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반복되는 장면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드 설링의 오리지널 환상특급 첫번째 시즌에서 본 이야기다. 주인공은 일과 가족에 소홀한 채 책만 읽어온 전형적인 책벌레인데 어느 날 일하는 은행의 지하 금고에 들어간 사이 핵전쟁이 발발해 지구가 초토화되어 뜻하지 않게 지구 최후의 사나이가 된다. 황폐화된 세상이지만 다행히도 도서관만은 그대로다. 혼자만 살아남았으니 식량도 거의 무한에 가깝게 남아있다. 더 이상 상사의 명령이나 아내의 등쌀로 인한 방해없이 마음놓고 느긋하게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뻐하며 드디어 첫번째 책을 막 집어들고 읽으려는 바로 그 순간, 하필이면 단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안경이 부서지고 만다. 남자는 이제 그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고 만다. 그렇게 좋아하는 수 만 권의 책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단 한 자도 읽을 수 없는 무간지옥같은 현실 말이다(하지만 도서관도 그대로인 마당에 안경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리가 있을까).

 

칼퇴근하고 돌아와 발 닦고 침대에 누워 책만 읽는 하급공무원의 삶을 꿈꿨다는 어느 작가의 글에 나는 반만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나인투파이브마저도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직위나 직함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읽다가 사라지는 무명의 삶, 내가 바라는 삶의 양상은 대략 이런 거였다. 읽는 것에 비하면 쓰는 일은 품만 많이 들고 얻는건 적다. 하면 할수록 글쓰기는 더 어색해지기만 한다. 쓰는 일에 중독된 서광증 환자도 있다지만 이런 이들에겐 어쨌거나 자기표현의 욕구 또는 공명심을 작게나마 마음 한 켠에 쟁여두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읽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사람은 뭘 원하는걸까. 지적이고 싶은 욕망이 원초적 욕구에 버금가는 정도인걸까. 지적 컴플렉스에 유독 심하게 시달리는걸까. 아니면 최신 물리학 이론이건 오늘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메뉴건간에 그저 빡빡하게 채워진 문자를 읽는 것에 중독된걸까.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반면 책장의 책은 야금야금 늘어가고 실제 읽는 양에 비해 읽고 싶은 책의 수는 거짓말 조금 보태 기하급수적으로, 이제는 여생을 전부 가져다 바쳐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버렸다. 이 욕망과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저 가련한 책벌레 남자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안경을 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만한 시력을 유지해야할 뿐 아니라 지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함양에도 힘써야 할텐데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기서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 밖에 없다. 그게 불가능함을 알기에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고 순응을 해야한다. 평생 비타협적으로 살겠다는 다짐같은 걸 하진 않았지만 체력을 기르고 시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유지한다는건 지금껏 거의 해보지 않은걸 시도하는, 즉 습관을, 생활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무척 어렵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살짝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다. 

 

독서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있고 관객인 나는 결국 그 시간에 투항하게 되어있는 어차피 질 싸움인 반면 독서는 어쨌든 내가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장하는, 하지만 그만큼 힘겨운 싸움이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드는 단위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면 그건 내 뇌세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고가 아닌가하고 매번 섬찟하다. 근육이 무뎌지고 달리기가 느려지고 손 움직임이 어줍게되는 것보다 페이지를 바라보는 동안 눈이 따끔따끔하고 저절로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흘러나오고 글자가 이중으로 보이고 졸음이 오고 두통이 느껴지면서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 문장과는 전혀 하등 상관없는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현실이 더 끔찍하다. 나만 그럴까 아니면 독서가들이 다 이럴까. 재미나 즐거움 같은 사적 유희가 아닌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로 고도의 추상적인 문서를 수없이 읽어대야하는 고급 두뇌 노동자들, 그러니까 '전문적인 독자'라고 할 학자나 연구자, 법률가 같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노화에 따른 지적 능력의 감퇴를, 정확히는 독해력의 감퇴를 걱정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기자나 작가를 포함한 문필가들의 평균수명이 짧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읽는 사람이 아닌 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쓰기보다 읽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그럼 어떨까. 읽기가 쓰기보다 어쩌면 더 고차원의 두뇌 노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굳이 나누어 본다면 많이 읽는 사람들의 건강이 많이 쓰는 사람보다 더 나쁘지 않을까싶다. 쓰는건 어쨌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책임지는 일이기에 딱히 어려울 게 없다. 내가 쓰는 글이 나한테 이해불능이거나 어려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읽는 일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궁의 연속이고 미로고 퍼즐이며 수학이다. 오문이나 잘못된 편집 때문인 경우는 그저 화가 나는 것에 그치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 안되는 난삽한 문장,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에 대한 가치 판단, 아무런 감흥을 주지않는 정보의 산문적 나열, 또는 생전 처음 접해보는 종류의 지식과 고도의 추상적 개념으로만 채워진 논리의 흐름 등을 마주칠 때면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안이 마르면서 갈증이 나고 머릿속도 마음도 쩍쩍 갈라진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뭔가를 마시고 그에 맞춰 다른 주전부리를 찾는 일도, 화장실을 찾는 횟수도 늘어난다. 읽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말을 달리 돌릴 수가 없다. 철저히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읽는 독서가 어느 순간 처리해야 할 일감처럼 되버린 것이다. 후딱 해치워놓고 다음으로 넘어가야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렇게 버겁다면 결국 읽기를 그만둬야 하는게 아닐까. 책을 집어던지고 영화를 보든 요리를 하든 아니면 밖에 나가 몸을 혹사시키든.  

 

하지만 이런다고해서 독서 생활이 힘들어지는 상황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신체적 변화와 심리적 장애라고 해야할까. 안타까운건 독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는 것아다. 아직 손에서 완전히 책을 놓지는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삶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어쨌든 불가능하다. 다만 요즘의 내 독서생활은 넓이에서는 협소해지고 깊이에서는 얕아졌으며 어딘가 심드렁해진 면이 있다. 취향이 분명해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더 직접적인 사정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굳이 본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겉표지나 제목, 저자명만으로도 다 알 것만 같은 책들이 있다. <민주와 애국>이라는 거창한 제목에서 벌써 이 책이 다루는 소재나 주제의 크기가 짐작되는데 거기에 결정적으로 번역본상 10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이 저자가 품은 야심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이것도 초고에서 절반쯤을 덜어낸거라고 한다). 정작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이런 야심찬 책을 쓰게된 연구 동기를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후기에서 털어놓듯이 말하고 있지만 바로 그 뒤에 소개하는 일화는 그와 모순을 빚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그 야심부터 밝혀야한다.

 

그 야심이란 바로 내셔널리즘의 복권이다.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패전 직후부터 이십년간, 그러니까 저자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이른바 '제1의 전후(1945~1955)'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전후 지식인들이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을 지향했고 실제 어느 정도의 성과도 있었으나 그 뒤 '제2의 전후(1955~1965)'시기가 되자 이른바 '55년 체제' 성립과 60년 안보 투쟁을 거치는동안 앞의 성취가 형해화되고 그 결과로서 민주와 애국이 분리된 영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1의 전후에 '(단일)민족' '국가' '애국'을 외친 것은 오히려 진보, 좌파, 호헌 세력들이었으나 제2의 전후부터 이러한 언표들은 우파에게 탈취되었고 거기에 20세기 중반 이후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공통된 기조와 맞물리면서 그 영향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나 저자가 보기에 내셔널리즘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할 이유는 없으며 되려 지금이야말로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결론을 위해 구체적으로 패전 이후부터 90년대까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이라는 언설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즉 각각의 정치적 당파들, 작가, 비평가, 학자, 사상가 등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 언표를 제각기 재구성했는지, 다시 말해 동일한 언표를 저마다 또 각 시대마다 어떻게 재해석해왔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 본서의 내용이다. 따라서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의 분량이 이토록 두툼해진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얼핏 참신하지도 않고, 일반적인 통념과도 거리가 있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더 철저한 논증과 논거가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저명한 일본의 문인, 사상가, 학자, 정치인 등을 모두 저마다의 내셔널리즘을 위해 분투한 이들로 재해석함으로써 '내셔널리즘' 또는 '애국'이라는 동일한 기표의 내용물이 계속 다시 쓰이고 다시 읽혀왔음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는 저자 자신이 지향하는 "정부나 영토와는 무관한,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 "을 주창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의 위상을 복원하고 다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의 종합을, 즉 민주와 애국을 동시에 성취해야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문학가, 공산당 정치인, 반 천황제 운동, 국민적 역사학 운동, 60년 안보투쟁, 그리고 베헤렌 같은 시민 운동까지 이들을 전부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또 저자 역시 한 명의 사회학자로서 강하게 기대고 있는 세대론적 관점의 투영이 어느 정도의 현실 정합성을 갖는지 등은 더 심도있는 비판과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전자에 대해서만 부연해보자면 '애국'과 '내셔널리즘'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 번갈아 씀으로써 밖으로 표출된 심정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그 심정마저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전전의 공산주의자들이, 60년대의 베헤렌 운동가들이, 그리고 전공투 세대들이 내셔널리즘을 복원하거나 재구성한다고 생각했을까. '구국'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애국'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국가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자의적으로 운동가들의 심정을 회수하거나 환원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됐다. 국가보다는 노동 계급을, 애국심보다는 보편적 인권을 염두에 두거나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원했을 그들의 굳은 결의와 의도, 즉 '심정'을 함부로 참칭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외에도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징병을 피한데 따른 죄책감에서 해방되고자 마침내 모든 공적인 것에의 거부를 표출했다든지, 패전시 요시모토보다 더 어린 세대였던 에토 준이 유년기의 뒤엉킨 욕망과 그로 인해 결핍된 아이덴티티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 해결책으로서 보수주의를 택했다는 주장 등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 심리(학)적인 '문예비평'에 가까워 이 또한 더 면밀한 검증이 요구된다.

 

전후 60년에 가까운 시간을 검토한 끝에(원서는 2002년 출간) 저자는 실제로는 대중을 멸시했으나 이론적으로는 주체적인 개인들이 자립하면서 연대하는 상태를 꿈꿨던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장에 가장 공감하는듯하다. 그러면서 "당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의 표현 수단으로서 민족과 국가라는 말이 채용된 상황"이라고 내셔널리즘을 정의함으로써 국가와 분리하려는 의도도 다시금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던 패전 직후 지식인들에 크게 공감하는 가운데 국가와는 구분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내셔널리즘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실로 담대한 기획일 수도 있고, 동시에 비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자유주의 지식인이 한번쯤 품어볼 수 있는 최대치이자 한계일 수도 있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태도를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국가를 전면 거부까지 하지는 않으며, 개인의 주체성에 최종적 기대를 품고서 그러한 주체적 개인들의 집합으로써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를 이상형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저자의 내셔널리즘 정의에는 '무엇을' 느끼는 '어떤' 심정의 표현수단인지가 빠져있다. 아마 그 답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속과 번영에 대한 기대와 불안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공동체에 '국가'가 들어설 자리가 과연 없을까. 그 내용이 지속적으로 바뀌어 읽혀왔다고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근대의 발명품으로 보는 일반적 관점을 염두에 둘 때 오구마의 이러한 제언은 제법 곤란한 이론적 궁지에 다다른다. 저마다의 온갖 특수성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개인, 민족, 인종들이 하나의 동일한 운명 공동체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 상태 혹은 그렇게 만든 관념을 nation이라고 지칭할 때 국민과 민족은 포함되지만 국가는 탈락되는 그런 내셔널리즘이 가능할까. 서로 변별되는 개념인 '국민'과 '민족'과 '국가'를 'nation'이 전부 포괄함으로 인해 자어 문화권에서 'nation state'의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혼란을 돌이켜보면 이는 단순히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니다. 쉽사리 원심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혼종물로서의 nation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국가를 향한 기대와 우려의 공존은 자유주의의 일반적 태도이자 자연적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구마의 지향점 또한 자유주의자가 처한(혹은 처할 수 밖에 없는) 궁지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치열한 모색의 흔적을 보여준다. 즉 네이션 없는 내셔널리즘이란 제국주의 시대에 직접 행위자로 뛰어들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끝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민으로서 가질 법한, 국가를 향한 애증이 낳은 비판적인 이론적 시도일 수 있다. 모든 것을 내셔널리즘의 프레임 안으로 투영시키면서도 최종적으로 국가를 거부하는 국가주의. 그러나 저자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국가없는 내셔널리즘 혹은 국가에 반하는 내셔널리즘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목도하는 중은 아닐까. 애국을 참칭하면서 거리를 점거한 채 소수자를 향한 폭력과 무질서를 선동하는 극우 결사단체와 친일 혹은 친미라는 의심을 받는 정당이 한일 양국에서 모두 등장하는 현실을 보자면 말이다. 분파주의, 배외주의, 그리고 폭력에의 경도된 이들이 애국을 주장하는 이런 현상은 국가가 혹은 국가만이 행할 수 있는 보편주의와 총체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때 '다시 쓰이는' 내셔널리즘의 실체가 무엇인지, 즉 분파주의를 보편주의로 바꿔치기하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을 사적으로 전유한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정당화의 구실이자 구호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부상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개념을 심정으로 읽으려는 오구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네이션에 괄호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인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부정의를 돌아보며 자발적이 아닌 외부로부터 강요된 집산주의를 경계하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실정적 사실로서의 네이션은 그 자체로 어쨌든 준거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서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네이션은 주체적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매개하는 통로로서, 집단의식(감정)이 형성되는 토대이자 중요 참조점으로서 기능한다. 심정이나 감정, 정동이 외재하는 실정적 사실에 영향을 분명히 미치고 때로는 파열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는건 말할 것도 없다. 스스로 애국을 참칭하는 우파 그리고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의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좌파간 대립도 그렇게 저마다의 심정만을 앞세운 결과가 아닐까. '내셔널리즘'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심정으로 읽음으로써 오구마는 공동체의 심리를 투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으려 애쓰지만 지금 필요한건 심정을 더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한 추상화되고 구조화된 개념과 이론일지 모른다. 에토 준이 청소년이 빠질법한 관념 과잉에 빠졌고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가, 가족, 정치, 이념 등 모든 공적인 것을 거부했다는 저자 자신의 분석을 따른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내셔널리즘 언설의 해석에 앞서 어쩌면 네이션에 대한 재평가 내지는 재해석에서부터 출발해야할런지도 모른다.  

 

패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뒤 징병을 당하고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이나 복지 혜택으로부터도 제외되었던 어느 재일조선인의 소송을 도왔던 자신의 부친 이야기를 후기에 길게 풀어놓으면서도 재차 이 일화가 자신의 연구 동기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그럴리 없음은 오구마 본인이 잘 알 것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른 개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신의 민족(성), 국적, 그리고 정치적 신념에까지 반할 수도 있을 전쟁에 참전하도록 만드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강제력, 그러니까 각양각색의 개인을 그들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로 통합할 수 있는 국가의 총체화 기능 -저자가 애국이라고 지칭하는- 이야말로 이 연구의 실질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익의 국가주의와 변별되면서 동시에 좌익과도 다른 내셔널리즘을 제안하는 것은 오구마의 다른 저서 제목처럼 '사회를 바꾸려면'(2014)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집단이나 집합체, 즉 그 책에서 계속 강조하는 '데모'를 가능케하는 바로 그 집단의 탄생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원서 출간 이후이긴 하지만 2011년 오큐파이 운동이나 이듬해 재스민 혁명 같은 대중 운동이 일본에서도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국가총동원이라는 거국일치 상황을 경험한 바 있는 일본에서 자발적인 연대를 기반으로한 리버럴한 대중 운동의 발생을 위한 조건의 탐구가 본서의 실질적인 연구 동기였던게 아닐까.   

 

은 '국민'이더라도 성별, 계급, 연령, 종교, 지역, 이념, 취향 등에 의해 쉼없이 미세한 분할을 경험하면서 파편화되는 탓에 공통된 지향과 목표를 공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자발적 연대를 통한 집합 의식을 생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심정으로서의 '애국'이 아니라 어쩌면 더 많은 자유와 더 실질적인 평등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애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성취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심정'이지 그 자체를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주'와 '애국'이 아니라 '민주'와 '평등'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민주'와 '애국'을 종합하더라도 그러기위해 국가를 애써 기각할 필요는 많지 않아보인다. 국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유의 출발이자 비판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이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만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합의한 '제도'와 '법'이라는 이름의 약속이 요구되고 강제력이 수반되어야한다. 저자가 '애국'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왜 그토록 국가를 저어하고 밀어내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국가가 하거나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적절한 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따른다면, 내셔널리즘이 아닌 네이션에 지금보다 더 넉넉한 자리를 내어줬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일은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엉뚱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훨씬 나중에, 그러니까 자기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볼 수있게 되었을 때, 그는 우연 말고는 정말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처음에는 단지 사건과 결과가 있었을 뿐이다. 그 일이 다르게 끝이 났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로 미리 정해진 것이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야기 그 자체이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

"여보세요?"

전화선 저편에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한순간 퀸은 전화를 건 사람이 그냥 끊어버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주 먼 데서 들리는 듯한, 그가 들어보았던 어떤 목소리와도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기계적이면서도 감정이 잔뜩 배어 있었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음정도 마찬가지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

전화벨 소리가 들렸을 때, 무시할까 하고도 생각했다. 스파게티는 다 삶기기 직전이었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런던 교향악단을 그야말로 음악적인 절정으로 끌어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가스 불을 줄이고 거실에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새로운 일거리 때문에 지인이 건 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10분, 시간을 줬으면 해." 여자가 불쑥 말했다.

나는 사람 목소리를 상당히 잘 기억한다고 자신하는 편이다. 그건 알지 못하는 소리였다. "실례지만 어디 거신 전화인가요?"하고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당신에게 걸었지. 10분만이라도 좋으니까 시간을 줘. 그럼 서로를 잘 알게 될거야."하고 여자는 말했다. 낮고 부드럽고, 특징 없는 목소리다.



이 일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잘못 걸려온 전화. 잘못 전화한 사람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은 잘못 전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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