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사로서 앤더슨의 영화들이 어떤 레퍼러스의 영향 하에 놓여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목록이다. 원문은 http://www.avclub.com/content/feature/16_films_without_which_wes/2

1.the graduate(1967)
아마도 웨스 앤더슨 감독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은 바로 마이크 니콜스의 독창적인 코미디에 나오는 불만에 가득찬 젊은이로서 이후 앤더슨의 다섯편의 영화들에게까지 고스란히 그 울림이 전해지고있다. 사운드트랙에서의 선구적인 팝음악 사용, 결점이 없는 와이드스크린 화면 구성, 그리고 불확실성과 멜랑콜리에 의해 특권이 무너진 젊은이의 이야기까지. 5월부터 9월까지 사이에 미성숙한 아이와 훨씬 나이많은 여인과의 역동성(<러시모어>), 단일 작곡가에 의해 꽉 채워진 음악선곡(여기서는 폴 사이먼, <스티븐 지수와의 해저생활>에서는 데이빗 보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그들의 부모와 함께 과거로 돌아간 젊은 아이들의 꽉막힌 삶(<로얄 테넌바움>) 그리고 결국엔 만족할만한 해결책은 그리 썩 훌륭한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점까지.

 

2.paper moon(1973)
앤더슨은 조숙한 젊은이, 아이같은 어른 그리고 명백히 복고적인 스타일을 포함하고있는 영화들에 취약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영화들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페이퍼문>을 떠올리게한다. 이 흑백 영화는 파인트 크기의 신동(라이언 오닐의 실제 딸인 테이텀 오닐)을 만난 음탕한 사기꾼(라이언 오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앤더슨처럼 보그다노비치도 그의 최고작에서 미장센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훌륭한 감각을 보여주고있는데(그의 전 부인이자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폴리 플랫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를 통해서 그의 영화는 연금술로 완성된 작은 세계로 거듭난다.

 

3.harold and maude(1971)
<러시모어>에서 캣 스티븐스의 “the wind" 삽입은 영화에서 60,70년대 노래들을 활용한 또다른 멋진 사례이다. 이것은 할 애쉬비의 컬트 클래식 코미디인 <해롤드와 모드>에서 끌어온 팁이기도하다. 이 영화에서 스티븐스의 노래들은 죽음에 사로잡힌 십대소년 해롤드의 등장에 쓰이고있는데 그는 노인 세대와의 상호교류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기에 이른다.(비록 제이슨 슈왈츠먼이 빌 머레이와 올리비아 윌리엄스와 맺는 관계는 해롤드가 루스 고든이 연기하는 이른아홉살의 친구 모드와의 맺는 그것보다는 훨씬 정숙한 것이지만 말이다)

 

4.brewster mccloud(1970)
코트는 슬프고 텅빈 얼굴을 한 잃어버린 또 하나의 윌슨 형제다. 로버트 알트만의 <브루스터 맥클라우드>에서 그의 역할은 앤더슨의 강박적인 인물을 앞서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코트는 당시엔 새로웠던 아스트로돔안에 들어가 하늘을 나는 것에 뜨겁게 미쳐있는 소년을 연기하는데, 소년의 굳건한 고집과 끈기는 <바틀 로켓>에서 오웬 윌슨이 실패한 강도질을 하면서 그대로 가져오고있다(그러니 거의 어쩔 수 없이 코트는 앤더슨 영화에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생활>에서 불안한 회계사를 연기한다).

 

5.sullivan's travels(1941)
그러나 인생은 강박을 만들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한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코미디 <설리반의 여행>에서 조엘 맥크리가 연기하는 할리우드 코미디 감독은 중요한 사회적 의의를 갖고있는 <오 형제여 어디로 가는가>라는 영화를 만들려고한다. 부랑자로 분하여 실제 세상을 경험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여행을 통해 찾아낸 것에 의해서만 영화를 만들리라 생각한다. 수많은 앤더슨의 캐릭터들처럼 그도 세상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하며 동시에 더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6.the world of henry orient(1964)
< 러시모어>가 그저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면, 거기에 나오는 조숙한 십대는 자신의 조숙함을 더 나은데 쓰는 법을 배웠을까? 그런 점에서 <헨리 오리엔트의 세계>보다 훌륭한 성장 영화는 없었다. 여기서 뉴욕에 사는 두명의 열네살 소녀들은 피터 셀러스가 연기하는 피아니스트를 스토킹한다. 티피 워커와 메리 스패스가 연기하는 소녀들은 짐 헨슨의 테넨바움 아기들 같은데 사춘기의 강박과 끝간데없는 상상을 공유하는 동안 예사롭지않은 표현들이 코믹하게 지나간다. 앤더슨의 캐릭터들이 마치 성인 소설의 세계에 나타난 십대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에 나오는 십대들이 공유하는 한가로운 우정은 이혼의 여파와 성에 눈을 뜨는 과정을 통해 파열된다. 영화의 외관은 부드럽지만 그 중심에는 친숙한 아픔이 자리하고있다.

 

7.the river(1951)
앤더슨에 의해 잘 알려져있다시피 <다즐링 주식회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장 르누아르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흑백화면이 테크니컬러로 변화하는 방식만큼이나 대단하다. 모든 장면은 인도에서 촬영되었고 인도에 대한 식민주의자의 시각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그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국취미를 만족시키고있지는않다. 반대로 그는 문화적 조건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존경심을 표하고있다. 비록 앤더슨의 영화가 여행에 관한 것인데 반해 르누아르가 다소간 정지한 상태로 남아있지만 두 영화 모두 명백히 서구 우월주의로부터 기인하고있고 두 편 모두 급진적으로 타문화를 이해하려하는 어떠한 전문가적 태도도 취하고있지않다. <강>과 <다즐링 주식회사>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하고있고 -전자에서 세명의 십대 소녀들이, 그리고 후자에서 세 명의 형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지만 그들 서로간의 소외와 다양한 개인적 위기들은- 아직 인도가 그들을 변화시키거나 치유하고있지는않고 그들의 삶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위한 문을 제공하고있을뿐이다.

 

8.bande a part(1964)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국외자들>은 수없이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있으며 그들은 그 유명한 댄스 시퀀스에 대한 경건한 오마주를 바치고있다. 그러나 앤더슨의 96년작 <바틀 로켓>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예상하기힘든 달콥쌉싸름한 또다른 범죄코미디인 <바틀 로켓>에는 젋고 매력적인 남자들이 무법자가 된 상황을 연기하고있는데 그중 누구도 설득력을 갖고있지않다. 이 두 영화는 모두 멜랑콜리와 상실감을 갖고있으면서도 동시에 놀라울정도로 부드럽게 공존하는 젊고 쾌활한 캐릭터들을 공유하고있다.

 

9.a boy named charlie brown(1969)
<로얄 테넌바움> 사운드트랙에 “christmas time is here"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앤더슨이 찰스 슐츠의 페티시이기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캐릭터들에게 입히는 유니폼은 찰리 브라운의 지그재그 셔츠나 루시의 파란 드레스, 그리고 <피너츠>와 앤더슨의 심각한 코미디에 공통적으로 흐르고있는 현명한 멜랑콜리한 기운과 유사한 것이다. <a boy named charlie brown>에는 앤더슨 영화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sic transit gloria"라는 주제가 울려퍼진다. 찰리 브라운은 지역의 철자맞추기 대회에서 실력을 뽐내지만 전국대회에서는 고전한다. 찰리가 집으로 돌아왔을때 친구들은 그를 놀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찰리를 받아들이는데 찰리는 슬로우 모션으로 걷고 그러는동안 "ooh la la"가 흘러나온다.

 

10.stolen kisses(1968)
앤더슨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자신들에게는 한번도 주어지지않은 법칙에 의해 굴러가고있는건 아닌가하고 자주 의심한다. 그리고 이 특징은 프랑수와 트뤼포의 앙투안 두와넬과 공유하는 것이기도하다. 1959년작 <400번의 구타>부터 20년 후 <사랑의 도피>까지 총 4편의 장편과 한편의 단편에서 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한 두와넬은 <훔친 키스>에서 일련의 직업들을 거치고 뒤죽박죽인 연애를 하며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두걸음쯤 뒤에 처져있다. 그러나 그 거리는 앤더슨으로 하여금 트뤼포 영화들의 사려깊고 현명한 톤을 빌리게끔하여 그가 자주 반복하고있는 관점(앤더슨은 뿌리깊은 영향력의 원천으로서 트뤼포를 언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않는다)을 제공하고있다.

 

11.big deal on madonna street(1958)
비록 <바틀 로켓>의 기발함은 없지만, 마리오 모니첼리의 클래식 패러디는 한탕을 하려고 하는 일련의 바보같은 범죄자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 앞에 나온 강탈 영화와 다소간 유사하다. 오웬 윌슨이 연기하는 디그넌과 그의 패거리들처럼 <마돈나 거리에서의 한탕>에 나오는 이들은 한번도 범죄로부터 진정 떨어져본 적이 없으며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강도질을 계속하게한다. 놓칠 수 없는 그들의 이번 계획은 마돈나 스트리트에 있는 전당포 옆에 자리한 빈 아파트에 파고드는 것으로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얇은 벽을 손쉽게 부숴 둘로 만든 다음 반대편에 있는 무방비의 금고에 접근하는 것이다. 쉽게 들리지만 패거리의 유일한 전문가는 최근 하는 일이 없는 은퇴한 금고 전문가뿐이고, 유리턱을 가진 권투선수와 여동생의 정숙함에 사로잡혀있는 불같은 성질의 시실리아 사람이 나머지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남자들이지만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1995년에 나온 능숙한 리메이크인 <팔루카빌>에서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이런 종류의 일에서 벗어나지못한다.

 

12.local hero(1983)
앤더슨의 영화들은 종종 감정적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우울한 캐릭터들을 중심에 놓곤한다. <러시모어>와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 생활>의 빌 머레이와 <로얄 테넨바움>의 윌슨 형제를 떠올려보라. 빌 포사이스의 사랑받는 컬트 코미디 <로컬 히어로>에서 사업가 피터 리거트는 그의 사장의 지시로 마법과 경이로 가득찬 사랑스러운 스코틀랜드 마을로의 여행을 통해 어떤 심각한 일들로부터 다시 일어선다. 리거트의 우울한 표정은 보스인 버트 랭커스터의 그것과 비교되는데 심술궃은 늙은 군주인 그는 자신을 화나게하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달아나 스코틀랜드 마을이 갖고있는 희열에 전염된다. 고맙게도 앤더슨과 포사이스 영화의 우울한 이들은 그들의 우울한 캐릭터에 동정심을 전할 줄 아는 매우 따뜻한 창조자들에 의해 생생한 삶을 가져다주는 세상에 존재할만큼 운이 좋다.

 

13.the king of comedy(1983)
마틴 스코시즈는 앤더슨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정신세계를 발견한 이후 그의 경력 초기부터 공공연한 지지자 역할을 해왔다. 앤더슨의 작업에서는 <비열한 거리>나 <성난 황소>같은 거칢은 없지만 두 감독 모두 공공연히 막스 오퓔스와 마이클 파웰에 대한 관심을 공유해왔다. <코미디의 왕>에서 스코시즈의 영화적 자양분과 네오리얼리스트적 측면에 대한 균형감각은 앤더슨과 흡사하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고있는 명성에 굶주린 루퍼트 펍킨의 초상은 <러시모어>의 제이슨 슈왈츠먼이나 <스티브 지수와의 해저 생활>의 빌 머레이를 연상케한다. 이 세사람 모두 위험할정도로 망상에 빠져있으며 이를 저지하기란 불가능하다.

 

14.metropolitan(1990)
휘트 스틸먼의 데뷔작이 불러온 컬트적 인기는 인디영화 제작자들에게 나약하고 박식한, 그러면서도 모호하고 어두운 관심사를 갖고있는 성인들의 세계가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걸 보여주었다. 뉴욕 영화들의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탄>은 <로얄 테넌바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두 편 모두 계급이 산산조각난 꿈의 도시를 스케치하고, 인간의 허영심에 의해 너무 빨리 녹슬어버린 황금 시대를 이야기하고있다.

 

15.a thousand clowns(1965)
J.D 샐린저가 자신의 작품 중 어느 것도 각색을 허락하지않았기때문에 영화감독과 작가들은 대사나 상황 그리고 까칠한 컬트 작가의 공격성같은 전체적인 태도등을 통해서 뒷구멍으로나마 슬쩍 샐린저를 끼워넣는 방법을 찾아야만했다. 앤더슨의 초기 영화들은 결정적으로 샐린저'스러운'톤을 갖고있는데 -<바틀 로켓>에서의 남매간의 관계는 홀든과 피비의 그것 그대로다- 이것은 허브 가드너가 쓴 연극이자 영화인 <a thousand clowns>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샐린저의 우상파괴적인 이상주의가 드리워져있다. 제이슨 로바즈는 그의 조카에게 어떻게하면 뉴욕의 게으름뱅이들처럼 삶을 멋지게 살 수 있는지 보여주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기를 즐기는 불성실한 tv작가를 연기한다. 그러나 자기 일에 끈덕지게 달라붙지않는다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양육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로바즈의 평범함을 동반한 불쾌함은 변덕스러운 성향과 마찬가지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이는 스티븐 지수에게서 -그리고 홀든 콜필드- 슬쩍 엿보인다.

 

16.murmur of the heart(1971)
그의 영화이력을 돌아보건대 앤더슨은 문화적 무관심을 조롱하고 상위계급의 특권을 매혹적으로 그려내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캐릭터에게 기인한다. 앤더슨 영화의 캐릭터들은 <마음의 속삭임>의 주인공인 지방에 사는 10대 소년 베누아 페로와 비슷한데 그는 부(富)가 허락하는 이점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성장통에 대처한다. 쇼킹한 클라이맥스의 연기를 통해 그의 소년적 불안함은 말그대로 자궁으로의 회귀로 이어진다.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루이 말은 자기반영적 주인공을 이상한 방식으로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거만함에 약간의 노스탤지어를 섞어 재현함으로써.

--------------------------------------------------------------------------------------------------------------------

*여기서도 나오지만 앤더슨은 트뤼포를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고있고 다른 기사를 보면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 영화는 <포켓 머니>라고한다.

 

큰 스크린으로는 처음봤지만 전체적으로는 세번째 본 <암흑가의 세사람>,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1.우선 중간에 앉아있던 관객들. 매장면도 아니고 매컷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 계속 웃어대는데 극장에서 예의도 아니거니와 은근히 기분나빠지게하더라만.

2.오승욱 감독에게 묻고싶었던 질문: 도대체 마테이가 집에 들어오는 '고양이 장면'은 뭘까? 영화에서 총 두번 나오는데 그 내용은 완전히 똑같다. 집에 들어와 코트를 의자 위에 던져두고 고양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욕실에 들어가 불을켜고 뜨거운 물을 받는다. 부엌에 들어가 불을 켜고 냉장고문을 열어 고양이 줄 먹이를 꺼낸다. 그다음 고양이들을 불러온다. 이 중 첫번째 장면은 내 느낌상으로 약 2,3여분간 지속되고 두번째에서는 똑같은 과정이 보다 짧게 연출되어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 그 내용은 매번 똑같다. 이 장면은 마테이 반장의 유일한 사생활 장면으로서 이상한건 두번째 장면이 끝나고나면 사실상 약간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로 마테이가 장물아비로 위장해 상티의 술집에서 코레이를 만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상으로는 최소 하루가 지난 다음이란건데. 선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변하고마는 마테이가 악인으로 변하기직전 유예되는 순간일까?

3.또하나 궁금한건 생략되거나 건너뛴 부분. 멜빌은 낚시에도 일가견이 있는걸까? 리코의 집에서 자고있던 여자는 분명 코리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틀림없다. 도대체 코리는 무슨일을 꾸몄다가 감옥에 들어간걸까. 물론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코리와 리코가 같이 한 일이 잘못되어 코리만 붙잡혔는데 리코의 이름을 불지않았으며 그래서 5년을 썩었고 그동안 리코는 코리의 여자를 가로챘다는. 그다음 궁금증은 역시 얀센과 마테이. 얀센은 마테이와 동기인 경찰 출신, 경찰직에 회의를 느껴서(그의 마지막 대사 '경찰은 역시 멍청하군')그만두고 폐인의 삶을 살고있다. 그리고 내사과 경찰은 마테이가 전형적인 코르시카인처럼 보이지않는다면서 그의 기록을 읽어본다. 하지만 관객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이 영화에는 관객의 상상으로 짐작해야하는 부분들이 꽤 있다.

4.이상하게 세사람 사이에서는 일말의 배신의 기운같은건 전혀 배제된채 서로가 서로를 굳게 신뢰한다. 그들을 배신하는건 그 외부의 인물들. 이 영화 그러고보니 정말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5.결국 세번째 보게되자 이번엔 마테이를 중심으로 봤다. 처음 기차장면에서보면 그는 투철한 사명감보다는 지치고 힘들어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보인다. 선하게 태어나 악인으로 변하는 예를 보여주는건 결국 이 영화에서 상티와 마테이뿐인데 마테이는 처음엔 용의자는 범인으로 생각하지않으며 자신은 이미 얼굴이 팔렸기때문에 직접 위장은 하지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킨다고말한다. 그러나 그는 보젤을 범인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뿐만아니라 결말부엔 장물아비로 위장해서 코리 일행을 죽음으로 이끄는 치사한 수를 쓴다.

6.오승욱 감독은 코리와 보젤이 처음 대면하는 '담배갑'장면이 무척 재미있고 뛰어난 연출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한손엔 총 다른손엔 담배 그다음 라이터를 던짐으로써 보젤은 총을 집어넣고 땅에 떨어진 라이터를 줍게되면서 그제야 두사람이 담배를 친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좀 다르게봤다. 그 장면에서 보젤은 담배갑을 받기전 '내가 트렁크에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올라타는걸 지켜봤나?"라고 묻는다. 그리고 코리는 "물론. 그렇지않았으면 숨쉬라고 나오지도않게했지"라고 대답한다. 바로 이 장면이 힌트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의 앞에 있었던 검문 장면을 다시 되돌아보라. 코리는 트렁크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않자 대번에 뭔가 잘못됐음을, 정확히는 그 안에 누가 타고있음을 직감한다. 그 다음이 바로 두사람이 대면하는 장면이다. 게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코리는 보젤이 올라타는걸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도록 편집이 되어있다. 관객이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않은 것이다. 우기면 뭐라할 수 없지만. 즉 이런 것이다. 코리는 검문과정에서 차안에 누군가 타고있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보젤의 생명의 은인임을 강조하고 아울러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위해 자신이 이미 휴게소에서부터 보젤이 올라타는걸 봤다고 거짓말한다. 그 다음이 바로 담배갑 장면이다. 처음보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있는 자를 좋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코리는 담배갑을 던지고 그 다음에 라이터를 던지면서 보젤의 손에서 총을 놓게함과 동시에 땅에 떨어진 라이터를 줍게함으로써 다시한번 관계의 주도권을 재확인한다. 다시말해 코리가 보젤에게 내가 너의 생명의 은인이니까 넌 그걸 잊지말라는 쿨한 경고쯤 될까. 물론 결과만 놓고보면 친해지는 장면이지만 그건 결과일뿐이고 그 과정의 경로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다.

7.오승욱 감독과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한 얘기들을 짧게 요약하면 요즘 영화같았으면 아예 보여주지도않았을 장면들을 무던히 길게 보여주는건 일종의 종교적 의식처럼 생각했던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으로서 영화 속 인물을 죽일 때 갖춰야할 윤리적 입장이나 판단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있는 중이다. 멜빌의 인물들은 기술적 장인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이 맡은 임무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한 프로페셔널들이지만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미숙한 나머지 결국 실패해버리고만다.

8.프로그래머도 말했지만 나역시 궁금했던 대사.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보젤이 코리에게 도망가라고한다음 마테이와 나누는 그 대사. 마테이가 묻는다. "왜 내가 누군지 말하지않았지?" 보젤의 대답 "그랬다면 도망가지않았을테니까?" 오승욱 감독은 마테이의 정체를 말했다면 코리가 그 자리에서 마테이를 쏴죽였을거기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보젤은 마테이가 죽지않기를 바란단말일까?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인 두 형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대비해보여준 다음 본 줄거리를 시작한다. 비서와 운전기사를 둔걸보니 뭔지몰라도 크게 성공한듯 보이는 동생 다케루, 알고보니 사진작가인 그는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위해 고향으로 떠나는 길이다. 그런데 그는 검은색 상복을 입지않고 그냥 손에 들고 나간다. 도착한 다음 갈아입겠다는거다. 고향에 도착한 다케루는 간만에 얼굴을 마주한 아버지와 만나자마자 싸운다.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도망가듯 고향을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고향에 묶어두려는 아버지에게 반발하는 다케루. 전형적인 가부장 아니랄까봐 아버지는 대번에 자기 앞에 놓인 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바로 그때 형 미노루는 허겁지겁 엎어진 상을 치우고 마룻바닥에 쏟아진 술을 걸레로 닦는다. 마치 자기의 잘못인냥 열심히 바닥을 닦는 미노루, 그런데 무릎을 꿇은 그의 발뒷꿈치 위로 아직 상 위에 엎어져있는 술병을 타고 술이 한방울씩 떨어지고있다. 자신은 돌보지않고 가족을 먼저 챙기는 남자.

 다케루는 사진을 찍는 사람, 따라서 그가 사물을 보기위해서는 사물과 눈 앞에 렌즈가 놓여야하고 그것이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쉽게 도망갈 수 있는. 반면 미노루는 좀체 세상 속으로 섞이지못하는 남자다. 여기서 흥미로운건 이 영화에는 결국 단 한명의 여자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리 위에서 죽어버리는 치에코는 그저 사건을 끌어가기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남은 두 남자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들을 링 안으로 불러내는 심판에 가깝다. 남는건 각기 다른 두형제, 네 남자다. 처음 영화에서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건 한 여자의 죽음, 즉 어머니의 장례식이다. 초반부터 한 여자의 부재를 알리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결국 또 한 명의 여자를 죽이고나서야 본 궤도에 오른다. 이 집안 남자들에게 여자는 치명적 함정이란말인가? 하쓰미 계곡에서 다케루는 분명히 형과 치에코가 엎치락뒤치락 하던 다리 위의 상황을 온전히 목격하고도 몰랐던 것처럼 형에게 행동한다. 치에코가 죽기를 바랬던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보고도 못본척 알아도 모른척, 늘 그랬듯 다시한번 사물과 진실 앞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그의 목에 라이카가 걸려있었음을 상기하라)그녀의 사망에 대한 진실 여부를 잠시 미뤄둔다면 어쨌든 그렇게 또 한명의 여자가 이 집안으로부터 제거(배제)되자 진심이 없는 치사한 수컷들에게 위기가 닥친다.

이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남자들의 세계를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기시작한다. 다케루 형제와 이사무 형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한데 형과 아우 사이의 위치는 두 형제 사이에서 묘하게 역전되지만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유사하다. 다케루 형제에서는 동생보다 못난 미노루가 고향에 남지만 이사무 형제의 경우엔 공부를 잘했던 형 오사무가 도쿄로 떠나 변호사가 되고 동생인 이사무가 고향에 남아 주유소를 운영한다. 그리고 고향에 남은 자들은 미약하게나마 여성의 ‘지위’를 ‘역할’한다. 그래서 그들은 밥을 하고 빨래를 넌다.

하지만 이 남자들은 한번도 진심인 적 없고 늘 가식적인데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하듯 괜히 화를 내고 저혼자 분에 겨웠던지 슬쩍 도망간다. 면회 도중 드디어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며 분노하는 미노루와 그런 형으로부터 자신의 치부와 죄의식이 낱낱이 밝혀지자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태도를 뒤집는 다케루도 마찬가지. 따라서 그건 다케루가 기억을 제대로 하고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숨기고싶었던 자신의 내면이 까발려졌을때 튀어나온 반사적 대응일뿐.

이토록 수컷들의 나약함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면서 바늘하나 들어갈 구석없는 치밀한 심리 대결을 보여주던 감독은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도 이 수컷들에게 옮았는지 괜한 사족에 가까운 에필로그를 붙여놨는데 다케루가 집에서 형제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옛날 8미리 테입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끝났다면 차갑긴해도 훨씬 감독의 애초 의도에 가까운 결말이 되었을듯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