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14년 nhk판 롱굿바이는 전반부까지는 원작에 매우 충실했으나 역시 후반부에서 상당한 각색을 가했다. 

1. 이건 nhk판 만의 문제는 아니긴하나 말로우의 독백이 거의 다 사라져버려 무척 심심하고 재미없어졌다. 거의 명언 수준이라할 말로우의 독백이야말로 원작의 정수이고 핵심이요 알파이고 오메가인데 영화건 드라마건 말로우 시리즈를 영상화할 때 이것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하는 부분이라면 연출력으로 극복해내야하건만 전반적으로 이렇다할 명장면이나 기억에 남을만한 대목이 없었다.

 

2. 원작이 추리 소설치고는 복선이나 암시, 힌트를 사전에 제시하고서 독자에게 맞춰보라는 식의 퍼즐게임을 하려는 의도가 없는지라 추리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해도 이번 nhk판은 대놓고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현재 일본에서 코유키라는 배우 자체가 일종의 마녀 이미지가 있어서 작년 4분기에 방송된 리갈 하이 2에서도 그런 맥락에서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됐는데 이번에도 그 스테레오타입을 그냥 빌려와버렸음. 게다가 드라마 내내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데다 심지어 4화 예고를 보면 직접적으로 '팜므파탈' 운운하는 지경.

 

3. 1과 관련하여 그래서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하는 마스자와 반지가 그렇다면 상대한테 맞고다닐지언정 말씨름에서는 지지않는 특유의 빈정대고 비꼬는 말로우 특유의 반어법적 말투가 나와야하는데 이것 또한 방송내내 제대로 구현되지않았다. 즉 이번 nhk판에서는 마스자와 반지 캐릭터가 원본에 충실한 것도, 재해석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여러번 말했듯 캐릭터만의 문제는 아니긴하다. (평소 아사노 타다노부의 연기력에 대해 호의적이지않은데 따른 편견일 수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리고 원작에서 레녹스와 말로우는 동년배, 게다가 레녹스는 원작에 따르면 흰머리가 갑자기 늘 정도로 급속히 늙어버린 남자인데 nhk판에서는 나이차도 나고 실제로도 아사노보다 한참 어린 아야노 고가 연기하고있다. 

 

4. 상기했듯 이번 2014년판은 전반부까지는 원작과 거의 차이가 없다시피한 충성스러운 각색이었다. 그런데 후반부가 그렇지않다. 이는 역시 소설을 영상화하는데 따른 어려움 때문인데 원작에서는 아일린과 말로우 그리고 출판업자 스펜서가 같이 앉아서 담판을 지으며 그 과정에서 범인이 밝혀지는데 nhk판에서는 마스자와가 이미 출판업자에게 사전에 자신의 추리를 말하고난 후 카미이도 부인을 찾아가는데 그마저도 하나하나 추궁해들어가며 일격을 가하는 식으로 진행되지않는다. 원작을 읽으면서 이 클라이맥스 부분이 꽤 산문적이어서 영상화를 하면 좀 심심하다싶긴했는데 정작 이번 드라마판은 원작보다도 더 싱겁고 흐지부지하게 사건이 해결되어버리는 셈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그나마 필립 말로우가 탐정다운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이걸 그냥 이렇게 넘겨버리고만다. 그리고 이 소설의 특징이 범인이 다 밝혀지고난 이후에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 꽤 길게 진행된다는건데 이 부분은 축약해서 넘어간다. 이거야 어차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거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5. 마스자와 반지와 하라다 타모츠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서정적으로 끝나버렸다. 마지막 우정을 나눈 후 말 그대로 긴 이별을 하기 직전의 순간인데 원작에서처럼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꾼 채 혼자 사무실로 찾아오는 설정을 그대로 따라하는건 무리였을테니 그렇다쳐도 상대의 정체가 밝혀지는 나름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임에도 역시나 어떠한 충격효과도 줄 의도가 없다는듯 하라다의 얼굴을 보여줘버리고 그 뒤에 어처구니없게도 반지가 끝까지 상대를 알아보지못했는지 얘기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그 순간까지 하라다는 한번도 돌아보지않고. 이거 남자들의 비정한 세계를 다루는 하드보일드 느와르 아니었나. 원작에서 말로우와 레녹스 간의 다소 건조한 대화들이야말로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냥 그대로 넣었어도 충분했을텐데.

 

6.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실망한 대목은 그 이후인데 마지막 64년 올림픽을 앞두고 상기된 도쿄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가운데 뜬금없이 2020년 도쿄올림픽 홍보 엠블렘이 지나간다. 이걸 보는순간 내가 왜 지금까지 이걸 보고있었나하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시 사극과 아침드라마 빼고 nhk드라마에는 기대를 하면 안되는거였는데. 역시 이번에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한번쯤은 원작에 끝까지 충실한 그런 영화나 드라마 버전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족이긴하지만 그렇다면 원작과 1973년 알트만 판과의 차이를 다시 짚어보자면

 

알트만은 원작의 시간적 배경을 당대로 옮겨오면서 다소 '파괴적 각색'을 시도했다. 리 브래킷이 쓴 시나리오는 흑인민권운동, 여성운동, 베트남전 반대운동, 유럽의 68혁명, 히피즘까지 60년대말 서구는 물론 옆나라 일본에까지 불어닥친 반체제 운동이 미완의 성공 혹은 실패로 끝난 후 다소 맥이 풀리고 나른해진 시대 분위기가 반영되어있었다. 그 결과

 

1. 원작에서는 끝없이 독백을 하지만 경찰이든 의뢰인이든 상대에게 말할 때는 말이 짧은 대신 반어법과 블랙 유머로 일관하는 필립 말로우 캐릭터가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빈정대는, 다소 뺀질거리는 캐릭터로 바뀌었다. 엘리엇 굴드의 말로우는 혼자 고양이를 키우고 (원작에는 말로우의 외로움을 강조하기위해 린다 로링이 말로우가 개나 고양이도 키우지않는다는걸 강조하는 대목이 있음) 성냥을 꼭 벽에다 대고 긋는 버릇이 있다.

 

2. 또 시대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영화판에서는 말로우 옆집에 정신요법에 심취한 철지난 히피여자들이 떼거지로 살고있고 심지어 말로우한테 심부름까지 시키는데 물론 원작에는 없는 설정.

 

3. 사건의 진상이 다르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작은 '치정'인데 영화판에서는 여기에 약간의 '금전관계'가 섞여있다. 영화판에서는 아일린을 범인으로 분명하게 적시하지않기때문에 그녀의 히스테리에 기반한 치정으로 사건을 끝낼 수가 없어서 그 대신 웨이드 부부와 멘디 사이에 얽혀있는 돈관계가 실비아의 살인과 테리 레녹스의 도주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암시를 한다.  

 

4. 마찬가지로 알트만의 영화판에서는 아일린이 두 건의 살인사건의 직접적인 범인이라고 명시하지않기때문에 로저 웨이드가 사라지는 방법도 다르다. 영화판에서 스털링 헤이든이 연기하는 로저 웨이드는 살해당하는게 아니라 한밤중에 파도 속으로 걸어가더니 그냥 갑자기 실종된다. 

 

5. 무엇보다 원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영화판에서는 레녹스와 말로우가 이미 예전부터 친구사이였던걸로 나온다. 하지만 원작에 비해 두사람의 우정이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다 알다시피 영화판에서는 말로우가 멕시코로 찾아가 그냥 테리를 쏴 죽여버리는 악명높은 엔딩으로 처리해버린다. 원작에서 테리와 멘디는 테리와 필립 못지않은 우정을 갖고있던 관계였고 그래서 테리는 아일린의 죄를 덮어쓰는 과정에서 멘디에게 도움을 청하고 멘디는 기꺼이 테리를 돕지만 영화판에서 멘디는 그저 철저한 악당. 하지만 영화판은 위에서 이미 말했듯 정작 끝까지 보고나면 도대체 사건의 진상이 어떻게 된건지 불분명한 점이 너무나 많은데 그럼에도 말로우는 사건을 확실히 해결할 생각도 없이 그저 복수하는 심정으로 그런 짓을 해버린다. 기실 영화는 이렇게 캐릭터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후반으로 갈수록 대책없이 갈 길을 잃고 흐느적대며 멋대로 진행되긴한다. 특히 후반 30분은 솔직히 너무하다 싶을 정도.

 

그 외. 다시 nhk판 얘기를 하자면 일단 시대고증에서 현실성보다는 다분히 필름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분위기에 맞추어 소품이나 의상 세트에서 당시 현실과는 다소 안맞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나 논픽션에 나오듯 무척 혼란스러웠던 일본의 50년대의 시대적 난맥상을 어떻게 담아낼지가 관건인데 로컬성이 그다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혹은 반대로 어차피 원작에서 챈들러가 하는 당대 사회 비판이란게 대개 관료제, 탐욕스러운 자본가, 권력층의 부패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이기에 충분히 어느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든 각색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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