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

광기와 예술간의 연관, 그러니까 '미친 예술가'는 무척 깊고 오래된 구구한 역사를 가진 스테레오타입. 그런데 이게 지금은 너무 정형화되고 뻔한 클리셰라서 왠만한 장편 영화에서 이런 주인공을 들고나오면 짐짓 의심부터 하게된다. <프랭크>의 변별점이라면 이걸 반박한다는데 있다. 광기와 예술은 그닥 별 상관이 없으며 미친 사람이 수준높은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 영화는 미친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간 정상인의 관찰기라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관찰자가 처음부터 참여관찰 목적을 갖고 들어간게 아니라 자기가 진정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으리라고 착각을 했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이 밴드의 사람들은 유명해지기위해서가 아니라 살기위해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자기표현을 하지않고는 도저히 계속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없는 자기만족형의 폐쇄된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헤어지더라도 결국엔 다시 뭉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그러니 당연히 관찰자인 존은 그들이 '감격적으로' 해후하는 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올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그 밴드는 존이 있을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친 사람들이 도저히 뭘 어떻게 해볼 수 없어서 만든 광기의 분출 목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밴드에 들어갔으니 그는 처음부터 불청객이었던 셈이고 이 점을 처음부터 간파한 사람이 바로 클라라였고 프랭크는 몰랐던 것.

절청풍운3
절청풍운은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지금 홍콩, 아니 전세계 자본주의 동학에 대한 코멘터리가 되어간다. 이번엔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강탈에 의한 축적'이 소재. 액션이나 스릴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장면이 적고 그 대신 긴 러닝타임을 <대부>류의 서사물 흉내를 내는데 진력한다.

 

aberdeen
팡호청은 정극과 코미디 사이를 의식적으로 왕복하는듯하다. 섹스코미디인 전작 vulgaria에 이어 이번에 드라마 장르. 평범한 홍콩 사람들의 오늘을 그려내겠다는 의도이고 거기에 지금의 그들을 있게한 과거와 역사로부터의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코미디를 만들때는 늘 재기가 번뜩이는 팡호청은 왜인지 진지한 드라마 장르에 도전할 때마다 완성도와 상관없이 뭔가 빠진듯 헛헛하다는 느낌이 있는데 그 이유가 거의 레퍼런스급으로 참고하는듯한 기존의 몇몇 영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못하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의문. <이사벨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왕가위였고 이번에는 로버트 알트만 류의 다중플롯을 차용한다. 


rigor mortis
강시 영화의 주역인 임정영과 허관영을 추모하는 엔딩크레딧처럼 이 영화는 80년대 강시 영화에 바치는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강시 영화 그리고 강시 장르가 유행했던 80년대 홍콩 영화의 한 세대를 추도한다. 이제는 (실제로는 그렇지않지만) 몰락한 배우 전소호가 자살하러왔다가 귀신과 퇴마사가 영역다툼하는 아파트 한가운데에 낀다는 이야기.

 

little murders

70년대 엘리엇 굴드 출연작들은 믿고 봐도 된다. 초현실코미디는 역시나 강한 현실 풍자 목적을 가질 때 빛을 발한다.

 

sorcerer

<공포의 보수>를 주말의 명화에서 본 게 중학교 때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사실 좀 심드렁하게 봤었는데 얼마전 hd로 복각된 이 리메이크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했다. 스타워즈에 밀려 흥행에서나 비평 양쪽에서 철저하게 과소평가된 작품인데, 실패가 예정되어있고 실패할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인간의 이야기에는 쉽사리 눈을 떼지못한다. 이상한 취향인거 같긴하지만.

 

play it again
우디 앨런이 연출하지 않고 출연만 한 몇 안되는 영화이자, 앨런의 홈그라운드인 미국 동부가 아닌 서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 흔치 않은 영화. 출연만 했으나 연출까지 한 것 같은 전형적 우디 앨런 영화인지라 오히려 그의 연출작보다도 그의 일관된 캐릭터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영화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the hospital
6,70년대 미국 드라마 장르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 선호가 있어서 틀면 마냥 보게된다. 오로지 일정 수준 이상의 각본, 연출, 연기로만 승부를 봐야하는 장르, 거기에 자본주의의 활황과 맞물려 미국 영화가 펄펄 끓던 시기의 미국 사회를 돌아보는 재미까지있기 때문이랄까, 굳이 이유를 설명해보자면.

seven days in may
국내에서 왜 금지됐는지 알만하다. 60년대 초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니 미국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나라.

rehearsal from murder
엄청 찾아헤맸던 영화. 어렸을 때 심야에 엄마랑 둘이서 <명화극장>에서 봤었다. 사실은 <토요명화>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인터넷 검색으로 편성표를 확인한 끝에 알아낸거다. 옛날 tv 편성표를 올려놓은 블로그를 겨우 발견해서 드디어 제목도 알게됐고 심지어 유튜브에서 영화 본편까지 볼 수 있었다. 마지막 결정적 반전이 일어날 때 자리를 비웠던 엄마에게 내가 '스포일링'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제목도, 출연배우도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이 영화를 찾으려고 얼마나 웹을 뒤지고 다녔던지. 알고보니 1982년에 제작된 tv 영화인데 아무튼 저런 옛 기억때문인지 그럭저럭 재밌게 볼 수 있었다.  


lenny
내게는 더스틴 호프만 최고의 연기.

blue jasmine
연출은 기성품인데 연기가 영화를 구한 케이스

야행
2013년 말에 보긴했는데 이월하자면 2014년에 본 가장 강렬한 한국영화. 거의 40여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여성의 심리적 방황이라는 주제도 그렇고 그걸 연출하는 방식이 고릿적에 이미 저런걸 다 하고있었다는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놀라웠고 신기했다. 여주인공이 혼자 사는 집이 이제 막 준공된 반포주공아파트인데 아파트 내부 모습이나 지금은 안쓰는 커다란 밥그릇과 숟가락 등의 살림도구, 여주인공이 일하는 은행을 포함해 계속 돌아다니는 명동을 비롯한 서울의 구시가, 그리고 저녁에 방영하는 tv드라마 제목이 무려 '홍길동'이라는 등 옛 서울의 도시풍경이나 문물 들여다보는 재미가 컸다.

티켓

vhs로 밖에 안남은 영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상자료원에서 역시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원스어폰어타임인 아메리카
현재까지 가장 긴 버전으로 알려진 4시간 19분판을 봤는데 이마저도 불완전한 부분이 남아있다. 도대체 최초 세르지오 레오네가 의도한 편집본은 대체 어느 정도 길이였을까.

 

미드나잇 애프터

원작이 홍콩에서 대박쳤다는 인터넷 소설이라는데 프루트 챈은 홍콩에서 나고 자란 이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홍콩을 배경으로 홍콩 배우들만을 데리고 또 한편의 홍콩찬가를 만들어냈다. 우산 혁명이 봉기하고 (반쯤은) 실패한 해에 동일한 자리에서 그는 본토로부터의 이런저런 영향으로 인해 점점 낯설어져가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이방인적 의식을 투영하려고 했던거 아니었을까하는 짐작.

 

f for fake

'천재'란 단어는 너무 남용되어 이제는 사실상 아무 뜻도 없는 단어에 가까워진 탓에 굳이 꺼내려는게 객쩍긴하지만 웰스에게는 다른 어떤 수사보다도 그냥 이 단어가 최적의 자리인듯하다.

 

인터스텔라

확실히 내가 미국인의 감수성과 안맞는다고 느끼는게 <보이후드>에 대한 만장일치에 가까운 그쪽의 열광, 또 반대로 이 영화를 향한 냉대에 가까운 홀대 양편 모두 이해가 안된다. 두 편 다 영화라는 예술의 독자적 특수성이라할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을 연출자가 맘껏 자기 개성대로 활용했는데 보이후드가 시계열적 시간의 퇴적이 보여주는 시간의 장엄함을 보여주는데 그쳤다면 이 영화에서는 첫번째 행성에서의 상대성이론 가지고 놀기보다 놀란 특유의 후반 교차편집이 더 감동적이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거리가 있는데 이렇게 이 영화를 좋게 보는 것도 나 역시 한 명의 한국인임을 방증하는건가 싶기도하고 그렇다.


the raid 2/ the act of killing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에 대한 어떤 '이미지' 혹은 '편견'을 만들어준 두 편의 영화라고 해야되나. 앞의 영화는 배우들이 쓰는 무술의 형식을 제외하면 로컬색이란게 거의 없다시피한, 세계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했어도 거의 다 통할 익숙하디 익숙한 언더커버 이야기이고 후자는 그렇게 장르 영화의 외피에 가려졌을 그 나라의 폭력의 살벌한 민낯을 보여준다. 합을 맞춘 스타일리시한 '액션' 그리고 고문과 살인으로 이어진 생짜 폭력과의 연결고리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않겠나하는 생각. 한국도 예외가 아니듯이.

 

the grand budafest hotel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형식적으로 엄정해진달까 완고해진달까. 후반기로 갈수록 형식적으로 점점 완결되어가며 누구도 범접못할 독자적 스타일을 구축했던 오즈를 보는듯했다. 헬베티카체는 이제 아예 버린듯.

 

inside lewyn davis

60년대의 미국 풍경 재현이 꽤 그럴듯해서 좋았다. 저렇게 입구와 출구가 맞붙은, 아니 맞붙어있지는 않더라도 아무리 좌충우돌 우회해봐야 입구와 출구가 이미 정해져있는 인생여정이야말로 진정 그럴싸하지않나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macbeth

고전을 보는 재미가 이런데 있는거 같다. 영문학의 고전을 가지고 영화의 고전을 만들었는데 실제 중세의 실상에 가깝게, 그러니까 야만스럽고 흉폭하기 짝이 없는 고릿적 시대상을 고전에다 접목한다. 의도였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작가의 악취미를 끝까지 밀어부쳤다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

 

천주정

중반까지는 좋았는데 마지막 에피소드가 앞의 둘에 비해 너무 약하고 억지로 앞과 연계지어 결말을 내려는 것도 무리한 시도인듯.

 

깡패수업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크루들인 오스기 렌과 하쿠류가 나오길래 캐스팅에 힘 좀 썼구나했는데 후반엔 v시네마 제왕인 아이카와 쇼까지 나온다. 뭘 하고싶었는지는 알겠는데, 즉 미드나잇 카우보이나 허수아비같은 70년대 미국 버디영화의 재현.(근데 이 장르의 한국식 로컬 버전의 또다른 한편인 게임의 법칙에도 박중훈이 나온다) 역시나 결과물은 딱 90년대 한국영화스러운 어색함과 촌스러움이 어쩔 수 없더라는.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지난 3년간 그간의 작품 경향과는 구분되는 두 편의 진지한 정극을 연출한 바 있다. <마이 백 페이지>는 실화를 배경으로한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이고 <고역열차>는 하층 노동자였던 작가의 자전적 삶을 소재로 한 사소설을 영화화한 것이었는데 두 편 모두 평단에서의 호평과 달리 흥행은 아쉬웠던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고역열차>를 마친 후 야마시타는 바로 장편에 들어가는대신 케이블 음악방송국의 스테이션 id라는 명목의 미니 드라마를 연출하기 시작했는데 작업 과정에서 이를 극장용 경장편으로 확장한 것이 바로 <모라토리엄의 타마코>다.


결과적으로 일본 좌파의 몰락을 불러온 1972년의 두 개의 사건들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갖는 무게를 극복해내지못했던 <마이백페이지>가 다소 의외였을뿐,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영화는 줄곧 역사나 사회보다는 주로 낙오자와 소외된 인물들에 천착해왔다. 그가 처음 주목을 받은 야마모토 히로시 주연의 '바보 3부작'만 보더라도 그가 이러한 캐릭터와 이야기에 얼마나 친근감을 갖고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데 2013년의 <모라토리엄 타마코>은 그런 점에서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만들어진 초기 3부작과 외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함축하는 바는 미묘하게 다르다. 3부작의 인물들이 영화 촬영을 위한 헌팅 여행을 떠난다거나 고향에 내려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있는 반면 <모라토리엄>의 타마코는 한마디로 말해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해 아무 것도 하지않으려는 인물이다. 아버지 성화에 못이겨 썼지만 결국 버리고만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은 본디 이력서라는 양식에는 결코 어울리지않는, 오히려 써서는 안되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말 그대로 '우상'인 아이돌을 열망한다는건 곧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 대신 타마코는 게임을 하고 만화를 보고 손님으로 알게된 중학생과 이런저런 작은 모험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잠을 잔다. 아무 것도 하지않으면서 나름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우리에게도 이제 결코 낯설지만은 않기에 납득이 된다.


이렇듯 영화는 '모라토리엄'으로 비유되는 유예된 시간과 사회적 책무로부터의 도피가 주는 매력과 불안의 양가감정을 직접적으로 전혀 노출하지않으면서 거기에 더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않는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있다. 백수나 니트를 다룬 다른 영화 주인공과 달리 타마코는 꿈과 목표를 이루기위한 노력 자체를 하지않으며 변화가 없는 일상의 지리멸렬함 속에서 생기는 피로감이나 불안도 거의 보이지않는다. 따라서 타마코가 취업에 성공해 이 상황을 벗어나느냐의 여부는 어느샌가 이 영화에서 부차적인, 아니 차라리 전혀 중요하지않게 되어버린다. 그 대신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는 부녀가 영위하는 그들 나름의 '생활'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궁금해지는건 바로 타마코가 오늘은 뭘하며 보낼지에 관한게 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끌고가는 동력이 '목표'와 그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의 서사가 아니라 바로 '생활'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시공간과 자연의 변화같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일련의 구체적 행위 양식의 메뉴얼로 구성된 생활에 대한 애착과 중요성은 일종의 일본적 특수성처럼 일관되게 영화나 드라마, 소설등 서사 장르에서 관철되고있는데 이는 각각의 계절마다 당연히 해야하는 것처럼 정해져있는듯한 구체적 의식이나 행위 양식들, 즉 봄의 벚꽃놀이, 여름의 불꽃놀이와 축제,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섣달그믐 제야의 타종행사 tv 중계 시청 그리고 각 계절 음식 같은 것들로 재현되며 이는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활'을 특정한 목적과는 무관한 말그대로 사람이 '생을 부지하기위한 활동'이라는 의미의 구체적 행동 양식의 모음으로 이해하게될 때 그것이 의식적이건 아니건간에 종내는 목적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확신 그리고 신뢰로 귀결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부녀는 밥상 위에서 같이 밥을 먹고 투닥거리던 가운데 별다른 계기없이 갈등을 해결이 아니라 '무마'해버린다. 평범한 생활을 공유하던 중에 서사상의 클라이맥스를 거치지않은채 결말에 이르러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명징하게 재현된다. 타마코가 실로 오랜만에 듣게된 '자연소멸'이란 단어에서 방점은 당연히 '소멸'이 아니라 '자연'에 찍혀있다. 인위적 노력을 하지않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어떻게든 되어버리는, 그래서 타마코 역시 지금의 유예된 시간을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지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될거라는, 그녀의 '생활'이 아닌 '삶'을 향한 은근한 당부와 믿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90년대말과 2000년대초의 3부작과 2013년 사이의 간극은 비슷한 처지의 인물에 대한 자못 상이한 시각차를 드러낸다. 아무 능력도 없이 무작정 세상에 나가 바보짓을 하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청춘들을 마치 자기 얘기를 하듯 만들었던 이십대 중반의 영화감독은 이제 기성 세대의 일원이 되어 자신보다 어린 젊은이들을 심드렁한 척하는 태도로 관찰한다.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제는 상투적이다시피한 허다한 언급이 없는 대신 별다른 고저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점차 쌓여 삶이라는 서사를 써간다. 하지만 '생활'에 대한 핍진한 묘사의 묶음으로 '삶'이 환원되어도 괜찮은걸까. 기승전결의 서사를 포기하고 소소한 생활의 묘사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치유계 영화의 역설적인 서사 전략의 본령인걸까.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와 감상 그리고 비판과 상관없이 내게 생긴 의문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삶 life'을 '스타일'과 연관짓는 온갖 정보와 디테일과 슬로건과 운동과 유행이 난립하면서 이러한 이야기 전략은 우리에게도 익숙해져간다. '이것으로 좋지않은가'라는 상투적 대사로 대변될만한 라이프 스타일의 그 촘촘한 묘사 뒤로 사실 알고보면 '삶'에 대한 특정한 입장과 태도가 은밀히 표명되고있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에 대해 답하기위해서는 따로 글 한 편이 필요할듯 싶다. 아무튼 적어도 이 영화에서 야마시타의 그 심드렁한 척하기의 뒷편에는 개인의 심정과 상관없이 무연히 흘러가는 시간에 기댄 무심한 기대와 응원이 있다. 그러고보면 그저 제작 시기와 맞물린 우연일 뿐이라고했지만 호시노 겐의 주제곡 '계절'은 실로 탁월한 선곡이 아닐 수 없다.  


p.s 영화에는 포함되지않은 실제 스테이션 id 영상들.




만화나 소설의 각색 또는 tv드라마의 극장판이 제작되는 개봉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는 실화마저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 에세이, 다큐, 르포 등으로 가공된 1차 저작물을 다시 각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대부분의 각색물이 주로 원작의 설정만 빌어오는 서구와는 달리 원작의 유명세에 기대어 안정적인 수익을 얻으려는 기획하에 영화사와 방송사간에 오랜 시간 동안 긴밀하게 구축된 제작 협조 체계 속에서 연출자에게 창작적 개입의 여지를 주지않은 채 거의 원작 그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작가적 인장을 새기는 감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하루키의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토니 타키타니>로 알려진 이치카와 준 (1948-2008) 역시 20여년간의 필모그래피 상당수를 각색물로 채웠다. 요시다 슈이치, 야마자키 후미오, 마도 카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하야시 마리코 등 소설이나 에세이 뿐 아니라 tv 다큐까지 포함하는 꾸준한 각색 작업을 거치며 그는 이미 검증된 원작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으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려 애써왔고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결과적으로 특유의 형식적 안정성과 휴머니즘이 일관하는 결과물로 완성됐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1993)

영화 내내 카메라는 병실의 한쪽 편에 고정되어 반대편 침상을 바라본다. 당연히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단 한번도 클로즈업은 커녕 심지어 바스트샷 하나도 없다. 그저 멀찌감치서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풀샷만 있을 뿐이다. 자연히 의사와 환자를 포함한 등장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들의 감정을 알아채기란 쉽지않다. 병세가 더해감에 따라 얼마 남지않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세 명의 암환자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한 명의 담당의가 서로간에 맺는 관계의 변화가 영화를 채워나간다. 소설이 아닌 실제 의사가 쓴 동명의 에세이인 원작을 염두에 두었는지 이치카와는 일반 극영화의 형식을 버리고 출퇴근길, 축제, 벚꽃놀이, 주택가 골목, 초등학교 교실, 시장, 해변, 카페, 버스, 아이들의 놀이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삽입하여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에피소드들을 구분하는 단락으로 쓰고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하면서 정겨운, 그리고 무엇보다 활기에 넘치는 일상과 생활의 장면들은 삶으로부터 조금씩 죽음으로 넘어가는 환자들의 이야기와 확연히 대비되지만 그들의 비극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짧은 인서트에 불과한 풍경 속으로 환자들의 에피소드가 서서히 스며들어간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문병을 다니며 늘 지나다니던 길 위로 죽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읽어나가는 남편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삽입됨으로써 두 개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데 이른다. 

 

<토키와장의 청춘> (1996)

일본 만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유명 만화가들이 숙식을 같이하며 꿈을 키워가던 공동체 시절의 이야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해가며 꿈을 일구어가는 과정이 인물간의 갈등이나 창작의 고통에 대한 클리셰를 걷어낸 채 이치카와 영화 특유의 안정감 속에서 차분하게 진행된다.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고민과 꿈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사는 공동체에 대한 회고적 묘사는 그것이 더이상 가능해보이지않는 현재 시점에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거장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또 전후 경제부흥시기에 대해 공유하는 일본인들의 집단 기억을 고려하면 미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영화는 노스탤지어에 쉽사리 기대기보다 고군분투하는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어떤 제약을 받았으며 또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를 서정적이지만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봄, 바니스에서> (2006)

평범한듯 보이지만 쉽게 털어놓지못할 비밀과 고민을 간직한 채 어쩌면 위장에 가까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몇 개의 작은 사건들을 지나며 조금씩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별다른 설명없이 진행되는데 마치 직전에 만든 <토니 타키타니>의 비공식 속편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유사한 스타일이 유지되고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나레이션을 맡았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여기서는 주인공을 연기하고있다.) 하지만 hdtv 초기에 제작된 tv 드라마로서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시도한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특색. 동일한 인물이 나오지만 하나로 응집되지못한 단편 연작인 원작이 각색 작업을 통해 구성적 완결을 갖춘 단막극으로 거듭났음에도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못했지만 hd 영상 속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치카와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다소 불균형적 결과물이 되었다. 

 

<츠구미> (1990)

친구 마리아의 나레이션과 함께 대도시 도쿄로부터 진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바닷가 시골 마을로 서서히 이동하는 부드럽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인상적인 7분여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타이틀 크레딧과 함께 그 타이틀의 주인인 츠구미가 등장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원작을 가지고 통속적 줄거리의 드라마가 될 뻔한 함정을 피해가는 이러한 영리한 전략은 불치병을 앓으며 마음마저 상처를 입어가는 여주인공의 돌연한 행동들을 보여주면서 앞의 서정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금 배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원작에 충실한 편이지만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널찍한 료칸 내부의 공간감, 고정된 포즈의 인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숏등 특유의 시정적인 정경과 분위기 묘사는 전성기 이치카와의 연출력을 확인하게한다.

 

이 네 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형식상으로는 cm 연출 때부터 시작된 일관된 스타일을 추구한 반면 내용상으로는 일반적인 기승전결 플롯의 전형성에서 꾸준히 벗어나려한 점은 이치카와 준의 작가성을 이루는 요소이다. 분위기, 즉 무드로서의 '안락함'이 유지되는 형식적 안정성은 트레이드 마크로서 그가 연출한 cm, tv 드라마, 장편 영화 모두에서 공통된다. 차분하다못해 살짝 가라앉은듯한 분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묘한 안락함의 정서를 제공하는데 이 분위기는 이야기와 내용을 차치하고 형식으로만 보자면 대개 고정되어있거나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움직임이 많지않은 인물들의 동작, 그리고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처럼 사물을 대하는 시선에서 비롯한다. 한참 멀리서 훔쳐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밀착하여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말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곁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물의 인위적이지않은 자연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것처럼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관찰자적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원경으로 포착된 마을 풍경이나 달리는 전철의 반복된 인서트 컷 등은 이미 오즈에게서 익숙하게 보아온 것이지만 친숙함 그 이상의 어떤 감정을 상기하게하는데 이러한 이치카와의 영화를 가리켜 요모타 이누히코는 '노스탤지어의 회귀'라고 명명하면서 도저한 '회고 취미'와 그에 기반한 '인생의 스냅샷'같은 화면을 지적하고있다. 희노애락같은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감정이 아닌 마치 정물화나 저 멀리 고정된 풍경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즉 고정된 사물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어날법한 아스라한, 보이지도 정체를 알 수도 없기에 '무드'라고 일컬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서정성을 노스탤지어라 (적극적으로) 재정의한다면 이러한 정조의 시각화야말로 이치카와 준 영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의 작가성은 앞으로 계속 논의되고 재평가될만하다.

이번 2014년 nhk판 롱굿바이는 전반부까지는 원작에 매우 충실했으나 역시 후반부에서 상당한 각색을 가했다. 

1. 이건 nhk판 만의 문제는 아니긴하나 말로우의 독백이 거의 다 사라져버려 무척 심심하고 재미없어졌다. 거의 명언 수준이라할 말로우의 독백이야말로 원작의 정수이고 핵심이요 알파이고 오메가인데 영화건 드라마건 말로우 시리즈를 영상화할 때 이것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하는 부분이라면 연출력으로 극복해내야하건만 전반적으로 이렇다할 명장면이나 기억에 남을만한 대목이 없었다.

 

2. 원작이 추리 소설치고는 복선이나 암시, 힌트를 사전에 제시하고서 독자에게 맞춰보라는 식의 퍼즐게임을 하려는 의도가 없는지라 추리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해도 이번 nhk판은 대놓고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현재 일본에서 코유키라는 배우 자체가 일종의 마녀 이미지가 있어서 작년 4분기에 방송된 리갈 하이 2에서도 그런 맥락에서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됐는데 이번에도 그 스테레오타입을 그냥 빌려와버렸음. 게다가 드라마 내내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데다 심지어 4화 예고를 보면 직접적으로 '팜므파탈' 운운하는 지경.

 

3. 1과 관련하여 그래서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마스자와 반지가 그렇다면 상대한테 맞고다닐지언정 말씨름에서는 지지않는 특유의 빈정대고 비꼬는 말로우 특유의 반어법적 말투가 나와야하는데 이것 또한 방송내내 제대로 구현되지않았다. 즉 이번 nhk판에서는 마스자와 반지 캐릭터가 원본에 충실한 것도, 재해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여러번 말했듯 캐릭터만의 문제는 아니긴하다. (평소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력에 대해 호의적이지않은데 따른 편견일 수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리고 원작에서 레녹스와 말로우는 동년배, 게다가 레녹스는 원작에 따르면 흰머리가 갑자기 늘 정도로 급속히 늙어버린 남자인데 nhk판에서는 나이차도 나고 실제로도 아사노보다 한참 어린 아야노 고가 연기하고있다. 

 

4. 상기했듯 이번 2014년판은 전반부까지는 원작과 거의 차이가 없다시피한 충성스러운 각색이었다. 그런데 후반부가 그렇지않다. 이는 역시 소설을 영상화하는데 따른 어려움 때문인데 원작에서는 아일린과 말로우 그리고 출판업자 스펜서가 같이 앉아서 담판을 지으며 그 과정에서 범인이 밝혀지는데 nhk판에서는 마스자와가 이미 출판업자에게 사전에 자신의 추리를 말하고난 후 카미이도 부인을 찾아가는데 그마저도 하나하나 추궁해들어가며 일격을 가하는 식으로 진행되지않는다. 원작을 읽으면서 이 클라이맥스 부분이 꽤 산문적이어서 영상화를 하면 좀 심심하다싶긴했는데 정작 이번 드라마판은 원작보다도 더 싱겁고 흐지부지하게 사건이 해결되어버리는 셈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그나마 필립 말로우가 탐정다운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이걸 그냥 이렇게 넘겨버리고만다. 그리고 이 소설의 특징이 범인이 다 밝혀지고난 이후에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꽤 길게 진행된다는건데 이 부분은 축약해서 넘어간다. 이거야 어차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거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5. 마스자와 반지와 하라다 타모츠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서정적으로 끝나버렸다. 마지막 우정을 나눈 후 말 그대로 긴 이별을 하기 직전의 순간인데 원작에서처럼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꾼 채 혼자 사무실로 찾아오는 설정을 그대로 따라하는건 무리였을테니 그렇다쳐도 상대의 정체가 밝혀지는 나름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임에도 역시나 어떠한 충격효과도 줄 의도가 없다는듯 하라다의 얼굴을 보여줘버리고 그 뒤에 어처구니없게도 반지가 끝까지 상대를 알아보지못했는지 얘기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그 순간까지 하라다는 한번도 돌아보지않고. 이거 남자들의 비정한 세계를 다루는 하드보일드 느와르 아니었나. 원작에서 말로우와 레녹스 간의 다소 건조한 대화들이야말로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냥 그대로 넣었어도 충분했을텐데.

 

6.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실망한 대목은 그 이후인데 마지막 64년 올림픽을 앞두고 상기된 도쿄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가운데 뜬금없이 2020년 도쿄올림픽 홍보 엠블렘이 지나간다. 이걸 보는순간 내가 왜 지금까지 이걸 보고있었나하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사극과 아침드라마 빼고 nhk드라마에는 기대를 하면 안되는거였는데. 역시 이번에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번쯤은 원작에 끝까지 충실한 그런 영화나 드라마 버전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긴하지만 그렇다면 원작과 1973년 알트만 판과의 차이를 다시 짚어보자면

 

알트만은 원작의 시간적 배경을 당대로 옮겨오면서 다소 '파괴적 각색'을 시도했다. 리 브래킷이 쓴 시나리오는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베트남전 반대운동, 유럽의 68혁명, 히피즘까지 60년대말 서구는 물론 옆나라 일본에까지 불어닥친 반체제 운동이 미완의 성공 혹은 실패로 끝난 후 다소 맥이 풀리고 나른해진 시대 분위기가 반영되어있었다. 그 결과

 

1. 원작에서는 끝없이 독백을 하지만 경찰이든 의뢰인이든 상대에게 말할 때는 말이 짧은 대신 반어법과 블랙 유머로 일관하는 필립 말로우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빈정대는, 다소 뺀질거리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엘리엇 굴드의 말로우는 혼자 고양이를 키우고 (원작에는 말로우의 외로움을 강조하기위해 린다 로링이 말로우가 개나 고양이도 키우지않는다는걸 강조하는 대목이 있음) 성냥을 꼭 벽에다 대고 긋는 버릇이 있다.

 

2. 또 시대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영화판에서는 말로우 옆집에 정신요법에 심취한 철지난 히피여자들이 떼거지로 살고있고 심지어 말로우한테 심부름까지 시키는데 물론 원작에는 없는 설정.

 

3. 사건의 진상이 다르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작은 '치정'인데 영화판에서는 여기에 약간의 '금전관계'가 섞여있다. 영화판에서는 아일린을 범인으로 분명하게 적시하지않기때문에 그녀의 히스테리에 기반한 치정으로 사건을 끝낼 수가 없어서 그 대신 웨이드 부부와 멘디 사이에 얽혀있는 돈관계가 실비아의 살인과 테리 레녹스의 도주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암시를 한다.  

 

4. 마찬가지로 알트만의 영화판에서는 아일린이 두 건의 살인사건의 직접적인 범인이라고 명시하지않기때문에 로저 웨이드가 사라지는 방법도 다르다. 영화판에서 스털링 헤이든이 연기하는 로저 웨이드는 살해당하는게 아니라 한밤중에 파도 속으로 걸어가더니 그냥 갑자기 실종된다. 

 

5. 무엇보다 원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영화판에서는 레녹스와 말로우가 이미 예전부터 친구사이였던걸로 나온다. 하지만 원작에 비해 두사람의 우정이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다 알다시피 영화판에서는 말로우가 멕시코로 찾아가 그냥 테리를 쏴 죽여버리는 악명높은 엔딩으로 처리해버린다. 원작에서 테리와 멘디는 테리와 필립 못지않은 우정을 갖고있던 관계였고 그래서 테리는 아일린의 죄를 덮어쓰는 과정에서 멘디에게 도움을 청하고 멘디는 기꺼이 테리를 돕지만 영화판에서 멘디는 그저 철저한 악당. 하지만 영화판은 위에서 이미 말했듯 정작 끝까지 보고나면 도대체 사건의 진상이 어떻게 된건지 불분명한 점이 너무나 많은데 그럼에도 말로우는 사건을 확실히 해결할 생각도 없이 그저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런 짓을 해버린다. 기실 영화는 이렇게 캐릭터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후반으로 갈수록 대책없이 갈 길을 잃고 흐느적대며 멋대로 진행되긴한다. 특히 후반 30분은 솔직히 너무하다 싶을 정도.

 

그 외. 다시 nhk판 얘기를 하자면 일단 시대고증에서 현실성보다는 다분히 필름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분위기에 맞추어 소품이나 의상 세트에서 당시 현실과는 다소 안맞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나 논픽션에 나오듯 무척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50년대의 시대적 난맥상을 어떻게 담아낼지가 관건인데 로컬성이 그다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혹은 반대로 어차피 원작에서 챈들러가 하는 당대 사회 비판이란게 대개 관료제, 탐욕스러운 자본가, 권력층의 부패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이기에 충분히 어느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든 각색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 형사 한 명이 있다. 경시청 수사1과 소속, 즉 살인사건 담당이다. 그런데 이 형사는 일하기가 그다지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담당하는 살인사건의 모든 범인들은 피해자의 최측근이기때문이다. 즉, 여기는 철저히 면식범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게다가 이 형사는 일복도 타고난 탓에 사적인 일정에도 여지없이 살인사건이 따라붙는다. 호주나 미국, 스페인같은 해외로의 휴가는 물론이고 치료를 위해 들른 치과에서마저 하필이면 그날 치과의사가 그 형사를 알리바이삼아 살인을 저지르니 말이다. 타인의 거짓말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뛰어난 직감을 가진 형사는 용의자를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귀찮게 말을 건다. 그러면 이 용의자들은 거기에 맞춰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형사의 꾀에 넘어가 본인도 모르게 자백을 하고만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용의자들이 귀찮다고 느낄 정도로 쫓아다니며 형사가 말을 거는데 이 용의자들은 종내 그 대화에 응한다는 점이다. 그들을 상대로 형사는 우선 현장에서 용의자가 놓쳤거나 실수한 점들을 짚어내고 당연히 그 말을 듣고있던 살인범의 표정은 이내 얼어붙는다. 하지만 아직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 그러다 형사는 뜻하지않은 지점에서 결정적 힌트를 찾아내고는 미소를 지으며 시청자에게 말을 건다. 과연 '나는 어디서 어떻게 범인을 확신하게 되었을까요?'

 

미타니 코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드라마 <후루하타 닌자부로>의 정수는 단연 1,2 시즌이다. 45분 안에 살인사건과 그 해결까지 한호흡에 마무리를 지어버리는 초기 두 시즌의 재미는 한 편당 2시간에 가까운 sp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드라마의 리듬 자체가 45분 분량에 최적화되어있음에도 어떤 sp 같은 경우는 범행과정에만 한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이 드라마의 패턴을 파괴하고마는하는 우를 범하기도한다. 그러나 3시즌에 접어들면 이제는 레귤러 드라마 형식 안에서마저 시리즈의 장기화에 따른 피로가 감지되는데 중후반부쯤에서 결정적 힌트를 얻어 범인을 확정하는 해결 및 풀이 방식을 유보하고 이미 범인을 특정해 놓고서 맨 처음 어디서 확신했을까를 맞춰보라는 방식으로 선회하게되는데 이는 부족해진 단서 찾기나 수사과정 등 결정적 사건 해결을 보충하기위한 차선책이다. 또한 사건 발생 후 출동이라는 패턴이 아니라 이런저런 상황에서 뜻하지않게 후루하타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전개가 주를 이루는 것도 3기의 특징이다.

 

모든 추리 및 미스테리물이 마찬가지이겠으나 이 드라마에 나오는 트릭들도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매끈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지고들면 여기저기 헛점이 있고 끝까지 납득되지않는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들이 이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재미에 전혀 영향을 주지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시리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후루하타 닌자부로라는 괴짜 형사 캐릭터, 그리고 그와 짝패를 이루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이마이즈미와의 콤비플레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검은 옷, 길게기른 뒷머리 같은 외양과 함께 과하다싶을 정도의 연극적인 발성과 대사처리, 그리고 몸짓을 통해 개성이 분명한 캐릭터를 만들어놓은 타무라 마사카즈의 연기는 수사물이 기계적인 수수께끼 풀이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또 하나의 장기 수사물인 <파트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지점이다.

 

마음이 요동치는 밤, 오즈 영화를 찾아보곤한다. 주로 컬러 시절의 후기작 아홉 편. 60년대 컬러 필름의 질감, 또 그 안에 50미리 단렌즈로 담아낸 일본의 옛 풍경들, 그리고 오즈 영화 속 사려깊고 예의바른 사람들의 틀에 박힌 형식적인 대화들을 보고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오즈의 후기 컬러 영화들 중에도 <고하야가와의 가을>은 이색적이다. <부초>에 이어 나온 나카무라 칸지로라는 배우 때문이다. 출연한 두 편에서 이 배우는 오즈 영화에서는 보기드물게 속물적 면모를 전혀 숨기지않는, 누구도 좋아하기 힘든, 그래서 류치슈와 전혀 상반된 아버지 캐릭터를 연기한다. <부초>에서 부인 몰래 낳아 숨겨놓은 아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채 다가가는 유랑극단의 단장이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식구들을 속이고 집 밖으로 나가 교토에 사는 정부와 딸을 만나는 노회한 가장을 연기한다.

 

나카무라가 이렇게 뻔뻔한 가부장으로 나오는 반면 이번에도 여성 캐릭터들은 다소곳하고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결단력있고 주체적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막내딸의 이름은 노리코이곤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츠카사 요코가 노리코를 연기하고, <만춘>과 <동경 이야기>에서는 노리코였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극중에서도 계속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하라 세츠코는 고하야가와 집안에 시집을 왔으나 지금은 미망인이 된 아키코를 연기한다. 오즈가 이 영화 바로 전에 만든 전작인 <가을 햇살>에서 서로를 아끼는 모녀간으로 나왔던 두사람은 이번에는 사이좋은 시누이와 올케 간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변화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현재 있는 그대로 붙잡아두려는 부질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월은 흐르고 세대는 아래로 내려가며 이어진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오사카에서 유서깊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고하야가와 가문. 사위는 가업을 돕고있고 큰 딸이 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집안을 유지하고있는데 막내딸인 노리코는 창너머로 오사카 성이 보이는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그리고 그녀의 올케이자 고하야가와가의 며느리인 아키코는 세련된 갤러리에서 일을 하고있다.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 아버지를 비롯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은 여전히 막내 딸의 결혼과 과부가 된 며느리의 재혼 등 여성들의 삶을 자신들의 손으로 결정짓기위해 온 관심을 쏟으며 이런저런 품을 팔지만 결국 그녀들은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로 서로 다짐한다. 이미 세상은 나이든 남자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고 있어서 교토에 숨겨놓은 딸(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않은)은 지금 동시에 두 명의 서양남자와 자유연애를 하고있고 방금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도 하지만 바로 이어 성호를 긋는다.

 

한 집안의 가장이 죽으면 어쩔 수 없이 남은 가족들을 둘러싼 세상은 조금은 변하고만다. 경영 위기에 처한 양조장은 곧 더 큰 회사에 합병될테고 큰 사위는 그렇게되면 이제 월급쟁이 사원이 될 것이다. 노리코는 자신의 연인을 따라 삿포로로 떠날테고 아키코도 고하야가와 가문을 떠나 아들을 키우며 살아갈 것이다. 음산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오즈 영화 중에서 단연 가장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한 엔딩으로 끝나지만 그럼에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건 이렇듯 등장인물들의 앞날에 대한 막연하지만 희망 비슷한 무엇이 감지되기때문이다.

2013년작만 대상으로


독전

증국상은 자신과 팽호상이 중국에서 <4+1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동안 얼마나 호된 경험을 했던가를 얘기하면서 앞으로는 본토보다 홍콩에서 작업하고싶다고 했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영화의 검열 원칙중에 귀신과 살인 금지가 있다고하는데 (근데 이 영화는 어떻게 된건지) 무엇보다 여전히 권선징악이 이데올로기로서 강제되고있는 가운데 두기봉의 2013년 연출작중 한 편인 이 영화에도 그래서인지 상당히 사족으로 보이는, 그러나 무척 강렬한 엔딩이 있다. 이 영화에서 중국경찰은 절대로 동료를 포기하지않는 동지애가 투철한 인간미 넘치는 이들인 반면에 홍콩인들은 전형적 악당으로서 마약장사꾼이거나 속으로 딴 꿍꿍이를 품지않은 적이 없는 변절자로 나온다. 좁디좁은 홍콩과는 대비되는 중국의 광활한 공간을 활용한 스토리 전개 (이를테면 장시간동안의 추적이나 계속 여기저기 바뀌는 장소들)같은 것은 그동안 그의 영화에서 보지못했던 요소로서 신선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뭔가 애매하다. 과연 두기봉은 여기서 본토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건가. 아니면 홍콩인을 비하함으로써 오히려 강렬한 조롱을 하는건가. 전형적이다못해 고루해보이기까지한 선악대결이 역설적이게도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케하는 텍스트를 낳은셈 . 


한나 아렌트

적이 아닌 자기 편을 향한 내부 비판이라는 비난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 학살에 협력한 동포을 비판한 자신을 향한 유대인 공동체의 공격에 아렌트는 일급지식인답게 의연하고 결연하며 당당하게 대응한다. 딴소리이나 이 영화를 본 다음 도서관에서 빌리지않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구매했다. 그런데 번역이 그동안 읽어온 번역서중에서는 최악. 제대로 이해를 한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이 좋은 책을 이 따위 번역으로 낸건 명망높은 출판사에게도 흑역사로 기억될듯. 그렇다고 원서를 굳이 찾아읽을 엄두는 안나고. 하여튼 앞으로는 책구매 전에 구매평같은걸 꼼꼼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선희

심각하기보다는 코믹한 홍상수가 더 좋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보다 이 영화가 더 좋은 이유.


비포 미드나잇

로맨스의 판타지로부터 빠져나와 현실의 진창으로 빠져든 이들이 어떻게 환멸을 견뎌나가는지 그 과정을 묘사했다는 평은 3부작을 모두 감안했을때 가능한 것이고 이 한편만 봤을 때는 애초부터 영화 내내 그 어디에도 로맨스가 없다. 그저 날씨좋은 그리스에서 로맨스가 있다고 착각하(고싶어하)는 부부가 어떻게든 그 환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애처로움만 보였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내 눈에는 한없이 불길하게만 보였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건 없고 기어이 한번 더 임시적 봉합에 합의하는 또 한번의 자기기만이 있을뿐이니까. 어쩌면 이 시리즈는 너무 지나치게 나간거 아닌가하는 생각.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감독의 데뷔작에서만큼 반짝거리지는 않지만 중간에 범효훤이 동명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볼만했다. 역시 이번에도 뮤지컬적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기억될만한 장면을 만들어냈는데 범효훤이 그동안 찍은 영화중에서는 가장 예쁘게 나오지않았나하는 (심지어 유부녀로 나왔음에도) 느낌적 느낌.


frances ha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는 미국산 '잉여 청춘'의 험난한 분투기. 굳이 공통점을 말하자면 '젊지만 가난한 여성의 고생담'이라는 점에서 느닷없이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분위기는 당연히 천양지차. 달변이 아닌 (창피를 피하기위한) 다변, 누구도 공감하지못하는 유머등 보고있으면 안쓰러운데 영화는 시종일관 경쾌하게 흘러간다.


일대종사

사실 별 감흥이 없었다. 실질적인 주인공이 양조위가 아니라 장쯔이라는게 약간 놀라웠고 역시나 왕가위 영화는 편집이 완성하는구나라는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렇게 미완성같이 만들어놔도 대가는 그에 걸맞는 품격있는 미완성의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래비티

한때 우주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소년시절을 거쳤던 사람으로서 산드라 블럭의 그 험난한 생존기도 내 눈엔 약간 부러웠다.


신세계

영화광 감독의 영화를 보는 피로함.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의 수치라고 생각함. '나 영화 많이 봤어'를 이렇게 노골적인 짜깁기로 인증해도 한국에선 그냥 넘어갈뿐만 아니라 통한다. 영화광들이 감독된다고 다 타란티노 되는거 아님을 여실히 보여줌.

이번에도 베스트 순위가 아니고 올해 본 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에 남는 영화들. 목록이 길어 정리를 위해 구분해둔다.

 

열쇠도둑의 방법

정식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포털에 검색을 하면 저렇게 뜨는데 저 제목이 오역이다. 딱 봐도 뭔가 어색한 번역투스러운 제목인데 원제목은 鍵泥棒のメソッド 즉 '열쇠도둑의 메소드'다. '方法'이라는 한자를 쓰지않고 'メソッド' 라 카타카나로 썼다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목욕탕에서 킬러로 보이는 어떤 남자의 차 열쇠를 우연히 가지고 나오는 '도둑'질을 한 배우지망생인 주인공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부분에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는걸 가리키는 것이다. 메소드 연기에 대한 책을 한번도 제대로 읽지않은 얼치기 배우가 나름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메소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예의 최근 일본영화답게 그냥 한편의 단막 TV드라마 그러니까 그들의 용어로는 sp라고 부르는 단막극같다. 왜 요즘 일본영화는 이렇게 tv드라마스러운걸까, 볼때마다 이 생각을 안 할때가 없다.

 

리얼리즘의 여관 (후나키를 기다리며, 혹은 ramblers)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2003년작. 그가 본격적으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기 직전에 만든, 그러니까 야마모토 히로시를 주연으로 한 삼부작의 마지막 영화. 원작 만화도 봤는데 영화에서 한가지 에피소드일뿐 전체적으로는 다른 여러 에피소드들로 채워져있다. 슬로우라이프나 힐링 영화 열풍이 불기 전에 나온 영화임에도 마치 내 눈엔 그런 영화들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일종의 안티 로드무비라고 해야되나. 돈도 없는 두 남자가 영화촬영을 위한 헌팅 여행을 떠났다가 이런저런 일을 겪는 이야기인데 미국 영화라면 뜻하지않은 일에 얽히면서 계속 일이 커지는 식으로 진행할텐데 여기서는 여러개의 단편적 에피소드가 연결되는가운데 미묘하게 어긋나는 상황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엇박자 유머로 계속 큭큭대며 웃게 만든다. 전통적인 로드무비 장르가 상실감이나 쓸쓸함을 배면으로 깔고있다면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물론적 의미의) 궁핍함의 정서가 관통하고있다. 가난한 여행자, 가난한 여관, 그리고 가난한 여행이 빚어내는 어색한 상황들. 

 

죽음의 가시

화장을 전혀 하지않은 맨얼굴로 일관하는 마쓰자카 케이코는 <포제션>과 <영향아래의 여자>와 함께 '미쳐가는 여자' 연기의 베스트라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생활

내가 본 우울증 환자에 관한 영화 중에서는 꽤 리얼한 임상보고서같은 영화. 여성 우울증 환자 연기의 한 예시.

 

실록 연합적군

1월 1일, 2013년에 처음 본 영화. 웰메이드를 포기하고 오롯한 결기를 끝까지 유지한 채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다큐 드라마. 미장센 따위 집어치워라는 식이지만 그대신 1972년 연합적군이 일으킨 두 건의 사건들을 둘러싼 앞뒤 정황들을 꼼꼼히 되짚고 사실의 재현에만 충실히 집중함으로써 통렬한 자기비판을 성취해낸다. 내 경우는 영화를 먼저보고 그 다음에 비슷한 시기에 막 출판된 <적군파>를 바로 이어 읽었는데 책을 읽고나자 그제야 영화 앞부분의 상황 설명과 인물들간의 관계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는 굉장히 단역처럼 나오는 시게노부 후사코라든지, 적군파를 처음 만든 시오미 다카야, 그리고 시오미로부터 모리 츠네오가 조직을 이어받는 과정같은 것들이 더 가깝게 와닿았다. 사실을 재현했으니 그런거기도 하겠지만 혹시나 이 영화가 이 책을 참조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 어느 쪽을 먼저 접하든 책이나 영화를 나중에 보면 이해에 도움될듯. 책에 대한 인상은 이전에 적었듯 그렇게까지 잘 쓰인 책이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두번째 읽으니 분명 얻는 부분은 있었다.

 

태풍클럽

80년대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라는 명성이 허명이 아님. 나에겐 80년대 일본 영화하면 맨처음 떠오르는 영화가 됐다. 한줄로 말하자면 '중2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정도 될까.

 

벚꽃정원

태풍클럽이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일본 영화라면 이 영화는 90년대 베스트 중 한편. 십대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미묘한 그들만의 세계가 굉장히 꼼꼼하게 잘 묘사되어있다. 일본 소녀학원물하면 연상되는 것들 중에서 퇴폐적인 것들을 제거하면 딱 이 영화가 나올듯. 같은 감독이 셀프 리메이크했다해서 2008년 리메이크작도 유튜브에서 봤는데 그건 완전 개쓰레기임. 오스카 소속 여자배우들 떼거리로 나오는 자기들끼리의 모임같은거.

 

동경공원

별로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는데 다다미가 깔린 일본 목조주택이 그리 냉난방이 잘되는 것도, 또 보안이나 그밖의 생활상의 편의가 용이하지않을거 같아보임에도 불구하고 잠시동안이라면 한번쯤은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을 찍는, 즉 타인을 관찰하는 대학생 주인공은 정작 자신의 주변사람의 마음은 하나도 들여다보지못한다. 무려 세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단 한명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 전체가 살짝 땅에서 떠있다는 느낌. 그래도 최근 일본 영화중에는 가장 재밌게 본 한편.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이전 포스트에서 밝힌바 있듯 나에겐 일종의 길티 플레저인 일본산 '잔잔한 영화'중 한편. 영화도 많이 보긴하지만 어쨌건 부정할 수 없는 책중독자로서 간다 진보초 고서점가의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내일의 나를 만드는 방법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 복잡한 이야기다. 현재 복잡한 가정환경과 그외 여러 일들 때문에 속내가 복잡한 소녀는 이러한 자신의 현실에 진력을 내는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옛친구를 돕는다. 자신을 가장하여 선의의 거짓말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거짓말을 통해 주인공은 '작가'가 되어가고 힘을 받은 상대편 소녀 역시 타인 앞에 자신을 가장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얻는다. 나루미 리코는 늘 우울하고 청승맞은 역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로 내게는 기억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중에서는 내가 본 중에는 가장 섬세한 연기를 해내고있다. 미완성작을 빼면 이치카와 준의 사실상 실질적인 유작

 

콰이어트룸에서 만나요

처음엔 초현실적 코미디인줄 알았는데 후반부를 보면 그렇지는 않고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다.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식

버블이 꺼지고 장기 불황으로의 전환에 대한 굉장히 나이브한 상상. (일개 관료의 욕심때문에 이렇게 됐다니) 이런 시시한 장르영화도 근데 보고있으면 은근히 일본인들의 속내같은 것들이 보여서 재미있다.

 

인간실격

이래서 명작 소설을 영화화하는건 위험하다. 아무래도 이건 밑지는 장사니까. 그냥 배우들의 노력이 안타깝다는 생각만 들었음.

 

도쿄랑데뷰

스탠다드 비율에다가 거칠거칠한 필름입자가 고스란히 보여서 괜히 옛날영화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거기에 낡은 집, '인생유예중'인 두 남자, 첫사랑의 기억을 안고있는 노년의 여인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날들의 연속 중에 벌어지는 몇 개의 사소한 사건들처럼 영화가 내내 결핍으로 채워져있다. 그런데 그게 또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먹방이 없는 힐링 영화. 

 

배를 엮다

남이 알아주지않는 일에 매진하는, 심지어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도 않는 사람들과 그런 무명의 열정가들에게 감화받는 '보통사람들'의 관찰기 뭐 그런건데 재밌게 보긴했으나 원작소설만큼은 아니고. 수작은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웰메이드 장르영화. 

 

다메진

미키 사토시의 실질적 데뷔작. 이미 이 영화에서 지금 보고있는 미키 사토시의 코드들이 거의 다 나오는거 같다. 참 한결같은 작가.

 

카뮈따윈 몰라
인물이건 상황이건 다 어딘가 기존의 레퍼런스를 두고있다. 맨마지막. 촬영되고있는 영화속 세계와 카메라 바깥의 현실이 완전히 중첩되어버린 상황을 묘사하는 연출력에는 경탄. 감독의 이전 영화들을 찾아보고싶어졌다.

 

동경의 황혼

오즈 영화중에서 가장 우울한 영화이자 가장 격렬한 영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때문. 주목할 점은 의도적일만큼 부부관계묘사가 배제되어있다는 점인데 아버지와 본처가 만나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고 별거중인 큰 딸과 그녀의 남편이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는 장면도 단 한번 없다. 다만 본처와 그의 현재 남편관계만이 짧게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부부 중심의 가족관에 대한 호오를 표시한거가 싶었는데 후반부에 큰딸이 자식은 양친이 키워야한다는 굉장히 보수적인 결론에 이른다는 점이 특이했다. 오즈를 <동경이야기>나 <만춘> 정도의 대표작으로만 알았던 나로서는<무네카타 자매들>과 함께 적지않이 놀랐다. 오즈는 보면 볼때마다 이렇게 놀래키고 마음을 움직이게한다. 그래서 거장이겠지만.

 

동경가족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않는 실망스런 리메이크. 신칸센과 비행기가 널리 보급된 지금, 한번에 자식들을 모두 둘러보러 상경하는 여행이란건 좀 무리 아닌가. 오즈가 얼마나 위대한 감독인지만 확인케하는 영화. <남동생>과 함께 최근 야마다 요지의 일본고전영화 리메이크 두편은 그가 두명의 위대한 선배 일본감독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감동강박이 어떻게 영화를 '안전'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예

 

절식남의 사랑

중반까진 한드같고 (강하게 영향을 받은듯) 뒷부분은 인디출신 감독의 고집과 뚝심이 보임. 근데 전반적으로 너무 기성품같고 특히 후반부가 늘어지는듯. 호시노 겐의 연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개와 고양이

개랑 고양이 키우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한자로 쓴 제목 '견묘'가 보여주듯 말 그대로 견묘지간인 두 동성친구의 동거간 갈등을 다룬 전형적인 일본의 '잔잔 영화' 나로선 그냥 무방비로 넋놓고 보게됨. 어떤 보정도 거치지않은듯한 필름질감도 좋고. 

 

안녕 미도리짱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개와고양이>에서는 찌질하게 나오더니 여기서는 그냥 전형적인 바람둥이로 나옴. 한창 읽을 때라 그런가 영화가 마치 현대를 배경으로 각색한 다자이 오사무 소설같았음.

 

페탈댄스

전에는 아예 제목에서부터 하늘이 들어간 영화 (<도쿄소라>)를 만들더니 이번에도 거의 매 장면에 어떻게든 하늘을 걸고 숏을 찍는다. 이전작과 거의 동일한 스타일의 연출.

 

 

희망의 나라

압도적인 폐허와 절멸의 풍경. 소노 시온은 말(대사)이 많은, 비영화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장엄한 멸망의 비주얼만으로도 역설적인 의미의 감동을 끌어낸다.

 

퍼레이드

요시다 슈이치를 다시 찾아읽게 만든 영화

 

츄리닝의 두사람

2013년에 본 마지막 영화. 갈등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그저 아무 고저없이 흘러가는 일본영화 특유의 잔잔함이 이제는 적응을 넘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음을 이 영화를 보며 확인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야할 자리에서 그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늘 위험을 안고살아가야하는 이들이 터득한 일종의 삶의 기술 같은걸까. 알고보면 고민도 많고 속내가 복잡한 부자가 시골마을로 피신같은 휴가를 떠난다.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조금씩 꿈틀꿈틀대며 변화하고있고 어느새 이미 특별한게 되어버린, 그렇게 알고보면 늘 뭔가가 진행중인 것이 바로 일상이라는 그런 약간의 깨달음이랄까.

 

포테이토 칩

<츄리닝의 두사람>도 그렇고 나카무라 요시히로는 달리 연출력이라 할만한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연출을 하는데 그럼에도 늘 그의 영화는 그래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크게 감동을 받는 것 같다. 죽 무미건조하게 이어지고있다가 터져서 더 크게 느껴지는 절정부랄까.

 

뱀의 길

V시네마로부터 작가주의 아트하우스 필름으로 건너가는중인 영화라고 해야할까.

 

여자가 계단을 올라갈때

이 영화를 통째로 베낀 한국영화가 있다는 사실때문에 더 흥미로웠는데 역시나 기본 줄거리가 매력있다.

 

산의 사랑하는 당신

원작을 유튜브에서 봤는데 이 리메이크는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이질적임에도 원작 특유의 안정적인 분위기가 그럭저럭 재현되고있어서 의외였다.

 

여자는 두번 플레이한다.

이것도 요시다 슈이치 원작인데 작가로서 살아가며 겪는 직업적 스트레스와 피로를 털어놓은 살짝 자기고백적 메타 서사로 보였다.

 

오레오레

영화를 보고 뒤늦게 원작 소설을 읽어봤다. 영화는 '내'가 증식한다는 설정만 취하고 상당한 각색을 가했는데 원작 소설을 읽어본 감상이라면 '다같이 망해버린 다음 완전히 새로 시작하자'는 식의 최근 자주 보이는, 너무 절망한 나머지 절멸을 희구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공멸에 대한 욕구가 결국은 자아라는 소우주에서 빠져나오지못한 에고이스트가 취하기쉬운 자살 충동의 이면이 아닐까라는 생각.  

 

탐정은 바에 있다2

도저히 추리물로는 볼 수 없고 성인풍의 하드보일드 패러디 정도로 볼 수 있을텐데 반전이 도저히 반전이라고 할 수 없을 수준이고 사실상 1편과 같은 플롯의 반복.

 

요노스케 이야기/ 가족의 나라/ 클라이머즈 하이/ 모두 안녕히: 이들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포스팅 한 적이 있음

외관만 보면 건축물로서 아파트는 확실히 주거시설이라기보다는 수용시설에 더 가깝다. 그래서 고급아파트들은 최상급 편의 제공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차별화하기위해 노력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특히 공공아파트 단지의 밀집된 사각형 용기의 집합같은 외관을 보고있으면 아파트란 건물의 일차목적은 단연 인구의 분산과 수용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80년대초 막 준공을 마친 공공아파트 단지의 최초 입주가구중 하나였다. 처음 입주 당시를 되돌아보면 주변의 이웃들이 비슷한 연령대의 가구들, 즉 신혼이거나 첫출산이 얼마 지나지않은, 그러니까 유아 자녀를 하나나 둘 (80년대 자녀 계획의 영향으로 셋이상은 거의 없었던걸로 기억한다) 키우고있는 비교적 젊은 부부를 위주로 한 이른바 정상핵가족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령 뿐만아니라 단지내 주민들은 대개 어슷비슷한 계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엄밀한 학적 분류에 따르자면 노동자 계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간 계급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중산층 진입을 목전에 두고 상승중인 그런 소시민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아직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고 사실로서도 그렇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과적으로 훗날 실제로 그들은 대개 지난 삼십년동안의 지속적인 강남아파트값 상승으로 인한 자산소득을 통해 지대 수익에 의한 잉여가치 획득이라는 교과서 예시에나 나올법한 부의 장기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일괄된 평형대의 주거시설에서 주거의 평등 뿐만아니라 부(축적)의 평등마저 누리고있었던 것이다. 사무직, 자영업, 자유업등 직종은 저마다 달랐으나 딱히 주변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무시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세입자가 아닌 소유자로서 그들에겐 분명치는 않아도 어렴풋한 장밋빛 미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거야 다 부모들의 관점이고 나같은 아이들의 세계는 그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아버지들이 출근하고 난 뒤 텅 빈 주차장을 공터삼아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고 공놀이를 했으며 아파트 복도에서는 팽이를 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이제 막 개인용 컴퓨터가 하나둘 보급되기 시작한 시점이라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집 밖에서 열심히 뛰놀던 시절이었다. 주말에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위해 우리집과 똑같이 생긴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거실이 아닌 작은 방에 따로 놓인 tv를 연결해 처음 비디오게임을 했고, 프로야구를 봤고 밤에는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었다. 아파트가 나에게 베푼 혜택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만 한정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사춘기에 이르자 성적만 일정하게 유지하면 특별히 뭔가를 강요받거나 방해받지 않게되면서 나는 음악 잡지를 보며 판을 사러다니거나 영화 제목을 적어가며 비디오가게를 출입하고 있었다. 주거불안이 뭔지도 모른채 그렇게 조금씩 중산계층의 문화자본과 문화적 습속을 하나씩 익혀가고있었던 것이다. 조지 오웰이 말한 것처럼 공영주택에서 자란 사람은 빈민가에서 자란 사람에 비해 확실히, 눈에 띄게 중산층의 관점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몇번의 이사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번도 강남의 아파트단지라는 실로 엄청나게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일종의 상징자본이라는 큰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파트라는 습식 건축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후하게 마련이고 생활상의 여러 불편을 감수해야한다는 뜻이기도하다. 나이가 들며 활력을 잃고 스러져가는 육신처럼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늘고 불편을 낳으며 쇠락하는 집을 보며 양가적인 감정이 들지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노쇠함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상징적 함의를 갖는데 대단위 토지 위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 단지 자체가 낡은 과거의, 지나간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처럼 변해간다는 것이다.

 

나카무라 요시히로의 <모두 안녕히>는 이러한 공공주택단지의 문제를 다루고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죽음을 겪은 뒤 아파트 단지 밖으로 한번도 나가지않고 저녁이면 단지를 순찰하며 친구들의 안녕을 돌보는 주인공. 그러나 그 친구들은 진학이나 취업, 결혼, 전근등의 이유로 하나둘씩 단지를 떠난다. 낮에는 뛰노는 아이들로 분주하고 장을 보는 전업주부들이 주를 이루다가 저녁이면 온 식구가 모여 저녁식사하는 단란한 가정으로 채워졌던 단지는 이런저런 정치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늘어나기만하는 전출 인구로 인해 고스트 타운처럼 변해간다. 이렇게 보면 공공주택단지라는 것은 고도경제성장 시기 일본과 한국 사회 그 자체를 은유하는 기표라 할 수 있다. 자아 실현보다는 모두들 생산과 노동에 일로매진하는 가운데 그러한 산업역군들을 배출하고 그들을 재충전시키는데 모든 역량이 집중된 사회 구조 그 자체 말이다. 집이란 것이 그 가정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비주얼적 매개체라 할 때 공공주택단지내의 입주 가정들은 상대적 박탈감없이 자신을 남과 견주지않은채 남들 하듯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리면 그만이었고 천편일률적인 모양을 한 그들의 아파트는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한 재생산의 공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도경제성장시기가 끝나고 장기불황의 시대에 접어들자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와 저들은 같아보이지만 실은 그 내부에서 꾸준히 계급과 직종과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의 분화는 계속되었고 그렇게 저마다 다른 선호와 특성을 가진 그야말로 더이상 나뉠 수 없는 '개인'(in-dividual)들에게 공공주택단지는 이제 더이상 선망되는 주거모델이 아닌 것이다. 빈 집이 늘어남에 따라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나 최빈곤층의 일시적 피난처로 전락하고 당연히 이런저런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한다. 영화에는 여기에 주인공의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플롯이 겹쳐지면서 아파트 단지가 마침내 이겨내야할 극복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란 것이 과거 번영했던 사회민주주의 국가 모델의 유물이자 (입으로는 열심히 외치긴하지만) 점점 더 정치인들의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허구가 되어감에따라 이제는 이러한 공공주택단지의 건설과 유지를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어쩌면 대단위 공공아파트 단지라는 개념자체가 앞으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주거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라진 산동네와 달동네를 대체하는 빈민층집단거주지, 즉 그나마도 기피 시설이라는 이유로 도시외곽이나 저소득층 주거지역에 지어지는 공공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런 성격의 공공아파트 단지, 인구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그들의 기대 소득을 예측하고 계층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국가 안전장치로서의 아파트 단지 말이다. 계층이동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과 공공아파트 단지의 몰락은 기이한 방식으로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가치 자체에 대한 아마도 의도된 무지와 오인, 그리고 폄하와 무시야말로 더 큰 문제일테지만. 그런 점에서 나에게 <모두 안녕히>는 그저 올 한해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유행이었던 풍요로웠던 과거에 대한 또 한 편의 추억팔이가 아니라 그 시대를 떠받치던 어떤 '시대정신', 이 표현이 너무 거창하다면 과거 한 시대에 모두가 공유했던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현재의 것이 아닌 집단적 믿음과 가치에 대한 만가로 보였다.

비행기 추락 사건을 두고 특종을 보도하려는 지방지 기자들의 분투를 담은 영화. 주인공인 베테랑 기자 유키는 사고관련 보도 전권을 쥔 총책임자가 되는데 그가 싸워야할 상대중에는 중앙일간지뿐만 아니라 그의 상사이기도한 데스크 3인방과 경영진도 있다. 재밌는 것은 오쿠보-연적 (오쿠보 살인사건과 연합적군의 린치와 아사마산장 사건) 보도로 스타가된 그의 선배인 데스크 3인방이 유키를 방해한다는 점인데 여기에는 자신보다 후배가 더 잘 나가도록 둘 수 없다는 묘한 경쟁심리가 작용하고있다. 데스크 3인방 중 하나인 엔도 켄이치가 '지방지 기자는 패배해도 패배했다고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인상적인 대사를 하는데 늘 중앙지와 경쟁, 아니 사실상은 늘 중앙지에 인력도 사건도 다 뺏기는 형국이기때문에 자존심이 없이는 지방지에서 버틸 수 없다는 열패감이 그대로 드러나고있다. 무엇보다 한자와 나오키로 대박을 친 사카이 마사토가 츠츠미 신이치 바로 밑에 서브주인공으로 나오는데 한자와 나오키에서도 그의 친구인 콘도로 나왔던 타키토 켄이치가 여기서도 사카이와 함께 직접 현장에서 구르는 취재기자 콤비로 나온다. 그리고 공교롭게 여기서도 콘도처럼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그 후에는 오노 마치코가 타키토 다음으로 사카이와 현장 취재를 하는 기자로 나온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사건을 다루는 유키의 태도에 있다. 빌리 와일더의 ace in the hole에서 지방지 발행인이 늘 강조했던 더블 체크의 중요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는 비행기 추락의 원인에 대한 보도를 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오보 가능성에 대한 저어때문에 끝내 포기하고마는데 다음날 중앙일간지인 마이니치가 이를 보도하고만다. 데스크는 그의 이러한 주저하고 회의하는 성향과 윤리적 태도를 두고 가장 중요한 결정 앞에서 늘 도망가고마는 겁쟁이라고 그를 몰아붙인다. 언론의 중요한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는 태도가 (물론 미화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하고는 너무 달라서 약간 신기해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유키는 두번의 패배를 하고만다. 늘 가정보다는 일에 매달리는지라 그의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타국으로 떠나버리는데 그렇게까지 일에 헌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터에서 동료들로부터 계속 견제를 당하고 결과적으로도 명백히 실패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렇듯 실패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팽팽하고 조직내 권력관계의 암투와 경쟁사간의 보도경쟁을 매우 리얼하게 보여준다. 특히 초반 편집국의 분주함에 대한 묘사는 매우 뛰어난 편인데 점프컷과 줌인줌아웃의 적절한 활용으로 긴박감을 잘 살리고있다. 단점이라면 현재 시점에서 죽은 동료인 안자이의 아들과의 등산장면이 본 줄기와 잘 붙지않고 결국 끝까지 보고나면 안자이가 영화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않은채 그냥 사라지고만다는 것. 기억에 남는 대목은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는 80년대 취재기자들의, 지금보면 매우 원시적인 보도연락체계와 비상통신망 묘사. 힘들게 산에 올라가서 현장을 취재한다음 다시 내려와서 여관의 전화를 붙들고 데스크에 보고한 다음 다시 또 산을 올라간다.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은 영화인데 일본의 중요한 주조연배우는 거의 다 나오는듯 싶고 다들 기본 이상은 해내고있다. 야마자키 츠토무 특유의 관객으로하여금 혐오스러움을 느끼게하는 악역 연기도 여기서 다시금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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