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 생각나는 영화인 <로얄 테넨바움>을 또 봤다. 이미 수차례 본 영화인지라 뒤늦은 즐거움보다 익숙함으로부터 느끼는 편안함이 더 크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새삼 새로이 보이는 점이 없지 않았다. 우선, 리치의 자살 시도 장면에서 실제로 자기 가슴에 칼을 꽂는 대담하고 흔치않은 자살 방식을 택했던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정말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사망 이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마약과 자살을 암시하는 needle in the hay가 삽입된건 다 그런 이유였을텐데도. 또, 테넨바움가의 두 여인, 마고와 에델린은 모두 여러 남성들로부터 동시에 구애를 받는다. 마고는 과거의 화려한 남성편력을 제외하고도 영화가 진행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세 명(랄레이, 리치, 일라이)의 남자들로부터, 그리고 에델린은 헨리와의 재혼을 앞두고 전남편인 로얄의 시기와 질투에 의한 ‘모략’의 대상이 된다. 
 
올해 나온 노아 바움백의 최신작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로얄 테넨바움>과 제법 닮아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상징적으로 거부되었던 자식들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후, 이제는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늙은 아버지를 향한 인정투쟁을 여전히 거듭한다는 기본 설정은 유사하다. 두 편 모두에 출연한 벤 스틸러는 <로얄 테넨바움>에서는 리치를 향한 아버지 로얄의 편애로 어릴 적부터 그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채즈를,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에서는 반대로 세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막내로서 아버지 해롤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형 누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아들 매튜를 연기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로얄 테넨바움>에서 일찍부터 경영 지식을 배워 로얄을 고소해 그의 재산을 빼앗았고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에서는 해롤드의 바람이었던 예술가 되기를 거부하고 가족 중 가장 고소득자인 회계사가 됨으로써 두 편 모두 이재에 밝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런데 노아 바움백이 <로얄 테넨바움> 다시쓰기처럼 보이는 영화를 이번에 처음 만든게 아니라는걸 모두가 안다. <오징어와 고래>는 웨스 앤더슨 특유의 캐리커처화된 캐릭터와 미장센의 형식주의등은 없지만 부모로부터 인정받기위한 자식의 인정투쟁이라는 모티프는 동일하다. 오프닝에서 이 가족의 관계와 영화의 갈등구조가 확실하게 설정되는데 아버지 버나드와 큰 아들 월트, 어머니 조앤과 작은 아들 프랭크가 각각 복식조를 이룬 테니스 경기는 버나드를 향한 월트의, 또 조앤을 향한 프랭크의 애착을 암시한다.  월트는 읽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주워섬기고 너무도 당당하게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를 자작곡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을 뽐내고 그걸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십대이고 그래서 한때 잘나갔던 소설가 아버지를 동경하는건 당연하다. 월트는 버나드를 따라 지식인 흉내를 내고, 어떤 때는 반대로 월트가 했던 것처럼 버나드가 조앤에게 f워드 욕을 한다. 한편 프랭크는 조앤을 더 좋아하고 그래서 억지로 둘의 닮은 점을 찾아내려고 할 정도지만 분노 조절을 못하고 말끝마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버나드 그대로다.
 
부부의 별거와 이혼과정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지만 갈등의 중심은 버나드와 조앤 부부가 아니라 조앤과 월트 모자에 맞추어져 있다. 초중반까지 영화는 마치 바움백의 실제 삶을 반영해 가족 해체의 책임을 조앤에게 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에 이르면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가족을 버린 이기적인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아니라 반대로 그렇게 내내 부정하려 했던 그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월트의 뒤늦은 깨달음을 묘사한다. 경력의 내리막에 들어선 버나드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조앤을 어쩌면 버나드보다 더 증오하는 것 같아 보였던 월트는 알고보면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 엄마와 함께 간 박물관에서 보았던 거대한 오징어와 고래 조형물의 기억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부가 인터뷰 영상을 보면 그 추억은 조앤을 연기한 로라 리니의 실제 추억이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갈등과 문제를 확인하고 또 해결하는 중산층 지식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결코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음을 바움백은 앤더슨 식의 형식주의나 양식화를 배제한 리얼함으로 보여준다.

 
그로부터 12년 뒤 만들어진 바움백의 최신작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오징어와 고래>의 비공식 속편의 면모를 갖고 있다. 86년 파크슬로프의 부자나 2017년의 맨하탄의 부녀나 주차할 장소를 찾지못해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빙빙 도는 와중에 나름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86년에 작은 아들에게 너는 예술에는 관심이 없냐고 물었던 소설가 아버지처럼 2017년에 조각가인 아버지도 자신과 달리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번에도) 작은 아들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86년이나 2017년에나 아버지는 이제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예술가이고, 부자 모두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은퇴한거나 마찬가지라해도 아버지에겐 공인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 비례하는 공명심과 허영심이 여전하고 자식들은 그러한 아버지가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예술에 재능을 보이는 '천재' 자녀와 아버지가 나온다는 점에서 여전히 <로얄 테넨바움>의 그림자가 보이지만 그나마 해피엔딩에 가까웠던 테넨바움 가의 삼남매와 달리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의 삼남매는 영화가 끝날 때 까지도 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와 고래>와 반대로 여기서는 아버지 해롤드에게 있는데 '매튜'라 명명한 자신의 작품이 정말로 작은 아들과 관련이 있는건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애착을 보이는듯 하다가도 여전히 이기적일 뿐인 모습에 큰 아들 대니로 하여금 대놓고 분노를 토해내게 한다. 이 장면에서 대니의 찰나의 독백은 해롤드를 향한 양가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웨스 앤더슨은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생활>의 각본을 같이 썼던 노아 바움백이 이듬해 연출한 <오징어와 고래>를 제작했다. 촬영감독은 두 편 모두 로버트 여먼. 지금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중반 두사람은 이렇듯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었다(앤더슨이 아니었다면 그 이전까지 연거푸 실패를 거듭한 바움백이 다시 감독직을 맡기란 어려웠을지 모른다). 웨스 앤더슨이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자식들(주로 아들들)의 좌충우돌을 그리는데 한동안 끈질기게 매달리다가 이후에는 이제 그 대체재로서 바람직한 유사 부자관계의 성립(<문라이즈 킹덤>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최근 몇 년 집중했다면, 노아 바움백은 예민한 예술가는 어떻게 사생활을 무너뜨리지않고 양쪽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꾸준히 천착해왔다. <마이어로위츠 스토리> 속 대니의 독백은 더 이상 부모나 주변의 지인이 아닌 바움백 자신을 향한 반문일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해체)되는가. 이제는 조금씩 그 방향이 서로 상이하지만 두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