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삼일간 한 십만원어치 정도되는 책을 사들였다. 싼값에 혹해서 헌책방에서 책을 제법 샀고 도서관에서 또 그만큼 빌려서 계속 읽고있으며 게다가 어제는 대형 서점에 들러 목록만 적어놓고 몇번을 들었다놨다했던 몇몇 책을 읽다가 돌아왔다. 우선 그동안 애타게 찾고있던 로빈 우드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와 로라 멀비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가 번역수록된 <여성/페미니즘/영화>가 모 헌책방에 같이 있음을 확인하고는 냅다 달려가 그외 눈에 띄는 이것저것 다른 것들까지 골라 사들고 돌아왔다. 다른데는 몰라도 서울은 그래도 아직 헌책방이 곳곳에 있어서 헌책이라기엔 상태가 양호한 책이 많고 더러 신간들도 눈에 띄었다. 이래저래 이번 겨울은 이렇게 책만 읽고있다.

2.이 겨울에 생각나는 두 장의 음반이라면 역시 카우보이 정키스의 <트리니티 세션스>와 콕토 트윈스다. 감히 천사의 목소리를 상상하게하는 (그래서 매시브 어택과의 작업한 곡 제목은 angel이었을까) 엘리자베스 프레이저는 딱 90년대 초반의 스타일, 그러니까 80년대의 촌스러움을 어떻게든 탈피하려고 애쓰지만 아직은 그래도 완전히 벗겨내지못한,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가, 클럽 사운드와 쟁글팝이 서로의 영역을 놓지않으려고 애쓰던 그당시 영국팝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해주는데 나온지 이십년이 넘거나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들으니 더 향수를 자극한다. 마치 요즘 금요일밤에 하는 tv문학관을 보는 기분. 그리고 <트리니티 세션스>는 이건 그냥 방에서 이불뒤집어쓰고 듣기 딱 좋은 이 계절의 사운드트랙이다.

3.영화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순수한 쾌락이자 오락으로 남아야하건만 지금 이 시대의 영화는 거대한 도박판이 되어감과 동시에 모든 취향과 개성을 사그리 긁어모아 한번에 섞고 뒤집어 끓여내고는 그걸 억지로 들이미는 격인지라 한마디로 요즘 나오는 영화를 보며 자신의 취향을 얘기한다는건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로만 폴란스키의 아파트 삼부작, 그리고 조지 로이 힐의 데뷔작인 <헨리 오리엔트의 세계>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영화에 관해 쓰고싶은 욕구가 생겼다.

4.아, 그리고 우연히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그동안 방치되고있던 웨스 앤더슨의 레퍼런스에 관한 포스트를 전부 번역해서 다시 올려두었다. 번역을 다시 함과 동시에 문맥도 고쳐놓은 다음 다시 읽어보니 다시금 앤더슨에 관한 애정을 재확인했다. 나 역시 이런 '취향'(또 취향!)의 영화들이 좋고 이 리스트 덕에 옛날 영화들을 더욱 열심히 찾아보게되었으며 더 좋아하게됐다. 

5.로빈 우드는 가장 난해한 영화이론가는 아닐지몰라도 가장 정교한 이론가임은 분명하다. 영화를 그것도 영화 내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는게 과연 어떤건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있던 것을 그의 글을 통해 비로소 실감했음은 물론 아카데믹함이 다룰 수 있는 것의 광범함과 깊이에 솔직히 질겁을 하면서 동시에 탄복했다. 불과 얼마전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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