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길게 쓸 줄 안다는건 분명히 능력이다. 이를테면 2000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 취재기인 <기운 내, 심바 안티 후보의 트레일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자신이 왜 이토록 길고 긴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시 그렇게 긴 서문을 써낸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처럼 말이다.

아래의 글이 무엇이고 원래 어디에 실렸는지 언급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서광증 환자의 증상이라면 이런게 아닐까. 첫째, 별거 아닌 것에 '호들갑' 떨기.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촬영분에서 원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패스트포워딩을 하는 과정에서 아날로그 테입과 달리 픽셀이 깨지는 화면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라. 뭉그러진 픽셀이 빚어내는 이미지 묘사는 월리스를 유사 현상학자처럼 보이게 한다.

같은 식으로 바보 같아 보일거라 예상할 수 있지만 CNN의 테이프와 편집기는 디지털이기에 FF를 한들 여덟 장의 거대한 성조기 앞에 선 매케인의 어깨 위 모습은 빨라져 바보처럼 변하지 않고 작고 다양한 디지털 상자와 네모로 일종의 '폭발'을 한다. 이 조각들은 격렬한 FF 속도로 뒤죽박죽 섞이고 부풀고 물러나고 휘돌고 스스로를 재정돈하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미지는 사상 최악의 마약 경험에서 볼법한 것으로, 고속 화면에서는 루빅큐브 관상의 네모와 상자가 날아다니고 형태를 바꾸고 이따금 인간 얼굴이 되기 직전까지 가지만 얼굴로 낙착되지는 않는다.

 

둘째, 반복하기. 이전까지 미번역된 에세이 중에 번역자가 골라낸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실린 글들에 꾸준히 반복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냉소(주의)'다. 사물이나 인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거나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무관심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냉소'에 월리스는 본문 내내 부정적이다. '냉소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가치 판단의 대상에 대해 월리스가 선택한 가장 범용성이 높은 최적의 단어처럼 보인다. 미국 정치판에서 야망있는 신인보다는 현직과 그들을 후원하는 '골수 지지자'라고 불리는 기득권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구도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결국 현실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소 때문이며, 식자층의 텔레비전 비평이 지루하고 한심한 이유도 그들이 결국 갈라서지도 않을 배우자를 계속 비난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임해야 할 비평 대상인 텔레비전에 대해 마냥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존 매케인을 향한 월리스의 호감의 핵심에는 매케인의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진정성이 냉소와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글의 절정이라 할 후반부의 듀런 모자 에피소드에서 월리스가 매케인을 향해 내보이는 감정의 흐름을 보라.

 

약물과 TV 그리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고백한) 섹스 중독자였던 월리스에게는 냉소야말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내지 가치관의 대척점에 있었을 것이다. 한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헌신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역설적인 적극적 주체가 중독자일테니까. 그렇다면 월리스 본인은 어디에 열중하고 어디에 냉소적인가.

 

1990년에 발표한 책 제목과 동명의 글에는 패기가 흘러넘친다. 충분히 더 짧고 더 명료하게 쓸 수 있었을 대목들에서 보이는 현학적인 단어 선택과 마침표가 잘 보이지 않는 긴 문장은 월리스가 훗날 쓴 에세이들과도 변별되는 상이한 스타일을 갖고있다. 이처럼 날서고 명민했던 월리스가 만일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현재의 유튜브와 스트리밍 문화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개진했을지 궁금해졌는데 몇몇 대목에서 엿보이는 통찰력은 글이 발표된 지 삼십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길더는 ... 선택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자신이 선택하는 ...... 유사 경험하는? 꿈꾸는 것에 대한 통제권이 엄청나게 많아져 TC 문화가 구원받으리라 예언한다.
선택이 확장되는 것만으로 우리가 텔레비전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다. 103

컨텐츠 대홍수 시대에 시청자는 과연 더 주체적이 됐을까. 낙관론에 기댄 기술 예찬론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월리스의 혜안은 ott가 차려놓은 컨텐츠로 선택이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선택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진' 끝에 마침내 마주한 것은 냉소주의 그 자체로서 이는 월리스식 디스토피아의 최종점이 된다. 모든 가치를 조롱한 끝에, 수동적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그냥 멍하게 받아들이는 반反 반란자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의식을 멀리하고 진부함을 경외의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서광증 환자의 마지막 증상은 긴 글의 끝자락에 자리한 모호함이다. 제시된 증거와 증언에 대한 판단 과정의 상세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판결문이나 전개한 논증에 기반해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식의 논문 등과는 달리 월리스의 에세이에는 자신이 관찰한 처음보는 낯선 풍경들, 이를테면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 방식의 복잡다단함, 미국식 자본주의의 전시장이 되어버린 지역 축제, 빡빡한 스케줄과 첨단 미디어의 경쟁이 되어버린 대선 경선을 세필화 그리듯 묘사하지만 잔뜩 늘어놓고는 제대로 그러모으지 못한다는 인상을 자주 남긴다. 그의 글이 그토록 긴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고도의 회피 내지는 의식적인 판단 보류라는 의심. 독자가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정보를 현란하고 빠른 필치로 눈 앞에 그려보이듯 묘사하지만 그래서 대체 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데서 보이는 첫인상은 두려움이 아닌 불안이다. 지나치게 긴 글을 쓰는건 할 말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전무해서일 수 있다. <기운 내>가 어떻게 끝났던가. 매케인을 진짜로 만들어주는 상자는 결국 잠겨있고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으며 유권자인 우리는 다만 '깨어있도록 노력'해야할 뿐이다. 즉 선거 국면에서 유권자가 후보의 진정성을 알기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그러기위한 노력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2000년 당시 시점의 최첨단 전자 기기들을 동원한 언론사간 치열한 보도 경쟁이나 쉴 틈이 없다시피한 경선 캠페인 스케줄에 관한 서술은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선거 캠페인의 이면을 조명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그렇게 긴 글이 다다른 종착점에서 저 한마디로 끝남으로써 글의 모양새가 마치 위태롭게 선 역 피라미드처럼 되어버린 탓에 그 앞까지의 전개를 장황하기만한 빌드업처럼 보이게 한다.

 

진지함은 그에 상응하는 형식을 요구할까. 글의 내용이 길이를 규정할까. 문학의 세계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쉽게 규정할 수 없다. 한 편 한 편이 길지는 않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산문이 낯설다면 그건 그의 유려한 완곡어법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자가 그렇지는 않지만 푸코의 글은 특히 저서가 아닌 강의록의 경우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분명하고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청사진 아래 어느 위치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수시로 독자와 청자에게 확인시키며 정의와 분류, 비교와 대조, 비유 그리고 예시를 끊임없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철학자의 글은 기본 개념을 선행 학습하더라도 그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논리철학논고>의 가시만 발라놓은 것처럼 극단적일만치 짧은 문장들은 그 자체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착착 연결되어 그 유명한 마지막 명제이자 결론으로 치닫지만 텍스트 외부에 있는 독자와의 소통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기에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설과 논쟁을 낳는다. 그러니까 저자마다 각자의 문체, 즉 스타일이 있고 거기에 적응하는데는 일정 정도의 시간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방대한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했기에 자연히 길 수밖에 없는 역사책을 읽기 어려운건 난문 때문이 아니라 볼륨에 겁먹는 심리적 장벽 그러니까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긴 글에는 길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필연성 또는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픽션/논픽션의 갈래가 아닌 광의의) 문학에서는 어느 것 하나 이거다라고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무수한 반례들이 쉴 새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니까. 그래서 말하고 싶은건 이거다. 때로는 글의 길이가 곧 스타일일 수도 있다는 것.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의 사적인 정보나 일상 묘사가 거의 안 보인다는 점에서 신변잡기류의 미셀러니도 '사소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인 평론이나 비평도 아닌 글의 형식이 이미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글의 그 '끼어있는' 성격을 예증한다. 본격 평론으로 분류하기에는 핍진한 묘사, 대화체, 1인칭 관찰자 시점 등은 기본적으로 '문학적'인 반면, 관찰하는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거나 함의를 읽어내는 통찰은 일급 비평가의 그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미국의 유명 월간지에서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탐사 보도류, 그러니까 '미국식 저널리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어쨌건 쉽사리 어떤 한 장르에 속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형식이야말로 그 통찰을 가능케하는 원인이며 그 자유로운 형식의 핵심에 바로 어마어마한 길이가 있다. 동시대 텔레비전 문화(그것도 지금 시점에서보면 '소박한' 1990년대 TV 문화다. 과연 2022년에 레거시 미디어라는 TV를 비평하려면 또는 ott를 포함해 가정에서 즐기는 홈 미디어 문화 전체를 월리스가 비평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페이지가 요구될까) 비평이 그토록 많은 페이지를 필요로하는 일일까. 충분히 과잉이고 '선을 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가 필연적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본다면 모호함이나 어중간함 또한 긴 글이 야기한 어떤 파생 효과에 가깝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저자의 의도'나 '전하고픈 메시지'는 긴 글 속 어딘가에 영리하게 숨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명의 첫번째 에세이 <에 우부니스 플루람>에서 월리스의 의도는 20세기말 미국 문학이 동시대 텔레비전 쇼와 어떻게 닮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순응하게 만드는 미디어를 비판하면서 '불승인'의 위험을, 경악과 비명의 감수를 요청한다. 앞에서 그토록 길게 전개한 비교와 대조 및 구체적 예시와 설명이 없었다면 이 마지막 주장은 다소 뜬금없고 허황하게 들렸을 것이다. 

 

독자를 얻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길게 쓰는건 분명히 능력이다. 투입한 노동량에 비해 최종 추출량이 적은 광물(이나 육류)처럼 귀한 소량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할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아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한 문장을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과정은 길고 지루하며, 때로는 쓰고 나서도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분명히 노동에 가깝다(대개의 경우, 그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저자들이 그 과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기는 것 또한 분명하다. 때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글쓰기를 시도하는 저자들도 있지 않을까.

1

실패할 자유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이면서도 낯선가. 실패할 자유란 곧 실패할 권리라는 말이겠지만 권리를 챙기겠다며 일부러 실패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그렇다면 이는 실패해도 무방한 자유, 즉 실패해도 다시 주어지는 기회의 보장을 뜻하는 걸텐데 작금의 자본주의 하에서 낭만적으로 들리기는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틀릴 자유'란 것도 있을까. 즉, '틀리는 실패를 저지르고도 계속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도 있을까. 『다케우치 요시미: 어느 방법의 전기』를 읽으면서 든 의문이다. 연이은 '말실수'와 '예측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던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해 저자 츠루미 슌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서 다케우치의 예언은 예견이나 예측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난 '예언자'의 예언이다. 그 어긋남은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도 전후 일본의 고도 성장에 대해서도 다케우치의 발언을 따라다녔다. 79p

대동아전쟁의 예측에 실패했으니 전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길을 택하지 앟았다. 전후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예측하는데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인정하며 중국에 대해 평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69p

듣는 이의 기분과 인격을 거스르지 않아야하고, 온갖 특수성과 상대성을 존중하느라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늘 의식해야하는 현 시점에서 한 번의 필화 때문에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줄어드는건 문필가 또한 다른 직업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전 후 일본의 논단이 지금보다 덜 각박했을지 몰라도 더 낭만적일 것도 없으리라 가정한다면 다케우치가 그럼에도 공적 지면상에서 '계속 말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츠루미는 다음과 같이 다케우치를 인정한다.

만년의 평론집에 <예견과 착오>라는 제목을 단 것은 자신의 예측이 대동아전쟁에 대해서도, 중국혁명 이후에 대해서도 불충분했다는 자기 인정을 포함한다. ... 자신의 예측이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매번 현재 위치에서 측정하고 인식하기를 거듭한다. ... 이를 일러 나는 '실수의 힘' 혹은 '실패의 힘'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 판단을 떠받치는 냉정과 용기의 조합에 나는 감동한다. 195p

 

한 사람의 일생을 시간 순서대로가 아닌 특정한 소주제에 맞춰, 그마저도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일간지 컬럼 분량의 소주제 하에 쓰인 글들이 묶인 낯선 '전기'의 형식은 다케우치가 썼던 어느 글의 제목을 차용한 이 책 어느 방법의 전기』야말로 '어느 전기의 방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방법이 이렇다면 '태도'는 어떨까. 다케우치를 바라보는 츠루미의 시선은 상기 인용에서 보듯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며 그 핵심엔 '쩡짜'라는 개념에 비추어 글과 삶에서 펼쳤던 다케우치의 분투에 대한 인정이 있다. 고통스럽지만 현실의 고뇌와 시련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감수하고 대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쩡짜'(이 책에서는 '저항'의 뜻으로 번역 및 소개하고 있다)는 보다시피 엄밀한 사회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문학적인 접근인데, 인물의 명암을 모두 조명함으로써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는 전기라는 형식에서 츠루미가 행한 이런 접근법이 옳으냐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전기의 대상인 다케우치의 평론부터가 문학인의 입장에서 행한, 문학적 시각에 의한 전중 및 전후 일본 사회 비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다케우치의 그토록 연이은 '예측 실패'와 '착오'의 원인도 현실 비판에 요구되는 객관적 시각과 엄정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결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쩡짜'는 그러한 결여를 상쇄하고 보충할만한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곧 이 책에 대한 판단의 핵심에 자리한다.

 

우선, 다케우치가 대동아전쟁을 긍정한 것을 넘어 거의 선동에 가까운 '선언'을 하게된 데는 중국문학자로서 어쩌면 피하기 어려웠을 중국 편향이 있었다고 쓰루미는 설명한다. 

강하고 풍족한 미국에는 양보하면서 약하고 궁핍한 중국은 거세게 밀어붙여 이권을 취한다는 다이쇼 이래 일본국의 행보가 줄곧 혐오스러웠는데, 마침내 일본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맞서겠다는 자세를 확실히 표명했기에 일거에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112p

중요한건 다케우치가 전후가 되자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를 마치 쓴 적 없었던 것처럼 사장하거나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 직접 상기했다는데 있다. 이 점이 다케우치를 바라보는 츠루미의 관점 및 태도를 결정짓게 되는데 다케우치가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이 전쟁에서 국민이 자진해서 싸웠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자기검증이라고 츠루미는 일차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자기검증의 차원을 넘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가 가진 한계를 돌파하려는 다케우치와 츠루미의 사상적 분투가 있다고 이 책의 부록에서 쑨거는 해설한다. '정확-착오'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한 '순백의 장소'는 현실에서 부재하고 그래서 현실의 우리에게 쥐어진 건 명확하지 않은, '응보가 없는' 복합적 선 뿐이다. 다케우치가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고뇌와 몸부림, 바로 그 쩡짜를 츠루미 또한 다케우치를 읽어가면서 행했음을 쑨거는 인정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올바름'의 기준 자체를 의심하는 다케우치의 (사상적) 자세이자 윤리의 준거틀은 그러나 일본의 과거 식민지의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일견 주의하게 한다. 다케우치가 말한 '의심을 의심함으로써 얻는 믿음'을 따라 또 한번 의심하면서 계속 읽어보자. 

 

'국민문학론'과 함께 전후에 다케우치가 제창한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이다. 실재하는 지리적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개념으로서 '아시아'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구로부터 침략당하고 이에 저항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질문은 바로 여기서 제기된다. '아시아 해방을 위해 연대한다'는 대의까지는 동의한다하더라도 왜 현실에서 그 방식이 그 아시아를 상대로 한 식민주의와 침략전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침묵하거나 모른척 하기는 다케우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해방과 연대를 위한 인접 아시아 국가의 강제합병과 침략이라는 모순을 모른 척 하기는 평전을 쓰는 츠루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록으로 실린 역자와 쑨거의 글이 이 딜레마를 풀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두 편의 우수리들은 공통적으로 다케우치와 츠루미 두 사람을 'acknowledgement' 하는 것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연대의 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은 어쩌면 일본 내 진보적 지식인 진영 내에서조차 분명한 하나의 지류로 존재하는 듯하고 다케우치 요시미는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되는 사조의 한 갈래에 속하는걸까. 이러한 논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가.

애당초 ‘침략’과 ‘연대’를 구체적 상황 속에서 구별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
조선 문제를 보더라도 결과는 분명 ‘일한병합’이라는 완전침략으로 끝났지만 그 과정은 간단치 않다. 러시아나 청국의 ‘침략’에 함께 맞선다는 일면도 ‘사상’으로서는 없었다고 할 수 없다.<일본의 아시아주의>(196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298p

그러나 아무리 에누리하더라도 그것이 아시아 나라들의 연대(침략을 수단으로 삼건 삼지 않건 간에)를 지향했다는 공통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ibid, 302p)

전후 이십년이 다 되어가는 1963년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침략과 연대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주장이 계속되는데 대해 분노하기에 앞서 어쩌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위의 문장을 보면서 들었다. 침략을 수단으로 써서(라도) 연대한다는 논리가 전전 전중 전후를 관통하며 이토록 오래되었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국가의 독자로서 생길 수 밖에 없는 감정을 넘어(어쩌면 더욱 더) 그 연원과 성립 과정 및 변천을 유심히 살펴봐야하는게 아닐까. 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러한 도착된 논리의 전후 버전이자 잠정적 결정판이 바로 다케우치식 아시아주의가 아닐까.

“전쟁에 패하면 아시아의 식민지는 해방될 수 없다는 천황제파시즘의 슬로건을 나름대로 믿고 있었다. 또한 전쟁 희생자의 죽음도 무의미해지리라고 생각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다카무라 고타로>, 『어느 방법의 전기』 중에서 145p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근대화는 몹시 눈부신 대목이 있습니다. 뒤처지고 식민지로 전락한 동양의 여러 나라에 해방운동을 촉진하기도 했지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1961),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40p 

 

아시아를 침략할 때 제국주의 일본 국가의 의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가공, 재구성 및 자기 식으로 변주해서 받아들인 일본 국민들이 있으며 그들을 일률적으로 군국주의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고 츠루미도 말을 보탠다. 이렇듯 '아시아 해방' '아시아와의 연대' '아시아주의' 등을 주워올리는 이러한 이상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여기에 조선과 대만 식민지 사정이 시야에서 배제되어 있음은 한결같다. 바로 이 불구의 이상주의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을 이해하려 할 때 염두에 둬야할 또 한 가지는 아닐까.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으로 유추해보건대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처럼 보이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동시에 아시아주의라는 연대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것, 즉 유럽적 근대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주의라는 '미완의 꿈'을 희구했던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지도한 이들 및 그들이 벌인 일과 묘하게 굴절되어 겹쳐보인다. 작금의 포스트 글로벌 시대에서 서구와 대립하며 아시아가 연대해야 할 당위가 있을까. 있다면 그 명분은 뭘까. 지난 몇 년 간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민국가가 당차게 돌아왔다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 이전에 있었던 브렉시트에서 보듯 세계는 블록화되는 가운데 동시에 잘게 분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동과 서가 대항하면서 역사가 발전했다는 제국주의 시절의 사관은 아직도 아시아주의라는 미완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을까.

 

 

 

2

애초에 이 글은 츠루미 슌스케가 쓴 평전의 서평을 목표로 했기에 다케우치 자체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피하려 했으나 읽으면서 본서만으로는 애초의 의도를 충족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국내에 번역된 다케우치 선집 두 권을 같이 참조했다. 그 결과 다케우치가 그토록 예측 실패와 말실수를 거듭한건 츠루미가 주장하듯 과거의 실패로부터 미래의 가능성과 단초를, 실마리와 유산을 길어올리는데는 기여했을지는 모르나 그 이전에 거의 모든 구설이 그러하듯 발화자 본인의 식견과 비전이 짧은 것이 그 실패와 말실수의 직접적 원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전후에 일관되게 비판한 '근대주의'는 곧 다케우치가 협량한 민족주의자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하며 자기자신의 과실을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글쟁이로서의 책임감(혹은 윤리라고 해야할까)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이를테면 다음 대목을 보자.

대동아전쟁은 세계사를 다시 썼다고 일컬어진다. 나는 그 말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믿고 있다. 대동아전쟁은 근대를 부정하고 근대문화를 부정하고, 그 부정의 끝 간 데서 새로운 세계와 세계문화를 자기형성해가는 역사의 창조활동이다.
<《 중국문학》 폐간과 나>(194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1:고뇌하는 일본』 중 75p
인용하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1941년부터 1942년의 지적 분위기를 지금 복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 개전을 예찬한 일은 “지적 전율”이기는커녕 지적 혼란이자 지성의 완전한 방기가 아니었을까. 도대체 어찌하여 그런 일이 지식인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가. 그 사정을 설명하기란 정말이지 어렵다. <근대의 초극>(1959) 중에서 (ibid, 131p)

서로 다른 두 편의 글에서 따온 인용이다. 16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문장 간의 태세 전환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 사정을 설명하기란 정말이지 어려"울까. 우선 본인의 사정부터 하나씩 설명하면 되는게 아닐까. 전자를 모른 척하는 후자의 인용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의아하기만 했다. "1941년부터 1942년"이 아닌 그 이듬해인 1943년에 발표한 글이라 미처 깜빡 잊은걸까.

나는 대동아문화가 자기보전문화를 초극할 때에만 구축된다고 믿는다. 우리 일본은 관념으로는 이미 대동아지역의 근대적 식민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이 한없이 옳다고 믿는다. 식민지배의 부정은 자기보존욕의 포기다. 개체가 다른 개체를 수탈하여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스스로를 부정하여 다른 개체를 품는다는 입장을 자기 안에서 생산해내는 일이다. 수탈이 아닌 나눔으로 세계를 그려야 한다.
<《 중국문학》 폐간과 나>(1943)중에서 (ibid ,71p)

식민지배가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한 글에 나오는 "우리 일본은 .... 이미 대동아지역의 근대적 식민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던가"라는 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일까? 자기기만이 아니라면 이런 문장은 아예 처음부터 조선을 시야에 넣지 않아야만 쓸 수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문제는 아무래도 전쟁의 재해석 내지 재평가와 함께 다뤄져야함을 (......)
가메이는 ... 중국(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만을 떼어내 그 측면 혹은 그 부분만 책임지자고 말한다. 이 점만큼은 나도 가메이의 사고방식을 지지하고 싶다. 대동아전쟁은 식민지 침략전쟁인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이기도 했다.
<근대의 초극>(1959)중에서 (ibid, 141p)
아시아에서 지도권을 주장한다는 것과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국민적 사명, 그 속에 내재된 원리적 배리가 이 책에서는 ‘일본은 서구’라는 관점의 조작을 거쳐 단순명쾌하게 전자만 살려내고 후자를 버리는 형태로 해결되었다. … 일본은 애초 아시아가 아니었다고 이들 신문명개화론자는 주장한다. (ibid, 182-183p)

대중국 전쟁은 침략전쟁이지만 대미국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기에 둘을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아시아에서의 지도권 행사와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사명이 과연 '원리적 배리'일까.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만이 아니었고 실제로도 역사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일부의 '주장'만이 아니었다. 서구근대의 초극이 아시아 지도권 행사를 위한 허울뿐인 명분이었던 현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그 원리만은 존중해야한다는, 전후이기에 나올법한 논리는 그러나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관점의 조작을 거쳐 한 쪽만 살려낸 게 아니라, 일본의 아시아 지도권 행사가 곧 '아시아'가 서구근대를 초극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고 서구근대를 초극한다는 목표는 다시 일본이 아시아를 이끌어야한다는 명분을 떠받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즉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었지 '원리적 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그럼에도 여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했던 '의도'는 인정해야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국제관계에서 (선한) 의도를 따지는 일만큼 무용한 일도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개인도 아닌 국가공동체를 의인화해 '의도'를,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결과와 전혀 상반된, 그래서 검증하기 더욱 어려운 상대의 의도를 굳이 애써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의도와 관련하여 다음 인용을 보자.

 

"이것(「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을 다케우치 씨는 전후에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 시기 다케우치 씨가 써냈던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해방을 기치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도 일본이 식민화하고 있는 조선과 타이완을 해방해야 합니다. (……)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해 국가를 밀고 나가면 일본 국가는 부서집니다. 부서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가 다케우치 씨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케우치 씨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파멸적 인간입니다. (......)
국가의 목적도 국가가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그 계기인 셈입니다. 그렇게 읽는다면, 다케우치 요시미가 전후에도 그 글을, <중국문학>을 통한 그 선언을 왜 철회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츠루미 슌스케, 「진보를 의심하는 방법」, 츠루미 슌스케·카가미 미츠유키 편, 『무근의 내셔널리즘을 넘어 - 다케우치 요시미를 재고한다』, 2007) (ibid 213-214p) (굵은 표시는 인용자)

안타깝게도 이 인용문의 출처인 『무근의 내셔널리즘을 넘어 - 다케우치 요시미를 재고한다』라는 책은 한국어 출간이 되어있지 않기에 저 인용문이 확인할 수 있는 전부다. 따라서 맥락에 유의하며 읽어야하는데 '그 시기'는 현재 주어진 저 인용문만으로 봤을 때는 전후와 전중 어느 쪽으로도 읽히는게 가능한데 아무래도 전중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러니까 전중에 '대동아해방'의 기치를 내세운 글을 썼기 때문에, 즉 그러한 뜻을 이미 전중에 밝혔기 때문에 대동아전쟁을 찬양한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를 전후에도 철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그래서 "조선과 타이완을 해방해야한다"는 당위의 표현이 다케우치의 것인지 아니면 저 인용문을 쓴 츠루미의 것인지 판단이 쉽지 않다. 과연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중에 조선과 타이완의 해방을 희구했을까. 전후에 조선의 강제병합을 비판한 문장은 제법 있지만 전중에도 저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케우치가 조선에 관해 쓴 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것도 다 전후에 나왔는데 그 중 한 편은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 들른 조선에서 옛 친구들과 조우한 사적인 회고담이다. 강제병합을 안타까워하고 비판한 것도, 일본인에게 '조선어 학습'을 권하고, 조선인 친구와의 회억을 언급한 것도 모두 전후였지 전중이나 전전이 아니었다. 아시아주의를 구상하고 아시아 해방을 한창 논할 때는 언급이 없(거나 드물)지만 향수의 감정이 물씬한 사적 회고에서야 겨우 등장하는 것이 조선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케우치의 진심 혹은 진의를 의심케한 결정적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용구의 유복자 이석규에게는 다이토 구니오大東國男라는 일본 이름이 있다. 아마도 ‘대동국大東國’을 기념하려는 것일 게다. 그는 <이용구의 생애>(1960, 時事新書)라는 책을 냈는데, 이는 오늘날 조선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거꾸러뜨린 안중근은 애국자로 칭송되지만 부친 이용구는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게 부당하다 여겨 그 오명을 씻겠다는 동기로 쓴 것이다. 정치적 판단의 실패는 실패로 인정하더라도 이용구의 오명을 씻는 연대의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으리라. <일본의 아시아주의>(1963),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내재하는 아시아』 중에서 337p

이용구의 오명을 씻는 정도의 일을 무려 '연대의 책임' 이라고까지 한다면 그런 연대는 두 손 들어 거부해야한다. 연대를 상호대등한 주체간의, 공동의 목표 아래 행해지는 자발적인 상호협력 및 부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과연 조선과 일본은 연대했는가. 조선에 대한 다케우치의 인식의 수준이 이 정도였기 때문에 아시아 해방을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이 아시아의 일부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주창하는 논자마다 저마다의 '아시아주의'를 논한다는 다케우치의 말에 본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아시아주의는 본인의 의도에 상관없이 강성한 팽창적 민족주의자들의 명분으로 쓰이거나 쓰일 가능성이 크며, 거기엔 너른 눈으로 상상한 균질적인 하나의 인지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때로는 비가시적일정도로 차등하고 불균질하며 전세계적으로 보면 서양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로서의 아시아라는 가상이 있을 뿐이다.

 

 

 

3

자신이 일단 선택하고 그 선택을 공표한 뒤 언제까지고 그 선택은 옳았다는 판단을 고집하며 자기 예언의 무오류를 가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를 출중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어느 방법의 전기』중에서 124p
국민이 침략 전쟁으로 향하는 시기, 그 동향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자를 비난해선 안되겠지만, 자신은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굳이 나라와 함께 걷는다. (ibid 137) (굵은 표시는 인용자)

츠루미가 쓴 본서 속 인용문의 문맥을 확인하기 위해 참조한 선집 두 권을 읽으면서 다케우치 요시미가 과연 '출중한 사상가'인지 그 명성에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 츠루미가 지나치게 우호적으로 평가하는게 아닌가라는 의심에 대해서는 외국인 독자와 자국인 독자의 시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실수와 실패에서 길어올린 지혜라는 이 전기의 핵심에 대해서조차도 위의 두번째 인용문에 이르자 의심은 더 굳어졌다.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굳이 나라와 함께 걷는" 것도 사상적 유연함일까. 아니 그 이전에 물어야 할 질문, 다케우치는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과연 알았을까. 사후의 지혜가 아닌 당시, 즉 전중의 시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상기한 두번째 인용문은 선집이 아닌 전기에서 발췌한, 즉 다케우치가 아닌 츠루미가 쓴 문장이다.

 

본서는 실패로부터 유산을, 현재로부터 미래를 위한 단초와 실마리를 길어올린다는 다케우치의 방법론, 이른바 '실패의 힘'을 상찬하는데 처음부터 초점이 맞추어진 나머지 평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균형 잡기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평전'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1959년 근대의 초극, 1941년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 1961년 주창한 근대문학론이 논단 내에서 어떻게 논의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더욱 상세하게 그려졌어야 했다. 매우 짧게 언급하고 지나간 문화대혁명과 일본 고도성장에 관한 예측 실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다케우치의 이력과 지적 성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행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 책이 츠루미라는 또 한 명의(즉 1/n로서) 저명한 지식인의 시점에서 본 주관적인 인물론이나 논평으로서의 가치를 갖는지 몰라도 공과를 모두 참조한 끝에 인물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전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적이 불친절하고 불완전할 것이다(이는 모든 전기와 평전에 해당하겠지만).


전기의 대상이 생애 과정에서 맞이하게 된 사건들에 뛰어든 전개 과정, 그 행위 혹은 선택의 결과 그리고 일정 시간 이후 행해진 이에 대한 '평가'라는 세 요소가 전부 갖추어질 때 평전은 성립한다. 또한 '평전'의 '평'이란 전기를 쓰고 있는 저자의 평만이 아니라 당대에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세간의 평가, 이 책처럼 지식인인 경우 학계나 언론, 그리고 이른바 '논단'이라는 사상계에서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소개해야 그 사건이 당대에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고, 훗날 전기를 쓰는 현재 시점에서 저자의 평가가 여기에 덧붙여질 때 그 시차로부터 발생하는 대조와 비교를 통해 독자 또한 자신만의 관점을, 즉 '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본서의 분량이 너무 작고 단출한 것이 지금까지 언급한 단점들을 야기한 결정적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유럽적 근대를 단호히 거부하는 다케우치의 반反 근대주의 논법은 다분히 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하고 '국민문학론' 역시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일본 지식인의 글에서 접하는 '해방으로서의 민족주의'란 언표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의 독자 입장에서 어색한 표정을 짓게한다. 우익적 아시아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아시아주의' 자체를 상상하는 것에 내재한 한계를 직시하기란 어려운 일일까. 해방을 갈망하는 식민지 사정에는 눈 감은 채 서구로부터의 해방을 제창하고, 유럽적 근대를 거부하는데에서 전후를 헤쳐나갈 단초를 얻는 그러한 아시아주의는 메이지유신 이전, 장기 쇄국상황이었던 일본을 떠올리게한다. 일본은 늘 아시아의 적이었지 단 한번도 아시아의 일원이었던 적이 없다며 비판한 이가 있었다. 제목부터 그러한 비판의 근거로 쓰이기에 충분해보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주도하는 팽창적 아시아주의의 진술로서 읽힐 수 있는데 이러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아시아주의가 여전히 미완의 꿈으로 남아있는한, 강성한 팽창주의의 이면에서 또 한번 애써 아시아의 패자(覇者)와 동반자를 나누고 분리하는 논법을 구사하는 지식인이나 사상가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역사의 반복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의 반복이라던 누군가의 말은 그래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흥분과 불안을 동시에 야기한다.

1. 믹스셋, 믹스테입, 플레이리스트 등의 최대 장점은 일일이 선곡할 필요가 없고 흐름도 끊기지 않은 채 감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데 있다. 무엇보다 그런 실용적 측면 말고도 개별 곡들이 같은 무대 위에서, 그러니까 신곡과 구곡, 장르 등의 구분 없이 동등한 감상(내지는 평가)의 기회를 받는다는 것이 최대 장점인 것 같다. 숨은 곡의 재발견이란 것도 같은 말일텐데 그 뮤지션이 누구인지(남성인지 여성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등), 언제 나온 노래인지, 어느 나라 곡인지, 어떤 장르인지 같은 정보와 그에 수반된 일체의 선입견이 없이, '무지의 베일'을 가린 상황에서 리스닝의 기회를 얻는다. 처음 듣는 믹스셋의 수록곡은 대개가 태반이 모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발견의 즐거움과 더불어 생활의 배경 음악이 늘어남으로써 얻는 만족감이 크다. 산책을 하거나 단순 작업을 할 때는 그래서 새로운 믹스셋과 익숙한 믹스셋을 반반의 비율로 듣는다. 그래서, 어쨌건간에 직접 만들어본 믹스셋중 하나.

 

 

2.

옛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베테랑 편집자에게 "평론은 같은 판매 부수의 소설에 비해 열 배 정도 영향력이 있답니다. 열심히 하길 바랍니다."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이 특이하긴하다고 느낀 대목. 상황이 이래서인지 아즈마 히로키는 신인 평론가를 데뷔('등단'이 아니라) 시키기 위한 비평 컨테스트를 주최하고 그 특전으로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에 지면을 내준다. 동인지를 통해 데뷔하는 아마추어 평론가의 숫자도 많고 그중에서 프로가 되는 예도 많다고 하니 확실히 평론이 '읽히는' 사회라는건데 이런 풍토는 어떻게 가능한걸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