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8일 tv tokyo에서 방송된 드라마 <마호로역전번외지>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중 한명인 교텐은 카페의 카라오케 기계 앞에서 시비가 붙어 드잡이를 하는 두사람을 보며 "오시마 나기사냐"하고 외친다. 과거 오시마가 동료로부터 마이크로 얻어맞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을 빗댄 것이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이 짧은 장면은 그러나 뜻하지않게 아마 앞으로 종종 회자될 처지가 되는데 일차적으로는 그 방송일로부터 바로 사흘전인 1월 15일에 오시마 나기사가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정말 '공교로운' 그 무엇이 되기위해서는 결정적으로 한가지가 더 필요한데 그건 바로 그 짧은 한마디 대사를 한 교텐 역의 마츠다 류헤이가 열여섯살 때 출연한 영화 데뷔작을 연출한 이가 바로 오시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 잠깐 스쳐가는 그 짧은 장면은 대략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듯하다. 자신의 은인과도 같은 노감독의 이름을 그다지 별로 중요하지도, 큰 의미도 없는 장면에 유머를 가미하기위해 입에 올렸으나 정작 그 타이밍이 실로 좋지 않았다고. 실제로 방송이 나가고 난 뒤 현지에서 이와 관련한 약간의 구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교로운 타이밍은 결코 의도한다고 될 리도 없고, 특히 이런 경우는 그 의도를 품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좋지않은 타이밍의 문제로 치부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 되버린, 누구도 예상치못한 결과를 낳은 우연.

 

<고하토>(1999)에서 마츠다 류헤이는 막부말 실제 있었던 남성 사무라이 집단인 신선조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는 미소년 무사인 카노를 연기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장르물보다는 정극에 출연하며 연기를 인정받긴 했으나 열혈의 액션 배우로 주로 기억되는 그의 아버지인 마츠다 유사쿠와는 시작이 달랐던 셈이다. 이후 이십대 초반에는 연애물이나 코미디에 종종 나오던 류헤이는 서른 줄에 접어들 무렵 출연한 마호로 연작에서 데뷔 때와는 180도 다른 '예수룩' 혹은 '거지룩'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우라 시온 원작의 마호로 연작은 첫번째 소설과 영화의 경우 버디무비의 외양을 하고서 사실은 비슷한 내적 상처를 안고있는 두 남자가 함께 지내며 조금씩 치유를 해가는 휴먼 드라마에 가까웠으나 드라마와 속편이 나오면서 흔한 장르물로 조금씩 변해간다. <고하토>에서의 마츠다가 집단 내의 모호한 욕망의 대상이었다면 마호로 연작에서 그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듯한) 다음 행동이 쉽사리 예측되지않는 괴짜를 연기한다. 어쨌든 그렇게 2세 배우로서 많은 기대를 받던 신인 연기자의 데뷔작이었던 영화는 반면에 만년의 오시마에게는 86년작 <막스 내사랑>이후 무려 13년만에 연출하는 장편이었다. 영화로부터 티비로 미디어의 중심이 옮겨감에 따라 과거 스튜디오 시스템을 경험한 나이든 감독들에게 연출 기회는 자연히 줄어들게 마련이지만 그보다도 <감각의 제국> 이후 긴 법정 투쟁을 거친 끝에 80년대 그는 마치 영화에 대한 티비의 승리를 상징이라도 하듯 티비 와이드쇼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오랜 기간 출연하면서 잠정적 은퇴 혹은 공적 은둔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그리고 90년대 유일한 연출작이자 동시에 유작이 된 그 영화에서 오시마는 마츠다 외에 과거 각각 그의 조연출이자 출연 배우였던 최양일과 기타노 다케시,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젊은 배우들인 아사노 타다노부와 다케다 신지를 기용했는데 칸느에서 공개됐을때 서구 비평가들로부터 과거만큼의 호의적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이 영화에서 오시마는 막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도전한다거나 과거처럼 비정상적 성애 묘사에 대한 욕심보다는 동질성을 결속력의 핵심으로 둔 공고한 집단 내부에서 그 동질성이 도전받으면서 생기는 내부의 혼란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집단의 질적 변화와 회복을 조명하고 싶었던듯 하다. 당연히 여기엔 단순히 일개 남성 집단을 넘어 강력한 동일성에 의해 존립하여 법, 사상, 관료제 등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 공동체를 겨냥한 비판의 의도가 깔려있다. 기획 당시 이미 발병한 뇌일혈로 조감독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완성된 (이후 사망까지 오시마는 줄곧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는 당시 그의 몸상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액션이 가미된 장르물로서의 사극이라기보다는 (오시마의 주 종목인) 정적인 심리극에 가깝게 완성되었다. 

 

오시마는 <윤복이의 일기>, <교사형>, <돌아온 술주정뱅이>, <일본춘가고>등 여러 편에서 일관되게 한국과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삽입한다. 딱히 지한파라거나 애정이 있어서라서라기보다는 자국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고려했을 때 전후 일본의 최대 약점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을 전략적으로 선택한거라 보는게 맞을 것이다. tv 다큐 <잊혀진 황군>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재일조선인출신 상이군인들이 일본 정부에 보상해달라는 청원을 하기 위한 가두 행진 과정을 담고 있다. 이 다큐에서 오시마는 주관을 가능한 배제한 채 그들의 비참한 삶을 그대로 쫓아가며 보여주는데 <윤복이의 일기>에서와 같은 한껏 감정이입된 노골적인 내레이션은 일절 없지만 '자,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래도 일본 정부는 계속 모른척 할 것인가'라며 직격으로 추궁하는듯 생생한 리얼리티를 얻어낸다.

 

오시마와 한국의 연은 생각지않은 방향으로도 이어진다. 요모타 이누히코의 <우리의 타자가 되는 한국> 중 두 곳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부인은 작년 파리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다며 일본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감스럽게도 감독의 이름은 잊었지만 농촌에서 삼각 관계를 바탕으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후일담으로 망령의 출현을 다룬 그 작품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감독이 아직 국제적으로 무명이었던 시절에 찍었던 어느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생김새는 거의 식별이 불능하다는 인종학적 사실을 역이용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작품 속에서는 동해를 건너 밀항해 온 한국의 탈주병과 일본인들이 우연히 해수욕을 같이 즐기고 있었다. 한국의 탈주병과 일본인들이 우연히 옷을 바꾸어 입는 모습이 시간적 계기를 무시하고 집요하게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제작 스탭이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임의로 인터뷰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지리멸렬한 채 영화는 끝난다. 감독이 직접 참가해서 "당신은 한국인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과격한 공격성과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한다고 나는 약간 요설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설명을 덧붙였다. 부인은 이 영화의 착상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174

영화감독인 오시마 나기사가 1985년의 양상대담 석상에서 '바카야로'라고 소리쳤을 때 한국측의 거부반응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역사적 사정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 한마디는 한국어의 문맥에서 단순한 바보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08

첫번째 인용에서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지않고 있는 두 편의 제목은 각각 <백주의 살인마>와 <돌아온 술주정뱅이>로 오시마가 자신의 제작사인 '창조사'를 통해 가장 왕성히 활동했던 60년대 연출작들이다. 전자는 수많은 컷분할과 편집에 의한 과감한 몽타주 기법의 활용으로 서구에서 유명하고 후자는 원문에 나와있듯 세 명의 한량이 해변에서 한국의 탈영병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벌어지는 초현실적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있다. 당시에 주류 감독으로서는 줄곧 가장 급진적 비판자의 위치를 점하면서 오시마의 작품들은 심미적 완결성을 일정부분 포기한 듯한 면이 없지 않다. 촬영과 미술 등의 외재적 형식은 플롯과 내러티브를 전달하기위한 도구 정도로 종속되어있는듯하고 이런 점은 할 말이 많은 영화일수록 더하다. 그래서일까. 60년대 그의 영화들은 은유와 알레고리와 숨겨둔 의미를 해독하기위한 퀴즈나 암호같아 보인다. 두번째 인용의 경우, 정확히 어떤 tv 프로의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지 부가 정보가 전무한 탓에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80년대, 그러니까 자의인지 타의인지 영화를 거의 만들지 않은 채 활동 거점을 tv로 옮겼던 당시 오시마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역으로 가늠케하는 해프닝으로 보인다. (마츠다 류헤이도 한국인을 할아버지로 둔 '혼혈'임을 감안하면 한국과의 연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생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았던 탓인지 지금 류헤이를 가리켜 '쿼터 한국인'쯤으로 여기는 촌스러움은 다행히 양국 어느 쪽도 없는듯)

 

그러니까 우연이란 서로 관련이 없는 혹은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두 개 이상의 일이 실제로 동시에 일어나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사건으로 서사화 되었을 때 그 공교로운 타이밍과 낮은 개연성, 그리고 특이성에 놀라워하는 반응을 개념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 배우보다는 신인이나 비 전문배우(가수같은 다른 분야의 연예인)를 주연으로 기용하고 그 대신 아내를 포함한 자신의 '사단'으로 조연을 꾸려 경력이 일천한 주연배우를 받치는 형태의 캐스팅을 선호하던 오시마는 유작에서도 연기 경험이 전무한 마츠다 류헤이를 단번에 주연으로 데뷔시킨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나 두사람의 인연은 좀 기이한 모양새로 다시 이어졌다. 관전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가십에 그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이 해프닝을 다시 돌아보면 결국 우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의 과거 인연이라는 요소 단 둘이 합쳐진 자체로는 별다른 울림이 없지만 여기에 오시마의 사망일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이 겹치면서 '우연'으로서의 의미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우연을 결정하는건 타이밍 뿐일까. 일반적인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는 별개의 사건을 기어이 인과적인 것으로 인지하게될 때 ('여기엔 확실히 보이지않는 뭔가 있는게 분명해. 아무 이유없이 이럴리 없어. 결국 이렇게 됐을 수 밖에 없는 일이야. 피할 수는 없었어'라는 식의) 그것은 마술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절묘한 동시발생(concurrence)의 타이밍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걸까. 하지만 우연은 결코 동시발생이나 일치한 대상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적 격차를 두고 완성되는 우연도 있기 때문이다. 줄곧 한국과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언급하던 감독이 어느 순간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일거에 강한 반발을 얻을 때의 아이러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주목해야할건 실시간이나 동시발생같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낮은 개연성,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의 난처함 때문에 서로 무관한 대상을 인과적인 것으로 부득불 설명하려 들 때 마주하게되는, 무지의 대상을 어떻게든 설명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흥미로운건 인과율(그렇다면 실제로는 동시발생하는 타이밍의 확률)에 대한 경탄보다는 어떻게든 그것을 인과로서 받아들여 납득하려는 이들의 반응이다. 일방향적 시간의 흐름과 두 사건의 동시적 발생이 아니라, 선후를 조정함으로써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는 관점이야말로 우연의 실체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저 관점의 문제일 뿐이라면 같은 사안도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다. 타이밍을 떼놓고 생각하면, 아니 오히려 그 타이밍까지 감안할 때 마츠다 건은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 교텐의 대사는 무례나 실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않으며 오히려 그 동시발생 타이밍의 공교로움이 어떤 분위기를 전조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 해프닝이야말로 차라리 진정 오시마에게 걸맞는 전별 의식이라고 볼 수는 없는걸까. 자신이 데뷔시킨 젊은 배우가 드라마에서 별다른 뜻없이 본인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만약 그 장면을 생전의 오시마가 봤다면 정작 그는 의연하게, 오히려 즐기지 않았을까. 우연을 우연으로 만드는건 개별 사건간의 내재적 관계가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예측불가능한 우연적인 반응, 바로 거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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