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의 <진실>(원제, Death and the Maiden, 1994)은 개봉 일이년쯤 뒤 tv에서 더빙판을 봤다. 하지만 그 시절 tv로 본 대부분의 영화가 그랬듯 끝까지 못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결말을 모르고 있었다. 그즈음 본 영화 대다수가 이 모양인걸보면 어쩌면 다 못본게 아니라 그저 기억력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싶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는 내 둔한 기억력만 상기시키는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끝까지 온전히 보니 이십여년의 세월을 두고 동일한 영화에 대해 전혀 상반된, 심지어 서로 상충하는 감상을 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텍스트 자체가 변할 리는 없고 이십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온 나 밖에 없으니 시간이 주는 위압감은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어렴풋하나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비록 끝까지 본 건 아니지만 주인공 폴리나에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니 폴리나는 아무리봐도 신뢰하기 힘든, 변호사인 그녀의 남편 제랄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못미더운 증인'이었다.
 
직전에 봤던 폴란스키의 2017년작 <실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대강의 향후 줄거리 전개와 결말이 거의 예측이 됐고 실제로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스릴러를 주로 연출하는 감독에게는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관객과의 게임에서 자기 패를 미리 보여주는거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장르적으로 거의 합의되다시피한 관습적 전개가 때로는 그 자체로 관객과 벌이는 또 하나의 게임이 될 수도 있으나 적어도 지금 말하는 이 두 편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본편을 보는 동안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다. 상대를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라 확신하고 그를 몰아붙여 반강제적으로 원하던 자백을 듣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손 안에 얻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가해자라고 의심받는) 당사자 말고는 결국 아무도 알 수 없는, 각자의 진실들만 남는 그런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불가지가 넘쳐나던 90년대스러운 서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80년대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을 2000년대 초에 영화로 재현한 한국의 감독도 아직 90년대의 영향 하에 놓여있던걸까).
 
나를 심란하게 한 것도 여기였다.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메세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에 내재한 맹목성, 즉 정의구현이라는 대의를 향한 강한 의지로 인해 수단의 적합성과 윤리성을 불문에 부치는 과격함을 비판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진실 추구 과정을 되려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어쩌면 무용할 수 있다는 항변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직업인으로서의 영화감독이 아니라 자연인 폴란스키의 반평생을 쫓아다니고 있는 추문에 대한 개인의 항변 혹은 반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들이 과연 옳다고, 진실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영리하게도 이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화에서는 국가 폭력이라는 과거사 규명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민주주의 사법 체제를 대변하는 남편 제랄도를 몹시도 무력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차에 플랫 타이어를 넣고 다닐 정도로 현실적인 일에는 무능하거나 무신경할 뿐더러 법률가의 회의적 성향 때문에 결단을 미루느라 목숨을 위협받기에 이른다. 범인을 단죄하기까지 민주주의 법체계가 요구하는 절차적 형식의 지난함이 그다지 효용이 높지 않음을 강변하는 대목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법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진실 규명과 사적 복수를 동시에 감행하는 폴리나에도 선뜻 관객이 동의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딜레마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과연 진실은 밝혀질 수 있는걸까. 폴란스키는 자신의 개인적 치부를 변호하느라 정치적으로 반동이 되어가는걸까. 집단적 공모로 인해 박해받는 소수자의 대명사격인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그의 최신작이 그래서 더 궁금하다.

<비정성시>를 처음 본 건 1996년 kbs 명화극장에서였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일이자 대만이 해방된 날, 출산하는 오프닝을 보면서 훗날 그 아이가 양조위 캐릭터가 되는 줄 알았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만 알았어도 그런 오해는 안했을텐데 그 정도로 미욱한 관객이었다. 필견작이라고 해서 늦은 시각 찾아봤지만 내용에는 그토록 무지했다. 반년쯤 전에 봤던 <중경삼림>과는 사뭇 다른 양조위의 캐릭터도 감상에 방해가 됐다. 그가 연기하는 막내 문청은 타인들과 주로 필담으로 소통한다. 연인은 그렇다쳐도 왜 가족과도 수화가 아닌 필담을 하는지 얼핏 생각하면 의아하지만 하고픈 말이 절실한 나머지 급하게 노트와 펜을 꺼내는 그의 움직임만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다. 다음 날 등교 때문이었는지 끝까지 보지 못했는데 확인해보니 96년 1월 방영이라 학교갈 일은 없었다. 영화에 어지간히도 몰입을 못했었나보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3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허우 샤오시엔 회고전에서 두번째로 이 영화를 봤다. 그제서야 줄거리 전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문청이 처한 상황과 그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임씨 형제들은 딱히 정치적이거나 하지 않음에도 당대의 현실이 그들을 마냥 놔두지 않는다. 문청의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인 관영은 빨치산이 되었고 맏형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대가족을 건사하려하지만 쉽지 않다. 아내와 조용한 삶을 살고 싶었던 문청은 점점 더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하는 순간으로 다가간다. 영화의 마지막즈음, 앞으로 다가올 어떤 날을 차분히 준비하는 그를 보면서 단순히 감정이입을 넘어 가당치도 않게 나를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느리지만 침착하고 유려한 전개에 푹 잠겼던 기억이 상영관 안의 분위기와 함께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다.
 
그후 허우 샤오시엔의 전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다 찾아봤지만 이 영화만큼 마음을 움직인 다른 작품은 안타깝지만 없다. 그의 90년대 이후 작품들은 템포가 갈수록 더 느려지거나 너무 관념적이었다. 그나마 두번째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건 <쓰리타임즈>인데 여기서도 그 선호는 사실상 마지막 에피소드에만 해당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그 작품들을 <비정성시>와는 달리 극장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화질이 열악하거나 자막이 부실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내가 나이를 먹었고 그러는동안 다른 영화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 수 있다. <비정성시>에 절절하게 감동했던 이십대가 순식간에 끝나버린 것이다. 선대의 뒤틀린 역사와 작금의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며 분노하고 또 절망하는 젊은이의 모습에 공감하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세속적으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일부러 어느 감독의 회고전을 보기 위해 집에서 먼 곳까지 발품을 파는 일도 거의 드물어졌고 가만히 있어도 어지러운 머릿속을 텅 비우기 위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위해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는 일이, 아니 감상한다기보다는 무심히 화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제법 늘었다. 이런걸 나이드는 거라고 한다면 이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살면서 하는 수많은 변명 중에 이보다 손쉬운 변명이 또 있을까.
 
다시 십오년이 지나 <비정성시>를 세번째 봤다. 이번엔 구체적인 정보에 좀더 신경을 기울였다. 의사인 둘째 형은 (아마도) 군의관으로 필리핀 루손 섬에 갔다가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있고 셋째 형은 (아마도 고문 때문에) 넋이 나간 채 귀환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대륙에서 온 밀수업자들과 일을 꾸미다가 사이가 틀어져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뒤 완전히 광인이 돼버린다. 그런 동생을 구하려다 장남 문웅마저 사망한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북경어, 일본어, 광동어가 들리는 가운데 두 번의 통역을 거치는 장면으로 보아 또 다른 언어(아마도 대만어)도 나온 것 같다. 그렇게 여러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대만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반영한다. 일본에 대한 양가적 태도도 그중 하나다. '우리 대만인들이 제일 불쌍해, 일본인과 대륙인에게 차례로 괴롭힘을 당하니'라는 이 영화의 제법 잘 알려진 대사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아들을 전쟁에서 잃고 패전 이후에도 대만에 쭉 남아있다가 뒤늦게 본국으로 돌아가는 옛 소학교 교장인 일본인 부녀의 에피소드도 있다. 서력이 아닌 '쇼와' 연호를 쓰는 전형적 일본인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는 식민 지배자를 향한 증오나 분노가 아닌 애처로움이 있는데 여기에는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이기 이전에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다는 공통점에 기반한 인물들간의 정서적 연대가 있다. 물론 그러한 시선의 저류에는 추상적 개념인 국가나 역사가 아니라 실재하는 각각의 사람들에 집중하는 감독의 끈덕진 태도가 있을 것이다. 임씨 가족은 정치와는 무관하지만 본토인과 함께 사업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자신들과 같은 본성인들로 구성된 자경단의 오해를 받아 린치를 당할 뻔하고, 수배중인 인물의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속을 당하는 등 쉼없이 역사와 정치에 휘말린다. 
 
히로히토의 '종전조서' 낭독 육성을 배경으로 시작한 영화의 중반부에는 장개석의 계엄령 선포 육성도 삽입되어있다. 국민들에게 직접 전하는 최고권력자의 육성은 곧 자신의 권력을 직접 체현하는 행위다. 그렇게 스스로 현전하는 권력으로터 개인이 자유롭기란 당연히 어렵다(저 두 육성 모두 자국민을 기만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민중은 대개 피해자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슬픈 도시'라는 제목에서도 보이다시피 이 영화 또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역사와 정치와 국가에 휘둘리는 평범한 개인들을 리얼리즘적으로 그린 이 영화가 허우 샤오시엔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우리 관객에게 깊이 소구할 수 있었던 큰 이유도 일본의 오랜 식민지배와 해방 이후 우파 정권의 독재 및 장기집권이라는 경험을 서로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를 쟁취한 바로 그 해, 대만에서도 40년 가까운 오랜 계엄령이 해제됐다. 그로부터 불과 2년만에 이 영화가 제작된 데도 이런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비정성시>의 직전 연출작인 <나일의 딸>(1987)을 봤다. 굳이 말하자면 청소년물이라 분류할 수 있을 이 영화에서 실제 당시 대만의 인기 여가수였다는 주연 여배우는 방황하는 젊은 여학생을 연기한다. 고정된 카메라는 책상이 놓인 동일한 구도의 실내를 여러번 보여주는데 오즈 영화에서 익히 보았듯이 이런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놓인 책상은 똑같은데 거기에 앉는 사람이 다르고 그곳에 앉아서 하는 행동이 다르다. 이렇듯 자신이 경험했고 알고있던 가까운 시대를 배경으로 실내극에 가까울 정도로 한정된 상황 하에서 캐릭터들 사이의 폐색된 관계와 심리를 그렸던 감독은 차기작에서 과감히 자신이 태어나던 즈음의 시절로 향한다. 예술가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해서 지금 이 곳에 있는지에 민감하기 마련인지라 그도 자기 부모님 세대의 시절로 돌아가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직접 자신의 힘으로 이해해보려 한다. <비정성시>보다 대략 십오년여쯤 뒤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양덕창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계엄령하 대만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상시적인 불안 및 긴장감을 어른이 아닌 소년들의 공동체를 통해 투영했다면 <비정성시>는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고 한다. 동갑의 두 감독이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음은 분명해보인다. 특히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하게 동시대물이 아니었던 양덕창의 경우를 본다면 더더욱.

오년만에 다시 보니 주인공들을 암울한 시대에 갇힌 채 희생당한 민중으로만 그리기보다 조금 더 과감했어도 좋았겠다 싶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영화사적 위상을 얻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벌써 삼십년 전, 그것도 계엄령 해제로부터 불과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제작 시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빠르게 제작에 착수한 감독과 제작진들의 진정성과 용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삼십년동안 변화된 영화 제작 환경, 서사 문법, 관객의 구성과 취향 등을 생각하면 1989년으로부터 지금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실로 아득하다. 감독의 명성이 올라가고 만신전에 오를수록 정작 그들의 신작이 일반 개봉의 형태로는 찾아보기 힘들어지는건 작가주의 감독들의 얄궃은 숙명이라고 해야할까. 이제 허우 샤오시엔의 신작도 영화제나 회고전에서 더 안정적으로 볼 수 있다.

 

집은 정신적 위안과 신체적 안락함을 제공하며 또 이를 통해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사적인 일상의 대부분을 영위하는 내밀한 공간으로서의 집은 그러나 동시에 거액의 화폐 가치를 갖는 엄연한 하나의 자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산이라는 추상적 관념과 물리적 공간이라는 구체적 실질이 합쳐졌을 때 집이라는 개념이 온전히 완성된다. 물론 여기에는 '집'으로부터 '가정'이라는 또다른 개념으로 전환하기위해 요구되는 다른 요소에 대한 고려는 아직 없다.

 

Exhibition(2013)은 집의 추상성이 구체성에, 즉 소유관계의 변화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삶에 균열을 야기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시작한다. 집을 팔려고 내놓은 이후 주인공인 거주자들의 삶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하는데 이는 사고파는 상품으로서의 자산이라는 개념이 갖는 소유관계 변화가 구체적인 생활의 양상까지 바꾼다는 암시다. 이후부터 영화는 변하지않고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가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여기서는 변하지 않고, 쉽게 변할 수도 없는 고정화된 사물로서의 주거공간이 그 권태의 원인이다. 이제부터는 추상적 권리가 아닌 구체적인 물성이 문제다.

 

법적인 부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동거인인 중년의 두 남녀는 주거 공간과 각자의 작업실을 함께 갖춰놓은 런던의 한 주택에서 생활과 일을 모두 한 곳에서 처리하는 자족적 생활을 하고 있다. 낮시간에 일을 할 때는 인터폰으로 연락하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독점적으로 점유하지만 식사와 수면 등 일상적인 생활은 여느 부부처럼 같이 영위한다. 그러나 일터와 주거의 공간이 같으면 어쩔 수 없이 양 편의 경계는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똑같은 일상이 반복, 지속되기 시작하자 남자가 작업실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여자는 주변 소음에 극히 민감해지고 조금씩 관음에 탐닉한다. 창 밖에서는 이웃집이 개조 공사중이고 거리 위 수상해보이는 사람들의 행동도 눈에 들어온다. 이를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극복은 없다. 굴복만 있을 뿐. 이러한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지 여자는 멀쩡히 사용하던 의자를 돌연 자위의 도구로 쓰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성적 일탈에 집착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와의 섹스 거부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남자가 자신과 집을 떠날까봐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는 남자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철저히 집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정해진 일상의 루틴으로부터 벗어나는 어떠한 행동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남자가 그토록 갈구했던 두 사람의 섹스가 이루어진 장소가 그들의 집이 아니라는 점은 정곡을 찌른다. 익숙한 루틴을 반복해야하는 일상의 공간은 급기야 일상의 삶 자체를 조금씩 옥죄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점점 생활 자체가 불편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자기 집에서마저 느끼는 불편함과 불안전한 느낌. 사적 공간에서마저 소외된 이방인 되기. 그러나 성적 일탈마저도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궁극적 답이 되지는 못한다. 엔딩에서 여자는 영화가 시작할 때의 권태에 찌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있다.

 

이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내가 아니라 아주 잠깐 나오는 심야의 런던 거리 스케치다. 거의 하얀 색에 가까운 가로등 불빛으로 인한 극명한 빛의 콘트라스트 속에서 극도로 조용한, 차라리 일체의 움직임이 사라진 정물에 가까운 런던 거리 이곳저곳을, 결코 산책이라 할 수 없는 빠른 걸음으로 통과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익숙한 실내에서의 여유롭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정적인 공간에서의 가장 동적인 움직임. 실내에서는 불가능한 연속 보행은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그동안 억압됐던 심리를 보여주는듯하다.

 

등기부 등본으로 대표되는 추상적 소유관계상의 지위는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서로 다를지 몰라도 어느 공간이건 그 안에서 사람 사는 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사를 해보면 누구라도 안다. 인간은 건물과 공간에 철저히 맞추어 살 수 밖에 없음을. 집을 줄이면 아무리 값비싼 살림살이라도 포기해야하고 식사, 세탁, 청소, 휴식, 수면 등 구체적 영위들도 이전과는 그 양태가 바뀐다. 집이 좁아지면 우선 사람과의 거리가 신경에 쓰이고, 집 주변으로부터 얻는 편의가 줄어들면 생활이 조급해진다. 누구도 고정화된 사물로서의 공간을 당장 혼자 힘으로는 변화시키지 못하니까. 그 고정성을 해체하거나 변형하지않는 한 그 안에 어떤 성격과 계급, 지위를 가진 사람이 살건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공간에, 건축물에 적응을 해야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집은 실제로 60년대 준공 이후 몇번의 리노베이션을 거쳤다고 하는데 나선형 계단과 슬라이딩 도어도 처음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초 완공 이후부터 지금까지 집이 겪은 내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이곳을 거쳐간 주거자들의 생활 양상도 상이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집이 인간의 삶(목숨)을 획정한다는 명제의 극단이라할 흉가 배경의 공포영화도 비로소 이해가 된다.

 

내부 장면을 전부 카메라를 고정한 채 찍음으로써 집의 전체적인 구조가 어떠한지 관객이 짐작하기는 어렵다. 제한된 프레임과 미장센 하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쾌적하고 편리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관객에게는 답답함과 폐소공포증만 유발하기 쉬운데 오히려 이런 면을 부각함으로써 영화는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인간관계와 그로 인한 권태, 또 그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과정을 실내극이라는 한정된 조건임에도 마치 스릴러를 보는듯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정작 영화가 끝날 때까지 딱히 일어난 사건은 없는데도 말이다. 고정화된 공간에 너무 푹 잠기면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정신의 활력마저 고정된다. 영화 속 두 인물들의 일탈 행위마저 지리멸렬해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정화된 공간, 이동하는 신체, 그리고 유동하는 정신. 바로 이 삼각 구도하에서 인간의 삶이 전개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삶의 혼란과 붕괴를 그려낸다. 유동하는 정신이 점점 고여가는 과정을 분위기 그대로 현시하면서. 건조하게 그리고 아주 권태롭게.

70년대 말, 호금전이 한국에 와서 연달아 찍은 두 편의 영화를 본 한국 관객이라면 먼저 익숙한 우리의 자연과 산수 풍경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동시대의 자국 로컬 영화들에서 보던 그것과는 어딘가 다르다.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재현된 험준한 산세, 계곡과 능선, 파도를 헤치고 우뚝 돌출된 바위, 그리고 단청 등을 찍은 숏은 이를 처음 본 사람만이 갖는 낯섦의 시선이 매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자에 의해 비로소 (재)각성되는 익숙함은 그래서 이 영화들을 '무국적' 시네마로 보이게 한다. 서사가 더 보편적 차원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기실 두 편 모두 이야기는 불교에 기반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호금전의 무협 사극을 가장한 도덕극이다. 게다가 두 편 중 <산중전기>의 줄거리는 아예 무협이라기보다는 짧은 '기담' 혹은 '괴담'에 가깝고 그에 반해 러닝타임은 너무 길고 늘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요즘 영화에서는 이제 거의 사멸되다시피한 서사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오히려 더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영화사에는 타국에서 온 감독이 바라보는 관찰자적 시선이 들어있는 영화들의 긴 목록이 있다. 빔 벤더스의 뉴욕과 텍사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런던과 데스 밸리, 요시다 기주의 리스본과 파리, 봉준호의 도쿄 등등. 이 두 편의 영화에서 호금전의 카메라는 단청과 마루와 장지문을 경공으로 넘나들면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상상 속 '강호' 마냥 우리의 산과 바다와 절을 지나가고 햇빛과 석양을 무연히 바라보고 등진다. 인물들은 태연하게 대청마루와 온돌방에 좌식으로 앉아 식사를 하며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달리 보면 그 어색함과 무국적스러움이 이야기의 비현실성과 환상성을 승인한다.

 

한홍합작 영화들이 숱하게 만들어지던 가운데 나온 이 두 편이 그들 속에서도 개성적으로 보인다면 이는 역시 감독의 비전 때문일 것이다. 내내 정적이다 돌연 중력을 거스르다 못해 초월하는 동적 장면들이 이어지는 비주얼, 그리고 철저히 거짓과 위선과 음모에 의해서만 움직이던 인물들이 결말에 이르자 불심으로 대동단결하면서 권선징악을 맞고 개과천선하며 깨우침을 얻는 서사.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식적이기 짝이 없는 전개지만 더없이 고전적이고 거기에 위에 말한 무협의 비주얼이 더해져 정전으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수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끝내는 예의 호금전스러운 엔딩 장면을 보면 알게 된다. 그가 왜 무협물의 마스터이자 세계영화사의 거장인지를. 

<산책하는 침략자>를 봤다. 철학적 SF? 그런데 분위기는 은근 코미디다. "'나'란 무엇인가? '일'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외계인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성인이 이런걸 진지하게 묻기 시작하면 우스꽝스럽지 않기가 어렵다. 그래서인지 배경음악도 희극적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설정만 보면 사변적 sf처럼 보이기는 하나 정작 본편을 보면 뭔가 영화가 뒤죽박죽이다. 아포칼립스, 액션, 멜로까지 온갖 서브 장르가 출몰하느라 전체적으로는 딱히 뭐라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변종 sf물의 꼴을 하고 있다. 

 

유심히 보면 이 영화는 양육에 관한 우화처럼 보인다. 자기 앞에 있는 사람 붙잡고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묻는건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하는 전형적 행동이고,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말리고 붙잡아 끌고 다니는 나루미의 모습 또한 흔히 보는 부모들의 그것이다. 즉 여기서 자칭 '외계인'은 아이이고 '가이드'는 부모인 것이다. 그래서 신지와 나루미는 부부지만 섹스를 하지도 그렇다고 감정적인 '로맨스'에 이르지도 못한다. 사실상 부모와 자식 사이니까. 점차 신지가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부부 되기는 더 어려워진다. 근친상간은 터부니까. 두 사람(이라기보다는 나루미)의 감정 변화의 과정 연출에 좀더 힘을 들이지 못한게 아쉽긴 하지만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남편의 말을 어쨌든 믿는 척하면서 받아들이는 나루미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화의 마지막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나루미는 지구 멸망 직전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사랑'이란 개념을 가져가라며 요구하고 신지는 그 요구를 따른다. 이후 침략이 중단돼 살아남았지만 '사랑'이라는 관념을 이미 상실한 나루미는 정신적 공백 상태에 빠진다. 자식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즉 모든 사랑을 내어준 후 늙어버린 부모를 이제는 자식이 보살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신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를 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평생 같이 있겠다고. 

 

일반적으로 보자면 정의를 내리는 사람이 권력자다. 선생님, 부모, 상사, 주권자 등. 그런데 여기서는 '우월'한 외계인이 하등한 지구인에게 정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대처럼 보이긴한다. 하지만 진정 지적으로 우월하다면 지구인의 관념을 그들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탈취할 필요가 있을까. 여타 sf물의 장르적 관습을 떠올려본다면 쉽게 비교가 된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지구인을 지적으로 열등한 종족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영화의 외계인들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구인보다 열등했던건 아닐까. 굳이 침략 대상인 지구인의 몸을 빌려야하는 사정도 그렇고(물론 비슷한 설정의 고전인 <바디 스내처>가 있긴하다) 달랑 외계인 셋이서 침략을 꾸미다가 그 중 둘이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는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외계인들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사족. 2010년대 이후로는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도 일본 주류 영화가 그러하듯이 거의 각색물만 연출하고 있는데(<세븐스 코드>와 <은판 위의 여인>이 예외인 걸로 알고있다) 그가 쓴 오리지널 각본물이 보고 싶다. 

<어댑테이션>을 다시 봤다. 공교롭게도 읽고 있던 책은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낯이 두꺼운걸까 아니면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절실한걸까. 오랜만에 다시 본 <어댑테이션>은 한 편의 포스트모던 문학작품 같았다.


두 명의 작가(찰리와 수전), 두 명의 카우프먼(찰리와 도널드), <난초도둑>의 각색을 위해 애쓰는 찰리의 분투기와 그 저자 수전의 존 라로쉬 취재기, <어댑테이션>의 주인공 찰리 카우프먼과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실존하는 진짜 찰리 카우프먼, 마찬가지로 <난초도둑>을 쓴 실제 수전 올린과 영화 속 캐릭터 수전 올린까지 영화는 온통 쌍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 내용으로 추측해보면 영화사로부터 의뢰받은 각색 작업의 진전이 여의치 않자 찰리 카우프먼은 아예 이러한 자신의 상황 자체를 소재로 이 시나리오를 써낸듯하다. 한 작가가 두 번은 써먹지 못할 트릭이랄까. 각색 작업이란게 본디 원전으로부터 긴장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를 재구성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도 물론 하나의 각색임은 분명하다. 단지 텍스트만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의 현실까지 원전으로 삼아 거기에 상상력을 보탰다는 것이 다를 뿐. 그렇게 탄생한 찰리의 쌍둥이 도널드는 상업성이나 도덕, 윤리같은 현실상의 제약을 초월한 채 온갖 상상과 망상과 욕망을 거리낌없이 풀어내는, 이 세상 모든 작가들의 잠재적 희망사항을 실현해 낸, 말그대로 찰리의 무의식이자 이 세상 모든 작가들의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쌍둥이 동생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나중에는 급기야 수전 올린, 로버트 맥키같은 다른 실존 인물까지 집어넣어 본인처럼 픽션화시켜버린다. 상호텍스트성, 미덥지 못한 화자, 저자의 실종, 열린 결말, 넘치는 알레고리와 그로 인해 모호해지는 텍스트 등등 포스트모던 문학이란게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고민은 곧 선택이다. <난초도둑>의 각색이 아니라 <각색>이라는 제목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할리웃 스튜디오와 일하는 실제 찰리 카우프먼은 도널드와는 달리 결국 현실과 타협한다. 어떻게? 상징으로서의 도널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쌍으로 나뉜 세계가 어찌어찌해서 하나가 되(남)는 것으로 갈등이 해결된다. 각각 병렬진행되던 찰리(와 도널드)와 수전의 이야기는 이 둘 혹은 셋이 만나면서 종국을 향해가고 최종적으로 두 명의 카우프먼 중 하나가, 그 반대편에서는 수전의 파트너인 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찰리가 아니라 도널드가 죽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실 법칙의 승리, 현실 법칙으로의 투항? 혹은 자신의 작가적 야망이라는 이드를 억누르고 자본의 요구라는 초자아를 승인한 에고의 자축의 표현일까. 그런데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어디까지를 극 중 찰리에게 투사하려 했을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하는 찰리는 실제의 그와 얼마나 같고 어떻게 다를까.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그는 승리한건 아닐까. 있지도 않은 동생을 만들어내고 또 죽일 때 그는 작가로서의 전능을 모두 누린게 아닐까. 따라서 해피엔딩이라는 형식을, 그러니까 주류영화를 지탱하는 관습적 형식으로서의 해피엔딩을 흉내내는듯한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건 작가의 타협과 야심 모두다.


한가지, 그렇다면 각본가 말고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역할은 뭐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키스트 아워>를 보는동안 같은 시기 도착적 유사 상황을 겪고 있던 또 한 국가, 바로 1945년의 추축국 일본이 떠올랐다. 갈수록 불리해지는 전황 속에서 두 나라 모두 주전파와 강화파의 대립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그래도 한번쯤은 적에게 일격을 가한 뒤 유리한 조건 하에서 강화를 하자는 육군 주전파와, 계전하다 패망할 경우 발생할지 모를 공산주의 혁명과 천황제 폐지가 두려운 궁중 중신 그룹이 갈등했고 그 결과 후자의 '종전 공작'이 성공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 '성단론'이 등장한다.

 

비슷한 점은 단순히 주전파와 강화파의 대립이라는 구도만이 아니다. 할리팩스와 체임벌린이 회담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실은 처칠을 실각시킨 뒤 다시 자신들이 정권을 수복한다는 복심을 갖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궁중 중신 그룹 또한 천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서 전권을 휘두르는 육군 주전파를 밀어내고 정국을 자신들이 주도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종전' 공작은 단순히 전쟁 중단만이 아니라 도조 히데키 내각 타도 공작이자 천황제 존속을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전쟁 전략이나 계획의 일부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 투쟁이자 권력 게임에 가까웠다.

 

영국에서는 처칠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천황과 육군이(도조 실각후에도 마지막 내각인 스즈키 내각의 육군 대신 아나미 히로치카까지 일관적으로) 필리핀과 오키나와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전을 주장한다. 두 나라의 비슷했던 처지와 상이한 선택 그리고 엇갈린 결과. 만약 처칠이 히틀러와의 회담에 응했다면 그리고 히로히토가 원자탄 투하 이후에도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고 이른바 '본토 결전'을 단행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선제공격을 하며 개전한 추축국과 그에 대응을 했던 연합국이라는 입장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당시 두 나라의 최종결정자들은 무모해보일 정도로 리스크를 감수하는데 있어서 별다른 주저함이 보이지 않았다. 부여된 권한과 책임의 크기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대하고 막중한 이들이 지위의 성격상 가질 수 밖에 없는 공통점일까 아니면 저러한 성정을 가진 인물형들이 결국 그러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걸까.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봤다. 작금의 동영상 시대에 맞게 몇 분 짜리 클립으로 편집될만한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빌드업해가면서 전체 스토리를 짜나가는 구성은 펠리니나 로셀리니 이후로 지금까지 계승되는 '이탈리아식' 시나리오 작법인걸까. 파울로 소렌티노도 그렇고 이 영화를 볼 때도 이런 식의 플롯이 계속 의식됐다. 무척 오래되고 전통적이지만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시나리오 구성. 안그래도 유럽 배경에 설정 자체도 어디선가 본 듯한데 시나리오까지 이런 방식이어서 기시감이 수시로 느껴지는 관람이었다.

이맘때쯤 생각나는 영화인 <로얄 테넨바움>을 또 봤다. 이미 수차례 본 영화인지라 뒤늦은 즐거움보다 익숙함으로부터 느끼는 편안함이 더 크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삼 새로이 보이는 점이 없지 않았다. 우선, 리치의 자살 시도 장면에서 실제로 자기 가슴에 칼을 꽂는 대담하고 흔치않은 자살 방식을 택했던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정말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사망 이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마약과 자살을 암시하는 needle in the hay가 삽입된건 다 그런 이유였을텐데도. 또, 테넨바움가의 두 여인, 마고와 에델린은 모두 여러 남성들로부터 동시에 구애를 받는다. 마고는 과거의 화려한 남성편력을 제외하고도 영화가 진행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세 명(랄레이, 리치, 일라이)의 남자들로부터, 그리고 에델린은 헨리와의 재혼을 앞두고 전남편인 로얄의 시기와 질투에 의한 ‘모략’의 대상이 된다. 
 
올해 나온 노아 바움백의 최신작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로얄 테넨바움>과 제법 닮아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상징적으로 거부되었던 자식들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후, 이제는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늙은 아버지를 향한 인정투쟁을 여전히 거듭한다는 기본 설정은 유사하다. 두 편 모두에 출연한 벤 스틸러는 <로얄 테넨바움>에서는 리치를 향한 아버지 로얄의 편애로 어릴 적부터 그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채즈를,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에서는 반대로 세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막내로서 아버지 해롤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형 누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아들 매튜를 연기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로얄 테넨바움>에서 일찍부터 경영 지식을 배워 로얄을 고소해 그의 재산을 빼앗았고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에서는 해롤드의 바람이었던 예술가 되기를 거부하고 가족 중 가장 고소득자인 회계사가 됨으로써 두 편 모두 이재에 밝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런데 노아 바움백이 <로얄 테넨바움> 다시쓰기처럼 보이는 영화를 이번에 처음 만든게 아니라는걸 모두가 안다. <오징어와 고래>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캐리커처화된 캐릭터와 미장센의 형식주의등은 없지만 부모로부터 인정받기위한 자식의 인정투쟁이라는 모티프는 동일하다. 오프닝에서 이 가족의 관계와 영화의 갈등구조가 확실하게 설정되는데 아버지 버나드와 큰 아들 월트, 어머니 조앤과 작은 아들 프랭크가 각각 복식조를 이룬 테니스 경기는 버나드를 향한 월트의, 또 조앤을 향한 프랭크의 애착을 암시한다.  월트는 읽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주워섬기고 너무도 당당하게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를 자작곡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을 뽐내고 그걸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십대이고 그래서 한때 잘나갔던 소설가 아버지를 동경하는건 당연하다. 월트는 버나드를 따라 지식인 흉내를 내고, 어떤 때는 반대로 월트가 했던 것처럼 버나드가 조앤에게 f워드 욕을 한다. 한편 프랭크는 조앤을 더 좋아하고 그래서 억지로 둘의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할 정도지만 분노 조절을 못하고 말끝마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버나드 그대로다.
 
부부의 별거와 이혼과정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지만 갈등의 중심은 버나드와 조앤 부부가 아니라 조앤과 월트 모자에 맞추어져 있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마치 바움백의 실제 삶을 반영해 가족 해체의 책임을 조앤에게 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에 이르면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가족을 버린 이기적인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아니라 반대로 그렇게 내내 부정하려 했던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월트의 뒤늦은 깨달음을 묘사한다. 경력의 내리막에 들어선 버나드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조앤을 어쩌면 버나드보다 더 증오하는 것 같아 보였던 월트는 알고보면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 엄마와 함께 간 박물관에서 보았던 거대한 오징어와 고래 조형물의 기억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부가 인터뷰 영상을 보면 그 추억은 조앤을 연기한 로라 리니의 실제 추억이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갈등과 문제를 확인하고 또 해결하는 중산층 지식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결코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음을 바움백은 앤더슨 식의 형식주의나 양식화를 배제한 리얼함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12년 뒤 만들어진 바움백의 최신작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오징어와 고래>의 비공식 속편의 면모를 갖고 있다. 86년 파크슬로프의 부자나 2017년의 맨하탄의 부녀나 주차할 장소를 찾지못해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빙빙 도는 와중에 나름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86년에 작은 아들에게 너는 예술에는 관심이 없냐고 물었던 소설가 아버지처럼 2017년에 조각가인 아버지도 자신과 달리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번에도) 작은 아들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86년이나 2017년에나 아버지는 이제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예술가이고, 부자 모두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은퇴한거나 마찬가지라해도 아버지에겐 공인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비례하는 공명심과 허영심이 여전하고 자식들은 그러한 아버지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예술에 재능을 보이는 '천재' 자녀와 아버지가 나온다는 점에서 여전히 <로얄 테넨바움>의 그림자가 보이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에 가까웠던 테넨바움 가의 삼남매와 달리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의 삼남매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도 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와 고래>와 반대로 여기서는 아버지 해롤드에게 있는데 '매튜'라 명명한 자신의 작품이 정말로 작은 아들과 관련이 있는건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애착을 보이는듯 하다가도 여전히 이기적일 뿐인 모습에 큰 아들 대니로 하여금 대놓고 분노를 토해내게 한다. 이 장면에서 대니의 찰나의 독백은 해롤드를 향한 양가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웨스 앤더슨은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생활>의 각본을 같이 썼던 노아 바움백이 이듬해 연출한 <오징어와 고래>를 제작했다. 촬영감독은 두 편 모두 로버트 여먼. 지금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중반 두사람은 이렇듯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앤더슨이 아니었다면 그 이전까지 연거푸 실패를 거듭한 바움백이 다시 감독직을 맡기란 어려웠을지 모른다). 웨스 앤더슨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식들(주로 아들들)의 좌충우돌을 그리는데 한동안 끈질기게 매달리다가 이후에는 이제 그 대체재로서 바람직한 유사 부자관계의 성립(<문라이즈 킹덤>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최근 몇 년 집중했다면, 노아 바움백은 예민한 예술가는 어떻게 사생활을 무너뜨리지않고 양쪽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꾸준히 천착해왔다. <마이어로위츠 스토리> 속 대니의 독백은 더 이상 부모나 주변의 지인이 아닌 바움백 자신을 향한 반문일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해체)되는가. 이제는 조금씩 그 방향이 서로 상이하지만 두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다.

'우리집' 밥상은 '엄마'가, 동네 분식점 메뉴는 '이모'와 '아주머니'들이 담당하지만 고급호텔의 '셰프'는 대부분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들이다. 동네 미용실은 여성들이 운영하는 곳이 많지만 최고의 '헤어 디자이너'들로 눈을 넓히면 남성의 수가 확연히 늘어난다. 고정된 성역할의 구별에 따라 가사노동에 속하는 행위도 이렇듯 사적 영역 내에서는 여성의 몫으로 한정되고 심지어 당연하게까지 여겨지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이동할수록, 또 그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남성이 차지한다.

<무사의 메뉴>에서 '식칼무사'인 야스노부가 인정을 받고 높은 자리에 있게한 이는 그보다 월등한 요리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물심양면 그를 도운 아내 하루다. 영화 말미 그가 영주에게 진상할 요리를 준비하는 그 시각, 하루는 여전히 집안 한켠 어두침침한 부엌에서 평소와 똑같이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요리를 하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동일한 노동이 젠더에 따라 갖게되는 상이한 가치를 명징하게 대조한다. 야스노부가 직접 참여하고 지휘하는 현장의 그 수많은 요리사들은 '식칼'을 들었을지언정 모두 무사들, 즉 남성이고 여성은 전무하다. '전속요리사' 집안인 후나키가의 큰아들이 병으로 죽자 아버지는 요리에 뜻이 없던 작은 아들 야스노부가 형을 대신하기를 희망하고, 그 뜻은 끝내 이뤄져 에필로그를 보면 이후 6대까지 가문은 이어졌다고 한다. 아마 그 긴 시간동안에도 하루처럼 부녀자와 시녀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겉으로 드러나지않은 채 가문을 위해 남편과 주인을 도왔을 것이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통해 세상을 아래에서 지탱한다면 남성은 여성들이 그렇게 지탱해놓은 세상을 법과 권력과 정치로 지배한다. 여성상위와 남성의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지금도 이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변하지않는건 모든게 변한다는 만물유전의 공리뿐이라지만 자세히 보면 너무 미세하게 변했는지 멀리서 보면 여전히 그대로인 것들 투성이다.

los angeles plays itself(2003)
올해 본 베스트 다큐. 상업영화의 아카이브만을 가지고 이렇게 면밀하고 상세한, 그것도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 정도의 도시 에세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울을 소재로도 못 만들거 없지않나 싶었으나 두가지 조건을 충족해야하는데 첫째, 서울을 배경으로한 영상 아카이브가 꼼꼼히 구축되어 있어야하며, 둘째 그 방대한 아카이브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연출자가 있어야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다큐의 연출자처럼 해당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가 성장한 도시에 대한 애증을 갖고있는 토박이어야하고, 영상자료만이 아니라 서울의 도시개발사도 꿰고 있어야야하며 거기에 인문학 지식까지 갖추고 있어야한다. 과연 여기에 부합할 도시사가이자 영화사가가 있을지.


중국(1972)
문혁 이후 얼마 지나지않은 시점, 그러니까 전세계 공산주의자(그리고 그 적수들까지도)의 시선이 '중국의 붉은 별' 모택동을 향해있던(이를테면 알랭 바디우) 바로 그 시기 중국을 직접 취재했다는 의의가 있긴한데 좀 너무하다. 공산당의 승인 하에 입국은 했으나 그 어떤 접촉도 불허받았는지 평범한 거리의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어떤 관료나 예술가, 학자 등 다른 계급 계층으로부터도 단 한마디도 따지 못한채 정말 말 그대로 피상적으로 인민들과 변화중인 그 나라 곳곳의 풍경을 무연히 바라보기만 한다.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는 장면까지 찍은걸보면 당으로부터의 협조가 아예 없진 않았던듯하나 대화가 단 한마디도 없다보니 심하게 말하면 동물원 구경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 나레이션마저도 정보 소개 정도에 그치고 있고. 마지막 편에서 서커스 장면을 몇십분씩이나 길게 보여주는걸 보면 취재거리가 떨어진건지 낯선 인종과 민족의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며 흥분한건지 헷갈릴 정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의 현재 취재 방식이 서커스를 보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고도의 풍자일 수도 있고. 따라서 여기엔 창작자를 비판할 여건 자체가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않다고 할 수도 있을듯하다.


자백 confession(1970)
"현재에 의해 과거는 언제나 다시 평가된다"

"자아비판은 공산주의자의 최고 미덕이다."
이런 류의 대사가 계속되고 막판에 나오는 공산주의 국가의 사법재판 현장의 그로테스크하면서 코믹한 정경까지 더해서 전체적으로 되게 인상적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배우들이 직접 저런 대사를 읊고 연기하는걸 보니까 섬뜩하면서도 웃기고 그렇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유물론에 기반한다고 해도 명분과 대의, 논리와 언어로 사람과 국가와 세상 전체를 이끌어가야하다보니 저런 식의 어쨌든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대사들이 넘쳐난다.


로만 폴란스키 memoir of his film (2010)

영화감독을 다룬 다큐는 정작 그 감독의 영화는 재미없을지언정 다 흥미로워서 찾아보게 되는데 본작은 감독의 예술론 같은 것보다 당연히 도피중인 자연인 로만 폴란스키의 해명 혹은 변명을 듣는데 초점이 있다. 자신의 연출론을 개인사와 자연스레 연결하는 그의 진술은 그래서 하나의 전략으로 간주하고 더 주의깊게 들어야한다.


altman

올해 본 또 한편의 영화감독 다큐. 작품 자체는 상대적으로 무개성적이지만 알트만의 필모그래피와 영화관에 대해 모나지않고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전개해간다. 담긴 정보량도 충실한 편이고.


버클리에서(2013)

미국 진보적 지성의 요람이자 최대 거점마저도 서서히 자본으로부터 포위되어가는 과정이 (좀 길긴하지만) 면밀히 기록되어 있다. 재밌는건 후반에 등록금 인하도 아니고 무려 '폐지'를 외치며 학생시위대가 도서관 안으로까지 진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데도 아닌 버클리라 그런건지 보안요원이나 도서관 행정직원이나 심지어 공부하던 학생들까지 다 그러려니하는 태도가 재밌었다. 일상화된 저항에는 만성화된 반응이 따라오게 마련인건지.


화씨 451(1966)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보는 고전 영화, 라고 하면 다소 과장이긴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언제봐도 감동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결말을 보기위해 다소 억지스럽고 무리한 중반부까지의 sf를 참고 보는 것 같다. 해방된 자유로운 공동체의 묘사


love streams (1984)
다큐 제외하고 극영화 중에는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본 영화. 엉뚱하지만 역시 남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편의 일본영화들이 떠올랐다. 물질적 궁핍이 아닌 사생활때문에 고생하는 중년의 남매. 여자는 끝까지 사랑을 믿고 남자는 그딴 건 믿지않지만 비밀을 밝히는데 애쓴다. "life is a series of suicides, divorces, promises broken, children smashed,whatever."


while we're young
다큐를 열심히 봐서인지 다큐 방법론의 한계를 노출하는 부분에 시선이 멈췄다. 365일 24시간 카메라를 늘 켜두지않는 이상 얻을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다큐를 볼 때 더러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다 연출일 수 있다며 작위성을 고백하는 장면. 거짓말의 증거를 잡는 장면마저도 그걸 다시 카메라 앞에서 한번 더 진술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상황. 그러나 막판의 클라이맥스는 주인공의 의도와 달리 흐지부지 끝나고마는데 노아 바움백은 주인공 부부의 체념을 나이들어가는 현실과 연관짓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건 자기 뜻대로 안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는걸까. 제이미는 자신을 힙스터라고 순순히 인정하지만 맨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건 그냥 지금 현재 이순간 그가 젊다는 현실인정일 뿐이다.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능숙히 다루는 갓난아기가 지금의 제이미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돼 있을지를 상상해보라는 그 마지막 장면을 보면 말이다. 트리비아 하나, 조시 친구인 아기 아빠가 자기 부인에게 찾아달라던(이게 더 멋있다면서) 윌코의 <yhf>의 종이 자켓을 나중에 조시가 그 집에 찾아갔을 때 손에 들고 있다. 


mistress america(2015)
2015년 마지막으로 본 영화. 노아 바움백에게서 우디 앨런을 연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내게 그의 최근 영화들은 가면 갈수록 위트 스틸먼의 판박이처럼 보인다. 거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후반부의 부자친구네 집 장면같은 걸 보면 스틸먼보다는 좀더 대놓고 코미디이긴 하지만.


에베레스트

이 영화를 본 바로 다음날 케이블에서 k2를 보는데 플롯 상에서는 아무래도 산악영화의 장르적 특성때문에 20년을 사이에 둔 두 편의 전개가 거의 대동소이한데 cg가 필수가 된 세상에서 만들어진 산악영화는 배우가 아무리 혼신의 연기를 해도 왠지 모르게 재연드라마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난다.


시카리오
드뇌 빌뇌브는 데뷔작부터 줄곧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 그것도 개인간의 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신체 가해 즉 고문과 그로부터 유발하는 유무형적 고통의 효과에 유독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작 프리즈너스는 관타나모등에서 있었던 포로학대와 고문에 대한 나름의 코멘트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도 미국 정부가 보면 뒷통수가 따끔할 불편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여주인공의 육체적 나약함이 연속으로 강조되는 것보다 중요한건 그녀가 임무수행과정에서 느끼는 육체가 아닌 심리적 허탈감이다. 그녀의 상관이 그녀에게 하는 명령은 일종의 사고실험인데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 공무원이 작전중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허락했고 뒤를 봐줄 것이라 약속했다는 전언이 그것이다. 즉 목적만 달성한다면 법과 원칙을 지키지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 이제 얼마든지 공권력을 남용해도 된다는 승인을 얻자 정작 공권력의 화신같은 경찰답지않게 주인공은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줄거리란 점점 더 비밀스런, '공권력'이라 통칭되는 국가 폭력이라는 '어둠의 핵심'으로 깊숙이 걸어들어가는 주인공의 심리적 방황의 여정이다. 갔다가 되돌아오는. 후반부에 급전회하는 줄거리도 그렇다면 약점일 수가 없는게 앞에 나온 그 상부로부터의 공권력 남용의 승인을 100% 이상 활용하는 베니치오 델토로야말로 바로 그 공권력의 진정한 화신으로서 신참은 몰랐던 전지전능한 국가폭력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이건 멕시코건 한국이건 국가의 본질을 비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조직폭력배들이 아무리 길거리에 시체를 매달고 벽 뒤에 묻어도 그건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사적인 복수심은 그저 인물을 움직이게하기위한 동기이지 감독의 의도는 비교를 불허하는 폭력간의 대비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난 두편까지 합쳐 세편의 영화가 내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폭력적인 장면이 가끔 나온다고 <그을린 사랑>이 액션이나 스릴러가 아닌 것처럼 내게는 이 영화도 스릴러나 액션이 아니라 예전에는 곧잘 볼 수 있던 그런 드라마 장르로 보였다.  


모스트 바이올런트 이어
남자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구인데 계속 폼잡는게 넌센스처럼 보였다. 특히 업자들 모임에 참석해서 한마디 날리고 가는 장면 같은건 보면서 그 자리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계속 자기를 엿먹이는 사람이 저들중 한명인데 그 앞에서 저렇게 대응을 한다? 마진 콜도 그렇고 이 감독의 영화는 실제 있었던 일에 영감은 받는데 그걸 구체적인 사건의 배경로 삼기보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재현하는데 집중하는 과거 영화를 만든다. 즉 2008년의 금융위기가 배경인데 정작 영화의 이야기는 하나의 가설에 가깝고 도시 자체가 재정 파산에 이르고 덩달아 범죄율까지 급증했던 70년대 뉴욕을 반영해 가장 폭력적인 해라고 80년대를 규정하면서도 이번에도 이야기는 당시의 구체적인 실화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다. 


러브 앤 머시
폴 다노에 비하면 존 쿠잭은 따라하기처럼 보이고 진정한 이 영화의 승자는 단연 폴 지아마티겠고. 마이크 역을 한 배우도 좋았다. 천재가 천재가 되기위해서는 주위에 온통 방해꾼들이 있어야하는걸까. 살면서 진짜 천재를 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목격한 머리좋고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는 정작 그다지 개인사적 고난같은 걸 본 적이 없다보니 이렇게 옆에서 재능을 착취하려드는 주변인을 물리치고 성공한 천재의 이야기를 보면 이거야말로 클리셰 가득한 픽션의 세계 같아보인다. 브라이언 윌슨의 서사가 허위라는게 아니라 천재를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서사가 이럴 수 밖에 없는건가라는.


mad max fury road
마침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 읽고있던 책 때문에 떠났다가 되돌아온다는 서사에 대해 생각해봤다. 두번째 보니 맥스는 어려운 일에는 늘 먼저 앞장서고 희생한다. 거의 성인급.


wild city

홍콩인보다 훨씬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그러니까 <황해>에서 조선족들이 담당했던 문명 이전의 느낌을 가진 청부살인 조폭집단으로 대만인들이 그려진다는 야릇한 인종주의의 냄새가 풍기긴하지만 정작 이 역할을 위해 캐스팅된 장효전의 연기가 그나마 유일하게 이 영화를 볼만하게 한다. 의붓형제가 형제애를 지키고, 최종악당은 조폭이 아니라 상층계급인 변호사이며 공돈을 쫓지말라는 뻔한 교훈. 경찰과 조폭으로부터 모두 쫓긴다는 설정까지 그럴싸한데 대만 조폭들이 왜 끝까지 여자주인공을 물고 늘어지는지는 이해가 안된다. 이런 식으로라도 인물들에게 동기를 줘서 움직이게 만들려고 한 건 알겠으나 끝까지 무리수. 하이라이트 추격씬에서의 대륙 특유의 과장된 cg도 헛웃음만 나옴.

spl2
wild city에서 실망한 후라 그런지 훨씬 더 좋게 다가왔다. 임영동이 흘러간 과거의 감독이고 정보서가 현재 가장 앞서가는 홍콩의 필름메이커라는 점을 비교하게하는 두 편의 영화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플롯이라는 면에서는 역시 비현실적인 확률의 우연에 기대고 있고 초반 세 인물간의 사연이 각기 어떠하고 이들이 어떻게 엮이는지를 보여주는데 있어서는 지금의 판본이 최선이긴하겠지만 더 효율적인 편집도 가능은 했을거 같다. 그래도 어쨌건 제일 중요한건 액션연출인데 촬영과 편집이 다 잘 빠졌다. wild city처럼 cg떡칠도 없고. 그런데 마지막이 좀 생뚱맞을 뿐 아니라 약간의 혼동을 낳게하고 있어서 나로서는 모호했다.


송가황조(1997)
실제 역사를 노스탤지어에 도취된 나머지 멜로드라마화 해버릴 때 생겨나는 착각 혹은 착시에 대하여. 영화의 시선은 세 자매에 고루 나뉘어져있지않고 장만옥이 연기한 둘째만이 실제 주인공에 가까운데 세자매 중 유일하게 독립적 여성주체의 가능성을 그나마 볼 수 있다. 시안사변 묘사는 평이한 수준에 별다른 해석이 보이지않는데 이렇듯 실제 역사를 장대한 서사극으로 재현할 야심도, 그렇다고 아예 여성 주체를 조명하는 내밀한 드라마를 구축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성탄매괴
주인공의 심적고통에 대한 동일시와 감정이입은 나쁘지 않은데 무고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무책임한 법정영화. 그래서 올해 본 중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한 편이다. 이렇게 법에 무신경한 영화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건 그나라의 사법체계가 그만큼 견고하지 못함을 반증한다고 말하면 실례려나. 


그라운드의 이방인 (2014)

역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무명인들의 발자취를 밟고서 앞으로 나간다.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인데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않고 진행되서 재밌었다.


스모킹/노스모킹(1993)
정작 보고나니 담배를 피느냐 마느냐가 영화를 실제로 보기 전에 글로만 접했던 것처럼 중요한 선택의 기로를 나눈건 아니었다. 알랭 레네는 순간의 선택으로 갈리는 인생의 기로를 조명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두 배우의 연기력을 극단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판을 벌여주려고했던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연극에 가까운데 연극과 다른건 배우들이 의상과 분장을 바꾸는 시간없이 즉각즉각 다른 캐릭터로 바꿔가며 나올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을 십분발휘됐다는거. 만약 이걸 실제 연극으로 올린다면 지금 이 영화처럼은 단연 불가능하겠지.

style wars/ wild style
지금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초기 힙합 다큐멘터리 두편


straight time(1978)

<레니>에서의 연기를 보면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도 되게 강렬하다. 하지만 아직도 <레니>가 내게는 더스틴 호프먼 최고 연기.


녹색광선(1986)/ 비행사의 아내(1980)
마리 리비에르는 어쩜 그렇게 짜증나는 캐릭터 연기를 잘하는지. 진상 민폐 캐릭터의 최고봉이다. 당해낼 자가 없음.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되는건 아닌데 도저히 호감을 갖기 어렵고 공감되지않는 캐릭터.


they live
외계인과의 싸움이 체제 대 반체제, 그리고 계급 적대로 재현된다. 즉 외계인들은 경찰과 군대로 대표되는 공권력으로, 또 기업과 언론을 장악한 엘리트 권력으로, 따라서 외계인들과 대항하는 지구인들은 무엇보다 떠돌이이고 육체노동자라는 피지배계급으로 등장한다. 80년대 말 공화당 정권 시절에 리버럴한 할리웃 영화가 부릴 수 있는 재주의 전형이랄까.

murmur of the hearts
 이혼후 양락시의 복귀작. 본인이 출연만한 영화들과 달리 감독으로서의 장애가는 늘 일관된 취향을 견지하고 있고 본편도 예외는 아니다.


listen up philip
그럴거 같더라니 힙스터들이 열광하는 영화라고. 소설가가 두명이나 나오지만 그들이 정작 무슨 소설을 쓰거나 썼는지는 거의 언급되지않는데 그 반면에 아마도 샐린저를 모델로 했을 은둔중인 노작가가 과거에 출간한 소설들의 가짜 표지가 엔딩크레딧에 쭉 나오는데 80년대 느낌이 물씬하고 정말 그럴듯하다. 소설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내용보다는 표지에 더 신경쓰는, 이런게 힙한 '간지'인가보다.


망각의 삶/빅나이트/블루 인더 페이스

90년대 중반 비디오 가게에서 나름 인기작이었던 영화들인데 그 때는 못보고 이번에 다 처음 봤다. 블루인더페이스는 선댄스채널에서 해주는걸 봤다.


find me guilty(2006)/night falls on manhattan(1996)
가족이라는 의식, 사법 제도의 생리에 대한 해부. 왜 늘 경찰이 문제인가. 이토록 한결같은 필모그래피를 가진 미국의 주류감독이 또 있을지.


fingers(1978)
글로만 접했던 영화를 드디어 봤다. '두 세계'. 손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신체부위이지만 손이 아닌 손가락은  더 나아가 구체적 기예를 뜻한다. 그런데 이성이 정념을 누르고 정교한 기예를 연마해야하는 예술가를 동경하지만 사실은 일개 갱스터라는게 주인공의 자아가 파열하는 이유. 예술가를 갈망하는 갱스터라니. 성욕을 주체하지못하고 폭력성을 억누르지 못하며 그의 주변 세계인 뉴욕은 인종과 민족별로 강고하게 구획되어 있다.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유태인, 흑인들은 절대 어울리지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고 증오한다. 이렇듯 그의 내면과 외적 세계 둘 다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있는데 영화 초반 백인 여자 캐롤이 거대한 체구의 흑인 남성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느끼는 분노와 환멸은 그동안 나뉘어져있던 이 두 세계가 곧 분열하고 폭발할 것임을 암시한다. 원작을 보고나니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인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예술가를 갈망하는 갱스터라는 설정과 부자관계 그리고 인종으로 구분된 세계라는 설정만 빌려왔음을 비교확인할 수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를 손에 들고 다니는 하비 키이텔의 모습은 지금보면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음.


군중낙원
보면서 왠지 모르게 연연풍진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후 샤오시엔이 제작과 편집에 일부 참여했고 엔드크레딧에는 존경의 메시지를 헌사한다. 


a borrowed life

<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 nj를 연기했던 오념진(nj는 이 이름의 영어 이니셜)의 연출작. 모 감독이 90년대 베스트로 극찬한 바 있었고 나는 천광싱의 책에서 처음 접하고서 찾아봤다. 피식민 경험이 한 개인의 내면을 어떻게 비틀게 되는지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자유의 언덕/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현재 한국 최고의 코미디 감독이기 때문에 극장에서 못본다. 혼자 낄낄대며 봐야 하기 때문에.   


lightning over water(1980)

하스미 시게히코에 따르면 50년대에 프로덕션 상의 어떤 한계를 돌파하려다가 '주저 앉아버린', 그렇게 정점을 지나 점차 잊혀져가던 왕년의 필름메이커의 후일담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다. 당시 스탭이었던 짐 자무시의 얼굴이 살짝 스쳐간다. 

스패니시 프리즈너(1997)
주인공이 시작부터 끝까지 너무 멍청하게 굴어서 이입이 안됐다. 반전 스릴러는 아무래도 그 반전 때문에 억지나 무리수를 아예 피할 수야 없겠지만 데이빗 마멧도 보면 매작품 이런 약점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2014)

<좋은 친구들>이랑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는. 자기복제라고 하면 좀 심한 말이겠지만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수상을 하거나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같다.

석양의 무법자(1966)
너무 유명한데 그 유명세에 비해 너무 뒤늦게 보게되면 오히려 별다른 감흥을 잘 못 받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고전은 두번 이상 볼 때야 비로소 각인이 되는데 서부극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라 이 영화도 이번에 두번째 보는데 완전히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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