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 시게히코는 부정과 결여로 오즈의 영화를 서술하는데 단호히 반대하면서 그 대신 풍부하게 뻗어나가는 다층적 의미와 세부에 주목해야한다고 했다. 그의 용어를 빌자면 '내러티브 구조'와 '주제론적 세부'의 불일치와 균열을 즐겨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민한 관객은 부정과 결여로 오즈를 보려는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동경의 황혼>의 여주인공 아키코의 줄곧 어두운 표정 또한 다른 요소들과 함께 이 영화를 부정과 결여로 서술하기위한 근거로 삼는건 편리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그런데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고, 인물들의 말과 표나는 갈등이 적고, 이야기의 기복이 없으며 이야기가 가정 밖으로 나가지않는다'는 등 디테일한 외재적 구성요소상의 부정과 결여가 아닌, '내러티브 구조'상의 부정성까지 과연 부정해야할까. 또 그게 가능할까. 부정적인 것을 제외하고나면 거의 할 말이 없는 영화인데도 말이다.

 

오즈의 팬이라면 <동경의 황혼>이 그의 필모중 드물게도 한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교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일본영화의 대표적인 상투형의 대사인 "아, 날씨 좋다"가 나올 일이 없는 것이다. 하스미의 설명에 따르자면 오즈는 한여름 햇빛의 영화인데 본작엔 그게 없다. 또 하나의 결여. 그동안의 필모로부터의 변별점은 이만이 아니다. 류치슈와 동반 출연하는 영화에서는 <맥추>에서처럼 딸이 아닌 여동생으로 나오더라도 '대개'(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했듯 오즈 영화는 일반화가 성립하는듯 하다가도 예외가 늘 있기 때문) 결혼을 주저하는 적령기 미혼 여성으로 나오던 하라 세츠코가 본편에서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갓난아기와 함께 아버지와 동생이 사는 본가로 돌아온 유부녀를 연기한다. 아버지의 '강권'(류 치슈의 영화 속 언동으로 보면 선뜻 납득은 안되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으로 결혼한 그녀와는 반대로 오즈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할 적령기 미혼 여성인 동생 아키코는 과거의 막내딸들과 달리 현재 자유연애중이며 나중에 혼전임신까지 하게된다.  

<만춘>이후 오즈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가족애의 단속적 유지와 그에 의한 가 (재)구성, 그리고 정확히 그 거울상으로서 자식의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등으로 붕괴하는 가족상이라 축약할 수 있다면 <동경의 황혼>은 이러한 가족 붕괴 서사의 정점에 있다. 끝내 아키코는 자살하고, 자매의 친어머니는 끝까지 두 딸로부터 어떠한 용서나 이해도 받지 못한채 홋카이도로 떠난다. 가족의 붕괴라는 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은 부부관계 묘사가 거의 배제되어있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별거중인 타카코와 그녀의 남편 누마타는 영화 내내 단 한번도 만나지않으며 대신 장인과 사위의 짧고 어색한 대화가 이를 대신한다. 마찬가지로 타카코 자매와 친모 야마다 이스즈는 각자 한번 이상 대면을 하지만 정작 류 치슈와 그녀는 만나지않는다. 아내가 도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류 치슈는 아예 찾아가 볼 생각 자체를 하지않는다. 그래서 영화에서 유일하게 제시되는 부부관계는 친모와 그녀의 현재 남편뿐인데 이들에게는 생계를 위한 부박한 일상에 대한 묘사가 있을 뿐 부부간의 애정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비정함이 단순히 러닝타임이나 플롯상의 편의 때문일까. 오즈는 이 영화에서 작정하고 가족간의 심리적 물리적 격절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한마디로 이 가족의 모든 여성들, 즉 타카코와 아키코 자매 그리고 이들을 버리고 떠난 친어머니까지 세 여인은 모두 배우자와 연인간의 관계에서 실패한다. 친모는 과거 함께 도망갔던 남자와도 헤어지고 현재 남편과는 마작집을 운영하는 영락한 신세가 되어있다. 타카코의 남편 누마타는 아내와의 재결합에 대한 의지가 없고 아키코는 시내 곳곳을 떠돌며 남자친구를 찾아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오즈는 마침내 중절수술을 위한 사전상담을 마치고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키코를 보여준 바로 다음 타카코의 갓난쟁이 딸 미치코를 보여주는 잔인한 대조를 주저하지않는다. 영화는 이렇듯 세 여인에게 가멸차며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하라 세츠코는 50년대 초 나루세 미키오의 <산의 소리>와 <밥>에서 남편과 갈등하는 아내를 연기한 바 있다. 그 두 편에서 부부간의 갈등(엄밀히 말하자면 대등한 주체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제 하의 억압에 가깝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화되다가 마침내 파국 아닌 파국을 맞게되는데 오즈는 나루세의 저 두 편을 통해 하라 세츠코에게서 어떤 새로운 면모를 찾은듯하다. <동경이야기>이후 4년만에 출연하는 오즈의 연출작인 본편에서 가출한 아내를, 그리고 이후의 두편 <고하야가와 가의 가을>과 <추일화>에서는 남편과 사별한 중년 여성을 연기한다. 그렇게 오즈 영화속 하라는 결혼적령기 미혼여성부터 미망인까지를 커버하는데 미혼 여성일 때 그 선택이 주체적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결혼을 통해 본가를 떠나 새로운 집으로 들어갔다면, 중년의 하라는 남성에 얽매이지않고 최대한 독립적이 되려 노력한다. 이러한 대조 사이에 57년작 <동경의 황혼> 속 타카코가 있다. 여기서 그녀는 결혼적령기에 이른 성년의 자식이 아닌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사별하지는 않았으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이미 균열이 시작된 젊은 아내를 연기한다. 필모그래피가 늘어감에 따라 배우와 그의 배역도 동일 캐릭터는 아니더라도 점차 나이를 먹고 일관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일견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비슷해보일지라도 동일한 상황과 설정과 성격의 배역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이는 류치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성(정확히는 배우자)과의 실패한 관계라는 면에서 타카코는 본편에서 가장 분열적인 결말을 맞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오즈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이듬해 오즈의 첫 컬러영화인 <피안화>로 두번째 출연한다) 아리마 이네코는 어떨까. 류치슈의 차녀, 그러니까 하라 세츠코의 뒤를 이어 적령기에 이른 미혼의 막내딸 역할이지만 아리마의 '아키코'는 하라의 미혼 시절 캐릭터인 '노리코'와는 다르다. 남자친구를 찾아 아파트, 마작집, 카페, 술집, 라면집, 그러다가 뜻하지않게 경찰서로 그리고 산부인과까지 쉬지않고 러닝타임내내 아키코는 찌푸린 표정을 한 채 도쿄시내를 떠돈다. 전후민주주의의 풍조 속에서 가난하지만 한껏 얻은 자유를 주체하지못하는 젊은이들의 초상에 대한 오즈의 관찰은 주인공 아키코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술과 커피를 파는 가게 '에투알'에서 스케치되는 젊은 연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삐걱거린다. 두 명중 하나가 약속에 늦거나 겨우 만나도 대화는 권태에 빠져 이별을 예감하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어서 결국 두 사람 중 하나는 그 자리에 없거나 곧 사라지고만다. 아키코를 포함한 젊은 연인들은 다들 이렇게 틀어져있다. 젊은이를 향한, 그리고 더 넓게는 조화하지않고 갈등하는 이성 연인들이라는 냉소적인 시선은 본편 내내 관철되고 있다. 부정성은 일관한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이들을 미심쩍어하는 시선은 아키코로 하여금 <만춘>이후 오즈의 가족영화의 여주인공들이 그동안 관객으로부터 얻었던 이해나 배려를 받지못한 채 극에서 퇴장하게 한다. 아키코는 아버지는 물론 언니와도 교감하지 못한 채 남자친구를 찾아다니고 급기야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식이 절대로 아닐거라는 믿음을 친모로부터 확인받으려다 부정당하자 그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늘 타인을 먼저 배려하던 하라의 '노리코'와는 달리 아키코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실패한 채 고립되고 마치 그 징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극적인 퇴장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다른 인물들의 행동도 의아한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그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타카코다. 친모에게 아키코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모든게 당신 탓이에요'라고 말하는 타카코는 과연 온전한 진실을 보고 있는걸까. 그 후 타카코는 양친의 사랑을 고루 받지못한 것이 아키코의 고통의 원인이었을거라고 태연하게 아버지에게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양친의 사랑을 받지못한건 타카코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키코의 심적 고통의 이유는, 부친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정한 자식이라 착각하고 싶어한 마음이 혼전의 자식을 잉태한 현재 자신의 처지와 오버랩되면서 대를 이어 이어지는 어떤 불가항력적 운명이 자신에게 가해지고있다고 느꼈던 때문이 아닐까. 가장 근본적 원인을 굳이 찾자면 편부 슬하의 양육이 아니라 부정한 자식이라는 부정적 상상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타카코는 동생의 죽음을 온전히 친모의 탓으로, 그래서 양친에 의한 자녀 양육이 옳다는 결론을 지어버린다. 정작 미치코는 부정한 자식이 아님에도 말이다. 타카코의 알듯모를듯한 결심에는 이러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자식은 양친이 함께 키우는게 맞는거 같다며 남편에게 돌아가겠다는 타카코의 대사는 그래서 일관된 캐릭터의 성격으로부터 내재적으로 나온 판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젊은이를 향한 냉소적 시선과 함께 정상가족에 대한 오즈 본인(또는 각본가 노다)의 생각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의 정경으로 회귀하는 엔딩은 일반적으로 모든 갈등이 어떻게든 봉합되었으며 이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는 믿음을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평일 오전 아버지의 출근 준비를 보여주는 본편의 엔딩 역시 이제까지의 부정성이 일단락되고 거기에 더해 일말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까마귀 울음소리가 화면과 소리를 채우는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의 그것 못지않게 이 엔딩은 음울하다. 진심인지 강요된 착각인지 알 수 없는 타카코의 결정을 환기함과 동시에 전복해버리는 잉여의 장면이 이물처럼 잔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하기 전 아버지는 방 한켠에서 타카코가 두고 간 미치코의 딸랑이 장난감을 발견한다. 당연히 이는 일차적으로는 타카코와 미치코가 정말로 이 집을 떠났음을, 그리고 아버지만 홀로 집에 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그동안 오즈의 가족 영화에서 부모는 자식의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그들과 별리를 행하고 홀로 집에 남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결혼이 아니라 한 명은 죽음으로, 그리고 다른 자식은 남편이 사는 집으로의 '귀가'를 위해 또다른 '출가'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아버지 홀로 남는다. 그런데 돌연 떠나간 사람의 유류품이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이 영화에서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주점 장면에서 술집 여주인은 류 치슈에게 그의 사위인 누마타가 언젠가 그곳에 들렀다가 모자를 두고갔음을 알려준다. 그러자 그는 그럼 또 오겠군요라고 말하지만 이후 그런 장면은 나오지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다면 이 영화를 열고 맺는 오프닝과 엔딩에는 앞으로 타카코가 함께 살아갈 가족 구성원 두 사람이 어딘가에 두고 간 소유물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의례로서의 결혼식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족을 애초에 별로 의식하지않는듯한 여주인공 아키코는 이전작들로부터 구분되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정상성을 구성하는 제도와 의식의 규범성을 승인하는 본편의 표면에 바로 이 두 곳의 잉여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편부 슬하에서 자란 동생의 어두운 내면과 그로인한 비극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제라도 남편에게 돌아가 딸을 제대로 키우겠다는 타카코의 결정은 선전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러나 오즈 야스지로라는 일본영화사의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이 연출한 작품의 여주인공이 내릴법한 결정치고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퇴행적이며 회피적이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를 감안해 현재 시점에서의 과도한 비판을 지양한다하더라도 일단 너무 손쉬운 결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화의 앞뒤에 배치된 두 물건이 타카코의 결정을 은유적으로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언급되는 술집에 두고 간 누마타의 모자가 타카코가 기다리는 집, 즉 가정에 안착하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면 엔딩에서 미치코가 아니라 당연히 타카코가 두고갔을 장난감은 그녀 본인도 미처 깨닫지못하고 있을 진심을 무심하게 보여준다. 전술했듯 오즈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모녀 어느 쪽에도 이성과의 순조로운 관계나 해피엔딩을 허락하지않는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세 명중 마지막까지 도쿄에 남은 타카코에게 작은 희망을 남겨둔거라고 보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타카코가 아버지에게 한 말과 달리 내심으로는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겨진 장난감은 앞으로도 그들의 부부관계가, 그리고 온전한 정상핵가족의 성립이 쉽지 않으리라는 암시라면 말이다. 타카코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만이 언해피한 결말을 맞이하는게 아니라 일말의 희망을 안고 돌아간 타카코마저도 딸의 양육이란 목적만을 위한 가정의 임시적 유지가 쉽지 않으리라는 암시를 은근하면서도 명백한 수미상관으로 남겨둔거라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프닝에서 누마타의 모자에 관한 언급은 이후 줄거리 전개에 하등 아무런 영향이나 기능을 하지않는 텅 빈 대사가 되어버리고만다. 또한 이렇게 볼 때 어떠한 일말의 희망의 기운도 남겨놓지않은 채 가족 붕괴라는 이 영화의 서사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제도로서의 결혼과 정상가족의 규범성을 설파하면서도 한 편의 서사로서 조역은 물론이고 주요캐릭터들에게조차 끝까지 이를 획득하지못한채 실패하게 함으로써 부정성을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작가로서의 전략일까. 카메라는 움직이지않을지도 모른다. 드러나는 인물간의 갈등도, 사건도 적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듯 이야기의 외부와 내부 혹은 겉과 속이 균열하는 가운데 전개되는 다층적인 서사야말로 오즈를 보는 재미다. 부정성을 애써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가주의의 일환으로서 기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물론 하스미의 말대로 작가의 전략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봐야'한다. 영화는 표층으로만 존재한다는 믿음, 그것은 홀로 외떨어져 덩그러니 남아 더 도드라져보이는 남겨진 물건과 말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겉을 유심히 바라볼 때 짐짓 다른 말을 하는 안이 비로소 들여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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