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xist-feminism에 의하면 현대핵가족은 자본주의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세대적인 면에서의 인간 재생산과 매일 매일 노동자의 생계유지라는 이중의 과정을 포함한 노동력의 재생산과정 그리고 여성을 잠재적인 예비 노동군으로 사용함으로써(그만큼 쉽게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국가가 비용할 부담을 대신 짊어지는 효과를 갖는다." 물론 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여러가지 비판을 받는다. 우선은 실재 존재하는 가족구성원간의 자발적이고 진실한 애정과 연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는 과연 정말 다른 가족 유형이 존재하느냐의 여부, 엥겔스의 표현을 빌면 단혼핵가족이 자본주의의 전형이고 주류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등등. 하지만 어떤 이론도 모든 걸 설명하지는 못하는법이고 맑시스트-페미니즘도 그중의 한가지 관점인데 충분히 설득력있고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베의 항구마을.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둘이 사는 어느 가정. 오늘도 아버지인 누마타씨의 관심은 아내보다는 아들들이다. 공부를 썩 잘하는 첫째 아들 신이치는 올해 명문인 세이부고에 들어갔다. 문제는 둘째인 시게유키, 공부에 영 소질도 없고 뜻도 없어보이는 막내 때문에 고민하던 누마타씨는 결국 가정교사를 고용한다. 정작 본인은 삼류대학을 그것도 7년째 다니고있으나 가정교사로서는 꽤 유능한 요시모토. 그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교육법(?)으로 시게유키를 다루기 시작한다. 시게유키는 서서히 학교에서 내외적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성적도 올라서 결국 자신이 원했던 진구 고교가 아닌 형이 다니고 있고 부모가 원하는 세이부고에 진학한다. 반면 신이치의 학교성적은 조금씩 하락한다. 시게유키의 입학이 결정되고 난 뒤 가족은 기념으로 요시모토와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는데 그 자리는 결국 괴상하게 끝나고 요시모토는 사라진다.

이건 정말 영화의 10분의 1도 다루지못하는 개괄적인 줄거리일뿐이다. 영화는 디테일이 강하고 세밀해서 작은 사건 하나도 놓칠 수 없고 등장인물들 모두 너무 세심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줄거리와 상관없이 그저 그들의 행동을 보는 것만도 흥미롭다. 영화를 보면서 위의 맑시스트-페미니즘의 기본 가정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는데 성실히 회사에서 일하는 근면한 아버지, 열심히 공부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을 '반드시' 해내야만하는 자식, 그런 그들을 먹이고 돌보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주고 부자 사이의 갈등을 완충해야하는 어머니까지 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을 찾기는 쉽지않다.

각자의 위치에서 흩어져살다가 밥을 먹을때만 비로소 같이 모이는 문자 그대로의 '식구'가 그나마 현대 가족에 가장 들어맞는 개념임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클라이막스인 마지막 식사장면을 포함해서 이 영화에는 유난히 밥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그림이 정곡을 찌른다. 이 집안의 식탁은 옆으로 길고 폭이 좁은 특이한 모양을 하고있어서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바싹 붙어앉아야만한다. 이 구조가 얼마나 상징적인지는 우리나라 tv 연속극과 비교해보면 된다.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식탁의 구조는 대개 가부장이 혼자 앉고 양옆으로 다른 식구들이 앉는 형태로 이 구조에서는 가부장의 얼굴만이 정면으로 보인다. 반면 이 영화의 식탁에서는(공원의 벤치를 떠올리면 쉽다.) 가족 구성원 모두의 정면을 볼 수 있는데 팔을 뻗기도 불편해보일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앉은 그들을 보고있으면 '가족은 결국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일뿐'임을 확인하게된다.

문제의 마지막 식사장면. 막내의 진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누마타씨는 다시 요시모토에게 이제는 큰 아들인 신이치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요시모토는 삼류 대학생이 일류 대학을 목표로하는 학생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사양하지만 누마타는 물러서지않는다. 정작 주인공인 시게유키는 안중에도 없이 누마타는 계속 신이치에게 놀지말고 쉬지말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다가 결국 '사고'가 터진다.

클라이막스가 지나고 마지막 장면은 명백히 암시적이다. 낮잠이 들었던 누마타 부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에 눈을 뜬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누마타 부인은 창가로 다가가고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시게유키가 원하는 고교 진학을 한다고해서 이 가족이 바로 행복해질리는 만무하다. 이제 목표는 신이치의 대학 진학으로 바뀔테고 그 목표가 완수되면 다음은 시게유키의 대학진학, 신이치의 취업, 결혼으로 계속 이어지며 이 가족의 미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저쪽으로 치워둔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거부하지 못하는 어머니. 고용인인 부모에게는 건실한 가정교사이지만 실은 특별히 가르치는건 전혀 없는 그저 감시자이자 훈육자일뿐인 요시모토, 그리고 성실한 가장이라는 겉모습 뒤로 계란 프라이를 쪽쪽 빨아먹는 아버지 누마타의 이상한 행동들은 과연 우리가 한 집에 산다고해서 진정 제대로 소통을 하고있는가를 되묻게한다.(이래저래 이 영화에서는 먹는게 어쨌든 중요하다. 요시모토는 물이든 음료든 소리를 내며 무조건 원샷으로 들이키는데 이 액션이 여러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요시모토와 누마타 이 두 남자가 이 집안의 성인 남자들이라는 점)

애초부터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가깝다. 국가는 중산층이라고 호명함으로써 당신을 체제에 편입시키고는 현실에 안주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눈앞의 부조리에 눈감게 한다. 중산층이 되면 이제 그들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부분이 되어 그것이 잘 굴러가게끔하는 바퀴 역할을 할 뿐.

좋은 영화의 기준이 여럿 있겠지만 지금 영화를 보는 당신은 어떠냐고 계속 묻는 것도 그 기준의 하나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좋은 영화다.

덧1. 어처구니없게도 영화에서 누마타 부부가 차에서 대화를 나눌때 흘러나오는 라디오는 우리나라 뉴스 방송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어쩌구저쩌구.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걸 계속 틀어놓는 것도 웃기고 그 뉴스 내용도 웃기고, 우리 말이 흘러나오는 상황 모두가 다 웃기다.

2. 마츠다 유사쿠 얘기를 안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평범한 역할인데도 예의 마초기질(?)이 흘러나오는데 요즘 활동하는 그의 아들래미를 보면 그건 물려받지않은듯. 근데 류헤이는 아버지만큼의 인기는 없는건지.

어떤 필요에 의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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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장 현실적인 가족이 등장하는 tv드라마는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닐까생각합니다. 우선 이 시트콤은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제외하고는 '온전한' 확대가족이 나오는 몇안되는 케이스죠. 조금만 돌아봐도 젊은이들을 타겟으로하는 트렌디 드라마에서라면 거의 다 핵가족이, 그것도 부족하면 아예 <케세라세라>의 에릭처럼(정말 비호감 캐릭터죠) 양친이 모두 사망해서 '걸치적거릴게 없는' 쿨한 독신이거나 아니면 어딘가 '결여된' 가족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이킥>에는 명목상의 가부장을 우두머리로 삼대가 같이 사는 확대가족이 그것도 이제는 대놓고 서열까지 정하는 지경에 이른 가족이 설정되어있죠. 오늘 에피소드만봐도 또 그 어처구니없는 이씨집안 트레이닝복이 또 나왔죠. 물론 이 시트콤은 기본이 코미디지만 앞서말했듯 그러면서도 리얼리스틱한 가족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역학관계들(시아버지와 며느리,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동생과 며느리, 자식에 대한 부모의 편애, 형제간의 알력 등등)을 보고있으면 이건 무슨 전쟁터가 따로없지요. 권력을 향한 의지가 불을 뿜지않습니까.


제게 가장 흥미있는건 역시 허울뿐인 가부장 '순재'입니다.(이건 어디까지나 캐릭터이름이니 존칭을 붙일 필요없겠지요.) 이 사람은 다른때보면 괜찮은거 같아도 가끔씩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갑자기 이씨집안이 어쩌고 어른이 어쩌고하면서 권위를 행세하려고할때죠. 권위의 행사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너무 뜬금없고 일관적이지않아서 문제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순재가 권위적인 가부장이 되려고하면 할수록 사람꼴이 정말 우스워진다는데 있죠. 이씨집안 트레이닝복이 처음 나왔을때 에피소드를 다시보면 그때 그의 대사는 정말 들어주기 불편할 정도입니다. "1번이 숟가락을 들면 그 다음에 2번이 그다음에 3번이 하는 식으로. 알겠나?" 그때 이씨집안 남성들의 이름은 사라지고 전부 번호로 호명되면서 순식간에 "쪽수"로 전락합니다.(가족 전체가 중대가 되는 순간이랄까요.) 그 에피소드의 끝은 얼마나 허망했습니까. 그게 무슨 가부장의 권위겠어요? 권력이란걸 행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쪽이 알아서 받아들이면 괜찮지만 스스로 자기가 자기 권위를 남들에게 인정하라고 자기 입으로 강요하고 무조건 거기에 따르라고하는것만큼 웃긴 상황도 없지요. 이 캐릭터를 몇십년동안 아버지를 연기한 한국의 대표적인 가부장인 이순재씨가(여기선 실제인물을 지칭하므로 존칭을 씁니다.) 연기하는건 그래서 전복적이기도합니다만 글쎄요. 매번 순재는 식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면박을 주고 발로 차고 가족들은 그러려니 받아들입니다. 암묵적인 승인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남편이, 시아버지가, 정말 무서워서가 아닌거죠.


역시 이순재씨가 나왔던 11년전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이 결국은 "목욕탕집 여자들"을 이야기했던것처럼 이 시트콤도 유심히 보면 순재를 비롯한 이씨집안남자들보다는 문희와 해미라는 여성캐릭터가 더 흥미진진합니다. 상기했듯 순재는 명목상의 가부장이고 집안의 큰 어른이고 주인이지만 이 집안의 실제 권력자는 해미죠. 이 시트콤을 거의 거르지않고 계속 따라오신분이라면 충분히 알 겁니다. 민용이 사는 방을 보수공사할때 모든 결정사항을 준하와 문희는 학회참석차 중국에 있던 해미에게 물어보죠. 게다가 순재보다 해미가 더 실력있는 한의사라는 사실은 온동네 사람들도 다 알고있고 심지어 순재도 인정하죠. 해미가 실권이 없었다면 그렇게 대놓고 시어머니를 무시할 수 있을까요? 준하는 집에서 노는 남자고 민용이는 사실 어쩔 수 없어 이 집에 있는거지 매번 이 가족에서 이탈하려하고 10대인 두 손자들이 이씨집안의 부흥은 내 손안에 달렸다며 살아갈 아이들도 아니고. 한편 시어머니인 문희로 시선을 돌리면 그녀는 이씨집안에 바친 일평생을 이제는 꽤나 자주 후회하고 불평합니다. 손자들에게 그저 밥만 열심히 해준 할머니로 기억될거라는 문희의 말이 저는 꽤 아프게 들렸습니다. 몇십년동안 같이 살면서 늘 무시만 받으며 살아왔다는 문희의 한탄은 요즘 왜 그리 자주 나올까요.


대개 우리는 가족을 하나의 보이지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가족을 보고있으면 가족이란 어쩔 수 없이 혼자이며 개인일뿐인 사람들이 느슨하게 그것도 겨우 풀로 이어붙여놓은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묶여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기존에 제가 갖고있던 생각이 시트콤을 보며 좀더 구체화된 것에 불과하겠지만요. 가족간의 연대를 구성하고 유지하기위해서는 그것도 노력이 필요한거 아니겠습니까. 저절로 되는건 아니죠. 그래서 저는 이 시트콤을 보면서 현실을 사는 우리네의 가족과 저 이씨집안을 비교해보면서 진짜 가족(이란 개념이 있다면)은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해봅니다.


<향수>의 첫장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숨은 이면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하수시설이 정비되지않은 도시는 온갖 악취가 범벅된 불결함 자체였다. 그 악취가 퍼지는 시장 한귀퉁이에서 태어난 그루누이에겐 정작 체취가 없었으니 곧 그는 유령인 셈이다.(그러니 뒤에서 다가가도 모를 수 밖에) 텅빈 내면을 가진, 차라리 내면이 없다고해야할 사내의 그 텅빈자리엔 '결정의 에센스'를 만들겠다는 집요한 욕망하나만이 자리하고있다.

영화에서도 꽤 정성들여 묘사된 옥닥복닥한 18세기 파리 시내의 정경도 인상적이지만 이 소설의 초점은 그렇게 모양새를 갖추어가던 근대의 형성에, 그리고 그와 함께 동반 출현하기시작한 전문가의 존재에 있다. 분명 정상은 아닌듯한 행동의 연속에, 도저히 이뻐할래야 이뻐할 구석하나없는 기괴하기만한 그루누이는 오로지 자신의 기술로만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전문가의 극단을 보여주기위해 설정되어있다. 세상은 갈수록 분업화 전문화되고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쏟아부어 얻어낸 기술로 인정을 받아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전문가의 존재는 근대의 특징이자 진정한 개인의 등장이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자기 기술의 독창성을 위해서라면 못할게 무엇이며 그걸 막는다고 두려우랴? 따라서 영화말미 자신이 만든 '최후의 향수'의 성능을 확인한 그루누이로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그의 안중에 부나 권력이 들어앉았을리가 없잖아.

사실 이 소설을 읽고난 후 왜 쥐스킨트는 이 소설 이후 이만큼 두툼한 소설을 쓰지못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이었던 <좀머씨 이야기>의 책 날개에는 작가가 철저히 은둔중이라고 써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향수>를 읽고나자 결국 이 소설은 쥐스킨트가 자기 얘기를 한 것임을 알았고 앞의 질문에 대한 해답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쥐스킨트는 속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철저한 단독자이고싶었던거다. 소설이라는 자신의 직능과 직무로만 존재하고 그 외에는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혼자이고픈 소설가와 궁극의 향기를 얻으려했던 그루누이는 쌍둥이다. 시정잡사와 얽히지않은채 물끄러미 뒤에 숨어있다 세상에 툭하니 책한권을 던져놓고는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대하는지 훔쳐보며 즐거워하는 소설가와 자기가 만든 향수에 미쳐버린 인간들을 바라보며 웃음짓는 향수제조자는 과연 다른가? 그렇다면 그처럼 결국 자기 얘기를 모두 털어놓은 작가가 더이상 무슨 다른 하고픈 말이 있을 수 없지. 그렇다면 첫출간 20년후 영화가 나온 지금 쥐스킨트는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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