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길게 쓸 줄 안다는건 분명히 능력이다. 이를테면 2000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경선 취재기인 <기운 내, 심바 안티 후보의 트레일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자신이 왜 이토록 길고 긴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시 그렇게 긴 서문을 써낸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처럼 말이다.

아래의 글이 무엇이고 원래 어디에 실렸는지 언급하는 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서광증 환자의 증상이라면 이런게 아닐까. 첫째, 별거 아닌 것에 '호들갑' 떨기.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촬영분에서 원하는 지점을 찾기 위해 패스트포워딩을 하는 과정에서 아날로그 테입과 달리 픽셀이 깨지는 화면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라. 뭉그러진 픽셀이 빚어내는 이미지 묘사는 월리스를 유사 현상학자처럼 보이게 한다.

같은 식으로 바보 같아 보일거라 예상할 수 있지만 CNN의 테이프와 편집기는 디지털이기에 FF를 한들 여덟 장의 거대한 성조기 앞에 선 매케인의 어깨 위 모습은 빨라져 바보처럼 변하지 않고 작고 다양한 디지털 상자와 네모로 일종의 '폭발'을 한다. 이 조각들은 격렬한 FF 속도로 뒤죽박죽 섞이고 부풀고 물러나고 휘돌고 스스로를 재정돈하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미지는 사상 최악의 마약 경험에서 볼법한 것으로, 고속 화면에서는 루빅큐브 관상의 네모와 상자가 날아다니고 형태를 바꾸고 이따금 인간 얼굴이 되기 직전까지 가지만 얼굴로 낙착되지는 않는다.

 

둘째, 반복하기. 이전까지 미번역된 에세이 중에 번역자가 골라낸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실린 글들에 꾸준히 반복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냉소(주의)'다. 사물이나 인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거나 개입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무관심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냉소'에 월리스는 본문 내내 부정적이다. '냉소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가치 판단의 대상에 대해 월리스가 선택한 가장 범용성이 높은 최적의 단어처럼 보인다. 미국 정치판에서 야망있는 신인보다는 현직과 그들을 후원하는 '골수 지지자'라고 불리는 기득권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구도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결국 현실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소 때문이며, 식자층의 텔레비전 비평이 지루하고 한심한 이유도 그들이 결국 갈라서지도 않을 배우자를 계속 비난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임해야 할 비평 대상인 텔레비전에 대해 마냥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존 매케인을 향한 월리스의 호감의 핵심에는 매케인의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진정성이 냉소와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글의 절정이라 할 후반부의 듀런 모자 에피소드에서 월리스가 매케인을 향해 내보이는 감정의 흐름을 보라.

 

약물과 TV 그리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고백한) 섹스 중독자였던 월리스에게는 냉소야말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내지 가치관의 대척점에 있었을 것이다. 한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헌신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역설적인 적극적 주체가 중독자일테니까. 그렇다면 월리스 본인은 어디에 열중하고 어디에 냉소적인가.

 

1990년에 발표한 책 제목과 동명의 글에는 패기가 흘러넘친다. 충분히 더 짧고 더 명료하게 쓸 수 있었을 대목들에서 보이는 현학적인 단어 선택과 마침표가 잘 보이지 않는 긴 문장은 월리스가 훗날 쓴 에세이들과도 변별되는 상이한 스타일을 갖고있다. 이처럼 날서고 명민했던 월리스가 만일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현재의 유튜브와 스트리밍 문화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개진했을지 궁금해졌는데 몇몇 대목에서 엿보이는 통찰력은 글이 발표된 지 삼십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길더는 ... 선택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자신이 선택하는 ...... 유사 경험하는? 꿈꾸는 것에 대한 통제권이 엄청나게 많아져 TC 문화가 구원받으리라 예언한다.
선택이 확장되는 것만으로 우리가 텔레비전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다. 103

컨텐츠 대홍수 시대에 시청자는 과연 더 주체적이 됐을까. 낙관론에 기댄 기술 예찬론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월리스의 혜안은 ott가 차려놓은 컨텐츠로 선택이 한정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선택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진' 끝에 마침내 마주한 것은 냉소주의 그 자체로서 이는 월리스식 디스토피아의 최종점이 된다. 모든 가치를 조롱한 끝에, 수동적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그냥 멍하게 받아들이는 반反 반란자가 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의식을 멀리하고 진부함을 경외의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서광증 환자의 마지막 증상은 긴 글의 끝자락에 자리한 모호함이다. 제시된 증거와 증언에 대한 판단 과정의 상세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판결문이나 전개한 논증에 기반해 결론에 도달하는 귀납식의 논문 등과는 달리 월리스의 에세이에는 자신이 관찰한 처음보는 낯선 풍경들, 이를테면 테니스 토너먼트 대회 방식의 복잡다단함, 미국식 자본주의의 전시장이 되어버린 지역 축제, 빡빡한 스케줄과 첨단 미디어의 경쟁이 되어버린 대선 경선을 세필화 그리듯 묘사하지만 잔뜩 늘어놓고는 제대로 그러모으지 못한다는 인상을 자주 남긴다. 그의 글이 그토록 긴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고도의 회피 내지는 의식적인 판단 보류라는 의심. 독자가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정보를 현란하고 빠른 필치로 눈 앞에 그려보이듯 묘사하지만 그래서 대체 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데서 보이는 첫인상은 두려움이 아닌 불안이다. 지나치게 긴 글을 쓰는건 할 말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전무해서일 수 있다. <기운 내>가 어떻게 끝났던가. 매케인을 진짜로 만들어주는 상자는 결국 잠겨있고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으며 유권자인 우리는 다만 '깨어있도록 노력'해야할 뿐이다. 즉 선거 국면에서 유권자가 후보의 진정성을 알기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그러기위한 노력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2000년 당시 시점의 최첨단 전자 기기들을 동원한 언론사간 치열한 보도 경쟁이나 쉴 틈이 없다시피한 경선 캠페인 스케줄에 관한 서술은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선거 캠페인의 이면을 조명하는데는 성공하지만 그렇게 긴 글이 다다른 종착점에서 저 한마디로 끝남으로써 글의 모양새가 마치 위태롭게 선 역 피라미드처럼 되어버린 탓에 그 앞까지의 전개를 장황하기만한 빌드업처럼 보이게 한다.

 

진지함은 그에 상응하는 형식을 요구할까. 글의 내용이 길이를 규정할까. 문학의 세계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쉽게 규정할 수 없다. 한 편 한 편이 길지는 않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산문이 낯설다면 그건 그의 유려한 완곡어법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자가 그렇지는 않지만 푸코의 글은 특히 저서가 아닌 강의록의 경우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분명하고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청사진 아래 어느 위치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수시로 독자와 청자에게 확인시키며 정의와 분류, 비교와 대조, 비유 그리고 예시를 끊임없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철학자의 글은 기본 개념을 선행 학습하더라도 그 이해를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논리철학논고>의 가시만 발라놓은 것처럼 극단적일만치 짧은 문장들은 그 자체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착착 연결되어 그 유명한 마지막 명제이자 결론으로 치닫지만 텍스트 외부에 있는 독자와의 소통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기에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설과 논쟁을 낳는다. 그러니까 저자마다 각자의 문체, 즉 스타일이 있고 거기에 적응하는데는 일정 정도의 시간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방대한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했기에 자연히 길 수밖에 없는 역사책을 읽기 어려운건 난문 때문이 아니라 볼륨에 겁먹는 심리적 장벽 그러니까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다. 긴 글에는 길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필연성 또는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픽션/논픽션의 갈래가 아닌 광의의) 문학에서는 어느 것 하나 이거다라고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 무수한 반례들이 쉴 새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니까. 그래서 말하고 싶은건 이거다. 때로는 글의 길이가 곧 스타일일 수도 있다는 것.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의 사적인 정보나 일상 묘사가 거의 안 보인다는 점에서 신변잡기류의 미셀러니도 '사소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인 평론이나 비평도 아닌 글의 형식이 이미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 글의 그 '끼어있는' 성격을 예증한다. 본격 평론으로 분류하기에는 핍진한 묘사, 대화체, 1인칭 관찰자 시점 등은 기본적으로 '문학적'인 반면, 관찰하는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거나 함의를 읽어내는 통찰은 일급 비평가의 그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미국의 유명 월간지에서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탐사 보도류, 그러니까 '미국식 저널리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어쨌건 쉽사리 어떤 한 장르에 속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형식이야말로 그 통찰을 가능케하는 원인이며 그 자유로운 형식의 핵심에 바로 어마어마한 길이가 있다. 동시대 텔레비전 문화(그것도 지금 시점에서보면 '소박한' 1990년대 TV 문화다. 과연 2022년에 레거시 미디어라는 TV를 비평하려면 또는 ott를 포함해 가정에서 즐기는 홈 미디어 문화 전체를 월리스가 비평한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페이지가 요구될까) 비평이 그토록 많은 페이지를 필요로하는 일일까. 충분히 과잉이고 '선을 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가 필연적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본다면 모호함이나 어중간함 또한 긴 글이 야기한 어떤 파생 효과에 가깝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저자의 의도'나 '전하고픈 메시지'는 긴 글 속 어딘가에 영리하게 숨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명의 첫번째 에세이 <에 우부니스 플루람>에서 월리스의 의도는 20세기말 미국 문학이 동시대 텔레비전 쇼와 어떻게 닮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순응하게 만드는 미디어를 비판하면서 '불승인'의 위험을, 경악과 비명의 감수를 요청한다. 앞에서 그토록 길게 전개한 비교와 대조 및 구체적 예시와 설명이 없었다면 이 마지막 주장은 다소 뜬금없고 허황하게 들렸을 것이다. 

 

독자를 얻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길게 쓰는건 분명히 능력이다. 투입한 노동량에 비해 최종 추출량이 적은 광물(이나 육류)처럼 귀한 소량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할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아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한 문장을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과정은 길고 지루하며, 때로는 쓰고 나서도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분명히 노동에 가깝다(대개의 경우, 그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하지만 저자들이 그 과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기는 것 또한 분명하다. 때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런 글쓰기를 시도하는 저자들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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