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들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형을 평소보다 배나 딱하게 여기는 일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형님이 학문 이외의 일에 시간을 쓰는걸 아까워하고 모든 일을 남한테 맡겨둔 채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않고 화족인 양 행세하는 것이 애초에 잘못이에요. 아무리 연구할 시간이 소중하고 학교 강의가 중요하다고 해도 평생 한곳에서 함께 생활해야 할 자기 아내 아닌가요?"
"다만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게 가장 괴롭습니다."
형님은 바둑을 두는 것은 물론이고 뭘 하든 다 싫었다고 하네. 동시에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고 하네. 그 모순이 이미 형님에게는 고통이었다네.
형님은 책을 읽어도, 사색을 해도, 밥을 먹어도, 산보를 해도 스물네 시간 뭘 해도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고 하네. 뭘 해도 이런 걸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기분에 쫓기게 된다고 하네."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형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뭘 해도 그게 목적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네. 그냥 불안한거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거네.
형님의 머리는 지나치게 명민하여 자칫하면 자신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가고 싶어하네. 마음의 다른 도구가 그의 이지와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데에 형님의 고통이 있는거네. 인격에서 보면 거기에 빈틈이 있는거지. 인격에서 보자면 거기에 파멸이 숨어있네. 형님을 위해 이 부조화를 슬퍼하는 나는 모든 원인을 지나치게 작동하는 이지의 죄로 돌리면서도 역시 그 이지에 대한 경의를 버릴 수가 없네.
형님 입장에서 보면 반듯한 머리가 곧 흐트러진 마음이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럽네. 머리는 확실하지만 정신은 어쩌면 좀 이상할지도 모른다, 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신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성과 감성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한 채 한쪽이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조금씩 정신이 분열되어가는 이치로는 근대적 인간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머리'와 '마음'간의 균열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상해져버린 '정신'. 머릿속에 다 집어넣기도 힘들만큼 서구로부터 지식이 쏟아져들어오던 시대, 그 지식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이, 사상이 바뀌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으로 대표되는 내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산시로> 속 문장을 빌리자면 '먼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정치, 경제, 사상 등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문물을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감각은 둔해져가는 탓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속을 몰라 애를 태운다. 뿐만 아니다. 아는게 많아질수록 모르는게 더 많다는걸 깨달으며 생긴 초조함과 조급함, 불안 때문에 인간에는 더욱 소홀해지고 그렇게 자신으로 인해 인간 관계가 파열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대를 의심하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부조리를 가한다. 원인 모를 불안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인간의 등장이라는 전환기의 풍경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동시대 서구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동시대 서구 작가들의 장황한 사변적 서술이 아닌 소박한 가족 드라마의 외양을 취한 점은 소세키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을 근대 시기를 살아가던 인간의 내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정작 장편소설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알게된거라곤 시대에 적응하려다 내파된 인간의 고통이라는 외양뿐이고, 그래서 대체 이치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다른 누군가의 또 하나의 잠정적 가설만 남는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알기 어려운 한 길 사람 마음속에 대한 소세키의 본격적 탐구는 차기작 <마음>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