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위기에 발현되었던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인 목적의식과 용기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걸물들을 그 이전 일본사 또는 중국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과 차별시켜주는 요인이라 볼 수 있다. 지사들을 가공할만한 적수로 만들었던 자신감과 확신, 방약무인한 태도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알려지지도않은) 천황의 뜻에 복종한다고 공언한 그들이었기에 주변의 통제나 지도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들이 생각한 바대로 행동했던 그들은 의견이 상충하는 상대에 대해 개인적으로 간섭하는 전통을 수립했다.

...이러한 점에서 료마의 정신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보여준 역동적이었던 사회상의 정치적 선구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료마의 정신은 일본이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야심가와 이상주의자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메이지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아시아 각지의 혁명가들에게 협력했던 일본의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영웅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들 모두는 그 영웅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예컨대 쑨원마저 "우리는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이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지사들의 전통은 자신이 '대의'라고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기위해서 권위와 법도마저도 거리낌없이 무시했던 과격분자들에게도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신 지사들의 이름과 언행 그리고 사례들은 훗날 다른 방법을 통한 저항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젊은 광신자들이 자신의 분별없는 행동을 정당하다고 확신하도록 만든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자들이 스스로를 유신 지사들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것은 근거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적 이상의 실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백년도 채 안되는 기간동안 일본의 세계적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반추하는데만 진력하는 부류에 해당한다. 백년전에 의미있던 문구도 오늘날에 와서는 시대에 뒤처져 효용가치가 없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자신의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중에서. p.574-575

 

글쓰기는 스타일의 문제라는 수전 손택의 말은 학술적 글쓰기에도 예외는 아니다. 형식적 제약이 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글쓰기 역시 스타일, 정확히는 그들 각자의 퍼스낼리티가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스타일은 또다른 스타일로부터 제약을 받게되는지라 70년대 이후 아마도 가장 저명한 미국인 사회학자의 최근 번역서는 저자 개인의 개성과는 별개로 주제를 향한 응집된 글쓰기보다 학자로서의 지적 박식함을 증명하는데 집중하는 지식인들의 특정한 글쓰기 경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번역본 상 430여페이지 되는 책은 저자가 고안해낸 개념들, 정확히 말하자면 비교와 대조를 위해 새로이 정의되고 짝지워진 개념들의 분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공감/감정이입, 변증법적 대화/대화적 대화, 하향식 연대/상향식 연대, 사회성 (sociality)/ 예절 (civility), 사회성/사교성(sociability), 정치적 좌파/사회적 좌파, 지루함/무관심, 해방/해리, 복원/교정/구조변경/, 연대/협력, 장기적 헌신/단기적 헌신, 초연함(detachment)/재집착(reattachment) 등,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유사한 것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개념들이 서로 대비되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예를 들어 공감과 감정이입은 둘 다 연대를 형성하긴하나 저자에 따르면 하나는 끌어안음이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 만남이다. 전자는 변증법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지만 후자는 특정한 목적이나 만족감이 없는 대화적 교환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기존의 개념들을 재정의하고 대비를 하기위해서는 자연히 방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어빙 고프먼, c 라이트 밀스, 뒤르켕, 짐멜 같은 사회학자부터 몽테뉴, 바르트, 루소, 비트겐슈타인같은 철학자, 홀바인의 회화 <대사들>, <캐치-22>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같은 대중 영화, 그리고 집단적 협동의 시초적 계기로서의 종교개혁과 '사회박물관' 역할을 했던 20세기 초의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박물 전시회같은 역사적 사실까지 저자의 인용에는 경계가 없고, 계급분화 과정에서 경험하는 어린 시절 불평등의 내면화, 신자유주의 전환 이후 열악해진 노동상황과 그 대응 전략으로서의 외부부터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와 그 관리를 둘러싼 유사 사회심리학등, 한 권의 책 안에서 소개되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숨가쁜 독서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사회학 개론서를 보충하는 실전서로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존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하고 다른 개념을 빌어와 대비함으로써 새로운 맥락에 위치짓는 것은 지식인으로서는 응당 당연한 의무이고 심지어 격려받을만한 일이기도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새롭고 창의적인 학술적 작업을 통해 정말 그 노력에 응당하는 창의적인, 또 논쟁적일 수도 있는 결론을 얻어냈느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론부에 이르면 이전까지의 현란한 지적 유람을 허탈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데 풍부한 지식과 정보의 자재로운 활용이 민망해질 정도로 전하려는 주제와 메시지가 앙상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 드디어 저자가 강조하려는 바가 그나마 다소 직접적으로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인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이것이 노먼 토머스의 지도 원리였고, 나는 그것이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

 

수직적이지않은 수평적이며 민주적인 의사소통과정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반적이고 다소 뻔한 결론을 내기위해서 이렇게 많은 지식과 사례를 든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이러한 거대한 우회와 덤불숲 두들기기를 의식했던지 머쓱해하기도한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한 아카데미 뿐만 아닌 일반적 저널리즘을 포함한 논픽션 쪽에서도 이러한 글쓰기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이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쓰인 책들의 정전이자 최고의 교본 사례는 아마도 맑스의 자본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a라는 주제를 향해 진행하는 과정에서 b와 c라는 세부 목표가 등장하면 기실 a와는 약간은 동떨어진 그 둘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고 집중적으로 파고들다가 다시 이들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d나 e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나서야 이제 다시 a라는 본줄기로 돌아와 논의를 재개한다. 예를 들면 자본을 설명하기위해서 먼저 상품을, 상품을 설명하기위해서는 상품을 상품이도록 하는 가치에 대해, 그 다음에는 다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인 화폐에 대해, 그렇게 이들을 지나고나면 이제야 자본에 대한 논의로 이동한다. 이렇게 꾸준히 분기되고 우회를 거치는 책을 읽다보면 정작 내가 지금 읽고있는 부분이 전체 책의 얼개 상 어디에 위치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인지하지못한 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게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유럽 출신 사상가와 21세기 초엽을 사는 미국인 사회학자의 차이가 있다면 이렇듯 분방하게 벌려놓은 지식의 다발들을 보기좋게 일관된 하나의 체계로 수습해냈느냐의 여부에 있다.

아직 학위를 받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석박사생들은 학위과정 내내 간명하고 주제를 향해 응집된 글쓰기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의받는다. 지도교수와 평가자들로부터 꾸준히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지적을 받는 과정에서 그들은 학술적 글쓰기를 계속 할 자격이 있을까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실망을 넘어 때로는 심한 내상을 입기도한다. 그런데 정작 학위를 받고 독립된 지식인으로서 인증을 받고나면 그때부터 그들의 글쓰기는 이제까지의 수련과정과는 달리 처음에 바랐던 자유를 얻는다. (아마 이것도 지식인의 역설적 특권 중 하나일지도) 시간이 지나며 명망높은 저자가 될수록 그의 글쓰기는 엄격한 비평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자잘한 실수나 과감한 시도 모두 익스큐즈 되는데 심지어 대학자들은 때로는 꼼꼼하지못하고 미비한 레퍼런스 마저도 용인되곤 한다. (대개 그런 경우 유능한 편집자나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그 수고로운 일이 넘겨진다.) 쓰기의 자유로움이 곧 방만한 글을 낳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건 이미 그 자체로 지식인으로서 실격이다. 일반적으로 아카데믹한 글은 이미 전반적인 구성이 짜여진 다음 본격적인 쓰기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언급하고있는 이 책의 문제는 형식과 구성상의 밀도와 내용상의 오리지널리티 추구가 그 의도와 다르게 발생한 우연한 효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번다함과 내용적 앙상함은 우연적 결과만은 아닐 것이다.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측면을 두루두루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백과사전처럼 건드릴수록 정작 주제로부터는 멀어지며 자연히 말할 것은 조금씩 줄어들게되고 그러고나면 이제 남은건 결론도 무엇도 아닌 그저 그럴싸한 개연성을 지닌 마무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타일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손택의 말은 역시 틀리지않았다.

 

90년대에 나왔던 그의 주저에서도 그렇고 최근 몇년간의 저작들을 보더라도 이 저자는 늘 추상적인 이념이나 총체적인 현상보다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물질, 사람들의 행위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더 주목해왔다. 정치적 편향성이나 당파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않는 비맑시스트인 리버럴한 미국인, 그것도 처음엔 신체를 통한 테크닉을 연마해야하는 클래식 음악을 하다가 두뇌를 더 많이 써야하는 사회과학으로 전향한 백인남성 미국인 인문사회학자라는 이력은 그의 이러한 독특한 학문적 접근법을 이해할 수 있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성)의 측면은 다소 모호하기도하고 제한적이기도하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말할 때 현재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동학의 분석같은 거대 서사를 다루는 대신 그는 그 과정에서 실직 후 자신감을 잃고 방황하는 우울한 개인들에게 직접 다가가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발언을 분석한다. 새로운 도시 문화의 융성은 생산 양식이나 문화적 차원으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살'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들의 행위가 '돌'같은 물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분석보다는 묘사와 기술에, 특정 이념이나 사조, 주의보다는 즉물성에 천착하는 것이 이 저자의 방법론인 셈이다. 그래서 그에겐 공동체의 회복과 협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사회적 관계는 신체적으로 겪는 경험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당부와 함께 이른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체화된 사회적 지식 (embodied social knowledge)'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도 저자의 이러한 접근법은 다시 그러한 즉물성의 외부에 놓인 거대 서사를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그 비판의 대상과 효과 양쪽에서 모두 미온적이 되고만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신체적 동작으로 이루어진 의례의 체계화는 협력과 연대를 가능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례적 연대'가 왜 지금까지는 활성화되지못했을까. 의례적 연대가 활성화되면 이 책의 2부에 해당하는 협력을 약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조건들이 극복될 수 있을까. 다시 책의 2부로 돌아가보자. 확산되는 불평등, 파편화된 노동과 해체된 관계등은 협력이 약해진 원인인가 결과인가. 그리고 의례적 연대는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질문을 바꿔서 의례적 연대가 지금껏 활성화되지 못했다면 이들은 앞에 말한 것들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비협동적 자아의 출현은 약화된 의례화된 연대의 결과인가 원인인가.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제안들은 하나같이 다시 이 책의 결론 이전까지의 내용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실망한 대목은 또 한번 저자 자신이 고안해낸 '사회적 수리 social repair'라는 개념을 들고나올 때다. social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repair라는 구체적이고 동적인 심상의 이 합성어에는 사회라는 장으로부터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져나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물리적으로 지금의 세상을 개선할 능력을 갖춘 우월한 타자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암시된다. 그것은 저자같은 지식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위정자나 공권력일 수도 있다. 실제로 '국가 개조'라는 말이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곳에서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이 묘한 데자뷔 앞에서 당황하지않기란 어렵다. 자라보고 놀란가슴은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는 법이니까. 

…오타쿠계 문화의 도상이 여러가지 성도착으로 채워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의 오타쿠에게는 도착자가 적은가하는 질문에 대해


…그러나 동물화의 흐름을 염두에 두면 같은 현실을 훨씬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적인 욕구와 인간적인 욕망이 다르듯이 성기적인 욕구와 주체적인 ‘섹슈얼리티’는 다르다. 그리고 성인만화나 미소녀 게임을 소비하는 현재의 오타쿠들은 그 양자를 분리해 도착적인 이미지로 성기를 흥분시키는 것에 단순히 동물적으로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십대무렵부터 수많은 오타쿠계의 성적 표현에 노출되어왔기때문에, 어느새 소녀의 일러스트를 보고 고양이귀를 보고 메이드 복장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훈련되어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흥분은 본질적으로는 신경의 문제이며 훈련을 쌓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에 지나지않는다. 그에 비해 소아성애나 동성애, 특정한 복장에 대한 페티시즘을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로 받아들이는 결단에는 전혀 다른 계기가 필요하다. 오타쿠들의 성적 자각은 대부분의 경우 그와 같은 수준에는 도달해있지않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앞에서 말한 2차장작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얼마든지 도착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의 도착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인 기묘한 이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중에서154p.


그런가싶으면서도 선뜻 쉽게 납득되지않는 구절. 저 둘이 명확하게 구분이 가능한가?


영화 <마진 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속한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조직의 위계제 묘사였다. 처음 시장의 파국을 예측한 평직원 애널리스트인 주인공은 상사로부터 다시 내용을 확인받기위한 호출을 받고 같은 층내 상사의 방으로 들어가 직접 설명을 한다. 그러고나면 이번엔 과장이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를 한 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다. 그곳은 평사원인 주인공에게는 미지의 영역 같았던 곳. 훨씬 넓고 쾌적한 회의실에서 또 한번 예측이 틀리지않았는지 재차 확인한 뒤 세사람은 이번에는 회사의 CEO에게 보고를 하고는 한번 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맨 윗층으로 올라가고 그것도 모자라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이제 저 멀리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내려오고 그 안에서 회사의 현 경영자가 나타난다. 최고위직은 아예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건물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경제학이나 금융공학같은거 잘 모르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건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봐"

 

더 높은 직위의 책임자를 만날때마다 위로 올라간다는 간단하지만 명징한 위계제 묘사와 저 마지막 발언은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하다. 바로 월스트리트를 움직이는 특유의 문화적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한번에 관통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업무량과 상시적이고 만성화된 고용불안, 이러한 리스크를 감당하고 얻어내는 높은 연봉과 대규모 보너스를 통해 움직이는 월스트리트의 생리에 대해 카렌 호의 <호모 인베스투스>는 때로는 장황하다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정치하게 묘사한다. 저자가 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썼던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정 보완하여 발표한 이 책은 미국최고의 명문대 졸업생들로만 이루어진 월스트리트라는 조직이 알고보면 얼마나 바보같은 짓들을 하고있는지, 한마디로 바보들의 집단적 바보짓을 보고있는듯한 기분을 들게한다. 책 내용을 직접 인용하거나 요약하지는 않겠으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것이 (짐작은 했지만) 그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얼마나 즉흥적이고 단기적이며 무책임하게 결정되는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빈약한 논리와 논거를 그저 날 선 목소리로 보충하려는 팸플릿같은 반-신자유주의 책들과는 달리 꼼꼼한 실증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을 읽고 분노를 하지않기란 어렵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월스트리트의 직업 세계는 금융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의 한 극단적 살풍경이다. 문제는 월스트리트의 젊고 유능한 직원들이 하루하루 직장 생활을 통해 체화하며 내면화하는 이른바 '월스트리트적 감수성'이 이제 금융업 종사자만이 아니라 거의 다른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보편화된 삶의 원리가 되어 간다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그들의 즉흥적 의사결정 방식을 요약하는 문구인 '전략없는 전략'이 하나의 규범으로서 직업이라는 공적 세계만이 아닌 평범하고 사적인 생활 세계까지도 침범해 들어가고 있음을 누구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진 콜>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금융화된 세상을 꼬집고있는 어느 영화 제목처럼 우리는 '원리원칙없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헤아려보니 대략 90여권 안팎의 책을 읽었는데 무엇보다 올해는 3,4 년만에 다시 소설을 찾아읽게된 해다. 기억에 남은 책들에 대한 메모.


서준식 옥중서한

처음으로 완독을 했다. 십년전 처음 읽었을때 적었던 메모. '결코 두께나 모양새등을 가지고 얘기할 책은 아니다. 이 비루한 땅에서 신념을 실천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냥 읽고 또 읽는다.'
적군파

실망한 측면이 적지않았다. 사회학적 분석이나 논의가 거의 없는 편이고 좋게말하면 사회심리학, 내가 보기엔 그저 저자 본인의 주관적 견해나 해석으로 사건의 의미를 진단한다. 차라리 같은 주제를 다룬 일본의 르포 라이터들의 책 (관련자들의 수기나 인터뷰같은)을 읽고싶어졌다. 물론 하나도 번역은 안됐지만.
지식인의 표상: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식인의 의무'라거나, '열정적인 지식의 삶을 변절시키고 무력화하며 끝내는 파멸시키는 것이 있다면 바로 회피가 내면화되는 것' 같은 구절들.
불멸화 위원회

신간이 나왔다하면 거의 따라 읽는 저자들 중의 한명. 불멸이라는 불가능한 욕망은 종교를 낳고 나중엔 과학과 결탁해 괴이한 합성물을 낳는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하얀 피부 검은 가면

배를 엮다

올해의 페이지 터너. 빠르게 넘기며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서울을 걷다.

논문때문에 서울 도시개발에 대한 책을 제법 찾아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통해 전혀 몰랐던 의외의 정보를 많이 알 수 있었다. 덕수궁이 일제시대 꾸준히 파괴됐었다던가하는 것들.
인간실격/ 신햄릿

전자는 재독이긴 하지만 임팩트라는 면에서 올해 읽은 최고의 소설. 후자에는 동경팔경이라는 단편을 접할 수 있었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요시다 슈이치를 다시 열심히 찾아 읽었다. 참 부지런히 쓰는 작가
나는 왜 쓰는가

never let me go


A major critic says we'€™ve forgotten how to read. Does it matter?

How to Read Literature is a conservative book, a book that wants to conserve a tradition. “Like clog dancing,” it begins, “the art of analyzing literature is almost dead on its feet. A whole tradition of what Nietzsche called ‘slow reading’ is in danger of sinking without trace.” (I don’t agree, but more important, I don’t believe that Eagleton believes that it matters all that much one way or another. If Dickens and Derrida couldn’t save the world, five-page readings of the opening sentence in A Passage to India aren’t likely to do much better.)

니체가 했다는 ‘slow reading’에 관한 언급은 “Morgenröte. Gedanken über die moralischen Vorurteile” (여명 − 윤리적 편견에 관한 고찰)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다.

더군다나 우리, 책과 나는 ‘느림’ (lento)의 동무 사이이다. 나는 겉멋 든 ‘텍스트분석가’ (Philologe)였던 적은 없지만, 기실 ‘느린 읽기’의 선생이라는 면에서 그 범주에 속할 지도 모른다. 읽기뿐 아니라 쓰기도 느리게 하게 되었다. 지금 나의 버릇일뿐더러 나의 취향이기도 한 것은 (변태적 취향일지 모르지만) ‘서둘러서’ 읽는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릴 글만을 쓰는 것이다. ‘텍스트 분석학’ (Philologie)이라는 고상한 공부가 이 공부를 하는 하는 사람들한테 요구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하나이다. 곧, 한 켠으로 비켜서서 여유를 가질 것, 조용해질 것, 느려질 것. ‘텍스트 분석학’은 반드시 느리게 수행해야 할 예술이고, 느리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게 없는 예술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텍스트 분석학’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시대에 더욱더 바람직한 공부이다. ‘일’의 시대, ‘서두름’의 시대, 상스러운 ‘허겁지겁’의 시대, 단번에 ‘이루고’ 싶어하는 시대, 심지어 책마저도, 고전이든 현대의 책이든 어서 빨리 읽고 끝내고 싶어하는 시대에 ‘텍스트 분석학’이야말로 최고의 매력을 지닌 공부이고 최고의 자극을 주는 공부인 까닭이다.
‘텍스트 분석학’은 서둘러서 ‘이루는’ 공부가 아니다. 잘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공부이다. 느리게, 깊게, 주의해서, 살펴서, 생각하면서, 정신의 문을 살짝 열어 두고, 섬세한 손과 눈으로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공부이다. 참을성 있는 나의 동무, 책은 오로지 온전하게 자신을 읽어 주려는 사람, 곧 ‘텍스트 분석가’한테만 ‘제발 좀 나를 잘 읽어 줘’라고 하소연한다.

기실 요새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의 모든 공부는 이 ‘philology’를 위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왜 ‘philology’에 흠뻑 빠지는지, 어렴풋하게 이해가 간다.

 

Race, on the other hand, has been a more successful technology of mystification. In the US, one of the great uses of racism was (and is) to induce poor white people to feel a crucial and entirely specious fellowship with rich white people; one of the great uses of anti-racism is to make poor black people feel a crucial and equally specious fellowship with rich black people. Furthermore, in the form of the celebration of ‘identity’ and ‘ethnic diversity’, it seeks to create a bond between poor black people and rich white ones. So the African-American woman who cleans my office is supposed to feel not so bad about the fact that I make almost ten times as much money as she does because she can be confident that I’m not racist or sexist and that I respect her culture. And she’s also supposed to feel pride because the dean of our college, who makes much more than ten times what she does, is African-American, like her. And since the chancellor of our university, who makes more than 15 times what she does, is not only African-American but a woman too (the fruits of both anti-racism and anti-sexism!), she can feel doubly good about her. But, and I acknowledge that this is the thinnest of anecdotal evidence, I somehow doubt she does. If the downside of the politics of anti-discrimination is that it now functions to legitimate the increasing disparities not produced by racism or sexism, the upside is the degree to which it makes visible the fact that the increase in those disparities does indeed have nothing to do with racism or sexism. A social analyst as clear-eyed as a University of Illinois cleaning woman would start from there. (원출처는 여기)


읽다가 이거다 싶어서 좀처럼 안하던 짓을 한다. 위 인용에서 race를 '지역'이나 '종교'같은 걸로 바꾸면 우리 현실에도 어느정도 들어맞지않나. 정체성 정치란게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인듯.

"...내게는 이 편지의 대미를 장식할 화려한 미사여구나 방점이 없네. 다만 내가 해주고싶은 말은 이런 걸세. 아무리 귀에 달콤해도 비이성을 경계하게나. '초월적인 경험'을 주장하면서 자네로 하여금 무언가에 스스로 복종하라고 말하거나 자네 자신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에는 귀를 틀어막게. 남의 동정을 불신하고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더욱 중시하게. 남들 눈에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비치는걸 두려워하지 말게. 모든 전문가들을 그저 포유동물로 여기게. 불공정과 우둔함을 절대로 방관하지말게. 침묵은 무덤 속에서도 한없이 할 수 있으니 논쟁과 반목을 기쁘게 찾아나서게. 자네 가슴 속에 존재하는 대의명분과 변명을 늘 의심하게. 남들이 자네에게 맞춰 살아가길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자네 또한 남에게 맞춰 살아가지말게."

 

"진로를 쫓아가기보다는 진정한 삶을 살아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에 빠져 살아라.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산다면 그 과정에서 당신은 잃은 것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의 방식이 맘에 들지않는다면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라. 아무 생각없이 남의 생각을 되풀이하지말고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 그런다면 노동의 기쁨이 당신의 삶을 충족하게 채우리라." 콘라드 죄르지

논문쓰느라 레퍼런스용으로 읽은걸 제외하고 뽑은 올해 기억에 남는 책들. 남들 다 아는 책이고 다 읽어봤을 책들 뿐이라 살짝 부끄럽긴하다. 그만큼 올해는 공부하느라 글쓰느라 읽은 걸 빼면 책을 안읽었다는 얘기. 그만큼 솔직히 책에 질렸고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그대신 영화를 걸신들린듯 보긴했는데 책을 덜 읽다보니 부작용이 생기긴 하더라는. 공부하느라 읽은 책들 중에서 정말 중요한 책들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레퍼런스를 위해서 읽는 (대부분의 경우) 발췌독을 제대로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 너무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분야의 책목록까지 여기에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1.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처음으로 완독한 지젝의 책. 그를 영미권 독서계에 처음 알렸던 일련의 영화관련(실은 영화를 빌미로한 정신분석입문정도 되려나) 서적들도 몇줄 읽다말았는데 끈기를 갖고 이 책은 다 읽었다. 그나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 알아들을 수 있어서였을까. 그의 견결한 (사회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재림에 대한 확신에 대해 심약한 자유주의자는 좀 회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일정부분 공감하고 동의하는 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뭐 이를테면 이런 대목들

맑스가 행한 분석의 요체는 자유-평등의 법적-이데올로기적 매트릭스가 착취-지배를 은폐하기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후자가 행사되는 바로 그 형식이라는 점이다. 248

우리는 마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듯이 행동하는데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자유언론'에 대한 우리의 집념이라는 바로 그형식에 새겨져있는)어떤 보이지않는 명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할지 말해주는 것을 용인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요구하기까지한다. 오래전 맑스가 말했듯이 비밀은 형식 그 자체에 있다. 267

한가지 사족을 달자면 정말이지 난 왜 창작과 비평사가 아직까지도 표준 국어표기법을 무시하고 예의 자신들만의 그 원어에 '가까운' 표기법을 고집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메시지'를 계속 '메씨지'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계속 나올때마다 어찌나 걸리적대던지. 오렌지를 '어륀지'라고 한다고 그 영어발음을 체화하는게 아니듯이 원어에 가깝게 표기한다고해서 과연 뭐가 달라지는건지 난 모르겠다. 분명 창비사가 그런 표기법을 고집하는데는 나름의 자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출판사에서 앞장서서 일반 독자들의 혼란을 부추길 필요가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참고)

2.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장하준의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고정 독자라면 이 책의 내용들이 크게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 책은 일관된 그의 논리와 주장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이자 재확인이다. 신자유주의를 지탱하고 떠받지는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면서도 우리 식으로 말했을때 '진보' '좌파'라고 쉽게 분류할 수 없는 그의 이론적 포지션에 대해 정말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책. 이것이야말로 서구 아카데미에서 말하는 '리버럴'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즉 쉽게 말해서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크게 감흥을 얻었다거나한건 아니지만 영미권에서 또 우리에게도 여전히 크게 주목을 받는걸 보면 확실히 요즘 시절이 하수상하긴한가보다.

3. <문화정치 문화전쟁 : 비판적 문화지리학 >
안타깝게도 논문을 쓸 때 나름 영감과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음에도 레퍼런스 목록에 추가하지못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돈 미첼이 편집한 <evil paradises>였다. (번역본 제목은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당시 기숙사 방안에 차고넘치던 그 수많은 책과 논문들 중에 참고를 했으면서도 정작 레퍼런싱하지못한 책이 이거 한권뿐은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조앤 샤프의 페미니즘 지리학이나 아니면 데이비드 하비의 초기 저작들) 이 책의 경우는 정말 적지않은 도움을 얻었음에도 빼먹었다. 처음 리서치라는걸 해보고 논문을 써본 초보의 실수. 사실 그 책은 미첼이 편집한 일련의 논문 모음집이고 지금 소개하는 책은 미첼이 직접 쓴 '문화지리학'입문 정도 되는 책인데 좀 일찍 읽어두었으면 무척 쓸모가 많았을듯.

4. <무엇이 정의인가? :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
솔직히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았지만 2학기 내내 서구현대정치철학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서 (정작 강좌명은 다문화주의의 이론이었는데 어떻게 된게 수업 내용은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페미니즘 같은 정치이론에 가까웠다.) 샌델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 샌델, 맥킨타이어, 왈저같은 공동체주의자들, 그 반대편에 킴리카, 롤즈, 그리고 자유주의에 입각한 다문화주의자 혹은 그 지지자들 (또 누가 있었더라). 하여간 그래서 나는 샌델의 이름을 수업에서 듣고 거꾸로 나중에 한국에서의 인기를 확인했는데 여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샌델의 논의에 대한 비판도 있고 또 이 책이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한 분석도 들어있다. 무엇보다 샌델의 책에서 화제는 그 첫장에 나온다는 일종의 사고실험때문인거 같은데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런 종류의 사고실험은 언제나 늘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이미 저자가 쳐놓은 함정이자 덫이기 때문에 내 경험상으로는 아예 처음부터 그 덫에 대해 밝히고 들어가야 거기에 발이 빠지지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들도 그 점을 일관되게 지적하고있기도하다. 현실의 세세한 결을 다 제거한 그 심플한 설정은 애초부터 논의를 산으로 끌고가게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지금 샌델의 인가가 유난히 지금 한국 국민들이 정의를 갈구해서일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지금 한국사회가 정의가 무엇인가를 논할 처지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너무 성급하게 도착한건 아닌가하는 불경한 생각.

5. <사회보장의 발명>
정말이지 읽고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없는 가운데 요즘 읽고있는 책이다. 2011년을 국내외적으로 '저항이 시작된 해'라고 기억될 수 있다면 그 가시적 성과를 이루어낸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저항이 어디서부터 연원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론적 노력도 뒷받침되어야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 수많은 위시리스트를 제치고 집어든 책이라고만 말해두자.

6. <social capital>
이 책도 사실은 아직 다 읽은 책은 아니다. 귀국전 런던 갔을때 foyles에서 샀는데 서울행 비행기에서 좀 많이 읽어두려고했지만 난생 처음 비행기 멀미라는걸 하는 바람에 겨우 서문 정도만 읽고왔더랬다. 한국에서 지난 몇년간 가장 범람하던 기표가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일텐데 난데없는 (사실 난데없진않지만) '사회적'인 것의 범람에 대한 답을 얻을까싶어 집어든 책이다. 기숙사 내 옆방에 살던 중국인 친구가 바로 이 주제에 관해 논문을 쓰고있기도한걸 보니 영미권에서도 핫한 주제이지싶은데 나로선 하여간 이 느닷없는 사회의 바람이 여간 마뜩치않다. '우리는 늘 사회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왠 느닷없이 사회타령이냐' 이런 이유때문은 아니고 지금 이 오래된 언표의 유행은 차라리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곳에서 '사회'가 없어지고있기때문에 그것을 붙잡기위한 애처로운 몸짓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또 요구하고있는 '사회'가 과연 무슨 모양새를 하고있느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긴 마찬가지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아니면 비정부기구와 선의를 가진 시민들의 모임, 아니면 온갖 '소셜 네트워크'. 그럼 선택은 그냥 복고반동 혹은 '사회'가 아닌 '커뮤니티'로의 환원 이 두가지 아닐까? 사회적 기업을 논하기전에 완전고용에 대한 노력부터 선행되어야하는건 아닐까?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보다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종속부터 이야기하는게 순서는 아닐까? 300일동안 고공에서 투쟁을 하고도 정작 노동이 성취한 것이 많지않은, 아니 그렇게까지해야만 노동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국가에서라면 말이다.
   위에서 심약한 자유주의자라고 나를 규정해놓고 다시 이런 말하는게 겸연쩍긴하지만 지금 우리가 요구해야하는건 자본주의 체제 내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한 새로운 사회이다. 현재 범람하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담론은 현 시스템 내에서 계급갈등을 봉합하려는 절충적 시도일 뿐이다. 사회적인 것을 요구하는 동안 이미 사회는 사라지거나 졸아들고있다.

막상 이렇게되니 더 쓰고싶은 책도 많고해서 아예 읽은 책 목록을 아예 다 올릴까싶은 생각도 들지만 아직 미처 다 못읽은 책이 많아서 일단 여기까지만.


김진숙씨의 고공투쟁이 트위터상에서 시시각각 실시간으로 중계될쯤 내 기억으로는 인터넷 포털에서 단 한줄도 관련한 뉴스를 이른바 포털 첫화면에서 볼 수 없었다. 아마 그즈음 가장 포털에서 그리고 내 주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건 임재범 나치의상 논란 아니면 무한도전 가요제 같은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가수의 공연 의상을 두고 '논란'을 벌였고 주말 버라이어티에서 코미디언과 뮤지션이 팀을 이뤄부르는 노래에 열광했다. 트위터 속 세상과 인터넷 뉴스포털 속 세상 사이의 그 넓디넓은 간극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당황스럽기만했다. 이역만리에서 뉴스로만 접하는데도 이렇게 우울한데 얼마 지나지않아 다시 저 곳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이 또 한번 나를 지치게했다.

이럴때면 습관처럼 아무 책이나 집어든다. 아무 구절이나 그냥 무턱대고 읽는 것이다. 이번에는 컴퓨터에 저장된 제임슨이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티의 논리였을 것이다.

"물론 경제를 정치로 대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든 부르주아적 공격이 취했던 표준적인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을 자유에 대한 논쟁으로, 경제적 착취에 대한 논쟁을 정치적 대표에 대한 논쟁으로 뒤바꾸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순전히 정치적이거나 권력적인 문제로 보였던 것들조차도 그 배후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음이 훤히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같은 웹이어도 트위터 속 세상과 포털 속 세상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 미련해보여도 이것이야말로 그나마 한국에서 유효한 작업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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