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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아메리칸시네마에 대한 나의 애정은 우선은 남성적 서사에 대한 선호에 기반한다. 진 해크먼, 잭 니콜슨, 알 파치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임스 칸, 존 보이트, 더스틴 호프만 등으로 대표되는 이 시절의 아이콘들은 하나같이 남성들, 그것도  자신이 마초임을 숨기지않는 당당한 남성들이다. 다분히 폭력적이며 반골적인 이 캐릭터들은 당시 시대의 공기와 거의 일대일로 호응하며 영화전체에 테스토스테른을 주입하고있다. 일반적으로 70년대 사회상을 읽어내는 텍스트로 기능하는 이 영화들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는 작품 내부에만 해당하지않아서 페킨파, 펜, 코폴라 같은 감독들이 매번 영화를 만들때마다 제작자와 겪었던 불화의 기록들은 삶과 영화가 구분되지않는 그 드라마틱함으로 인해 그들의 영화에 광채를 더하고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 영화들을 단순히 남성성으로만 한정해서 본다면 정작 이 남성성이 전면에 드러나게된 배경과 경로를 놓치는 격으로 사실 이것들이야말로 이 영화들이 지향하는 방향점이다. 그 모양새가 직접적인 액션물이든 아니면 '사회파 드라마'이건 심지어 멜로드라마이건 이 시절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뭔가를 잃거나 곧 패배할 운명에 처해있다. 형사는 좀처럼 잡히지않는 범인 때문에 미치기 일보직전이고 성공하려고 상경한 젊은이들은 결국 죽어버리거나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연애를 시작하고있다. 스크린 바깥으로부터 기인한 이 상실과 열패의 정서가 거꾸로 고집센 창작자들에게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한 점은 이 시절 미국 영화계에 단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이 영화를 한마디로 말해보라고한다면 '70년대 뉴아메리칸시네마의 태도를 오롯이 재현하고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줄거리는 특정한 상황설정이나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인공 밥의 행적, 정확히는 방황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다. 음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장래가 이미 정해져있는 답답하기만한 예술가 집안을 떠나 친구인 엘튼의 도움으로 유전에서 노동자 생활을 자처하고있다. 같이 살고있는 애인 레이엣에게는 이미 애정을 잃은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떠나지도못한채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는 권태로운 일상을 영위한다. 이처럼 영화는 부유하는 밥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있는데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못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와 불만에 가득찬 그의 행동은 변덕과 충동의 반복으로 점철되어있다. 친구들 앞에서 레이엣을 무시하다가 사과하고, 버리다시피한채 그녀를 떠나려다 그런 스스로를 욕하고는 다시 돌아가 둘이서 같이 떠나고,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고는 고향으로 향하지만 결국 하나도 변하지않은 그곳에 적응하지못한채 다시 돌아나온다. 잠시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확신하지못해 포기한다. 이처럼 계속되는 밥의 변덕은 지금까지의 이 모든 과정을 집약한듯한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까지 계속된다.

부모세대에 절대로 동화할 수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직 자신의 정체성도 확립하지못한채 흔들리던 당시 베이비붐세대의 가치관의 혼란을 절절하게 연기하고있는 잭 니콜슨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이 걸작으로 칭송될 이유는 차고도 남는다. 한해전 <이지라이더>부터 이후 <차이나타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여행자>등 으로 이어가던 그의 최전성기 시절의 명연을 볼 수 있다.

덧. 우리나라 비디오 제목인 <잭 니콜슨의 회색지대>나 <잃어버린 전주곡>도 충분히 좋은 제목 같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 원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기도하지만.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남녀사이에 우정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언의 다른 한편에는 '사랑에 국경도 나이도 없다'는 강변 또한 있으니 관계를 맺기위한 사전 조건과 선행 사항들이 적지않은듯하다. 옛부터 '친구'라 불릴 수 있는 관계를 동년배의 동성간으로 한정해버릇해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범위에서 벗어난 관계를 맺을때 왠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하지만 이 범위란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특수한 것이어서 그것이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위치하면 어딜가나 시선의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든 살 노인과 스물 갓 넘은 소년과의 우정은 태평양 건너에서도 여전히 생경하고 더 나아가 사회를 향한, 금기에 대한 도전처럼 보이기까지하니까.

연고도 없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걸 즐기고 영구차를 자가용으로 구입하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죽음에 집착하는 소년 해롤드. 목숨이 아홉 개인 고양이도 아닌데 교살, 동맥과 손목절단, 권총, 익사, 분신 등 갖가지 방법으로 최소 열다섯번 이상 자살을 밥먹듯 시도하면서도 해롤드는 죽지않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죽지않는다. 창백하다못해 무표정하기까지해서 시체같기만한 그의 얼굴은 억압적인 어머니를 대할때 더욱 유난히 공포스럽게 바뀐다. 이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해롤드의 두 번째 자살 시도. 잡지에 나온 심리테스트를 해보라던 어머니는 너는 이러이러하니 이렇겠지라며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테스트를 하고있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숨막혀하던 해롤드는 리볼버에 총을 장전하더니 결국 자기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던 어느날 역시 누군지도모르는 장례식장에서 해롤드는 곧 여든살 생일을 곧 맞이하는 괴짜 할머니 모드를 만난다. 검은색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장례식에 노란 색 우산과 하얀 코트를 입고나타날 정도로 주관이 뚜렷하고 당찬 모드의 캐릭터는 여러모로 해롤드의 어머니와 명징한 대비를 이룬다. 영국식 억양을 쓰는 어머니와 거대한 집이 그 크기와 실내 인테리어로 인해 유럽의 고성을 연상시킨다면 모드가 살고있는 작은 트레일러는 갖가지 꽃과 식물이 있고 큰 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터프한 드라이버이기도한 모드는 늘 새로운걸 추구하기위해 우리의 삶이 주어졌다고 굳게 믿고있으며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않는데 이러한 보헤미안적 사고방식은 왠지 유럽의 상류귀족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롤드와 그의 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처음부터 내내 상반된 것들의 대조를 통해 코미디를 구성한다. 소년은 죽음에 집착하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세상을 하나둘 배워가는 어린 아이처럼 생의 의지로 약동한다. 모드가 두려운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는 열혈 청춘처럼 누드 모델도 되고 직접 얼음 조각을 한다면 영국 억양을 쓰는 어머니는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사교와 예의 범절을 중시한다.

모드는 해롤드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하나둘씩 쌓아가게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삶을 생각하고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고있는 꽃들이 피고 자라고 죽는 모든 과정이곧 삶이며, 도덕과 윤리 그 이상을 보라고. 그럴때 너의 삶은 자유로워지는거라고. 그 어떤 젊은이보다 쿨하고 개방적인 전대미문의 노인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삶을 다시 사고하게하고 그렇게 모드와 친해지면서 점점 해롤드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걸작으로 분류된다면 노인이 젊은이에게 베푸는 인생의 혜안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있기때문일 것이다. 곧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듯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사를 통하는게 아니라 활력이 넘치는 동적인 캐릭터,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삶에 적극적인,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를 흐릿하게만드는 캐릭터의 존재 자체만으로 주제를 구현하고있기때문이다.

이 영화가 컬트로 추앙받는다면 그건 남다른 코미디 방식때문이며 이런 방식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코미디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는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 해롤드가 행하는 가지각색의 자살시도, 심지어 어머니가 소개해준 여자를 놀래키기위해 할복을 시도하고 그걸 따라하다가 그녀가 허무하게 죽고마는데도 영화는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체의 언급도 없다. 또 모드는 절벽에서 바다로 풍덩 빠지지만 다음 장면에서 아무렇지도않게 나온다. 이런 뻔뻔함이 현실감을 저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고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에도 한쪽 팔을 잃은 군인 삼촌의 거수경례나 경찰과의 추격전, 프로이드의 카우치에 거꾸로 눕는등, 기존의 공인받은 사회적 가치나 제도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는 그 기회를 죽음으로 메우려하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않은 노인은 젊은이의 죽음마저 자신이 가져가고는 아직도 충만하기만한 자신의 생의 에너지를 젊은이에게 건넨다. 아무리 자살을 해도 죽지않기때문에 해롤드에게 그동안 죽음이란 다다를 수 없는 집착의 대상일뿐이었다. 해봐야 죽지도 않는 자살을 아무리 골백번 시도해봤자 그에게 죽음은 아직 실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다 해롤드는 모드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진짜 죽음의 맨얼굴을 대면하고 그제야 모드가 한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 피고 자라고 지는 이 모든 과정이 삶이라고. 온전한 성장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해롤드를 중점으로 본다면 이 영화 역시도 대부분의 성장영화들이 가르쳐온 교훈을 다시한번 재확인시킨다. 성장하기위해서는 죽음을 대면해야한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덧.1.처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을 봤을때는 이 영화를 보기전이라 몰랐는데 얼마전 다시보다가 버드 코트가 나왔다는걸 그제야 알았다. 30년이란 세월을 지나면서 이 미소년도 많이 변하긴했는데 그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은 어렸을때만큼이나 정감이 가더라만.

2.영화 시작에 나오는 캣 스티븐스의 don't be shy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 엔딩크레딧중에 나온다.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마다 항상 드는 궁금증. 과연 감독과 작가들은 진정 저 아이들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서 만들고있는걸까? 출연하는 배우에게 한번쯤은 너라면 어떻게했겠니라고 물어본적 있을까? 열살 꼬마든 팔순 노인이든 만드는 이가 그 등장인물에 대한 모든걸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과 심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아이들을 다루는 영화는 좀 달라야하는거아닌가 하고 평소 생각해왔는데 그건 아이들이 너무 소중해서, 아이들은 보호받아야할 대상이라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 영화를 보는 성인 관객인 내가 중요하기때문이다. 왜곡된 묘사는 (아이들보다 전혀 판단력이라는 측면에서 우월할 바 없는)어른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남기기때문이다. 사실상 아이들은 어른들만큼이나 그들이 어느 시대에 살고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인 개인들의 무리이다. 우리나라에서 9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지금의 삽십대와 2007년을 살고있는 지금 내 또래의 이십대의 삶이 판이하듯 90년대에 십대를 보낸 내 또래들과 2007년 지금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지금의 청소년들의 삶의 간극은 다리가 무너져 건널 수 없는 강과 매한가지이기때문이다. 단적으로말해 고등학교때 처음 인터넷을 접한 나와 초등학교시절부터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고 온라인게임을 즐기기시작한 지금 내 조카또래의 아이들과 대화하기위해서는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얼마전 나는 아이들의 은어를 이해못해 잠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대개 두서너가지 중 하나로 묘사되고있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똑똑한 자식이거나 반대로 부모 속 썩이는 애물단지로서 부모라는 성인 주인공의 삶에 개입하는 조연(주변요인). 주인공으로 나온다면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로맨티스트이거나 기성세대와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도약하느냐 아니면 실패하느냐의 기로에 서는, 실제라면 스무살이 지나고 한참 후에나 닥칠 인생의 "최종 관문'이나 '최종 심판'에 직면하는 햄릿형 인간. 즉,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 제작자들이 십대를 다룰때 그들은 너무 안이하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오바하고있다는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중고등학교다니던 시절엔 "어른들은 몰라요"나 "학교" 아니면 ebs에서 곧잘 청소년드라마를 볼 수 있었는데 볼 때는 즐겁게봤지만 과연 내가 저 이야기들에 얼마나 공감했었는지를 더듬어보면 뭐라 딱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김영하가 지적했던 '눈물 오리엔탈리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더 직접적으로말해서 꼰대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그리고있지는않은가하는 의문.


따라서 이런 경우 청소년을 다룬 창작물을 두고 작품이 그걸 만든 어른의 시선으로 만들어졌는지아닌지의 여부를 가리는 나 혼자만의 방법이 있다.

첫째, 해당 창작물이 청소년의 기쁨보다 그들의 슬픔을 강조하고 그것을 과장할 때. 둘째, 청소년들의 일상보다 비일상적 사건에 초점을 맞출 때. 셋째, 푸훗하고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지 아니면 감탄이나 한숨을 짓게만드는지. 이 세가지 사례에서 후자의 반응을 유도하면 그건 어른들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물론 이건 무척이나 거친 분류임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한번 시험해보시기를)

이렇게 길게 흰소리를 늘어놓은건 결국 트뤼포가 드물게도 이러한 점에서 진정성을 갖춘 작가였다고 말하기위해서라는걸 알아챘을 것이다. 비록 실제 존재하지않는다하더라도 창작자가 자신이 만드는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진실한 애정을 품고있을때 그 영화가 비로소 현실적 질감을 얻는거라고 평소 굳게 믿고있는데 트뤼포야말로 그런 점에서 진정한 박애주의자이다. 이 영화를 보고있으면 등장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싶고 영화 속 선생님들과 각본가 그리고 트뤼포에게는 직접 만나서 존경의 의사표시를 하고싶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어떻게 아이들을 다루고있는지를 묘사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영화 앞에서 한줌의 언어는 그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분명한건 이 영화 안에는 나와 당신과 우리모두의 학창 시절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시계를 바라보며 수업 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친구들 앞에서 재미있는 (야한)이야기를 해주고 친구의 어머니를 짝사랑하고 돈을 벌기위해 친구의 머리를 깎고 부모의 비싼 어떤 장신구보다도 자신의 장난감이 제일 소중한, 그래서 9층에서 떨어져도 털끝하나 다치지않는 어른보다 강한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아이들보다 더 철딱서니없는 애들보다 못한 부모,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 아이들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재단하려드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부모, 그리고 겉으로는 딱딱하고 무심한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고민하고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미 언급했듯 이 영화엔 보고있으면 유쾌해지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진다. 절대로 한없이 맑고 투명하지만은않았던 우리 모두가 거쳐온 '동심'의 시절이 인위적 가감없이 솔직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리셰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꽤 긴 시간동안 수업 아닌 수업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작진이 꼭 전하고싶었을 직접적인 이 메세지는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사과임과 동시에 성인들을 향한 부탁이기도하다. 이러한 이유로 꼭 한번쯤은 성인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 꼭 한번쯤은 우리 배우들이 연기하는 이런 유쾌한 청소년 드라마를 보고싶다.

덧. 보는내내 한글 자막을 꼭 만들어보고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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