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가장 많은 영화를 본 해일텐데 동시에 개봉영화를 가장 적게본 해이기도 하다. 2012년에 본 영화들중 기억에 남는 영화들의 목록을 적어본다.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훌륭해서이기도하고 좀 이상해서이기도하고 너무 못만들어서이기도하고. 보면 알겠지만 2012년은 주로 일본 영화를 봤다. 영화를 그렇게 많이봤는데 거의 다 일본 영화였고 게다가 본격적으로 일드란걸 보기 시작한 해였다. 드라마는 빼고 영화로 한정해본다.
1.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클라이맥스와 결말이 없는 이상한 영화. 영화가 기승까지만 있고 전과 결이 없이 마치 새가 날개를 쭉펴고 서서히 활강하듯 유유히 흘러가다가 불현듯 그냥 끝나버린다. 소설각색을 하다 나올 수 있는 최악의 수인듯. <그래도 살아간다>에 이은 에이타의 남루한 외양, 마츠다 류헤이 특유의 그 괴상함(현실에서라면 전혀 상대하고싶지않을), 그리고 장편영화임에도 마치 드라마 에피 몇개이어붙인듯 이어지는 어색한 병렬적 구성과 위에 말했듯 그 어색한 마무리까지 인상적이지않을 수가 없다. 제작진도 이 영화의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어쨌는지 속편이 tv 연속드라마로 곧 시작된단다. 올해도 일드 시청은 계속된다.
2. 여름궁전
위에 저렇게 써놓고 중국영화를 두번째로 꼽는다. 성과 정치를 엮어서 당대 중국 사회의 변화상을 은유하려는 시도인데 우리에겐 약간은 익숙한 이야기 전개인듯. 그럼에도 두 주연배우 특히 여자주인공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서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3. 술이깨면 집에 가자
한동안 아사노 타다노부 나오는 영화를 챙겨보지못했다. 8,9년쯤 전에 그가 나오는 영화를 닥치고 찾아보던 적이 있었는데. 연약한 꽃미남 스타일이 여전히 득세하는 요즘 추세 속에서 무척 남성적인 마스크를 갖고있음에도 정작 그렇게 마초스러운 역할은 많이 하지않았다. 이 영화에서는 무려 가장이자 생활인 연기를 하긴하는데 사실은 재활치료를 받는 중증알콜중독환자다. 워낙 절제된 스타일의 연기를 트레이드마크로 하는지라 아사노의 연기는 어찌보면 잘하는건지 못하는건지 좀 헷갈릴때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기할만한건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실제 남자주인공이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만화가인 그의 부인의 관점에서 같은 이야기를 다시 만든 <안녕, 엄마>가 이듬해 나왔다. 거기서는 나가세 마사토시가 아사노가 했던 남편 역할을 맡았는데 두 사람은 이시이 쇼고의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의 두 주인공이기도하다.
4.남극의 쉐프
감독인 오카다 슈이치는 이 데뷔작과 그 다음작품인 <딱따구리와 비>에서 연이어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의 괴상한 우정을 묘사한다. 코미디이긴하지만 그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있다는 점에서,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인간은, 또 남자라는 동물은 얼마나 퇴행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연구. 어찌보면 삼시세끼 주는 밥 먹으면서 그날그날 정해진 할 일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학교나 군대하고 유사하지만 여기는 일급셰프가 최상의 재료를 가지고 고급 요리를 그것도 정해진 식단이 아니라 그들이 그날그날 원하는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게다가 그 구성원들은 또 다 과학자나 기술자같은 전문가들이라는 것도 있고.
5.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리갈 하이>를 순전히 각키보려고 시작했다가 결국은 사카이 마사토의 연기 보는 재미에 끝까지 봐버렸는데 이 영화에서는 늘 흥분해있던 그 드라마속 변호사와는 반대로 갑작스레 찾아온 우울증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을 연기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증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하는 생각을 하긴했지만 충분히 더 진지해지고 깊이있게 묘사할 수 있는 지점 앞에서 역시나 일본 영화 아니랄까봐 머뭇거린다.(아마 할리우드였다면 훨씬 더 세밀하고 무거운 톤의 묘사가 나왔을 것이다) 그냥 너무나 선한 두 부부의, 특히 부인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남편이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너무 평범한, 재연 프로그램에서도 안할법한 역시나 너무 일본영화스러운 결말. 그 치료과정도 딱히 설득력이 있지도않고. 윌리엄 스타이런의 우울증 극복기인 <보이는 어둠>이나 <한낮의 우울>같은 책을 읽어보면 우울증이란게 결코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난치병이건 분명한데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그 병에 공감하기 쉽지않은 탓인지어쩐지. 기실 그런 점에서 어떤 병이든 투병기를 잘 만들기란 쉽지않은가보다. 그럼에도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만드는건 그런 클리셰가 주는 안전함과 익숙함때문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것도 분명 또다른 병이다. 뻔하디뻔한걸 끝까지 멍하니 보고있는거.
6.거대한 환영
2003년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를 집중적으로 몰아서 봤던지라 이미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좋았다. 이 영화의 괴이함은 유럽의 아트하우스 영화와는 또 다른 종류의 낯설음을 제공한다. 영화가 너무 좋아서 꼼짝도 안하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다 봐버렸다. 도대체 뭘 말하고싶은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이 시절 다케시 신지는 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주연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외모였다. 사실 이 영화를 볼 즈음에 그 유명하다는 칸노 미호하고 나온 드라마를 본 직후라 연기 톤의 변화에 적응하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요즘 다케다 신지는 드라마에서 주로 조연으로 나오고있는듯.
7.마더워터
자영업자들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세계. 그냥 딱 그거였다. 남에게 뭔가를 팔기도하고 또 자신이 물건을 팔았던 그들에게 이번에는 자신이 손님이 되기도하면서 그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동네에서 소박하게 자급자족하는 세계. 이런 영화들을 보고있노라면 아무리 힐링이 유행이라지만 어쩌자고 요즘같은 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고(앉아)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든다.
8.해탄적일천
양덕창의 무려 2시간 45분짜리 데뷔작이다. 게다가 내가 본건 그나마도 광동어 더빙의 vhs립버전이었다. 저화질탓에 한껏 미간에 힘을 줘가며 영상과 자막을, 보는게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시청각 경험이었지만 영화는 실로 인상적이었다. 고령가소년살인사건 정도를 제외하면 늘 과거가 아닌(후샤오시엔과의 차이) 당대 대만의 현실에 천착했던 감독답게 여기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반평생을 쫓아가는데 흥미롭게도 전면적인 액자구성 속에 적극적으로 플래시백을 쓰고있다. 처음에 나온 여자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그녀는 장애가가 연기하는 진짜 여자주인공의 오랜 친구로 오랜만에 장애가를 만나 그녀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즉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 같은 위치에 그치고만다. (장애가보다 훨씬 미인이어서 당연히 주인공인줄 알았다.)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 자체보다도 양덕창이 이런 여성들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집중하는 여성드라마를 (페미니스트 드라마라고 부르기보다는) 데뷔작으로 만들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촬영은 크리스토퍼 도일.
9.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때 도대체 뭔지 알아먹을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번역에 대한 불만들이 많았다.) 영화보기전에 bbc판 드라마를 먼저 보면서 워밍업을 했다. 그래도 이해안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70년대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는 그럭저럭 성공, 첩보물로서의 긴박감은 그보다 조금 아래, 그런데 전반적으로 스파이 영화치고 분위기가 너무 우아하다. 그리고 또하나 느낀건 6,70년대가 그래도 '현대'로 분류되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시절을 다룬 현대물들이 조금씩 '역사물'스럽게 보인다는 거다.
10. 스펙 천
올해 내가 본 영화중 가장 망작. 과거 전세계가 주목했던 일본영화수준이 지금 얼마나 퇴행했는지 보여주는 예. 물론 이 영화는 로컬관객을 상대로한 내수물이고 우리나라 영화들 역시 내수시장만을 목표로한 저질 영화들이 똑같이 만들어지고있다는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고예산에 인기배우들이 줄줄이 나오는 인기드라마의 확장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사실 지난해 동시대 일본 영화들을 찾아보면서 느낀건 일본 영화는 드라마보다도 수준이 한참 아래인데 만화나 소설이 모든 스토리텔링의 일차적 소스이고 영화는 그래서 대부분 각색물이고 오리지널이 별로 없다보니 독창성을 찾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우리에 비하면 들이는 돈이나 시간 노력이 비교가 안되는 수준임에도 결과물은 어떻게 이렇게 허접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이 괴작으로 돌아오면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제작진이 만든게 맞나싶을 정도로 캐릭터의 일관성이 완전히 깨져있다는거다. 세부미가 맨 처음 등장할 때 하는 짓을 보면 얘는 분명 드라마에서는 이렇지않았는데 왜 이렇게됐나 싶고, 우뢰매 수준의 cg사용이나 두시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불구 극장판에 걸맞는 그런 볼거리도 없다. 가을에 새로운 극장판이 나온다니 일본대중문화의 사골우려먹기는 진짜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케이조쿠도 극장판이 그렇게 망작이라는데 하여간 이 츠츠미 유키히코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연출력 자체에 문제가 있어보이긴하다. 그가 만든 다른 영화를 봐도. 워낙 드라마건 영화건 가리지않고 다작을 하는 사람이니 작가주의같은걸 의식하고 있어보이지는않는데 아무리 그래도 하여간 이건 너무 심했어. (재밌는게 일본은 드라마 연출자와 극장용 장편 영화 감독의 차이가 없다. 드라마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거의 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드라마 연출자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방송국 직원이고 외주더라도 드라마 만드는 사람은 거의 드라마만 만든다는 점에서 무시못할 차이점이다. 이것도 장편극영화가 tv드라마와 구분되는 매체적 특성을 보이지못하는 현재의 일본영화 질하락의 한가지 원인이지않을까.) 하여간 드라마만 봐도 충분하다는게 결론. 안봐도 아쉬워할 거 전혀 없음.
11.두더지
소노 시온의 야심작. 일본 상업영화에서 포스트 311을 직접적으로 다루려고 시도함으로써 만화원작의 주제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고 말았다. 그러니까 원작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모든 결론을 내리고 다 정리함으로써 확실한 결단을 내리는 철저히 단단한 실존을 가진 개인이었는데 영화는 여기에 311이라는 외부요소를 끌어들임으로써 자꾸만 바깥에서 주인공을 뒤흔드는 것들과의 얽힘속에서 결국은 그런 외재로서의 현실에 주인공이 꺾여 넘어지고만다는 억지춘향스러운 결말을 내고말았다. 내가 볼때 결말은 주인공의 실패일뿐이지 성공이나 희망 이런게 아니다. 원작자가 이 결말에 동의하고 긍정한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그건 이미 원작자 본인도 연재할 때의 그와는 다른 (처지가 된) 사람일테니까 그렇겠지 싶기도하고.
12.청매죽마
역시 양덕창의 초기작. 허우 샤오시엔의 연기가 어쨌거나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영화. 서늘한 도시 드라마인데 확실히 <공포분자>가 훨씬 걸작이다.
13.행복의향기
작년에 많이 찾아본 일본 음식영화들 중에선 그나마 가장 나았다. 나오는 음식들도 먹음직스럽고 오버하지않는 배우들의 연기도, 또 중간에 나오는 중국 마을의 그 고즈넉함도 다 좋았다. 아무리 음식먹으며 쉬는 '힐링'영화라고해도 <고독한 미식가>처럼 마치 누군가 꾸역꾸역 음식을 들이미는 것같은 압박감보다는 이 영화처럼 느릿느릿하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먹을 맛도 더 나는 법.
14.디스턴스
고레에다의 초기작중 <원더풀라이프>보다는 이 영화가 더 좋았다. 처음 만났을때는 낯설기만했던 이들이 서로 조금씩 교류하는 과정은 그들을 그렇게 모이게 만든 떠나간 이들, 즉 죽은 광신교도들이 원했던 바였으리라. 직접적인 교류 혹은 관계만들기. 죽은 이에 대한 원망과 의문 그리고 남은 자의 부채의식, 이것들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않으면서도 충분히 할 말을 다 하고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5.탈명금
오늘날 이른바 '금융화되는 삶'에 대한 면밀한 케이스 스터디. 다른 곳도 아닌 아시아 금융허브라는 홍콩이 배경인지라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온다.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 긴 글을 써볼까하고있다.
16.디어평양
평소 서경식 선생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갖게된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한층 깊게 만든 영화. 곧 <가족의 나라>도 개봉한다니 봐야할듯.
글이 갈수록 짧아지지만 하여간 이렇다. 생각나면 더 덧붙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