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상의 '확산'이나 '염상' 혹은 '리벤지 포르노'나 개인 정보 폭로 같은 일들은, '자기 표출 거리'가 없는데 그 도구와 '억압'은 존재하기 때문에 상습화된다. 말할 것이 없는데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억압화된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자기 표출'은 지극히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될 수 밖에 없다. '감동'이나 '혐오' 즉 '눈물난다'나 '혐XX'(이 'XX'에는 '중국' 요즘이라면 심지어 '오키나와'도 들어가곤한다) 등과 같이 너무나도 척수반사적인 감정 토로가 파블로프의 개만큼이나 인터넷상에 언어화되어 있다. '감정'의 표출에 논거나 묘사 따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중에서, 78p

어쩌면 모든 갈등은 저 간단한 이유에서 기인하는 지도.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말을 하라고 판('플랫폼')은 깔려 있는 상황. 그래서 저마다 뭐라도 한마디 보태려 안달이 나있는, 그래서 불특정한 타인의 말과 새된 목소리를 싫어도 계속 듣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결과적으로 판을 깔아준 이들(이른바 '플랫폼 사업자')의 배가 불려지는 동안 그 안에서는 글과 말이 끝도 없이 소모되는 난맥상.

대니얼 오펜하이머의 <Exit Right>(2015)은 앨저 히스를 고발한 장본인인 위태커 챔버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미국인 우파(로의) 전향자의 삶을 전향에 초점을 두어 재구성한 책이다. 이들은 일본처럼 국가 권력에 의한 물리적 폭력 및 정신적 압박을 받은 끝에 공식적인 전향 선언이나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이 아닌 자서전을 포함한 문필 활동, 연설, 강연 등을 통해 기꺼이 스스로 전향 이유를 밝혔다. 살아온 시대 배경도, 삶의 이력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망 직전에 비로소 고백한 어머니를 통해 뒤늦게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된 히친스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 중 셋이 유대인이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이도 셋인데 이는 저자 오펜하이머에게는 모두 해당하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아이비 리그 출신 미국 유대인과 전향 간의 모종의 관계성을 규명한 책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른 다섯 명과 거의 어떠한 교집합도 없는 로널드 레이건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떤 기준에 의해 이들 여섯 명을 골랐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끝까지 읽어봐야겠다.

 

조지 패커는 미국 우파 전향자들의 전향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소비에트로 대변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자행한 숙청과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은 계급에 의한 위계와 권위주의 통치 등의 모순과 부조리를 목격했기 때문에/ 지하 활동에 불가피한 격리, 비밀 유지, 상습적 거짓말 등의 일탈 행위 등을 견디지 못해서/ 미국 리버럴리즘의 주요 원칙이자 대의인 다원주의 및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유주의를 혐오하게 되고 그 대안으로 보수주의를 선택하게돼서/ 정세 판단의 결과 더 이상 공산주의에 기대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해도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신념에 강하게 헌신했을 정도로 목적과 대의를 향한 집착이 좌파 사상의 대체제를 찾은 끝에 종교 정확히는 기독교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도 전향하게 되는 경우/ 보수주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유주의를 경멸하는 개인적 성향이 자연스레 좋았던 옛 시절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회귀하게 되어서(특히 이렇게 공산주의는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도 마뜩치않아 우파 보수주의를 택했다는 이들에게서는 더러 '내가 변한게 아니라 자유주의가 변했을 뿐이고, 나는 그대로이고 바뀐건 민주당이다'라는 궤변도 보게된다)/ 30년대 대공황을 경험한 끝에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깨닫고서는 체제 전복보다는 체제 안에서 정부의 통치 공학에 힘을 보태기로 하거나/ 순수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마르크스 변증법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이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전히 사적인 이해 득실을 따라서 즉 돈, 명성, 사회적 지위 등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전향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공산주의 및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그에 헌신했던 자신의 삶도 같이 실패했다는 비관적 판단이 선행한다.

 

그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떨까. 이 책의 주제인 전향 이유에 초점을 맞춰 거칠게 본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차 대전을 지지하고 전시하 영국민을 격려했던 조지 오웰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스스로를 21세기판 오웰이라 여기며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을 옹호했고,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자신과 정치적 신념을 공유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목격한 끝에 그간 침묵했던 좌파의 오류와 실패를 지적하고 그들의 위선을 직접 벗겨내기로 한다. 연기자 노조 임원까지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은 생계를 위해 선택한, 본업과는 제법 거리가 먼 홍보 목적의 기업 강연 여행을 하는 동안 점차 노동자보다 사용자와 자본가의 논리를 내면화는 한편, <내셔널 리뷰> 같은 보수지와 위태커 챔버스의 자서전을 탐독한 끝에 우파로 돌아선 다음 자신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활용해 우파 이데올로그로 거듭나더니 마침내 백악관까지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코멘터리> 편집장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물질적 보상의 달콤함을 맛 본 노먼 포도레츠는 자신이 동경하던 노먼 메일러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하고, 남들은 쉽게 밖으로 발설하지 않는 인종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았던 에세이의 성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활용해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가 좌파 동료들로부터 집단적 거부를 당하고는 종교적 계시를 접한다. 이들 여섯 명 중 가장 앞선 시대를 살았던 대표적인 미국의 우파 전향자인 챔버스와 제임스 버넘은 공통적으로 스탈린의 대숙청과 독소조약 체결로부터 충격을 받고는 스탈린 정권 비판 수준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로부터의 절연을 실행한다.

 

이론과 실천의 격차를 (경험이 아닌) 목격하고 실망한 나머지 미숙했던 실천이나 이론의 적용을 탓하는게 아니라 아예 신념 자체를 철회하는 과정은 충분히 있을법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한 쪽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데 실패한 소비에트 '정권'만을 비판한다면 그 반대 쪽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를 거부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향한 철저한 자아비판까지 행한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최우등생이었고 학자로서도 전망이 밝았던 제임스 버넘의 전향은 주목할만하다. 그의 저서 <관리자 혁명>(1941)은 이른 시점에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그 자체로 높은 지적 성취이자 동시에 정교한 전향 선언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춘 사람답게 버넘에게는 늘 체제와 목적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중 가장 합당한 선택지처럼 보였다. 그런만큼 그의 전향은 이 책의 등장 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드라마틱했는데, 트로츠키와 직접 주고받은 논전은 나중에는 조야한 수준까지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이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불과 몇 해 전 <퇴각하는 지식인들>이라는 글로 우파 전향자들을 비판했던 이가 그로부터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비판하던 바로 그 대상이 됐다는 것은 일견 조소를 당할만한 일이기는 하나, 정작 트로츠키 분파는 그의 전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가 절실하지 않음을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부유한 성장 배경,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 그리고 혁명 세력 이외에도 자신과 세상을 연결할 다른 수많은 연결고리가 그에겐 남아있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는 절실한 기대와 달리 인텔리겐치아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지적인 작업의 일환이자 그 자체가 오롯한 지적 구조물이었기에 처음 접할 때 만큼이나 떨어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본 것이다. 버넘의 옛 동지들이 놀란건 그가 전향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정도가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의 내용을 하나하나 공개적으로 부정해나갔다.

 

젊었을 적부터 늘 현대 사회의 위기를 근심해온 위태커 챔버스는 공산주의가 결코 그 위기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계시를 어느 날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없이는 그가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조우한 '신'이야말로 또다른 대의의 연장임을, 마르크스주의의 대체물임을 그는 과연 몰랐을까. 대개의 우파 전향자들이 공유하는 종교(정확히는 기독교)에의 헌신이 대의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보이는 공통점이라는 점에서 챔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이 의미하는 바를 날카롭게 간파한 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종교세계 자체로의 퇴폐는 거의 항상 현세적 개인의 현세적 죄를 인간 일반의 원죄로 해소해버린다는 관념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 이 현세적 개인 책임의 해소라는 관련."

 

이렇게 본다면 우파 전향자의 종교적 헌신은 죄책감의 우회적 고백이자 현실 도피 그리고 책임을 거부하는 비윤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매우 크고 편안한 울타리를 벗어나 정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크고 편안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건 선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반쯤 정해진 필연에 더 가까운게 아닐까. 과거의 공산주의자가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는건 정말 방향을 바꾼걸까. 아니면 훨씬 멀리있는 동일한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경유지를 살짝 바꿨을뿐인걸까.

 

노먼 포도레츠는 늘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은 주장을 한다면 두려워 않고 밀어붙이는 강한 배짱도 있었다. 흑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솔직히 밝혀 우호적인 반응을 받았던 것처럼 좌파의 위선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랬다. "명쾌함, 책무, 종교, 권위, 전통적 성별,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다시 명쾌함", "진리는 간단하다. 심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좌파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거부하고 유명 인사가 되고 싶다고 선언한 셈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좌파로 규정했던 데이빗 호로위츠는 자신의 지인들이 같은 좌파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을 결정적인 전향의 동기로 삼는다. 흑인 시민권 운동을 이끌고 관련인들을 변호했던 저명한 여성 변호사가 자신의 클라이언트이자 연인으로부터 살해됐을 때 그는 좌파 내부에 여전히 팽배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비판하기로 한다. 게다가 이 사건은 그보다 먼저 있었던, 휴이 뉴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의심되는 여성 활동가 살인 사건의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호로위츠는 정확히 말해 사람에 실망했지 신념 자체에 실망한건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챔버스와 버넘의 또다른 반복이라 할만하다.

 

히친스의 결정적 전향 동기는 보편적 정의감(거기에 더해지는 일말의 공명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 개전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허구성이 훗날 드러나면서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이미 그의 신체가 조금씩 스러지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가 당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생전에 공개적으로 후회나 유감을 표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언젠가 훗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판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회의나 두려움 같은건 처음부터 그의 고려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용 정보만으로 결정한 자신의 스탠스에 대한 확신과 명분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을 자처하는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을테니.

 

전향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사상의 전환이라 규정한 츠루미 슌스케의 정의를 엄격하고 좁게 적용한다면 이 여섯 명을 '전향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한자 조합어 '전향'(転向)이 우익이 득세하던 1930년대 일본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최초 고안된 개념임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한 기표만 전유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의해 '강제'된 '전환'이 아니라면 물어야 할 질문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 전환이 진정 자발적인지의 여부이다. 국가 내지는 공권력이라는 강고한 타자로부터 독립된 주체적 선택인가라는 소극적인 의미의 자발성을 묻는게 아니라, 전향자의 결단이 어떠한 '내재적'인 논리로부터 파생했는지를 세세하게 따져보는, 즉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반성했는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우선 이들이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는가 아니면 더 심층적 수준에서 기존의 신념 자체를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에 우선하지 않는다면, 즉 이론이 현실과 유리된 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현실을 추상화한 개념으로서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론과 신념의 부정이 마냥 비판당하기만은 어렵다. 이론이 현실로부터 추출된다는걸 인정한다면, 현실이 기대(가정)를 배반했을 때 그 파생물인 이론까지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와 신념의 부정이 오로지 이론적 층위에서만 행해진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에 개입한 무수한 우연과 의도치 않은 요소는 별개로 치더라도 결국 전향은 인간이 내리는 결단이고 거기엔 대상을 향한 온갖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영화 제작 조건을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면서 결국 제작 자체를 사보타주했던 노조를 보면서 느낀 레이건의 감정,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자아비판이나 반성이 없는 급진주의 운동가들을 보면서 호로위츠가 느낀 감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최대한 균형잡힌 시선으로 보려고 하더라도 레이건은 자신의 물질적 기반이 풍족해짐에 따라 우선 정치적 스탠스를 바꾸고 난 뒤에 그걸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향의 이유를 사후적으로 찾은 것처럼 보인다. 히친스는 생전에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몇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우파라고 호명한다해도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의 그 발언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은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는 우회적인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전향은 자발적이기도 하고 '자발적'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들 중 현실의 정세 변환과 상관없이 이론에 진정 충실했던 이는 누구인가.

 

적절한 분노와 적당한 명분, 씁쓸한 자기연민과 부족했던 인내, 지나친 확신과 넘쳤던 자기애는 경험을 투사하고 상상을 확증하며 자신만의 전향 경로를 형성해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나 정합적인 논리가 타인에게도 그럴까. 앨저 히스를 고발하기 전, 챔버스는 히스에게 자신과 함께 전향하자고 권했으나 그로부터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그저 정신적 자위행위일 뿐이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배제한 온전히 스스로의 판단 하에 얻어낸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들은 얼마나 고려했을까. 인식의 지평 사이에 놓인 결코 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간극을 가리켜 세계관과 사상과 이데올로기라 명명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간극을 뛰어넘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체계적으로 축조된 것처럼 보이는 사상이라는 단단한 건축물 사이사이에 그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하며 물컹물컹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건축물의 경도가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간극을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진다. 오롯이 논리와 이론으로만 사상이 축조된다면 전향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있는 단단하지 못한 그 무엇, 그러니까 이 여섯 명의 전향자들이 드러낸 분노, 공감, 비애 같은 감정과 위신 같은 (세속적인), 한마디로 (매우) 인간(적 특)성까지도 사상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염두에 둘 때 전향 문제를 사유하는 다른 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간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후기에서 밝히듯 저자는 이 여섯 명의 전향 '원인'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이는 출간 후 있을지모를 필화 등을 피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저자 또한 집필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이 점점 더 어렵다고 느낀 때문은 아닐까. 이들 여섯 명은 현실에 패배한 강직한 이론가가 아닌 회의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구현에 실패한 이론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인간을 더 회의하는.

 

6인의 미국인 우파 전향자와 1930년대 일본의 전향자들 간의 결정적 차이도 바로 이 회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있다. 권력의 강제에 의해 대중에게 자신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과 생각을 공개 표명한다는 전향성명서 형식에 전제된 작위성은 어쩔 수 없이 성명서를 하나의 텍스트로 대하게 한다. 텍스트의 행간을 파악하고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 안과 밖을 모두 살피려는 노력이 요구되는데,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쓰고 발표한 글이나 책, 연설에서는 챔버스 등이 경험한 (이론과 인간을 포함한) 회의의 '속내' 내지 '느낌'이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는 반면 전향성명서에는 부재한다. 한마디로, 전향성명서에는 전향의 절반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인한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나머지 절반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자살한 소설가라는 한 줄의 사실과 한 편의 글로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를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지루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유명인들의 졸업 축사라는 관례가 있는 미국에서 월리스는 훗날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모 대학의 졸업 축사로 유명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인생의 ‘디폴트 세팅’을 거부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삶을 향한 애착을 전했다. 그랬던 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를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삶이라는 투쟁에서 투항해버린 사람으로 (적어도 내게는) 기억하게 했다.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 셀러브리티의 정의라면 월리스는 일찌감치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국의 문학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면서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얻고 커리어를 시작한 다분히 미국적인 셀러브리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는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월리스의 사후 십 년만에 뒤늦게 출간된, 데이비드 립스키가 진행한 인터뷰의 주제이자 핵심도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에 맞춰져 있다. 립스키는 월리스의 1996년 북투어의 마지막 며칠간을 동행하면서 행한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이 유명세에 대해 묻는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유명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하는지, 유명세를 어떻게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질문에 월리스는 -완벽한 녹취록이라기보다는 편집이 가해졌음을 감안해야하지만- 짜증을 낸다거나 무시하거나 하지않고 진지하게 응답한다. 유명세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며 소설을 매우 열심히 쓰고있을 뿐이라는 패턴으로 일관하는 답변에는 그때까지 그의 이력과 삶의 태도를 유추하게 하는 면이 있다.

 

어렸을 때는 테니스로 그리고 대학에서는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계에서 촉망받던 이가 학문이 아닌 픽션 쓰기로 전향을 하고 이후 비장르문학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미디어로부터 전국적인 수준의 주목을 받는 등 그의 삶은 북투어를 돌던 삼십대 중반에 이미 화려한 이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늘 의식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 그 결과, 오만함이란 자신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정의까지 갖게 했다. 스스로를 너무 의식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애써왔고 그래서 이제는 독자나 비평가의 시선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치열하고 성실한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월리스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소설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명제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썼다는 그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게 한다.

 

인터뷰어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한 편의 에세이처럼 편집되는 미국 잡지 저널리즘의 일반적인 인터뷰 기사 스타일과는 달리 녹취록처럼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가운데 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어의 코멘트를 부분적으로 삽입해 가감없이 월리스가 한 말을 최대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 편집은 독자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월리스는 자신이 어떤 문학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좋아했던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같은 쇄말적인 것부터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처음 만나는 인터뷰어를 상대로 비교적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는건 물론이고 숙식까지 같이 하면서 가까워진 립스키를 향해 월리스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도, 약물 못지않은 수준의 tv 중독도 모두 선뜻 인정한다. 그의 작품들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과 지성을 갖춘 백인 중상류층에게 주로 어필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일반적인 잡지 인터뷰에 할당된 지면을 훌쩍 뛰어넘는, 그래서 차라리 긴 대화에 가까운 분량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분주하게 대화 소재를 바꿔 나가는데 그토록 방대한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관해서도 월리스는 나름 사려깊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해보자면 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미국에서 산다는 것,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그것이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깊게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의 삶의 방식이며 거기서 헤어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숨기거나 꾸미려는 인터뷰이와 어떻게든 그러한 위장과 화장을 벗겨내려는 인터뷰어 간의 긴장감이야말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이라면 여기서 두 사람은 내밀한 친구간의 대화와 격식을 차린 공식적 인터뷰 사이를 수시로 오고간다. 월리스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편집되어 게재될까 걱정하며 빼달라고 부탁하는 등 때로 불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솔직한 편이고, 지금은 잡지 기자이지만 본인 역시 소설을 출간한 적 있는 립스키는 월리스의 유명세를 부러워하는 또 한 명의 살리에르처럼 보이기도 하는 한편 월리스를 향한 우호적인 시선과 예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밀도 높은 인터뷰가 정작 당시에는 최종적으로 잡지에 실리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심도있고 진중한 인터뷰 내용이 대중 음악 잡지라는 매체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실무적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이 인터뷰 역시도 월리스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교롭게도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이면서도 월리스는 문자화 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측면에 대해 이미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다. <끈이론>에 실린 어느 테니스 선수의 자서전 서평은 왜 스포츠 선수들이 쓴 책들은 하나같이 지루한지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하는데,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체득한 프로 운동 선수들의 기술과 실력은 그 느낌이나 정수를 언어화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틀에 박힌 뻔한 클리셰로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 현장 답사기와 감독론이 한데 섞여있는 길고 긴 글에서 린치를 초현실주의자가 아닌 표현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린치 영화의 불가지성을 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자화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삶의 비의는 삶을 긍정하라는 메시지와는 상반된 결과로 끝난 월리스의 삶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향한 강한 열망을 줄곧 내비쳤지만 그가 안고 있던 내적 고통에 타인이 주목하기란 어려웠다. 누구나 다면적인 삶의 양태를 갖고 있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단일하고 일관된 그 무엇으로만 이해되거나 설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삶이라는 다면체이자 다중 우주를 인터뷰, 즉 언어를 이용해 그 대상을 특정한 캐릭터를 가진 단일 주체로 설정하고 그 아래에서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꿰어내야하는 문학 형식, 특히나 대화를 진행하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인칭 에세이 형식의 인터뷰 기사가 감당하기에 월리스는 처음부터 무리였던게 아닐까. 동일한 인터뷰더라도 현재 같은 단행본 형식이 아닌 잡지 지면이라는 제한된 분량 안에서는 지금과는 꽤나 다른 인상으로 재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천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척 하는) 천재 내지는 역시나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남다른 성격, 습관, 취향 등을 가진 비범한 이의 삶을 구경하는 관찰기같은. 거기에 장안의 화제작으로 그의 신작이 회자되던 인터뷰 시점까지 겹쳐짐으로써 대중 매체에서 숱하게 소비되는 천재 셀러브리티의 또다른 표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훗날 참조하게될 사료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료가 그러하듯 면밀한 비판적 독해를 요구하는 섬세한 텍스트다. 인터뷰이의 발화, 그리고 그것을 편집한 인터뷰어의 코멘트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기에 의심하고 상상하고 따져보고 행간을 미루어 짐작해봐야한다. 사후에 출간된 유명 소설가와의 생전 인터뷰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는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도 신빙성을 계속 의심받는 후자의 책과 달리 녹취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책 모두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에게 단순한 취재 대상 그 이상이며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한다. 창작의 비결,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사적 비밀, 당대 사회 이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인터뷰어 자신의 인정 욕구 충족(또는 존재감 증명) 등등.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신비화된 예술가라는 광휘로 인해 답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최초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해독해야 할 암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 이런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읽어본 결과, 많은 시간이 투입된 만큼 특정한 몇 개의 서사로 꿰어질 정도로 월리스에 대한 일관된 인상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인터뷰 시점과 출간 시점까지 사이의 시간의 공백으로 인해 상반된 인상을 전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연상시키는 무언가의 등장을 예상하며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대목은 그의 비범한 지성을 재차 확인케하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에서 한순간도 헤어나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부분은 인터뷰 당시보다는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더 분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도널드 바셀미를 읽고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중력의 무지개>를 읽고 힘을 얻을만큼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매혹된 문학 청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십대 시절 <반지의 제왕>을 다섯 번 읽었고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와 tv 드라마에 중독되다시피한 대중적 취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월리스라는 암호를 풀기위한 단서는 도처에 있는 듯하지만 쉽게 조합되지 않으며 접근 경로는 군데군데 보이는 듯하지만 번번이 차단된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장편 한 권도 제대로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온 인터뷰집은 수사를 동반한 상찬부터 루머에 기반한 비판까지 작가를 향한 선입견만 강화하는데 그칠 수 있다(이를테면 본문 뒤에 자리한 옮긴이의 글). 어차피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립스키의 언어로 재현된 월리스는 타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예민하고 성마른 예술가보다는 비대한 자아를 가까스로 통제하고서는 그 복잡한 내면을 투사해 반영된 세상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만큼의(그러나 너무나 풍성하고 흘러넘치는) 언어로 재현하려 분투하는 지식인에 가까워보인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보다 더 많(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해야한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월리스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소설가로서 언어의 한계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광대하다고 느꼈던 것이 그가 겪은 고뇌의 일부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 월리스는 몰라도 립스키는 그 한계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또한 그의 한계만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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