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소설가라는 한 줄의 사실과 한 편의 글로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를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지루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유명인들의 졸업 축사라는 관례가 있는 미국에서 월리스는 훗날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모 대학의 졸업 축사로 유명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인생의 ‘디폴트 세팅’을 거부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삶을 향한 애착을 전했다. 그랬던 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를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삶이라는 투쟁에서 투항해버린 사람으로 (적어도 내게는) 기억하게 했다.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 셀러브리티의 정의라면 월리스는 일찌감치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국의 문학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면서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얻고 커리어를 시작한 다분히 미국적인 셀러브리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는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월리스의 사후 십 년만에 뒤늦게 출간된, 데이비드 립스키가 진행한 인터뷰의 주제이자 핵심도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에 맞춰져 있다. 립스키는 월리스의 1996년 북투어의 마지막 며칠간을 동행하면서 행한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이 유명세에 대해 묻는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유명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하는지, 유명세를 어떻게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질문에 월리스는 -완벽한 녹취록이라기보다는 편집이 가해졌음을 감안해야하지만- 짜증을 낸다거나 무시하거나 하지않고 진지하게 응답한다. 유명세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며 소설을 매우 열심히 쓰고있을 뿐이라는 패턴으로 일관하는 답변에는 그때까지 그의 이력과 삶의 태도를 유추하게 하는 면이 있다.

 

어렸을 때는 테니스로 그리고 대학에서는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계에서 촉망받던 이가 학문이 아닌 픽션 쓰기로 전향을 하고 이후 비장르문학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미디어로부터 전국적인 수준의 주목을 받는 등 그의 삶은 북투어를 돌던 삼십대 중반에 이미 화려한 이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늘 의식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 그 결과, 오만함이란 자신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정의까지 갖게 했다. 스스로를 너무 의식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애써왔고 그래서 이제는 독자나 비평가의 시선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치열하고 성실한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월리스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소설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명제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썼다는 그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게 한다.

 

인터뷰어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한 편의 에세이처럼 편집되는 미국 잡지 저널리즘의 일반적인 인터뷰 기사 스타일과는 달리 녹취록처럼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가운데 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어의 코멘트를 부분적으로 삽입해 가감없이 월리스가 한 말을 최대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 편집은 독자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월리스는 자신이 어떤 문학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좋아했던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같은 쇄말적인 것부터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처음 만나는 인터뷰어를 상대로 비교적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는건 물론이고 숙식까지 같이 하면서 가까워진 립스키를 향해 월리스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도, 약물 못지않은 수준의 tv 중독도 모두 선뜻 인정한다. 그의 작품들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과 지성을 갖춘 백인 중상류층에게 주로 어필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일반적인 잡지 인터뷰에 할당된 지면을 훌쩍 뛰어넘는, 그래서 차라리 긴 대화에 가까운 분량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분주하게 대화 소재를 바꿔 나가는데 그토록 방대한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관해서도 월리스는 나름 사려깊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해보자면 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미국에서 산다는 것,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그것이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깊게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의 삶의 방식이며 거기서 헤어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숨기거나 꾸미려는 인터뷰이와 어떻게든 그러한 위장과 화장을 벗겨내려는 인터뷰어 간의 긴장감이야말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이라면 여기서 두 사람은 내밀한 친구간의 대화와 격식을 차린 공식적 인터뷰 사이를 수시로 오고간다. 월리스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편집되어 게재될까 걱정하며 빼달라고 부탁하는 등 때로 불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솔직한 편이고, 지금은 잡지 기자이지만 본인 역시 소설을 출간한 적 있는 립스키는 월리스의 유명세를 부러워하는 또 한 명의 살리에르처럼 보이기도 하는 한편 월리스를 향한 우호적인 시선과 예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밀도 높은 인터뷰가 정작 당시에는 최종적으로 잡지에 실리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심도있고 진중한 인터뷰 내용이 대중 음악 잡지라는 매체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실무적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이 인터뷰 역시도 월리스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교롭게도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이면서도 월리스는 문자화 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측면에 대해 이미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다. <끈이론>에 실린 어느 테니스 선수의 자서전 서평은 왜 스포츠 선수들이 쓴 책들은 하나같이 지루한지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하는데,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체득한 프로 운동 선수들의 기술과 실력은 그 느낌이나 정수를 언어화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틀에 박힌 뻔한 클리셰로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 현장 답사기와 감독론이 한데 섞여있는 길고 긴 글에서 린치를 초현실주의자가 아닌 표현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린치 영화의 불가지성을 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자화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삶의 비의는 삶을 긍정하라는 메시지와는 상반된 결과로 끝난 월리스의 삶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향한 강한 열망을 줄곧 내비쳤지만 그가 안고 있던 내적 고통에 타인이 주목하기란 어려웠다. 누구나 다면적인 삶의 양태를 갖고 있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단일하고 일관된 그 무엇으로만 이해되거나 설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삶이라는 다면체이자 다중 우주를 인터뷰, 즉 언어를 이용해 그 대상을 특정한 캐릭터를 가진 단일 주체로 설정하고 그 아래에서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꿰어내야하는 문학 형식, 특히나 대화를 진행하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인칭 에세이 형식의 인터뷰 기사가 감당하기에 월리스는 처음부터 무리였던게 아닐까. 동일한 인터뷰더라도 현재 같은 단행본 형식이 아닌 잡지 지면이라는 제한된 분량 안에서는 지금과는 꽤나 다른 인상으로 재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천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척 하는) 천재 내지는 역시나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남다른 성격, 습관, 취향 등을 가진 비범한 이의 삶을 구경하는 관찰기같은. 거기에 장안의 화제작으로 그의 신작이 회자되던 인터뷰 시점까지 겹쳐짐으로써 대중 매체에서 숱하게 소비되는 천재 셀러브리티의 또다른 표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훗날 참조하게될 사료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료가 그러하듯 면밀한 비판적 독해를 요구하는 섬세한 텍스트다. 인터뷰이의 발화, 그리고 그것을 편집한 인터뷰어의 코멘트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기에 의심하고 상상하고 따져보고 행간을 미루어 짐작해봐야한다. 사후에 출간된 유명 소설가와의 생전 인터뷰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는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도 신빙성을 계속 의심받는 후자의 책과 달리 녹취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책 모두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에게 단순한 취재 대상 그 이상이며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한다. 창작의 비결,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사적 비밀, 당대 사회 이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인터뷰어 자신의 인정 욕구 충족(또는 존재감 증명) 등등.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신비화된 예술가라는 광휘로 인해 답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최초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해독해야 할 암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 이런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읽어본 결과, 많은 시간이 투입된 만큼 특정한 몇 개의 서사로 꿰어질 정도로 월리스에 대한 일관된 인상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인터뷰 시점과 출간 시점까지 사이의 시간의 공백으로 인해 상반된 인상을 전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연상시키는 무언가의 등장을 예상하며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대목은 그의 비범한 지성을 재차 확인케하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에서 한순간도 헤어나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부분은 인터뷰 당시보다는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더 분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도널드 바셀미를 읽고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중력의 무지개>를 읽고 힘을 얻을만큼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매혹된 문학 청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십대 시절 <반지의 제왕>을 다섯 번 읽었고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와 tv 드라마에 중독되다시피한 대중적 취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월리스라는 암호를 풀기위한 단서는 도처에 있는 듯하지만 쉽게 조합되지 않으며 접근 경로는 군데군데 보이는 듯하지만 번번이 차단된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장편 한 권도 제대로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온 인터뷰집은 수사를 동반한 상찬부터 루머에 기반한 비판까지 작가를 향한 선입견만 강화하는데 그칠 수 있다(이를테면 본문 뒤에 자리한 옮긴이의 글). 어차피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립스키의 언어로 재현된 월리스는 타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예민하고 성마른 예술가보다는 비대한 자아를 가까스로 통제하고서는 그 복잡한 내면을 투사해 반영된 세상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만큼의(그러나 너무나 풍성하고 흘러넘치는) 언어로 재현하려 분투하는 지식인에 가까워보인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보다 더 많(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해야한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월리스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소설가로서 언어의 한계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광대하다고 느꼈던 것이 그가 겪은 고뇌의 일부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 월리스는 몰라도 립스키는 그 한계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또한 그의 한계만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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