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bfi가 의뢰한 자국 영화사 다큐멘터리의 일본편(1994)을 연출한 오시마 나기사는 지금도 서구에서 여전히 통용되는 몇몇 감독 중심의 일본영화사 개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본편 내내 관철한다. 작가의 창의성을 억압하려는 체제와 제도에 대항한 응전으로서의 일본 영화사 전개가 그것으로 이는 더 크게 보면 일본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투영하는 매체로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감독론이나 일본(영화)적 특수성보다는 제작방식, 즉 온전한 창의성 발현을 위한 독립 제작 방식이 매우 일찍부터 일본 영화계에 있었음을 내세움으로써 몇몇 거대 스튜디오 중심의 주류 일본영화사 또한 기각한다. 이미 서구에 널리 알려진 거장 감독들의 이름은 구로사와 정도를 빼고는 직접 언급되지 않으며 대신 그가 주목해온 당대의 젊은 작가군의 이름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36년 2.26사태 하루 전 감독협회가 설립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늘 체제로부터의 종속 시도와 영향력 아래 있었던 일본 영화는 전시 체제가 본격화된 이후 강화된 검열과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서 개인과 가족 생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오시마는 오즈 작품들의 화면을 삽입하고는 이어 오즈가 각본을 썼던 샐러리맨 영화 <끝없는 전진>을 두고 '자멸을 향한 끝없는 전진'이라 쏘아붙이기를 주저않는다. 고질라 등의 특촬물 역시도 전시 영화를 만들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쌓여 나오게 됐다는 코멘트까지 오시마의 이러한 전복적 관점은 주류적 시각에서의 일본영화사 이해의 협소함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자국 영화사를 개관함과 동시에 자신의 감독 이력을 회고하는 오시마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인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여자들의 동산>(1954)을 보고서 비로소 감독이 되겠다는 확신을 했노라고 고백한다. 60년 안보조약 사태를 통과하면서 일본의 전근대성 및 봉건성으로부터의 해방을 모색하기 위해 선택한 쇼치쿠 퇴사와 창조사 설립 이후의 독립 제작 방식은 다른 젊고 유능한 감독들로 하여금 이 대열에 합류하게한다. 요시다 기주, 데라야마 슈지, 하니 스스무, 오가와 신스케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ATG같은 제도도 이 즈음에 포함된다) 그의 관점에서는 핑크 영화나 로망 포르노 또한 자본과 체제로부터 해방되기위한 일련의 뉴웨이브 흐름 안에 위치한다.

 

하지만 72년 연합적군 사건 이후 학생운동이 퇴조하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야쿠자 영화, 그리고 가족과 고향으로 회귀하는 야마다 요지의 보수적인 가족 영화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런 가운데 <감각의 제국>을 둘러싼 스캔들과 무죄 선고로 체제에 균열을 내는데 성공했던 오시마는 지나친 자국 중심적 가치관을 비판하기 위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를 기획했노라고 말한다. 60년대 내내 본인이 자이니치에게 집중했듯이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을 반영해 외국인의 시각으로 일본 사회를 조명하는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뜻에서 향후 일본 영화가 일본적인 것에서 벗어난 순수한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는 마지막 멘트와 함께 다큐는 끝을 맺는다. 

 

60년대에 일본 사회를 가열차게 비판한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오시마는 이렇듯 가장 코스모폴리턴적인 필름메이커이기도 했다. 폐쇄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일본 사회를 환멸했던 그에게 영화는 예술이면서 (적어도 60년대까지는 분명히) 정치였고 해방의 도구였다. 그런 점에서 7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품 활동의 간격이 길어진 이유는 (길었던 소송과 건강 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자신의 작품들이 비판의 도구로서 무력해졌다는 회의보다는 오히려 소기의 목표를 일부 달성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자신이 홀로 짊어져야했던 소재와 주제들을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젊은 감독들이 저마다의 스타일과 방식으로 각자 펼쳐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빠르고 힘찬 내레이션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낙관적 어조는 <맥스 내 사랑>(1986) 이후 장편을 내놓지 않은지 벌써 수 년이 되어가는 90년대 중반 시점에서도 그가 여전히 영화에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럽인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면 톰 리플리는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한다.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렇듯 시리즈의 시작부터 그는 사실상 도피중이었다. 도주야말로 리플리의 삶의 본질이고 범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36년간 범죄자이자 반쯤은 예술가같은 리플리가 유럽 각지로 도망치며 벌이는 범죄 행각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리즈의 첫번째 소설은 후반부 그러니까 프레디 마일즈 살인 이후부터 그런 리플리가 도주를 하지않고 이탈리아에 계속 머무르면서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태양은 가득히>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도 마찬가지다.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위한 리플리의 몸부림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액션이 없이 느리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몇 번의 이동 그리고 경찰, 디키의 아버지, 탐정과의 대면 등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도망가지 못한 채 정체되고 답답한 상황에서의 조마조마함은 아직은 초보 범죄자였던 리플리를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몰고간다. 후반부의 핵심은 이런 가운데 두어번 이어지는 위기-해결 패턴의 반복인데, 그 해결이 리플리의 영리함 때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스릴러 소설로서 현재 시점에서보면 점수가 깎일만하다.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다한들 이십세기 중반에 이렇게 우연만으로 심지어 지문 대조 한번 없이 위기를 탈출하는 방식은 너무 손쉬워 보일 수 밖에 없고 하이스미스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두 달 동안 수사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건 헤아릴 수 없을만큼 계속 이어진 행운 덕분이었다. 디키인 척 가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행운이었다. ... 그의 행운은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다. 

거기에 이 소설의 가장 급박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마지의 우둔함으로 해결된다는 점도 되짚어볼만하다. 본문 내내 리플리는 마지를 향한 혐오감을 내비칠 뿐 아니라 자칭 작가라곤 하지만 그러기엔 지성보다 감성만 지나치게 앞서있는 그녀의 우둔함을 시종일관 조소한다. 거의 유일한 주요 여성 배역을 이렇게 설정한건 하이스미스 본인의 단편집 제목처럼 '여성혐오' 내지는 비하처럼 보일만하다. 실제 자신과는 정반대 타입의 여성 작가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하이스미스는 그와 대비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한건 아닐까.  

리플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직접적 언급이 없긴하지만 그 점을 괄호친다면 이 소설은 호모소셜의 유지를 위해 여성이 배제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리플리와 디키가 모종의 호모소셜한 관계를 짧게나마 유지했다고 본다면 이제 그 방해자가 된 마지는 디키와의 연인 관계만 끝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 결정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에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깝게 다가갔음에도 끝내 그를 통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지적 작업)에 실패함으로써 진실을 알고있는 유일한 두 사람 리플리와 디키 사이에 끼지못하고 떨어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브 세지윅이 주창했던 '호모소셜'이란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로서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러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디키와 프레디라는 피살자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남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냥 남성이 아니라 영민하며 예술가적 기질까지 갖춘, 지금봐도 여전히 선구적인 캐릭터인 리플리에 비하면 현저히 어리석은 마지의 등장과 농락 그리고 배제 과정은 이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동성간의 내밀하고 강고한 연대라는 세지윅의 가설을 일부 증명해내고 있다.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의 부흥과 맞물리는(혹은 그보다 조금 이전이었던) 집필 시점에서 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며 그렇지 않은 여성을 상상하기는 힘들다는 식으로 말한걸 보면 하이스미스도 나름의 호모소셜 가설을 갖고 있었던듯하다. 다만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했다기보다는, 이성은 결코 이해할 수도 그래서 인지할 수도 없고 따라서 입장 자체가 불가한 동성간의 긴밀하고 점성력 높은 유대와 사교 관계를 재현하려 한 것 같다.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을뿐.

나는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활동적이거나 무모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의 활동이 육체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원동력으로 보자면 분명히 남자들을 앞서기까지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자들이 사람들이나 상황을 이끌기보다는 거기에 떠밀리며, "하겠다"나 "할 작정이다"보다는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중 161p

내밀하지만 단단한 유대가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 해체되고 파국을 맞는다는건 그래서 흥미롭다. 디키와 톰의 껄끄러웠던 첫만남 그리고 서서히 갈등이 쌓이던 끝에 벌어진 살인 장면은 배타적 젠더라는 유일 요소만으로는 호모소셜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디키와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회화를 감상하기 시작하던 리플리처럼 취향은 노력을 통해 곧잘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엔 이미 계급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이는 젠더만으로는 애초부터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향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심지어 나이까지 불문한(<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남성간의 연대와 그 해체로 인해 리플리는 계속 도주한다.

이 날은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정원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그 후부터 쉬지 않고 열일곱 시간을 써내려갔다. 한밤중에 소설이 완성되었다. 일기를 보니 몹시 지쳐있었던 듯 딱 한마디, '아주 좋다'라고만 써져있다.

 

…레이는 오랫동안의 공백기를 깨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레이는 칼라마주로 가는 대신에 병원 일을 주말로 옮기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주 닷새를 하루 온종일 글을 썼다. 미시간에서 도서관학과의 수업이 시작될 무렵에 레이는 오십 페이지에 달하는 새 작품을 잡지사에 우편으로 부치고 나서 두 작품을 더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몽당연필을 찾아서 이 신문의 가장자리, 하얀 여백에 글을 썼지.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건 암같은 광기였어. 그건 일도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니며, 사조의 일부도 아니었지. 그냥 그런 것이었어. 그게 다지.

 

겐조는 다다미 8조의 넓은 방 한가운데에 다리가 낮은 작은 상을 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책에 글을 썼다.
...파리 머리같은 글씨로 되도록이면 많은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그때의 그에게는 무엇보다 유쾌하고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또 그의 의무이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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