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의 <진실>(원제, Death and the Maiden, 1994)은 개봉 일이년쯤 뒤 tv에서 더빙판을 봤다. 하지만 그 시절 tv로 본 대부분의 영화가 그랬듯 끝까지 못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결말을 모르고 있었다. 그즈음 본 영화 대다수가 이 모양인걸보면 어쩌면 다 못본게 아니라 그저 기억력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싶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는 내 둔한 기억력만 상기시키는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끝까지 온전히 보니 이십여년의 세월을 두고 동일한 영화에 대해 전혀 상반된, 심지어 서로 상충하는 감상을 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텍스트 자체가 변할 리는 없고 이십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온 나 밖에 없으니 시간이 주는 위압감은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어렴풋하나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비록 끝까지 본 건 아니지만 주인공 폴리나에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 보니 폴리나는 아무리봐도 신뢰하기 힘든, 변호사인 그녀의 남편 제랄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못미더운 증인'이었다.
 
직전에 봤던 폴란스키의 2017년작 <실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대강의 향후 줄거리 전개와 결말이 거의 예측이 됐고 실제로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스릴러를 주로 연출하는 감독에게는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관객과의 게임에서 자기 패를 미리 보여주는거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장르적으로 거의 합의되다시피한 관습적 전개가 때로는 그 자체로 관객과 벌이는 또 하나의 게임이 될 수도 있으나 적어도 지금 말하는 이 두 편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본편을 보는 동안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다. 상대를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라 확신하고 그를 몰아붙여 반강제적으로 원하던 자백을 듣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손 안에 얻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가해자라고 의심받는) 당사자 말고는 결국 아무도 알 수 없는, 각자의 진실들만 남는 그런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 불가지가 넘쳐나던 90년대스러운 서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80년대 발생한 실제 살인사건을 2000년대 초에 영화로 재현한 한국의 감독도 아직 90년대의 영향 하에 놓여있던걸까).
 
나를 심란하게 한 것도 여기였다.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메세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에 내재한 맹목성, 즉 정의구현이라는 대의를 향한 강한 의지로 인해 수단의 적합성과 윤리성을 불문에 부치는 과격함을 비판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진실 추구 과정을 되려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어쩌면 무용할 수 있다는 항변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직업인으로서의 영화감독이 아니라 자연인 폴란스키의 반평생을 쫓아다니고 있는 추문에 대한 개인의 항변 혹은 반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신들이 과연 옳다고, 진실을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영리하게도 이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화에서는 국가 폭력이라는 과거사 규명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민주주의 사법 체제를 대변하는 남편 제랄도를 몹시도 무력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는 차에 플랫 타이어를 넣고 다닐 정도로 현실적인 일에는 무능하거나 무신경할 뿐더러 법률가의 회의적 성향 때문에 결단을 미루느라 목숨을 위협받기에 이른다. 범인을 단죄하기까지 민주주의 법체계가 요구하는 절차적 형식의 지난함이 그다지 효용이 높지 않음을 강변하는 대목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사법 제도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진실 규명과 사적 복수를 동시에 감행하는 폴리나에도 선뜻 관객이 동의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딜레마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과연 진실은 밝혀질 수 있는걸까. 폴란스키는 자신의 개인적 치부를 변호하느라 정치적으로 반동이 되어가는걸까. 집단적 공모로 인해 박해받는 소수자의 대명사격인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그의 최신작이 그래서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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