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


이 강의의 애니메이션 축약버전

사실 이 강연보다 더 재미있었던건 바로 bbc의 하드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일부러 도발하는듯 보이는 인터뷰어는 기실 일반인의 입장을 대변하기위함일테고 거기에 맞서는 하비의 태도는 권위는 커녕 유연한 태도가 어떤건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주소는 http://www.youtube.com/watch?v=YtyZY9sKv2w


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본 어떤 광고문구.

"디자인 덕분에 살맛나요.
여기는 세계 디자인 수도 - 서울입니다."

집권 초기부터 "디자인 서울"을 천명하며 온 서울시내를 갈아엎더니만 누가 어떻게 정했는지 몰라도 서울이 세계디자인수도로 정해졌나본데 이 문구를 보자 할 포스터의 <디자인과 범죄>와 이 책이 제목을 빌려온 아돌프 로스의 에세이 <장식과 범죄>가 전하는 토탈디자인 비판이 바로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나 디자인을 외치고 숭배하는 가운데 정작 디자인은 사라지고있다는.

포스터가 지적하는 토탈디자인의 문제는 지금 서울에서 정확하게 관찰된다. 조건과 맥락을 거세한채 일방적으로 기입된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건 사용가치도 미적가치도 없이 내용(기의)을 전혀 갖고있지않은, 텅빈 기호마냥 덩그러니 남은 디자인. 어디에나 편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하는, 그래서 편재하며 부재하는 디자인.

황금옷을 입은채 광화문 한복판에 들어앉은 세종대왕은 한글에 대한 우수성을 실제 사용이나 경험을 통한 실질이 아닌 상징으로 강요한다. 그 앞에 서있는 이순신 동상까지 더해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이 수도 서울의 행정적 최요지에 떡하니 앞 뒤로 서있는 광경은 실로 압박감으로 충만한 기괴한 미감을 선사한다.

허울좋은 '디자인 서울'의 기실이란 것이 대개 이런 식이다. 대학로에 들어섰다가 발목부상등 시민들의 민원으로 다시 갈아엎어야했던 인조시내나 한강다리 곳곳에 설치된 분수시설처럼 수경시설에 대한 남다른 애정, 재개발(이라고 쓰고 난개발이라고 읽는다)로 쫓겨나는 서민들, 천정부지의 집값으로 인해 어쩔 수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데이비드 하비는 이를 '추방에 의한 축적'이라 명명했다.(용산참사 이후로도 서울 시내 이곳저곳에서 길거리 노점상이나 개발예정지역에 대한 강제철거는 여전히 계속되고있다.) 이토록 숨가쁜 디자인 서울프로젝트 속에서 정작 시민들의 삶이 어떻게 디자인되고있는지 서울 시장은 지금 자신이 벌이고있는 심시티적 노력의 십분의 일이라도 고민해봤을까. 디자인되고있는 것은 도시인가 사람인가. 그리고 서울시가 상상하는 디자인의 실체는 진정 무엇일까.

디자인 비평으로 가장하고있지만 실은 그 어떤 두툼한 사회과학서적이나 에세이보다 신랄하게 현재의 신자유주의 사회를 비판하고있는 이 자그마한 책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조심스레 상상하고있다.

디자인에 문외한인 나의 피상적 인식으로 보더라도 디자인은 단순히 공간에 대한 물리적 구획만은 아니다. 디자이너의 심미적 판단과 안전, 기능성 등 실용적 계산의 양자가 상호 긴장을 놓지않는 가운데 매크로와 마이크로 사이에서, 오래된 것과 새 것의 사이에서, 아름다운 것과 비천한 것 사이에서의 쉴틈없는 변증법 속에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안과 밖을 아울러 새로이 형성되는 삶의 양태 혹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행위, 그래서 예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전형적인, 그야말로 진짜 정치 행위이자 의사소통 행위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하는 것이다.

서울 시장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재구성된 지난 약 십여년 동안의 서울의 외양은 단순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직업 정치가의 권력의지 그 자체가 참혹하리만치 적나라하게 재현된 예라 할 수 있을텐데 이것이먈로 공적 디자인에 정확히 반대되는 지극히 사적 디자인이 아닐까. 난숙한 지금의 신자유주의가 개인들의 삶을 서서히 그러나 아주 철저하게 재조직하고있다면, 즉 디자인하고있다면 그에 저항하기위한 궁극의 디자인이란 곧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과 그것을 가능케하는 삶의 조건에 대한 급진적 상상이자 기획임을 놓치지말자.

1.삼일간 한 십만원어치 정도되는 책을 사들였다. 싼값에 혹해서 헌책방에서 책을 제법 샀고 도서관에서 또 그만큼 빌려서 계속 읽고있으며 게다가 어제는 대형 서점에 들러 목록만 적어놓고 몇번을 들었다놨다했던 몇몇 책을 읽다가 돌아왔다. 우선 그동안 애타게 찾고있던 로빈 우드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와 로라 멀비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가 번역수록된 <여성/페미니즘/영화>가 모 헌책방에 같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냅다 달려가 그외 눈에 띄는 이것저것 다른 것들까지 골라 사들고 돌아왔다. 다른데는 몰라도 서울은 그래도 아직 헌책방이 곳곳에 있어서 헌책이라기엔 상태가 양호한 책이 많고 더러 신간들도 눈에 띄었다. 이래저래 이번 겨울은 이렇게 책만 읽고있다.

2.이 겨울에 생각나는 두 장의 음반이라면 역시 카우보이 정키스의 <트리니티 세션스>와 콕토 트윈스다. 감히 천사의 목소리를 상상하게하는 (그래서 매시브 어택과의 작업한 곡 제목은 angel이었을까) 엘리자베스 프레이저는 딱 90년대 초반의 스타일, 그러니까 80년대의 촌스러움을 어떻게든 탈피하려고 애쓰지만 아직은 그래도 완전히 벗겨내지못한,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가, 클럽 사운드와 쟁글팝이 서로의 영역을 놓지않으려고 애쓰던 그당시 영국팝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해주는데 나온지 이십년이 넘거나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들으니 더 향수를 자극한다. 마치 요즘 금요일밤에 하는 tv문학관을 보는 기분. 그리고 <트리니티 세션스>는 이건 그냥 방에서 이불뒤집어쓰고 듣기 딱 좋은 이 계절의 사운드트랙이다.

3.영화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순수한 쾌락이자 오락으로 남아야하건만 지금 이 시대의 영화는 거대한 도박판이 되어감과 동시에 모든 취향과 개성을 사그리 긁어모아 한번에 섞고 뒤집어 끓여내고는 그걸 억지로 들이미는 격인지라 한마디로 요즘 나오는 영화를 보며 자신의 취향을 얘기한다는건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로만 폴란스키의 아파트 삼부작, 그리고 조지 로이 힐의 데뷔작인 <헨리 오리엔트의 세계>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영화에 관해 쓰고싶은 욕구가 생겼다.

4.아, 그리고 우연히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그동안 방치되고있던 웨스 앤더슨의 레퍼런스에 관한 포스트를 전부 번역해서 다시 올려두었다. 번역을 다시 함과 동시에 문맥도 고쳐놓은 다음 다시 읽어보니 다시금 앤더슨에 관한 애정을 재확인했다. 나 역시 이런 '취향'(또 취향!)의 영화들이 좋고 이 리스트 덕에 옛날 영화들을 더욱 열심히 찾아보게되었으며 더 좋아하게됐다. 

5.로빈 우드는 가장 난해한 영화이론가는 아닐지몰라도 가장 정교한 이론가임은 분명하다. 영화를 그것도 영화 내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는게 과연 어떤건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있던 것을 그의 글을 통해 비로소 실감했음은 물론 아카데믹함이 다룰 수 있는 것의 광범함과 깊이에 솔직히 질겁을 하면서 동시에 탄복했다. 불과 얼마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선 오기 지적부터. <오징어와 고래>를 만든 이는 노아 봄바흐가 아니라 노아 바움백이고 데이비드 피스의 소설에 나오는 실존인물 주인공의 이름은 브라이언 클라우가 아니라 브라이언 클러프다.

이 책에서 첫번째 재미있었던 부분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보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러오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한 혼비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대개의 모든 일반독자들을 포함해서 책읽는걸 반쯤은 업으로 삼고있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포함)들이 크게 공감하리라 생각되는데 읽지도않을 책을 잔뜩 사들이고는 읽지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과 무엇을 읽을까하는 고민, 읽고도 내용을 기억하지못하는 나쁜 기억력에 대한 한탄, 그리고 책을 읽지못했던 구구절절한 이유와 온갖 핑계들까지. 유명작가라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군하며 살짝 위로가 되었다고해야할까.

혼비는 여기서 '문예소설'을 말하고있는데 아무래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본격문학'을 지칭하고있는듯하다. 그도 대개 문예소설은 재미가 없다고 토로하고있다.

무릎을 치며 가장 크게 공감했던 부분은 퇴고과정에서의 소설분량 덜어내기와 다듬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짧게 줄이는 것이 작가적 역량이자 미덕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인가본데 여기에 대해 혼비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왜 그렇게 줄이고 줄였는데도 꼭 마지막 최종 결과물은 딱 두툼한 장편한권정도가 되는가. 작가가 길게 쓰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라면서 그는 찰스 디킨스의 예를 들고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줄이는걸 강조하는 것은 원래가 소설을 쓰는 일이 그리 남들에게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기때문에 육체노동자의 그것에 준하는 치열함과 엄격함을 작가에게 강요한 결과라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소설쓰는 일이 사실 그리 남자다운 일이 아니라니. 이 얼마나 솔직하면서도 놀라운 통찰력이란 말인가. 그럼 맞는 말이긴하다. 아닌게아니라 어찌보면 남들 이리저리 뛰어다닐때 책상에 앉아 깨작깨작 종이를 채워나가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풍경은 밥벌이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는 풍경과는 거리가 살짝 멀어보인다. 길게 써야한다면 길게 써야지 그걸 편집과정에서 굳이 또 줄이고 줄일건 뭐냐. 또한 이건 작가의 자존심의 문제와도 결부되는데 죽어라고 고생고생해가며 쓴 글을 듬성듬성 쳐내면서(혹은 족족 뽑아내면서) 편집자들은 겨우 냉혹한 시장논리를 들이민다. 그 시장논리중에는 요즘 독자들은 긴 글을 읽어내지못한다는 푸념도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 주범으로는 영화와 tv 그리고 새로운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인터넷이 용의선상에 올라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 독자들의 인내심이 약해진건 어느 정도 사실인듯하고 그런 바람에 인터넷상에서 요즘 시쳇말로 '난독증'에 의한 살풍경을 자주 목격하기도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인터넷상에서 그렇게 치고박고 할때의 '난독증'은 의학용어로서의 난독증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저 자기가 읽고싶은대로 읽고 남의 말은 그냥 무시하는건데 이건 난독 자체가 문제라고는 결코 할 수 없고 그저 문해력 (literacy)의 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책 자체는 재미있기도하고 없기도한데 우선 재미가 없는건 혼비가 소개한 책의 절반쯤은 우리나라에서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책들이어서 책 내용이 어떻다고 말해도 와닿지가않아서, 둘째는 역시 번역상의 문제인데 저자의 문체를 제대로 못 살린건지 아니면 아예 엉뚱하게 오역을한건지는 원문을 보지않았으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건지 문맥을 쫓기 어려운 문장들이 더러 눈에 보였다.(이것도 내 '난독증'때문인가?)

그의 독서취향은 아무래도 문학에 쏠려있다. 그리고 나는 요즘 좀처럼 문학을 읽어내지못하고있는데 이 책을 보니 영어권에서는 그야말로 재미있(어보이)는 문학책이 여전히 쏟아져나오고있나보다. 그쪽 출판계의 특징이 논픽션도 픽션처럼 써서 딱히 어느 쪽으로 분류하기힘든 책들이 많고 대개는 그런 책들이 더 재미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책들도 그런 류가 많고 다 읽고싶었다. 앞서말했듯 혼비도 '문예 소설'에서는 재미를 찾지못하고 장르소설과 논픽션들을 높게 쳐주고있다. 영미권이야 워낙에 장르소설과 논픽션의 전통이 유구하고 그렇다보니 좋은 책들도 많이 나오고있을테고 우리는 여전히 문학하면 본격문학이고 거기에 동시대의 현대문학은 도서 정보나 수요를 감당해낼 번역자의 부족같은 것 등이 겹쳐 소개가 덜되지않나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며 놀란건 의외로 혼비가 언급하는 책들이 적지않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있다는 점이었다. 몇 권은 적어놓았으니 향후 읽을 기회가 있겠지.

'레예스의 30미터짜리 캐넌슛보다 더한 감격을 전해준 책은 이번 달에 없었다'거나, 서포팅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한데 대한 흥분을 떡하니 독서칼럼에 적는 열혈 구너 인증도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음을 밝혀둔다. 지난 시즌 3년만에 두번째 챔스 준결승에 올랐으니 5월에도 책은 덜 읽었겠군.

<고종석의 유럽통신>
지금도 매년 한권 이상 꼴로 나오고있는 수많은 그의 저작들 중에서도 사고싶다고 쉽게 살 수 있는게 아닌지라 몇년간 위시리스트 일순위에 올라있었는데 알라딘을  둘러보다가 중고장터에 올라있는걸보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냅다 질렀다. 같은 날 주문한 일곱권의 다른 책들과 같이 배송이 도착해 기대감이 정점인 상태에서 새 책보다 먼저 뜯었는데 책 상태가 너무 좋은거야. 나온지 십삼년이나 지난데다 도서관 장서였음에도 많아봐야 두번 이상 본 것 같지는 않을 정도로 종이 변색도 심하지않고, 단 한 장도 줄 치거나 접힌 흔적없이 깨끗해서 거진 반쯤은 새 책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판매자 측에서 이렇게 좋은 상태의 책을 사천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정해서 더 만족스러웠다. 배송받고나서 알라딘에 다시 들어가보니 또 한 권이 장터에 올라와있는데 가격은 무려 원가의 두배인 만원이다. 배송비까지 합치면 거의 만삼천원꼴인데 책 상태가 그만큼 자신이 있는건지 괜히 한번 보고싶다.(내가 구입할 때는 못봤는데 이제 매물이 하나뿐이라 가격이 더 올라간건지.)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중고서점을 뒤지고 다닐 능력이 안되는데 집에서 책상 앞에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이렇게 좋은 책을 받아보게되니 오랜만에 인터넷 생활에서 만족을 느낀 순간이었다. 안그래도 시장을 접수하다시피한 인터넷 서점이 중고책 거래까지 시작하면서 걱정하는 목소리들도 더러 있지않을까싶은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툴이 생겼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이 시스템이 현존하는 중고서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계되어 거래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다면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지않을까.(혹시 이미 그렇게 하고있는건가.) 

나름 '어렵게'얻은 '귀한' 책인지라 밑줄도 못 긋고 귀퉁이를 접지도 못하고 페이지 떨어져나갈까 살살 조심스레 다 읽었다. 나로서는 확실히 그의 초기 저작들이 요즘 나오는 것들보다는 더 유용하고 더 잘 읽히는데 칠년여 전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정신적 포만감은 그대로였다. 역사에 도통 관심이 없는지라 분명 세계사 시간에 들어는 봤겠지만 이름만 남았을 뿐인 파리코뮌이 비로소 이 책을 통해 내 머릿속 한 켠에 자리를 잡았고, 그래서 파리에 갔을 때는 제일 먼저,는 아니고 (첫번째는 에펠탑이였다. 촌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번째로 간 곳이 페르라셰즈였다. 오랜만에 서문을 읽고있으니 마음이 안정되면서 다음엔 김병익의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문을 쓰는 이론가가 명징한 의식을. 투명한 정신을 지닐 수 있다는 걸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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