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iweather post pavillion> 발매를 즈음한 피치포크미디어와의 인터뷰. 전문번역 아닌데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질문은 전부 빼버린채 답변만 실었다. 뒤로 갈수록 발번역의 정도가 더하므로 웬만하면 원문과 같이 읽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

"저널리스트건, 투어 중에 만나는 팬들이건 계속 접하게되는 반응은 '당신들 음반을 이해하는데 정말 긴 시간이 필요했어요'라는 것이다. ..."잡지에서 봤고 계속 봐왔고 내 친구들과 얘기했지만 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장에 한동안 음반을 놔두었고 사람들이 계속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는걸 듣고는 다시 꺼내들었다."  모두가 우리 음악을 말하는 순간이 있었던것 같다. 이번 음반은 here comes the indian으로 건너가기위한 통로같은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만약 신보의 어떤  부분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 이전 것들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그 둘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dave portner)

“ 내가 열 네 살 때, 처음 들었던 페이브먼트의 음반은 <crooked rain, crooked rain>였다. 너바나와 다이노서 주니어로 시작한 열네살 소년에게는 따라갈만한 음반이었고 들을만했다. 내가 아마 westing같은 그들의 초기싱글을 좀더 일찍 들었다면 당장 집어던졌겠지. 페이브먼트는 음반을 낼때마다 극적인 변화를 했다. 심지어 <crooked rain>중에서도 몇몇 트랙은 처음 들었을 때 낯설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듣고싶을 순간들이 있다. 심지어 infant dressing table같은 것도 곡 구조를 갖고있다. 아마 더 옛날 곡들의 노이즈에 한번 익숙해지기만하면 그 밑에는 이번 새음반과의 유사점들이 많다는걸 알게될거다.” (brian weitz)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이란걸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하던 때가 분명 있었다. 우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팬들에게 우리가 직접 말하고 만나는게 중요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방법은 미스터리를 제거해버린다. 우리가 설정한 경계선 위를 넘어간다고 느낄 때는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전히 우리의 음반이나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몇가지 얘기들이 있다. 그리고 우린 사람들이 그걸 알려고하는데에는 전혀 신경쓰지않는다. 어떤 테크니컬한 것들 말이다. 우리는 스튜디오 안에 들어와 사진을 찍게 하거나 우리가 작업할때 스튜디오로 누군가가 들어오게하지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매우 개인적인 측면이기때문이다."(dp)

"우리가 좋아하는 많은 밴드들의 미스터리한 부분들은 매우 특별한 음악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능력이다. 그건 우리를 생각하게하고 우리 음악을 만들때 영감을 제공한다. 당신이 타인에게 말하는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뭘하는지,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쓴다면 그건 그들을 그들만의 실험을 하게하거나 그들만의 것을 만들어내게하는게 아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하는 것에 관해 항상 말하지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dp)

"here comes the indian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팬들과 그 음반에 실린 기타 사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이메일에 아직까지 답장을 하고있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 사운드를 위해 어떻게 페달을 조합한거죠?" 일단, 난 모른다.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일단 그들에게 요점은 말한다. 우린 이러이러한 페달을 썼거나 딜레이를 세팅했다고 말하고싶지않다고말이다. 왜냐하면 아직 어린 나이에 음악을 만든다는 것의 재미의 절반은 데이브가 말한 것처럼 오직 당신만의 사운드를 만드는 것과 저 사람들이 어떻게 저걸 해냈는지 알아맞혀보려 노력하고 결과적으로는 똑같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때때로 우연히 나온 것은 오롯이 당신만의 것이다."(bw)

"전혀 그렇지않다."(bw, 당신은 훌륭한 뮤지션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상대적이다. 어떤 때는 그렇다고 얘기한다."(dp)

"난 훌륭한 뮤지션들이 있는 밴드에 몸담고있는건 이상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일동 웃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생각을 두번하고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 자신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야만한다. 음악적으로 많이 공부한 뮤지션들, 이를테면 그레이트풀 데드같은 밴드 말이다. 넷이나 다섯명의 곡을 쓸 줄 아는 사람들로 만들어진 밴드는 뭔가 이상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 아닌가. "좋아, 이번엔 G로 시작했다가 브리지는 이렇게 넘어가고..." 모두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아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스펙트럼의 정반대에 서 있다."(noah lennox)

"이 말은 그러니까 우리는 저런 식으로 소통하는 차원을 넘어섰다는거다. 우리는 음악만드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만의 언어를 개발했다. 그래서 저런 것이 우리에겐 중요하지않다는거다."(dp)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을 갖고있고 그 스타일에 맞는 종류의 기술을 갖고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네 파트에 맞는 솔로를 연주해봐"라고 말하는 그런 스튜디오 뮤지션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중 누구도 그런건 할 줄 모른다.

"...우린 항상 보컬의 소리를 가장 높게 올리지않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우리 노래의 가사의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없기때문이다. 때로 우린 사람들이 항상 우리가 뭐라고 하는건지 못알아들어야한다고 생각한다."(dp,일동 웃음)

(당신들은 특정 노래가 무엇에 관한건지 서로 얘기하느냐는 질문에)
"예전보다는 더 자주 그렇게한다."(nl)
"그건 좀 나중이다. 우선 집중하는건 음악 자체다. 그리고나서 브라이언이 이렇게 덧붙인다. "이게 그거였어? 난 그렇게 오랫동안 몰랐네." 어떤 노래에서 뭐라고 한건지 같은 밴드 멤버조차 모른다는건 좀 놀라운 일이다. (dp)

"이번 음반으로 보자면, <메리웨더>를 쓸 때, 우리는 각자 개인 작업을 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으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많은 이메일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걸 하나로 추려낼 수 없을거라는 걱정도 있었다. 그건 가능한 많은 아이디어들을 모으고 각자 어떻게 그것을 굴려나갈건지에 관한 문제였다. '이번 곡에서는 샘플 소스가 더 어쿠스틱하거나 홈메이드여야해"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번 앨범에서 나는 텍스츄얼한 사운드를 원하지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음반에서 이미 해봤고 더이상 어렵지않기때문이다. 그래서 더 멜로딕한 샘플이나 최소한 멜로딕한 것들을 써보기로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의 노래로 조정될 수 있었다. 그 노래는 가능한 많은 것들을 담고있다. 나로서는 오십가지 루프나 샘플을 가지고한 첫번째 연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절반만이 이번 음반에 들어가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중 최소한 일부는 제대로 되었다."(bw)

"노래들은 다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다. 난 여전히 어쿠스틱 기타나 피아노로 만들기를 좋아하는 노래들이 있다. no more running은 피아노로 썼다. 난 그게 다르게 들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노래들은 샘플을 다시 돌리고 다시 돌리고 하는 과정에서 쓰였고 그런 식으로 구조를 진행해갔다. 많은 멜로디들은 그 전에 쓰였다. 그것은 당신 머리에서 멜로디를 취하고 특정한 소리를 쓰는 방식을 정하고 연주를 위한 악기를 쓰는 방식을 정하는 것이다." 

"... 노아는 사실 내 노래들이 린지 버킹햄을 떠올리게한다고 말했다. 난 플릿우드 맥 같은 오래된 팝 밴드를 매우 좋아한다. 그들은 위대한 밴드 중 하나다. <tusk>, <rumors>. 린지 버킹햄과 스티브 닉스라는 라인업은 명백하게 내게 영향을 미쳤다...."(dp)

"그 곡(brother sport)의 첫번째 버전은 두개의 기타 코드 위로 내가 즉흥적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었다.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면서 내가 어떤 효과를 썼는지는 기억나지않는다. 그러나 나는 무디맨 샘플을 연주했었다. 그의 노래의 일부를 리듬으로 쓰려고 했었다. 그걸 최종버전에 쓰고싶지는않았다. 그러나 첫번째 버전은 그러했고 그것은 매우 하우지(house-y)한 소리를 냈는데 나는 거기에 괴상한 브라질리언 드럼 스쿨 샘플을 끼워넣었고 결국 그 노래의 기저부로 쓰게 되었다. 기타 코드는 그 노래의 리듬파트 다음에 완성되었고 그 다음 가사는 맨 마지막이었다. 그게 나로서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가사는 언제나 노래라는 퍼즐의 맨 마지막 부분이다." (nl)

"그 노래(brother sport)는 이 노래를 쓸 당시 힘든 시기를 겪고있던 내 형제를 위한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nl)

"곡의 결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 노아는 실제로 음반의 시퀀스에 관해 신경썼다. 그에겐 매우 중요했다."

"세번째 트랙은 내겐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당신은 더 좋아할 것이다. ... 그것은 말랑말랑할 수 있다. no more runnin은 내게 세번째 네번째 것보다 더 클래시컬하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이미 sung tongs에 실린 the softest voice에서 그걸 해낸바 있다. feels에 실린 flesh canoe도 그렇다.(bw)

"... brother sport는 마지막 트랙이 될거라고 느꼈다. 다른건 생각해보지않았다.  ... 그 음반을 끝맺을 다른 트랙은 없었다. no more runnin과 brother sport는 마지막 두곡이 되어야만했다.

이 음반은 당신들에게 다르게 느껴지는가?
"때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우리에겐, 정확히는 나 자신에 한해서, 이 지점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도록 압력을 받는 것이 처음이다.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일어난 일에 대해 돌아보고있다. 그건 음반 이상의 시간이다. 우리에게 모든 음반은 우리 인생의 특정 시간대를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각각의 음반들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어떻든지간에 이 음반은 다른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뭔가 더 공간이 있는 것 같다. 잘 모르겠다. 말로는 표현이 안된다.(dp)

"나에게는 만드는게 조금 달랐다. 이 음반의 곡들을 처음 쓰기 시작할때 우리 모두 매우 긴장했었다. 조쉬는 투어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쉬없이 새 곡들을 쓸 시간이 두 주 있어"라고 했다.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처음 몇번 연습하면서 뭔가를 향해 나아갔고 난 그게 뭔지 몰랐지만 대단했다. 삼사일쯤 지나고나서 노아와 내가 어느날 밤 집 밖에서 얘기를 나눴다. "소리가 좋은데" 어떤 믹싱이나 그 무엇도 없이 그저 스튜디오에서의 소리와 자연스러운 어쿠스틱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매우 편하고 행복했다." (bw)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다. 이전과는 다르게 해낸 작지만 행운적인 것들이 많았다.게다가 이건 다른 종류의 음반이다. 벤 앨런과의 작업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전에는 그와 만난 적이 없었고 그가 작업하는 방식에 대해 몰랐다. 점차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해내는지 알았고 그것이 우리를 이끌었다.

"그와의 작업은 매우 잘 되었고 사운드는 우리가 원했던 바로 그거였다. 스튜디오가 정말 훌륭했고 한달동안 음악을 만들기에는 적합한 장소라는건 아주 작은 거였다. 데이브와 내가 이년전부터 곡을 쓰고 함께 해나갔다는 것도 어떤 운이었다. 가장 중요한건 집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투어를 하고 다른걸 하는 사이에 시간의 갭이 전혀 없었다. 나로 하여금 정말 다르게 느끼게 만든 것은 일이 매우 부드럽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어떠한 커다란 문제도 이번엔 없었다."(nl)
199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99년은 짤없이 열다섯, 2000년은 라이브와 ep 한장씩빼면 딱 열. 어쩜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지 원.
빌투스필의 라이브는 그 전의 두 앨범과 함께 삼부작 혹은 삼형제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연결되는 음반이다.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다음해에 나온 이 라이브 음반은 지난 두장의 음반의 충실한 서플먼트로서 90년대 후반 그들의 음악적 여정을 비로소 완성지으며 확실하게 방점을 찍어주고있다. 안타깝게도 도브스는 이 해에 나온 데뷔음반을 넘어서는 후속작을 내놓지못하고있다. 라디오헤드는 2000년대의 음악계의 흐름을 그냥 단번에 규정해버렸으며 그랜대디는 가장 월등한 멜로디의 질을 보여주고있다. 프라이멀 스크림은 제일 화끈했다. 마그네틱 필즈는 90년대에도 '진짜'컨셉앨범이 가능함을 증명한 더블, 아니 트리플앨범이다. 여름동안에는 트래비스 노래만 들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부분 동의하지않겠지만 아놀드의 데뷔작은 같은 해에 나온 벨앤세바스찬의 녹색앨범보다 훨씬 더 영국적인 모던포크라고 생각한다. 엉클은 당시에 가장 핫한 아이템중 하나였다. 비록 반쪽짜리 작업이긴하지만 <mermaid avenue>는 <summer teeth>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뛰어난 결과물이다. 모든 유작들은 그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기에 더 아쉽고 아스라하게마련이고 제프 버클리도 예외는 아니다. 90년대 시애틀 씬의 생존자 펄잼은 향후 보여줄 한없이 진지한 '마이너'의 길을 이즈음부터 걷기 시작했고 브릿팝의 생존자였던 펄프는 비록 이 음반이 그들의 마지막 정규작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브릿팝 에필로그를 써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파릇파릇한 신진세력 중의 하나였던 베타밴드가 있었다. 아프간 윅스는 화끈하고 소울풀한 락앤롤을 보여줬고 팻보이슬림은 케미컬 브라더스가 놓쳤던 발랄함을 제대로 채워주었다. 뉴트럴밀크호텔은 지금까지도 미국인디씬을 대표하는 전무후무한 걸작을 내놓았고 루퍼스 웨인라이트라는 미청년이 데뷔작을 들고 처음 얼굴을 내밀었으며 알루미늄 그룹의 초콜렛은 노래제목만큼이나 달콤했다. 에디 베더만큼이나 걸쭉한 벤 오트웰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고메즈의 데뷔작은 재기가 넘쳤고 매시브 어택은 이때 정말 최고였다. 그리고 <xo>는 나의 두번째 '시작'이었다.

아래는 (고메즈만 빼고) 앨범으로 꼽을 순 없지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해의 싱글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orning glory

I lit my purest candle close to my
Window, hoping it would catch the eye
Of any vagabond who passed it by,
And I waited in my fleeting house

Before he came I felt him drawing near;
As he neared I felt the ancient fear
That he had come to wound my door and jeer,
And I waited in my fleeting house

"Tell me stories," I called to the Hobo;
"Stories of cold," I smiled at the Hobo;
"Stories of old," I knelt to the Hobo;
And he stood before my fleeting house

"No," said the Hobo, "No more tales of time;
Don't ask me now to wash away the grime;
I can't come in 'cause it's too high a climb,"
And he walked away from my fleeting house

"Then you be damned!" I screamed to the Hobo;
"Leave me alone," I wept to the Hobo;
"Turn into stone," I knelt to the Hobo;
And he walked away from my fleeting house

부정적인 뉘앙스를 제거한 의미에서의 인간혐오자. 속된 세상의 비루함에 염증을 느끼는, 아니 그 이전에 그토록 비루한 세상을 만든 인간에 대한 베른하르트의 도저한 혐오와 부정에 독자는 자칫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 그의 주된 비판은 인간 일반에서 시작해 그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로 좁혀지는데 위정자부터 예술가 동료까지 가리지않는다. 일체의 행갈이 없이도 구렁이 담넘듯 소재와 일화를 바꾸어가며 죽음 앞에 직면한 인간만이 가능한 초연함으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누구와도 친해질 수 없는 인간의 철저한 부정과 자기 혐오와 자기 저주가 이어진다. 일체의 대안이나 한줌의 희망도 없이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이런 태도를 위악으로 몰아붙이기는 손쉬운 일이겠으나 오히려 진정성은 꿋꿋이 제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저자가 자신의 고결함이나 꼿꼿함 따위를 드러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고. 어떻게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숙명적 패배주의 안에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인간은 물론이고 그의 조국도 예외일 수 없는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수 밖에 없다. 철저한 회의와 부정은 대안 제시를 위한 필수 선행 과정이며 애초에 대안 제시는 예술가의 몫은 아닌 법.
 
수술을 받은 후 요양하는 과정에서 쓰인 소설임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하루하루 스러져가는 육신에 굴복하지않으려는 강퍅하고 메마른 정신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잊고싶지않은 구절들.
----------------------------------------------------------------------------------------------------
"또한 나는 그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그건 내가 그들을 떠났었기 때문이고 - 이것은 사실이다- 아무것도 원하지않았던 것처럼 그들 모두를 원하지 않았기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스스로 끝을 내기에는 너무 비겁했기때문이다."


"나는 아주 젊었을 때부터 영어와 불어로 된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기고있다. 나는 자주 나의 세계가 대체로보아 조약한 종잇장에 불과한 독일어 신문에만 의존해야한다고 가정할 때 그건 어떤 세계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빈의 카페를 증오한 것은 그 안에서 늘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맞닥뜨려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과 직면하고싶지않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위해 가는 카페에서는 더더욱 그러기를 원하지않는다. 그러나 다름아닌 바로 그곳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된다. 나는 나 스스로를 못견뎌한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생각에 잠겨 글을 쓰는 한 무리의 사람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나왔던 그곳에 있으려한다. 이 운명적인 상태는 지난 몇년간 더 악화되어 나아지지않았으며, 나는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빈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나탈로 되돌아오고 나탈에서 다른 큰 도시, 즉 베니스와 로마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프라하로 갔다가 되돌아오곤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있을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에 대하여>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책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날로 둔감해져만가는 대중의 인식능력전반을 꼬집으면서 이를 현재의 비극 즉, 이라크 전쟁을 승인해버린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가고있다. 인문학적 사유를 통한  反戰서적이라고나할까. 번역본상으로 180여페이지되는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한문장으로 요약된다.

"고통받고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154p)

이를 조금 길게 다시 풀자면
"극소수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을 보편화하고있는 셈이다. ...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163p)

이에 대해 손택은 다음과 같은 반성과 태도를 요구한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 따라서 상기하기가 일종의 윤리적 행위라는 믿음은 우리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으며, 세상이치에 따라 우리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본성 한가운데에 깊숙이 놓여있다. ... 화해한다는 것은 잊는다는 것이다. 즉, 화해하려면 기억이 불완전하고 한정되어있어야한다."(168p)

통렬한 지적과 비판의 연속이지만 책의 결말은 다소 유보적이며 그 전까지 이어오던 강건한 어조의 일관성이 흐려져있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184p) 결국 이미지를 통해서 뭔가를 느낀다거나 배운다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으며 또 그 자체가 치명적인 실수일 수 있다. 다시말해 인간이 이미지를 이해한다는건 이미지 자체와 그것이 품고있는 미적 논리보다는 그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와 담론 속에서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이라크전 발발 이후 그녀의 사망 직전에 발표된 이 책에는 그 즈음에 쓴 다른 에세이들도 함께 실려있는데 어수선하기만한 세상을 바라보는 노인의 근심과 페시미즘으로 꽉 차있다. 역시 최근에 사망한 커트 보네것의 마지막 에세이집 <나라없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보네것쪽이 훨씬 유머러스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셈이었다.

덧.위에 옮겨놓은 대목중에서 168페이지 마지막은 누가 꼭 좀 읽어봤으면. 하는 짓이 그대로 똑같잖아.

"사고와 글쓰기는 궁극적으로 정력의 문제이다. 스스로 의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우울한 인간들은 자신이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파괴적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우울한 사람이 일하는 스타일은 몰입, 완전한 집중이다.", 벤야민에 대해 수전 손택이 쓴 <토성의 영향 아래>중에서.

1.<해석에 반대한다>가 주로 60년대에 나온 그녀의 글을 수록하고있다면 <우울한 열정>은 70년대의 글들을 묶어놓고있다. 우울함이라는 벤야민의 개인적 기질을 그의 작업과 연관시키고있는 <토성의 영향 아래>도 신선하고 좋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중요한 글은 <매혹적인 파시즘>일 것이다. 야금야금 주도면밀하게 파고들어가는 정치한 분석은 처음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었을때처럼 계속해서 밑줄을 긋고 곱씹어서 읽도록 만들었다. 지배와 종속의 관계, 미에 대한 맹목적 추구, 지도자에 대한 우상숭배, 육체에 대한 찬양과 그 반대편에 자리한 지성에 대한 혐오등 파시즘 미학의 내용들을 명쾌하게 정리하고있으며 그것이 여전히 관통하고있는 우리의 현실을 비판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위에 언급한 것들이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란걸 알 수 있지않나. 또한 비판과 분석을 하려면 정확한 타격점과 확실한 증거,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무기를 갖춰야함을, 너무나 당연하지만(동시에 그렇지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므로) 다시 재확인하게된다.

2.유진 조레츠키의 <우리는 왜 싸우는가>(2005)를 보았다. 이런 다큐를 보고있으면 과연 역사가 진보하고있는지를 되묻지않을 수 없다. 저들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권력수뇌부와 위정자들은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지모른다는 역설적 위안과 함께 한심함과 답답함도 동시에 밀려온다. 정말 그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 알고싶다면http://imdb.com/title/tt0436971/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디스트 마우스의 커버로만 채워진 선킬문, 일명 '문성길 밴드'의 두번째 앨범중에서.

엘리엇과 제프와는 다른 이유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나의 페이버릿, 마크 코즐렉은 여전히 이 앨범에서도 산산이 가루를 내어 원곡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리메이크를 하고있다.

레드하우스페인터스 시절과 달리 갈수록 유머러스해지고있는걸보면 이 사람은 갑자기 자기 가슴에 칼꽂을 일은 없겠구나싶으면서도 그러다보니 레드하우스페인터스 이름으로 신곡을 듣기가 힘든건아닌가싶어 아쉽기도하고. 그러고보니 페인터스 앨범 안나온지가 6년이 넘었군.

덧,군대있을적 스펀지를 보다가 갑자기 '미국 록밴드중에는 권투선수 김득구를 노래한 밴드도 있다'며 소개되어 뜨악했던 적이 있었다. 제보자는 이걸로 정말 지식개발금을 타려고했던걸까.  


어제 하루동안 이 곡만 무려 네번을 쉬지도않고 이어서 듣고 좀 쉬다가 다시 두번을 연이어, 도합 여섯번을 들었다.

태평양건너 살고있는 윌 셰프 군은 뭐가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이렇게 구슬프면서도 아찔할 정도로 격정적인 곡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나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서 이곡을 그렇게 미친듯이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는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