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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야심가

 

"직장은 곧 정글"이라는 뻔한 비유로부터 이곳 '던더 미플린'의 스크랜튼 지점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곳 풍경은 뭔가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일단 지점장 마이클 스캇을 제외하면 다른 직원들간의 위계서열은 분명히 드러나지않으며 마이클이 전직원을 불러놓고 서서 뭔가를 말할때 다른 직원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앉아도 상관없으며 또 마이클에게 욕을 하거나 더 나아가 뺨을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직원들이 담대하고 상사에게 '스스럼없다.' 다시말해 마이클 스캇이란 이 남자는 상사치고는 무척 만만해보인다는 것이다. 일단 겉으로는.

하지만 이 자유로운 사무실에서 아무리 '부지점장'(이라고 주장하는) 드와이트가 주접을 떨고 짐이 영리해도 이 곳의 최고결정자는 마이클이고 이곳은 자기 말마따나 그의 제국이다. 도대체 이 남자가 하는 짓들이 고도의 위선인지 아니면 그냥 주책맞고 눈치없는건지는 쉽게 구별되지않는데 이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계속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찍고있기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라 누군가가 촬영하고있는 리얼다큐처럼 보이게하고있어서 카메라의 시선은 마치 진짜 다큐인냥 등장인물의 행동을 절묘하게 포착하기도하지만 동시에 감시자가 되어 다시 마이클을 포함한 사무실 전체를 시선의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대화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카메라의 눈치를 보는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불러오는 의외의 긴장감. 즉, 등장인물들의 카메라를 의식한 발언과 실제 벌어지는 행위사이의 불일치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때로 그 차이를 판별하기가 어려운 상황의 미묘함이 코미디를 구성하는 두번째 요소이다. 그 때 시청자는 마이클의 이 위선인지 무지인지 모를 행동의 불일치에 쓴웃음을 짓고 그 진의를 의심하게된다.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면서도 농구시합에 끼고싶다는 멕시코계 직원인 오스카에게 야구나 권투경기가 있으면 그때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자연스레 내뱉고, 신입사원인 라이언을 즐겁게하겠다면서 팸에게 거짓해고통보를 날리며 급기야 그를 울리고마는 뭐 이런 식이다. 그런 마이클에게는 자신도 똑같은 동료이자 피고용인이면서도 계속 마이클 옆에 붙어 고용인 행세를 하려는 드와이트, 그런 드와이트를 놀려먹는 짐. 마이클이 싫으면서도 어쩔수 없이 그 밑에서 따라가야만하는 팸과 그외 직원들이 있다.

 다큐멘터리적 느낌을 살리기위해 핸드헬드촬영에 극중은 물론이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때조차 음악을 배제함으로써 이 코미디는 낯설면서도 이상한 현실감을 탑재한다. 불친절해보이는 카메라의 급격한 화면전환과 연기가 아니라 실제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과 연기는 분명 설정된 드라마라는걸 알면서도 왠지 지금 내 주위에서 보고 들은 얘기인 것같은 기시감을 불러온다. 마이클의 고도의 농간과 그에 대응하는 부하직원들의 소극적 반항과 기지도 결국은 적정한계선을 넘지못하면서 매번 모든 에피소드는 이래저래 백퍼센트는 아니더라도 대개 마이클의 뜻대로 귀결한다. 자신이 부하직원을 사랑하는 최고의 상사라고 자부하는 마이클은 그 명성을 유지하기위해서 자기가 맡기싫은 악역은 드와이트에게 맡기고 미국의 저명한 코미디언들을 입에 올리면서(마이클은 그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넣고싶어하는듯하다.) 그들을 흉내내어 부하직원들을 웃기려한다. 원래 부드러운 파시즘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인원감축이 예정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하고 회사에 매여있는 직원들과 마이클 사이의 우당탕탕 덜컹대는 소동을 보며 낄낄대다가도 종내엔 마이클의 손바닥위에서 굴러가는 사무실을 보면서 '쟤들도 다 똑같구나'하는 씁쓸한 동병상련과  체념으로서의 위안이 이 드라마의 인기요인이 아닐까싶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나마 저렇게라도 친구처럼 대하려 노력하고 웃기려는 상사가 있으니 그것만도 다행인줄 알라며 한마디 쏘아붙일지모르겠다.

덧.1. 그나마 덜 웃긴 에피소드하나. 1시즌 5화에서 결국 주말근무를 하게되어 불만인 직원을 앞에두고 마이클은 직원들 맘을 헤아린다는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사고 나부랭이고 내일 나오지마. 쉬라고. 하루 더 나오면 인원감축에서 안전하긴하겠지만. 주말 잘 보내."

2.아직 2시즌 초반밖에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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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내 것인적없는 단어들이 있다. 근면,성실,자본,권력,스타크래프트,여름휴가,당구,클래식,비만등등, 더이상 밝혔다가는 자학증세가 어디까지갈지 장담할 수 없어서 그만둬야겠다. 하여튼 이 단어들의 목록 속에 '고향'도 있다. 이 단어는 나에게 그 어떠한 감정과 기억과 이미지도 제공하지못하는데 세살무렵부터 지금까지 중학생때 이년여를 제외하곤 줄곧 한동네에서, 그것도 삭막하기그지없는 아파트단지에서 거주하고있는 사람에게 고향이란 단어는 그러니까 알래스카 여행이나 비시스와즈나 마찬가지다. 도저히 그게 뭔지 감도 못잡는거다. 고향이요? 서울이에요 라고 말할때마다 오답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닌듯한 어색함이 휙하고 지나가는, 그렇다고 억울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낀적 역시 한번도 없지만.

그래서 향수병이란게 뭔지도 나는 잘 모른다. 밤에 침대에 누우면 고향의 공기가 느껴지고 동네입구가 떠오르고 부모와 친구들과 지나간 옛시절이 떠오르는 뭐 그런건가하고 어렴풋 짐작만할뿐인데 군대시절에도 이런걸 느껴본 적은 기억을 더듬더듬해봐도 없는 거 같다. 이럴땐 무심하고 무감각하고 무던한 성격이 좋은건지아닌건지 잘 모르겠다.(그러니까 군대에서는 명령된 프로그램처럼 그냥 무조건 집에만 가고싶다는 강박이 있을뿐 딱히 집이 그립다는 식의 향수는 아닌 것 같다는 말씀. 세상에 집에 안가고싶은 병사가 어디있을까만 무조건적으로 집에 돌아가고싶은 마음과 향수병은 그래도 뭔가 좀 달라야하지않을까.)

타르코프스키는 <노스탤지어>에서 향수병을 지극히 시적인 이미지로 한가득 펼쳐놓았었다. 그곳에선 시간도 다르게 흘러가고 공간은 현실로부터 살짝 떠올라 천천히 부유한다. 이런 시각적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고향이 있다면 역시 가장 대중적인 고향의 기억은 원형의 공간이라는걸거다.

<가든스테이트>를 보고있으면 자연스레 이 영화보다 일년뒤에 나온 <엘리자베스타운>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일단 영화의 대략적 시놉시스만 놓고보면 두영화는 흡사 판박이에 가깝다. 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에 돌아온 남자주인공, 객지에서 고생하다 실의에 빠진 이 남자들은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된다는 얘기. 배우들은 모두 선남선녀에다가 공교롭게 두 영화 모두 잘 선곡된 컴필레이션 ost를 가지고있다는 공통점까지 있다.    

고향. 그곳에가니 잊으려 노력했던 자신의 지난 과거와 치부를 인정하고 타인의 죄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가족과 화해하고 덤으로 연인까지 얻다니. 오라! 고향은 좋은 곳이로구나. 그럼 내가 이모양인건 고향이 없어서였던건가? 고향없는 자의 설움은 계속된다. 고향에 돌아간 주인공 앤드류는 그동안 평생 먹어왔던 약도 끊고 옛친구를 만나서 신나게 수다도 떨고 이상한 모험도 하면서 옛시절을 추억하고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향을 자의대로 상상하고 재구성하고있지는 않을까? 그곳엔 내가 진정 잊고싶었던 어리숙하고 욕심만 많고 능력은 없는데다 촌스럽기가 말도 못하던 내가 있지않았나? 그곳엔 다시는 얼굴 마주보지않으리라 생각하며 떠나왔던 부모와 나를 괴롭혔던 친구 아닌 친구와 내 부끄러운 치부를 모조리 알고있는 첫사랑 그녀가 아직도 살고있지는않은가? 그리고 그곳엔 이제는 기억나지도않을만큼 멀어져버린 젊은 시절의 꿈도. 그것들과 마주하게되기가 싫어서 우리는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가지않는다. 그냥 쉽게 명절을 떠올리면 된다. 일년에 두어차례 명절이라 불리는 연례정기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친척이란 이름의 그 사람들. 내가 학교에서 몇등을 하는지, 올해 연봉은 얼만지, 지금 사귀는 사람은 있는지, 결혼은 언제하는지 등등. 뿐만아니다. 그곳에선 꼭 어릴적 내 실수들이 빠지지않고 등장한다. 나하나 우스개가되어 즐거워지는 그곳. 군인들도 안에있을때는 늘 집에만 돌아가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간인보다 말년병장이 더 편하다는, 현역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고 실제로도 말이 안되는 이 역설중의 역설도 그러나 역설로서의 일말의 진실을 갖고있다.

가든스테이트와 엘리자베스타운의 주인공들은 모두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중산층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선량하고 이상하게 그의 옛친구들은 도시로 안떠나고 모두 고향에서 한자리씩하면서 마치 기다리고있었다는듯 웃으며 맞이한다. 게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새 여자친구까지 생긴다. 처음엔 부모와 약간 삐걱대지만 심각한건 아니고 몇마디 대화를 통해 화해한다. 나도 이런 고향하나쯤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언제나 쉴 수 있고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고 다가올 내일을 힘차게 계획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지금까지 고향이 없는 남자의 고약한 투정이자 질투였다. 진심이다. <스크럽스>의 그 젊은이가 이런 따뜻한 영화를 만들 줄 몰랐다. 그리고 나이든 카메론 크로우의 <엘리자베스타운>보다는 훨씬 디테일하고 더 공감이가는 귀향기였다. ost 선곡도 훨씬 내 취향이고.

가장 맘에 들었던 장면. 음악과 화면이 멋지게 붙어있다.

 

영화를 처음보고 든 생각은 알레고리에 집착하고있다는 것, 그리고 혹시나 감독이 문학에 조예가 깊지않을까하는 것이었고 확인 결과 아닌게아니라 처음에 소설가로 데뷔를 했었단다. 그러다가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해 결국은 현재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것.

영화는 보는내내 그의 출세작인 <크라잉 게임>을 떠올리게만든다. 대사는 한줄한줄이 세심하게 공들여 쓰여있고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사랑, 그리고 크고 작은 은유와 상징이 계속 이어지고 전체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알레고리가 떠받치고있다는 점이 그랬다. 아, 그리고 영화의 시작을 오래된 팝송으로 시작한다는 점도.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막 감옥에서 출소한 남자가 예전에 알고지내던 조직의 보스 소개로 흑인 콜걸의 운전사 역할을 하는데 그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그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게되고 그 과정에서 조직과 마찰을 빚게된다는. 이 남자는 처음 자기 집 앞에서 아내로부터 문전박대당하는 장면만봐도 안쓰러운데 불같은 성질 뒤에는 의외로 순진하고 정도 많은 그런 사람이다. 자동차 정비공 로이는 조지의 유일한 친구로서 탐정소설을 좋아하는데 어느날 조지에게 소설 한 권을 선물하고 만날때마다 둘은 소설 내용에 대해 잡담을 하는데 이는 점점 더 실제 조지가 겪는 모험을 은유하게된다.

영화의 초반, 조지는 느닷없이 엉뚱한 행동을 한다. 출소후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의 보스인 모트웰을 찾아가는 자리에서 흰 토끼 한마리를 사서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을 받아달라는 신호일 수도 있고 당신이 나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잊지말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후 토끼에 대한 언급은 한번도 없다가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모트웰이 이 토끼를 안고서 조지와 시몬을 기다리고있다. 가장 친숙한 해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빌려오는 것인데 거기서처럼 토끼는 이제 앞으로 조지가 잠시동안 겪게될 이상한 세상으로의 초대권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말은 어떤가. 조지가 읽고있는 소설에서 말은 살인범이 현장에 남겨두는 표식이다. 그런데 시몬이 찾아달라고부탁했던 캐시를 시몬과 둘이 만나게해주고나서 조지는 갑자기 흰 말 한마리를 보게되는데 이는 곧 살인이 일어나리라는 암시임과 동시에 결국 이 모든게 한편의 소설이고 이야기, 그러니까 조지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그저 한편의 에피소드에 지나지않음을 암시한다.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않는가, 일편단심인 조지의 맘을 알면서도 시몬은 그를 끝내 받아들이지못한다. 조지가 모르는 것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의 뒷골목탐험은 한편의 오딧세이, 거기서 그는 결국 변태, 악당, 창녀, 동성애자들이 뒤얽힌 어둠을 경험하고 그 모험의 끝에서 아무것도 얻지못한채 결국 평범한 남자로 되돌아와 딸과 로이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정비공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잠깐의 여행이고 백일몽인셈. 자신이 알지못했던 어둠의 세계를 배회하다가 끝내 얻지못할 사랑으로 마음아파하다가 끝나버리는.

한번도 서로에게 솔직한적 없던 두사람은 놀이공원에서 우스꽝스런 선글라스를 끼고나서야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토해낸다. 이 장면은 밋밋하게 전개되던 영화에서 방점을 찍는 인상적인 장면인데 기둥을 붙잡고 끙끙대는 호스킨스의 얼굴은 베스트 컷이라 할만하다. 닐 조단의 개성이 두드러진 초기작. 최근 그는 조디 포스터 주연의 <brave one>개봉을 앞두고있다.

내일까지 마쳐야하는 레포트때문에 약간 어이없는 현장조사를 마치고 돌아와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밤, ebs에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봤다. 60년대 체코에서 나온, 그러니까 원작소설이 나오고얼마되지않아서 나왔을 영화. 루드빅도, 헬레나도, 파벨도 다들 너무 못생겨서 도저히 몰입이 안되는 영화였다. 천하의 바람둥이 루드빅이 대머리에 배나온 중년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헬레나같은 콧대높은 인텔리 여성이 넘어간단말인가.(그런데 영화속 헬레나도, 파벨도 모두 그리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닌지라 마찬가지) 어쨌거나 영화는 80분남짓한 시간동안 소설의 내용을 얼추 다 담아놓았다. 과거와 현재가, 기억과 사실이 계속 맞물리며 간략하고 빠르게 넘어가고있었는데 그 어색하고 어지간히 궁핍해보이는 화면속에는 프라하의 어떤 풍광도 제대로 들어있지않았고 인물간의 치열한 관계도 밋밋하게만 보였다. 차라리 한시간뒤에 kbs에서 시작한 트리플엑스 속 프라하가 훨씬 더 멋있었다. 모터보트가 카펠교를 향해 달리는 액션 무대로서의 프라하는 여전히 생뚱맞긴하지만 프라하 관광청으로서는 <농담>속 프라하보다는 이 할리웃블록버스터 속의 프라하를 더 좋아할 것이다.

이미 몇번이나 읽은 소설이었건만 영화속 마가레타의 행동은 여전히 짜증나고 불쾌했다. 이 세상 모든 걸 문자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고지식함은 한 남자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었건만 그녀는 단 한번도 후회하지않는다. 굳이 밝히지않더라도 그녀는 물론 그녀가 속해있던 당을 대변하는 역할일테고 이는 곧 공산주의에대한 쿤데라의 반감 그 자체였으리라.

언제어디서나 타인에게 교조적인 사람은 그 자체로 역겹기짝이없고 그 도그마를 곧이곧대로 아무런 성찰없이 받아들이는 인간은 더 끔찍하다. 제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도 당이 포기하라면 포기하는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당원들로 가득했을 당 수뇌부는 그러한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보며 속으로 얼마나 웃고있었을까?

40년도 훌쩍 지난 아시아의 좁아터진 조그만 나라에서도 여전히 이런 도그마의 망령에 붙들린 넋나간 영혼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알고있고 한번도 몸으로 겪어보지않은 체험과 사실과 지식을 장신구처럼 걸치고는 거들먹거리고 자랑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선동하고 억압한다. 도대체 자기들이 지금 뭘 하고있는지조차 알지못하는 그들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들은 함부로 말하고 겁없이 행동하며 책임을 져야할때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이런 세상에서 침묵이 결코 비겁한 수단이나 회피라고 나는 생각하지않는다. 흘러넘치는 말이 무섭고 뱀처럼 또아리를 트는 말이 무섭고 어디로 날아갈지모르는 말이 무섭고...  하여간 말이 많은 곳에서 괜히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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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상류층의 두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이혼직전에 이른다. 단 하루도 쉬지않고 싸우면서. 그러다 심리상담사를 만나 남자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부부는 '재결합'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 이란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미지와 이란 영화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다. 호메이니, 아시아 축구 강국, 불안한 중동 국가라는 지극히 껍데기뿐인 이미지의 반대편에는 인간의 선함을 지극히 소박한 서민들의 시선으로 따뜻하게 풀어내는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로 대변되는 이란 영화들이 있다. 위험한 편견이란걸 나도 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나의 선입견을 깨뜨리고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있어서 거부감은 적을지몰라도 너무 낯익고 익숙한 모양새여서 여성영화제라는 타이틀에서 품었던 일말의 기대(비록 그것 역시 편견이라하더라도)를 충족하지는 못했다. 영화제에서 이토록 전형적인 장르물을 보게될줄은 몰랐는데 절대 물러서지않는 남녀가 쉴새없이 말을 주고받고 투닥투닥하고있으니 스크루볼코미디와 <사랑과 전쟁>(두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는 컨설턴트 혹은 중개인의 존재와 남발되는 플래시백)의 어디쯤 서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영화였다.

이란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려노력했지만 영화는 분명 한계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하고있는 남자주인공 유세프는 아내인 사예를 때리지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벨트로 때리며 살아왔지만 유세프는 쉴새없이 협박은 할지언정 직접 때리지는 않는다. 반면 세련되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인 사예가 아무리 저항을 해도 그녀를 둘러싼 이란 사회의 차별구조는 견고하기만하다. 여성과 개는 들어오지못한다는 간판이 버젓이 걸려있는 사회에서 소리치고 싸우는 사예가 나에겐 무슨 간첩이나 외계인처럼 보였다.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사회에서 과연 그런 인물이 가능할까?

대표적으로 마지막장면에서 보듯 재결합하기로한 뒤 화해기념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는 주인공의 사회경제적위치는 이 영화의 다른 모든 등장인물에게도 해당된다. 모두들 외제차에 휴대폰을 갖고다니고있고 엄청나게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집과 (차도르를 썼을지언정) 전형적 커리어 우먼 차림을 하고있는 등장인물의 패션은 여기가 할리웃 어느 거리인지 테헤란인지 착각할 정도다. 단 한명도 평범한 테헤란의 갑남을녀는 보이지않는다. 게다가 캐릭터나 드라마가 전혀 없어 들러리밖에 되지못하는 성전환수술(희망)자는 뭔가? 이것이 이란 사회의 변화양상인가? 이건 그저 나열이고 전시에 지나지않는다.

게다가 결국 아마추어틱한 정신분석학 내지는 심리학에 기대는 결말도 정말 안이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구조를 깨부수는건 개인의 노력부터라고하면 할 말 없지만 거대한 구조 앞에서의 개인의 노력은 전부 그런건 아니지만 몸부림에 지나지않아 보인다. 감독은 지나치게 미시적인, 그것도 상류층의 미시적 갈등만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진정 몰랐을까? 그저 '우리나라 이만큼 변했어요'라고 보여주고싶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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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사전정보없이 보게되는 영화들이 있다. 전부 그런건 아니지만 때로 그런 영화들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되고 곧 천천히 아주 서서히 온 몸으로 스며든다.

재즈광인 베르트랑 타베르니에가 버드 파웰과 레스터 영에게 바치는 영화라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른 불세출의 섹소포니스트 덱스터 고든의 자전적인 전기의 모양새를 한 영화이기도하다. 프란시스는 파리의 어느 클럽에서 잊혀졌던 색소폰 주자 데일 터너를 만나게된다. 피상적인 팬과 뮤지션의 관계를 넘어 두 사람은 깊은 교류를 이어나가게되는데 이혼에 실직중인 프란시스도, 미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한 노쇠한 뮤지션도 모두 삶의 전환을 맞게되어 프란시스와 그의 딸 베랑제를 만나 힘을 얻은 터너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재기에 성공하지만 곧 죽고만다는 단순한 이야기. 그리고 이는 실제로 미국을 떠나 유럽을 떠돌던 고든의 삶과 얼마정도 유사하다. 황량하기만한 사막같은 고든의 얼굴과 목소리는 도저히 연기와 실제가 구별이 되지않고 실제로 이 영화의 발표 후 몇 해 안되어 사망함으로써 영화 속 그의 외로움을 보고있노라면 안타깝기만하다.  

이렇다할 사건도 줄거리도 없는 밋밋한 전개중에도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압도되고 프란시스와 터너 두사람의 우정은 애잔하면서도 따뜻하다. 재즈를 좋아하지않는 사람도 충분히 즐길 수 있고 또 결코 흔하지않은 분위기를 갖고있는 영화.

물론 영화에는 고든말고도 숱한 재즈 뮤지션들이 대거 등장한다. 60년대부터 고든의 밴드에서 같이 해온 드러머 빌리 히긴스부터 론 카터, 시더 월튼같은 노장부터 당시로서는 젊은 축에 속했을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존 맥러플린까지. 그리고 자칭 재즈광이라며 자진해서 참여했다는 마틴 스콜세지와(여기서도 어지간히 수다스럽게 나온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필립 누아레도 빼놓을 수 없다.


결말부. 영화 속 터너의 딸을 위해 작곡한 Chan's song. 실제로는 허비 행콕의 작품. 마지막 크레딧 올라갈때 나오는 스튜디오 버전도 정말 좋다.


"회장자리가 뭐가 그리 대단하죠? 뭐 때문에 그만 두지 못하는겁니까?"

주인공 지미는 현재 회장인 록에게 묻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내내 나도 똑같이 묻고있었다. 1편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결국 자리다툼하는 치사한 남자들의 비열한 거리 위의 협잡과 배신을 다룬다. 새로 회장을 뽑아야할 시점이 다가오고 현임 회장과 차기 주자는 서로 으르렁대다가 납치하고 협박하고 고문하고 개싸움을 벌인다. 이 영화 뒤에 나온 두기봉의 차기작 <방축>과는 정반대로 인물들 사이에 의리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오로지 배신과 음모와 폭력 그리고 속임수만이 이어진다. 추천을 받고 신임을 얻기위해 조직의 원로들을 찾아가고(매수하고) 상대의 약점을 잡고 제거하려하는 이 모든 과정을 놓고보면 이 영화는 공정한 룰 위에서 진행된다고믿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선거제도에 대한 비아냥으로까지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중국과 홍콩의 주종관계가 끼어들면서 그 색깔이 달라지기시작한다. 본토에서 합법적 사업권을 얻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회장선거에 뛰어드는 지미는 스스로를 사업가일뿐이라고하지만 서서히 권력쟁탈전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그는 무자비해지고 급기야는 인간성을 버린 무자비한 갱스터로 거듭난다.

그렇게 결국 용두봉을 차지하게된 지미. 그러나 홍콩 조직들을 속속들이 알고있는 중국 공안부장은 그에게 이제 조직의 룰을 바꾸라고, 소모적인 이런 선거전은 더이상 안된다며 족벌세습체제로 바꾸라고 강요한다. 더러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라고 명령하는 주인과 결국 명령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은 노예는 절망한다. 이제 자신에게 어떠한 선택권도 없음을 알아버린 지미의 허망한 뒷모습은 보일듯보이지않는 그 권력의 실체를 짐작하게한다.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본토식 중앙집권주의를 따르라는 대륙으로부터의 명령? 이처럼 직접적으로 현 정치상황을 은유하는 장르영화는 얼마만인가.

 덧

1. 두기봉의 영화를 처음 봤다. 뭔데 그렇게들 난리가싶어 보게된 영화였는데 확실히 이사람이라면 <암흑가의 세사람> 리메이크를 믿고 맡길만하겠구나싶다. 어서 빨리 만들어주세요. 기대하고있습니다.

2. 얼마전 <방축>을 봤다. 아 이사람이 액션씬을 할줄몰라서 <흑사회>를 그렇게만든게 아니었구나. <흑사회>와는 내용이나 스타일에서나 180도 다르다. <방축>얘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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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독립투사, 의사, 열사. 이런 단어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은 대개 한움쿰의 민족주의와 넉넉한 회고일 것이다. "엄혹한 시절이었으나 그때 목숨바쳐 항거한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우리는..." 그들에게 드리워진 영웅담의 휘장을 걷어내지않을때 우리 손에 남는건 또다른 전설과 신화 그리고 위인전이다. 이러한 일말의 영웅만들기도, 추억으로 회고하는 노스탤지어적 시선도 모두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자 군단>이 서있는 지점은 독특하다. 2차대전당시 실제 레지스탕스였던 멜빌은 폴 버호벤의 <오렌지 병사들>처럼 스릴만점의 무용담보다는 그시절 점령당한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지않았고 또 무엇을 해야했으며 하지말았어야했는지에대한 나름의 뒤늦은 후회를 하고있다.

다시말해 영화의 초반부와 맨마지막에 자리한 두번의 배신자처형이 얼마나 다른 의미를 갖는지를 비교해보는것이 이 두시간반짜리 영화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게 보는 방법인 셈이다. 첫번째 처형장면. 안전가옥에서 조직의 젊은 배신자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필립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다른 동료들, 특히 다른 젊은 신참 르 마스크는 심히 주저하지만 필립에게 배신자 처형은 재고해볼 가치가 전혀 없다. 반면 영화의 결말부에서 조직의 핵심인 마틸드를 죽여야하는 대원들은 모두 갈등한다. 조직에 대한 그동안의 그녀의 헌신을 모두 알고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녀를 죽일 수 있겠는냐는 의견과 그래도 조직의 안전과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은 어떤 선택도 쉽게 하지못하게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내내 이 질문을 하고있다. 과연 그때 우리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과연 우리는 그시절 정말 현명했을까? 조직의 안전과 조국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피도 눈물도 없어질수록 그들은 점점 더 목표완수와는 멀어진다. 형제를 눈앞에두고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고 생각지도않은 곳에서 체포되고 배신자를 처형하지만 조직은 언제나 불안하기만하다.

살다보면 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의 순간. 그 순간에 과연 우리는 정말 옳았을까? 우리는 그 찰나의 순간에 진실했을까? 목표를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될 수 밖에 없을 때 우리는 과연 우리가 싸우고있는 적과 얼마나 다를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영화를 결코 반전(反戰)영화로 오해하면 안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지나치게 정직하고 꾸밈없고 강직해서 더 안타깝다. 그 순간을 내려야만하게만든 시대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사람들 모두.

1. 장 프랑소아를 연기했던 미남 배우이자 뱅상 카셀의 아버지이고 모니카 벨루치의 시아버지인 장 피에르 카셀이 얼마전 세상을 떠났단다.

2. 어디선가뽑은 작년 미국국내개봉영화 탑텐 목록에 이 영화가 2위에 오르면서 다시 화제에 올랐다. 뉴욕 단관상영이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나온지 30년도 더 된 영화가 미국에서 소개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으니 이것도 참. 그리고 올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완전판 상영을 했다.


marxist-feminism에 의하면 현대핵가족은 자본주의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세대적인 면에서의 인간 재생산과 매일 매일 노동자의 생계유지라는 이중의 과정을 포함한 노동력의 재생산과정 그리고 여성을 잠재적인 예비 노동군으로 사용함으로써(그만큼 쉽게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국가가 비용할 부담을 대신 짊어지는 효과를 갖는다." 물론 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여러가지 비판을 받는다. 우선은 실재 존재하는 가족구성원간의 자발적이고 진실한 애정과 연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는 과연 정말 다른 가족 유형이 존재하느냐의 여부, 엥겔스의 표현을 빌면 단혼핵가족이 자본주의의 전형이고 주류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등등. 하지만 어떤 이론도 모든 걸 설명하지는 못하는법이고 맑시스트-페미니즘도 그중의 한가지 관점인데 충분히 설득력있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베의 항구마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둘이 사는 어느 가정. 오늘도 아버지인 누마타씨의 관심은 아내보다는 아들들이다. 공부를 썩 잘하는 첫째 아들 신이치는 올해 명문인 세이부고에 들어갔다. 문제는 둘째인 시게유키, 공부에 영 소질도 없고 뜻도 없어보이는 막내 때문에 고민하던 누마타씨는 결국 가정교사를 고용한다. 정작 본인은 삼류대학을 그것도 7년째 다니고있으나 가정교사로서는 꽤 유능한 요시모토. 그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교육법(?)으로 시게유키를 다루기 시작한다. 시게유키는 서서히 학교에서 내외적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성적도 올라서 결국 자신이 원했던 진구 고교가 아닌 형이 다니고 있고 부모가 원하는 세이부고에 진학한다. 반면 신이치의 학교성적은 조금씩 하락한다. 시게유키의 입학이 결정되고 난 뒤 가족은 기념으로 요시모토와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 자리는 결국 괴상하게 끝나고 요시모토는 사라진다.

이건 정말 영화의 10분의 1도 다루지못하는 개괄적인 줄거리일뿐이다. 영화는 디테일이 강하고 세밀해서 작은 사건 하나도 놓칠 수 없고 등장인물들 모두 너무 세심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줄거리와 상관없이 그저 그들의 행동을 보는 것만도 흥미롭다. 영화를 보면서 위의 맑시스트-페미니즘의 기본 가정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는데 성실히 회사에서 일하는 근면한 아버지, 열심히 공부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을 '반드시' 해내야만하는 자식, 그런 그들을 먹이고 돌보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주고 부자 사이의 갈등을 완충해야하는 어머니까지 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을 찾기는 쉽지않다.

각자의 위치에서 흩어져살다가 밥을 먹을때만 비로소 같이 모이는 문자 그대로의 '식구'가 그나마 현대 가족에 가장 들어맞는 개념임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막스인 마지막 식사장면을 포함해서 이 영화에는 유난히 밥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그림이 정곡을 찌른다. 이 집안의 식탁은 옆으로 길고 폭이 좁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있어서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바싹 붙어앉아야만한다. 이 구조가 얼마나 상징적인지는 우리나라 tv 연속극과 비교해보면 된다.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식탁의 구조는 대개 가부장이 혼자 앉고 양옆으로 다른 식구들이 앉는 형태로 이 구조에서는 가부장의 얼굴만이 정면으로 보인다. 반면 이 영화의 식탁에서는(공원의 벤치를 떠올리면 쉽다.) 가족 구성원 모두의 정면을 볼 수 있는데 팔을 뻗기도 불편해보일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앉은 그들을 보고있으면 '가족은 결국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일뿐'임을 확인하게된다.

문제의 마지막 식사장면. 막내의 진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누마타씨는 다시 요시모토에게 이제는 큰 아들인 신이치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요시모토는 삼류 대학생이 일류 대학을 목표로하는 학생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사양하지만 누마타는 물러서지않는다. 정작 주인공인 시게유키는 안중에도 없이 누마타는 계속 신이치에게 놀지말고 쉬지말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다가 결국 '사고'가 터진다.

클라이막스가 지나고 마지막 장면은 명백히 암시적이다. 낮잠이 들었던 누마타 부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눈을 뜬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누마타 부인은 창가로 다가가고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시게유키가 원하는 고교 진학을 한다고해서 이 가족이 바로 행복해질리는 만무하다. 이제 목표는 신이치의 대학 진학으로 바뀔테고 그 목표가 완수되면 다음은 시게유키의 대학진학, 신이치의 취업, 결혼으로 계속 이어지며 이 가족의 미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저쪽으로 치워둔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거부하지 못하는 어머니. 고용인인 부모에게는 건실한 가정교사이지만 실은 특별히 가르치는건 전혀 없는 그저 감시자이자 훈육자일뿐인 요시모토, 그리고 성실한 가장이라는 겉모습 뒤로 계란 프라이를 쪽쪽 빨아먹는 아버지 누마타의 이상한 행동들은 과연 우리가 한 집에 산다고해서 진정 제대로 소통을 하고있는가를 되묻게한다.(이래저래 이 영화에서는 먹는게 어쨌든 중요하다. 요시모토는 물이든 음료든 소리를 내며 무조건 원샷으로 들이키는데 이 액션이 여러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요시모토와 누마타 이 두 남자가 이 집안의 성인 남자들이라는 점)

애초부터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가깝다. 국가는 중산층이라고 호명함으로써 당신을 체제에 편입시키고는 현실에 안주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눈앞의 부조리에 눈감게 한다. 중산층이 되면 이제 그들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부분이 되어 그것이 잘 굴러가게끔하는 바퀴 역할을 할 뿐.

좋은 영화의 기준이 여럿 있겠지만 지금 영화를 보는 당신은 어떠냐고 계속 묻는 것도 그 기준의 하나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좋은 영화다.

덧1. 어처구니없게도 영화에서 누마타 부부가 차에서 대화를 나눌때 흘러나오는 라디오는 우리나라 뉴스 방송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어쩌구저쩌구.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걸 계속 틀어놓는 것도 웃기고 그 뉴스 내용도 웃기고, 우리 말이 흘러나오는 상황 모두가 다 웃기다.

2. 마츠다 유사쿠 얘기를 안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평범한 역할인데도 예의 마초기질(?)이 흘러나오는데 요즘 활동하는 그의 아들래미를 보면 그건 물려받지않은듯. 근데 류헤이는 아버지만큼의 인기는 없는건지.

어떤 필요에 의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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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장 현실적인 가족이 등장하는 tv드라마는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닐까생각합니다. 우선 이 시트콤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제외하고는 '온전한' 확대가족이 나오는 몇안되는 케이스죠. 조금만 돌아봐도 젊은이들을 타겟으로하는 트렌디 드라마에서라면 거의 다 핵가족이, 그것도 부족하면 아예 <케세라세라>의 에릭처럼(정말 비호감 캐릭터죠) 양친이 모두 사망해서 '걸치적거릴게 없는' 쿨한 독신이거나 아니면 어딘가 '결여된' 가족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이킥>에는 명목상의 가부장을 우두머리로 삼대가 같이 사는 확대가족이 그것도 이제는 대놓고 서열까지 정하는 지경에 이른 가족이 설정되어있죠. 오늘 에피소드만봐도 또 그 어처구니없는 이씨집안 트레이닝복이 또 나왔죠. 물론 이 시트콤은 기본이 코미디지만 앞서말했듯 그러면서도 리얼리스틱한 가족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역학관계들(시아버지와 며느리,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동생과 며느리, 자식에 대한 부모의 편애, 형제간의 알력 등등)을 보고있으면 이건 무슨 전쟁터가 따로없지요. 권력을 향한 의지가 불을 뿜지않습니까.


제게 가장 흥미있는건 역시 허울뿐인 가부장 '순재'입니다.(이건 어디까지나 캐릭터이름이니 존칭을 붙일 필요없겠지요.) 이 사람은 다른때보면 괜찮은거 같아도 가끔씩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갑자기 이씨집안이 어쩌고 어른이 어쩌고하면서 권위를 행세하려고할때죠. 권위의 행사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너무 뜬금없고 일관적이지않아서 문제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순재가 권위적인 가부장이 되려고하면 할수록 사람꼴이 정말 우스워진다는데 있죠. 이씨집안 트레이닝복이 처음 나왔을때 에피소드를 다시보면 그때 그의 대사는 정말 들어주기 불편할 정도입니다. "1번이 숟가락을 들면 그 다음에 2번이 그다음에 3번이 하는 식으로. 알겠나?" 그때 이씨집안 남성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전부 번호로 호명되면서 순식간에 "쪽수"로 전락합니다.(가족 전체가 중대가 되는 순간이랄까요.) 그 에피소드의 끝은 얼마나 허망했습니까. 그게 무슨 가부장의 권위겠어요? 권력이란걸 행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쪽이 알아서 받아들이면 괜찮지만 스스로 자기가 자기 권위를 남들에게 인정하라고 자기 입으로 강요하고 무조건 거기에 따르라고하는것만큼 웃긴 상황도 없지요. 이 캐릭터를 몇십년동안 아버지를 연기한 한국의 대표적인 가부장인 이순재씨가(여기선 실제인물을 지칭하므로 존칭을 씁니다.) 연기하는건 그래서 전복적이기도합니다만 글쎄요. 매번 순재는 식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면박을 주고 발로 차고 가족들은 그러려니 받아들입니다. 암묵적인 승인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남편이, 시아버지가, 정말 무서워서가 아닌거죠.


역시 이순재씨가 나왔던 11년전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이 결국은 "목욕탕집 여자들"을 이야기했던것처럼 이 시트콤도 유심히 보면 순재를 비롯한 이씨집안남자들보다는 문희와 해미라는 여성캐릭터가 더 흥미진진합니다. 상기했듯 순재는 명목상의 가부장이고 집안의 큰 어른이고 주인이지만 이 집안의 실제 권력자는 해미죠. 이 시트콤을 거의 거르지않고 계속 따라오신분이라면 충분히 알 겁니다. 민용이 사는 방을 보수공사할때 모든 결정사항을 준하와 문희는 학회참석차 중국에 있던 해미에게 물어보죠. 게다가 순재보다 해미가 더 실력있는 한의사라는 사실은 온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있고 심지어 순재도 인정하죠. 해미가 실권이 없었다면 그렇게 대놓고 시어머니를 무시할 수 있을까요? 준하는 집에서 노는 남자고 민용이는 사실 어쩔 수 없어 이 집에 있는거지 매번 이 가족에서 이탈하려하고 10대인 두 손자들이 이씨집안의 부흥은 내 손안에 달렸다며 살아갈 아이들도 아니고. 한편 시어머니인 문희로 시선을 돌리면 그녀는 이씨집안에 바친 일평생을 이제는 꽤나 자주 후회하고 불평합니다. 손자들에게 그저 밥만 열심히 해준 할머니로 기억될거라는 문희의 말이 저는 꽤 아프게 들렸습니다. 몇십년동안 같이 살면서 늘 무시만 받으며 살아왔다는 문희의 한탄은 요즘 왜 그리 자주 나올까요.


대개 우리는 가족을 하나의 보이지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가족을 보고있으면 가족이란 어쩔 수 없이 혼자이며 개인일뿐인 사람들이 느슨하게 그것도 겨우 풀로 이어붙여놓은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묶여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기존에 제가 갖고있던 생각이 시트콤을 보며 좀더 구체화된 것에 불과하겠지만요. 가족간의 연대를 구성하고 유지하기위해서는 그것도 노력이 필요한거 아니겠습니까. 저절로 되는건 아니죠. 그래서 저는 이 시트콤을 보면서 현실을 사는 우리네의 가족과 저 이씨집안을 비교해보면서 진짜 가족(이란 개념이 있다면)은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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