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지난 3년간 그간의 작품 경향과는 구분되는 두 편의 진지한 정극을 연출한 바 있다. <마이 백 페이지>는 실화를 배경으로한 전공투 세대의 후일담이고 <고역열차>는 하층 노동자였던 작가의 자전적 삶을 소재로 한 사소설을 영화화한 것이었는데 두 편 모두 평단에서의 호평과 달리 흥행은 아쉬웠던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고역열차>를 마친 후 야마시타는 바로 장편에 들어가는대신 케이블 음악방송국의 스테이션 id라는 명목의 미니 드라마를 연출하기 시작했는데 작업 과정에서 이를 극장용 경장편으로 확장한 것이 바로 <모라토리엄의 타마코>다.


결과적으로 일본 좌파의 몰락을 불러온 1972년의 두 개의 사건들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갖는 무게를 극복해내지못했던 <마이백페이지>가 다소 의외였을뿐,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영화는 줄곧 역사나 사회보다는 주로 낙오자와 소외된 인물들에 천착해왔다. 그가 처음 주목을 받은 야마모토 히로시 주연의 '바보 3부작'만 보더라도 그가 이러한 캐릭터와 이야기에 얼마나 친근감을 갖고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데 2013년의 <모라토리엄 타마코>은 그런 점에서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만들어진 초기 3부작과 외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함축하는 바는 미묘하게 다르다. 3부작의 인물들이 영화 촬영을 위한 헌팅 여행을 떠난다거나 고향에 내려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있는 반면 <모라토리엄>의 타마코는 한마디로 말해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해 아무 것도 하지않으려는 인물이다. 아버지 성화에 못이겨 썼지만 결국 버리고만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은 본디 이력서라는 양식에는 결코 어울리지않는, 오히려 써서는 안되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말 그대로 '우상'인 아이돌을 열망한다는건 곧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 대신 타마코는 게임을 하고 만화를 보고 손님으로 알게된 중학생과 이런저런 작은 모험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잠을 잔다. 아무 것도 하지않으면서 나름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우리에게도 이제 결코 낯설지만은 않기에 납득이 된다.


이렇듯 영화는 '모라토리엄'으로 비유되는 유예된 시간과 사회적 책무로부터의 도피가 주는 매력과 불안의 양가감정을 직접적으로 전혀 노출하지않으면서 거기에 더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않는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있다. 백수나 니트를 다룬 다른 영화 주인공과 달리 타마코는 꿈과 목표를 이루기위한 노력 자체를 하지않으며 변화가 없는 일상의 지리멸렬함 속에서 생기는 피로감이나 불안도 거의 보이지않는다. 따라서 타마코가 취업에 성공해 이 상황을 벗어나느냐의 여부는 어느샌가 이 영화에서 부차적인, 아니 차라리 전혀 중요하지않게 되어버린다. 그 대신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에는 부녀가 영위하는 그들 나름의 '생활'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궁금해지는건 바로 타마코가 오늘은 뭘하며 보낼지에 관한게 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끌고가는 동력이 '목표'와 그에 도달하기위한 '과정'의 서사가 아니라 바로 '생활'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시공간과 자연의 변화같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일련의 구체적 행위 양식의 메뉴얼로 구성된 생활에 대한 애착과 중요성은 일종의 일본적 특수성처럼 일관되게 영화나 드라마, 소설등 서사 장르에서 관철되고있는데 이는 각각의 계절마다 당연히 해야하는 것처럼 정해져있는듯한 구체적 의식이나 행위 양식들, 즉 봄의 벚꽃놀이, 여름의 불꽃놀이와 축제,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섣달그믐 제야의 타종행사 tv 중계 시청 그리고 각 계절 음식 같은 것들로 재현되며 이는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활'을 특정한 목적과는 무관한 말그대로 사람이 '생을 부지하기위한 활동'이라는 의미의 구체적 행동 양식의 모음으로 이해하게될 때 그것이 의식적이건 아니건간에 종내는 목적으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긍정과 확신 그리고 신뢰로 귀결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부녀는 밥상 위에서 같이 밥을 먹고 투닥거리던 가운데 별다른 계기없이 갈등을 해결이 아니라 '무마'해버린다. 평범한 생활을 공유하던 중에 서사상의 클라이맥스를 거치지않은채 결말에 이르러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명징하게 재현된다. 타마코가 실로 오랜만에 듣게된 '자연소멸'이란 단어에서 방점은 당연히 '소멸'이 아니라 '자연'에 찍혀있다. 인위적 노력을 하지않아도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어떻게든 되어버리는, 그래서 타마코 역시 지금의 유예된 시간을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지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될거라는, 그녀의 '생활'이 아닌 '삶'을 향한 은근한 당부와 믿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90년대말과 2000년대초의 3부작과 2013년 사이의 간극은 비슷한 처지의 인물에 대한 자못 상이한 시각차를 드러낸다. 아무 능력도 없이 무작정 세상에 나가 바보짓을 하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청춘들을 마치 자기 얘기를 하듯 만들었던 이십대 중반의 영화감독은 이제 기성 세대의 일원이 되어 자신보다 어린 젊은이들을 심드렁한 척하는 태도로 관찰한다.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제는 상투적이다시피한 허다한 언급이 없는 대신 별다른 고저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점차 쌓여 삶이라는 서사를 써간다. 하지만 '생활'에 대한 핍진한 묘사의 묶음으로 '삶'이 환원되어도 괜찮은걸까. 기승전결의 서사를 포기하고 소소한 생활의 묘사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치유계 영화의 역설적인 서사 전략의 본령인걸까.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와 감상 그리고 비판과 상관없이 내게 생긴 의문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삶 life'을 '스타일'과 연관짓는 온갖 정보와 디테일과 슬로건과 운동과 유행이 난립하면서 이러한 이야기 전략은 우리에게도 익숙해져간다. '이것으로 좋지않은가'라는 상투적 대사로 대변될만한 라이프 스타일의 그 촘촘한 묘사 뒤로 사실 알고보면 '삶'에 대한 특정한 입장과 태도가 은밀히 표명되고있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에 대해 답하기위해서는 따로 글 한 편이 필요할듯 싶다. 아무튼 적어도 이 영화에서 야마시타의 그 심드렁한 척하기의 뒷편에는 개인의 심정과 상관없이 무연히 흘러가는 시간에 기댄 무심한 기대와 응원이 있다. 그러고보면 그저 제작 시기와 맞물린 우연일 뿐이라고했지만 호시노 겐의 주제곡 '계절'은 실로 탁월한 선곡이 아닐 수 없다.  


p.s 영화에는 포함되지않은 실제 스테이션 id 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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