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after hours(1986)
일과후 남자는 우연히 카페에서 한 여자를 만나 집에 초대를 받고는 기분좋게 집을 나서지만 서서히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쉴새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도 이상하게 꼭 같은 장소를 두번 이상 가게되고 만났던 사람을 두번 이상 만나더니 오해를 받아 쫓겨다니기에 이른다. 이 하룻밤의 소동이 결국 이 남자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는 계속 출몰하고있는데 그렇다해도 이런 개꿈의 주인공이라면 좀 곤란할듯하다. 자기 집 열쇠와 술집 주인의 열쇠는 분명 다른 것임에도 왠지 같은 것처럼 보이고 내가 잃어버린 20달러가 조각가의 작품에 붙어있는 저것인 것만 같고 몇시간전만해도 사람들로 바글바글대던 클럽이 지금은 주인만 혼자남아 오늘밤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고있으니 정신 멀쩡한 우리의 주인공 어느새 비에 쫄딱 맞은 생쥐꼴이 처량하기그지없다. 마지막장면까지 보고나면 결국 이 영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다.

"열심히 일한 당신, 딴생각말고 계속 일해라. 쉬지말고. 쭉!"

2.hollywood ending(2002)
왕년엔 오스카도 받았을만큼 잘나갔지만 이제는 퇴물인 발 왁스만은 이혼한 전처 엘리의 현남편 할 예거가 제작하는 영화의 감독을 맡는다.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되찾고 더불어 엘리와 재결합하려 애쓰는 할. 근데 이게 웬일. 검사상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불구하고 '심리적 실명'상태를 맞이한다. 겨우겨우 스탭들을 속여가며 영화를 만드는데 결과물은 보나마나 최악의 상황. 이제 완벽하게 준비된 실패를 눈앞에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프랑스에서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게되고 오래전부터 파리에 살고싶어했던 발은 엘리와 함께 파리로 떠나며 끝을 맺는다. 90년대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오스카와는 인연이 멀어졌지만 쉬지않고 한해에 한편꼴로 그것도 기본이상은 하는 영화를 만들고있는 우디 알렌 본인의 얘기에다가 영화와 영화산업을 동시에 조롱하는 깔끔한 메타영화로서 시치미 뚝떼고 영화 그 자체보다는 영화제작의 바깥쪽, 즉 제작자의 간섭, 가십 캐기에 바쁜 기자, 말만들기 좋아하는 비평쪽을 두루두루 꼬집고있다. "끝만 좋으면 다 좋은 법" 그게 바로 할리웃 엔딩이 아니겠느냐는 이 깜찍한 도발은 이바닥에서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은 노장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3.margot at the wedding(2007)
구체적인 시간과 지명까지 들먹이면서(1986년 뉴욕 파크슬롭)자신의 이야기를 윤색해 중산층 가족의 붕괴와 그 과정에서 정신적 변화를 겪는 아이들을 그려냈던 노아 바움백은 이번에 두자매의 보이지않는 신경전을 떡하니 붙어서서 마치 리얼다큐처럼 묘사한다. 이번에도 반쯤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싶은 의혹을 갖게되는 이 이야기에는 반쯤은 히피같은 동생과 맨해튼에 사는 전형적인 도시 지식인 마고를 대비가 아니라 일방적인 물고 물리는 관계로 그려내고있다. 둘만의 비밀을 늘 남에게 이야기하고다니며 주위 온갖 사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는 그것을 배로 되갚아버리는 신경질적인 마고의 캐릭터는 <오징어와 고래>에서 제프 다니엘스가 맡았던 역할과 어느정도 유사하다. 이번에도 여전히 어린 아들은 엄마와 이모를 지켜보며 어른들의 세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게되고 어른들은 갈등과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진정한 화합을 이루지못한채 헤어지고만다. 저예산의 인디영화치고는 캐스팅이 화려한 편인데 시나리오 자체가 그런지몰라도 뭔가 대단한 연기를 보여줄만한 부분이 애초부터 적다. ciaran hinds같은 경우는 서점에서의 낭독회를 빼면 얼굴한번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잭 블랙의 캐릭터는 딴말 필요없이 그냥 평소 영화 속 그의 이미지들을 한데모아놓고 뭉쳐서 펼쳐놓은 매너리즘적 산물이다. 이런 비교적 화려한 캐스팅이 성공적인 전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 여러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플롯은 전작에 비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편인데 그럼에도 뭘 얘기하고싶은지를 알아채기가 그닥 어렵지는 않다. 세련된 도시 사람들과 왠지 두렵기까지한 시골사람들 사이의 대조. 가족을 '배신'했던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언니와 그로인해 고통받은 다른 가족들간의 갈등, 복잡한 사생활 속에서 갈피를 못잡은채 흔들리다가 결국 도망치다시피한 고향에서마저 모든걸 망쳐버리는 마고의 민폐스토리 정도.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을 성공작이라 부르기 어려운 이유는 인디 영화 특유의 사변적 태도때문이라기보다는(거기에 더해) 오히려 더 확장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너무 '쿨'하게 끝내버린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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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 새로운 기운으로 꿈틀꿈틀하던 맨체스터 음악씬을 되짚고있는 <24시간 파티피플>의 주인공은 그라나다 TV의 쇼프로그램 진행자이자 한눈에 '되는 물건'을 가려낼줄 알았던 영민했으며 능글맞았던, 훗날 팩토리 레코드사의 사장이되는 제작자 토니 윌슨이다. 영화에는 해피 먼데이스와 함께 당시 그가 픽업했던 주요 뮤지션중 하나였던 조이디비전이 한꼭지를 차지하고있는데 보컬리스트 이언 커티스를 왠지 태어날때부터 예술가였을것만같은 인물로 그리고있다. 그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유니크한 무대매너를 가지고있고 말수가 적으며 자신의 속내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않은채 혼자 고뇌하는. 따라서 그의 자살에 대해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않고있다. 그리고 커티스 사후 27년이 지난 지금, 조이디비전의 데뷔초부터 그들의 뮤직비디오와 스틸을 찍었던 안톤 코빈이 직접 무대 안밖에서의 커티스의 삶을 그려냈다. 그것도 다큐가 아니라 극영화로.(따라서 <24시간 파티피플>과 반대로 이번에는 커티스가 주연, 토니 윌슨이 조연이다.)

이안 커티스의 부인이었던 데보라 커티스가 쓴 책을 토대로 각색한 시나리오는 조이 디비전의 탄생보다 이안 커티스의 개인사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그 결과 뜨거운 음악영화라기보다는 차분히 가라앉은 멜로드라마로 완성됐다. 발화점은 없고 냉각기만 뒤에서 조용히 돌아가는. 밴드의 탄생과 그들의 성장사도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만(영화에 따르면 피터 훅과 버나드 섬너가 이미 밴드를 갖춰놓은 상태에서 커티스가 보컬리스트로 나중에 합세하고있다.) 그보다는 뮤지션이기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때나마 직장도 가졌었던 커티스의 개인사를 조명하고있는 것이다. 귀기어린 스테이지 매너와 곧바로 이어지는 발작이 상징하는 뮤지션으로서의 면모보다 부인인 데비와 연인이었던 아닉 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한채 갇혀버린 남성으로서의 모습이 그의 진정한 실존이었노라고, 음악적 고뇌보다는 좀체 출구를 찾지못했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야말로 자살의 실제 원인이었을지모른다고 영화는 말하고있다. 불완전한 육신과 나약하고 유리같은 정신을 가진 고뇌하는 뮤지션이기 이전에 두 여자사이에서 꼼짝하지못하는 멜로드라마의 남자주인공으로 그리고있으니 커티스를 커트 코베인과 동일시하며 더 거대한 무엇을 기대했을 팬들로서는 적지않은 충격일듯하다.

<컨트롤>은 대중에게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는, 게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더욱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여지곤하는 요절한 스타의 삶에 드리워진 아우라를 확실하게 벗겨내는 작업이긴하다. 이는 스타에게 곧잘 행해지는 '사후 교정' 차원의 재조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실존인물의 전기를 대할 때의 경계사항 하나를 다시금 재확인하게한다. 이제는 더이상 어떠한 개입이나 수정이나 가감도 불가능한 굳건한 바위같은 사물에 대한 뒷날의 호사가들의 부지런한 입놀림 말이다. 이 영화가 커티스의 죽음의 실체에 과연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있을까. 그와 살을 맞대고 살았던 가장 가까운 이의 기록은 마냥 공평무사하기만할까. 너무 닳고닳은 뻔한 말이지만 한 인간의 삶의 총체에 다가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할 뿐이며 이 영화에서 관객이 보는 것도 그저 편향된 하나의 관점일뿐이다. 그렇기때문에 그 내용의 불편함에 대한 관객의 과민반응 또한 불필요하다. <라스트 데이즈>처럼 창작자의 자의식이 투철하게 반영되어 전기로부터 영감만 받은(그래서 흔적만 남은) 전혀 새로운 창작물에 비한다면 <컨트롤>이 견지하는 태도는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타협적이며 동시에 절충된 합당한 균형점이라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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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ebs에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보고있자니 우리 영화 <삼포가는 길>이 떠올랐는데 원작 소설이 1973년에 발표됐으니 거의 동시대에 나온 셈으로 두 작품 모두 실낱처럼 불확실한 희망을 안고 여행길에 오르는 두 남자의 여정을 다루고있다. 모든 로드무비들이 다 애잔하고 쓸쓸하기만한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대개의 로드무비들이 공유하고있는 이 정서에 깊숙이 기대고있다. 먼지바람이 몰아치고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기차 화물칸에 몰래 올라타 이동을 하고 허름한 모텔방에서 하룻밤을 뉘이고 가는 곳마다 그곳 주민들과 드잡이를 하는 궁핍하고 피곤한 여행길은 두번세번봐도 보고있으면 좀 서글퍼진다.

기약없는, 그래서 본인들만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않는 세차사업이라는 목표를 위해 피츠버그로 향하는 이 여정에서 두남자는 번번이 타지에서 타인들과 어울리지못하고 사고를 일으킨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오넬과 맥스가 찾아낸 대응방법은 바로 자기자신을 우습게 만들어 남들을 웃기는 것. 라이오넬이 가르쳐준 이 방법의 효용을 비로소 깨달은 맥스가 보여주는 술집에서의 '스트립 쇼'는 그래서 아프면서도 가장 훈훈한 장면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웃겨야하는 코미디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인 법. 라이오넬이 그렇게 보고싶어했던 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가짜)비보를 듣고 그 사실을 숨긴채 전화박스에서 뛰어나와 맥스 앞에서 기쁜 척 하고 뒤이어 분수대에서 결국 실신하고마는 장면은 그 생생함에 관객들도 수직상승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 영화의 최절정이다.

내게 이 영화는 무엇보다 알 파치노의 재발견으로 기억될 것 같다. 메소드 연기의 표본이자 전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아니 카리스마 그 자체인 것 같은 이 배우가 여기서는 자신보다 열살많은 진 해크먼과 공연하면서 나이 어린 막내동생같은 이미지로 쉴 새없이 다른 사람들을 웃기려고하는 쾌활한 캐릭터를 연기하고있다. 마이클 콜레오네부터 <오션스 써틴>의 윌리 뱅크에 이르기까지 냉철한 권력자가 그의 한쪽 얼굴이라면 그 반대편에서 이 영화나 <뜨거운 날의 오후> 그리고 <프랭키와 자니>같은 생활인의 냄새가 물씬한 소시민적 얼굴이 짓는 표정이야말로 파치노가 왜 최고의 성격배우인지에 대한 천편일률적 답변들의 빈틈을 메워주고있다. 해크먼 역시 평소 즐겨 해왔던 전문가 역할과 180도 달리 성질머리빼고는 아무것도 가진거없는 전과자 연기를 하고있는데 여전히 터프가이라는 점에서는 그 변화폭이 파치노에 비해 크지는않지만 또한 그래서 여전히 설득력이 크다.

"내가 감옥에 가기전엔 이 동네가 이렇지않았다"는 뻔한 대사를 읊을때, 추위에 떨며 외투깃을 부여잡을때, 왜 자신에게 잘해주느냐는 질문에 "나에게 마지막 성냥을 줬으니까"라고 대답할때, 맥스가 자신이 아닌 라이오넬을 괴롭힌 이와 뒤엉켜 싸울때, 이 영화는 더이상 낯설지가 않다. 풍경이 바뀌고 계속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싸우고 상처받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 여정을 버틸 수 있는건 지금 내 곁에 동반자가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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