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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동의하지않겠지만 아놀드의 데뷔작은 같은 해에 나온 벨앤세바스찬의 녹색앨범보다 훨씬 더 영국적인 모던포크라고 생각한다. 엉클은 당시에 가장 핫한 아이템중 하나였다. 비록 반쪽짜리 작업이긴하지만 <mermaid avenue>는 <summer teeth>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뛰어난 결과물이다. 모든 유작들은 그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기에 더 아쉽고 아스라하게마련이고 제프 버클리도 예외는 아니다. 90년대 시애틀 씬의 생존자 펄잼은 향후 보여줄 한없이 진지한 '마이너'의 길을 이즈음부터 걷기 시작했고 브릿팝의 생존자였던 펄프는 비록 이 음반이 그들의 마지막 정규작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브릿팝 에필로그를 써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파릇파릇한 신진세력 중의 하나였던 베타밴드가 있었다. 아프간 윅스는 화끈하고 소울풀한 락앤롤을 보여줬고 팻보이슬림은 케미컬 브라더스가 놓쳤던 발랄함을 제대로 채워주었다. 뉴트럴밀크호텔은 지금까지도 미국인디씬을 대표하는 전무후무한 걸작을 내놓았고 루퍼스 웨인라이트라는 미청년이 데뷔작을 들고 처음 얼굴을 내밀었으며 알루미늄 그룹의 초콜렛은 노래제목만큼이나 달콤했다. 에디 베더만큼이나 걸쭉한 벤 오트웰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고메즈의 데뷔작은 재기가 넘쳤고 매시브 어택은 이때 정말 최고였다. 그리고 <xo>는 나의 두번째 '시작'이었다.

아래는 (고메즈만 빼고) 앨범으로 꼽을 순 없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해의 싱글들.











 



실패한 최고권력자의 회고에서 대중이 기대하는건 좀 심하게말해서 공개처형(거기에 살짝 덧붙여진 분노의 배설과 감정의 정화)과 비슷한게 아닐까싶다. 대한민국에는 역사적 평가를 포함해서 '객관적으로' 봤을때 실패했다고 동의되고 간주되는 전직 최고권력자가 사실상 없고 당연히 실패한 권력자의 회고도 없어서 경험에 근거해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아직껏 버리지못한 권력을 향한 집착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았던 시절에 대한 흐뭇한 기억 그리고 사과를 가장한 자기 변명을 보면서 괜히 사서 열받고 싶은 사람은 많지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대중은 그의 발언을 통해 숨겨졌던 모종의 역사적 진실을 기대하기보다는 모든 발언을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인격적 모독을 포함하여)실컷 욕을 퍼붓고 그리고 종내는 그래도 사과(비슷한 그 무엇이라도)를 하지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처형과 회고가 결정적으로 다른건 더 많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는 후자의 경우 그것은 철저히 본인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는 점이다. 인터뷰이에겐 최소한의 자기 방어가 허용되고 본인의 역량에 의해 이는 얼마든지 반전의 기회로까지 삼을 수 있다는거다. 물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어떻게든 표면 아래 감춰진 사실의 한조각이라도 캐내려는 인터뷰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추기/드러내기의 사이에서 교묘한 말장난에다가 물한바가지도 부어가며 '고급'스런 물타기 기술을 구사하는 인터뷰이의 구렁이 담넘는 모습은 어쨌건 꽤 흥미로운데 여기에 출판물과 달리 영상 인터뷰의 경우 매체의 속성까지 이 모든 요소들에 중첩되다보면 진실보다는 한 개인, 정확히는 앞뒤맥락은 저멀리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하는 표정과 속도,억양등 어조의 변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관찰자의 복잡한 심경까지 기록되어 엄밀한 사료적 가치보다는 마치 한 사물에 대한 임상적 관찰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백악관을 떠나는 리차드 닉슨의 얼굴을 TV로 지켜보던 영국 출신의 방송인 데이빗 프로스트의 머리 위로 스쳐간 것도 이런 종류였으리라. 당시 대중이 듣고싶었던 것은 닉슨의 재임시기 업적에 관한 사료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아니기때문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목매여있는 토크쇼 호스트가 원한건 무엇보다 닉슨을 자신의 앞에 마주앉혀놓겠다는 것, 다시말해 흥행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인 것이다.

그와 같이 일해온 연출자 존이 말하듯 프로스트는 정치에 관심은 커녕 투표 한번해보지않은 영국 출신의 토크쇼 진행자다. 한마디로 그는 TV대담프로 진행자로서 요구되는 고결하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불편부당한 지식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TV광대, 즉 손석희보다는 강호동에 가까운 인물이다. 또한 그는 야심많은 몽상가이기도한데 충동적으로 야심차게 닉슨과의 인터뷰를 기획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이를 방송하겠다는 방송국도, 광고를 붙이겠다는 회사도 없는등 프로젝트의 구체화 과정은 현실과의 격차를 뚜렷이 드러내고 그때문에 급기야는 광고주를 직접 찾아가는 영업사원 노릇까지하면서도 팀원들 앞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않으려는 프로스트의 모습은 저돌적이면서도 야심찬 도전자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방어전을 앞둔 챔피언인 전직대통령이 있다. 스캔들 이후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않은 채 은둔하며 은근히 정계로의 복귀를 갈망하고있는 닉슨은 적지않은 출연료와 미국인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의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점 등 몇가지 이유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 응하게되고 노회한 정치인의 연륜을 십분살려 미소 속에 칼을 숨긴채 잔뜩 벼르고있는 프로스트와 이하 제작진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친다.
 
이렇게 챔피언과 도전자라는 대결구도로 놓고보면 이 영화는 '정치 영화'라기보다는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강한 두 에고이스트, 즉 머리가 크고 쉴새 없이 땀을 흘리는 못생기고 나이든, 게다가 치명적인 스캔들로 낙마한 전직 정치인과 젊고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방송인의 대결로 맞춰진다.(세대간 대결양상의 구도도 슬쩍 강조된다.) 하지만 두사람은 적수라기엔 은근히 유사점을 공유하는데 전세계를 호령하는 최고권력의 자리에서 치욕적으로 쫓겨난 전직 대통령 그리고 불가능해보이는 프로젝트에 올인하느라 서서히 자기명성에 흠집을 겪고있는 프로스트 모두 현재 패배중이라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간의 인터뷰는 별안간 두 남자의 패자부활전의 무대로 거듭나는데 이는 갑자기 한밤 중에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닉슨의 모습에서 분명해진다.

여러모로 2009년의 대한민국을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칼과 방패에 비견되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대화의 기술(인터뷰어가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자신이 이미 준비했고 '알고있(다고믿는)으며' 하고싶은 말만 자동응답기처럼 반복하는 한국의 어떤 인터뷰이들과의 비교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서서히 닉슨을 코너에 몰아 원하던 대답을 이끌어내는 프로스트를 보면서 환경과 기회가 주어지지않아서 그렇지 이런 인터뷰어가 우리에게도 아예 없지는않을듯해서 부럽고 동시에 아쉬웠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방송은 결코 학술이 아니라는 점. 지극히 한정되어있으며 동시에 매우 불연속적인 시간 안에서 무한정한 편집이 가능한 방송인터뷰의 매체로서의 속성은 어쩌면 애초에 팩트는 보여줄지언정 진실을 드러내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평소의 회의가 영화를 보는동안 내내 고민을 하게했다. 카메라 안에 사실이 기록되는 것과 그것이 카메라 바깥 세상으로 전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고 카메라 안에 기록되는 그 무엇마저 수많은 권력의 밀고당기기가 개입된 결과물이라면 과연 거대한 껍데기를 벗기고벗겨낸 끝에 드러난(혹은 드러날 수도 있는) 한줌의 진실은 애초부터 허풍선이였을 수도 있기때문이다. 뭔가가 있긴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단적으로 말해 자신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린 닉슨의 마지막 발언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파를 타느냐 타지않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텐데 이 경우엔 그 결과가 전자였다는 것이고, 내 의문은 과연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능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가 비록 현재 권력을 갖고있지않은 전직대통령이라 할지라도.(그럼 이제 여기서 다시 각자가 처한 상황의 형식과 질을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일테지만 이건 내가 말할 수 없는 능력바깥의 부분이니 미뤄둔다.)

이는 이 영화의 존재 자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전쟁을 개시한 부분에 대한 프로스트의 추궁을 보고있노라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의 워터게이트 이후의 어느 후일담을 끄집어낸 피터 모건은 그렇다쳐도 이를 기어이 지금 시점에 영화화해낸 미국인 론 하워드가 노리고있었던 바가 뭔지 눈치채기는 그닥 어렵지않다. 아마도 누군가는 뜨끔했을테고 또다른 누군가들은 충분히 그래야함에도 너무 둔감한지라 그렇지않았을게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내게 영화 속 내용과 이 영화의 존재 자체까지 포함해 여러모로 '열폭'하게 만들었다. 연기? 말이 필요없다. 직접 보면 안다.(이미 피터 모건의 각본에 프랭크 란젤라와 마이클 쉰이 그대로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했었으니 연기에 관해서는 사전검증을 마친 셈.) 다른 배우들 중에는 오랜만에 올리버 플랫을 봤고 샘 록웰은 나름의 이미지 변신이 꽤 그럴싸했으며 매튜 맥파든은 보는내내 더못 멀로니를 떠올리게했다.
1.마지막으로 비디오를 본게 3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녹화해뒀던 nhk다큐멘터리였는데 돌려보기도 불편하고 일단 화질에 적응이 어려웠다. 요 몇년간 어떤 영상물이건 쨍쨍한 화질의 dvd나 파일로 보느라 비디오 전원은 커녕 먼지도 한번 제대로 안 닦아줬으니 헤드가 정상일리 만무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구겨진 종이같은 화질에 꽉 눌린 음질은 감상이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분명 몇년전까지는 그래도 좋다고 본건데. 무릇 세상은 이렇게 바뀌었건만 그래도 이런 세상의 속도에 전혀 발맞추려는 생각이 없는 슬로우족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뉴저지 어느 쇠락한 동네 구석에 처박혀있는 비디오가게 <be kind rewind>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가내수공업적 특수효과의 장인 미셸 공드리는 전작 <수면의 과학>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일가를 이룬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방식을 아예 영화의 내러티브와 찰싹 붙여놓음으로써 전면에 내세운다. 철거가 예정되어있는 가게 주인 플레처씨가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여하느라 유일한 직원 마이크에게 가게를 맡긴 사이, '우발적 사고'로 온 몸에 자기를 띠게된 제리가 들어오는바람에 가게의 모든 비디오테입이 일시에 공테이프가 되어버린다. 손님을 잃지않으려는 마이크와 제리는 궁리끝에 기존의 영화들을 아예 자신들만의 방식, 일명 '스웨덴식'으로 하나하나 vhs카메라로 리메이크하기시작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공드리는 하드보드지, 색지, 호일 등의 온갖 종이와 고철덩어리, 조악한 분장과 부족하거나 과해보이는 의상들을 긁어모아 싼티나고 후줄근하면서도 왠지모르게 쿨해보이는 저예산b급의 첨단 특수효과를 통해 <고스트 버스터즈>나 <로보캅>부터 <맨인블랙>, <러시 아워2>같은 8,90년대 블록버스터,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부터 <부기 나이츠>같은 작가주의 영화까지 자신만의 눈으로 종횡무진 영화사를 새로 써나간다.(그 중엔 유일하게 다큐<우리가 왕이었을때>도 있다.)

원작 영화를 어떻게 새로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촬영과정의 소소한 재미도 즐겁지만 미셸 공드리는 이러한 작업방식이 상징하는 어떤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있는듯 보인다. 영화 속에서 제리는 "모두들 이 동네를 떠나고싶어한다."고 외치고(물론 본인은 절대 떠나지못한다.) 가게는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젠 아무도 vhs테입으로 영화를 보지않고 그 대신 dvd를 취급하는 인근의 대형프랜차이즈 스토어를 찾는다. 팻츠 월러를 추모하는 모임에서 플레처의 친구들은 미국에서는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다며 그에게 돈되는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설파하는한편 뉴욕사람까지 찾아올정도로 인기끌던 마이크와 제리의 20분짜리 '스웨덴'식 영화들은 저작권침해위반으로 일말의 여지도없이 폐기처분된다. 이렇듯 영화는 빠르고 좋은 것보다 느리고 불편하며 낡은 것의 우월함과 로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치 슘페터처럼)"작고 낡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설파한다.

2.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가 뭐였는지, 누구와 같이 봤는지 좀체 기억이 나지않는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가족과 함께였겠지만 하여간 최초의 기억은 없어도 등교하듯이 영화를 열심히 봤던 기억은 난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강남에도 재개봉관들이 몇개 있었고 거기서 일주일에 두번 꼴로 별의 별 영화를 다 봤었다. 지옥의 묵시록, 인디아나 존스, 로보캅같은 걸작부터 실베스터 스탤론의 코브라나 척 노리스 영화, 폴리스 아카데미, 그리고 우뢰매까지 모두 재개봉관에서 봤다. 뿐만아니다. 공중파에서는 주말 밤마다 동서고금의 걸작을 틀어줬고 시작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광고 숫자를 하나하나 세면서 봤었다. 지금은 정확한 내용은 커녕 장면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않지만 분명한건 그때 봤던  모든 영화들은 아직 예술이 아니라 놀이였다는 것,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전부 교과서였으며 주인공들은 롤모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험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나면 며칠동안은 주인공의 걸음걸이나 말투부터 의상과 소품도 어디선가 구하고 심지어는 위험천만한 '스턴트'도 와이어줄 하나없이 감행하지않나.(일명 슈퍼맨 놀이) 아직은 걸작과 졸작을 구분하지않았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던 시절. <be kind rewind>는 바로 그 시절의 흥분, 예술이 아닌 유희로서의 영화가 불러오는 흥분의 감정을 소환하다. 어릴 때처럼 의상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자기만의 영화를 만드는 짓 따위를 정상인 어른이 할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셸 공드리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웃자란 키덜트 몽상가들이었고 우리 모두 한때는 저러했다. 열렬히 영화를 봤고 영화가 곧 세상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커가면서 세상은 영화가 아님을 알게되고 점차 영화와 현실의 경계선을 그으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갖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현실이라는 내성을 키워간다.(그리고 대개 그 과정을 사람들은 성장이라고 부른다.)그리고 그즈음부터 영화는 이제 예술로 분류되면서 엄지를 올리느냐 마느냐의 이진법, 혹은 별네개를 가지고하는 사진법 등을 이용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심미안을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며 궁극적으로는 엄연한 하나의 텍스트로 거듭난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디서도 어릴적 몽상가들을 찾을 수가 없을 밖에. 영화를 보면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 하지만 아이였을 적 영화를 봤던 기억은 마치 유전자나 감기바이러스처럼 몸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있다가 한번의 작은 자극만 주어지면 불현듯 활성화된다. 못믿겠다면 이 영화속 "스웨덴"식 영화들을 보면 된다. 도서관에서 <고스트 버스터즈>를, 폐차장에서 <맨 인 블랙>을 다시 찍는 마이크와 제리를 보고있으면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한때는 성룡이었고 주윤발이었던, 또 슈퍼맨과 터미네이터였던 나와 당신이 그 안에 있다.

3.할리웃의 일급 작가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였던 <이터널 선샤인>과 <휴먼 네이처>, 그리고 본인의 자작 시나리오로 만든 이후 두편의 차이는 작은 듯하면서 크고 큰 것 같으면서도 다소 미묘하다. 두사람 모두 철저히 독자적으로 작업하는 나홀로  예술가 타입이긴한데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는 더 폐쇄적이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왠만해서는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몽상가들의 낙원이자 오밀조밀한 마이크로 코스모스 공드리 월드는 장편영화로서는 다소 지루하고 늘어진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있긴하지만 그래도 그 독보적인 상상력때문에 또 다시 기대하게한다.(그래서 그의 이전 뮤직비디오 작업이 더 좋았던건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도쿄>가, 그리고 현재는 (imdb)에 따르면 <시공간의 주인>이라는 차기작을 준비하고있다고한다.  <그린 호넷>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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