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군단>의 후반부, 게슈타포에게 붙잡힌 필립은 감방에 갇힌다. 그곳엔 이미 그보다 먼저 붙잡혀 곧 처형을 기다리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다섯명 더 있는데 다들 죽기를 기다리는 처지이다보니 말한마디 없이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다. 그순간 필립은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낸다. 반쯤 구겨져 딱 보기에도 얼마 안남아보이는 담배갑을 필립은 그냥 통째로 자기 옆사람에게 던진다. 받은 이는 "필요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겠다"고하고는(곧 죽을 판인데 언제? 게다가 총살인데?)한개피를 꺼내어 귀옆에 꽂아두고 다시 그 옆사람에게 건넨다. B 역시 하나를 꺼내고는 다시 C에게. 그런식으로 담배갑은 마지막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가 자기몫을 꺼내고나자 이젠 다 떨어졌다. 다음 차례가 필립이지만 건넬 수가 없다. 그는 담배갑을 한손에 넣고 찌그러뜨려 버린다.

영화를 아직 딱 한번 본 나에게 이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비중이 큰 순간도 아니건만 멜빌은 언제나처럼 이 장면을 하나의 생략도 없이 길게 이어간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의 흡연이라는 이미지는 분명 클리셰이지만 또한 그것말고 아무것도 할게 없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해보이기때문에 당당히 영화의 한자리를 차지하고있다. <Un Flic>에서는 총맞고 죽어가는 동료에게 불붙인 담배를 건네고(그런데 그친구, 한번 피우고는 찡그리며 옆사람에게 줘버린다.) 멜빌의 후계자인 오우삼도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중요한 순간이면 어김없이 담배를 물렸다.

그러고보니 멜빌과 오우삼의 인물들이 어느덧 30년,20년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2007년 새해. 첫 지구촌 뉴스는 홍콩에서 사실상 전면금연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알려왔다. 파리와 함께 애연가들의 천국이라불러도좋을 국제도시 홍콩도 이제 금연이라는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물결에 뛰어든 것이다. 가만생각해보니 그렇다. 정말 멋지게 흡연하는 사람을 실제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멋진 흡연이란 쿨한 영화속 범죄자들이나 하루키 소설 주인공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새 흡연 자체를 범죄로 인식하고있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유럽과 일본, 홍콩은 그렇다치고 미국은 어떨까? 요즘 미국영화엔 흡연장면이 금지되어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정말 그런가요?) 이 영화의 주인공 닉 네일러는 바로 이걸 없애기위해 할리우드의 에이전트를 찾아가고 이들은 브래드 피트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우주선 속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다분히 2류SF소설에나 나올법한 장면을 구상하며 시한부환자가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하듯 어떻게든 겨우겨우 흡연의 세상을 이어가기위해 분투한다.

하긴 어디나 마찬가지다. 지금 세계 어느곳에서나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싸움은 계속되고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점차 흡연자에게 불리하게돌아가고있는 게 사실이고 그 싸움의 양상은 싸우고있는 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닉의 분투기는 결국 그가 살고있는 나라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돋보기 구실을 하고있는 셈. 끝없는 항소가 가능한 법 제도, 특종에 혈안이 된 언론, 보이지않지만 계속되는 이익단체간의 로비싸움, 혹세무민하는 광고와 홍보, 그리고 협상보다는 논쟁을 해야 승리하는 그 나라말이다.

<흡연, 감사합니다>는 <금연,유감입니다>라고 투덜대거나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지않는다. 다만 흡연을 하고싶으나 맘대로 할 수 없는 당신이 살고있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라고 묻는다.

덧, 결국 이 영화에도 흡연장면은 나오지않는다. 그리고 새 컴퓨터구입기념  첫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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