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eidf에서 본 이 다큐는 1995년 옴진리교 테러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연출한 작품으로, 교단명을 바꾼채 지금도 여전히 운영중인 동일 단체의 간부, 즉 감독에게는 가해자 편에 속한 한 남자와의 짧은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감독 사카하라 아쓰시는 사건 발생 후 삼십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테러의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하고 당시에도 이미 신자였던 아라키 히로시는 자신들이 일으킨 사건의 크기와 영향력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신앙'을 놓지 못한 채 지금도 집단 생활을 하며 단체를 이끌고 있다. 두 사람의 여행은 그래서 선뜻 가능할까 싶지만 의외로 담담하게 시작된다. 두 사람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관계라기보다는 얼핏보면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카하라가 상대를 비난하거나 힐난하는 식으로 대하지 않고 어떻게든 우호적 관계 속에서 대화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제로 비슷한 나이대에 같은 지역 출신에 같은 대학(이는 확실치 않다)을 다녔던 공통점도 있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서로 공유하는 기억의 접점을 확인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재 처한 각자의 상반된 입장과 삶의 이력으로 인해 역설적 비극성을 재현한다.

 

경계심을 풀게 하는 첫인상을 가진 감독 사카하라는 시종 농담을 섞어가며 아라키와의 거리감을 좁혀가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대인 접근 방식은 동시에 이 다큐 전체의 영리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 사이에 사카하라는 아라키에게 진짜 묻고 싶었던 회심의 질문들을 던진다. 사건 발생 이후 지금껏 계속 품어왔을 질문들, 이를테면 당신들이 벌인 테러의 궁극적 동기는 무엇인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아직껏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해져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고 여러 ptsd에 가정까지 파탄나버린 나는 그렇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대화 전략이 영리한 이유는 작품의 전체 플롯 자체가 이 대화 방식과 유사해서, 처음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하는 여행이라는 설정에서 연상되는 일말의 (말초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호객'에 성공하지만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내용이 심각해지면서 결국 맨마지막에 이르면 갈등과 긴장이 최정점에 달한 지점에서 바로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의 근원은 결국 감독 사카하라가 아닌 인터뷰이 아라키에게 있다.

 

사카하라가 타인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하는 인상이라면 길고 마른 체형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관하는 아라키 또한 관객의 선입견을 유발한다. 하지만 사카하라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영민한 이가 아라키였음을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또렷하게 보여준다. 아라키는 사카하라의 회심의 질문에 번번이 피해가면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화법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사실상 대답을 거부한다. 진실 규명과 우호적인 여론 형성이라는 서로간의 상충하는 목표가 확실한 저널리스트와 인터뷰 대상의 관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허위성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재닛 맬컴의 주장(<기자와 살인자>, 2009)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가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아라키는 빛바랜 필통 이야기를 꺼낸다. 요지인즉슨 어릴 때 친구들이 갖고 있던 필통이 너무 부러워서 자신도 구입을 했는데 정작 그 이후부터 왠지 모르게 이전에는 반짝반짝 빛나던 필통이 평범해보였다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아사하라 쇼코를 향한 양가감정의 우회적인 고백으로 읽힐만한 대목이다. 이렇듯 직접적으로 속내를 토로하는 대신 간접적으로 유추해내야하는 말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명문대 대학원까지 다녔던 아라키의 이지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즉 그의 이런 말들은 유의하며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슷한 얘기는 또 있다. 그는 자신이 옴진리교에 몸담게된 동기 중 하나로 동생이 골육종 진단을 받았던 일을 든다. 다행히 다른 병원에서 또다른 진단을 받고 치료도 잘 되었으나 그 이후부터 정작 자신의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앞의 것보다도 더 잘 짜여진 대본처럼 들린다. 테러 사건으로부터 자그만치 25년의 세월이 지나는동안 아라키는 직접적인 사법적 책임을 면피할 목적은 아니더라도 옴진리교에 투신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무수한 자문자답을 해봤을 것이다. 의도적이건 그렇지않건, 타인의 책임 추궁에 대비하기 위함이건 아니면 자기자신에 납득하기 위함이건 간에 여러 가지 답변을, 아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어봤을테고 동생의 투병기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야기를 지었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그러니까 세뇌나 강압이 아니라 다른 일반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실존적 고뇌를 종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의에 의해 선택했다는 방어적 변론을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 에피소드 내지는 전략이라는 힐난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합리적으로 이해해보려 애를 쓰기 마련이다. 그저 불운했거나 우연일 뿐이라는 답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게 마련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진실이라 굳게 믿기도 한다. 합리적인, 그러니까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나를 포함한 타인에게 언어로 진술하고 제시함으로써 설득시킬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설명이 '이야기'이고 서사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자문하고 자성하는 과정에서 완성된 '이야기'라고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 정작 중요한 것들은 대개는 뒤늦게, 때를 놓친 뒤에 찾아오게 마련이므로. 설사 그것이 타인에게 전혀 이해받을 수 없는 나만의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시간은 진실의 감가상각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같은 증언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빙성을 더욱 의심받으며 그 가치를 잃어간다.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를 폄하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진실 규명이 더딜 때 인간은 나름의 대응과 적응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건 흔한 상대주의적 주장들, 그러니까 저마다의 진실'들'이 난립한다는 데 있지 않다. 갈등하는건 진실'들'이 아니라 진실의 크기를 또는 그 실체를 감당할 수 없어서 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아예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하거나 혹은 못하는,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이다.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을 때 관련된 개인들 각자가 겪는 내적 혼란이란게 어떤 것인지, 이 다큐의 두 인물이 보여주고 있는건 바로 이것이다.

서로 교감을 하는듯 보이다가도 다시금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거리가 멀어지는 패턴의 반복은 극영화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패턴의 절정은 단연 본편 전체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한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다. 기자들을 미리 불러놓고서 두 사람은 최초 테러가 발생했던 도쿄의 지하철 역을 직접 찾는다. 거기서 아라키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노회한 정치인의 전형적인 화법, 즉 유감은 표명하지만 사죄는 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초반부에 사카하라에게 했던, 교주가 지금껏 사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으로서는 어떤 분명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말을 기자들 앞에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준비해둔 차를 타고 빠져나와 다시 둘만 남은 상황에서 사카하라가 입을 연다. 아까 뭔가 다른 말이 나올까하고 기대를 했다고.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를 저버린채 아라키는 이번엔 아예 입을 닫는다. 종교나 여타 신념을 배제한 자연인으로서 갖는 심정과 투철한 종교인의 신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듯한 그의 모습은 뭔가를 크게 두려워하거나 또는 모종의 어떤 이유로 인해 진실 규명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의 신념에 헌신했던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이 두렵지만 동시에 죄의식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두 양태의 불안정한 공존은 아라키의 야윈 얼굴과 시종일관 불안한 눈빛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여전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이제는 뭘 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듯한 사카하라의 난처한 표정.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조문을 보여주는 오프닝을 통해 비판적 의도를 표명했지만 정작 본편에서 주로 보이는건 법과 자유 같은 추상적 관념보다는(아사하라의 사형과 관련된 뉴스를 빼면 이 작품에서는 국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개인들의 절절함이었다. 아라키는 입으로만 사과를 말하는 위선자일 수도 있지만 죄의식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신경증 환자일 수도 있다. 사카하라 또한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눈 앞에서 보며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일 수도 있지만(마지막까지 보면 아라키를 포함한 '알레프'에 대한 사카하라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 이전에 아직껏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채 맞이한 엔딩.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세상과 불화하는 가운데 자기자신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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