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나 소설의 각색 또는 tv드라마의 극장판이 제작되는 개봉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는 실화마저도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 에세이, 다큐, 르포 등으로 가공된 1차 저작물을 다시 각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대부분의 각색물이 주로 원작의 설정만 빌어오는 서구와는 달리 원작의 유명세에 기대어 안정적인 수익을 얻으려는 기획하에 영화사와 방송사간에 오랜 시간 동안 긴밀하게 구축된 제작 협조 체계 속에서 연출자에게 창작적 개입의 여지를 주지않은 채 거의 원작 그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작가적 인장을 새기는 감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는 하루키의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 <토니 타키타니>로 알려진 이치카와 준 (1948-2008) 역시 20여년간의 필모그래피 상당수를 각색물로 채웠다. 요시다 슈이치, 야마자키 후미오, 마도 카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하야시 마리코 등 소설이나 에세이 뿐 아니라 tv 다큐까지 포함하는 꾸준한 각색 작업을 거치며 그는 이미 검증된 원작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으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려 애써왔고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결과적으로 특유의 형식적 안정성과 휴머니즘이 일관하는 결과물로 완성됐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1993)

영화 내내 카메라는 병실의 한쪽 편에 고정되어 반대편 침상을 바라본다. 당연히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단 한번도 클로즈업은 커녕 심지어 바스트샷 하나도 없다. 그저 멀찌감치서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풀샷만 있을 뿐이다. 자연히 의사와 환자를 포함한 등장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들의 감정을 알아채기란 쉽지않다. 병세가 더해감에 따라 얼마 남지않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세 명의 암환자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한 명의 담당의가 서로간에 맺는 관계의 변화가 영화를 채워나간다. 소설이 아닌 실제 의사가 쓴 동명의 에세이인 원작을 염두에 두었는지 이치카와는 일반 극영화의 형식을 버리고 출퇴근길, 축제, 벚꽃놀이, 주택가 골목, 초등학교 교실, 시장, 해변, 카페, 버스, 아이들의 놀이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삽입하여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에피소드들을 구분하는 단락으로 쓰고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익숙하면서 정겨운, 그리고 무엇보다 활기에 넘치는 일상과 생활의 장면들은 삶으로부터 조금씩 죽음으로 넘어가는 환자들의 이야기와 확연히 대비되지만 그들의 비극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짧은 인서트에 불과한 풍경 속으로 환자들의 에피소드가 서서히 스며들어간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문병을 다니며 늘 지나다니던 길 위로 죽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읽어나가는 남편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삽입됨으로써 두 개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데 이른다. 

 

<토키와장의 청춘> (1996)

일본 만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유명 만화가들이 숙식을 같이하며 꿈을 키워가던 공동체 시절의 이야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해가며 꿈을 일구어가는 과정이 인물간의 갈등이나 창작의 고통에 대한 클리셰를 걷어낸 채 이치카와 영화 특유의 안정감 속에서 차분하게 진행된다. 같은 일을 하며 같은 고민과 꿈을 공유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사는 공동체에 대한 회고적 묘사는 그것이 더이상 가능해보이지않는 현재 시점에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거장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또 전후 경제부흥시기에 대해 공유하는 일본인들의 집단 기억을 고려하면 미화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영화는 노스탤지어에 쉽사리 기대기보다 고군분투하는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어떤 제약을 받았으며 또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를 서정적이지만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봄, 바니스에서> (2006)

평범한듯 보이지만 쉽게 털어놓지못할 비밀과 고민을 간직한 채 어쩌면 위장에 가까운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몇 개의 작은 사건들을 지나며 조금씩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남자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별다른 설명없이 진행되는데 마치 직전에 만든 <토니 타키타니>의 비공식 속편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유사한 스타일이 유지되고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나레이션을 맡았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여기서는 주인공을 연기하고있다.) 하지만 hdtv 초기에 제작된 tv 드라마로서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시도한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특색. 동일한 인물이 나오지만 하나로 응집되지못한 단편 연작인 원작이 각색 작업을 통해 구성적 완결을 갖춘 단막극으로 거듭났음에도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못했지만 hd 영상 속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치카와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다소 불균형적 결과물이 되었다. 

 

<츠구미> (1990)

친구 마리아의 나레이션과 함께 대도시 도쿄로부터 진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바닷가 시골 마을로 서서히 이동하는 부드럽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인상적인 7분여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타이틀 크레딧과 함께 그 타이틀의 주인인 츠구미가 등장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원작을 가지고 통속적 줄거리의 드라마가 될 뻔한 함정을 피해가는 이러한 영리한 전략은 불치병을 앓으며 마음마저 상처를 입어가는 여주인공의 돌연한 행동들을 보여주면서 앞의 서정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금 배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원작에 충실한 편이지만 바닷가 마을의 풍경과 널찍한 료칸 내부의 공간감, 고정된 포즈의 인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숏등 특유의 시정적인 정경과 분위기 묘사는 전성기 이치카와의 연출력을 확인하게한다.

 

이 네 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형식상으로는 cm 연출 때부터 시작된 일관된 스타일을 추구한 반면 내용상으로는 일반적인 기승전결 플롯의 전형성에서 꾸준히 벗어나려한 점은 이치카와 준의 작가성을 이루는 요소이다. 분위기, 즉 무드로서의 '안락함'이 유지되는 형식적 안정성은 트레이드 마크로서 그가 연출한 cm, tv 드라마, 장편 영화 모두에서 공통된다. 차분하다못해 살짝 가라앉은듯한 분위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묘한 안락함의 정서를 제공하는데 이 분위기는 이야기와 내용을 차치하고 형식으로만 보자면 대개 고정되어있거나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움직임이 많지않은 인물들의 동작, 그리고 무엇보다 다큐멘터리처럼 사물을 대하는 시선에서 비롯한다. 한참 멀리서 훔쳐보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밀착하여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말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곁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물의 인위적이지않은 자연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우연히 카메라에 잡힌 것처럼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관찰자적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원경으로 포착된 마을 풍경이나 달리는 전철의 반복된 인서트 컷 등은 이미 오즈에게서 익숙하게 보아온 것이지만 친숙함 그 이상의 어떤 감정을 상기하게하는데 이러한 이치카와의 영화를 가리켜 요모타 이누히코는 '노스탤지어의 회귀'라고 명명하면서 도저한 '회고 취미'와 그에 기반한 '인생의 스냅샷'같은 화면을 지적하고있다. 희노애락같은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감정이 아닌 마치 정물화나 저 멀리 고정된 풍경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즉 고정된 사물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어날법한 아스라한, 보이지도 정체를 알 수도 없기에 '무드'라고 일컬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서정성을 노스탤지어라 (적극적으로) 재정의한다면 이러한 정조의 시각화야말로 이치카와 준 영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의 작가성은 앞으로 계속 논의되고 재평가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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