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plays itself(2003)
올해 본 베스트 다큐. 상업영화의 아카이브만을 가지고 이렇게 면밀하고 상세한, 그것도 글이 아니라 영상으로 이 정도의 도시 에세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울을 소재로도 못 만들거 없지않나 싶었으나 두가지 조건을 충족해야하는데 첫째, 서울을 배경으로한 영상 아카이브가 꼼꼼히 구축되어 있어야하며, 둘째 그 방대한 아카이브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연출자가 있어야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다큐의 연출자처럼 해당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자기가 성장한 도시에 대한 애증을 갖고있는 토박이어야하고, 영상자료만이 아니라 서울의 도시개발사도 꿰고 있어야야하며 거기에 인문학 지식까지 갖추고 있어야한다. 과연 여기에 부합할 도시사가이자 영화사가가 있을지.


중국(1972)
문혁 이후 얼마 지나지않은 시점, 그러니까 전세계 공산주의자(그리고 그 적수들까지도)의 시선이 '중국의 붉은 별' 모택동을 향해있던(이를테면 알랭 바디우) 바로 그 시기 중국을 직접 취재했다는 의의가 있긴한데 좀 너무하다. 공산당의 승인 하에 입국은 했으나 그 어떤 접촉도 불허받았는지 평범한 거리의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어떤 관료나 예술가, 학자 등 다른 계급 계층으로부터도 단 한마디도 따지 못한채 정말 말 그대로 피상적으로 인민들과 변화중인 그 나라 곳곳의 풍경을 무연히 바라보기만 한다.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는 장면까지 찍은걸보면 당으로부터의 협조가 아예 없진 않았던듯하나 대화가 단 한마디도 없다보니 심하게 말하면 동물원 구경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 나레이션마저도 정보 소개 정도에 그치고 있고. 마지막 편에서 서커스 장면을 몇십분씩이나 길게 보여주는걸 보면 취재거리가 떨어진건지 낯선 인종과 민족의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며 흥분한건지 헷갈릴 정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자신의 현재 취재 방식이 서커스를 보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고도의 풍자일 수도 있고. 따라서 여기엔 창작자를 비판할 여건 자체가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않다고 할 수도 있을듯하다.


자백 confession(1970)
"현재에 의해 과거는 언제나 다시 평가된다"

"자아비판은 공산주의자의 최고 미덕이다."
이런 류의 대사가 계속되고 막판에 나오는 공산주의 국가의 사법재판 현장의 그로테스크하면서 코믹한 정경까지 더해서 전체적으로 되게 인상적이다.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배우들이 직접 저런 대사를 읊고 연기하는걸 보니까 섬뜩하면서도 웃기고 그렇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유물론에 기반한다고 해도 명분과 대의, 논리와 언어로 사람과 국가와 세상 전체를 이끌어가야하다보니 저런 식의 어쨌든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대사들이 넘쳐난다.


로만 폴란스키 memoir of his film (2010)

영화감독을 다룬 다큐는 정작 그 감독의 영화는 재미없을지언정 다 흥미로워서 찾아보게 되는데 본작은 감독의 예술론 같은 것보다 당연히 도피중인 자연인 로만 폴란스키의 해명 혹은 변명을 듣는데 초점이 있다. 자신의 연출론을 개인사와 자연스레 연결하는 그의 진술은 그래서 하나의 전략으로 간주하고 더 주의깊게 들어야한다.


altman

올해 본 또 한편의 영화감독 다큐. 작품 자체는 상대적으로 무개성적이지만 알트만의 필모그래피와 영화관에 대해 모나지않고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전개해간다. 담긴 정보량도 충실한 편이고.


버클리에서(2013)

미국 진보적 지성의 요람이자 최대 거점마저도 서서히 자본으로부터 포위되어가는 과정이 (좀 길긴하지만) 면밀히 기록되어 있다. 재밌는건 후반에 등록금 인하도 아니고 무려 '폐지'를 외치며 학생시위대가 도서관 안으로까지 진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데도 아닌 버클리라 그런건지 보안요원이나 도서관 행정직원이나 심지어 공부하던 학생들까지 다 그러려니하는 태도가 재밌었다. 일상화된 저항에는 만성화된 반응이 따라오게 마련인건지.


화씨 451(1966)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보는 고전 영화, 라고 하면 다소 과장이긴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언제봐도 감동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결말을 보기위해 다소 억지스럽고 무리한 중반부까지의 sf를 참고 보는 것 같다. 해방된 자유로운 공동체의 묘사


love streams (1984)
다큐 제외하고 극영화 중에는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본 영화. 엉뚱하지만 역시 남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편의 일본영화들이 떠올랐다. 물질적 궁핍이 아닌 사생활때문에 고생하는 중년의 남매. 여자는 끝까지 사랑을 믿고 남자는 그딴 건 믿지않지만 비밀을 밝히는데 애쓴다. "life is a series of suicides, divorces, promises broken, children smashed,whatever."


while we're young
다큐를 열심히 봐서인지 다큐 방법론의 한계를 노출하는 부분에 시선이 멈췄다. 365일 24시간 카메라를 늘 켜두지않는 이상 얻을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다큐를 볼 때 더러 의아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이 다 연출일 수 있다며 작위성을 고백하는 장면. 거짓말의 증거를 잡는 장면마저도 그걸 다시 카메라 앞에서 한번 더 진술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상황. 그러나 막판의 클라이맥스는 주인공의 의도와 달리 흐지부지 끝나고마는데 노아 바움백은 주인공 부부의 체념을 나이들어가는 현실과 연관짓는다. 나이가 들어간다는건 자기 뜻대로 안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유야무야 넘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라는걸까. 제이미는 자신을 힙스터라고 순순히 인정하지만 맨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건 그냥 지금 현재 이순간 그가 젊다는 현실인정일 뿐이다.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능숙히 다루는 갓난아기가 지금의 제이미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돼 있을지를 상상해보라는 그 마지막 장면을 보면 말이다. 트리비아 하나, 조시 친구인 아기 아빠가 자기 부인에게 찾아달라던(이게 더 멋있다면서) 윌코의 <yhf>의 종이 자켓을 나중에 조시가 그 집에 찾아갔을 때 손에 들고 있다. 


mistress america(2015)
2015년 마지막으로 본 영화. 노아 바움백에게서 우디 앨런을 연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내게 그의 최근 영화들은 가면 갈수록 위트 스틸먼의 판박이처럼 보인다. 거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후반부의 부자친구네 집 장면같은 걸 보면 스틸먼보다는 좀더 대놓고 코미디이긴 하지만.


에베레스트

이 영화를 본 바로 다음날 케이블에서 k2를 보는데 플롯 상에서는 아무래도 산악영화의 장르적 특성때문에 20년을 사이에 둔 두 편의 전개가 거의 대동소이한데 cg가 필수가 된 세상에서 만들어진 산악영화는 배우가 아무리 혼신의 연기를 해도 왠지 모르게 재연드라마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난다.


시카리오
드뇌 빌뇌브는 데뷔작부터 줄곧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 그것도 개인간의 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신체 가해 즉 고문과 그로부터 유발하는 유무형적 고통의 효과에 유독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작 프리즈너스는 관타나모등에서 있었던 포로학대와 고문에 대한 나름의 코멘트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도 미국 정부가 보면 뒷통수가 따끔할 불편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여주인공의 육체적 나약함이 연속으로 강조되는 것보다 중요한건 그녀가 임무수행과정에서 느끼는 육체가 아닌 심리적 허탈감이다. 그녀의 상관이 그녀에게 하는 명령은 일종의 사고실험인데 임명직이 아닌 선출직 공무원이 작전중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허락했고 뒤를 봐줄 것이라 약속했다는 전언이 그것이다. 즉 목적만 달성한다면 법과 원칙을 지키지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 이제 얼마든지 공권력을 남용해도 된다는 승인을 얻자 정작 공권력의 화신같은 경찰답지않게 주인공은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줄거리란 점점 더 비밀스런, '공권력'이라 통칭되는 국가 폭력이라는 '어둠의 핵심'으로 깊숙이 걸어들어가는 주인공의 심리적 방황의 여정이다. 갔다가 되돌아오는. 후반부에 급전회하는 줄거리도 그렇다면 약점일 수가 없는게 앞에 나온 그 상부로부터의 공권력 남용의 승인을 100% 이상 활용하는 베니치오 델토로야말로 바로 그 공권력의 진정한 화신으로서 신참은 몰랐던 전지전능한 국가폭력의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이건 멕시코건 한국이건 국가의 본질을 비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조직폭력배들이 아무리 길거리에 시체를 매달고 벽 뒤에 묻어도 그건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사적인 복수심은 그저 인물을 움직이게하기위한 동기이지 감독의 의도는 비교를 불허하는 폭력간의 대비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난 두편까지 합쳐 세편의 영화가 내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폭력적인 장면이 가끔 나온다고 <그을린 사랑>이 액션이나 스릴러가 아닌 것처럼 내게는 이 영화도 스릴러나 액션이 아니라 예전에는 곧잘 볼 수 있던 그런 드라마 장르로 보였다.  


모스트 바이올런트 이어
남자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구인데 계속 폼잡는게 넌센스처럼 보였다. 특히 업자들 모임에 참석해서 한마디 날리고 가는 장면 같은건 보면서 그 자리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계속 자기를 엿먹이는 사람이 저들중 한명인데 그 앞에서 저렇게 대응을 한다? 마진 콜도 그렇고 이 감독의 영화는 실제 있었던 일에 영감은 받는데 그걸 구체적인 사건의 배경로 삼기보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재현하는데 집중하는 과거 영화를 만든다. 즉 2008년의 금융위기가 배경인데 정작 영화의 이야기는 하나의 가설에 가깝고 도시 자체가 재정 파산에 이르고 덩달아 범죄율까지 급증했던 70년대 뉴욕을 반영해 가장 폭력적인 해라고 80년대를 규정하면서도 이번에도 이야기는 당시의 구체적인 실화 배경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이다. 


러브 앤 머시
폴 다노에 비하면 존 쿠잭은 따라하기처럼 보이고 진정한 이 영화의 승자는 단연 폴 지아마티겠고. 마이크 역을 한 배우도 좋았다. 천재가 천재가 되기위해서는 주위에 온통 방해꾼들이 있어야하는걸까. 살면서 진짜 천재를 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목격한 머리좋고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는 정작 그다지 개인사적 고난같은 걸 본 적이 없다보니 이렇게 옆에서 재능을 착취하려드는 주변인을 물리치고 성공한 천재의 이야기를 보면 이거야말로 클리셰 가득한 픽션의 세계 같아보인다. 브라이언 윌슨의 서사가 허위라는게 아니라 천재를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서사가 이럴 수 밖에 없는건가라는.


mad max fury road
마침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 읽고있던 책 때문에 떠났다가 되돌아온다는 서사에 대해 생각해봤다. 두번째 보니 맥스는 어려운 일에는 늘 먼저 앞장서고 희생한다. 거의 성인급.


wild city

홍콩인보다 훨씬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그러니까 <황해>에서 조선족들이 담당했던 문명 이전의 느낌을 가진 청부살인 조폭집단으로 대만인들이 그려진다는 야릇한 인종주의의 냄새가 풍기긴하지만 정작 이 역할을 위해 캐스팅된 장효전의 연기가 그나마 유일하게 이 영화를 볼만하게 한다. 의붓형제가 형제애를 지키고, 최종악당은 조폭이 아니라 상층계급인 변호사이며 공돈을 쫓지말라는 뻔한 교훈. 경찰과 조폭으로부터 모두 쫓긴다는 설정까지 그럴싸한데 대만 조폭들이 왜 끝까지 여자주인공을 물고 늘어지는지는 이해가 안된다. 이런 식으로라도 인물들에게 동기를 줘서 움직이게 만들려고 한 건 알겠으나 끝까지 무리수. 하이라이트 추격씬에서의 대륙 특유의 과장된 cg도 헛웃음만 나옴.

spl2
wild city에서 실망한 후라 그런지 훨씬 더 좋게 다가왔다. 임영동이 흘러간 과거의 감독이고 정보서가 현재 가장 앞서가는 홍콩의 필름메이커라는 점을 비교하게하는 두 편의 영화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플롯이라는 면에서는 역시 비현실적인 확률의 우연에 기대고 있고 초반 세 인물간의 사연이 각기 어떠하고 이들이 어떻게 엮이는지를 보여주는데 있어서는 지금의 판본이 최선이긴하겠지만 더 효율적인 편집도 가능은 했을거 같다. 그래도 어쨌건 제일 중요한건 액션연출인데 촬영과 편집이 다 잘 빠졌다. wild city처럼 cg떡칠도 없고. 그런데 마지막이 좀 생뚱맞을 뿐 아니라 약간의 혼동을 낳게하고 있어서 나로서는 모호했다.


송가황조(1997)
실제 역사를 노스탤지어에 도취된 나머지 멜로드라마화 해버릴 때 생겨나는 착각 혹은 착시에 대하여. 영화의 시선은 세 자매에 고루 나뉘어져있지않고 장만옥이 연기한 둘째만이 실제 주인공에 가까운데 세자매 중 유일하게 독립적 여성주체의 가능성을 그나마 볼 수 있다. 시안사변 묘사는 평이한 수준에 별다른 해석이 보이지않는데 이렇듯 실제 역사를 장대한 서사극으로 재현할 야심도, 그렇다고 아예 여성 주체를 조명하는 내밀한 드라마를 구축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성탄매괴
주인공의 심적고통에 대한 동일시와 감정이입은 나쁘지 않은데 무고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무책임한 법정영화. 그래서 올해 본 중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한 편이다. 이렇게 법에 무신경한 영화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건 그나라의 사법체계가 그만큼 견고하지 못함을 반증한다고 말하면 실례려나. 


그라운드의 이방인 (2014)

역사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무명인들의 발자취를 밟고서 앞으로 나간다.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인데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않고 진행되서 재밌었다.


스모킹/노스모킹(1993)
정작 보고나니 담배를 피느냐 마느냐가 영화를 실제로 보기 전에 글로만 접했던 것처럼 중요한 선택의 기로를 나눈건 아니었다. 알랭 레네는 순간의 선택으로 갈리는 인생의 기로를 조명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두 배우의 연기력을 극단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판을 벌여주려고했던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연극에 가까운데 연극과 다른건 배우들이 의상과 분장을 바꾸는 시간없이 즉각즉각 다른 캐릭터로 바꿔가며 나올 수 있는 영화의 장점을 십분발휘됐다는거. 만약 이걸 실제 연극으로 올린다면 지금 이 영화처럼은 단연 불가능하겠지.

style wars/ wild style
지금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초기 힙합 다큐멘터리 두편


straight time(1978)

<레니>에서의 연기를 보면서 깜짝 놀란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도 되게 강렬하다. 하지만 아직도 <레니>가 내게는 더스틴 호프먼 최고 연기.


녹색광선(1986)/ 비행사의 아내(1980)
마리 리비에르는 어쩜 그렇게 짜증나는 캐릭터 연기를 잘하는지. 진상 민폐 캐릭터의 최고봉이다. 당해낼 자가 없음.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되는건 아닌데 도저히 호감을 갖기 어렵고 공감되지않는 캐릭터.


they live
외계인과의 싸움이 체제 대 반체제, 그리고 계급 적대로 재현된다. 즉 외계인들은 경찰과 군대로 대표되는 공권력으로, 또 기업과 언론을 장악한 엘리트 권력으로, 따라서 외계인들과 대항하는 지구인들은 무엇보다 떠돌이이고 육체노동자라는 피지배계급으로 등장한다. 80년대 말 공화당 정권 시절에 리버럴한 할리웃 영화가 부릴 수 있는 재주의 전형이랄까.

murmur of the hearts
 이혼후 양락시의 복귀작. 본인이 출연만한 영화들과 달리 감독으로서의 장애가는 늘 일관된 취향을 견지하고 있고 본편도 예외는 아니다.


listen up philip
그럴거 같더라니 힙스터들이 열광하는 영화라고. 소설가가 두명이나 나오지만 그들이 정작 무슨 소설을 쓰거나 썼는지는 거의 언급되지않는데 그 반면에 아마도 샐린저를 모델로 했을 은둔중인 노작가가 과거에 출간한 소설들의 가짜 표지가 엔딩크레딧에 쭉 나오는데 80년대 느낌이 물씬하고 정말 그럴듯하다. 소설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내용보다는 표지에 더 신경쓰는, 이런게 힙한 '간지'인가보다.


망각의 삶/빅나이트/블루 인더 페이스

90년대 중반 비디오 가게에서 나름 인기작이었던 영화들인데 그 때는 못보고 이번에 다 처음 봤다. 블루인더페이스는 선댄스채널에서 해주는걸 봤다.


find me guilty(2006)/night falls on manhattan(1996)
가족이라는 의식, 사법 제도의 생리에 대한 해부. 왜 늘 경찰이 문제인가. 이토록 한결같은 필모그래피를 가진 미국의 주류감독이 또 있을지.


fingers(1978)
글로만 접했던 영화를 드디어 봤다. '두 세계'. 손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신체부위이지만 손이 아닌 손가락은  더 나아가 구체적 기예를 뜻한다. 그런데 이성이 정념을 누르고 정교한 기예를 연마해야하는 예술가를 동경하지만 사실은 일개 갱스터라는게 주인공의 자아가 파열하는 이유. 예술가를 갈망하는 갱스터라니. 성욕을 주체하지못하고 폭력성을 억누르지 못하며 그의 주변 세계인 뉴욕은 인종과 민족별로 강고하게 구획되어 있다.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유태인, 흑인들은 절대 어울리지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고 증오한다. 이렇듯 그의 내면과 외적 세계 둘 다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있는데 영화 초반 백인 여자 캐롤이 거대한 체구의 흑인 남성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느끼는 분노와 환멸은 그동안 나뉘어져있던 이 두 세계가 곧 분열하고 폭발할 것임을 암시한다. 원작을 보고나니 이 영화의 리메이크작인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예술가를 갈망하는 갱스터라는 설정과 부자관계 그리고 인종으로 구분된 세계라는 설정만 빌려왔음을 비교확인할 수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를 손에 들고 다니는 하비 키이텔의 모습은 지금보면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음.


군중낙원
보면서 왠지 모르게 연연풍진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후 샤오시엔이 제작과 편집에 일부 참여했고 엔드크레딧에는 존경의 메시지를 헌사한다. 


a borrowed life

<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 nj를 연기했던 오념진(nj는 이 이름의 영어 이니셜)의 연출작. 모 감독이 90년대 베스트로 극찬한 바 있었고 나는 천광싱의 책에서 처음 접하고서 찾아봤다. 피식민 경험이 한 개인의 내면을 어떻게 비틀게 되는지를 아주 리얼하게 보여준다.


자유의 언덕/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현재 한국 최고의 코미디 감독이기 때문에 극장에서 못본다. 혼자 낄낄대며 봐야 하기 때문에.   


lightning over water(1980)

하스미 시게히코에 따르면 50년대에 프로덕션 상의 어떤 한계를 돌파하려다가 '주저 앉아버린', 그렇게 정점을 지나 점차 잊혀져가던 왕년의 필름메이커의 후일담을 슬쩍 들여다 볼 수 있다. 당시 스탭이었던 짐 자무시의 얼굴이 살짝 스쳐간다. 

스패니시 프리즈너(1997)
주인공이 시작부터 끝까지 너무 멍청하게 굴어서 이입이 안됐다. 반전 스릴러는 아무래도 그 반전 때문에 억지나 무리수를 아예 피할 수야 없겠지만 데이빗 마멧도 보면 매작품 이런 약점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2014)

<좋은 친구들>이랑 너무 똑같아서 놀랐다는. 자기복제라고 하면 좀 심한 말이겠지만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수상을 하거나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같다.

석양의 무법자(1966)
너무 유명한데 그 유명세에 비해 너무 뒤늦게 보게되면 오히려 별다른 감흥을 잘 못 받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고전은 두번 이상 볼 때야 비로소 각인이 되는데 서부극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라 이 영화도 이번에 두번째 보는데 완전히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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