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면 톰 리플리는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한다.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렇듯 시리즈의 시작부터 그는 사실상 도피중이었다. 도주야말로 리플리의 삶의 본질이고 범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36년간 범죄자이자 반쯤은 예술가같은 리플리가 유럽 각지로 도망치며 벌이는 범죄 행각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리즈의 첫번째 소설은 후반부 그러니까 프레디 마일즈 살인 이후부터 그런 리플리가 도주를 하지않고 이탈리아에 계속 머무르면서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태양은 가득히>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도 마찬가지다.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위한 리플리의 몸부림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액션이 없이 느리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몇 번의 이동 그리고 경찰, 디키의 아버지, 탐정과의 대면 등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도망가지 못한 채 정체되고 답답한 상황에서의 조마조마함은 아직은 초보 범죄자였던 리플리를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몰고간다. 후반부의 핵심은 이런 가운데 두어번 이어지는 위기-해결 패턴의 반복인데, 그 해결이 리플리의 영리함 때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스릴러 소설로서 현재 시점에서보면 점수가 깎일만하다.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다한들 이십세기 중반에 이렇게 우연만으로 심지어 지문 대조 한번 없이 위기를 탈출하는 방식은 너무 손쉬워 보일 수 밖에 없고 하이스미스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두 달 동안 수사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건 헤아릴 수 없을만큼 계속 이어진 행운 덕분이었다. 디키인 척 가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행운이었다. ... 그의 행운은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다. 

거기에 이 소설의 가장 급박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마지의 우둔함으로 해결된다는 점도 되짚어볼만하다. 본문 내내 리플리는 마지를 향한 혐오감을 내비칠 뿐 아니라 자칭 작가라곤 하지만 그러기엔 지성보다 감성만 지나치게 앞서있는 그녀의 우둔함을 시종일관 조소한다. 거의 유일한 주요 여성 배역을 이렇게 설정한건 하이스미스 본인의 단편집 제목처럼 '여성혐오' 내지는 비하처럼 보일만하다. 실제 자신과는 정반대 타입의 여성 작가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하이스미스는 그와 대비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한건 아닐까.  

리플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직접적 언급이 없긴하지만 그 점을 괄호친다면 이 소설은 호모소셜의 유지를 위해 여성이 배제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리플리와 디키가 모종의 호모소셜한 관계를 짧게나마 유지했다고 본다면 이제 그 방해자가 된 마지는 디키와의 연인 관계만 끝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 결정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에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깝게 다가갔음에도 끝내 그를 통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지적 작업)에 실패함으로써 진실을 알고있는 유일한 두 사람 리플리와 디키 사이에 끼지못하고 떨어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브 세지윅이 주창했던 '호모소셜'이란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로서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러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디키와 프레디라는 피살자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남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냥 남성이 아니라 영민하며 예술가적 기질까지 갖춘, 지금봐도 여전히 선구적인 캐릭터인 리플리에 비하면 현저히 어리석은 마지의 등장과 농락 그리고 배제 과정은 이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동성간의 내밀하고 강고한 연대라는 세지윅의 가설을 일부 증명해내고 있다.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의 부흥과 맞물리는(혹은 그보다 조금 이전이었던) 집필 시점에서 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며 그렇지 않은 여성을 상상하기는 힘들다는 식으로 말한걸 보면 하이스미스도 나름의 호모소셜 가설을 갖고 있었던듯하다. 다만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했다기보다는, 이성은 결코 이해할 수도 그래서 인지할 수도 없고 따라서 입장 자체가 불가한 동성간의 긴밀하고 점성력 높은 유대와 사교 관계를 재현하려 한 것 같다.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을뿐.

나는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활동적이거나 무모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의 활동이 육체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원동력으로 보자면 분명히 남자들을 앞서기까지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자들이 사람들이나 상황을 이끌기보다는 거기에 떠밀리며, "하겠다"나 "할 작정이다"보다는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중 161p

내밀하지만 단단한 유대가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 해체되고 파국을 맞는다는건 그래서 흥미롭다. 디키와 톰의 껄끄러웠던 첫만남 그리고 서서히 갈등이 쌓이던 끝에 벌어진 살인 장면은 배타적 젠더라는 유일 요소만으로는 호모소셜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디키와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회화를 감상하기 시작하던 리플리처럼 취향은 노력을 통해 곧잘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엔 이미 계급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이는 젠더만으로는 애초부터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향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심지어 나이까지 불문한(<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남성간의 연대와 그 해체로 인해 리플리는 계속 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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