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오펜하이머의 <Exit Right>(2015)은 앨저 히스를 고발한 장본인인 위태커 챔버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미국인 우파(로의) 전향자의 삶을 전향에 초점을 두어 재구성한 책이다. 이들은 일본처럼 국가 권력에 의한 물리적 폭력 및 정신적 압박을 받은 끝에 공식적인 전향 선언이나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이 아닌 자서전을 포함한 문필 활동, 연설, 강연 등을 통해 기꺼이 스스로 전향 이유를 밝혔다. 살아온 시대 배경도, 삶의 이력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사망 직전에 비로소 고백한 어머니를 통해 뒤늦게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된 히친스까지 포함하면 여섯 명 중 셋이 유대인이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이도 셋인데 이는 저자 오펜하이머에게는 모두 해당하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아이비 리그 출신 미국 유대인과 전향 간의 모종의 관계성을 규명한 책인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다른 다섯 명과 거의 어떠한 교집합도 없는 로널드 레이건이 중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떤 기준에 의해 이들 여섯 명을 골랐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끝까지 읽어봐야겠다.

 

조지 패커는 미국 우파 전향자들의 전향 동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소비에트로 대변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자행한 숙청과 폭력,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 못지않은 계급에 의한 위계와 권위주의 통치 등의 모순과 부조리를 목격했기 때문에/ 지하 활동에 불가피한 격리, 비밀 유지, 상습적 거짓말 등의 일탈 행위 등을 견디지 못해서/ 미국 리버럴리즘의 주요 원칙이자 대의인 다원주의 및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유주의를 혐오하게 되고 그 대안으로 보수주의를 선택하게돼서/ 정세 판단의 결과 더 이상 공산주의에 기대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해도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신념에 강하게 헌신했을 정도로 목적과 대의를 향한 집착이 좌파 사상의 대체제를 찾은 끝에 종교 정확히는 기독교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도 전향하게 되는 경우/ 보수주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유주의를 경멸하는 개인적 성향이 자연스레 좋았던 옛 시절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로 회귀하게 되어서(특히 이렇게 공산주의는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도 마뜩치않아 우파 보수주의를 택했다는 이들에게서는 더러 '내가 변한게 아니라 자유주의가 변했을 뿐이고, 나는 그대로이고 바뀐건 민주당이다'라는 궤변도 보게된다)/ 30년대 대공황을 경험한 끝에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깨닫고서는 체제 전복보다는 체제 안에서 정부의 통치 공학에 힘을 보태기로 하거나/ 순수하게 이론적 관점에서 마르크스 변증법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이념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전히 사적인 이해 득실을 따라서 즉 돈, 명성, 사회적 지위 등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전향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공산주의 및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그에 헌신했던 자신의 삶도 같이 실패했다는 비관적 판단이 선행한다.

 

그럼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떨까. 이 책의 주제인 전향 이유에 초점을 맞춰 거칠게 본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차 대전을 지지하고 전시하 영국민을 격려했던 조지 오웰과 자신을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스스로를 21세기판 오웰이라 여기며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을 옹호했고,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자신과 정치적 신념을 공유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을 목격한 끝에 그간 침묵했던 좌파의 오류와 실패를 지적하고 그들의 위선을 직접 벗겨내기로 한다. 연기자 노조 임원까지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은 생계를 위해 선택한, 본업과는 제법 거리가 먼 홍보 목적의 기업 강연 여행을 하는 동안 점차 노동자보다 사용자와 자본가의 논리를 내면화는 한편, <내셔널 리뷰> 같은 보수지와 위태커 챔버스의 자서전을 탐독한 끝에 우파로 돌아선 다음 자신의 천부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을 활용해 우파 이데올로그로 거듭나더니 마침내 백악관까지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코멘터리> 편집장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물질적 보상의 달콤함을 맛 본 노먼 포도레츠는 자신이 동경하던 노먼 메일러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하고, 남들은 쉽게 밖으로 발설하지 않는 인종에 대한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았던 에세이의 성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활용해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가 좌파 동료들로부터 집단적 거부를 당하고는 종교적 계시를 접한다. 이들 여섯 명 중 가장 앞선 시대를 살았던 대표적인 미국의 우파 전향자인 챔버스와 제임스 버넘은 공통적으로 스탈린의 대숙청과 독소조약 체결로부터 충격을 받고는 스탈린 정권 비판 수준이 아닌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로부터의 절연을 실행한다.

 

이론과 실천의 격차를 (경험이 아닌) 목격하고 실망한 나머지 미숙했던 실천이나 이론의 적용을 탓하는게 아니라 아예 신념 자체를 철회하는 과정은 충분히 있을법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한 쪽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데 실패한 소비에트 '정권'만을 비판한다면 그 반대 쪽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 신념 자체를 거부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향한 철저한 자아비판까지 행한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최우등생이었고 학자로서도 전망이 밝았던 제임스 버넘의 전향은 주목할만하다. 그의 저서 <관리자 혁명>(1941)은 이른 시점에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그 자체로 높은 지적 성취이자 동시에 정교한 전향 선언이다. 탁월한 지성을 갖춘 사람답게 버넘에게는 늘 체제와 목적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중 가장 합당한 선택지처럼 보였다. 그런만큼 그의 전향은 이 책의 등장 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드라마틱했는데, 트로츠키와 직접 주고받은 논전은 나중에는 조야한 수준까지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이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다. 불과 몇 해 전 <퇴각하는 지식인들>이라는 글로 우파 전향자들을 비판했던 이가 그로부터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비판하던 바로 그 대상이 됐다는 것은 일견 조소를 당할만한 일이기는 하나, 정작 트로츠키 분파는 그의 전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가 절실하지 않음을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부유한 성장 배경,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 그리고 혁명 세력 이외에도 자신과 세상을 연결할 다른 수많은 연결고리가 그에겐 남아있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는 절실한 기대와 달리 인텔리겐치아 버넘에게 트로츠키주의는 지적인 작업의 일환이자 그 자체가 오롯한 지적 구조물이었기에 처음 접할 때 만큼이나 떨어져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본 것이다. 버넘의 옛 동지들이 놀란건 그가 전향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정도가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의 내용을 하나하나 공개적으로 부정해나갔다.

 

젊었을 적부터 늘 현대 사회의 위기를 근심해온 위태커 챔버스는 공산주의가 결코 그 위기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계시를 어느 날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없이는 그가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조우한 '신'이야말로 또다른 대의의 연장임을, 마르크스주의의 대체물임을 그는 과연 몰랐을까. 대개의 우파 전향자들이 공유하는 종교(정확히는 기독교)에의 헌신이 대의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보이는 공통점이라는 점에서 챔버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이 의미하는 바를 날카롭게 간파한 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종교세계 자체로의 퇴폐는 거의 항상 현세적 개인의 현세적 죄를 인간 일반의 원죄로 해소해버린다는 관념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 이 현세적 개인 책임의 해소라는 관련."

 

이렇게 본다면 우파 전향자의 종교적 헌신은 죄책감의 우회적 고백이자 현실 도피 그리고 책임을 거부하는 비윤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매우 크고 편안한 울타리를 벗어나 정반대편에 있는 또다른 크고 편안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건 선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반쯤 정해진 필연에 더 가까운게 아닐까. 과거의 공산주의자가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는건 정말 방향을 바꾼걸까. 아니면 훨씬 멀리있는 동일한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경유지를 살짝 바꿨을뿐인걸까.

 

노먼 포도레츠는 늘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은 주장을 한다면 두려워 않고 밀어붙이는 강한 배짱도 있었다. 흑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솔직히 밝혀 우호적인 반응을 받았던 것처럼 좌파의 위선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랬다. "명쾌함, 책무, 종교, 권위, 전통적 성별,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다시 명쾌함", "진리는 간단하다. 심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좌파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거부하고 유명 인사가 되고 싶다고 선언한 셈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좌파로 규정했던 데이빗 호로위츠는 자신의 지인들이 같은 좌파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을 결정적인 전향의 동기로 삼는다. 흑인 시민권 운동을 이끌고 관련인들을 변호했던 저명한 여성 변호사가 자신의 클라이언트이자 연인으로부터 살해됐을 때 그는 좌파 내부에 여전히 팽배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비판하기로 한다. 게다가 이 사건은 그보다 먼저 있었던, 휴이 뉴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의심되는 여성 활동가 살인 사건의 반복이었다. 그렇다면 호로위츠는 정확히 말해 사람에 실망했지 신념 자체에 실망한건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챔버스와 버넘의 또다른 반복이라 할만하다.

 

히친스의 결정적 전향 동기는 보편적 정의감(거기에 더해지는 일말의 공명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전 개전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허구성이 훗날 드러나면서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이미 그의 신체가 조금씩 스러지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가 당시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대해 생전에 공개적으로 후회나 유감을 표명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언젠가 훗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오판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회의나 두려움 같은건 처음부터 그의 고려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가용 정보만으로 결정한 자신의 스탠스에 대한 확신과 명분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을 자처하는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을테니.

 

전향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사상의 전환이라 규정한 츠루미 슌스케의 정의를 엄격하고 좁게 적용한다면 이 여섯 명을 '전향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한자 조합어 '전향'(転向)이 우익이 득세하던 1930년대 일본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최초 고안된 개념임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용어를 채택하지 않는 한 기표만 전유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의해 '강제'된 '전환'이 아니라면 물어야 할 질문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 전환이 진정 자발적인지의 여부이다. 국가 내지는 공권력이라는 강고한 타자로부터 독립된 주체적 선택인가라는 소극적인 의미의 자발성을 묻는게 아니라, 전향자의 결단이 어떠한 '내재적'인 논리로부터 파생했는지를 세세하게 따져보는, 즉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반성했는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우선 이들이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는가 아니면 더 심층적 수준에서 기존의 신념 자체를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론이 현실에 우선하지 않는다면, 즉 이론이 현실과 유리된 채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현실을 추상화한 개념으로서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론과 신념의 부정이 마냥 비판당하기만은 어렵다. 이론이 현실로부터 추출된다는걸 인정한다면, 현실이 기대(가정)를 배반했을 때 그 파생물인 이론까지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와 신념의 부정이 오로지 이론적 층위에서만 행해진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에 개입한 무수한 우연과 의도치 않은 요소는 별개로 치더라도 결국 전향은 인간이 내리는 결단이고 거기엔 대상을 향한 온갖 감정이 투사되어 있다. 영화 제작 조건을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면서 결국 제작 자체를 사보타주했던 노조를 보면서 느낀 레이건의 감정,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자아비판이나 반성이 없는 급진주의 운동가들을 보면서 호로위츠가 느낀 감정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최대한 균형잡힌 시선으로 보려고 하더라도 레이건은 자신의 물질적 기반이 풍족해짐에 따라 우선 정치적 스탠스를 바꾸고 난 뒤에 그걸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전향의 이유를 사후적으로 찾은 것처럼 보인다. 히친스는 생전에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몇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우파라고 호명한다해도 개의치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의 그 발언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은 끝내 전향하지 않았다는 우회적인 항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전향은 자발적이기도 하고 '자발적'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들 중 현실의 정세 변환과 상관없이 이론에 진정 충실했던 이는 누구인가.

 

적절한 분노와 적당한 명분, 씁쓸한 자기연민과 부족했던 인내, 지나친 확신과 넘쳤던 자기애는 경험을 투사하고 상상을 확증하며 자신만의 전향 경로를 형성해나갔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나 정합적인 논리가 타인에게도 그럴까. 앨저 히스를 고발하기 전, 챔버스는 히스에게 자신과 함께 전향하자고 권했으나 그로부터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그저 정신적 자위행위일 뿐이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배제한 온전히 스스로의 판단 하에 얻어낸 결론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들은 얼마나 고려했을까. 인식의 지평 사이에 놓인 결코 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간극을 가리켜 세계관과 사상과 이데올로기라 명명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간극을 뛰어넘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체계적으로 축조된 것처럼 보이는 사상이라는 단단한 건축물 사이사이에 그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하며 물컹물컹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 건축물의 경도가 유지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간극을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진다. 오롯이 논리와 이론으로만 사상이 축조된다면 전향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붙어있는 단단하지 못한 그 무엇, 그러니까 이 여섯 명의 전향자들이 드러낸 분노, 공감, 비애 같은 감정과 위신 같은 (세속적인), 한마디로 (매우) 인간(적 특)성까지도 사상을 구성하는 요소임을 염두에 둘 때 전향 문제를 사유하는 다른 관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행간에서 찾아내려 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후기에서 밝히듯 저자는 이 여섯 명의 전향 '원인'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이는 출간 후 있을지모를 필화 등을 피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저자 또한 집필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이 점점 더 어렵다고 느낀 때문은 아닐까. 이들 여섯 명은 현실에 패배한 강직한 이론가가 아닌 회의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구현에 실패한 이론보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인간을 더 회의하는.

 

6인의 미국인 우파 전향자와 1930년대 일본의 전향자들 간의 결정적 차이도 바로 이 회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있다. 권력의 강제에 의해 대중에게 자신의 달라진 정치적 입장과 생각을 공개 표명한다는 전향성명서 형식에 전제된 작위성은 어쩔 수 없이 성명서를 하나의 텍스트로 대하게 한다. 텍스트의 행간을 파악하고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 안과 밖을 모두 살피려는 노력이 요구되는데, 자유로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쓰고 발표한 글이나 책, 연설에서는 챔버스 등이 경험한 (이론과 인간을 포함한) 회의의 '속내' 내지 '느낌'이 어떤 식으로든 언급되는 반면 전향성명서에는 부재한다. 한마디로, 전향성명서에는 전향의 절반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인한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나머지 절반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자살한 소설가라는 한 줄의 사실과 한 편의 글로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를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그저 지루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유명인들의 졸업 축사라는 관례가 있는 미국에서 월리스는 훗날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모 대학의 졸업 축사로 유명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인생의 ‘디폴트 세팅’을 거부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삶을 향한 애착을 전했다. 그랬던 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를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삶이라는 투쟁에서 투항해버린 사람으로 (적어도 내게는) 기억하게 했다.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 셀러브리티의 정의라면 월리스는 일찌감치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국의 문학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면서 이미 충분한 유명세를 얻고 커리어를 시작한 다분히 미국적인 셀러브리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는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월리스의 사후 십 년만에 뒤늦게 출간된, 데이비드 립스키가 진행한 인터뷰의 주제이자 핵심도 바로 이 유명세라는 문제에 맞춰져 있다. 립스키는 월리스의 1996년 북투어의 마지막 며칠간을 동행하면서 행한 인터뷰 내내 반복적으로 이 유명세에 대해 묻는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유명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하는지, 유명세를 어떻게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그리고 이러한 반복된 질문에 월리스는 -완벽한 녹취록이라기보다는 편집이 가해졌음을 감안해야하지만- 짜증을 낸다거나 무시하거나 하지않고 진지하게 응답한다. 유명세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고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으며 소설을 매우 열심히 쓰고있을 뿐이라는 패턴으로 일관하는 답변에는 그때까지 그의 이력과 삶의 태도를 유추하게 하는 면이 있다.

 

어렸을 때는 테니스로 그리고 대학에서는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학계에서 촉망받던 이가 학문이 아닌 픽션 쓰기로 전향을 하고 이후 비장르문학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미디어로부터 전국적인 수준의 주목을 받는 등 그의 삶은 북투어를 돌던 삼십대 중반에 이미 화려한 이력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늘 의식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 그 결과, 오만함이란 자신을 너무 의식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정의까지 갖게 했다. 스스로를 너무 의식한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늘 애써왔고 그래서 이제는 독자나 비평가의 시선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치열하고 성실한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음을 월리스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소설 쓰기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명제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썼다는 그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게 한다.

 

인터뷰어가 일인칭 화자가 되어 한 편의 에세이처럼 편집되는 미국 잡지 저널리즘의 일반적인 인터뷰 기사 스타일과는 달리 녹취록처럼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가운데 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인터뷰어의 코멘트를 부분적으로 삽입해 가감없이 월리스가 한 말을 최대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 편집은 독자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월리스는 자신이 어떤 문학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좋아했던 영화나 tv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같은 쇄말적인 것부터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경험까지 처음 만나는 인터뷰어를 상대로 비교적 진솔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는건 물론이고 숙식까지 같이 하면서 가까워진 립스키를 향해 월리스는 자신의 지적 우월함도, 약물 못지않은 수준의 tv 중독도 모두 선뜻 인정한다. 그의 작품들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과 지성을 갖춘 백인 중상류층에게 주로 어필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일반적인 잡지 인터뷰에 할당된 지면을 훌쩍 뛰어넘는, 그래서 차라리 긴 대화에 가까운 분량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분주하게 대화 소재를 바꿔 나가는데 그토록 방대한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에 관해서도 월리스는 나름 사려깊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해보자면 9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미국에서 산다는 것, 미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 있는지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그것이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깊게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의 삶의 방식이며 거기서 헤어나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숨기거나 꾸미려는 인터뷰이와 어떻게든 그러한 위장과 화장을 벗겨내려는 인터뷰어 간의 긴장감이야말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이라면 여기서 두 사람은 내밀한 친구간의 대화와 격식을 차린 공식적 인터뷰 사이를 수시로 오고간다. 월리스는 자신이 방금 한 말이 편집되어 게재될까 걱정하며 빼달라고 부탁하는 등 때로 불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솔직한 편이고, 지금은 잡지 기자이지만 본인 역시 소설을 출간한 적 있는 립스키는 월리스의 유명세를 부러워하는 또 한 명의 살리에르처럼 보이기도 하는 한편 월리스를 향한 우호적인 시선과 예의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밀도 높은 인터뷰가 정작 당시에는 최종적으로 잡지에 실리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심도있고 진중한 인터뷰 내용이 대중 음악 잡지라는 매체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실무적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이 인터뷰 역시도 월리스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공교롭게도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가이면서도 월리스는 문자화 할 수 없는 삶의 어떤 측면에 대해 이미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었다. <끈이론>에 실린 어느 테니스 선수의 자서전 서평은 왜 스포츠 선수들이 쓴 책들은 하나같이 지루한지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하는데,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체득한 프로 운동 선수들의 기술과 실력은 그 느낌이나 정수를 언어화하기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틀에 박힌 뻔한 클리셰로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운동선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 현장 답사기와 감독론이 한데 섞여있는 길고 긴 글에서 린치를 초현실주의자가 아닌 표현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린치 영화의 불가지성을 논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자화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삶의 비의는 삶을 긍정하라는 메시지와는 상반된 결과로 끝난 월리스의 삶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향한 강한 열망을 줄곧 내비쳤지만 그가 안고 있던 내적 고통에 타인이 주목하기란 어려웠다. 누구나 다면적인 삶의 양태를 갖고 있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단일하고 일관된 그 무엇으로만 이해되거나 설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삶이라는 다면체이자 다중 우주를 인터뷰, 즉 언어를 이용해 그 대상을 특정한 캐릭터를 가진 단일 주체로 설정하고 그 아래에서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꿰어내야하는 문학 형식, 특히나 대화를 진행하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보다도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인칭 에세이 형식의 인터뷰 기사가 감당하기에 월리스는 처음부터 무리였던게 아닐까. 동일한 인터뷰더라도 현재 같은 단행본 형식이 아닌 잡지 지면이라는 제한된 분량 안에서는 지금과는 꽤나 다른 인상으로 재현됐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천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척 하는) 천재 내지는 역시나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남다른 성격, 습관, 취향 등을 가진 비범한 이의 삶을 구경하는 관찰기같은. 거기에 장안의 화제작으로 그의 신작이 회자되던 인터뷰 시점까지 겹쳐짐으로써 대중 매체에서 숱하게 소비되는 천재 셀러브리티의 또다른 표상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훗날 참조하게될 사료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료가 그러하듯 면밀한 비판적 독해를 요구하는 섬세한 텍스트다. 인터뷰이의 발화, 그리고 그것을 편집한 인터뷰어의 코멘트가 겹으로 둘러싸고 있기에 의심하고 상상하고 따져보고 행간을 미루어 짐작해봐야한다. 사후에 출간된 유명 소설가와의 생전 인터뷰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진실되거나, 아예 진실되지 않거나>는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까지도 신빙성을 계속 의심받는 후자의 책과 달리 녹취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책 모두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에게 단순한 취재 대상 그 이상이며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한다. 창작의 비결,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사적 비밀, 당대 사회 이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인터뷰어 자신의 인정 욕구 충족(또는 존재감 증명) 등등. 그리고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신비화된 예술가라는 광휘로 인해 답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최초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해독해야 할 암호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 이런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읽어본 결과, 많은 시간이 투입된 만큼 특정한 몇 개의 서사로 꿰어질 정도로 월리스에 대한 일관된 인상을 전하지 않는다. 또한 실제 인터뷰 시점과 출간 시점까지 사이의 시간의 공백으로 인해 상반된 인상을 전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연상시키는 무언가의 등장을 예상하며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대목은 그의 비범한 지성을 재차 확인케하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에서 한순간도 헤어나오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부분은 인터뷰 당시보다는 그의 최후를 알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더 분명한 의미로 다가온다. 도널드 바셀미를 읽고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 <중력의 무지개>를 읽고 힘을 얻을만큼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매혹된 문학 청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십대 시절 <반지의 제왕>을 다섯 번 읽었고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와 tv 드라마에 중독되다시피한 대중적 취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월리스라는 암호를 풀기위한 단서는 도처에 있는 듯하지만 쉽게 조합되지 않으며 접근 경로는 군데군데 보이는 듯하지만 번번이 차단된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장편 한 권도 제대로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나온 인터뷰집은 수사를 동반한 상찬부터 루머에 기반한 비판까지 작가를 향한 선입견만 강화하는데 그칠 수 있다(이를테면 본문 뒤에 자리한 옮긴이의 글). 어차피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립스키의 언어로 재현된 월리스는 타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예민하고 성마른 예술가보다는 비대한 자아를 가까스로 통제하고서는 그 복잡한 내면을 투사해 반영된 세상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만큼의(그러나 너무나 풍성하고 흘러넘치는) 언어로 재현하려 분투하는 지식인에 가까워보인다.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이 그 반대보다 더 많(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언어를 붙들고 씨름해야한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월리스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소설가로서 언어의 한계를 '체념'하고 받아들이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광대하다고 느꼈던 것이 그가 겪은 고뇌의 일부는 아니었을까. 적어도 이 인터뷰에서 월리스는 몰라도 립스키는 그 한계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또한 그의 한계만은 아니겠지만.

이제 신작들은 거의 안 듣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그다지 뽑는 재미도 없고 의의도 없지만 어쨌든

fleet foxes, shore

destroyer, have we met 중 it just doesn't happen

gil scott heron, we're new again 중 this can't be real

dungen, dungen live

strokes, the new abnomal 중 not the same anymore

 

 

올해 읽은 책들 중 몇 권을 꼽아보자면,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끈이론;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사가판 유대문화론 - 우치다 타쓰루의 책은 읽을 땐 그런가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쓰는 기계에 가까운 저자인지라 올해도 이 사람의 책을 두 세권쯤 읽었는데 그나마 이 책은 그중 가장 밀도가 있었다.

철학의 태도, 아즈마 히로키. 후반부에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자신의 추천 독서 목록에 P.G 우드하우스를 곧잘 집어넣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분류에 따르자면, 우드하우스 작품의 "어디가 웃기다는건지 알지못하겠다는 길 잃은 영혼들"이자 "불운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버티와 지브스> 연작은 적어도 내 세대에게는 사건을 해결하는 진짜 실력자 조수를 둔 형사 가제트를 떠올리게하는 면이 있었고, 유크리지도, 골프 연작도 크게 웃기거나 한 대목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몇 해 전에 나온 우드하우스 단편선을 끝까지 다 읽어낸 소감이라면 과거 영국 사회가 얼마나 여유롭고 한가로운 곳이었는가라는 상상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공고한 계급사회였던 20세기 초 영국 내 백인 상층계급의 여유로움이 뚝뚝 떨어지는, 그래서 저자와 같은 계급 배경을 가진 사람들, 아니면 적어도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이나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듯한 소설들이었다. 적지않은 '고전'이 그러하듯 점점 쌓여가는 세월의 무게에 눌린 탓에 문학 작품으로서 독서의 재미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조금씩 더 높아지면서 점점 낡아가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반 세기동안 계속 쓰는 작가가 있다는 것, 또 그렇게 길게 이어질만큼 독자층이 탄탄했다는 사실은 영국 사회 내부가 계급적으로나 인종적으로 얼마나 단단한 경계와 위계의 구분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케했다. 영국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우드하우스를 읽으면서 귀족들의 삶을 상상하고 동경한다는 히친스의 코멘트도 이런 점을 뒷받침한다. 

 

다 큰 백인 남성이 그렇게 여유로운 소설을 평생동안 쓴다는건 저자 본인이 작품만큼이나 재밌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보다는 직접 창조한 작품 속 세계가 더 현실적이고 친숙한 그런 행복한 저자였기 때문이었을까. 2차대전 중 프랑스에 마련한 집에 계속 남아있다 나치의 포로가 된 그는 아예 적극 협조해 영어로 자신의 조국을 향해 선전 방송을 진행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영국에서 공공의 적 수준으로 떠올랐고[각주:1]서점에서 하나둘 저서들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즈음에 돌연 조지 오웰이 <우드하우스를 변호하며>(1945)라는 글을 통해 우드하우스의 평판을 바꾸는데 기여한다. 부역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그의 다른 글들이 그러하듯이 오웰은 참고할만한 지점을 제공한다. 그의 변호 내용의 핵심은 두가지다. 첫째, 우드하우스는 무관심하다못해 아예 당시 정치에는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정세 판단은 커녕 그의 내면은 1910년대와 20년대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어서 퍼블릭 스쿨 그리고 하녀, 집사, 정원사, 요리사 등등 여러 종류의 하인을 동반한 귀족 제도 등 그가 포로로 붙잡힌 시점에 이미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과거 영국 사회에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오웰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여전히 "에드워드 시대"를 사는 중이었던 것이다. 히친스 또한 그가 "심각한 발달정지" 상태였으며 그냥 (정신적)"성장을 멈춰버린 것"이라며 오웰의 편에 선다. 둘째, 우드하우스는 표적이 되어 지나치게 비난받았다. 한마디로 그는 희생양이었다. 유럽 침공 전 평화조약 체결을 주장하며 나치에 우호적이었던 지식인들과 언론인 등은 얼마든지 있었고, 히틀러와 뮌헨 조약을 맺었던 챔벌린 정권과 그 동조 세력들은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우드하우스를 마치 일본의 A급 전범 비슷한 취급을 하게 된데는 그가 당시에 이미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저명한 문인이었기에 자신의 몫을 초과한 비난까지도 전부 뒤집어 쓴 면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소없이) 풀려난 뒤 미국으로 이주해 시민권을 획득한 우드하우스는 이후 한번도 영국 땅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이같은 오웰의 변호를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신을 반쯤 금치산자로 취급하는 이런 태도에 그 스스로도 부응한 것처럼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만년까지 작풍은 한결같이 유지됐고, 과거의 자신을 두고 "바보 중의 상바보"였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드하우스의 사례는 보면 볼수록 변절과 부역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변절'이 기준과 일관성이 깨진 것을 비판하는 함의를 갖는다면 우드하우스는 부역은 했을지 몰라도 변절은 아니지않을까. 변절을 하려면 애초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어야 할테니 말이다. 이 말이 너무 관대하게 들린다면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 없이 꼿꼿한 후지타 쇼조의 '변절'에 대한 정의, 즉 "아무런 권력으로부터의 강제가 없는데도 사적 이익이나 지위 상승이 동기가 되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경우"에는 해당할까. 변절과 부역 그리고 전향의 판단은 이렇듯 당시 정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판단을 요구한다.  

 

아무런 권력으로부터의 강제가 없는데도 사적 이익이나 지위 상승이 동기가 되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경우

출처: https://tweedy.tistory.com/434 [tweedy blog]
아무런 권력으로부터의 강제가 없는데도 사적 이익이나 지위 상승이 동기가 되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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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권력으로부터의 강제가 없는데도 사적 이익이나 지위 상승이 동기가 되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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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권력으로부터의 강제가 없는데도 사적 이익이나 지위 상승이 동기가 되어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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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우드하우스의 단편 중 하나는 드론스 클럽 시리즈 중 한 편인 <놀라운 모자 미스터리>(1933)로, 키 차이가 큰 두 커플이 그로 인해 상대가 쓰고있는 모자의 크기를 착각한다는 이야기다. 즉 키 작은 여자친구의 시점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기 때문에 연인의 모자가 지나치게 작아보이는 반면, 처지가 반대인 커플의 경우에는 오히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기 때문에 남자 친구의 모자가 너무 커보인다는 것이다. 정작 원문에는 이런 설명은 전혀 없이 두 남자가 그저 모자를 잘못 만들었다며 투덜대다가 우드하우스의 이야기들이 으레 그렇듯 돌연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알고보면 썰렁한 농담에 불과한 이야기를 귀족들의 여유작작하고 클래시한 도락의 에피소드로 탈바꿈하면서 형용사 '놀라운'을 제목에 붙이는게 바로 우드하우스식 넉살이다. 그런데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사물이 달리보인다는 이 단편은 우드하우스라는 작가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민국가(내지는 네이션)만을 판단 기준으로 보면 우드하우스는 영락없는 부역자에 다름 아니지만 늘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상호호혜적 관계와 엄격한 예절을 교육받는, 그러니까 '신사도'를 중요시하라고 배우는 퍼블릭 스쿨 출신의 나이만 먹은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소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을 정중하게 대한 이의 요구라면 그것이 설사 적이라 할지라도 응해야한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오웰의 말처럼 그 판단이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수준의) '어리석음' 그 자체라는게 안타깝지만. 자신의 시점에만 함몰된 나머지 상대가 쓴 모자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연인들처럼 우드하우스도 일면적 판단을 한 것이 아닐까.

 

다들 나치를 피해 중립국이나 미국으로 이주할 때 분별없이 점령 지역에 남아있다가 포로가 된 건 당시 정세를 정말 몰라서 그랬다고, 조국을 향해 모국어로 적을 위한 프로파간다 방송을 한 것도 백번 양보해서 자신과 가족의 인신을 구속받는 가운데 어쩔 수 없었을 여러 상황이 있었을거라고 참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드하우스가 훗날 자신의 과거 행적을 정당화하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만일 누군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자신의 과거 부역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거기서부터는 어떠한 비판과 비난도 피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건 현실로부터 물러난 것도 회피한 것도 아닌 현실에의 적극적 · 의지적 개입이기 때문이다(이는 아마도 후지타가 '태도바꾸기' 내지는 '기회주의'라 분류한 것에 해당하겠다). 진짜 변절이나 전향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며 한 개인의 생애에서 몇 번이고 전향은 가능하다는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향자나 부역자 중 일부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재차 수정해보려는 정신적 투쟁을 이어가는건 그렇게해서라도 과거는 내줄지언정 현재와 미래만은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안해내는 고도의 추상적 사변과 논리가 정작 변절했던 시점보다 더 심도있는 사유와 넓은 시각을 제시함으로써 과거의 선택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 우드하우스의 사례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지키거나 버리거나 바꾸거나 할 선택지를 그는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인 면이 있다. 현실 정치에 몹시도 무지했던 이가 매우 가혹한 정치적 비극을 맞이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사례는 그만의 것이 아님을, 20세기에 이런 일을 겪은 이들이 허다함은 아는 바 그대로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고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며,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것도 없다는 오웰의 말이 맞다면 우드하우스야말로 그때 누구보다 가장 정치적이었던게 그가 저지른 오판의 근본적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에 무관심할 때, 정치로부터 멀리 거리를 뒀다고 생각했을 때야말로 어쩌면 정치에 가장 깊숙이 개입하는 순간이자 가장 정치적으로 처신하는 때이며 결과적으로 정치의 한가운데에 빠져드는 순간일지 모른다는 것. 오웰이 이번에도 옳았다.

  1. 우드하우스에게 여전히 매몰찬 21세기의 어느 미국인 서평가에게서도 이런 시선을 볼 수 있다. "독일 강점기 프랑스에서 나치와 손발 맞추던 똥폼 귀족 새끼 P.G 우드하우스의 책도 절대 읽지 않을 것이다. 방화, 수간, 소득세 탈루 등등 세상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들도 많이 있으나 이런 죄는 그 축에 들지 않는다." 다만 이 서평가는 한번 뭔가를 싫어하면 철저하게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양키스와 양키스 팬이 쓴 책도 전부 읽기를 거부할 정도임을 밝혀 두어야겠다. [본문으로]
동생에게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목만 보면 마치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에도가와 란포처럼 보이지만 <행인>은 음습한 성적 욕망에 매달리는 정신병리의 해부 수준을 넘어 작품이 쓰이던 당대에 새로이 나타난 어떤 풍경을 포착하고 있다. 관찰자이자 화자인 지로가 바라보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그의 형 이치로는 학문에 헌신하느라 평범한 일상은 커녕 한 집에 살고있는 가족 구성원 전체와 불화를 겪는 중이다. 표면적으로 불거지는 사건도 없고 일상은 그런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부모, 아내, 동생 모두 뒤에서 그를 걱정하는 동시에 불편해하는 가운데 특히 형제와 이치로의 아내 세 사람간의 내적 긴장은 내내 팽팽하다. 문제의 핵심은 겉으로 봐서는 존경받는 학자이자 선생인 이치로에게 그래서 정확히 무슨 문제가 생긴건지를 알 수 없다는데 있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눈으로 이치로를 판단하는데 형의 이상 성격에 대해서는 지로도 이미 일찌감치 나름의 가설을 갖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형을 평소보다 배나 딱하게 여기는 일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형님이 학문 이외의 일에 시간을 쓰는걸 아까워하고 모든 일을 남한테 맡겨둔 채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않고 화족인 양 행세하는 것이 애초에 잘못이에요. 아무리 연구할 시간이 소중하고 학교 강의가 중요하다고 해도 평생 한곳에서 함께 생활해야 할 자기 아내 아닌가요?"
지로가 보기에 형은 공부를 너무 많이 탓에 성격이 이상해졌다. 그럼 다른 가족의 관점은 어떨까.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에도 장남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숨어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한즉슨 이십여년 전, 약혼까지 했음에도 이후에 일방적으로 실연당했던 여인이 세월이 그렇게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같이 이야기를 듣고있던 사람들 중 이치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자신과 이야기 속 여인이 같은 처지라고 믿기 때문인데 여인의 한마디는 곧 그의 속내이기도하다. 
"다만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게 가장 괴롭습니다."
 
높은 학식을 쌓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이치로는 단순히 의처증을 앓는게 아니다. 그가 품은 근심에는 더 깊은 뭔가가 있는데 가족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 혹은 볼 수 있는 것만을 볼 뿐 누구도 정확하게 그 근심을 짚어내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할 뿐이다. 결국 이 과업을 이뤄내는 이는 이를 알아내기 위해 이치로와 함께 여행을 떠난 그의 친구인데 여행지에서 그가 지로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야 비로소 그 해답을 유추해볼 수 있는 나름의 단서가 흩어져있다.
형님은 바둑을 두는 것은 물론이고 뭘 하든 다 싫었다고 하네. 동시에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고 하네. 그 모순이 이미 형님에게는 고통이었다네.

형님은 책을 읽어도, 사색을 해도, 밥을 먹어도, 산보를 해도 스물네 시간 뭘 해도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고 하네. 뭘 해도 이런 걸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기분에 쫓기게 된다고 하네."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형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뭘 해도 그게 목적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네. 그냥 불안한거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거네. 

형님의 머리는 지나치게 명민하여 자칫하면 자신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가고 싶어하네. 마음의 다른 도구가 그의 이지와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데에 형님의 고통이 있는거네. 인격에서 보면 거기에 빈틈이 있는거지. 인격에서 보자면 거기에 파멸이 숨어있네. 형님을 위해 이 부조화를 슬퍼하는 나는 모든 원인을 지나치게 작동하는 이지의 죄로 돌리면서도 역시 그 이지에 대한 경의를 버릴 수가 없네.

형님 입장에서 보면 반듯한 머리가 곧 흐트러진 마음이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럽네. 머리는 확실하지만 정신은 어쩌면 좀 이상할지도 모른다, 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신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성과 감성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한 채 한쪽이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조금씩 정신이 분열되어가는 이치로는 근대적 인간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머리'와 '마음'간의 균열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상해져버린 '정신'. 머릿속에 다 집어넣기도 힘들만큼 서구로부터 지식이 쏟아져들어오던 시대, 그 지식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이, 사상이 바뀌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으로 대표되는 내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산시로> 속 문장을 빌리자면 '먼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정치, 경제, 사상 등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문물을 알아가(고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감각은 둔해져가는 탓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속을 몰라 애를 태운다. 뿐만 아니다. 아는게 많아질수록 모르는게 더 많다는걸 깨달으며 생긴 초조함과 조급함, 불안 때문에 인간에는 더욱 소홀해지고 그렇게 자신으로 인해 인간 관계가 파열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대를 의심하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부조리를 가한다. 원인 모를 불안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인간의 등장이라는 전환기의 풍경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동시대 서구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동시대 서구 작가들의 장황한 사변적 서술이 아닌 소박한 가족 드라마의 외양을 취한 점은 소세키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을 근대 시기를 살아가던 인간의 내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정작 장편소설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알게된거라곤 시대에 적응하려다 내파된 인간의 고통이라는 외양뿐이고, 그래서 대체 이치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다른 누군가의 또 하나의 잠정적 가설만 남는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알기 어려운 한 길 사람 마음속에 대한 소세키의 본격적 탐구는 차기작 <마음>으로 이어진다.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반복되는 장면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드 설링의 오리지널 환상특급 첫번째 시즌에서 본 이야기다. 주인공은 일과 가족에 소홀한 채 책만 읽어온 전형적인 책벌레인데 어느 날 일하는 은행의 지하 금고에 들어간 사이 핵전쟁이 발발해 지구가 초토화되어 뜻하지 않게 지구 최후의 사나이가 된다. 황폐화된 세상이지만 다행히도 도서관만은 그대로다. 혼자만 살아남았으니 식량도 거의 무한에 가깝게 남아있다. 더 이상 상사의 명령이나 아내의 등쌀로 인한 방해없이 마음놓고 느긋하게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뻐하며 드디어 첫번째 책을 막 집어들고 읽으려는 바로 그 순간, 하필이면 단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안경이 부서지고 만다. 남자는 이제 그보다 더한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하고 만다. 그렇게 좋아하는 수 만 권의 책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단 한 자도 읽을 수 없는 무간지옥같은 현실 말이다(하지만 도서관도 그대로인 마당에 안경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리가 있을까).

 

칼퇴근하고 돌아와 발 닦고 침대에 누워 책만 읽는 하급공무원의 삶을 꿈꿨다는 어느 작가의 글에 나는 반만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나인투파이브마저도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직위나 직함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읽다가 사라지는 무명의 삶, 내가 바라는 삶의 양상은 대략 이런 거였다. 읽는 것에 비하면 쓰는 일은 품만 많이 들고 얻는건 적다. 하면 할수록 글쓰기는 더 어색해지기만 한다. 쓰는 일에 중독된 서광증 환자도 있다지만 이런 이들에겐 어쨌거나 자기표현의 욕구 또는 공명심을 작게나마 마음 한 켠에 쟁여두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읽는 행위 자체에 중독된 사람은 뭘 원하는걸까. 지적이고 싶은 욕망이 원초적 욕구에 버금가는 정도인걸까. 지적 컴플렉스에 유독 심하게 시달리는걸까. 아니면 최신 물리학 이론이건 오늘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의 메뉴건간에 그저 빡빡하게 채워진 문자를 읽는 것에 중독된걸까.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반면 책장의 책은 야금야금 늘어가고 실제 읽는 양에 비해 읽고 싶은 책의 수는 거짓말 조금 보태 기하급수적으로, 이제는 여생을 전부 가져다 바쳐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버렸다. 이 욕망과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저 가련한 책벌레 남자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안경을 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만한 시력을 유지해야할 뿐 아니라 지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함양에도 힘써야 할텐데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기서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 밖에 없다. 그게 불가능함을 알기에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고 순응을 해야한다. 평생 비타협적으로 살겠다는 다짐같은 걸 하진 않았지만 체력을 기르고 시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유지한다는건 지금껏 거의 해보지 않은걸 시도하는, 즉 습관을, 생활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무척 어렵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살짝 위험해보이기까지 하다. 

 

독서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있고 관객인 나는 결국 그 시간에 투항하게 되어있는 어차피 질 싸움인 반면 독서는 어쨌든 내가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장하는, 하지만 그만큼 힘겨운 싸움이다. 한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드는 단위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면 그건 내 뇌세포에 문제가 생겼다는 경고가 아닌가하고 매번 섬찟하다. 근육이 무뎌지고 달리기가 느려지고 손 움직임이 어줍게되는 것보다 페이지를 바라보는 동안 눈이 따끔따끔하고 저절로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흘러나오고 글자가 이중으로 보이고 졸음이 오고 두통이 느껴지면서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 문장과는 전혀 하등 상관없는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현실이 더 끔찍하다. 나만 그럴까 아니면 독서가들이 다 이럴까. 재미나 즐거움 같은 사적 유희가 아닌 순전히 직업적인 이유로 고도의 추상적인 문서를 수없이 읽어대야하는 고급 두뇌 노동자들, 그러니까 '전문적인 독자'라고 할 학자나 연구자, 법률가 같은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도 노화에 따른 지적 능력의 감퇴를, 정확히는 독해력의 감퇴를 걱정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기자나 작가를 포함한 문필가들의 평균수명이 짧다는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읽는 사람이 아닌 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쓰기보다 읽기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그럼 어떨까. 읽기가 쓰기보다 어쩌면 더 고차원의 두뇌 노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굳이 나누어 본다면 많이 읽는 사람들의 건강이 많이 쓰는 사람보다 더 나쁘지 않을까싶다. 쓰는건 어쨌든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책임지는 일이기에 딱히 어려울 게 없다. 내가 쓰는 글이 나한테 이해불능이거나 어려울 수 있을까. 하지만 읽는 일은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궁의 연속이고 미로고 퍼즐이며 수학이다. 오문이나 잘못된 편집 때문인 경우는 그저 화가 나는 것에 그치지만, 아무리 읽어도 이해 안되는 난삽한 문장,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에 대한 가치 판단, 아무런 감흥을 주지않는 정보의 산문적 나열, 또는 생전 처음 접해보는 종류의 지식과 고도의 추상적 개념으로만 채워진 논리의 흐름 등을 마주칠 때면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안이 마르면서 갈증이 나고 머릿속도 마음도 쩍쩍 갈라진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뭔가를 마시고 그에 맞춰 다른 주전부리를 찾는 일도, 화장실을 찾는 횟수도 늘어난다. 읽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말을 달리 돌릴 수가 없다. 철저히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읽는 독서가 어느 순간 처리해야 할 일감처럼 되버린 것이다. 후딱 해치워놓고 다음으로 넘어가야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렇게 버겁다면 결국 읽기를 그만둬야 하는게 아닐까. 책을 집어던지고 영화를 보든 요리를 하든 아니면 밖에 나가 몸을 혹사시키든.  

 

하지만 이런다고해서 독서 생활이 힘들어지는 상황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신체적 변화와 심리적 장애라고 해야할까. 안타까운건 독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는 것아다. 아직 손에서 완전히 책을 놓지는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삶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어쨌든 불가능하다. 다만 요즘의 내 독서생활은 넓이에서는 협소해지고 깊이에서는 얕아졌으며 어딘가 심드렁해진 면이 있다. 취향이 분명해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더 직접적인 사정은 다른데 있(는 것 같)다. 

 

굳이 본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겉표지나 제목, 저자명만으로도 다 알 것만 같은 책들이 있다. <민주와 애국>이라는 거창한 제목에서 벌써 이 책이 다루는 소재나 주제의 크기가 짐작되는데 거기에 결정적으로 번역본상 10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이 저자가 품은 야심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이것도 초고에서 절반쯤을 덜어낸거라고 한다). 정작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이런 야심찬 책을 쓰게된 연구 동기를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후기에서 털어놓듯이 말하고 있지만 바로 그 뒤에 소개하는 일화는 그와 모순을 빚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그 야심부터 밝혀야한다.

 

그 야심이란 바로 내셔널리즘의 복권이다.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패전 직후부터 이십년간, 그러니까 저자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이른바 '제1의 전후(1945~1955)'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전후 지식인들이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의 결합을 지향했고 실제 어느 정도의 성과도 있었으나 그 뒤 '제2의 전후(1955~1965)'시기가 되자 이른바 '55년 체제' 성립과 60년 안보 투쟁을 거치는동안 앞의 성취가 형해화되고 그 결과로서 민주와 애국이 분리된 영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1의 전후에 '(단일)민족' '국가' '애국'을 외친 것은 오히려 진보, 좌파, 호헌 세력들이었으나 제2의 전후부터 이러한 언표들은 우파에게 탈취되었고 거기에 20세기 중반 이후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공통된 기조와 맞물리면서 그 영향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나 저자가 보기에 내셔널리즘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할 이유는 없으며 되려 지금이야말로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결론을 위해 구체적으로 패전 이후부터 90년대까지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이라는 언설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즉 각각의 정치적 당파들, 작가, 비평가, 학자, 사상가 등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 언표를 제각기 재구성했는지, 다시 말해 동일한 언표를 저마다 또 각 시대마다 어떻게 재해석해왔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 본서의 내용이다. 따라서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의 분량이 이토록 두툼해진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얼핏 참신하지도 않고, 일반적인 통념과도 거리가 있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더 철저한 논증과 논거가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저명한 일본의 문인, 사상가, 학자, 정치인 등을 모두 저마다의 내셔널리즘을 위해 분투한 이들로 재해석함으로써 '내셔널리즘' 또는 '애국'이라는 동일한 기표의 내용물이 계속 다시 쓰이고 다시 읽혀왔음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는 저자 자신이 지향하는 "정부나 영토와는 무관한,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 "을 주창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의 위상을 복원하고 다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의 종합을, 즉 민주와 애국을 동시에 성취해야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문학가, 공산당 정치인, 반 천황제 운동, 국민적 역사학 운동, 60년 안보투쟁, 그리고 베헤렌 같은 시민 운동까지 이들을 전부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 또 저자 역시 한 명의 사회학자로서 강하게 기대고 있는 세대론적 관점의 투영이 어느 정도의 현실 정합성을 갖는지 등은 더 심도있는 비판과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전자에 대해서만 부연해보자면 '애국'과 '내셔널리즘'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서로 번갈아 씀으로써 밖으로 표출된 심정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그 심정마저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전전의 공산주의자들이, 60년대의 베헤렌 운동가들이, 그리고 전공투 세대들이 내셔널리즘을 복원하거나 재구성한다고 생각했을까. '구국'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애국'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국가의 복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자의적으로 운동가들의 심정을 회수하거나 환원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의문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됐다. 국가보다는 노동 계급을, 애국심보다는 보편적 인권을 염두에 두거나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원했을 그들의 굳은 결의와 의도, 즉 '심정'을 함부로 참칭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외에도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징병을 피한데 따른 죄책감에서 해방되고자 마침내 모든 공적인 것에의 거부를 표출했다든지, 패전시 요시모토보다 더 어린 세대였던 에토 준이 유년기의 뒤엉킨 욕망과 그로 인해 결핍된 아이덴티티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 해결책으로서 보수주의를 택했다는 주장 등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 심리(학)적인 '문예비평'에 가까워 이 또한 더 면밀한 검증이 요구된다.

 

전후 60년에 가까운 시간을 검토한 끝에(원서는 2002년 출간) 저자는 실제로는 대중을 멸시했으나 이론적으로는 주체적인 개인들이 자립하면서 연대하는 상태를 꿈꿨던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장에 가장 공감하는듯하다. 그러면서 "당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의 표현 수단으로서 민족과 국가라는 말이 채용된 상황"이라고 내셔널리즘을 정의함으로써 국가와 분리하려는 의도도 다시금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던 패전 직후 지식인들에 크게 공감하는 가운데 국가와는 구분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내셔널리즘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실로 담대한 기획일 수도 있고, 동시에 비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자유주의 지식인이 한번쯤 품어볼 수 있는 최대치이자 한계일 수도 있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태도를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국가를 전면 거부까지 하지는 않으며, 개인의 주체성에 최종적 기대를 품고서 그러한 주체적 개인들의 집합으로써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연대를 이상형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저자의 내셔널리즘 정의에는 '무엇을' 느끼는 '어떤' 심정의 표현수단인지가 빠져있다. 아마 그 답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속과 번영에 대한 기대와 불안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공동체에 '국가'가 들어설 자리가 과연 없을까. 그 내용이 지속적으로 바뀌어 읽혀왔다고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근대의 발명품으로 보는 일반적 관점을 염두에 둘 때 오구마의 이러한 제언은 제법 곤란한 이론적 궁지에 다다른다. 저마다의 온갖 특수성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개인, 민족, 인종들이 하나의 동일한 운명 공동체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 상태 혹은 그렇게 만든 관념을 nation이라고 지칭할 때 국민과 민족은 포함되지만 국가는 탈락되는 그런 내셔널리즘이 가능할까. 서로 변별되는 개념인 '국민'과 '민족'과 '국가'를 'nation'이 전부 포괄함으로 인해 자어 문화권에서 'nation state'의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혼란을 돌이켜보면 이는 단순히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니다. 쉽사리 원심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혼종물로서의 nation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국가를 향한 기대와 우려의 공존은 자유주의의 일반적 태도이자 자연적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구마의 지향점 또한 자유주의자가 처한(혹은 처할 수 밖에 없는) 궁지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치열한 모색의 흔적을 보여준다. 즉 네이션 없는 내셔널리즘이란 제국주의 시대에 직접 행위자로 뛰어들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인 끝에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국민으로서 가질 법한, 국가를 향한 애증이 낳은 비판적인 이론적 시도일 수 있다. 모든 것을 내셔널리즘의 프레임 안으로 투영시키면서도 최종적으로 국가를 거부하는 국가주의. 그러나 저자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국가없는 내셔널리즘 혹은 국가에 반하는 내셔널리즘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목도하는 중은 아닐까. 애국을 참칭하면서 거리를 점거한 채 소수자를 향한 폭력과 무질서를 선동하는 극우 결사단체와 친일 혹은 친미라는 의심을 받는 정당이 한일 양국에서 모두 등장하는 현실을 보자면 말이다. 분파주의, 배외주의, 그리고 폭력에의 경도된 이들이 애국을 주장하는 이런 현상은 국가가 혹은 국가만이 행할 수 있는 보편주의와 총체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때 '다시 쓰이는' 내셔널리즘의 실체가 무엇인지, 즉 분파주의를 보편주의로 바꿔치기하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을 사적으로 전유한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과 정당화의 구실이자 구호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부상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개념을 심정으로 읽으려는 오구마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네이션에 괄호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인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부정의를 돌아보며 자발적이 아닌 외부로부터 강요된 집산주의를 경계하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실정적 사실로서의 네이션은 그 자체로 어쨌든 준거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서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네이션은 주체적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매개하는 통로로서, 집단의식(감정)이 형성되는 토대이자 중요 참조점으로서 기능한다. 심정이나 감정, 정동이 외재하는 실정적 사실에 영향을 분명히 미치고 때로는 파열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는건 말할 것도 없다. 스스로 애국을 참칭하는 우파 그리고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의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좌파간 대립도 그렇게 저마다의 심정만을 앞세운 결과가 아닐까. '내셔널리즘'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심정으로 읽음으로써 오구마는 공동체의 심리를 투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으려 애쓰지만 지금 필요한건 심정을 더 정교하게 설명하기 위한 추상화되고 구조화된 개념과 이론일지 모른다. 에토 준이 청소년이 빠질법한 관념 과잉에 빠졌고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가, 가족, 정치, 이념 등 모든 공적인 것을 거부했다는 저자 자신의 분석을 따른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내셔널리즘 언설의 해석에 앞서 어쩌면 네이션에 대한 재평가 내지는 재해석에서부터 출발해야할런지도 모른다.  

 

패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뒤 징병을 당하고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이나 복지 혜택으로부터도 제외되었던 어느 재일조선인의 소송을 도왔던 자신의 부친 이야기를 후기에 길게 풀어놓으면서도 재차 이 일화가 자신의 연구 동기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그럴리 없음은 오구마 본인이 잘 알 것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다른 개인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신의 민족(성), 국적, 그리고 정치적 신념에까지 반할 수도 있을 전쟁에 참전하도록 만드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강제력, 그러니까 각양각색의 개인을 그들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로 통합할 수 있는 국가의 총체화 기능 -저자가 애국이라고 지칭하는- 이야말로 이 연구의 실질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우익의 국가주의와 변별되면서 동시에 좌익과도 다른 내셔널리즘을 제안하는 것은 오구마의 다른 저서 제목처럼 '사회를 바꾸려면'(2014)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집단이나 집합체, 즉 그 책에서 계속 강조하는 '데모'를 가능케하는 바로 그 집단의 탄생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원서 출간 이후이긴 하지만 2011년 오큐파이 운동이나 이듬해 재스민 혁명 같은 대중 운동이 일본에서도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국가총동원이라는 거국일치 상황을 경험한 바 있는 일본에서 자발적인 연대를 기반으로한 리버럴한 대중 운동의 발생을 위한 조건의 탐구가 본서의 실질적인 연구 동기였던게 아닐까.   

 

은 '국민'이더라도 성별, 계급, 연령, 종교, 지역, 이념, 취향 등에 의해 쉼없이 미세한 분할을 경험하면서 파편화되는 탓에 공통된 지향과 목표를 공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자발적 연대를 통한 집합 의식을 생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심정으로서의 '애국'이 아니라 어쩌면 더 많은 자유와 더 실질적인 평등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애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성취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심정'이지 그 자체를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주'와 '애국'이 아니라 '민주'와 '평등'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민주'와 '애국'을 종합하더라도 그러기위해 국가를 애써 기각할 필요는 많지 않아보인다. 국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유의 출발이자 비판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이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만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엔 모두가 동의하고 따르기로 합의한 '제도'와 '법'이라는 이름의 약속이 요구되고 강제력이 수반되어야한다. 저자가 '애국'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왜 그토록 국가를 저어하고 밀어내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국가가 하거나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적절한 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을 따른다면, 내셔널리즘이 아닌 네이션에 지금보다 더 넉넉한 자리를 내어줬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일은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엉뚱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훨씬 나중에, 그러니까 자기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볼 수있게 되었을 때, 그는 우연 말고는 정말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처음에는 단지 사건과 결과가 있었을 뿐이다. 그 일이 다르게 끝이 났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로 미리 정해진 것이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야기 그 자체이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

"여보세요?"

전화선 저편에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한순간 퀸은 전화를 건 사람이 그냥 끊어버린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주 먼 데서 들리는 듯한, 그가 들어보았던 어떤 목소리와도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기계적이면서도 감정이 잔뜩 배어 있었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속삭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음정도 마찬가지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

전화벨 소리가 들렸을 때, 무시할까 하고도 생각했다. 스파게티는 다 삶기기 직전이었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런던 교향악단을 그야말로 음악적인 절정으로 끌어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가스 불을 줄이고 거실에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새로운 일거리 때문에 지인이 건 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10분, 시간을 줬으면 해." 여자가 불쑥 말했다.

나는 사람 목소리를 상당히 잘 기억한다고 자신하는 편이다. 그건 알지 못하는 소리였다. "실례지만 어디 거신 전화인가요?"하고 나는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당신에게 걸었지. 10분만이라도 좋으니까 시간을 줘. 그럼 서로를 잘 알게 될거야."하고 여자는 말했다. 낮고 부드럽고, 특징 없는 목소리다.



이 일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잘못 걸려온 전화. 잘못 전화한 사람은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잘못 전화하지 않은 사람은 잘못 전화한 사람이었다.


유럽인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면 톰 리플리는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한다.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렇듯 시리즈의 시작부터 그는 사실상 도피중이었다. 도주야말로 리플리의 삶의 본질이고 범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36년간 범죄자이자 반쯤은 예술가같은 리플리가 유럽 각지로 도망치며 벌이는 범죄 행각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리즈의 첫번째 소설은 후반부 그러니까 프레디 마일즈 살인 이후부터 그런 리플리가 도주를 하지않고 이탈리아에 계속 머무르면서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태양은 가득히>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도 마찬가지다.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위한 리플리의 몸부림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액션이 없이 느리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몇 번의 이동 그리고 경찰, 디키의 아버지, 탐정과의 대면 등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도망가지 못한 채 정체되고 답답한 상황에서의 조마조마함은 아직은 초보 범죄자였던 리플리를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몰고간다. 후반부의 핵심은 이런 가운데 두어번 이어지는 위기-해결 패턴의 반복인데, 그 해결이 리플리의 영리함 때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스릴러 소설로서 현재 시점에서보면 점수가 깎일만하다.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다한들 이십세기 중반에 이렇게 우연만으로 심지어 지문 대조 한번 없이 위기를 탈출하는 방식은 너무 손쉬워 보일 수 밖에 없고 하이스미스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두 달 동안 수사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건 헤아릴 수 없을만큼 계속 이어진 행운 덕분이었다. 디키인 척 가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행운이었다. ... 그의 행운은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다. 

거기에 이 소설의 가장 급박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마지의 우둔함으로 해결된다는 점도 되짚어볼만하다. 본문 내내 리플리는 마지를 향한 혐오감을 내비칠 뿐 아니라 자칭 작가라곤 하지만 그러기엔 지성보다 감성만 지나치게 앞서있는 그녀의 우둔함을 시종일관 조소한다. 거의 유일한 주요 여성 배역을 이렇게 설정한건 하이스미스 본인의 단편집 제목처럼 '여성혐오' 내지는 비하처럼 보일만하다. 실제 자신과는 정반대 타입의 여성 작가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하이스미스는 그와 대비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한건 아닐까.  

리플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직접적 언급이 없긴하지만 그 점을 괄호친다면 이 소설은 호모소셜의 유지를 위해 여성이 배제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리플리와 디키가 모종의 호모소셜한 관계를 짧게나마 유지했다고 본다면 이제 그 방해자가 된 마지는 디키와의 연인 관계만 끝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 결정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에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깝게 다가갔음에도 끝내 그를 통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지적 작업)에 실패함으로써 진실을 알고있는 유일한 두 사람 리플리와 디키 사이에 끼지못하고 떨어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브 세지윅이 주창했던 '호모소셜'이란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로서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러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디키와 프레디라는 피살자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남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냥 남성이 아니라 영민하며 예술가적 기질까지 갖춘, 지금봐도 여전히 선구적인 캐릭터인 리플리에 비하면 현저히 어리석은 마지의 등장과 농락 그리고 배제 과정은 이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동성간의 내밀하고 강고한 연대라는 세지윅의 가설을 일부 증명해내고 있다.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의 부흥과 맞물리는(혹은 그보다 조금 이전이었던) 집필 시점에서 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며 그렇지 않은 여성을 상상하기는 힘들다는 식으로 말한걸 보면 하이스미스도 나름의 호모소셜 가설을 갖고 있었던듯하다. 다만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했다기보다는, 이성은 결코 이해할 수도 그래서 인지할 수도 없고 따라서 입장 자체가 불가한 동성간의 긴밀하고 점성력 높은 유대와 사교 관계를 재현하려 한 것 같다.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을뿐.

나는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활동적이거나 무모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의 활동이 육체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원동력으로 보자면 분명히 남자들을 앞서기까지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자들이 사람들이나 상황을 이끌기보다는 거기에 떠밀리며, "하겠다"나 "할 작정이다"보다는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중 161p

내밀하지만 단단한 유대가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 해체되고 파국을 맞는다는건 그래서 흥미롭다. 디키와 톰의 껄끄러웠던 첫만남 그리고 서서히 갈등이 쌓이던 끝에 벌어진 살인 장면은 배타적 젠더라는 유일 요소만으로는 호모소셜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디키와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회화를 감상하기 시작하던 리플리처럼 취향은 노력을 통해 곧잘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엔 이미 계급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이는 젠더만으로는 애초부터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향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심지어 나이까지 불문한(<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남성간의 연대와 그 해체로 인해 리플리는 계속 도주한다.

이 날은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정원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그 후부터 쉬지 않고 열일곱 시간을 써내려갔다. 한밤중에 소설이 완성되었다. 일기를 보니 몹시 지쳐있었던 듯 딱 한마디, '아주 좋다'라고만 써져있다.

 

…레이는 오랫동안의 공백기를 깨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레이는 칼라마주로 가는 대신에 병원 일을 주말로 옮기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주 닷새를 하루 온종일 글을 썼다. 미시간에서 도서관학과의 수업이 시작될 무렵에 레이는 오십 페이지에 달하는 새 작품을 잡지사에 우편으로 부치고 나서 두 작품을 더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몽당연필을 찾아서 이 신문의 가장자리, 하얀 여백에 글을 썼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건 암같은 광기였어. 그건 일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며, 사조의 일부도 아니었지. 그냥 그런 것이었어. 그게 다지.

 

겐조는 다다미 8조의 넓은 방 한가운데에 다리가 낮은 작은 상을 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책에 글을 썼다.
...파리 머리같은 글씨로 되도록이면 많은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그때의 그에게는 무엇보다 유쾌하고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또 그의 의무이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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