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왕국에서 지도술은 너무도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한 도의 지도는 한 시 전체를 감고있었고, 한 왕국의 지도는 한 도 전체를 담고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대한 지도들조차 만족감을 주지못했고, 지도학교들은 왕국과 똑같은 크기에 완전히 왕국과 일치하는 왕국지도 하나를 만들었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 중에서.

1.거칠게 말해서 영화의 중심 아이디어는 보르헤스의 위 우화 그대로다. 그러나 영화 전체는 보르헤스의 저 단장 못지않게 판타스틱하며,초현실적인게 아니라 초현실 자체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는 하나도 현실적인게 없다. 단 한부분도. 케이든의 연극은 현실을 흉내내려고하는데 정작 그 현실은 이미 초현실인 것이다.(한 인터뷰에서 카우프만은 사만다 모튼이 살고있는 불타는 집에 대해서 "꿈에선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왜냐고 묻지않지요."라고 대답함으로써 말그대로 꿈같은 이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애초부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가족으로부터 내쳐지고 점점 극도로 고립되어가는 케이든은 자신이 연출하는 연극에서마저 자신의 지금 처지를 개선하기는커녕 똑같이 재현하려하고있으니 연극은 애초부터 성공적으로 개막할리 만무하다. 죽지않는 이상 인생에 끝이 없는데 어찌 그 현실을 모조리 제유(synecdoche)하는 연극에 끝이 있을 수 있는가. 요컨대 죽거나 세상이 종말을 맞아야만 비로소 연극은 끝난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기존에 알고지내던 가족이나 친구등의 가까운 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잦아지고 그 경험들은 누적되어 하나의 거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나간다. 삶과 죽음이라는 어려운 질문들은 한 개인의 반평생을 휘적휘적 따라가면서 현실에 밀착되어 점차 거대한 은유의 바퀴를 굴려나간다.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시간을 뒤로 한채 점점 외골수가 되어가는 케이든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연극에 매달리면서 현실의 시공간 밖으로 서서히 튕겨져나가지만 하나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연이어 떠나보내면서 뒤늦게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되고 그때마다 그의 인생은, 아니 이제는 그의 인생이 되어버린 그의 연극은 쉼없이 바뀌어간다.

2.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를 볼 때마다 이렇게도 영화가 되는구나하는 감탄을 하게된다. 국내에서 그의 이름을 널리알린건 출세작 <존 말코비치 되기>보다는 <이터널 선샤인>일텐데 자신이 작가로서 겪는 정신적 고통과 딜레마 그 자체를 각본으로 써낸 <어댑테이션>을 나는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그 영화에서 로버트 맥키는 지금 할리우드에는 모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새로운 장르란 없으니 새로운걸 해 볼 생각말고 기존의 장르에 충실하라는 충고를 하는데 얄밉게도 남의 입을 빌어 그 대사를 쓴 카우프만 본인이야말로 그 이름 자체가 할리웃에서 하나의 독보적 브랜드를 이루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그간 찰리 카우프만이 언제나 남의 머리속을 궁금해하는(그러나 관객으로서는 그의 머리속이 궁금한) 영리한 작가(혹은 기인)로 알고있었고 그의 영리함을 부러워했는데 <이터널 선샤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감독 데뷔작을 보면서 그가 무척이나 따뜻한 페시미스트이자 온정적인 외톨이란 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시넥도키 뉴욕>은 그간 그가 쓴 영화들중 가장 안쓰럽다. 이는 다시말해 이 영화가 그의 모든 작업중 논리보다, 아니 논리만큼 감성에 기대고있어서 무척 인간적이라는 말이기도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보다는 개인, 그중에서도 타인보다는 자신의 무능력과 불운, 비참함, 불우로부터 시작했음이 분명한 얘기만을 집요하게 되풀이해온 카우프만은 여기서 오십줄에 들어서면서 점점 빠르게 자신의 삶 내부로 육박해들어오는 죽음의 구체성에 관하여 (이전과 달리)블랙 유머를 배제한채 한없이 진지하게 풀어나가고있다.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들이 작게나마 슬며시 긍정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왔던데 비하면 이번 영화의 결말은 절망적이지는않지만 묵직하고 애닯다. 요컨대 나는 찰리 카우프만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슬퍼졌다. 

누가 찰리 카우프만 영화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흉내내고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진다. 그렇게 현실과 은유는 점차 서로 포개지고 뭉개지며 인물들은 서로를 흉내내다가 종내는 공존한다. 확대경을 쓰고 미세화를 그리는 아델과 체육관만한 크기의 창고에서 초대형 연극을 구상하는 케이든 부부는 이미 시작부터 대립적임을 암시한다. 클레어가 예술이 아닌 실제 세상의 구체성을, 상담가 매들린이 두 세계 사이의 혼돈을 상징한다면 불타는 집에 사는 헤이즐은 이 두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자신의 비참한 인생을 직접 이름붙인 '시뮬라크룸'안에서 기어이 완성하려는 케이든의 의지는 나로선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술가의 승화 의지라면 예술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이리라. 게다가 현실과 현실의 대체물이 점차 교집합을 늘려가가던 끝에 완전히 포개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케이든의 고뇌와 야심을 카우프만과 연결짓지않기란 어렵다. 게다가 케이든이 만든 연극 세트장은 그 자체가 기실 영화 속 세트가 아니던가. 이쯤되면 직유든 은유든 환유든 제유든, 비유는 이미 비유가 아니다. 연극은 연극이 아니고 영화는 영화가 아니듯이. (아래 사진을 보면 내가 지금 무슨 횡설수설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으려나. 출처는 로저 이버트의 블로그.)



3.결국 인생이 뭔지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발설할 수 있는 자격은 시간의 지긋지긋함을 견뎌낸 이들에게 주어진 전리품. 화장실에서 한 주먹 가득 약을 입안으로 털어놓는 케이든과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새미의 모습은 근래 나온 영화들중 드물게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케이든은 자신의 인생을 남의 것 보듯 하게되면 뭔가 다른걸 얻으리라 생각했을까. 그 어떤 장광설의 언어로도 담지해내지못할 삶의 총체성은 그것을 통째로, 그 전체를 조감해야만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삶과 분리되지말아야한다는 말들을 곧잘 하곤하지만 이는 쉽지도않을뿐더러 현대인에게 권장되는 태도도 아니다. 케이든은 세상엔 엑스트라란 없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이야기를 가지고있다고했지만, 그러나 어쩌면 정말 인생은 몇백미터짜리 높이의 대형 세트장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작은 무대이고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흉내내는 배우인지도 모른다. 수십년간 연습을 하고도 한번도 관객들에게 선보이지못할 수도 있고 그렇게 숱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클라이맥스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진행되다가 이유도 설명되지않은채 급작스레 퇴장함으로써 완성되는 그런 연극.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어떻게든 저혼자 알아서 흘러가는 그런 연극말이다.
 
덧.주요 남자배우로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톰 누난 두명만이 나오는데 비해 그들의 상대역으로 사만다 모튼, 캐서린 키너, 에밀리 왓슨, 다이언 위스트, 제니퍼 제이슨 리, 호프 데이비스 등 자그만치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여섯명의 연기파 여배우들이 나온다. 카우프만이 심어놓은 이 영화의 비밀은 이 여배우들이 맡은 각각의 캐릭터와 그들이 케이든과 맺는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나감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실패한 최고권력자의 회고에서 대중이 기대하는건 좀 심하게말해서 공개처형(거기에 살짝 덧붙여진 분노의 배설과 감정의 정화)과 비슷한게 아닐까싶다. 대한민국에는 역사적 평가를 포함해서 '객관적으로' 봤을때 실패했다고 동의되고 간주되는 전직 최고권력자가 사실상 없고 당연히 실패한 권력자의 회고도 없어서 경험에 근거해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아직껏 버리지못한 권력을 향한 집착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았던 시절에 대한 흐뭇한 기억 그리고 사과를 가장한 자기 변명을 보면서 괜히 사서 열받고 싶은 사람은 많지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대중은 그의 발언을 통해 숨겨졌던 모종의 역사적 진실을 기대하기보다는 모든 발언을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인격적 모독을 포함하여)실컷 욕을 퍼붓고 그리고 종내는 그래도 사과(비슷한 그 무엇이라도)를 하지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처형과 회고가 결정적으로 다른건 더 많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후자의 경우 그것은 철저히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점이다. 인터뷰이에겐 최소한의 자기 방어가 허용되고 본인의 역량에 의해 이는 얼마든지 반전의 기회로까지 삼을 수 있다는거다. 물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어떻게든 표면 아래 감춰진 사실의 한조각이라도 캐내려는 인터뷰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추기/드러내기의 사이에서 교묘한 말장난에다가 물한바가지도 부어가며 '고급'스런 물타기 기술을 구사하는 인터뷰이의 구렁이 담넘는 모습은 어쨌건 꽤 흥미로운데 여기에 출판물과 달리 영상 인터뷰의 경우 매체의 속성까지 이 모든 요소들에 중첩되다보면 진실보다는 한 개인, 정확히는 앞뒤맥락은 저멀리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하는 표정과 속도,억양등 어조의 변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관찰자의 복잡한 심경까지 기록되어 엄밀한 사료적 가치보다는 마치 한 사물에 대한 임상적 관찰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백악관을 떠나는 리차드 닉슨의 얼굴을 TV로 지켜보던 영국 출신의 방송인 데이빗 프로스트의 머리 위로 스쳐간 것도 이런 종류였으리라. 당시 대중이 듣고싶었던 것은 닉슨의 재임시기 업적에 관한 사료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아니기때문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목매여있는 토크쇼 호스트가 원한건 무엇보다 닉슨을 자신의 앞에 마주앉혀놓겠다는 것, 다시말해 흥행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인 것이다.

그와 같이 일해온 연출자 존이 말하듯 프로스트는 정치에 관심은 커녕 투표 한번해보지않은 영국 출신의 토크쇼 진행자다. 한마디로 그는 TV대담프로 진행자로서 요구되는 고결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불편부당한 지식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TV광대, 즉 손석희보다는 강호동에 가까운 인물이다. 또한 그는 야심많은 몽상가이기도한데 충동적으로 야심차게 닉슨과의 인터뷰를 기획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이를 방송하겠다는 방송국도, 광고를 붙이겠다는 회사도 없는등 프로젝트의 구체화 과정은 현실과의 격차를 뚜렷이 드러내고 그때문에 급기야는 광고주를 직접 찾아가는 영업사원 노릇까지하면서도 팀원들 앞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않으려는 프로스트의 모습은 저돌적이면서도 야심찬 도전자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방어전을 앞둔 챔피언인 전직대통령이 있다. 스캔들 이후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않은 채 은둔하며 은근히 정계로의 복귀를 갈망하고있는 닉슨은 적지않은 출연료와 미국인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의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점 등 몇가지 이유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 응하게되고 노회한 정치인의 연륜을 십분살려 미소 속에 칼을 숨긴채 잔뜩 벼르고있는 프로스트와 이하 제작진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친다.
 
이렇게 챔피언과 도전자라는 대결구도로 놓고보면 이 영화는 '정치 영화'라기보다는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강한 두 에고이스트, 즉 머리가 크고 쉴새 없이 땀을 흘리는 못생기고 나이든, 게다가 치명적인 스캔들로 낙마한 전직 정치인과 젊고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방송인의 대결로 맞춰진다.(세대간 대결양상의 구도도 슬쩍 강조된다.) 하지만 두사람은 적수라기엔 은근히 유사점을 공유하는데 전세계를 호령하는 최고권력의 자리에서 치욕적으로 쫓겨난 전직 대통령 그리고 불가능해보이는 프로젝트에 올인하느라 서서히 자기명성에 흠집을 겪고있는 프로스트 모두 현재 패배중이라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인터뷰는 별안간 두 남자의 패자부활전의 무대로 거듭나는데 이는 갑자기 한밤 중에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닉슨의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여러모로 2009년의 대한민국을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칼과 방패에 비견되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대화의 기술(인터뷰어가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자신이 이미 준비했고 '알고있(다고믿는)으며' 하고싶은 말만 자동응답기처럼 반복하는 한국의 어떤 인터뷰이들과의 비교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서서히 닉슨을 코너에 몰아 원하던 대답을 이끌어내는 프로스트를 보면서 환경과 기회가 주어지지않아서 그렇지 이런 인터뷰어가 우리에게도 아예 없지는않을듯해서 부럽고 동시에 아쉬웠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방송은 결코 학술이 아니라는 점. 지극히 한정되어있으며 동시에 매우 불연속적인 시간 안에서 무한정한 편집이 가능한 방송인터뷰의 매체로서의 속성은 어쩌면 애초에 팩트는 보여줄지언정 진실을 드러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평소의 회의가 영화를 보는동안 내내 고민을 하게했다. 카메라 안에 사실이 기록되는 것과 그것이 카메라 바깥 세상으로 전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고 카메라 안에 기록되는 그 무엇마저 수많은 권력의 밀고당기기가 개입된 결과물이라면 과연 거대한 껍데기를 벗기고벗겨낸 끝에 드러난(혹은 드러날 수도 있는) 한줌의 진실은 애초부터 허풍선이였을 수도 있기때문이다. 뭔가가 있긴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단적으로 말해 자신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린 닉슨의 마지막 발언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파를 타느냐 타지않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텐데 이 경우엔 그 결과가 전자였다는 것이고, 내 의문은 과연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가 비록 현재 권력을 갖고있지않은 전직대통령이라 할지라도.(그럼 이제 여기서 다시 각자가 처한 상황의 형식과 질을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일테지만 이건 내가 말할 수 없는 능력바깥의 부분이니 미뤄둔다.)

이는 이 영화의 존재 자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전쟁을 개시한 부분에 대한 프로스트의 추궁을 보고있노라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의 워터게이트 이후의 어느 후일담을 끄집어낸 피터 모건은 그렇다쳐도 이를 기어이 지금 시점에 영화화해낸 미국인 론 하워드가 노리고있었던 바가 뭔지 눈치채기는 그닥 어렵지않다. 아마도 누군가는 뜨끔했을테고 또다른 누군가들은 충분히 그래야함에도 너무 둔감한지라 그렇지않았을게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내게 영화 속 내용과 이 영화의 존재 자체까지 포함해 여러모로 '열폭'하게 만들었다. 연기? 말이 필요없다. 직접 보면 안다.(이미 피터 모건의 각본에 프랭크 란젤라와 마이클 쉰이 그대로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했었으니 연기에 관해서는 사전검증을 마친 셈.) 다른 배우들 중에는 오랜만에 올리버 플랫을 봤고 샘 록웰은 나름의 이미지 변신이 꽤 그럴싸했으며 매튜 맥파든은 보는내내 더못 멀로니를 떠올리게했다.
1.마지막으로 비디오를 본게 3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녹화해뒀던 nhk다큐멘터리였는데 돌려보기도 불편하고 일단 화질에 적응이 어려웠다. 요 몇년간 어떤 영상물이건 쨍쨍한 화질의 dvd나 파일로 보느라 비디오 전원은 커녕 먼지도 한번 제대로 안 닦아줬으니 헤드가 정상일리 만무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구겨진 종이같은 화질에 꽉 눌린 음질은 감상이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분명 몇년전까지는 그래도 좋다고 본건데. 무릇 세상은 이렇게 바뀌었건만 그래도 이런 세상의 속도에 전혀 발맞추려는 생각이 없는 슬로우족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뉴저지 어느 쇠락한 동네 구석에 처박혀있는 비디오가게 <be kind rewind>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가내수공업적 특수효과의 장인 미셸 공드리는 전작 <수면의 과학>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일가를 이룬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방식을 아예 영화의 내러티브와 찰싹 붙여놓음으로써 전면에 내세운다. 철거가 예정되어있는 가게 주인 플레처씨가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여하느라 유일한 직원 마이크에게 가게를 맡긴 사이, '우발적 사고'로 온 몸에 자기를 띠게된 제리가 들어오는바람에 가게의 모든 비디오테입이 일시에 공테이프가 되어버린다. 손님을 잃지않으려는 마이크와 제리는 궁리끝에 기존의 영화들을 아예 자신들만의 방식, 일명 '스웨덴식'으로 하나하나 vhs카메라로 리메이크하기시작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공드리는 하드보드지, 색지, 호일 등의 온갖 종이와 고철덩어리, 조악한 분장과 부족하거나 과해보이는 의상들을 긁어모아 싼티나고 후줄근하면서도 왠지모르게 쿨해보이는 저예산b급의 첨단 특수효과를 통해 <고스트 버스터즈>나 <로보캅>부터 <맨인블랙>, <러시 아워2>같은 8,90년대 블록버스터,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부터 <부기 나이츠>같은 작가주의 영화까지 자신만의 눈으로 종횡무진 영화사를 새로 써나간다.(그 중엔 유일하게 다큐<우리가 왕이었을때>도 있다.)

원작 영화를 어떻게 새로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촬영과정의 소소한 재미도 즐겁지만 미셸 공드리는 이러한 작업방식이 상징하는 어떤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있는듯 보인다. 영화 속에서 제리는 "모두들 이 동네를 떠나고싶어한다."고 외치고(물론 본인은 절대 떠나지못한다.) 가게는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젠 아무도 vhs테입으로 영화를 보지않고 그 대신 dvd를 취급하는 인근의 대형프랜차이즈 스토어를 찾는다.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서 플레처의 친구들은 미국에서는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며 그에게 돈되는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설파하는한편 뉴욕사람까지 찾아올정도로 인기끌던 마이크와 제리의 20분짜리 '스웨덴'식 영화들은 저작권침해위반으로 일말의 여지도없이 폐기처분된다. 이렇듯 영화는 빠르고 좋은 것보다 느리고 불편하며 낡은 것의 우월함과 로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치 슘페터처럼)"작고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설파한다.

2.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가 뭐였는지, 누구와 같이 봤는지 좀체 기억이 나지않는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가족과 함께였겠지만 하여간 최초의 기억은 없어도 등교하듯이 영화를 열심히 봤던 기억은 난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강남에도 재개봉관들이 몇개 있었고 거기서 일주일에 두번 꼴로 별의 별 영화를 다 봤었다. 지옥의 묵시록, 인디아나 존스, 로보캅같은 걸작부터 실베스터 스탤론의 코브라나 척 노리스 영화, 폴리스 아카데미, 그리고 우뢰매까지 모두 재개봉관에서 봤다. 뿐만아니다. 공중파에서는 주말 밤마다 동서고금의 걸작을 틀어줬고 시작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광고 숫자를 하나하나 세면서 봤었다. 지금은 정확한 내용은 커녕 장면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않지만 분명한건 그때 봤던  모든 영화들은 아직 예술이 아니라 놀이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전부 교과서였으며 주인공들은 롤모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험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며칠동안은 주인공의 걸음걸이나 말투부터 의상과 소품도 어디선가 구하고 심지어는 위험천만한 '스턴트'도 와이어줄 하나없이 감행하지않나.(일명 슈퍼맨 놀이) 아직은 걸작과 졸작을 구분하지않았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던 시절. <be kind rewind>는 바로 그 시절의 흥분, 예술이 아닌 유희로서의 영화가 불러오는 흥분의 감정을 소환하다. 어릴 때처럼 의상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자기만의 영화를 만드는 짓 따위를 정상인 어른이 할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셸 공드리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웃자란 키덜트 몽상가들이었고 우리 모두 한때는 저러했다. 열렬히 영화를 봤고 영화가 곧 세상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커가면서 세상은 영화가 아님을 알게되고 점차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갖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현실이라는 내성을 키워간다.(그리고 대개 그 과정을 사람들은 성장이라고 부른다.)그리고 그즈음부터 영화는 이제 예술로 분류되면서 엄지를 올리느냐 마느냐의 이진법, 혹은 별네개를 가지고하는 사진법 등을 이용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심미안을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엄연한 하나의 텍스트로 거듭난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디서도 어릴적 몽상가들을 찾을 수가 없을 밖에.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 하지만 아이였을 적 영화를 봤던 기억은 마치 유전자나 감기바이러스처럼 몸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있다가 한번의 작은 자극만 주어지면 불현듯 활성화된다. 못믿겠다면 이 영화속 "스웨덴"식 영화들을 보면 된다. 도서관에서 <고스트 버스터즈>를, 폐차장에서 <맨 인 블랙>을 다시 찍는 마이크와 제리를 보고있으면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한때는 성룡이었고 주윤발이었던, 또 슈퍼맨과 터미네이터였던 나와 당신이 그 안에 있다.

3.할리웃의 일급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였던 <이터널 선샤인>과 <휴먼 네이처>, 그리고 본인의 자작 시나리오로 만든 이후 두편의 차이는 작은 듯하면서 크고 큰 것 같으면서도 다소 미묘하다. 두사람 모두 철저히 독자적으로 작업하는 나홀로  예술가 타입이긴한데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는 더 폐쇄적이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왠만해서는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몽상가들의 낙원이자 오밀조밀한 마이크로 코스모스 공드리 월드는 장편영화로서는 다소 지루하고 늘어진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있긴하지만 그래도 그 독보적인 상상력때문에 또 다시 기대하게한다.(그래서 그의 이전 뮤직비디오 작업이 더 좋았던건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도쿄>가, 그리고 현재는 (imdb)에 따르면 <시공간의 주인>이라는 차기작을 준비하고있다고한다.  <그린 호넷>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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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홀연히 나타난 위트 스틸먼의 데뷔작이다. 과작의 작가 스틸먼은 98년 세 번째 작품인 <디스코의 마지막 날들>이후 십년째 긴 침묵 중이며 지금 소개하려는 이 데뷔작에 나온 배우들 중에도 계속 배우 경력을 이어가는 이는 찰리 역을 맡은 배우 외에는 없다.(지금 imdb를 확인해보면 스틸먼이 신작준비중이라고 나온다.) 동일한 씬 내에서도 툭툭 끊어가는 연출과 미장센으로 인해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보이며 배우들의 연기도 계속 보고있으면 아마추어티가 물씬 나지만 영화는 지금봐도 참신한 소재와 맛깔나는 대사의 향연으로 90년대 미국 독립영화의 빛나는 성취로 남아있다.

시작은 이렇다. 뉴욕에 사는 평범한 젊은이 톰은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않은 저녁 어느 부잣집 자제들의 사교파티에 우연히 초대받게된다. 유럽과 달리 계급이 존재하지않는 미국이라고하지만 거대한 저택에서 마치 피츠제럴드 소설에나 나올법한 이브닝 드레스와 수트를 입고있는 이들은 명백히 잘난 부모를 둔 상류계급 아이들이다. 여기에는 아직도 작위로 불리는 유럽에서 온 재수없는 도련님도 있고 프레피에겐 실패만이 예정되어있다고 굳게믿는 숙명적 패배주의에 빠진 샌님도 있다. 톰을 파티에 초대한 닉은 이들 중에서 정말 괴짜이긴하지만 프레피들의 속물근성에 심한 염증을 느끼기도한다. 몇 번의 파티가 계속 이어지면서 여자 주인공 오드리는 똑똑하고 착한 톰을 짝사랑하지만 톰은 알아차리지못한다.

과연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영화는 그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고 말한다. 톰과 닉의 프레피 친구들은 영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시절은 잠깐,  새로 사귄 연인과 살기위해 혹은 취직으로 친구들은 점차 하나둘씩 떠나간다. 그리고 언제나 톰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닉은 자아를 찾겠다며 뉴욕을 떠난다.

초반부만 보면 영화는 계급간의 미묘한 차이와 그로인한 갈등 그리고 불분명한 계급간의 경계에 대한 탐구처럼 보이기도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시니컬하면서도 소박한 것을 얘기한다. 게다가 계급에 대해서는 아예 그 차이를 점차 지워나간다. 닉의 캐릭터는 부르주아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이나 낙천적 염세주의자에 가깝고 톰은 전혀 소설을 읽지않으면서도 당당히 제인 오스틴에 대해 논평하는 스노브다. 여자 친구들 중 하나인 제인은 이제 유한계급의 가면 놀이에 싫증을 느낀다면서 이제부터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겠다며 집에 놀러온 톰과 닉을 내쫓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들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단말인가? 그순간 이제 비로소, 아직도 어색하긴하지만 진짜 친구처럼 보이는 관계가 시작된다. 바로 톰과 찰리다. 혼자남은 톰은 자신이 오드리의 진심을 알아차리지못했음을 후회하고 그녀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연락이 닿은건 처음부터 톰을 탐탁지않아했던 찰리. 허공 위에 세워놓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있을뿐인 두 남자는 자동차 천국인 미국에 사는 성인이면서도 둘 다 운전면허가 없다. 친구들 중 아직까지 뉴욕에 남아있던 두사람은 함께 오드리를 찾아 재수없는 유럽 출신의 폰 네커가 살고있는 롱아일랜드로 떠나 말도안되는 소동극을 벌인다. 그렇게 영화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작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끝난다.

친구가 되기위한 조건이 반드시 비슷한 출신 배경과 문화적 인덱스의 공유일 필요는 없다. 지금 나의 곁에 아무도 없을때, 너도 나도 모두 혼자일때, 그러한 필요가 자연스레 친구를 만든다. 톰은 불연듯 오드리의 부재를 느끼고는 그녀가 자신의 옛날 러브레터를 모두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급작스레 그녀를 찾아나서고 그때 그의 곁에는 찰리만이 남아있다. 처음엔 껄끄러웠던 두사람이 마지막 모험을 감행하는 아이러니. 계급따위보다는 어쩌면 필요가 더 중요할지모른다는 어찌보면 나이브해보이는 이 천연덕스러움.

덧. 영화는 찰리의 입을 빌려 프레피, 부르주아등 자신들의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계속 늘어놓고있다(찰리는 스스로 같은 부류를 hubs라고 부른다). 아마도 스틸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대목을 보고있으면 멀리는 우디 앨런부터 지금의 노아 바움백이나 케빈 스미스 혹은 리차드 링클레이터를 잇는 중간 역할을 했던 스틸먼의 위치를 가늠하게된다. 꽤나 수다스럽다는 점에서도 서로들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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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들이 있었다. 어떤 대통령 어떤 국회의원을 뽑을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어도 걸그룹의 우열을 논하며 싸우는데에는 익숙한, 그러나 진정 연대하는 방법은 전혀 모르는 우리세대애겐 애초에 요원해보이지만 하여튼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랬던 세대들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최근의 혁명으로 기록된 68혁명. 이 영화에는 그 때 거리 위에 있었던 일군의 젊은이들이 나온다.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차에 불지르고 돌을 던지고 손에 붕대를 감고 바리케이드 뒤로 숨어 망을 보다가 경찰을 피해 도망을 가고 그러다 쓰러진 동료(라고 쓰고 동지라고 읽는다)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지금보면 어떻게 저런게 가능했을까 싶은 그런 장면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기획된 영화답게 여러모로 비교된다. 도대체 베르톨루치 영화속에 혁명은 어디있는거냐며 항변하듯 이 영화는 <몽상가들>이 끝난데서 출발한다. 혁명의 시작점에서 세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테오가 거리로 뛰쳐나가면서 <몽상가들>이 끝났다면 이 영화는 그 뒤 테오의 행적을 쫓듯 초반 30 분을 통째로 경찰과의 거리 위 대치장면으로 채워놓았다. <몽상가들>이 커다란 집안에서 육체와 관념의 유희에 빠져있던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집밖으로 뛰쳐나가는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소재주의에 함몰되 자멸했다면 <평범한 연인들>은 거리위의 가투로 초반을 시작해 그 이후엔 앙투안의 스튜디오에 모인 '동지'들의 권태로운 일상들로 채워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화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크레딧에조차 일체의 소리를 배제하고 가투장면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찍었던데반해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지점부터 배경음악도 삽입되는데 이러한 상반된 스타일의 시도 역시 표피적인 제스처만을 취했던 <몽상가들>이 보여주지못한 것을 전부 해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혁명은 실패하고 열패감에 사로잡힌 옛 투사들은 이제 마약과 연애 그리고 예술로 도피한다. 그 속엔 자본가 아버지를 둔 앙투안과 장 크리스토프 사이에 차마 계급갈등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해프닝도 있고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미적지근한 연애등 여러가지 사건이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예술활동도, 정신의 쾌락도 오래가지못한다. 뉴욕으로 떠난 뒤 보낸 편지에서 릴리는 입국하자마자 일종의 사상증명을 했노라고 말하고 편지를 읽은 그날밤 꿈에서 프랑수아는 그제야 그녀에게 미처 보이지못한 진심을 고백하며 마지막 선택을 한다.

본디 혁명은 이념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 그렇기때문에 혁명전야의 흥분된 긴장감보다 그 이후의 미세한 변화들이 필립 가렐에겐 더 중요했던듯싶다. 혁명을 전후로한 삶의 변화가 그리는 궤적을 통해 영화는 몸 밖이 아닌 내면에 입은 상처를 그대로 내보인다. 모두가 혁명때문에 잠시 미루어놓았던 자신들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할때 그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다른 평범한 이들의 삶을 흉내도 내보고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양심과 원칙을 고수하기도한다. 그래서 프랑수아와 릴리의 연애도 그렇게 뜨뜻미지근할 수 밖에. 애초에 연애가 혁명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했던 이상이 좌절된 젊은이에게는 이제 그 무엇도 조심스럽기만하다. 욕망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배운 프랑수아에겐 욕망과 윤리의 관계를 새로이 고민해야만했다. 그래서 릴리가 뉴욕으로 떠난다고했을때 프랑수아로서는 그저 "그럼 이제 난 어쩌지?"라는 말 그 한마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덧1. 킹크스의 "this time tomorrow"를 배경으로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웨스 앤더슨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 곡을 자기 영화에 쓴게 아닐까싶은데. 제작 시점에서도 몇년 차이가 안나기도하고. 이 곡이 다른 영화에서도 또 쓰인적이 있을까.

2. 러닝타임이 길어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의외로 새겨둘만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은 영화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가투가 끝난 새벽 집으로 돌아온 장 크리스토프가 어머니에게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노동자들이 포기하려해요. 노조가 부르주아보다 혁명을 더 두려워한다구요. 그들이 원하는건 급료인상뿐이에요. 그게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라도한다는듯이. 그들은 뭐가 더 중요한지 몰라요. 그렇지만 돈은 절대로 삶을 바꾸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대꾸는 커녕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도않은채 집안 청소에만 열심이다.
"오직 남은 질문은 이것 뿐이에요. 우리가 혁명을 완성할 수 있을까? 노동계급을 위해서? 노동계급을 무시하고서도?"
그제야 어머니가 입을 연다.
"그들은 바뀔거야"
"그렇지않아요. 아니에요."
그리고는 신발을 벗은채 소파에 누워 잠이 든 아들. 어머니는 침대에 가서 누우라며 방으로 보내고는 아들이 벗어놓은, 지난 밤의 치열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먼지로 뒤덮인 신발을 손에 든다. 무심한듯보이던 어머니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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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가을무렵, 그 해 칸느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펄프 픽션>의 전세계 최초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를 연출한 생소한 이름의 미국 출신 신인감독 퀜틴 타란티노가 직접 내한을 했었다. 영화잡지 <스크린>은(아직 씨네21 창간 전이다) 두 해 전 첫 장편을 세상에 내놓은 박찬욱이라는 신인감독을 붙여 두사람의 인터뷰(혹은 대담)를 성사시켰었다. (4년전 스크린에서 다시 이 기사를 전재했었고 나도 이 기사가 실린 2004년 7월호를 가지고 있는데 최근 이 기사가 모 블로그에 다시 전재되면서 다시금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열혈 영화광인 두사람은 그때도 b무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않았는데 그때 타란티노가 몬티 헬만의 영화를 아직 못봤느냐며 박찬욱에게 자신이 돌아가면 테입을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적어갔는데 아직까지(그러니까 2004년 7월까지)소식이 없었다고 적혀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타란티노로부터는 기별이 없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때 말했던 영화는 혹시 <two-lane blacktop>은 아니었을까.

이 영화가 지금 와서 컬트로 분류되어 칭송받는 이유를 직접 보고나니 대강 알 것도 같았다. 자동차 영화이면서도 레이싱 장면은 거의 없는 차라리 로드무비인데다 이렇다할 갈등이나 사건도 없다. 관객을 위한 흥분제로 작용하기에는 턱없이 에너지가 부족하여 레이싱의 뜨거움보다는 한껏 낮추어진 서늘함이 쓸쓸하기까지하다. 속도에 탐닉하는 열혈남아들이 아니라 쿨하다못해 차갑기까지한 이름 모를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너무 말이 없어서 묻는 말에 조차 제대로 한번 대꾸를 안한다.  

이처럼 조용한 남자들의 미처 표출되지못한 남성성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에도 반영된다. 왠만한 차는 명함도 못내밀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는 이들의 차는 셰비블록이라는 앤틱. 그냥 차가 좋을뿐인 두 남자는 무연히 차를 몰고 동쪽으로 향하는데 왜 떠나는지는 관객도, 주인공도 알 수 없다. 생면부지의 소녀가 태연히 차에 올라타도 아무것도 묻지않고 태운 채 같이 떠나고 길에서 만난 나이 든 드라이버 gto와는 즉흥적으로 레이싱대결을 시작한다.

이 영화가 나온 71년에는 또다른 자동차 영화의 걸작 <vanishing point>도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두 영화 모두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애초에 의도했던 목적지는 사라지고 가속도가 붙는 가운데 그저 눈 앞의 소실점 안으로 질주해들어가는 결말, 어색하다싶을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교유, 그리고 전반적으로 영화를 지배하고있는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전세계가 동시에 들끓었던 60년대말을 거친 후 혁명과 열정의 불꽃이 사그라든 시점을 반영하기라도하듯 영화는 그렇게 풀이 죽어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은 시대가 바뀐 줄도 모르는, 혹은 전혀 신경쓰지않는 좌절한 히피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않으며 자신들도 과거의 열정을 잃은 채 그냥 차를 몰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돈이 떨어지면 경주를 해서 여비를 해결한다. 그들에겐 예전처럼 같이 할 동료들이 많지는않지만 운이 좋아 길에서 만나면 너무나 쉽게 친구가 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도 바로 드라이버와 gto 사이의 여러 대비에 있다. 하루에 몇번씩이나 같은 스타일의 옷을 색깔만 바꿔 갈아입는 gto는 그가 얼핏 말했듯 대도시에서 왔다.(계속 말을 바꾸고있어서 쉽사리 믿기는 어렵지만) 머리도 짧고 어딘가 비즈니스맨처럼 보이는 외모를 한 채 그는 자신의 차에 대한 무한한 자존심을 뽐낸다. '드라이버'와 '메카닉' 그리고 '소녀'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이 남자는 최신형 스포츠카를 모는 반면 아들 세대인 이들은 골동품 자동차를 운전한다.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려는 gto에게 듣고싶지않다고 딱 잘라버리는 '드라이버'에게는 오직 현재만, 자신이 운전하는 이 차와 오늘 달려야할 거리와 불분명한 목적지만이 있을 뿐이다. 승패는 관심없으며 다른 누군가와 계속 달린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이 영화는 목적지없는 로드무비가 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의의는 일반 레이싱 영화와는 다른데서 찾게되는데 온전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과장하지않고 묘사한 하위 문화 캐리커처이면서 냉소적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또하나의 뉴아메리칸 시네마가 바로 그것이다.


1.주인공으로 출연한 네 명의 배우 중 '드라이버' 역을 맡았던 제임스 테일러를 제외한 세 명이 모두 사망했는데 그 중 70년대의 명배우 워렌 오츠를 뺀 나머지 둘은 제 명을 채우지못한 죽음을 맞았다. 몬티 헬만이 발굴해낸 '소녀'역의 로리 버드는 이후 헬만의 차기작 <cockfighter>와 우디 앨런의 <애니홀> 출연 후 스물 다섯 나이에 자살을 했고 비치보이스의 윌슨 가문 출신인 데니스 윌슨('메카닉')도 서른 아홉 살에 익사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워렌 오츠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전문 배우였는데 영화 상에서의 신구세대의 대립 구도는 그대로 한 명의 전문 배우 VS 세 명의 비전문배우로 나뉜다. 이 영화를 찍을 무렵 스물 둘셋 정도였던 제임스 테일러와 스물 일곱이었던 데니스 윌슨은 상당한 미남들인데 요즘 제임스 테일러 사진을 보면 안습 그 자체. 세월의 풍화를 이겨낼 자 누가 있겠냐만은 이런걸 보면 자기관리라는거 정말 필요하다.

2.이 영화를 비롯한 70년대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이 시절 차들은 기본적으로 체형 자체가 상당히 슬림하고 그래서 무척 날렵해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충돌하면 너무 쉽게, 마치 종이장처럼 찌그러지고, 커브를 돌때도 드리프트라기보다는 차라리 슬라이딩한다는 표현이 어울려보일 정도로 불안해보이는데 그에 비하면 요즘 차들은 어떤 기종이라도 전부 기본적으로 무슨 장갑차나 보호차량처럼 묵직해보인다. 일단은 예전에 비하면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이라 온갖 전자부품들이 많이 들어가고 안전 강화를 위한 디자인과 고안된 장치들 때문일텐데 그러니 당연히 차 자체의 디자인이 예전보다는 몰개성적이고 어슷비슷해지면서 미감을 덜자극할 수 밖에 없다. <불리트>에 나오는 머스탱같은 자동차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걸까.

 

하루세끼 밥을 먹듯이 영화를 보던 시절이 불과 얼마전까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충만하게하고 삶에 찌든 육신을 치유한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는 역시 다섯손가락, 그나마 정말 너그럽게 품어안았을때 열손가락을 빌려도 한두 자리는 남는다. 그나마 최근 2년동안 dvd나 파일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본 영화만으로 한정하자면 말년휴가 나오자마자 봤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전 같은해 봄에 2박3일짜리 외박나와서 봤던 <굿나잇앤굿럭> 그리고 작년에 세시간짜리 공강을 이용해서 봤던 <원스>정도.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살짝 비껴가있는듯한 취향인데 여기에 한편의 목록이 추가되었으니 바로 지난주 개봉하자마자 봄비를 맞으며 학교근처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부리나케 메가박스로 달려가서 본 <데어윌비블러드>다. 영화를 본지 수일이 지났건만 여지껏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은 감상이 사방으로 곁가지로 뻗어나가 그것을 한줄기로 잡아채어 추스리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나의 빈약한 언어로는 턱에도 미치지못하기때문이다. 플레인뷰가 마지막 대사인 "i', m finished"를 내뱉고나서 다시 영화제목이 타이틀로 올라오면 화면에서 뻗어나온 기운이 나를 사정없이 밀어붙이는듯한 느낌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좀체 쉽지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알트만-앤더슨 스타일에 무한애정을 갖고있다는건 이런 경우에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형식적 수사이고 잰체일뿐이다. 알트만 영화 하나도 모르고 앤더슨 영화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도 이 영화가 최근 나온 그 어떤 미국영화보다 독보적인 개성을 가지고있음을, 플레인뷰가 영화의 맨처음 열심히 삽질하던 그 탄광처럼 영화가 뿜어내는 어둡고 음험한 기운의 존재를 인정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주의의 흥망성쇠나 개발사를 다루는 역사 다큐도 아니고 최근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풍자극도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 모두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그저 인간, 자본가이기도하고 인간혐오자이기도하지만 그 이전에 그냥 유일무이한 한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보고서가 가장 온당한 분류가 아닐까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자꾸만 대놓고 영화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들어앉으려고할때다. 해질무렵 힘차게 불타오르는 유정 뒤로 웃고있는 플레인뷰와 해밀턴의 검은 실루엣을 볼때, 화재를 진압하려 수십명의 남자들이 손에 하나씩 뭔가를 쥐고 달려나올때, 일라이의 대범하기만한 종교사기극을 볼때, 그리고 거짓 신앙을 고백하는 플레인뷰의 가증스런 얼굴을 볼때, 그리고 그렇게 결탁과 반목을 거듭하던 두 인물이 급기야 정면 충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쾌감은 분명히 옛날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놀랍게도 영화는 그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뒤로갈수록 점점 더 팽팽해지고 세지면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듯 누적된 힘에 관객은 압도되고 짓눌리게 되는데 이 모든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에 폭발하기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마지막 씨퀀스는 고도로 양식화되고 계산되어있음이 역력하게 보이는데(사실, 말을 바로하자면 이 영화의 전부 어디하나 빼놓지않고 다 그렇지만)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하다. 사각의 프레임안에 3차원적 입체라기보다는 2차원적 평면 느낌이 강한, 그러니까 정물화나 스틸사진을 보는 듯한 두 대의 볼링 레인과 기계가 정면으로 놓여있는 방을 무대로 벌어지는 두사람의 격돌은 심히 과장되어있지만 그만큼 정교한데 마치 한창때의 스탠리 큐브릭 영화들을 보는듯했다. (구부정한 폼으로 달려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다.)

마지막 대결에 이르면 이 영화의 비유는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워진다. 자본주의는 자본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었기에 과거 종교의 힘을 빌렸으나 어느 시점에 오면 서로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된 결탁과 반목은 곧 파국을 맞이하리란 부정적 전망. (여기서 지금의 현실을 대입하고 적용하는건 관객의 몫?)하지만 이렇듯 추상적인 차원의 은유로만 영화를 보기엔 플레인뷰라는 인간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다. 그는 자본가라서 나쁜 게 아니고 두번의 살인을 저질렀다고해서 악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단한번도 죄책감을 보이지않고 자신의 행위에대해 스스로에게 되물은 적 없고 따라서 반성도 하지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확신이 있으니까. 플레인뷰라는 인물의 캐릭터스터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하지않는 인간, 확신하는 인간의 강직함, 그 바위같은 단단함 그 자체가 여기서는 핵심이 아닐까. 앤더슨은 반성하지않는 독단적 인간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오류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충분히 그러고도남을, 아니 차라리 그럴 수 밖에없는 그럴만한 인물, 그래서 범인들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나올 수밖에 없는 단독자의 내면을 차근차근 한삽한삽 채광꾼처럼 파고들어가고있는 것이다.

컴퓨터나 와이드TV로 영화를 보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대개 그 말들은 산업적 보호같은 당위의 차원이나 큰 화면이 주는 감동같은 뻔한 관습적 어구에서 크게 벗어나지못한다. 큰 화면이 주는 감동에 대해 조금 말을 보태어보자면 그건 어두운데서 한참을 훔쳐보다가 들켰을때의 당황스러움 내지 창피함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나오면 빛에 눈이 적응하는 시간보다 내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시간이 더 길게마련인데 그건 영화가 어두운 극장 내부를 휘저으면서 관객인 내 마음까지 지배해버리기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영화들은 그 강도가 더 세기 마련인데 회의하지않는 확신에 찬 집요한 플레인뷰같은 인물에 한참을 푹 빠져 그 어두운 기운에 침잠되면 극장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에 적응하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분을 맛보기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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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결국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하지만 그렇지못하거나 반대로 언제까지나 그안에서 머물려고하는 아들들의 이야기다. 이는 (아직까지 보지못한 <바틀 로켓>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발사인 맥스의 아버지는 타인들 앞에서 신경외과 전문의로 둔갑되고 전직 변호사 로얄 테넌바움의 장남 채스는 부정혐의로 아버지를 고소한 후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그 다음 영화 <스티븐 지수와의 해저생활>부터 이 아들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켄터키 항공사의 파일럿 네드 플림턴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만 믿고서 해양탐사전문다큐멘터리스트(이렇게 부르는게 맞나?)스티븐 지수를 찾아가고 나중에는 성까지 지수로 개명한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주인공 휘트먼 3형제는 여기에 한술 더 뜬다. 이들은 어찌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랑했던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노라며 애정결핍증상을 보이면서 아버지의 선글라스나 면도기같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 서로 다툰다. 이렇게 덩치만 큰 미성숙한 애어른들은 그래서 남들은 일찌감치 해치운 ‘어른 되기’의 과정을 남들보다 비싼 방식으로 치른다. 뭐 평생 놀고먹어도 크게 지장없을정도로 부자들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만.

비록 흔한 인도 클리셰이고 동시에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는않지만 영적 체험을 위해서라는 기차 여행의 애초의 명목은 그럴싸해보인다. 파리 슈발리에 호텔에 처박혀있던 막내 잭, 임신한 여자친구를 떠나려하는 둘째 피터는 맏이 프랜시스의 부름에 왠일인지 고분고분 응한다. 그러나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있는 형제는 결코 크고 대단한 게 아닌 작고 사소한 문제에서 매번 부딪치며 투닥투닥 여행을 계속한다.

형제들의 전사(前史)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을 남기면서 전개되는 영화는 처음엔 영적 체험으로 시작했다가 삼천포를 돌고돌아 어느 현지 소년의 죽음을 겪고 나중에는 은둔해있던 어머니와 재회하는 여정을 거친다. 그결과 값비싼 기차여행이 형제에게 정작 베푼 것은 그들의 영적인 고양이 아니다. 각자 살던 곳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끙끙대던 형제들은 인도에서 여유롭게 요가를 배우거나 갠지스 강 앞에서 명상같은건 하지않는다. 여행이 모두 끝난 후 기차가 다시 돌아갈때까지도 그들의 문제는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않았고 아마도 자신들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간후에야 비로소 그때부터 풀어나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는 인도에서 분명 뭔가를 느꼈다. 자기가 먹고자고 일하던 곳에서 빠져나오면 그제서야 그곳과 자기 자신의 삶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늠된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진실쯤. 그게 바로 여행의 기능 아닐까. 그것이 꼭 콜로세움처럼 오래된 건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왜소화하고 영원에 가까운 장구한 시간 앞에서 경건해하는 방식으로만 행해질 필요는 없다. 휘트먼 형제가 이 영화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 고작해야 생전에 아버지가 몰던 차를 가져야만 그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근대인/(혹은)도시인적 사고를 했던 형제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어느 인도 소년의 죽음을 겪은 뒤에 비로소 죽음의 질감을 피부로 확인하고 무게를 실감한다. 어수룩한 삼형제는 그 후 오지에서 수녀생활을 하는 어머니와 재회하고나서야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해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을리는 애초부터 만무하다. 대신에 길 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직접 어머니를 마주한 이후에야 형제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견문을 넓히기위함도 물론 좋지만 그냥 목적없이 떠나는 여행이 갖는 의외의 효용은 떠나봐야만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이를테면 프랜시스의 비서 브랜든이 만든 코팅된 일정표처럼) 스케줄에 맞추어 무심히 따라가다가 마주친 의외의 장소나 사람들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던 기억이 돌아오고나면 기억에 또렷이 남는 법이다. 그리고 기실 대부분의 모든 여행이 그러하다(남는게 사진과 쇼핑목록뿐인 가이드투어는 그래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뿐) 

덧. 그래도 하필이면 왜 꼭 무대가 인도여야만 했느냐는 힐난 앞에서는 내가 감독도 아니지만 나름 변명을 할 수는 있다. 이 형제는 세련됐을지는몰라도 지적이지는못한 전형적인 백인들이니까 그렇게까지 사려깊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따진다면야 아들이 셋씩이나 있는 패트리샤 휘트먼이 인도에서 수녀원장을 하고있어서라는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저 웃기고싶어서, 따로 할 말을 위해서 앤더슨이 심어놓은 꽤나 과장된 장치들일뿐, 그는 인도라는 무대의 클리셰를 기꺼이 써먹고싶었을뿐이었으리라. 

1.after hours(1986)
일과후 남자는 우연히 카페에서 한 여자를 만나 집에 초대를 받고는 기분좋게 집을 나서지만 서서히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쉴새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도 이상하게 꼭 같은 장소를 두번 이상 가게되고 만났던 사람을 두번 이상 만나더니 오해를 받아 쫓겨다니기에 이른다. 이 하룻밤의 소동이 결국 이 남자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는 계속 출몰하고있는데 그렇다해도 이런 개꿈의 주인공이라면 좀 곤란할듯하다. 자기 집 열쇠와 술집 주인의 열쇠는 분명 다른 것임에도 왠지 같은 것처럼 보이고 내가 잃어버린 20달러가 조각가의 작품에 붙어있는 저것인 것만 같고 몇시간전만해도 사람들로 바글바글대던 클럽이 지금은 주인만 혼자남아 오늘밤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고있으니 정신 멀쩡한 우리의 주인공 어느새 비에 쫄딱 맞은 생쥐꼴이 처량하기그지없다. 마지막장면까지 보고나면 결국 이 영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다.

"열심히 일한 당신, 딴생각말고 계속 일해라. 쉬지말고. 쭉!"

2.hollywood ending(2002)
왕년엔 오스카도 받았을만큼 잘나갔지만 이제는 퇴물인 발 왁스만은 이혼한 전처 엘리의 현남편 할 예거가 제작하는 영화의 감독을 맡는다.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되찾고 더불어 엘리와 재결합하려 애쓰는 할. 근데 이게 웬일. 검사상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불구하고 '심리적 실명'상태를 맞이한다. 겨우겨우 스탭들을 속여가며 영화를 만드는데 결과물은 보나마나 최악의 상황. 이제 완벽하게 준비된 실패를 눈앞에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프랑스에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게되고 오래전부터 파리에 살고싶어했던 발은 엘리와 함께 파리로 떠나며 끝을 맺는다. 90년대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오스카와는 인연이 멀어졌지만 쉬지않고 한해에 한편꼴로 그것도 기본이상은 하는 영화를 만들고있는 우디 알렌 본인의 얘기에다가 영화와 영화산업을 동시에 조롱하는 깔끔한 메타영화로서 시치미 뚝떼고 영화 그 자체보다는 영화제작의 바깥쪽, 즉 제작자의 간섭, 가십 캐기에 바쁜 기자, 말만들기 좋아하는 비평쪽을 두루두루 꼬집고있다. "끝만 좋으면 다 좋은 법" 그게 바로 할리웃 엔딩이 아니겠느냐는 이 깜찍한 도발은 이바닥에서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은 노장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3.margot at the wedding(2007)
구체적인 시간과 지명까지 들먹이면서(1986년 뉴욕 파크슬롭)자신의 이야기를 윤색해 중산층 가족의 붕괴와 그 과정에서 정신적 변화를 겪는 아이들을 그려냈던 노아 바움백은 이번에 두자매의 보이지않는 신경전을 떡하니 붙어서서 마치 리얼다큐처럼 묘사한다. 이번에도 반쯤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싶은 의혹을 갖게되는 이 이야기에는 반쯤은 히피같은 동생과 맨해튼에 사는 전형적인 도시 지식인 마고를 대비가 아니라 일방적인 물고 물리는 관계로 그려내고있다. 둘만의 비밀을 늘 남에게 이야기하고다니며 주위 온갖 사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는 그것을 배로 되갚아버리는 신경질적인 마고의 캐릭터는 <오징어와 고래>에서 제프 다니엘스가 맡았던 역할과 어느정도 유사하다. 이번에도 여전히 어린 아들은 엄마와 이모를 지켜보며 어른들의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게되고 어른들은 갈등과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진정한 화합을 이루지못한채 헤어지고만다. 저예산의 인디영화치고는 캐스팅이 화려한 편인데 시나리오 자체가 그런지몰라도 뭔가 대단한 연기를 보여줄만한 부분이 애초부터 적다. ciaran hinds같은 경우는 서점에서의 낭독회를 빼면 얼굴한번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잭 블랙의 캐릭터는 딴말 필요없이 그냥 평소 영화 속 그의 이미지들을 한데모아놓고 뭉쳐서 펼쳐놓은 매너리즘적 산물이다. 이런 비교적 화려한 캐스팅이 성공적인 전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 여러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플롯은 전작에 비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그럼에도 뭘 얘기하고싶은지를 알아채기가 그닥 어렵지는 않다. 세련된 도시 사람들과 왠지 두렵기까지한 시골사람들 사이의 대조. 가족을 '배신'했던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언니와 그로인해 고통받은 다른 가족들간의 갈등, 복잡한 사생활 속에서 갈피를 못잡은채 흔들리다가 결국 도망치다시피한 고향에서마저 모든걸 망쳐버리는 마고의 민폐스토리 정도.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을 성공작이라 부르기 어려운 이유는 인디 영화 특유의 사변적 태도때문이라기보다는(거기에 더해) 오히려 더 확장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너무 '쿨'하게 끝내버린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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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 새로운 기운으로 꿈틀꿈틀하던 맨체스터 음악씬을 되짚고있는 <24시간 파티피플>의 주인공은 그라나다 TV의 쇼프로그램 진행자이자 한눈에 '되는 물건'을 가려낼줄 알았던 영민했으며 능글맞았던, 훗날 팩토리 레코드사의 사장이되는 제작자 토니 윌슨이다. 영화에는 해피 먼데이스와 함께 당시 그가 픽업했던 주요 뮤지션중 하나였던 조이디비전이 한꼭지를 차지하고있는데 보컬리스트 이언 커티스를 왠지 태어날때부터 예술가였을것만같은 인물로 그리고있다. 그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유니크한 무대매너를 가지고있고 말수가 적으며 자신의 속내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않은채 혼자 고뇌하는. 따라서 그의 자살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않고있다. 그리고 커티스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 조이디비전의 데뷔초부터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스틸을 찍었던 안톤 코빈이 직접 무대 안밖에서의 커티스의 삶을 그려냈다. 그것도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로.(따라서 <24시간 파티피플>과 반대로 이번에는 커티스가 주연, 토니 윌슨이 조연이다.)

이안 커티스의 부인이었던 데보라 커티스가 쓴 책을 토대로 각색한 시나리오는 조이 디비전의 탄생보다 이안 커티스의 개인사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그 결과 뜨거운 음악영화라기보다는 차분히 가라앉은 멜로드라마로 완성됐다. 발화점은 없고 냉각기만 뒤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밴드의 탄생과 그들의 성장사도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만(영화에 따르면 피터 훅과 버나드 섬너가 이미 밴드를 갖춰놓은 상태에서 커티스가 보컬리스트로 나중에 합세하고있다.) 그보다는 뮤지션이기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때나마 직장도 가졌었던 커티스의 개인사를 조명하고있는 것이다. 귀기어린 스테이지 매너와 곧바로 이어지는 발작이 상징하는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보다 부인인 데비와 연인이었던 아닉 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한채 갇혀버린 남성으로서의 모습이 그의 진정한 실존이었노라고, 음악적 고뇌보다는 좀체 출구를 찾지못했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야말로 자살의 실제 원인이었을지모른다고 영화는 말하고있다. 불완전한 육신과 나약하고 유리같은 정신을 가진 고뇌하는 뮤지션이기 이전에 두 여자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하는 멜로드라마의 남자주인공으로 그리고있으니 커티스를 커트 코베인과 동일시하며 더 거대한 무엇을 기대했을 팬들로서는 적지않은 충격일듯하다.

<컨트롤>은 대중에게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는, 게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여지곤하는 요절한 스타의 삶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확실하게 벗겨내는 작업이긴하다. 이는 스타에게 곧잘 행해지는 '사후 교정' 차원의 재조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실존인물의 전기를 대할 때의 경계사항 하나를 다시금 재확인하게한다. 이제는 더이상 어떠한 개입이나 수정이나 가감도 불가능한 굳건한 바위같은 사물에 대한 뒷날의 호사가들의 부지런한 입놀림 말이다. 이 영화가 커티스의 죽음의 실체에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있을까. 그와 살을 맞대고 살았던 가장 가까운 이의 기록은 마냥 공평무사하기만할까. 너무 닳고닳은 뻔한 말이지만 한 인간의 삶의 총체에 다가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할 뿐이며 이 영화에서 관객이 보는 것도 그저 편향된 하나의 관점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 내용의 불편함에 대한 관객의 과민반응 또한 불필요하다. <라스트 데이즈>처럼 창작자의 자의식이 투철하게 반영되어 전기로부터 영감만 받은(그래서 흔적만 남은) 전혀 새로운 창작물에 비한다면 <컨트롤>이 견지하는 태도는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타협적이며 동시에 절충된 합당한 균형점이라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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