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 채널을 돌리다 어떤 영화를 후반부쯤부터 보게 됐다. 그 중 한 대목. 유배중인 정약용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형 약전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책과 먹을 멀리하라는 당부를 전한다. 자연히 글을 쓰고 싶어질테니 말이다. 각혈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던 그를 보며 그의 유배 생활을 돕던 아낙은 "제발 글 좀 그만쓰라"고 사정을 하지만 약전은 기어이 책상 머리 앞에서 붓을 손에 쥔 채 죽는다. 얼마나 전기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맞을 것이다. 직접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록하는 일에 그토록 열중했던 이유는 뭘까. 그간 갈망해온 세상을 개벽하는 일에 관한 것도, 유배당한 처지에 울분을 호소하는 것도, 평생동안 궁구한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것도 아닌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데 그처럼 진을 쏟은 이유는 뭐였을까. 아마도 그렇게 써낸 것이 쓰지 않은 저 모든 것들의 대체재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렇게라도 뭔가 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글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러나 결국 글쓰기는 죽음이다. 오컬트한 미신도, 살인의 도구라는 장르물의 설정 놀음도 아니다. 말그대로 글쓰기는 곧 죽음이다.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군 중 하나가 기자와 소설가, 시인같은 글쟁이라는게 만국공통임은 주지의 사실이건만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쓰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을 쓰다가, 아니 글만 쓰다가 붓을 손에 쥐고 죽기도 한다. 그걸 저주라 볼지 숙명이라 볼지는 관점의 차이일테지만.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마다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 루소는 생피에르섬의 피난처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상념을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뫼리케 또한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게 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자기 소설을 고치고 또 고쳤다. 켈러는 문학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치기 위해 쉰여섯의 나이에 공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 발저는 스스로를 이른바 금치산자로 만듦으로서써만 비로소 글쓰기의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그는 발저가 문학을 완전히 등졌음에도 여전히 조끼 호주머니 속에 몽당연필 한 개와 별도로 잘라 낸 메모지들을 늘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자주 적어넣곤 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발저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끼면 마치 나쁜 짓이나 심지어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언제나 부리나케 메모장을 주머니에 다시 감췄다고 베를레는 덧붙였다.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고 답이 없는 일 같아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둘 수는 없는 그런 일인 것 같다. 글쓰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내놓을 수 있는 근거란 아무것도 없으며, 따르는 보상 또한 적다.

 
『전원에 머문 날들』(2021)에서 제발트는 불운한 재주로서의 글쓰기 운명을 짊어진 작가들이 세속을 피해 자연으로, 전원으로 파고들었던 한 시절을 다루고 있다. 실재인지 허구인지 모호한 그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처럼 그 자신 또한 염세적인 한 명의 작가로서 공감하는, 무작정 뭐라도 써야만하는 그 글쓰기 욕망에 대해 이번에도 제발트는 예의 긴 혼잣말하듯 행갈이 없이 글을 밀고 나간다. 보상이 전무한, 시간이 흘러도 타인에게 겨우 몇 줄 읽힐까 말까한, 공감이나 이해는 커녕 타박이나 안 받으면 다행인 그러한 글쓰기를 말하는 작가는 또 있다.

애초에 나는 왜 노트를 쓰는 걸까? 이런 모든 면에서 자기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특히 강박적이고, 이 같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쓸모라고는 강박이 스스로 정당화할 때 그렇듯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것 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요람에서 싹트거나 아예 싹트지 않는다. 비록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글쓰기의 강박을 느꼈지만 아무리 봐도 내 딸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 자기만의 노트를 쓰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부류로,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이다.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다.
조앤 디디온, <노트 쓰기: 과거의 나와 화해할 이유> 중에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2021) 189pp

 
자기 자신을 닮은, 그래서 피하려고 해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 글쓰기.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이런 글쓰기에 어떤 실제적 효용이 있는건 아닐까. 그래서 쓸 수 밖에 없는게 아닐까. 그럼 그 효용은 뭘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나는 글쓰기라는 매우 거대한 의무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런 의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무감이 당신에게 고지되고 알려지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 그렇게 하듯이 작은 분량이라도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큰 불안이나 큰 긴장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에 우리가 자신에게 부과한 이 작은 분량을 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일종의 사면을 행하게 됩니다. 이 사면은 하루의 행복에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행복한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에 달려 있으며 약간은 다른 어떤 것, 곧 실존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고, 매우 수수께끼 같은 일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다지도 허무하고 허구적이며 나르시시즘적이고 자신을 향해 침잠하는 이 몸짓, 다만 아침나절을 할애해 탁자에 앉아 빈 종이 몇 장을 채우는 이 몸짓은 어떻게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대한 축복이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직업, 허기, 욕망, 사랑, 성, 노동과 같은 사물의 실재가 아침나절 동안 또는 하루 중 어느 때인가 글쓰기를 했다고 해서, 변형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자,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입니다. 어떤 경우든, 내게는 이런 일이야말로 내가 글쓰기의 의무를 느끼게 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

이것은 당신이 보다시피 즐거움이란 없는 의무지만, 결국 의무로부터의 도피가 당신을 더 큰 불안에 빠뜨리고 법의 위반이 당신을 더 큰 불안정과 방황에 빠뜨릴 때,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은 사실은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요? ... 이러한 의무에 복종한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적이며, 당신을 짓누르며 사방에서 당신을 압도하는 이 법에 복종한다는 것, 이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의 즐거움입니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는 물론 내게 글쓰기가 매우 피곤하고 어려우며, 또 불안을 몰고 오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나는 늘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물론 나는 무한히 어긋나고, 실패합니다.

미셸 푸코, 『상당한 위험』(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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