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베스트 순위가 아니고 올해 본 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에 남는 영화들. 목록이 길어 정리를 위해 구분해둔다.

 

열쇠도둑의 방법

정식 개봉하지는 않았지만 포털에 검색을 하면 저렇게 뜨는데 저 제목이 오역이다. 딱 봐도 뭔가 어색한 번역투스러운 제목인데 원제목은 鍵泥棒のメソッド 즉 '열쇠도둑의 메소드'다. '方法'이라는 한자를 쓰지않고 'メソッド' 라 카타카나로 썼다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목욕탕에서 킬러로 보이는 어떤 남자의 차 열쇠를 우연히 가지고 나오는 '도둑'질을 한 배우지망생인 주인공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부분에서 '메소드' 연기를 한다는걸 가리키는 것이다. 메소드 연기에 대한 책을 한번도 제대로 읽지않은 얼치기 배우가 나름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에 메소드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예의 최근 일본영화답게 그냥 한편의 단막 TV드라마 그러니까 그들의 용어로는 sp라고 부르는 단막극같다. 왜 요즘 일본영화는 이렇게 tv드라마스러운걸까, 볼때마다 이 생각을 안 할때가 없다.

 

리얼리즘의 여관 (후나키를 기다리며, 혹은 ramblers)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2003년작. 그가 본격적으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서기 직전에 만든, 그러니까 야마모토 히로시를 주연으로 한 삼부작의 마지막 영화. 원작 만화도 봤는데 영화에서 한가지 에피소드일뿐 전체적으로는 다른 여러 에피소드들로 채워져있다. 슬로우라이프나 힐링 영화 열풍이 불기 전에 나온 영화임에도 마치 내 눈엔 그런 영화들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일종의 안티 로드무비라고 해야되나. 돈도 없는 두 남자가 영화촬영을 위한 헌팅 여행을 떠났다가 이런저런 일을 겪는 이야기인데 미국 영화라면 뜻하지않은 일에 얽히면서 계속 일이 커지는 식으로 진행할텐데 여기서는 여러개의 단편적 에피소드가 연결되는가운데 미묘하게 어긋나는 상황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엇박자 유머로 계속 큭큭대며 웃게 만든다. 전통적인 로드무비 장르가 상실감이나 쓸쓸함을 배면으로 깔고있다면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물론적 의미의) 궁핍함의 정서가 관통하고있다. 가난한 여행자, 가난한 여관, 그리고 가난한 여행이 빚어내는 어색한 상황들. 

 

죽음의 가시

화장을 전혀 하지않은 맨얼굴로 일관하는 마쓰자카 케이코는 <포제션>과 <영향아래의 여자>와 함께 '미쳐가는 여자' 연기의 베스트라 할만한 것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생활

내가 본 우울증 환자에 관한 영화 중에서는 꽤 리얼한 임상보고서같은 영화. 여성 우울증 환자 연기의 한 예시.

 

실록 연합적군

1월 1일, 2013년에 처음 본 영화. 웰메이드를 포기하고 오롯한 결기를 끝까지 유지한 채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다큐 드라마. 미장센 따위 집어치워라는 식이지만 그대신 1972년 연합적군이 일으킨 두 건의 사건들을 둘러싼 앞뒤 정황들을 꼼꼼히 되짚고 사실의 재현에만 충실히 집중함으로써 통렬한 자기비판을 성취해낸다. 내 경우는 영화를 먼저보고 그 다음에 비슷한 시기에 막 출판된 <적군파>를 바로 이어 읽었는데 책을 읽고나자 그제야 영화 앞부분의 상황 설명과 인물들간의 관계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는 굉장히 단역처럼 나오는 시게노부 후사코라든지, 적군파를 처음 만든 시오미 다카야, 그리고 시오미로부터 모리 츠네오가 조직을 이어받는 과정같은 것들이 더 가깝게 와닿았다. 사실을 재현했으니 그런거기도 하겠지만 혹시나 이 영화가 이 책을 참조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 어느 쪽을 먼저 접하든 책이나 영화를 나중에 보면 이해에 도움될듯. 책에 대한 인상은 이전에 적었듯 그렇게까지 잘 쓰인 책이라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두번째 읽으니 분명 얻는 부분은 있었다.

 

태풍클럽

80년대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라는 명성이 허명이 아님. 나에겐 80년대 일본 영화하면 맨처음 떠오르는 영화가 됐다. 한줄로 말하자면 '중2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정도 될까.

 

벚꽃정원

태풍클럽이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일본 영화라면 이 영화는 90년대 베스트 중 한편. 십대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미묘한 그들만의 세계가 굉장히 꼼꼼하게 잘 묘사되어있다. 일본 소녀학원물하면 연상되는 것들 중에서 퇴폐적인 것들을 제거하면 딱 이 영화가 나올듯. 같은 감독이 셀프 리메이크했다해서 2008년 리메이크작도 유튜브에서 봤는데 그건 완전 개쓰레기임. 오스카 소속 여자배우들 떼거리로 나오는 자기들끼리의 모임같은거.

 

동경공원

별로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는데 다다미가 깔린 일본 목조주택이 그리 냉난방이 잘되는 것도, 또 보안이나 그밖의 생활상의 편의가 용이하지않을거 같아보임에도 불구하고 잠시동안이라면 한번쯤은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을 찍는, 즉 타인을 관찰하는 대학생 주인공은 정작 자신의 주변사람의 마음은 하나도 들여다보지못한다. 무려 세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단 한명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 전체가 살짝 땅에서 떠있다는 느낌. 그래도 최근 일본 영화중에는 가장 재밌게 본 한편.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이전 포스트에서 밝힌바 있듯 나에겐 일종의 길티 플레저인 일본산 '잔잔한 영화'중 한편. 영화도 많이 보긴하지만 어쨌건 부정할 수 없는 책중독자로서 간다 진보초 고서점가의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내일의 나를 만드는 방법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 복잡한 이야기다. 현재 복잡한 가정환경과 그외 여러 일들 때문에 속내가 복잡한 소녀는 이러한 자신의 현실에 진력을 내는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옛친구를 돕는다. 자신을 가장하여 선의의 거짓말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거짓말을 통해 주인공은 '작가'가 되어가고 힘을 받은 상대편 소녀 역시 타인 앞에 자신을 가장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얻는다. 나루미 리코는 늘 우울하고 청승맞은 역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로 내게는 기억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중에서는 내가 본 중에는 가장 섬세한 연기를 해내고있다. 미완성작을 빼면 이치카와 준의 사실상 실질적인 유작

 

콰이어트룸에서 만나요

처음엔 초현실적 코미디인줄 알았는데 후반부를 보면 그렇지는 않고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다.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식

버블이 꺼지고 장기 불황으로의 전환에 대한 굉장히 나이브한 상상. (일개 관료의 욕심때문에 이렇게 됐다니) 이런 시시한 장르영화도 근데 보고있으면 은근히 일본인들의 속내같은 것들이 보여서 재미있다.

 

인간실격

이래서 명작 소설을 영화화하는건 위험하다. 아무래도 이건 밑지는 장사니까. 그냥 배우들의 노력이 안타깝다는 생각만 들었음.

 

도쿄랑데뷰

스탠다드 비율에다가 거칠거칠한 필름입자가 고스란히 보여서 괜히 옛날영화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거기에 낡은 집, '인생유예중'인 두 남자, 첫사랑의 기억을 안고있는 노년의 여인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날들의 연속 중에 벌어지는 몇 개의 사소한 사건들처럼 영화가 내내 결핍으로 채워져있다. 그런데 그게 또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먹방이 없는 힐링 영화. 

 

배를 엮다

남이 알아주지않는 일에 매진하는, 심지어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도 않는 사람들과 그런 무명의 열정가들에게 감화받는 '보통사람들'의 관찰기 뭐 그런건데 재밌게 보긴했으나 원작소설만큼은 아니고. 수작은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에서의 웰메이드 장르영화. 

 

다메진

미키 사토시의 실질적 데뷔작. 이미 이 영화에서 지금 보고있는 미키 사토시의 코드들이 거의 다 나오는거 같다. 참 한결같은 작가.

 

카뮈따윈 몰라
인물이건 상황이건 다 어딘가 기존의 레퍼런스를 두고있다. 맨마지막. 촬영되고있는 영화속 세계와 카메라 바깥의 현실이 완전히 중첩되어버린 상황을 묘사하는 연출력에는 경탄. 감독의 이전 영화들을 찾아보고싶어졌다.

 

동경의 황혼

오즈 영화중에서 가장 우울한 영화이자 가장 격렬한 영화.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때문. 주목할 점은 의도적일만큼 부부관계묘사가 배제되어있다는 점인데 아버지와 본처가 만나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고 별거중인 큰 딸과 그녀의 남편이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는 장면도 단 한번 없다. 다만 본처와 그의 현재 남편관계만이 짧게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부부 중심의 가족관에 대한 호오를 표시한거가 싶었는데 후반부에 큰딸이 자식은 양친이 키워야한다는 굉장히 보수적인 결론에 이른다는 점이 특이했다. 오즈를 <동경이야기>나 <만춘> 정도의 대표작으로만 알았던 나로서는<무네카타 자매들>과 함께 적지않이 놀랐다. 오즈는 보면 볼때마다 이렇게 놀래키고 마음을 움직이게한다. 그래서 거장이겠지만.

 

동경가족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않는 실망스런 리메이크. 신칸센과 비행기가 널리 보급된 지금, 한번에 자식들을 모두 둘러보러 상경하는 여행이란건 좀 무리 아닌가. 오즈가 얼마나 위대한 감독인지만 확인케하는 영화. <남동생>과 함께 최근 야마다 요지의 일본고전영화 리메이크 두편은 그가 두명의 위대한 선배 일본감독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감동강박이 어떻게 영화를 '안전'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예

 

절식남의 사랑

중반까진 한드같고 (강하게 영향을 받은듯) 뒷부분은 인디출신 감독의 고집과 뚝심이 보임. 근데 전반적으로 너무 기성품같고 특히 후반부가 늘어지는듯. 호시노 겐의 연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개와 고양이

개랑 고양이 키우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한자로 쓴 제목 '견묘'가 보여주듯 말 그대로 견묘지간인 두 동성친구의 동거간 갈등을 다룬 전형적인 일본의 '잔잔 영화' 나로선 그냥 무방비로 넋놓고 보게됨. 어떤 보정도 거치지않은듯한 필름질감도 좋고. 

 

안녕 미도리짱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개와고양이>에서는 찌질하게 나오더니 여기서는 그냥 전형적인 바람둥이로 나옴. 한창 읽을 때라 그런가 영화가 마치 현대를 배경으로 각색한 다자이 오사무 소설같았음.

 

페탈댄스

전에는 아예 제목에서부터 하늘이 들어간 영화 (<도쿄소라>)를 만들더니 이번에도 거의 매 장면에 어떻게든 하늘을 걸고 숏을 찍는다. 이전작과 거의 동일한 스타일의 연출.

 

 

희망의 나라

압도적인 폐허와 절멸의 풍경. 소노 시온은 말(대사)이 많은, 비영화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장엄한 멸망의 비주얼만으로도 역설적인 의미의 감동을 끌어낸다.

 

퍼레이드

요시다 슈이치를 다시 찾아읽게 만든 영화

 

츄리닝의 두사람

2013년에 본 마지막 영화. 갈등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자리에 그저 아무 고저없이 흘러가는 일본영화 특유의 잔잔함이 이제는 적응을 넘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음을 이 영화를 보며 확인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야할 자리에서 그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늘 위험을 안고살아가야하는 이들이 터득한 일종의 삶의 기술 같은걸까. 알고보면 고민도 많고 속내가 복잡한 부자가 시골마을로 피신같은 휴가를 떠난다. 아무 특별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조금씩 꿈틀꿈틀대며 변화하고있고 어느새 이미 특별한게 되어버린, 그렇게 알고보면 늘 뭔가가 진행중인 것이 바로 일상이라는 그런 약간의 깨달음이랄까.

 

포테이토 칩

<츄리닝의 두사람>도 그렇고 나카무라 요시히로는 달리 연출력이라 할만한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연출을 하는데 그럼에도 늘 그의 영화는 그래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크게 감동을 받는 것 같다. 죽 무미건조하게 이어지고있다가 터져서 더 크게 느껴지는 절정부랄까.

 

뱀의 길

V시네마로부터 작가주의 아트하우스 필름으로 건너가는중인 영화라고 해야할까.

 

여자가 계단을 올라갈때

이 영화를 통째로 베낀 한국영화가 있다는 사실때문에 더 흥미로웠는데 역시나 기본 줄거리가 매력있다.

 

산의 사랑하는 당신

원작을 유튜브에서 봤는데 이 리메이크는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이질적임에도 원작 특유의 안정적인 분위기가 그럭저럭 재현되고있어서 의외였다.

 

여자는 두번 플레이한다.

이것도 요시다 슈이치 원작인데 작가로서 살아가며 겪는 직업적 스트레스와 피로를 털어놓은 살짝 자기고백적 메타 서사로 보였다.

 

오레오레

영화를 보고 뒤늦게 원작 소설을 읽어봤다. 영화는 '내'가 증식한다는 설정만 취하고 상당한 각색을 가했는데 원작 소설을 읽어본 감상이라면 '다같이 망해버린 다음 완전히 새로 시작하자'는 식의 최근 자주 보이는, 너무 절망한 나머지 절멸을 희구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공멸에 대한 욕구가 결국은 자아라는 소우주에서 빠져나오지못한 에고이스트가 취하기쉬운 자살 충동의 이면이 아닐까라는 생각.  

 

탐정은 바에 있다2

도저히 추리물로는 볼 수 없고 성인풍의 하드보일드 패러디 정도로 볼 수 있을텐데 반전이 도저히 반전이라고 할 수 없을 수준이고 사실상 1편과 같은 플롯의 반복.

 

요노스케 이야기/ 가족의 나라/ 클라이머즈 하이/ 모두 안녕히: 이들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포스팅 한 적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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