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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가을무렵, 그 해 칸느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펄프 픽션>의 전세계 최초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를 연출한 생소한 이름의 미국 출신 신인감독 퀜틴 타란티노가 직접 내한을 했었다. 영화잡지 <스크린>은(아직 씨네21 창간 전이다) 두 해 전 첫 장편을 세상에 내놓은 박찬욱이라는 신인감독을 붙여 두사람의 인터뷰(혹은 대담)를 성사시켰었다. (4년전 스크린에서 다시 이 기사를 전재했었고 나도 이 기사가 실린 2004년 7월호를 가지고 있는데 최근 이 기사가 모 블로그에 다시 전재되면서 다시금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열혈 영화광인 두사람은 그때도 b무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않았는데 그때 타란티노가 몬티 헬만의 영화를 아직 못봤느냐며 박찬욱에게 자신이 돌아가면 테입을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적어갔는데 아직까지(그러니까 2004년 7월까지)소식이 없었다고 적혀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타란티노로부터는 기별이 없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때 말했던 영화는 혹시 <two-lane blacktop>은 아니었을까.

이 영화가 지금 와서 컬트로 분류되어 칭송받는 이유를 직접 보고나니 대강 알 것도 같았다. 자동차 영화이면서도 레이싱 장면은 거의 없는 차라리 로드무비인데다 이렇다할 갈등이나 사건도 없다. 관객을 위한 흥분제로 작용하기에는 턱없이 에너지가 부족하여 레이싱의 뜨거움보다는 한껏 낮추어진 서늘함이 쓸쓸하기까지하다. 속도에 탐닉하는 열혈남아들이 아니라 쿨하다못해 차갑기까지한 이름 모를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너무 말이 없어서 묻는 말에 조차 제대로 한번 대꾸를 안한다.  

이처럼 조용한 남자들의 미처 표출되지못한 남성성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에도 반영된다. 왠만한 차는 명함도 못내밀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는 이들의 차는 셰비블록이라는 앤틱. 그냥 차가 좋을뿐인 두 남자는 무연히 차를 몰고 동쪽으로 향하는데 왜 떠나는지는 관객도, 주인공도 알 수 없다. 생면부지의 소녀가 태연히 차에 올라타도 아무것도 묻지않고 태운 채 같이 떠나고 길에서 만난 나이 든 드라이버 gto와는 즉흥적으로 레이싱대결을 시작한다.

이 영화가 나온 71년에는 또다른 자동차 영화의 걸작 <vanishing point>도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두 영화 모두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 애초에 의도했던 목적지는 사라지고 가속도가 붙는 가운데 그저 눈 앞의 소실점 안으로 질주해들어가는 결말, 어색하다싶을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교유, 그리고 전반적으로 영화를 지배하고있는 상실감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전세계가 동시에 들끓었던 60년대말을 거친 후 혁명과 열정의 불꽃이 사그라든 시점을 반영하기라도하듯 영화는 그렇게 풀이 죽어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은 시대가 바뀐 줄도 모르는, 혹은 전혀 신경쓰지않는 좌절한 히피에 다름 아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않으며 자신들도 과거의 열정을 잃은 채 그냥 차를 몰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돈이 떨어지면 경주를 해서 여비를 해결한다. 그들에겐 예전처럼 같이 할 동료들이 많지는않지만 운이 좋아 길에서 만나면 너무나 쉽게 친구가 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도 바로 드라이버와 gto 사이의 여러 대비에 있다. 하루에 몇번씩이나 같은 스타일의 옷을 색깔만 바꿔 갈아입는 gto는 그가 얼핏 말했듯 대도시에서 왔다.(계속 말을 바꾸고있어서 쉽사리 믿기는 어렵지만) 머리도 짧고 어딘가 비즈니스맨처럼 보이는 외모를 한 채 그는 자신의 차에 대한 무한한 자존심을 뽐낸다. '드라이버'와 '메카닉' 그리고 '소녀'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이 남자는 최신형 스포츠카를 모는 반면 아들 세대인 이들은 골동품 자동차를 운전한다.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려는 gto에게 듣고싶지않다고 딱 잘라버리는 '드라이버'에게는 오직 현재만, 자신이 운전하는 이 차와 오늘 달려야할 거리와 불분명한 목적지만이 있을 뿐이다. 승패는 관심없으며 다른 누군가와 계속 달린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이 영화는 목적지없는 로드무비가 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의의는 일반 레이싱 영화와는 다른데서 찾게되는데 온전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과장하지않고 묘사한 하위 문화 캐리커처이면서 냉소적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향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또하나의 뉴아메리칸 시네마가 바로 그것이다.


1.주인공으로 출연한 네 명의 배우 중 '드라이버' 역을 맡았던 제임스 테일러를 제외한 세 명이 모두 사망했는데 그 중 70년대의 명배우 워렌 오츠를 뺀 나머지 둘은 제 명을 채우지못한 죽음을 맞았다. 몬티 헬만이 발굴해낸 '소녀'역의 로리 버드는 이후 헬만의 차기작 <cockfighter>와 우디 앨런의 <애니홀> 출연 후 스물 다섯 나이에 자살을 했고 비치보이스의 윌슨 가문 출신인 데니스 윌슨('메카닉')도 서른 아홉 살에 익사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워렌 오츠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전문 배우였는데 영화 상에서의 신구세대의 대립 구도는 그대로 한 명의 전문 배우 VS 세 명의 비전문배우로 나뉜다. 이 영화를 찍을 무렵 스물 둘셋 정도였던 제임스 테일러와 스물 일곱이었던 데니스 윌슨은 상당한 미남들인데 요즘 제임스 테일러 사진을 보면 안습 그 자체. 세월의 풍화를 이겨낼 자 누가 있겠냐만은 이런걸 보면 자기관리라는거 정말 필요하다.

2.이 영화를 비롯한 70년대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 이 시절 차들은 기본적으로 체형 자체가 상당히 슬림하고 그래서 무척 날렵해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충돌하면 너무 쉽게, 마치 종이장처럼 찌그러지고, 커브를 돌때도 드리프트라기보다는 차라리 슬라이딩한다는 표현이 어울려보일 정도로 불안해보이는데 그에 비하면 요즘 차들은 어떤 기종이라도 전부 기본적으로 무슨 장갑차나 보호차량처럼 묵직해보인다. 일단은 예전에 비하면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이라 온갖 전자부품들이 많이 들어가고 안전 강화를 위한 디자인과 고안된 장치들 때문일텐데 그러니 당연히 차 자체의 디자인이 예전보다는 몰개성적이고 어슷비슷해지면서 미감을 덜자극할 수 밖에 없다. <불리트>에 나오는 머스탱같은 자동차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걸까.

 

하루세끼 밥을 먹듯이 영화를 보던 시절이 불과 얼마전까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충만하게하고 삶에 찌든 육신을 치유한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는 역시 다섯손가락, 그나마 정말 너그럽게 품어안았을때 열손가락을 빌려도 한두 자리는 남는다. 그나마 최근 2년동안 dvd나 파일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본 영화만으로 한정하자면 말년휴가 나오자마자 봤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전 같은해 봄에 2박3일짜리 외박나와서 봤던 <굿나잇앤굿럭> 그리고 작년에 세시간짜리 공강을 이용해서 봤던 <원스>정도.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살짝 비껴가있는듯한 취향인데 여기에 한편의 목록이 추가되었으니 바로 지난주 개봉하자마자 봄비를 맞으며 학교근처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부리나케 메가박스로 달려가서 본 <데어윌비블러드>다. 영화를 본지 수일이 지났건만 여지껏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기가 어려운 것은 감상이 사방으로 곁가지로 뻗어나가 그것을 한줄기로 잡아채어 추스리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나의 빈약한 언어로는 턱에도 미치지못하기때문이다. 플레인뷰가 마지막 대사인 "i', m finished"를 내뱉고나서 다시 영화제목이 타이틀로 올라오면 화면에서 뻗어나온 기운이 나를 사정없이 밀어붙이는듯한 느낌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좀체 쉽지않았다. 원래부터 내가 알트만-앤더슨 스타일에 무한애정을 갖고있다는건 이런 경우에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형식적 수사이고 잰체일뿐이다. 알트만 영화 하나도 모르고 앤더슨 영화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도 이 영화가 최근 나온 그 어떤 미국영화보다 독보적인 개성을 가지고있음을, 플레인뷰가 영화의 맨처음 열심히 삽질하던 그 탄광처럼 영화가 뿜어내는 어둡고 음험한 기운의 존재를 인정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주의의 흥망성쇠나 개발사를 다루는 역사 다큐도 아니고 최근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는 풍자극도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 모두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그저 인간, 자본가이기도하고 인간혐오자이기도하지만 그 이전에 그냥 유일무이한 한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보고서가 가장 온당한 분류가 아닐까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자꾸만 대놓고 영화사의 한 자리를 당당히 꿰차고 들어앉으려고할때다. 해질무렵 힘차게 불타오르는 유정 뒤로 웃고있는 플레인뷰와 해밀턴의 검은 실루엣을 볼때, 화재를 진압하려 수십명의 남자들이 손에 하나씩 뭔가를 쥐고 달려나올때, 일라이의 대범하기만한 종교사기극을 볼때, 그리고 거짓 신앙을 고백하는 플레인뷰의 가증스런 얼굴을 볼때, 그리고 그렇게 결탁과 반목을 거듭하던 두 인물이 급기야 정면 충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쾌감은 분명히 옛날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놀랍게도 영화는 그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뒤로갈수록 점점 더 팽팽해지고 세지면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듯 누적된 힘에 관객은 압도되고 짓눌리게 되는데 이 모든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에 폭발하기위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마지막 씨퀀스는 고도로 양식화되고 계산되어있음이 역력하게 보이는데(사실, 말을 바로하자면 이 영화의 전부 어디하나 빼놓지않고 다 그렇지만)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듯하다. 사각의 프레임안에 3차원적 입체라기보다는 2차원적 평면 느낌이 강한, 그러니까 정물화나 스틸사진을 보는 듯한 두 대의 볼링 레인과 기계가 정면으로 놓여있는 방을 무대로 벌어지는 두사람의 격돌은 심히 과장되어있지만 그만큼 정교한데 마치 한창때의 스탠리 큐브릭 영화들을 보는듯했다. (구부정한 폼으로 달려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인간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다.)

마지막 대결에 이르면 이 영화의 비유는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워진다. 자본주의는 자본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었기에 과거 종교의 힘을 빌렸으나 어느 시점에 오면 서로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된 결탁과 반목은 곧 파국을 맞이하리란 부정적 전망. (여기서 지금의 현실을 대입하고 적용하는건 관객의 몫?)하지만 이렇듯 추상적인 차원의 은유로만 영화를 보기엔 플레인뷰라는 인간의 크기가 너무 거대하다. 그는 자본가라서 나쁜 게 아니고 두번의 살인을 저질렀다고해서 악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단한번도 죄책감을 보이지않고 자신의 행위에대해 스스로에게 되물은 적 없고 따라서 반성도 하지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확신이 있으니까. 플레인뷰라는 인물의 캐릭터스터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성하지않는 인간, 확신하는 인간의 강직함, 그 바위같은 단단함 그 자체가 여기서는 핵심이 아닐까. 앤더슨은 반성하지않는 독단적 인간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오류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충분히 그러고도남을, 아니 차라리 그럴 수 밖에없는 그럴만한 인물, 그래서 범인들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나올 수밖에 없는 단독자의 내면을 차근차근 한삽한삽 채광꾼처럼 파고들어가고있는 것이다.

컴퓨터나 와이드TV로 영화를 보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대개 그 말들은 산업적 보호같은 당위의 차원이나 큰 화면이 주는 감동같은 뻔한 관습적 어구에서 크게 벗어나지못한다. 큰 화면이 주는 감동에 대해 조금 말을 보태어보자면 그건 어두운데서 한참을 훔쳐보다가 들켰을때의 당황스러움 내지 창피함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나오면 빛에 눈이 적응하는 시간보다 내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시간이 더 길게마련인데 그건 영화가 어두운 극장 내부를 휘저으면서 관객인 내 마음까지 지배해버리기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영화들은 그 강도가 더 세기 마련인데 회의하지않는 확신에 찬 집요한 플레인뷰같은 인물에 한참을 푹 빠져 그 어두운 기운에 침잠되면 극장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에 적응하기까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분을 맛보기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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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결국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하지만 그렇지못하거나 반대로 언제까지나 그안에서 머물려고하는 아들들의 이야기다. 이는 (아직까지 보지못한 <바틀 로켓>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발사인 맥스의 아버지는 타인들 앞에서 신경외과 전문의로 둔갑되고 전직 변호사 로얄 테넌바움의 장남 채스는 부정혐의로 아버지를 고소한 후 오랫동안 소원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그 다음 영화 <스티븐 지수와의 해저생활>부터 이 아들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켄터키 항공사의 파일럿 네드 플림턴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만 믿고서 해양탐사전문다큐멘터리스트(이렇게 부르는게 맞나?)스티븐 지수를 찾아가고 나중에는 성까지 지수로 개명한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주인공 휘트먼 3형제는 여기에 한술 더 뜬다. 이들은 어찌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사랑했던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노라며 애정결핍증상을 보이면서 아버지의 선글라스나 면도기같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 서로 다툰다. 이렇게 덩치만 큰 미성숙한 애어른들은 그래서 남들은 일찌감치 해치운 ‘어른 되기’의 과정을 남들보다 비싼 방식으로 치른다. 뭐 평생 놀고먹어도 크게 지장없을정도로 부자들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만.

비록 흔한 인도 클리셰이고 동시에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는않지만 영적 체험을 위해서라는 기차 여행의 애초의 명목은 그럴싸해보인다. 파리 슈발리에 호텔에 처박혀있던 막내 잭, 임신한 여자친구를 떠나려하는 둘째 피터는 맏이 프랜시스의 부름에 왠일인지 고분고분 응한다. 그러나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있는 형제는 결코 크고 대단한 게 아닌 작고 사소한 문제에서 매번 부딪치며 투닥투닥 여행을 계속한다.

형제들의 전사(前史)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을 남기면서 전개되는 영화는 처음엔 영적 체험으로 시작했다가 삼천포를 돌고돌아 어느 현지 소년의 죽음을 겪고 나중에는 은둔해있던 어머니와 재회하는 여정을 거친다. 그결과 값비싼 기차여행이 형제에게 정작 베푼 것은 그들의 영적인 고양이 아니다. 각자 살던 곳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끙끙대던 형제들은 인도에서 여유롭게 요가를 배우거나 갠지스 강 앞에서 명상같은건 하지않는다. 여행이 모두 끝난 후 기차가 다시 돌아갈때까지도 그들의 문제는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않았고 아마도 자신들이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간후에야 비로소 그때부터 풀어나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는 인도에서 분명 뭔가를 느꼈다. 자기가 먹고자고 일하던 곳에서 빠져나오면 그제서야 그곳과 자기 자신의 삶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늠된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진실쯤. 그게 바로 여행의 기능 아닐까. 그것이 꼭 콜로세움처럼 오래된 건축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왜소화하고 영원에 가까운 장구한 시간 앞에서 경건해하는 방식으로만 행해질 필요는 없다. 휘트먼 형제가 이 영화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 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것, 고작해야 생전에 아버지가 몰던 차를 가져야만 그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전형적인 근대인/(혹은)도시인적 사고를 했던 형제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어느 인도 소년의 죽음을 겪은 뒤에 비로소 죽음의 질감을 피부로 확인하고 무게를 실감한다. 어수룩한 삼형제는 그 후 오지에서 수녀생활을 하는 어머니와 재회하고나서야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사원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해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을리는 애초부터 만무하다. 대신에 길 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직접 어머니를 마주한 이후에야 형제에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견문을 넓히기위함도 물론 좋지만 그냥 목적없이 떠나는 여행이 갖는 의외의 효용은 떠나봐야만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이를테면 프랜시스의 비서 브랜든이 만든 코팅된 일정표처럼) 스케줄에 맞추어 무심히 따라가다가 마주친 의외의 장소나 사람들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던 기억이 돌아오고나면 기억에 또렷이 남는 법이다. 그리고 기실 대부분의 모든 여행이 그러하다(남는게 사진과 쇼핑목록뿐인 가이드투어는 그래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일뿐) 

덧. 그래도 하필이면 왜 꼭 무대가 인도여야만 했느냐는 힐난 앞에서는 내가 감독도 아니지만 나름 변명을 할 수는 있다. 이 형제는 세련됐을지는몰라도 지적이지는못한 전형적인 백인들이니까 그렇게까지 사려깊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는. 그렇게따진다면야 아들이 셋씩이나 있는 패트리샤 휘트먼이 인도에서 수녀원장을 하고있어서라는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저 웃기고싶어서, 따로 할 말을 위해서 앤더슨이 심어놓은 꽤나 과장된 장치들일뿐, 그는 인도라는 무대의 클리셰를 기꺼이 써먹고싶었을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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