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댑테이션>을 다시 봤다. 공교롭게도 읽고 있던 책은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낯이 두꺼운걸까 아니면 그만큼 하고 싶은 말이 절실한걸까. 오랜만에 다시 본 <어댑테이션>은 한 편의 포스트모던 문학작품 같았다.


두 명의 작가(찰리와 수전), 두 명의 카우프먼(찰리와 도널드), <난초도둑>의 각색을 위해 애쓰는 찰리의 분투기와 그 저자 수전의 존 라로쉬 취재기, <어댑테이션>의 주인공 찰리 카우프먼과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실존하는 진짜 찰리 카우프먼, 마찬가지로 <난초도둑>을 쓴 실제 수전 올린과 영화 속 캐릭터 수전 올린까지 영화는 온통 쌍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 내용으로 추측해보면 영화사로부터 의뢰받은 각색 작업의 진전이 여의치 않자 찰리 카우프먼은 아예 이러한 자신의 상황 자체를 소재로 이 시나리오를 써낸듯하다. 한 작가가 두 번은 써먹지 못할 트릭이랄까. 각색 작업이란게 본디 원전으로부터 긴장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를 재구성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도 물론 하나의 각색임은 분명하다. 단지 텍스트만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의 현실까지 원전으로 삼아 거기에 상상력을 보탰다는 것이 다를 뿐. 그렇게 탄생한 찰리의 쌍둥이 도널드는 상업성이나 도덕, 윤리같은 현실상의 제약을 초월한 채 온갖 상상과 망상과 욕망을 거리낌없이 풀어내는, 이 세상 모든 작가들의 잠재적 희망사항을 실현해 낸, 말그대로 찰리의 무의식이자 이 세상 모든 작가들의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쌍둥이 동생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나중에는 급기야 수전 올린, 로버트 맥키같은 다른 실존 인물까지 집어넣어 본인처럼 픽션화시켜버린다. 상호텍스트성, 미덥지 못한 화자, 저자의 실종, 열린 결말, 넘치는 알레고리와 그로 인해 모호해지는 텍스트 등등 포스트모던 문학이란게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고민은 곧 선택이다. <난초도둑>의 각색이 아니라 <각색>이라는 제목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할리웃 스튜디오와 일하는 실제 찰리 카우프먼은 도널드와는 달리 결국 현실과 타협한다. 어떻게? 상징으로서의 도널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쌍으로 나뉜 세계가 어찌어찌해서 하나가 되(남)는 것으로 갈등이 해결된다. 각각 병렬진행되던 찰리(와 도널드)와 수전의 이야기는 이 둘 혹은 셋이 만나면서 종국을 향해가고 최종적으로 두 명의 카우프먼 중 하나가, 그 반대편에서는 수전의 파트너인 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찰리가 아니라 도널드가 죽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실 법칙의 승리, 현실 법칙으로의 투항? 혹은 자신의 작가적 야망이라는 이드를 억누르고 자본의 요구라는 초자아를 승인한 에고의 자축의 표현일까. 그런데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어디까지를 극 중 찰리에게 투사하려 했을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연기하는 찰리는 실제의 그와 얼마나 같고 어떻게 다를까.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그는 승리한건 아닐까. 있지도 않은 동생을 만들어내고 또 죽일 때 그는 작가로서의 전능을 모두 누린게 아닐까. 따라서 해피엔딩이라는 형식을, 그러니까 주류영화를 지탱하는 관습적 형식으로서의 해피엔딩을 흉내내는듯한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건 작가의 타협과 야심 모두다.


한가지, 그렇다면 각본가 말고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역할은 뭐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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