더라도 통증 부위를 늘 의식하지않을 수 없는 고질처럼 부정하려해도 자꾸만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고마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위한 필수조건은 언제 어디서든 내 가족이 누구이고 내가 태어난 곳은 어디이며 여권에 적혀있는 국가명이 무엇인지, 선뜻 답은 할 수 있지만 결코 질문자를 만족시키지못하는 대답들과 그로 인한 부수적인 설명이 첨부되어야만하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속한 공동체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부분일 순 있어도 결코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부정적으로 반증한다. 그렇다면 '국민'이 아닌 '개인'이란 없는걸까. 가족과 국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정말 굴레일지도 모를 그 두개의 공동체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둘 때, 그럼으로써 어느 쪽과도 가깝지않지만 그 사이 어디께에서 아슬아슬하게 발붙이고 있음으로써 '나'라는 개인의 서사를 써나갈 자리를 얻어낼 수 있을때, 그제서야 그 둘로부터 벗어날지도 모를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쥘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가장 많은 영화를 본 해일텐데 동시에 개봉영화를 가장 적게본 해이기도 하다. 2012년에 본 영화들중 기억에 남는 영화들의 목록을 적어본다.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훌륭해서이기도하고 좀 이상해서이기도하고 너무 못만들어서이기도하고. 보면 알겠지만 2012년은 주로 일본 영화를 봤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봤는데 거의 다 일본 영화였고 게다가 본격적으로 일드란걸 보기 시작한 해였다. 드라마는 빼고 영화로 한정해본다.


1.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클라이맥스와 결말이 없는 이상한 영화. 영화가 기승까지만 있고 전과 결이 없이 마치 새가 날개를 쭉펴고 서서히 활강하듯 유유히 흘러가다가 불현듯 그냥 끝나버린다. 소설각색을 하다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수인듯. <그래도 살아간다>에 이은 에이타의 남루한 외양, 마츠다 류헤이 특유의 그 괴상함(현실에서라면 전혀 상대하고싶지않을), 그리고 장편영화임에도 마치 드라마 에피 몇개이어붙인듯 이어지는 어색한 병렬적 구성과 위에 말했듯 그 어색한 마무리까지 인상적이지않을 수가 없다. 제작진도 이 영화의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어쨌는지 속편이 tv 연속드라마로 곧 시작된단다. 올해도 일드 시청은 계속된다.


2. 여름궁전

위에 저렇게 써놓고 중국영화를 두번째로 꼽는다. 성과 정치를 엮어서 당대 중국 사회의 변화상을 은유하려는 시도인데 우리에겐 약간은 익숙한 이야기 전개인듯. 그럼에도 두 주연배우 특히 여자주인공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서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3. 술이깨면 집에 가자

한동안 아사노 타다노부 나오는 영화를 챙겨보지못했다. 8,9년쯤 전에 그가 나오는 영화를 닥치고 찾아보던 적이 있었는데. 연약한 꽃미남 스타일이 여전히 득세하는 요즘 추세 속에서 무척 남성적인 마스크를 갖고있음에도 정작 그렇게 마초스러운 역할은 많이 하지않았다. 이 영화에서는 무려 가장이자 생활인 연기를 하긴하는데 사실은 재활치료를 받는 중증알콜중독환자다. 워낙 절제된 스타일의 연기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는지라 아사노의 연기는 어찌보면 잘하는건지 못하는건지 좀 헷갈릴때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기할만한건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실제 남자주인공이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만화가인 그의 부인의 관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만든 <안녕, 엄마>가 이듬해 나왔다. 거기서는 나가세 마사토시가 아사노가 했던 남편 역할을 맡았는데 두 사람은 이시이 쇼고의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의 두 주인공이기도하다.


4.남극의 쉐프

감독인 오카다 슈이치는 이 데뷔작과 그 다음작품인 <딱따구리와 비>에서 연이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의 괴상한 우정을 묘사한다. 코미디이긴하지만 그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있다는 점에서,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인간은, 또 남자라는 동물은 얼마나 퇴행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연구. 어찌보면 삼시세끼 주는 밥 먹으면서 그날그날 정해진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학교나 군대하고 유사하지만 여기는 일급셰프가 최상의 재료를 가지고 고급 요리를 그것도 정해진 식단이 아니라 그들이 그날그날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게다가 그 구성원들은 또 다 과학자나 기술자같은 전문가들이라는 것도 있고.


5.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리갈 하이>를 순전히 각키보려고 시작했다가 결국은 사카이 마사토의 연기 보는 재미에 끝까지 봐버렸는데 이 영화에서는 늘 흥분해있던 그 드라마속 변호사와는 반대로 갑작스레 찾아온 우울증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을 연기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증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하는 생각을 하긴했지만 충분히 더 진지해지고 깊이있게 묘사할 수 있는 지점 앞에서 역시나 일본 영화 아니랄까봐 머뭇거린다.(아마 할리우드였다면 훨씬 더 세밀하고 무거운 톤의 묘사가 나왔을 것이다) 그냥 너무나 선한 두 부부의, 특히 부인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남편이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너무 평범한, 재연 프로그램에서도 안할법한 역시나 너무 일본영화스러운 결말. 그 치료과정도 딱히 설득력이 있지도않고. 윌리엄 스타이런의 우울증 극복기인 <보이는 어둠>이나 <한낮의 우울>같은 책을 읽어보면 우울증이란게 결코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난치병이건 분명한데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그 병에 공감하기 쉽지않은 탓인지어쩐지. 기실 그런 점에서 어떤 병이든 투병기를 잘 만들기란 쉽지않은가보다. 그럼에도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만드는건 그런 클리셰가 주는 안전함과 익숙함때문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분명 또다른 병이다. 뻔하디뻔한걸 끝까지 멍하니 보고있는거.


6.거대한 환영

2003년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를 집중적으로 몰아서 봤던지라 이미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좋았다. 이 영화의 괴이함은 유럽의 아트하우스 영화와는 또 다른 종류의 낯설음을 제공한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꼼짝도 안하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다 봐버렸다. 도대체 뭘 말하고싶은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 시절 다케시 신지는 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주연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외모였다. 사실 이 영화를 볼 즈음에 그 유명하다는 칸노 미호하고 나온 드라마를 본 직후라 연기 톤의 변화에 적응하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요즘 다케다 신지는 드라마에서 주로 조연으로 나오고있는듯.


7.마더워터

자영업자들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세계. 그냥 딱 그거였다. 남에게 뭔가를 팔기도하고 또 자신이 물건을 팔았던 그들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손님이 되기도하면서 그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에서 소박하게 자급자족하는 세계. 이런 영화들을 보고있노라면 아무리 힐링이 유행이라지만 어쩌자고 요즘같은 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고(앉아)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든다.


8.해탄적일천

양덕창의 무려 2시간 45분짜리 데뷔작이다. 게다가 내가 본건 그나마도 광동어 더빙의 vhs립버전이었다. 저화질탓에 한껏 미간에 힘을 줘가며 영상과 자막을, 보는게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시청각 경험이었지만 영화는 실로 인상적이었다. 고령가소년살인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늘 과거가 아닌(후샤오시엔과의 차이) 당대 대만의 현실에 천착했던 감독답게 여기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반평생을 쫓아가는데 흥미롭게도 전면적인 액자구성 속에 적극적으로 플래시백을 쓰고있다. 처음에 나온 여자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그녀는 장애가가 연기하는 진짜 여자주인공의 오랜 친구로 오랜만에 장애가를 만나 그녀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즉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 같은 위치에 그치고만다. (장애가보다 훨씬 미인이어서 당연히 주인공인줄 알았다.)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 자체보다도 양덕창이 이런 여성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집중하는 여성드라마를 (페미니스트 드라마라고 부르기보다는) 데뷔작으로 만들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촬영은 크리스토퍼 도일.


9.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때 도대체 뭔지 알아먹을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번역에 대한 불만들이 많았다.) 영화보기전에 bbc판 드라마를 먼저 보면서 워밍업을 했다. 그래도 이해안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70년대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는 그럭저럭 성공, 첩보물로서의 긴박감은 그보다 조금 아래, 그런데 전반적으로 스파이 영화치고 분위기가 너무 우아하다. 그리고 또하나 느낀건 6,70년대가 그래도 '현대'로 분류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시절을 다룬 현대물들이 조금씩 '역사물'스럽게 보인다는 거다.


10. 스펙 천

올해 내가 본 영화중 가장 망작. 과거 전세계가 주목했던 일본영화수준이 지금 얼마나 퇴행했는지 보여주는 예. 물론 이 영화는 로컬관객을 상대로한 내수물이고 우리나라 영화들 역시 내수시장만을 목표로한 저질 영화들이 똑같이 만들어지고있다는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고예산에 인기배우들이 줄줄이 나오는 인기드라마의 확장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사실 지난해 동시대 일본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느낀건 일본 영화는 드라마보다도 수준이 한참 아래인데 만화나 소설이 모든 스토리텔링의 일차적 소스이고 영화는 그래서 대부분 각색물이고 오리지널이 별로 없다보니 독창성을 찾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우리에 비하면 들이는 돈이나 시간 노력이 비교가 안되는 수준임에도 결과물은 어떻게 이렇게 허접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이 괴작으로 돌아오면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제작진이 만든게 맞나싶을 정도로 캐릭터의 일관성이 완전히 깨져있다는거다. 세부미가 맨 처음 등장할 때 하는 짓을 보면 얘는 분명 드라마에서는 이렇지않았는데 왜 이렇게됐나 싶고, 우뢰매 수준의 cg사용이나 두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불구 극장판에 걸맞는 그런 볼거리도 없다. 가을에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니 일본대중문화의 사골우려먹기는 진짜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케이조쿠도 극장판이 그렇게 망작이라는데 하여간 이 츠츠미 유키히코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연출력 자체에 문제가 있어보이긴하다. 그가 만든 다른 영화를 봐도. 워낙 드라마건 영화건 가리지않고 다작을 하는 사람이니 작가주의같은걸 의식하고 있어보이지는않는데 아무리 그래도 하여간 이건 너무 심했어. (재밌는게 일본은 드라마 연출자와 극장용 장편 영화 감독의 차이가 없다. 드라마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거의 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드라마 연출자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방송국 직원이고 외주더라도 드라마 만드는 사람은 거의 드라마만 만든다는 점에서 무시못할 차이점이다. 이것도 장편극영화가 tv드라마와 구분되는 매체적 특성을 보이지못하는 현재의 일본영화 질하락의 한가지 원인이지않을까.) 하여간 드라마만 봐도 충분하다는게 결론. 안봐도 아쉬워할 거 전혀 없음.


11.두더지

소노 시온의 야심작. 일본 상업영화에서 포스트 311을 직접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함으로써 만화원작의 주제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고 말았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모든 결론을 내리고 다 정리함으로써 확실한 결단을 내리는 철저히 단단한 실존을 가진 개인이었는데 영화는 여기에 311이라는 외부요소를 끌어들임으로써 자꾸만 바깥에서 주인공을 뒤흔드는 것들과의 얽힘속에서 결국은 그런 외재로서의 현실에 주인공이 꺾여 넘어지고만다는 억지춘향스러운 결말을 내고말았다. 내가 볼때 결말은 주인공의 실패일뿐이지 성공이나 희망 이런게 아니다. 원작자가 이 결말에 동의하고 긍정한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그건 이미 원작자 본인도 연재할 때의 그와는 다른 (처지가 된) 사람일테니까 그렇겠지 싶기도하고.


12.청매죽마

역시 양덕창의 초기작. 허우 샤오시엔의 연기가 어쨌거나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영화. 서늘한 도시 드라마인데 확실히 <공포분자>가 훨씬 걸작이다.


13.행복의향기

작년에 많이 찾아본 일본 음식영화들 중에선 그나마 가장 나았다. 나오는 음식들도 먹음직스럽고 오버하지않는 배우들의 연기도, 또 중간에 나오는 중국 마을의 그 고즈넉함도 다 좋았다. 아무리 음식먹으며 쉬는 '힐링'영화라고해도 <고독한 미식가>처럼 마치 누군가 꾸역꾸역 음식을 들이미는 것같은 압박감보다는 이 영화처럼 느릿느릿하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먹을 맛도 더 나는 법. 


14.디스턴스

고레에다의 초기작중 <원더풀라이프>보다는 이 영화가 더 좋았다. 처음 만났을때는 낯설기만했던 이들이 서로 조금씩 교류하는 과정은 그들을 그렇게 모이게 만든 떠나간 이들, 즉 죽은 광신교도들이 원했던 바였으리라. 직접적인 교류 혹은 관계만들기. 죽은 이에 대한 원망과 의문 그리고 남은 자의 부채의식, 이것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않으면서도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5.탈명금

오늘날 이른바 '금융화되는 삶'에 대한 면밀한 케이스 스터디. 다른 곳도 아닌 아시아 금융허브라는 홍콩이 배경인지라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온다.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 긴 글을 써볼까하고있다.


16.디어평양

평소 서경식 선생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갖게된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한층 깊게 만든 영화. 곧 <가족의 나라>도 개봉한다니 봐야할듯.


글이 갈수록 짧아지지만 하여간 이렇다. 생각나면 더 덧붙일 예정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낀 두가지

우선 lp의 물성에 대한 집착. 특정 사물의 물질적 성격에 대한 페티시적 성향을 바이닐 매니아들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현대인도 드물 것이다.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소중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컴퓨터를 뒤져 mp3를 보여주는 것보다 초라한 것이 있겠느냐는 한 인터뷰이의 말이 단적인 예. 대형사이즈의 커버가 주는 시각적 쾌감과 촉각을 통해 전해지는 레코드의 중량감, 판을 꺼내고 먼지를 털어내고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늘을 내리는 일련의 물리적 동작들은 음악을 듣는 행위에 일종의 의식적 성격을 부여하까지한다. 결국 lp의 이런 물성에 대한 집착은 다시 턴테이블과 앰프, 그리고 스피커같은 오디오 기기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페티시즘이다. 이건 결코 좋고나쁘다의 가치판단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여하튼 테입이나 씨디에서는 보기 힘든 이러한 lp만의 물성에 대한 애착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다. dj들이 주로 lp를 이용함으로 인한 일종의 전문가주의, 묵직한 lp의 중량감과 방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레코드덱이 보여주는 아카이브로서의 기능과 인상적인 시각적 이미지같은 것은 분명히 중요하다.

두번째, 그럼에도 앞의 성격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으로 그렇게 lp가 갖는 사물로서의 성질에 집착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바이닐이 cd나 mp3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굳은 믿음. 먼지에 의한 소음마저도 여기서는 잡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성격을 더해주는 요소로 격상된다. 'cd는 디지털화된 카피일뿐이지만 레코드는 판 안에 음원이 직접기록되기때문에 소리 그 자체이며 레코드에서 나는 소리는 좀더 편안하고 인간적이며' (이 역시 다큐에 직접 언급되는 인터뷰 내용이다.)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있기까지하다. (영화의 홍보문구 중에서) 이런 견해들은 단순히 아날로그 대 디지털의 대결 양상이 아닌 좀 더 연원이 오래된 두가지 가치관의 대결일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세대간의 갈등이다. 이 논쟁은 과연 '요즘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그저 소음일뿐이다.' 혹은 '예전엔 그래도 세상 살만했지'같은 푸념들과 얼마나 다른가. 처음 cd가 나왔을때 사람들은 그 디지털화에 의한 휴대성과 연장된 수록시간에, 그리고 mp3가 나타났을때는 다시 한번 획기적으로 발전한 휴대성과 편리성 그리고 음질의 보존에 찬탄을 보냈다. 그래서 lp는 과거의 역사적 유물 대접을 받으며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면 음원을 물리적 매개체 없이 직접 주고받는 상황에 이른 현재 최근의 바이닐 리바이벌은 어쨌든 상당부분 과거의 향수에 대한 애착과 그 흔치않음 (rarity)에 기댄 바가 크다. 이건 그 음원을 디지털로 처리하느냐 아니면 아날로그로 처리하느냐와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더불어 산업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존의 오디오매니아들을 흡수하고 또 새로이 오디오기기에 진입하는 이들을 만들기위해서, 즉 시장과 관련 산업의 유지와  관련하여 최근의 유행을 바라볼 수도 있다. 최근 신보들의 바이닐도 꾸준히 소량이나마 생산된다는 사실이 이런 매니아들의 희귀수집벽에 호응하고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산업적 이유들은 흥미롭게도 '예전에는 음악이 맘에 들지않으면 판을 부러뜨리고 구부리고 집어던지면 됐지만 지금은 그냥 클릭 몇번으로 지워버리면된다'는 식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로 환원되면서 애착의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물성에 집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극단적인 물화라고할 디지털을 거부하고 역설적으로 좀 더 '인간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순. 이는 꽤 변덕스럽지만 어쩌면 예술에 대해 인간이 갖는 늘 한결같은 태도를 다시금 보여주는 어떤 장면인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물적인 것에 대한 애착으로 전환하는건 예술도 예외가 아니고 기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이기도하다. 예술을 내 것으로 소유하기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어떻게든 하나의 사물로서 곁에 두는 것이고 이는 늘 그래서 귀족이나 부르주아지만이 진정으로 예술의 강력한 소비자이며 그래서 가장 확실한 예술의 보호자이자 결국은 예술을 부흥하게했던 매개자였던 이유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 다운로드가 아니라 음반을 사라는 외침들. 그럼 지금 돈을 주고 다운로드 받는 이 풍경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이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말했듯 디지털이야말로 궁극의 물화이니까. 일체의 다른 맥락을 소거한 채 교환가치만을 갖고있는, 교환가치가 있을때에만 비로소 어떤 사물로서 존재하게되는 그런 0과 1이라는 숫자의 조합. 이것이 과연 글로벌 금융네트워크상에서 오고가는 일련의 가상의 화폐들과 다를바가 뭐란말인가. 즉, 우리는 이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 없는 세상을 살고있는 것이다. 그럼 바이닐 매니아들의 진짜 정체란 과연 뭘까. 그저 시대에 적응하지못하는 노스탤지어에서 헤어나오지못하는 매니아들인가. 그들은 과거에 애착을 느끼고 집착하는 퇴행적 감성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전통적 의미의 예술애호가들인지 모르겠다. 대개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않는 미적가치를 어떻게든 실증적으로 붙잡으려애쓰는. 반면 그렇다고해서 파일로 음악을 듣는 이들이 탈근대적인 것도 결코 아니다. '소유'하지않은채 '즐기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하는 가장 흔한 보통의 방식이니까. 예술 작품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만끽함으로써 사실상 '소유'하면서도 소유하지않는, 예술을 특별한 행위양식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늘 해오던 방식 그대로인 것이다. 알고보면 우린 그다지 크게 '탈'하지못한 것이다. 아직 우리는 여전히 근대를 살고있다.

전체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이 드라마의 핵심 모티프는 남성 살해 그리고 그 밑에 흐르는 정서는 남성에 대한 공포 혹은 혐오다. 다섯편의 에피소드 전부에서 각 에피소드의 여주인공들은 어떤 남성을 직접적으로 살해하거나 혹은 죽게 만든다. 마지막 에피에서만 직접 살해를 하지않지만 그것도 어쨌거나 간접적 혹은 우회적 살인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젠더 종속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젠더상의 위계 전복이라는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가장 편리할테지만 어쩌면 이 드라마가 진짜 말하고자하는건 더 냉소적인 것 같다. 네명의 소녀들이 갖는 트라우마 중엔 친구의 죽음을 막지못했다는 죄책감 외에도 죽은 아이에 대한 계급적 열등의식이 굳게 자리하고있고 이는 소녀들로 하여금 각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속죄를 이해하게한다. 이를테면 세번째 에피에서 일명 '곰 소녀'는 다른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약자를 구하겠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친오빠를 살해하는데 그것은 두번째 에피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고백하는 것이기도하다. 살해 당시 자신은 타인을 구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15년전 당시에 자신을 이입시켜 그 당시에 했어야할일을 지금 비로소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번째 에피의 여주인공의 대응은 좀 놀랄만하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따위 저주같은 속죄강요에 응하지않겠다고 당당히 말한다. 에피의 전반적 내용이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법하다고 폄하하는 시청자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유일하게 남성이 아닌 여성을 (그러니까 언니를) 질투하면서그 대상으로서의 남성을 착취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기도하다. 그래서 그녀의 형부살해는 가장 주체적인 살해행위라 할만하다. 그러니까 성장한 네소녀는 저마다 자신의 방식대로 속죄를 이해하고 자신들은 그것을 해냈다고 말하지만 아사코가 곰소녀에게 말하는 바대로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excuse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비록 아사코는 곰소녀에게만 말했지만 이는 곧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정작 약자를 보호하려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했음을. 상징적 폭력행위를 행한 두번째 에피 주인공에게 원래는 교감에게 가하려했던 복수의 주먹을 날리는 동료선생의 행위가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들은 나름대로의 복수를 했는지 몰라도 속죄를 한것은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들은 어쩌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고 값을 치루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고보자니 정작 진짜 복수가 행해지는 마지막 에피에 오면 좀 이상해진다. 숨겨왔던 비밀이 드러나고나면 이 드라마 전체에서 정말 유일하게 속죄를 해야할 사람은 바로 아사코 혼자뿐이기때문이다. 피해자인줄 알았던 아사코는 알고보니 이 길고 길었던 원한의 시작점에 있었던 최초의 가해자이기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복수의 길에 나서고 그 결과는 실패이고 진정한 속죄, 영원히 끝나지않을 속죄의 시작이다. 그는 딸의 복수는 했는지 모르겠지만 딸의 아비를 죽음에 이르게했고 애초에 원한을 만들었으되 그것을 확실하게 끝맺음하지도못했다. 자신이 범인이 되고자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 애초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알았기에 살인죄를 뒤집어쓰려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함으로써 이제 그녀에게 남은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속죄를 할 대상도 방법도 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시초의 가해자인 그녀의 입장에서 딸의 살인자가 본디 그녀가 연모했던 사람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남성에 대한 공포나 혐오라는 그 이전까지 에피에서의 일관성마저 깨져버린다. 애초에 딸 에미리가 문제의 편지를 발견하게되는 그 우연을 보고있노라면 마지막에 와서 극 전체의 일관성도 개연성도 모두 깨져버려서 잘 가다가 마지막에 망해버리는 드라마가 되어 버린 셈이다. 남성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남성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어하는데 따른 두려움 그리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을 원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따른 여성들이 갖는 남성에 대한 근원적인 양가감정과 그 혼란에 대해서, 또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보상받거나 해소되지않는다는 것을 <속죄>는 서늘하게 보여준다.

팡호청은, 진부한 표현이긴하나 언제나 참신하고 새롭고 재기발랄했다. 그게 그가 홍콩 밖에서 주목받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love in the buff는 예외다. 그의 필모중 지금까지는 가장 태작이 아닌가싶다. (난 4+1프로젝트를 제외한 그의 모든 장편 영화를 다 보았다.)이렇게 뻔한 로맨틱코미디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이게 다 대륙과의 공동작업때문에 벌어진 사단이라고 하면 그냥 편견일뿐일까. 하지만 이 의심에는 근거가 없지않다. 도대체 이럴거면 뭐하러 베이징에 갔냐고? 베이징이 아닌 어디였어도, 그냥 홍콩이었어도 아무 상관없는,지리적 특징이 하나도 드러나지않는 플롯. 심지어 두명의 본토출신 서브주인공들은 철저하게 도구적으로 기능하다가 쿨하게 두 메인주인공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않고 사라져버린다.

지리적으로 확장됐지만 하나도 실속이 없는 그 공간적 배경과 마찬가지로 컴팩트했던 전작의 각본도 그 컴팩트함에서 비롯했던 장점이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우선 단 몇일동안의 이야기를 몇개의 시퀀스로 나눴던 그 플롯 구성이 없어졌다. 비록 이번에도 몇월 몇일이고 두사람이 처음 만난지 몇일째인지 표기는 되지만 꽤 장기간의 이야기이고 (첫만남 후 사백몇일이라고 나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표기되지않는 날들의 에피소드들이 더 많다. 전작에서 꽤 중요하게 쓰였던 그 뜬금없는 맥거핀 성격의 호러에피소드가 이번에도 영화의 인트로로 쓰이지만 전작과 달리 중간에 그것이 다시 쓰이지는않는다. 맨끝에 그냥 끼워맞추기 구색용으로만 나올뿐 스토리텔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건 전작에서 여주인공 춘교의 마음을 돌리게했던 그 깜찍한 반전의 역할을 이번 속편에서는 어처구니없는 분장쇼로 대신하고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냐구.

하지만 이런 각각의 구성 요소간의 비교를 떠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영화 자체가 코믹하지않다는 것이다.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쉴새없이 치고받는 스크루볼 코미디식 대사와 계속 이어지는 코믹한 상황들이 전부 사라졌는데 이건 광동어만을 쓸 수 없는 조건도 한몫했을텐데 (전작의 시작부에서의 그 시끌벅적한 수다를 떠올려보라)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거의 뒤의 한시간 정도는 영화속 대사에도 나오듯 똑같은 상황의 연속이다. 어차피 답안나오는 문제에 대한 지리한 반복.(보면 무슨 말인지안다)

4+1프로젝트를 하면서 프로젝트의 일원이자 팡호청의 제자인 증국상은 중국본토에서의 협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않아서 앞으로는 계속 홍콩에서만 작업하겠다고 밝혔는데 (현재 그는 80년대초 홍콩에서 살해당한 스코틀랜드 출신 게이 경관이라는 흥미진진한 실화를 영화화하고있다.) 이건 팡호청 역시 마찬가지지않았을까라는 짐작을 해본다. 그래서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love in the buff와 동시에 공개한 vulgaria에 흥미가 간다. 세상에, 떠나는 여자를 붙잡으려 뛰어가는 남자라는 이 진부한 클리셰를 팡호청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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