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혁명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세대들이 있었다. 어떤 대통령 어떤 국회의원을 뽑을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어도 걸그룹의 우열을 논하며 싸우는데에는 익숙한, 그러나 진정 연대하는 방법은 전혀 모르는 우리세대애겐 애초에 요원해보이지만 하여튼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랬던 세대들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최근의 혁명으로 기록된 68혁명. 이 영화에는 그 때 거리 위에 있었던 일군의 젊은이들이 나온다.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차에 불지르고 돌을 던지고 손에 붕대를 감고 바리케이드 뒤로 숨어 망을 보다가 경찰을 피해 도망을 가고 그러다 쓰러진 동료(라고 쓰고 동지라고 읽는다)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지금보면 어떻게 저런게 가능했을까 싶은 그런 장면들.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기획된 영화답게 여러모로 비교된다. 도대체 베르톨루치 영화속에 혁명은 어디있는거냐며 항변하듯 이 영화는 <몽상가들>이 끝난데서 출발한다. 혁명의 시작점에서 세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테오가 거리로 뛰쳐나가면서 <몽상가들>이 끝났다면 이 영화는 그 뒤 테오의 행적을 쫓듯 초반 30 분을 통째로 경찰과의 거리 위 대치장면으로 채워놓았다. <몽상가들>이 커다란 집안에서 육체와 관념의 유희에 빠져있던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집밖으로 뛰쳐나가는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소재주의에 함몰되 자멸했다면 <평범한 연인들>은 거리위의 가투로 초반을 시작해 그 이후엔 앙투안의 스튜디오에 모인 '동지'들의 권태로운 일상들로 채워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화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크레딧에조차 일체의 소리를 배제하고 가투장면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찍었던데반해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지점부터 배경음악도 삽입되는데 이러한 상반된 스타일의 시도 역시 표피적인 제스처만을 취했던 <몽상가들>이 보여주지못한 것을 전부 해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혁명은 실패하고 열패감에 사로잡힌 옛 투사들은 이제 마약과 연애 그리고 예술로 도피한다. 그 속엔 자본가 아버지를 둔 앙투안과 장 크리스토프 사이에 차마 계급갈등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해프닝도 있고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미적지근한 연애등 여러가지 사건이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예술활동도, 정신의 쾌락도 오래가지못한다. 뉴욕으로 떠난 뒤 보낸 편지에서 릴리는 입국하자마자 일종의 사상증명을 했노라고 말하고 편지를 읽은 그날밤 꿈에서 프랑수아는 그제야 그녀에게 미처 보이지못한 진심을 고백하며 마지막 선택을 한다.

본디 혁명은 이념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 그렇기때문에 혁명전야의 흥분된 긴장감보다 그 이후의 미세한 변화들이 필립 가렐에겐 더 중요했던듯싶다. 혁명을 전후로한 삶의 변화가 그리는 궤적을 통해 영화는 몸 밖이 아닌 내면에 입은 상처를 그대로 내보인다. 모두가 혁명때문에 잠시 미루어놓았던 자신들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할때 그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다른 평범한 이들의 삶을 흉내도 내보고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양심과 원칙을 고수하기도한다. 그래서 프랑수아와 릴리의 연애도 그렇게 뜨뜻미지근할 수 밖에. 애초에 연애가 혁명의 대체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했던 이상이 좌절된 젊은이에게는 이제 그 무엇도 조심스럽기만하다. 욕망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배운 프랑수아에겐 욕망과 윤리의 관계를 새로이 고민해야만했다. 그래서 릴리가 뉴욕으로 떠난다고했을때 프랑수아로서는 그저 "그럼 이제 난 어쩌지?"라는 말 그 한마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덧1. 킹크스의 "this time tomorrow"를 배경으로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웨스 앤더슨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 곡을 자기 영화에 쓴게 아닐까싶은데. 제작 시점에서도 몇년 차이가 안나기도하고. 이 곡이 다른 영화에서도 또 쓰인적이 있을까.

2. 러닝타임이 길어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의외로 새겨둘만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은 영화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 가투가 끝난 새벽 집으로 돌아온 장 크리스토프가 어머니에게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노동자들이 포기하려해요. 노조가 부르주아보다 혁명을 더 두려워한다구요. 그들이 원하는건 급료인상뿐이에요. 그게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라도한다는듯이. 그들은 뭐가 더 중요한지 몰라요. 그렇지만 돈은 절대로 삶을 바꾸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대꾸는 커녕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도않은채 집안 청소에만 열심이다.
"오직 남은 질문은 이것 뿐이에요. 우리가 혁명을 완성할 수 있을까? 노동계급을 위해서? 노동계급을 무시하고서도?"
그제야 어머니가 입을 연다.
"그들은 바뀔거야"
"그렇지않아요. 아니에요."
그리고는 신발을 벗은채 소파에 누워 잠이 든 아들. 어머니는 침대에 가서 누우라며 방으로 보내고는 아들이 벗어놓은, 지난 밤의 치열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먼지로 뒤덮인 신발을 손에 든다. 무심한듯보이던 어머니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잊고싶지않은 구절들.
----------------------------------------------------------------------------------------------------
"또한 나는 그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그건 내가 그들을 떠났었기 때문이고 - 이것은 사실이다- 아무것도 원하지않았던 것처럼 그들 모두를 원하지 않았기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스스로 끝을 내기에는 너무 비겁했기때문이다."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영어와 불어로 된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기고있다. 나는 자주 나의 세계가 대체로보아 조약한 종잇장에 불과한 독일어 신문에만 의존해야한다고 가정할 때 그건 어떤 세계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빈의 카페를 증오한 것은 그 안에서 늘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맞닥뜨려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직면하고싶지않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위해 가는 카페에서는 더더욱 그러기를 원하지않는다. 그러나 다름아닌 바로 그곳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된다. 나는 나 스스로를 못견뎌한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생각에 잠겨 글을 쓰는 한 무리의 사람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나왔던 그곳에 있으려한다. 이 운명적인 상태는 지난 몇년간 더 악화되어 나아지지않았으며, 나는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빈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나탈로 되돌아오고 나탈에서 다른 큰 도시, 즉 베니스와 로마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프라하로 갔다가 되돌아오곤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있을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에 대하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책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날로 둔감해져만가는 대중의 인식능력전반을 꼬집으면서 이를 현재의 비극 즉, 이라크 전쟁을 승인해버린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가고있다. 인문학적 사유를 통한  反戰서적이라고나할까. 번역본상으로 180여페이지되는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한문장으로 요약된다.

"고통받고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154p)

이를 조금 길게 다시 풀자면
"극소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있는 셈이다. ...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163p)

이에 대해 손택은 다음과 같은 반성과 태도를 요구한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 따라서 상기하기가 일종의 윤리적 행위라는 믿음은 우리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으며, 세상이치에 따라 우리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본성 한가운데에 깊숙이 놓여있다. ...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있어야한다."(168p)

통렬한 지적과 비판의 연속이지만 책의 결말은 다소 유보적이며 그 전까지 이어오던 강건한 어조의 일관성이 흐려져있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184p) 결국 이미지를 통해서 뭔가를 느낀다거나 배운다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으며 또 그 자체가 치명적인 실수일 수 있다. 다시말해 인간이 이미지를 이해한다는건 이미지 자체와 그것이 품고있는 미적 논리보다는 그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와 담론 속에서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이라크전 발발 이후 그녀의 사망 직전에 발표된 이 책에는 그 즈음에 쓴 다른 에세이들도 함께 실려있는데 어수선하기만한 세상을 바라보는 노인의 근심과 페시미즘으로 꽉 차있다. 역시 최근에 사망한 커트 보네것의 마지막 에세이집 <나라없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보네것쪽이 훨씬 유머러스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셈이었다.

덧.위에 옮겨놓은 대목중에서 168페이지 마지막은 누가 꼭 좀 읽어봤으면. 하는 짓이 그대로 똑같잖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