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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ebs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보고있자니 우리 영화 <삼포가는 길>이 떠올랐는데 원작 소설이 1973년에 발표됐으니 거의 동시대에 나온 셈으로 두 작품 모두 실낱처럼 불확실한 희망을 안고 여행길에 오르는 두 남자의 여정을 다루고있다. 모든 로드무비들이 다 애잔하고 쓸쓸하기만한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대개의 로드무비들이 공유하고있는 이 정서에 깊숙이 기대고있다. 먼지바람이 몰아치고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기차 화물칸에 몰래 올라타 이동을 하고 허름한 모텔방에서 하룻밤을 뉘이고 가는 곳마다 그곳 주민들과 드잡이를 하는 궁핍하고 피곤한 여행길은 두번세번봐도 보고있으면 좀 서글퍼진다.

기약없는, 그래서 본인들만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않는 세차사업이라는 목표를 위해 피츠버그로 향하는 이 여정에서 두남자는 번번이 타지에서 타인들과 어울리지못하고 사고를 일으킨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오넬과 맥스가 찾아낸 대응방법은 바로 자기자신을 우습게 만들어 남들을 웃기는 것. 라이오넬이 가르쳐준 이 방법의 효용을 비로소 깨달은 맥스가 보여주는 술집에서의 '스트립 쇼'는 그래서 아프면서도 가장 훈훈한 장면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웃겨야하는 코미디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인 법. 라이오넬이 그렇게 보고싶어했던 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가짜)비보를 듣고 그 사실을 숨긴채 전화박스에서 뛰어나와 맥스 앞에서 기쁜 척 하고 뒤이어 분수대에서 결국 실신하고마는 장면은 그 생생함에 관객들도 수직상승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영화의 최절정이다.

내게 이 영화는 무엇보다 알 파치노의 재발견으로 기억될 것 같다. 메소드 연기의 표본이자 전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아니 카리스마 그 자체인 것 같은 이 배우가 여기서는 자신보다 열살많은 진 해크먼과 공연하면서 나이 어린 막내동생같은 이미지로 쉴 새없이 다른 사람들을 웃기려고하는 쾌활한 캐릭터를 연기하고있다. 마이클 콜레오네부터 <오션스 써틴>의 윌리 뱅크에 이르기까지 냉철한 권력자가 그의 한쪽 얼굴이라면 그 반대편에서 이 영화나 <뜨거운 날의 오후> 그리고 <프랭키와 자니>같은 생활인의 냄새가 물씬한 소시민적 얼굴이 짓는 표정이야말로 파치노가 왜 최고의 성격배우인지에 대한 천편일률적 답변들의 빈틈을 메워주고있다. 해크먼 역시 평소 즐겨 해왔던 전문가 역할과 180도 달리 성질머리빼고는 아무것도 가진거없는 전과자 연기를 하고있는데 여전히 터프가이라는 점에서는 그 변화폭이 파치노에 비해 크지는않지만 또한 그래서 여전히 설득력이 크다.

"내가 감옥에 가기전엔 이 동네가 이렇지않았다"는 뻔한 대사를 읊을때, 추위에 떨며 외투깃을 부여잡을때, 왜 자신에게 잘해주느냐는 질문에 "나에게 마지막 성냥을 줬으니까"라고 대답할때, 맥스가 자신이 아닌 라이오넬을 괴롭힌 이와 뒤엉켜 싸울때, 이 영화는 더이상 낯설지가 않다. 풍경이 바뀌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싸우고 상처받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 여정을 버틸 수 있는건 지금 내 곁에 동반자가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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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아메리칸시네마에 대한 나의 애정은 우선은 남성적 서사에 대한 선호에 기반한다. 진 해크먼, 잭 니콜슨, 알 파치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임스 칸, 존 보이트, 더스틴 호프만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절의 아이콘들은 하나같이 남성들, 그것도  자신이 마초임을 숨기지않는 당당한 남성들이다. 다분히 폭력적이며 반골적인 이 캐릭터들은 당시 시대의 공기와 거의 일대일로 호응하며 영화전체에 테스토스테른을 주입하고있다. 일반적으로 70년대 사회상을 읽어내는 텍스트로 기능하는 이 영화들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는 작품 내부에만 해당하지않아서 페킨파, 펜, 코폴라 같은 감독들이 매번 영화를 만들때마다 제작자와 겪었던 불화의 기록들은 삶과 영화가 구분되지않는 그 드라마틱함으로 인해 그들의 영화에 광채를 더하고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 영화들을 단순히 남성성으로만 한정해서 본다면 정작 이 남성성이 전면에 드러나게된 배경과 경로를 놓치는 격으로 사실 이것들이야말로 이 영화들이 지향하는 방향점이다. 그 모양새가 직접적인 액션물이든 아니면 '사회파 드라마'이건 심지어 멜로드라마이건 이 시절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뭔가를 잃거나 곧 패배할 운명에 처해있다. 형사는 좀처럼 잡히지않는 범인 때문에 미치기 일보직전이고 성공하려고 상경한 젊은이들은 결국 죽어버리거나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연애를 시작하고있다. 스크린 바깥으로부터 기인한 이 상실과 열패의 정서가 거꾸로 고집센 창작자들에게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한 점은 이 시절 미국 영화계에 단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이 영화를 한마디로 말해보라고한다면 '70년대 뉴아메리칸시네마의 태도를 오롯이 재현하고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줄거리는 특정한 상황설정이나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 밥의 행적, 정확히는 방황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다. 음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장래가 이미 정해져있는 답답하기만한 예술가 집안을 떠나 친구인 엘튼의 도움으로 유전에서 노동자 생활을 자처하고있다. 같이 살고있는 애인 레이엣에게는 이미 애정을 잃은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떠나지도못한채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는 권태로운 일상을 영위한다. 이처럼 영화는 부유하는 밥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있는데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못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불만에 가득찬 그의 행동은 변덕과 충동의 반복으로 점철되어있다. 친구들 앞에서 레이엣을 무시하다가 사과하고, 버리다시피한채 그녀를 떠나려다 그런 스스로를 욕하고는 다시 돌아가 둘이서 같이 떠나고,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고는 고향으로 향하지만 결국 하나도 변하지않은 그곳에 적응하지못한채 다시 돌아나온다. 잠시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확신하지못해 포기한다. 이처럼 계속되는 밥의 변덕은 지금까지의 이 모든 과정을 집약한듯한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까지 계속된다.

부모세대에 절대로 동화할 수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직 자신의 정체성도 확립하지못한채 흔들리던 당시 베이비붐세대의 가치관의 혼란을 절절하게 연기하고있는 잭 니콜슨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이 걸작으로 칭송될 이유는 차고도 남는다. 한해전 <이지라이더>부터 이후 <차이나타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여행자>등 으로 이어가던 그의 최전성기 시절의 명연을 볼 수 있다.

덧. 우리나라 비디오 제목인 <잭 니콜슨의 회색지대>나 <잃어버린 전주곡>도 충분히 좋은 제목 같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 원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기도하지만.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남녀사이에 우정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언의 다른 한편에는 '사랑에 국경도 나이도 없다'는 강변 또한 있으니 관계를 맺기위한 사전 조건과 선행 사항들이 적지않은듯하다. 옛부터 '친구'라 불릴 수 있는 관계를 동년배의 동성간으로 한정해버릇해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범위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을때 왠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하지만 이 범위란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이어서 그것이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위치하면 어딜가나 시선의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든 살 노인과 스물 갓 넘은 소년과의 우정은 태평양 건너에서도 여전히 생경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향한, 금기에 대한 도전처럼 보이기까지하니까.

연고도 없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걸 즐기고 영구차를 자가용으로 구입하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죽음에 집착하는 소년 해롤드.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아닌데 교살, 동맥과 손목절단, 권총, 익사, 분신 등 갖가지 방법으로 최소 열다섯번 이상 자살을 밥먹듯 시도하면서도 해롤드는 죽지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죽지않는다. 창백하다못해 무표정하기까지해서 시체같기만한 그의 얼굴은 억압적인 어머니를 대할때 더욱 유난히 공포스럽게 바뀐다. 이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해롤드의 두 번째 자살 시도. 잡지에 나온 심리테스트를 해보라던 어머니는 너는 이러이러하니 이렇겠지라며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테스트를 하고있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숨막혀하던 해롤드는 리볼버에 총을 장전하더니 결국 자기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던 어느날 역시 누군지도모르는 장례식장에서 해롤드는 곧 여든살 생일을 곧 맞이하는 괴짜 할머니 모드를 만난다. 검은색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장례식에 노란 색 우산과 하얀 코트를 입고나타날 정도로 주관이 뚜렷하고 당찬 모드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해롤드의 어머니와 명징한 대비를 이룬다. 영국식 억양을 쓰는 어머니와 거대한 집이 그 크기와 실내 인테리어로 인해 유럽의 고성을 연상시킨다면 모드가 살고있는 작은 트레일러는 갖가지 꽃과 식물이 있고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터프한 드라이버이기도한 모드는 늘 새로운걸 추구하기위해 우리의 삶이 주어졌다고 굳게 믿고있으며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않는데 이러한 보헤미안적 사고방식은 왠지 유럽의 상류귀족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롤드와 그의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내내 상반된 것들의 대조를 통해 코미디를 구성한다. 소년은 죽음에 집착하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세상을 하나둘 배워가는 어린 아이처럼 생의 의지로 약동한다. 모드가 두려운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는 열혈 청춘처럼 누드 모델도 되고 직접 얼음 조각을 한다면 영국 억양을 쓰는 어머니는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사교와 예의 범절을 중시한다.

모드는 해롤드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하나둘씩 쌓아가게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삶을 생각하고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고있는 꽃들이 피고 자라고 죽는 모든 과정이곧 삶이며, 도덕과 윤리 그 이상을 보라고. 그럴때 너의 삶은 자유로워지는거라고. 그 어떤 젊은이보다 쿨하고 개방적인 전대미문의 노인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삶을 다시 사고하게하고 그렇게 모드와 친해지면서 점점 해롤드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걸작으로 분류된다면 노인이 젊은이에게 베푸는 인생의 혜안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있기때문일 것이다. 곧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듯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사를 통하는게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동적인 캐릭터,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삶에 적극적인,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를 흐릿하게만드는 캐릭터의 존재 자체만으로 주제를 구현하고있기때문이다.

이 영화가 컬트로 추앙받는다면 그건 남다른 코미디 방식때문이며 이런 방식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코미디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 해롤드가 행하는 가지각색의 자살시도, 심지어 어머니가 소개해준 여자를 놀래키기위해 할복을 시도하고 그걸 따라하다가 그녀가 허무하게 죽고마는데도 영화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체의 언급도 없다. 또 모드는 절벽에서 바다로 풍덩 빠지지만 다음 장면에서 아무렇지도않게 나온다. 이런 뻔뻔함이 현실감을 저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고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에도 한쪽 팔을 잃은 군인 삼촌의 거수경례나 경찰과의 추격전, 프로이드의 카우치에 거꾸로 눕는등, 기존의 공인받은 사회적 가치나 제도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는 그 기회를 죽음으로 메우려하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젊은이의 죽음마저 자신이 가져가고는 아직도 충만하기만한 자신의 생의 에너지를 젊은이에게 건넨다. 아무리 자살을 해도 죽지않기때문에 해롤드에게 그동안 죽음이란 다다를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일뿐이었다. 해봐야 죽지도 않는 자살을 아무리 골백번 시도해봤자 그에게 죽음은 아직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다 해롤드는 모드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진짜 죽음의 맨얼굴을 대면하고 그제야 모드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 피고 자라고 지는 이 모든 과정이 삶이라고. 온전한 성장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해롤드를 중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 역시도 대부분의 성장영화들이 가르쳐온 교훈을 다시한번 재확인시킨다. 성장하기위해서는 죽음을 대면해야한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덧.1.처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을 봤을때는 이 영화를 보기전이라 몰랐는데 얼마전 다시보다가 버드 코트가 나왔다는걸 그제야 알았다. 30년이란 세월을 지나면서 이 미소년도 많이 변하긴했는데 그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은 어렸을때만큼이나 정감이 가더라만.

2.영화 시작에 나오는 캣 스티븐스의 don't be shy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 엔딩크레딧중에 나온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마다 항상 드는 궁금증. 과연 감독과 작가들은 진정 저 아이들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서 만들고있는걸까? 출연하는 배우에게 한번쯤은 너라면 어떻게했겠니라고 물어본적 있을까? 열살 꼬마든 팔순 노인이든 만드는 이가 그 등장인물에 대한 모든걸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과 심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아이들을 다루는 영화는 좀 달라야하는거아닌가 하고 평소 생각해왔는데 그건 아이들이 너무 소중해서, 아이들은 보호받아야할 대상이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영화를 보는 성인 관객인 내가 중요하기때문이다. 왜곡된 묘사는 (아이들보다 전혀 판단력이라는 측면에서 우월할 바 없는)어른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남기기때문이다. 사실상 아이들은 어른들만큼이나 그들이 어느 시대에 살고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인 개인들의 무리이다. 우리나라에서 9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지금의 삽십대와 2007년을 살고있는 지금 내 또래의 이십대의 삶이 판이하듯 90년대에 십대를 보낸 내 또래들과 2007년 지금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지금의 청소년들의 삶의 간극은 다리가 무너져 건널 수 없는 강과 매한가지이기때문이다. 단적으로말해 고등학교때 처음 인터넷을 접한 나와 초등학교시절부터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고 온라인게임을 즐기기시작한 지금 내 조카또래의 아이들과 대화하기위해서는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얼마전 나는 아이들의 은어를 이해못해 잠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대개 두서너가지 중 하나로 묘사되고있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똑똑한 자식이거나 반대로 부모 속 썩이는 애물단지로서 부모라는 성인 주인공의 삶에 개입하는 조연(주변요인). 주인공으로 나온다면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로맨티스트이거나 기성세대와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도약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의 기로에 서는, 실제라면 스무살이 지나고 한참 후에나 닥칠 인생의 "최종 관문'이나 '최종 심판'에 직면하는 햄릿형 인간. 즉,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 제작자들이 십대를 다룰때 그들은 너무 안이하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오바하고있다는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중고등학교다니던 시절엔 "어른들은 몰라요"나 "학교" 아니면 ebs에서 곧잘 청소년드라마를 볼 수 있었는데 볼 때는 즐겁게봤지만 과연 내가 저 이야기들에 얼마나 공감했었는지를 더듬어보면 뭐라 딱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김영하가 지적했던 '눈물 오리엔탈리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더 직접적으로말해서 꼰대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그리고있지는않은가하는 의문.


따라서 이런 경우 청소년을 다룬 창작물을 두고 작품이 그걸 만든 어른의 시선으로 만들어졌는지아닌지의 여부를 가리는 나 혼자만의 방법이 있다.

첫째, 해당 창작물이 청소년의 기쁨보다 그들의 슬픔을 강조하고 그것을 과장할 때. 둘째, 청소년들의 일상보다 비일상적 사건에 초점을 맞출 때. 셋째, 푸훗하고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지 아니면 감탄이나 한숨을 짓게만드는지. 이 세가지 사례에서 후자의 반응을 유도하면 그건 어른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물론 이건 무척이나 거친 분류임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한번 시험해보시기를)

이렇게 길게 흰소리를 늘어놓은건 결국 트뤼포가 드물게도 이러한 점에서 진정성을 갖춘 작가였다고 말하기위해서라는걸 알아챘을 것이다. 비록 실제 존재하지않는다하더라도 창작자가 자신이 만드는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진실한 애정을 품고있을때 그 영화가 비로소 현실적 질감을 얻는거라고 평소 굳게 믿고있는데 트뤼포야말로 그런 점에서 진정한 박애주의자이다. 이 영화를 보고있으면 등장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싶고 영화 속 선생님들과 각본가 그리고 트뤼포에게는 직접 만나서 존경의 의사표시를 하고싶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어떻게 아이들을 다루고있는지를 묘사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영화 앞에서 한줌의 언어는 그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분명한건 이 영화 안에는 나와 당신과 우리모두의 학창 시절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시계를 바라보며 수업 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친구들 앞에서 재미있는 (야한)이야기를 해주고 친구의 어머니를 짝사랑하고 돈을 벌기위해 친구의 머리를 깎고 부모의 비싼 어떤 장신구보다도 자신의 장난감이 제일 소중한, 그래서 9층에서 떨어져도 털끝하나 다치지않는 어른보다 강한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아이들보다 더 철딱서니없는 애들보다 못한 부모,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재단하려드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부모, 그리고 겉으로는 딱딱하고 무심한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고민하고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미 언급했듯 이 영화엔 보고있으면 유쾌해지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절대로 한없이 맑고 투명하지만은않았던 우리 모두가 거쳐온 '동심'의 시절이 인위적 가감없이 솔직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리셰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꽤 긴 시간동안 수업 아닌 수업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작진이 꼭 전하고싶었을 직접적인 이 메세지는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사과임과 동시에 성인들을 향한 부탁이기도하다. 이러한 이유로 꼭 한번쯤은 성인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 꼭 한번쯤은 우리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런 유쾌한 청소년 드라마를 보고싶다.

덧. 보는내내 한글 자막을 꼭 만들어보고싶었으나...  


최근 기사로서 앤더슨의 영화들이 어떤 레퍼러스의 영향 하에 놓여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목록이다. 원문은 http://www.avclub.com/content/feature/16_films_without_which_wes/2

1.the graduate(1967)
아마도 웨스 앤더슨 감독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은 바로 마이크 니콜스의 독창적인 코미디에 나오는 불만에 가득찬 젊은이로서 이후 앤더슨의 다섯편의 영화들에게까지 고스란히 그 울림이 전해지고있다. 사운드트랙에서의 선구적인 팝음악 사용, 결점이 없는 와이드스크린 화면 구성, 그리고 불확실성과 멜랑콜리에 의해 특권이 무너진 젊은이의 이야기까지. 5월부터 9월까지 사이에 미성숙한 아이와 훨씬 나이많은 여인과의 역동성(<러시모어>), 단일 작곡가에 의해 꽉 채워진 음악선곡(여기서는 폴 사이먼, <스티븐 지수와의 해저생활>에서는 데이빗 보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그들의 부모와 함께 과거로 돌아간 젊은 아이들의 꽉막힌 삶(<로얄 테넌바움>) 그리고 결국엔 만족할만한 해결책은 그리 썩 훌륭한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점까지.

 

2.paper moon(1973)
앤더슨은 조숙한 젊은이, 아이같은 어른 그리고 명백히 복고적인 스타일을 포함하고있는 영화들에 취약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영화들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페이퍼문>을 떠올리게한다. 이 흑백 영화는 파인트 크기의 신동(라이언 오닐의 실제 딸인 테이텀 오닐)을 만난 음탕한 사기꾼(라이언 오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앤더슨처럼 보그다노비치도 그의 최고작에서 미장센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훌륭한 감각을 보여주고있는데(그의 전 부인이자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폴리 플랫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를 통해서 그의 영화는 연금술로 완성된 작은 세계로 거듭난다.

 

3.harold and maude(1971)
<러시모어>에서 캣 스티븐스의 “the wind" 삽입은 영화에서 60,70년대 노래들을 활용한 또다른 멋진 사례이다. 이것은 할 애쉬비의 컬트 클래식 코미디인 <해롤드와 모드>에서 끌어온 팁이기도하다. 이 영화에서 스티븐스의 노래들은 죽음에 사로잡힌 십대소년 해롤드의 등장에 쓰이고있는데 그는 노인 세대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기에 이른다.(비록 제이슨 슈왈츠먼이 빌 머레이와 올리비아 윌리엄스와 맺는 관계는 해롤드가 루스 고든이 연기하는 이른아홉살의 친구 모드와의 맺는 그것보다는 훨씬 정숙한 것이지만 말이다)

 

4.brewster mccloud(1970)
코트는 슬프고 텅빈 얼굴을 한 잃어버린 또 하나의 윌슨 형제다. 로버트 알트만의 <브루스터 맥클라우드>에서 그의 역할은 앤더슨의 강박적인 인물을 앞서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코트는 당시엔 새로웠던 아스트로돔안에 들어가 하늘을 나는 것에 뜨겁게 미쳐있는 소년을 연기하는데, 소년의 굳건한 고집과 끈기는 <바틀 로켓>에서 오웬 윌슨이 실패한 강도질을 하면서 그대로 가져오고있다(그러니 거의 어쩔 수 없이 코트는 앤더슨 영화에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생활>에서 불안한 회계사를 연기한다).

 

5.sullivan's travels(1941)
그러나 인생은 강박을 만들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한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코미디 <설리반의 여행>에서 조엘 맥크리가 연기하는 할리우드 코미디 감독은 중요한 사회적 의의를 갖고있는 <오 형제여 어디로 가는가>라는 영화를 만들려고한다. 부랑자로 분하여 실제 세상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여행을 통해 찾아낸 것에 의해서만 영화를 만들리라 생각한다. 수많은 앤더슨의 캐릭터들처럼 그도 세상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하며 동시에 더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6.the world of henry orient(1964)
< 러시모어>가 그저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면, 거기에 나오는 조숙한 십대는 자신의 조숙함을 더 나은데 쓰는 법을 배웠을까? 그런 점에서 <헨리 오리엔트의 세계>보다 훌륭한 성장 영화는 없었다. 여기서 뉴욕에 사는 두명의 열네살 소녀들은 피터 셀러스가 연기하는 피아니스트를 스토킹한다. 티피 워커와 메리 스패스가 연기하는 소녀들은 짐 헨슨의 테넨바움 아기들 같은데 사춘기의 강박과 끝간데없는 상상을 공유하는 동안 예사롭지않은 표현들이 코믹하게 지나간다. 앤더슨의 캐릭터들이 마치 성인 소설의 세계에 나타난 십대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에 나오는 십대들이 공유하는 한가로운 우정은 이혼의 여파와 성에 눈을 뜨는 과정을 통해 파열된다. 영화의 외관은 부드럽지만 그 중심에는 친숙한 아픔이 자리하고있다.

 

7.the river(1951)
앤더슨에 의해 잘 알려져있다시피 <다즐링 주식회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 르누아르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흑백화면이 테크니컬러로 변화하는 방식만큼이나 대단하다. 모든 장면은 인도에서 촬영되었고 인도에 대한 식민주의자의 시각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그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국취미를 만족시키고있지는않다. 반대로 그는 문화적 조건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존경심을 표하고있다. 비록 앤더슨의 영화가 여행에 관한 것인데 반해 르누아르가 다소간 정지한 상태로 남아있지만 두 영화 모두 명백히 서구 우월주의로부터 기인하고있고 두 편 모두 급진적으로 타문화를 이해하려하는 어떠한 전문가적 태도도 취하고있지않다. <강>과 <다즐링 주식회사>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하고있고 -전자에서 세명의 십대 소녀들이, 그리고 후자에서 세 명의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지만 그들 서로간의 소외와 다양한 개인적 위기들은- 아직 인도가 그들을 변화시키거나 치유하고있지는않고 그들의 삶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위한 문을 제공하고있을뿐이다.

 

8.bande a part(1964)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국외자들>은 수없이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있으며 그들은 그 유명한 댄스 시퀀스에 대한 경건한 오마주를 바치고있다. 그러나 앤더슨의 96년작 <바틀 로켓>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예상하기힘든 달콥쌉싸름한 또다른 범죄코미디인 <바틀 로켓>에는 젋고 매력적인 남자들이 무법자가 된 상황을 연기하고있는데 그중 누구도 설득력을 갖고있지않다. 이 두 영화는 모두 멜랑콜리와 상실감을 갖고있으면서도 동시에 놀라울정도로 부드럽게 공존하는 젊고 쾌활한 캐릭터들을 공유하고있다.

 

9.a boy named charlie brown(1969)
<로얄 테넌바움> 사운드트랙에 “christmas time is here"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앤더슨이 찰스 슐츠의 페티시이기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캐릭터들에게 입히는 유니폼은 찰리 브라운의 지그재그 셔츠나 루시의 파란 드레스, 그리고 <피너츠>와 앤더슨의 심각한 코미디에 공통적으로 흐르고있는 현명한 멜랑콜리한 기운과 유사한 것이다. <a boy named charlie brown>에는 앤더슨 영화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sic transit gloria"라는 주제가 울려퍼진다. 찰리 브라운은 지역의 철자맞추기 대회에서 실력을 뽐내지만 전국대회에서는 고전한다. 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때 친구들은 그를 놀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찰리를 받아들이는데 찰리는 슬로우 모션으로 걷고 그러는동안 "ooh la la"가 흘러나온다.

 

10.stolen kisses(1968)
앤더슨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자신들에게는 한번도 주어지지않은 법칙에 의해 굴러가고있는건 아닌가하고 자주 의심한다. 그리고 이 특징은 프랑수와 트뤼포의 앙투안 두와넬과 공유하는 것이기도하다. 1959년작 <400번의 구타>부터 20년 후 <사랑의 도피>까지 총 4편의 장편과 한편의 단편에서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한 두와넬은 <훔친 키스>에서 일련의 직업들을 거치고 뒤죽박죽인 연애를 하며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두걸음쯤 뒤에 처져있다. 그러나 그 거리는 앤더슨으로 하여금 트뤼포 영화들의 사려깊고 현명한 톤을 빌리게끔하여 그가 자주 반복하고있는 관점(앤더슨은 뿌리깊은 영향력의 원천으로서 트뤼포를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않는다)을 제공하고있다.

 

11.big deal on madonna street(1958)
비록 <바틀 로켓>의 기발함은 없지만, 마리오 모니첼리의 클래식 패러디는 한탕을 하려고 하는 일련의 바보같은 범죄자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앞에 나온 강탈 영화와 다소간 유사하다. 오웬 윌슨이 연기하는 디그넌과 그의 패거리들처럼 <마돈나 거리에서의 한탕>에 나오는 이들은 한번도 범죄로부터 진정 떨어져본 적이 없으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강도질을 계속하게한다. 놓칠 수 없는 그들의 이번 계획은 마돈나 스트리트에 있는 전당포 옆에 자리한 빈 아파트에 파고드는 것으로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얇은 벽을 손쉽게 부숴 둘로 만든 다음 반대편에 있는 무방비의 금고에 접근하는 것이다. 쉽게 들리지만 패거리의 유일한 전문가는 최근 하는 일이 없는 은퇴한 금고 전문가뿐이고, 유리턱을 가진 권투선수와 여동생의 정숙함에 사로잡혀있는 불같은 성질의 시실리아 사람이 나머지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남자들이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1995년에 나온 능숙한 리메이크인 <팔루카빌>에서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이런 종류의 일에서 벗어나지못한다.

 

12.local hero(1983)
앤더슨의 영화들은 종종 감정적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우울한 캐릭터들을 중심에 놓곤한다. <러시모어>와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 생활>의 빌 머레이와 <로얄 테넨바움>의 윌슨 형제를 떠올려보라. 빌 포사이스의 사랑받는 컬트 코미디 <로컬 히어로>에서 사업가 피터 리거트는 그의 사장의 지시로 마법과 경이로 가득찬 사랑스러운 스코틀랜드 마을로의 여행을 통해 어떤 심각한 일들로부터 다시 일어선다. 리거트의 우울한 표정은 보스인 버트 랭커스터의 그것과 비교되는데 심술궃은 늙은 군주인 그는 자신을 화나게하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달아나 스코틀랜드 마을이 갖고있는 희열에 전염된다. 고맙게도 앤더슨과 포사이스 영화의 우울한 이들은 그들의 우울한 캐릭터에 동정심을 전할 줄 아는 매우 따뜻한 창조자들에 의해 생생한 삶을 가져다주는 세상에 존재할만큼 운이 좋다.

 

13.the king of comedy(1983)
마틴 스코시즈는 앤더슨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정신세계를 발견한 이후 그의 경력 초기부터 공공연한 지지자 역할을 해왔다. 앤더슨의 작업에서는 <비열한 거리>나 <성난 황소>같은 거칢은 없지만 두 감독 모두 공공연히 막스 오퓔스와 마이클 파웰에 대한 관심을 공유해왔다. <코미디의 왕>에서 스코시즈의 영화적 자양분과 네오리얼리스트적 측면에 대한 균형감각은 앤더슨과 흡사하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고있는 명성에 굶주린 루퍼트 펍킨의 초상은 <러시모어>의 제이슨 슈왈츠먼이나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 생활>의 빌 머레이를 연상케한다. 이 세사람 모두 위험할정도로 망상에 빠져있으며 이를 저지하기란 불가능하다.

 

14.metropolitan(1990)
휘트 스틸먼의 데뷔작이 불러온 컬트적 인기는 인디영화 제작자들에게 나약하고 박식한, 그러면서도 모호하고 어두운 관심사를 갖고있는 성인들의 세계가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걸 보여주었다. 뉴욕 영화들의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탄>은 <로얄 테넌바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두 편 모두 계급이 산산조각난 꿈의 도시를 스케치하고, 인간의 허영심에 의해 너무 빨리 녹슬어버린 황금 시대를 이야기하고있다.

 

15.a thousand clowns(1965)
J.D 샐린저가 자신의 작품 중 어느 것도 각색을 허락하지않았기때문에 영화감독과 작가들은 대사나 상황 그리고 까칠한 컬트 작가의 공격성같은 전체적인 태도등을 통해서 뒷구멍으로나마 슬쩍 샐린저를 끼워넣는 방법을 찾아야만했다. 앤더슨의 초기 영화들은 결정적으로 샐린저'스러운'톤을 갖고있는데 -<바틀 로켓>에서의 남매간의 관계는 홀든과 피비의 그것 그대로다- 이것은 허브 가드너가 쓴 연극이자 영화인 <a thousand clowns>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샐린저의 우상파괴적인 이상주의가 드리워져있다. 제이슨 로바즈는 그의 조카에게 어떻게하면 뉴욕의 게으름뱅이들처럼 삶을 멋지게 살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기를 즐기는 불성실한 tv작가를 연기한다. 그러나 자기 일에 끈덕지게 달라붙지않는다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양육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로바즈의 평범함을 동반한 불쾌함은 변덕스러운 성향과 마찬가지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이는 스티븐 지수에게서 -그리고 홀든 콜필드- 슬쩍 엿보인다.

 

16.murmur of the heart(1971)
그의 영화이력을 돌아보건대 앤더슨은 문화적 무관심을 조롱하고 상위계급의 특권을 매혹적으로 그려내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캐릭터에게 기인한다. 앤더슨 영화의 캐릭터들은 <마음의 속삭임>의 주인공인 지방에 사는 10대 소년 베누아 페로와 비슷한데 그는 부(富)가 허락하는 이점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성장통에 대처한다. 쇼킹한 클라이맥스의 연기를 통해 그의 소년적 불안함은 말그대로 자궁으로의 회귀로 이어진다.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루이 말은 자기반영적 주인공을 이상한 방식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거만함에 약간의 노스탤지어를 섞어 재현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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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나오지만 앤더슨은 트뤼포를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고있고 다른 기사를 보면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 영화는 <포켓 머니>라고한다.

 

큰 스크린으로는 처음봤지만 전체적으로는 세번째 본 <암흑가의 세사람>,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1.우선 중간에 앉아있던 관객들. 매장면도 아니고 매컷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 계속 웃어대는데 극장에서 예의도 아니거니와 은근히 기분나빠지게하더라만.

2.오승욱 감독에게 묻고싶었던 질문: 도대체 마테이가 집에 들어오는 '고양이 장면'은 뭘까? 영화에서 총 두번 나오는데 그 내용은 완전히 똑같다. 집에 들어와 코트를 의자 위에 던져두고 고양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욕실에 들어가 불을켜고 뜨거운 물을 받는다. 부엌에 들어가 불을 켜고 냉장고문을 열어 고양이 줄 먹이를 꺼낸다. 그다음 고양이들을 불러온다. 이 중 첫번째 장면은 내 느낌상으로 약 2,3여분간 지속되고 두번째에서는 똑같은 과정이 보다 짧게 연출되어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 그 내용은 매번 똑같다. 이 장면은 마테이 반장의 유일한 사생활 장면으로서 이상한건 두번째 장면이 끝나고나면 사실상 약간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로 마테이가 장물아비로 위장해 상티의 술집에서 코레이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상으로는 최소 하루가 지난 다음이란건데. 선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변하고마는 마테이가 악인으로 변하기직전 유예되는 순간일까?

3.또하나 궁금한건 생략되거나 건너뛴 부분. 멜빌은 낚시에도 일가견이 있는걸까? 리코의 집에서 자고있던 여자는 분명 코리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틀림없다. 도대체 코리는 무슨일을 꾸몄다가 감옥에 들어간걸까. 물론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코리와 리코가 같이 한 일이 잘못되어 코리만 붙잡혔는데 리코의 이름을 불지않았으며 그래서 5년을 썩었고 그동안 리코는 코리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그다음 궁금증은 역시 얀센과 마테이. 얀센은 마테이와 동기인 경찰 출신, 경찰직에 회의를 느껴서(그의 마지막 대사 '경찰은 역시 멍청하군')그만두고 폐인의 삶을 살고있다. 그리고 내사과 경찰은 마테이가 전형적인 코르시카인처럼 보이지않는다면서 그의 기록을 읽어본다. 하지만 관객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이 영화에는 관객의 상상으로 짐작해야하는 부분들이 꽤 있다.

4.이상하게 세사람 사이에서는 일말의 배신의 기운같은건 전혀 배제된채 서로가 서로를 굳게 신뢰한다. 그들을 배신하는건 그 외부의 인물들. 이 영화 그러고보니 정말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5.결국 세번째 보게되자 이번엔 마테이를 중심으로 봤다. 처음 기차장면에서보면 그는 투철한 사명감보다는 지치고 힘들어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보인다. 선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변하는 예를 보여주는건 결국 이 영화에서 상티와 마테이뿐인데 마테이는 처음엔 용의자는 범인으로 생각하지않으며 자신은 이미 얼굴이 팔렸기때문에 직접 위장은 하지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킨다고말한다. 그러나 그는 보젤을 범인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뿐만아니라 결말부엔 장물아비로 위장해서 코리 일행을 죽음으로 이끄는 치사한 수를 쓴다.

6.오승욱 감독은 코리와 보젤이 처음 대면하는 '담배갑'장면이 무척 재미있고 뛰어난 연출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한손엔 총 다른손엔 담배 그다음 라이터를 던짐으로써 보젤은 총을 집어넣고 땅에 떨어진 라이터를 줍게되면서 그제야 두사람이 담배를 친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좀 다르게봤다. 그 장면에서 보젤은 담배갑을 받기전 '내가 트렁크에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올라타는걸 지켜봤나?"라고 묻는다. 그리고 코리는 "물론. 그렇지않았으면 숨쉬라고 나오지도않게했지"라고 대답한다. 바로 이 장면이 힌트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의 앞에 있었던 검문 장면을 다시 되돌아보라. 코리는 트렁크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않자 대번에 뭔가 잘못됐음을, 정확히는 그 안에 누가 타고있음을 직감한다. 그 다음이 바로 두사람이 대면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코리는 보젤이 올라타는걸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도록 편집이 되어있다. 관객이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않은 것이다. 우기면 뭐라할 수 없지만. 즉 이런 것이다. 코리는 검문과정에서 차안에 누군가 타고있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보젤의 생명의 은인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위해 자신이 이미 휴게소에서부터 보젤이 올라타는걸 봤다고 거짓말한다. 그 다음이 바로 담배갑 장면이다. 처음보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있는 자를 좋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코리는 담배갑을 던지고 그 다음에 라이터를 던지면서 보젤의 손에서 총을 놓게함과 동시에 땅에 떨어진 라이터를 줍게함으로써 다시한번 관계의 주도권을 재확인한다. 다시말해 코리가 보젤에게 내가 너의 생명의 은인이니까 넌 그걸 잊지말라는 쿨한 경고쯤 될까. 물론 결과만 놓고보면 친해지는 장면이지만 그건 결과일뿐이고 그 과정의 경로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다.

7.오승욱 감독과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한 얘기들을 짧게 요약하면 요즘 영화같았으면 아예 보여주지도않았을 장면들을 무던히 길게 보여주는건 일종의 종교적 의식처럼 생각했던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으로서 영화 속 인물을 죽일 때 갖춰야할 윤리적 입장이나 판단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있는 중이다. 멜빌의 인물들은 기술적 장인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이 맡은 임무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한 프로페셔널들이지만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미숙한 나머지 결국 실패해버리고만다.

8.프로그래머도 말했지만 나역시 궁금했던 대사.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보젤이 코리에게 도망가라고한다음 마테이와 나누는 그 대사. 마테이가 묻는다. "왜 내가 누군지 말하지않았지?" 보젤의 대답 "그랬다면 도망가지않았을테니까?" 오승욱 감독은 마테이의 정체를 말했다면 코리가 그 자리에서 마테이를 쏴죽였을거기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보젤은 마테이가 죽지않기를 바란단말일까?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인 두 형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대비해보여준 다음 본 줄거리를 시작한다. 비서와 운전기사를 둔걸보니 뭔지몰라도 크게 성공한듯 보이는 동생 다케루, 알고보니 사진작가인 그는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위해 고향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런데 그는 검은색 상복을 입지않고 그냥 손에 들고 나간다. 도착한 다음 갈아입겠다는거다. 고향에 도착한 다케루는 간만에 얼굴을 마주한 아버지와 만나자마자 싸운다.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가듯 고향을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고향에 묶어두려는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다케루. 전형적인 가부장 아니랄까봐 아버지는 대번에 자기 앞에 놓인 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바로 그때 형 미노루는 허겁지겁 엎어진 상을 치우고 마룻바닥에 쏟아진 술을 걸레로 닦는다. 마치 자기의 잘못인냥 열심히 바닥을 닦는 미노루, 그런데 무릎을 꿇은 그의 발뒷꿈치 위로 아직 상 위에 엎어져있는 술병을 타고 술이 한방울씩 떨어지고있다. 자신은 돌보지않고 가족을 먼저 챙기는 남자.

 다케루는 사진을 찍는 사람, 따라서 그가 사물을 보기위해서는 사물과 눈 앞에 렌즈가 놓여야하고 그것이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쉽게 도망갈 수 있는. 반면 미노루는 좀체 세상 속으로 섞이지못하는 남자다. 여기서 흥미로운건 이 영화에는 결국 단 한명의 여자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리 위에서 죽어버리는 치에코는 그저 사건을 끌어가기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남은 두 남자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들을 링 안으로 불러내는 심판에 가깝다. 남는건 각기 다른 두형제, 네 남자다. 처음 영화에서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건 한 여자의 죽음, 즉 어머니의 장례식이다. 초반부터 한 여자의 부재를 알리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결국 또 한 명의 여자를 죽이고나서야 본 궤도에 오른다. 이 집안 남자들에게 여자는 치명적 함정이란말인가? 하쓰미 계곡에서 다케루는 분명히 형과 치에코가 엎치락뒤치락 하던 다리 위의 상황을 온전히 목격하고도 몰랐던 것처럼 형에게 행동한다. 치에코가 죽기를 바랬던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보고도 못본척 알아도 모른척, 늘 그랬듯 다시한번 사물과 진실 앞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그의 목에 라이카가 걸려있었음을 상기하라)그녀의 사망에 대한 진실 여부를 잠시 미뤄둔다면 어쨌든 그렇게 또 한명의 여자가 이 집안으로부터 제거(배제)되자 진심이 없는 치사한 수컷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이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남자들의 세계를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기시작한다. 다케루 형제와 이사무 형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한데 형과 아우 사이의 위치는 두 형제 사이에서 묘하게 역전되지만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유사하다. 다케루 형제에서는 동생보다 못난 미노루가 고향에 남지만 이사무 형제의 경우엔 공부를 잘했던 형 오사무가 도쿄로 떠나 변호사가 되고 동생인 이사무가 고향에 남아 주유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고향에 남은 자들은 미약하게나마 여성의 ‘지위’를 ‘역할’한다. 그래서 그들은 밥을 하고 빨래를 넌다.

하지만 이 남자들은 한번도 진심인 적 없고 늘 가식적인데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하듯 괜히 화를 내고 저혼자 분에 겨웠던지 슬쩍 도망간다. 면회 도중 드디어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며 분노하는 미노루와 그런 형으로부터 자신의 치부와 죄의식이 낱낱이 밝혀지자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태도를 뒤집는 다케루도 마찬가지. 따라서 그건 다케루가 기억을 제대로 하고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숨기고싶었던 자신의 내면이 까발려졌을때 튀어나온 반사적 대응일뿐.

이토록 수컷들의 나약함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면서 바늘하나 들어갈 구석없는 치밀한 심리 대결을 보여주던 감독은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도 이 수컷들에게 옮았는지 괜한 사족에 가까운 에필로그를 붙여놨는데 다케루가 집에서 형제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옛날 8미리 테입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차갑긴해도 훨씬 감독의 애초 의도에 가까운 결말이 되었을듯하다.


 

빔 벤더스를 전혀 좋아하지않지만 이 영화만은 예외다.(사실 90년대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는 아예 관심밖이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벤더스 영화. 꽉짜인 플롯이나 대사보다는 로비 뮐러의 유려한 촬영과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침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있는데 무엇보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된건 영화속 도시들 때문이다.

여기서 빔 벤더스는 아직 출간도 되지않은 상태였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 리플리가 유럽의 미국인임을 표나게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이 잘 알고있는 도시들의 낯선 풍경을 제시하고있다. 그에게 공간이란 곧 도시이고 시간은 언제나 현재일뿐이다. 파리, 함부르그, 뉴욕이라는 코스모폴리스를 무대로 (실제 그곳이 어디이든 도시라고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각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건축물이 보이지만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이 영화속 파리는 아이보리색 저층 건물들이 아니라 고층 빌딩이 올라가는 회색빛 도시이고 함부르그는 허허벌판에 바닷바람이 부는 항구이며 그 도시들의 내부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지하철 역과 익명의 사람들이 부딪히는 기차 그리고 녹색 조명의 당구대와 빨간 하늘을 뒤로한 술집이 있는 스릴러의 공간적 배경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세상은 점차 구체적 지명이 사라지고 거대한 하나의 도시가, 검푸른 하늘 아래 축축한 회색빛의 인간미없는 차가운 도시로 재편된다. 그래서 에펠탑이 보여도 넓은 하늘 아래 홀로 우뚝 선 에펠탑이 아니라 고층건물과 나란히 선 에펠탑, 리플리의 걸음 위로 아무런 관련없이 불쑥 등장하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 항구의 부산한 풍경과 입김이 나오는 차가운 공기와 젖은 아스팔트의 함부르그가 보인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이 차가운 도시들을 넘나들면서 점점 악당이 되어간다.

로케이션의 효율적 운용과 적색 및 녹색을 활용한 조명을 통해 영화는 위의 세 도시를 비정한 스릴러 무대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하고있다. <도시의 앨리스>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보듯 필모그래피 내내 빔 벤더스는 도시와 도시의 풍경들을 재해석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고 이 영화는 그중에서 가장 개성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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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가 길의 왕이라면 짐 자무쉬는 길 위의 구경꾼 정도가 되려나. 그에겐 길위에 있으면서도 늘 한발짝 떨어져서 눈앞의 풍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농담이나 늘어놓는 수다쟁이같은 면모가 있다. 장편데뷔작 <천국보다 낯선>부터 <다운 바이 로>, <미스테리 트레인>, <지상의 밤>, <데드맨> 모두 로드무비다.

 <다운바이로>는 처음엔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마지막엔 넉넉하고 유쾌한 로드무비로 끝난다. 미국남부 루이지애나의 풍경을 보여주기위해서 누구나 몇십번씩은 보고 들었을법한 이야기를 '이건 당신들 모두 알고있는 바로 그거라구. 별 거 없어'하는 식으로 전개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남자들이 탈옥을 해서 다들 붙잡히지않고 흩어진다는 이야기. 하지만 어처구니없이 누명을 쓰고 황당하게 탈옥을 해서 한갓진 오후 햇살 아래 느긋하게 도망치는 이야기라면 이건 뭔가 확실히 다르다. 멜빌이라면 말한마디없이 몇분동안 탈옥장면을 공들여보여줄 것이고 마이클 베이라면 도망가는 중에 차 열대정도는 거뜬히 부숴버리는 카체이스씬 하나쯤 기가막히게 뽑아냈을테지만 자무쉬의 관심은 전혀 그런데 있지않다. 탈옥과정은 통째로 건너뛴채 그냥 웃으면서 하수구를 달려나오는 세사람의 표정만 잡아낸 (탈옥의 '흔적'만 있는) 이상한 탈옥씬을 지나면 도피장면에서는 아직 도시문명으로부터 침해받지않은 멋드러진 미국남부의 자연풍광을 뽑아낸다. 배를타고 천천히 늪을 헤어나와 토끼를 구워먹고 우연히 사람좋은 이태리 여인네를 만나(물론 이 역할은 니콜레타 브라쉬가 맡았다.) 밥도 얻어먹고 술도 나눠마시고 잠도 자고 옷도 바꿔입고 그렇게 헤어진다. 심지어 세명 중 이태리인 밥은 그녀와 함께 그곳에 정착하기까지하고있으니 도저히 그들에겐 다시 붙잡힐거라는 두려움따위는 보이지않는다. 그냥 먹고마시고 수다떨고 춤추고 노래할뿐. 여기엔 미국남부의 습하고 더운날씨를 영화내내 그대로 끌어오려는 자무쉬의 시도가 숨어있다. 내러티브가 아닌 배경의 공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겠다는 야심말이다. 등장인물은 딱히 착하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으며 뭐하나 작정하고 해보려는 의지같은건 눈에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냥 게으른 루저들이지만 그들의 대사하나 행동하나에는 서로에 대한 무심한 애정과 썰렁하고 나른한 유머가 있고 이같은 대책없는 낙천성이 관객을 끝까지 흐뭇하게만든다. 

 한가지 꼭 짚고갈점은 역시 로비 뮐러의 카메라. 그는 여기서 에드워드 호퍼 그림에서나 나올법한 각도 즉, 좌우 45도 에서 찍은 비스듬한 화면을 고집하므로써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이게하는 그림을 뽑아낸다. 붙어있는 두 감방을 계속 좌우로 비스듬히 왔다갔다하며 소개하는 감옥장면 그리고 배를 타고 늪을 건널때 보여주는 트랙킹씬은 단연코 이 영화를 로드무비라면 응당 갖추어야할 길 위의 그림중에서도 최고로 손꼽게 만든다.

 덧. 로베르토 베니니의 최근작 <호랑이와 눈>에 톰 웨이츠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오랜만에 두사람을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 <다운바이로>를 찾아 보게된 것도 역시 웨이츠 영감과 <rain dogs>앨범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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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눈에도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배웅나온 친구에게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약간 들떠있는 표정에서 전형적인 여행자의 설레임도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그건 조금씩 나에겐 사그라져가는 감정이었다. 집을 떠나온지 한달도 채 안됐지만 제대로 먹지도못하고 숙소를 정하고 지칠때까지 걷다가 돌아와 저녁마다 남은 예산을 확인해보는 일은 이제 나에겐 그저 또다른 일상이었으니까.

 그렇게 저녁9시 비엔나발베니스행 야간열차가 출발했다. 나초스낵을 먹으며 두남자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나에겐 눈길한번 주지않았다. 물론 나도 그편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워하는 두남자가 왠지모르게 불안해보였다고하면 그냥 선입견일뿐이었을까. 그러나 한시간도 안되어 그 불안감은 구체화되었다. 

 어느나라 경찰인지도 알 수 없는 그들은 모든 승객들에게 여권 제시를 요구했다. 통상적인 절차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쓸데없이 권위적이었고 여권을 제시하지못했던 두남자에게는 더 그랬다. 그들은 일부러 경찰의 말을 못알아듣는 척하는 것 같기도했지만 자신들은 아무 문제없다는듯한 제스처를 계속 취했다. 결국 다른 두명의 경찰까지 합세해 총 네명이 나와 그들이 앉은 좌석앞으로 모여들었고 나중에 합세한 두 경찰의 눈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인인 내가 보였다. 그들은 내게 다시 여권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난 이미 끝났다며 거절했다. 그제야 먼저 조사했던 경찰이 독일어로 난 신경쓰지말라며 나중에 온 그 경찰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인지 명령인지모를 말들이 계속됐고 두남자는 계속 자신들은 못 알아듣고 모르겠다는 시늉만 계속했다. 결국 경찰들은 두 남자를 일으켜세웠고 차량을 빠져나갔다. 텅빈 맞은편 좌석엔 그들이 먹었던 나초과자봉지만이 남았다.

 그들이 정말 불법체류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말이 통하지않는 나와 똑같은 여행자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씩 그 기억을 떠올릴때면 자연스레 그들의 향후 행방이 궁금해진다. 다음 역에서 내려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불법체류자 신분이 확인되어 그들이 왔던 곳으로 추방을 당했을수도있고 아니면 유럽지역 거주자임이 확인됐을수도 있고 어쩌면 주머니에서 여권이 나와 다시 여행을 시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의 눈빛을 분명히 기억하고있다. 그것은 속이려해도 속일 수 없는 여행자만의 유유자적하는 허영과는 거리가 먼 신산한 삶이 가져온 피곤으로 가득차있었다. 정말 그들이 다른 땅에서 뭔가를 새로 시작해보려했다면 결국 무위에 돌아간셈이고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했을것이다. 도착은 커녕 기차가 떠나는 곳에서부터 들떠있게만들었던 그들의 섣부른 희망은 그렇게 다시한번 좌절로 귀결해버렸다.

 <인디스월드>의 주인공인 소년 자말과 청년 에나야트는 런던으로 가기위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파키스탄, 이란, 터키, 이태리, 프랑스를 경유하는 불가능해보이는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다. 결국 자말만이 런던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이 경유지 어느곳에 있든, 삶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지지는않는다. 애초에 밀입국자일뿐인 그들에게는 안락한 집이나 안정적인 직업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반복될 뿐이다. 거기엔 유랑자의 뜬구름잡는 방랑의식이 아닌 절박한 생의 의지만이 가득차있을뿐이고 그렇기때문에 흙먼지날리는 사막에서 산뜻한 서구의 도시로 그 풍경이 바뀌어도 영어로된 농담하나 알아듣지못하는 에나야트가 그곳에서 행복할리는 없을 것이다. 탈출계획이 도대체 중간경유지마다 어떻게 브로커에게 전해지고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고있는지를 몸소 경험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피난한 난민이 역설적이게도 서구행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푼의 돈과 생명을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의 간악함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곧 ‘이 세상안에서’ 통용되는 기본적 룰이라는 불편한 진실임을 관객은 재확인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3년전 그날밤의 기억이 떠오른건 사실 그리 옳지못할 수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 자체에 이미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심리적우월감이 은연중에 내재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끌고나가던 경찰들이 보여준 다분히 억압적이며 폭력적이었던 분위기는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이 경험한 그것과 크게 달라보이지않았다. 그 경찰들은 악행을 저지른게아니라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두사람과 같이 싸잡아 '문제있어보이는 아시아인'으로 분류된 잠깐동안 내가 느꼈던 불안감을 되짚어볼때 내 판단이 그렇게 틀린 것 같지는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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