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World of Henry Orient(1964)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센트럴 파크와 브라운스톤 건물들을 포함한 크리스마스 시즌의 60년대 뉴욕 풍경을 현재의 디지털로는 불가능한 색감으로 볼 수 있다. 계급도 가정 환경도 상이한 두 소녀가 친구가 되어 센트럴 파크에서 상상 놀이를 즐기다 의도치 않은 스토커가 되어 온 도시를 휘저으며 돌아다닌다. 그러다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접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온가족이 즐기는', 즉 어른과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즐길 거리가 있는 진정한 가족 영화. 60년대 노스탤지어와 함께.

 

2.Blast of Silence(1961)

살인을 의뢰받은 킬러는 타겟을 미행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다큐멘터리적 접근과 스릴러물의 긴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의외의 재미를 주는 영화. 저예산 영화는 기발한 아이디어 자체만 남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b무비 답게 비록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장편 영화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다.

 

3. Black Christmas(1974)

온가족이 모이는 연휴 시즌에는 일부러라도 이런 영화를 봐 줄 필요가 있다. 최초의 슬래셔 무비라는 영화사적 의의와는 별도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보면 더 재밌는 장르물.

연휴에 채널을 돌리다 어떤 영화를 후반부쯤부터 보게 됐다. 그 중 한 대목. 유배중인 정약용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형 약전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책과 먹을 멀리하라는 당부를 전한다. 자연히 글을 쓰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각혈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던 그를 보며 그의 유배 생활을 돕던 아낙은 "제발 글 좀 그만쓰라"고 사정을 하지만 약전은 기어이 책상 머리 앞에서 붓을 손에 쥔 채 죽는다. 얼마나 전기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맞을 것이다. 직접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록하는 일에 그토록 열중했던 이유는 뭘까. 그간 갈망해온 세상을 개벽하는 일에 관한 것도, 유배당한 처지에 울분을 호소하는 것도, 평생동안 궁구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것도 아닌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데 그처럼 진을 쏟은 이유는 뭐였을까. 아마도 그렇게 써낸 것이 쓰지 않은 저 모든 것들의 대체재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뭔가 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글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러나 결국 글쓰기는 죽음이다. 오컬트한 미신도, 살인의 도구라는 장르물의 설정 놀음도 아니다. 말그대로 글쓰기는 곧 죽음이다.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군 중 하나가 기자와 소설가, 시인같은 글쟁이라는게 만국공통임은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쓰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을 쓰다가, 아니 글만 쓰다가 붓을 손에 쥐고 죽기도 한다. 그걸 저주라 볼지 숙명이라 볼지는 관점의 차이일테지만.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마다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 루소는 생피에르섬의 피난처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상념을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뫼리케 또한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게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자기 소설을 고치고 또 고쳤다. 켈러는 문학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치기 위해 쉰여섯의 나이에 공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 발저는 스스로를 이른바 금치산자로 만듦으로서써만 비로소 글쓰기의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그는 발저가 문학을 완전히 등졌음에도 여전히 조끼 호주머니 속에 몽당연필 한 개와 별도로 잘라 낸 메모지들을 늘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자주 적어넣곤 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발저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언제나 부리나케 메모장을 주머니에 다시 감췄다고 베를레는 덧붙였다.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답이 없는 일 같아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는 그런 일인 것 같다. 글쓰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근거란 아무것도 없으며, 따르는 보상 또한 적다.

 
『전원에 머문 날들』(2021)에서 제발트는 불운한 재주로서의 글쓰기 운명을 짊어진 작가들이 세속을 피해 자연으로, 전원으로 파고들었던 한 시절을 다루고 있다. 실재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그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처럼 그 자신 또한 염세적인 한 명의 작가로서 공감하는, 무작정 뭐라도 써야만하는 그 글쓰기 욕망에 대해 이번에도 제발트는 예의 긴 혼잣말하듯 행갈이 없이 글을 밀고 나간다. 보상이 전무한, 시간이 흘러도 타인에게 겨우 몇 줄 읽힐까 말까한, 공감이나 이해는 커녕 타박이나 안 받으면 다행인 그러한 글쓰기를 말하는 작가는 또 있다.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 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조앤 디디온, <노트 쓰기: 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중에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2021) 189pp

 
자기 자신을 닮은, 그래서 피하려고 해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 글쓰기.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이런 글쓰기에 어떤 실제적 효용이 있는건 아닐까. 그래서 쓸 수 밖에 없는게 아닐까. 그럼 그 효용은 뭘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나는 글쓰기라는 매우 거대한 의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런 의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무감이 당신에게 고지되고 알려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 그렇게 하듯이 작은 분량이라도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큰 불안이나 큰 긴장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에 우리가 자신에게 부과한 이 작은 분량을 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일종의 사면을 행하게 됩니다. 이 사면은 하루의 행복에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행복한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달려 있으며 약간은 다른 어떤 것, 곧 실존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고, 매우 수수께끼 같은 일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다지도 허무하고 허구적이며 나르시시즘적이고 자신을 향해 침잠하는 이 몸짓, 다만 아침나절을 할애해 탁자에 앉아 빈 종이 몇 장을 채우는 이 몸짓은 어떻게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대한 축복이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직업, 허기, 욕망, 사랑, 성, 노동과 같은 사물의 실재가 아침나절 동안 또는 하루 중 어느 때인가 글쓰기를 했다고 해서, 변형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자,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어떤 경우든, 내게는 이런 일이야말로 내가 글쓰기의 의무를 느끼게 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

이것은 당신이 보다시피 즐거움이란 없는 의무지만, 결국 의무로부터의 도피가 당신을 더 큰 불안에 빠뜨리고 법의 위반이 당신을 더 큰 불안정과 방황에 빠뜨릴 때,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사실은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요? ... 이러한 의무에 복종한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적이며, 당신을 짓누르며 사방에서 당신을 압도하는 이 법에 복종한다는 것, 이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의 즐거움입니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는 물론 내게 글쓰기가 매우 피곤하고 어려우며, 또 불안을 몰고 오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나는 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나는 무한히 어긋나고, 실패합니다.

미셸 푸코, 『상당한 위험』(2021) 중에서

올해 eidf에서 본 이 다큐는 1995년 옴진리교 테러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교단명을 바꾼채 지금도 여전히 운영중인 동일 단체의 간부, 즉 감독에게는 가해자 편에 속한 한 남자와의 짧은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감독 사카하라 아쓰시는 사건 발생 후 삼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테러의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하고 당시에도 이미 신자였던 아라키 히로시는 자신들이 일으킨 사건의 크기와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신앙'을 놓지 못한 채 지금도 집단 생활을 하며 단체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의 여행은 그래서 선뜻 가능할까 싶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시작된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관계라기보다는 얼핏보면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카하라가 상대를 비난하거나 힐난하는 식으로 대하지 않고 어떻게든 우호적 관계 속에서 대화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제로 비슷한 나이대에 같은 지역 출신에 같은 대학(이는 확실치 않다)을 다녔던 공통점도 있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서로 공유하는 기억의 접점을 확인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재 처한 각자의 상반된 입장과 삶의 이력으로 인해 역설적 비극성을 재현한다.

 

경계심을 풀게 하는 첫인상을 가진 감독 사카하라는 시종 농담을 섞어가며 아라키와의 거리감을 좁혀가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대인 접근 방식은 동시에 이 다큐 전체의 영리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 사이에 사카하라는 아라키에게 진짜 묻고 싶었던 회심의 질문들을 던진다. 사건 발생 이후 지금껏 계속 품어왔을 질문들, 이를테면 당신들이 벌인 테러의 궁극적 동기는 무엇인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아직껏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져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고 여러 ptsd에 가정까지 파탄나버린 나는 그렇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대화 전략이 영리한 이유는 작품의 전체 플롯 자체가 이 대화 방식과 유사해서, 처음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하는 여행이라는 설정에서 연상되는 일말의 (말초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호객'에 성공하지만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내용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맨마지막에 이르면 갈등과 긴장이 최정점에 달한 지점에서 바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의 근원은 결국 감독 사카하라가 아닌 인터뷰이 아라키에게 있다.

 

사카하라가 타인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하는 인상이라면 길고 마른 체형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관하는 아라키 또한 관객의 선입견을 유발한다. 하지만 사카하라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영민한 이가 아라키였음을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또렷하게 보여준다. 아라키는 사카하라의 회심의 질문에 번번이 피해가면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화법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사실상 대답을 거부한다. 진실 규명과 우호적인 여론 형성이라는 서로간의 상충하는 목표가 확실한 저널리스트와 인터뷰 대상의 관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허위성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재닛 맬컴의 주장(<기자와 살인자>, 2009)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가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아라키는 빛바랜 필통 이야기를 꺼낸다. 요지인즉슨 어릴 때 친구들이 갖고 있던 필통이 너무 부러워서 자신도 구입을 했는데 정작 그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이전에는 반짝반짝 빛나던 필통이 평범해보였다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아사하라 쇼코를 향한 양가감정의 우회적인 고백으로 읽힐만한 대목이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속내를 토로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유추해내야하는 말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명문대 대학원까지 다녔던 아라키의 이지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즉 그의 이런 말들은 유의하며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슷한 얘기는 또 있다. 그는 자신이 옴진리교에 몸담게된 동기 중 하나로 동생이 골육종 진단을 받았던 일을 든다. 다행히 다른 병원에서 또다른 진단을 받고 치료도 잘 되었으나 그 이후부터 정작 자신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의 것보다도 더 잘 짜여진 대본처럼 들린다. 테러 사건으로부터 자그만치 25년의 세월이 지나는동안 아라키는 직접적인 사법적 책임을 면피할 목적은 아니더라도 옴진리교에 투신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무수한 자문자답을 해봤을 것이다. 의도적이건 그렇지않건, 타인의 책임 추궁에 대비하기 위함이건 아니면 자기자신에 납득하기 위함이건 간에 여러 가지 답변을, 아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어봤을테고 동생의 투병기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를 지었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러니까 세뇌나 강압이 아니라 다른 일반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존적 고뇌를 종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의에 의해 선택했다는 방어적 변론을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 에피소드 내지는 전략이라는 힐난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보려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저 불운했거나 우연일 뿐이라는 답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게 마련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진실이라 굳게 믿기도 한다. 합리적인, 그러니까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나를 포함한 타인에게 언어로 진술하고 제시함으로써 설득시킬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설명이 '이야기'이고 서사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자문하고 자성하는 과정에서 완성된 '이야기'라고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대개는 뒤늦게, 때를 놓친 뒤에 찾아오게 마련이므로. 설사 그것이 타인에게 전혀 이해받을 수 없는 나만의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시간은 진실의 감가상각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같은 증언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빙성을 더욱 의심받으며 그 가치를 잃어간다.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폄하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진실 규명이 더딜 때 인간은 나름의 대응과 적응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건 흔한 상대주의적 주장들, 그러니까 저마다의 진실'들'이 난립한다는 데 있지 않다. 갈등하는건 진실'들'이 아니라 진실의 크기를 또는 그 실체를 감당할 수 없어서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아예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하거나 혹은 못하는,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이다.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을 때 관련된 개인들 각자가 겪는 내적 혼란이란게 어떤 것인지, 이 다큐의 두 인물이 보여주고 있는건 바로 이것이다.

서로 교감을 하는듯 보이다가도 다시금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거리가 멀어지는 패턴의 반복은 극영화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패턴의 절정은 단연 본편 전체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다. 기자들을 미리 불러놓고서 두 사람은 최초 테러가 발생했던 도쿄의 지하철 역을 직접 찾는다. 거기서 아라키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노회한 정치인의 전형적인 화법, 즉 유감은 표명하지만 사죄는 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초반부에 사카하라에게 했던, 교주가 지금껏 사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서는 어떤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말을 기자들 앞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준비해둔 차를 타고 빠져나와 다시 둘만 남은 상황에서 사카하라가 입을 연다. 아까 뭔가 다른 말이 나올까하고 기대를 했다고.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를 저버린채 아라키는 이번엔 아예 입을 닫는다. 종교나 여타 신념을 배제한 자연인으로서 갖는 심정과 투철한 종교인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듯한 그의 모습은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거나 또는 모종의 어떤 이유로 인해 진실 규명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의 신념에 헌신했던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이 두렵지만 동시에 죄의식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두 양태의 불안정한 공존은 아라키의 야윈 얼굴과 시종일관 불안한 눈빛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여전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제는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듯한 사카하라의 난처한 표정.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조문을 보여주는 오프닝을 통해 비판적 의도를 표명했지만 정작 본편에서 주로 보이는건 법과 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보다는(아사하라의 사형과 관련된 뉴스를 빼면 이 작품에서는 국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개인들의 절절함이었다. 아라키는 입으로만 사과를 말하는 위선자일 수도 있지만 죄의식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신경증 환자일 수도 있다. 사카하라 또한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눈 앞에서 보며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일 수도 있지만(마지막까지 보면 아라키를 포함한 '알레프'에 대한 사카하라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 이전에 아직껏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채 맞이한 엔딩.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세상과 불화하는 가운데 자기자신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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