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반복되는 장면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드 설링의 오리지널 환상특급 첫번째 시즌에서 본 이야기다. 주인공은 일과 가족에 소홀한 채 책만 읽어온 전형적인 책벌레인데 어느 날 일하는 은행의 지하 금고에 들어간 사이 핵전쟁이 발발해 지구가 초토화되어 뜻하지 않게 지구 최후의 사나이가 된다. 황폐화된 세상이지만 다행히도 도서관만은 그대로다. 혼자만 살아남았으니 식량도 거의 무한에 가깝게 남아있다. 더 이상 상사의 명령이나 아내의 등쌀로 인한 방해없이 마음놓고 느긋하게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뻐하며 드디어 첫번째 책을 막 집어들고 읽으려는 바로 그 순간, 하필이면 단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안경이 부서지고 만다. 남자는 이제 그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고 만다. 그렇게 좋아하는 수 만 권의 책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단 한 자도 읽을 수 없는 무간지옥같은 현실 말이다(하지만 도서관도 그대로인 마당에 안경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리가 있을까).
칼퇴근하고 돌아와 발 닦고 침대에 누워 책만 읽는 하급공무원의 삶을 꿈꿨다는 어느 작가의 글에 나는 반만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나인투파이브마저도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직위나 직함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읽다가 사라지는 무명의 삶, 내가 바라는 삶의 양상은 대략 이런 거였다. 읽는 것에 비하면 쓰는 일은 품만 많이 들고 얻는건 적다. 하면 할수록 글쓰기는 더 어색해지기만 한다. 쓰는 일에 중독된 서광증 환자도 있다지만 이런 이들에겐 어쨌거나 자기표현의 욕구 또는 공명심을 작게나마 마음 한 켠에 쟁여두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읽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사람은 뭘 원하는걸까. 지적이고 싶은 욕망이 원초적 욕구에 버금가는 정도인걸까. 지적 컴플렉스에 유독 심하게 시달리는걸까. 아니면 최신 물리학 이론이건 오늘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메뉴건간에 그저 빡빡하게 채워진 문자를 읽는 것에 중독된걸까.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반면 책장의 책은 야금야금 늘어가고 실제 읽는 양에 비해 읽고 싶은 책의 수는 거짓말 조금 보태 기하급수적으로, 이제는 여생을 전부 가져다 바쳐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버렸다. 이 욕망과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저 가련한 책벌레 남자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안경을 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만한 시력을 유지해야할 뿐 아니라 지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함양에도 힘써야 할텐데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기서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 밖에 없다. 그게 불가능함을 알기에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고 순응을 해야한다. 평생 비타협적으로 살겠다는 다짐같은 걸 하진 않았지만 체력을 기르고 시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유지한다는건 지금껏 거의 해보지 않은걸 시도하는, 즉 습관을, 생활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무척 어렵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살짝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다.
독서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있고 관객인 나는 결국 그 시간에 투항하게 되어있는 어차피 질 싸움인 반면 독서는 어쨌든 내가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장하는, 하지만 그만큼 힘겨운 싸움이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드는 단위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면 그건 내 뇌세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고가 아닌가하고 매번 섬찟하다. 근육이 무뎌지고 달리기가 느려지고 손 움직임이 어줍게되는 것보다 페이지를 바라보는 동안 눈이 따끔따끔하고 저절로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흘러나오고 글자가 이중으로 보이고 졸음이 오고 두통이 느껴지면서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 문장과는 전혀 하등 상관없는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현실이 더 끔찍하다. 나만 그럴까 아니면 독서가들이 다 이럴까. 재미나 즐거움 같은 사적 유희가 아닌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로 고도의 추상적인 문서를 수없이 읽어대야하는 고급 두뇌 노동자들, 그러니까 '전문적인 독자'라고 할 학자나 연구자, 법률가 같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노화에 따른 지적 능력의 감퇴를, 정확히는 독해력의 감퇴를 걱정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기자나 작가를 포함한 문필가들의 평균수명이 짧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읽는 사람이 아닌 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쓰기보다 읽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그럼 어떨까. 읽기가 쓰기보다 어쩌면 더 고차원의 두뇌 노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굳이 나누어 본다면 많이 읽는 사람들의 건강이 많이 쓰는 사람보다 더 나쁘지 않을까싶다. 쓰는건 어쨌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책임지는 일이기에 딱히 어려울 게 없다. 내가 쓰는 글이 나한테 이해불능이거나 어려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읽는 일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궁의 연속이고 미로고 퍼즐이며 수학이다. 오문이나 잘못된 편집 때문인 경우는 그저 화가 나는 것에 그치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 안되는 난삽한 문장,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에 대한 가치 판단, 아무런 감흥을 주지않는 정보의 산문적 나열, 또는 생전 처음 접해보는 종류의 지식과 고도의 추상적 개념으로만 채워진 논리의 흐름 등을 마주칠 때면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안이 마르면서 갈증이 나고 머릿속도 마음도 쩍쩍 갈라진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뭔가를 마시고 그에 맞춰 다른 주전부리를 찾는 일도, 화장실을 찾는 횟수도 늘어난다. 읽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말을 달리 돌릴 수가 없다. 철저히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읽는 독서가 어느 순간 처리해야 할 일감처럼 되버린 것이다. 후딱 해치워놓고 다음으로 넘어가야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렇게 버겁다면 결국 읽기를 그만둬야 하는게 아닐까. 책을 집어던지고 영화를 보든 요리를 하든 아니면 밖에 나가 몸을 혹사시키든.
하지만 이런다고해서 독서 생활이 힘들어지는 상황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신체적 변화와 심리적 장애라고 해야할까. 안타까운건 독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는 것아다. 아직 손에서 완전히 책을 놓지는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삶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어쨌든 불가능하다. 다만 요즘의 내 독서생활은 넓이에서는 협소해지고 깊이에서는 얕아졌으며 어딘가 심드렁해진 면이 있다. 취향이 분명해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더 직접적인 사정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