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오기 지적부터. <오징어와 고래>를 만든 이는 노아 봄바흐가 아니라 노아 바움백이고 데이비드 피스의 소설에 나오는 실존인물 주인공의 이름은 브라이언 클라우가 아니라 브라이언 클러프다.

이 책에서 첫번째 재미있었던 부분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보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불러오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한 혼비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대개의 모든 일반독자들을 포함해서 책읽는걸 반쯤은 업으로 삼고있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포함)들이 크게 공감하리라 생각되는데 읽지도않을 책을 잔뜩 사들이고는 읽지못한 것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과 무엇을 읽을까하는 고민, 읽고도 내용을 기억하지못하는 나쁜 기억력에 대한 한탄, 그리고 책을 읽지못했던 구구절절한 이유와 온갖 핑계들까지. 유명작가라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군하며 살짝 위로가 되었다고해야할까.

혼비는 여기서 '문예소설'을 말하고있는데 아무래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본격문학'을 지칭하고있는듯하다. 그도 대개 문예소설은 재미가 없다고 토로하고있다.

무릎을 치며 가장 크게 공감했던 부분은 퇴고과정에서의 소설분량 덜어내기와 다듬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짧게 줄이는 것이 작가적 역량이자 미덕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인가본데 여기에 대해 혼비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있다. 왜 그렇게 줄이고 줄였는데도 꼭 마지막 최종 결과물은 딱 두툼한 장편한권정도가 되는가. 작가가 길게 쓰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라면서 그는 찰스 디킨스의 예를 들고있다. 그러면서 그렇게 줄이는걸 강조하는 것은 원래가 소설을 쓰는 일이 그리 남들에게 내세우고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기때문에 육체노동자의 그것에 준하는 치열함과 엄격함을 작가에게 강요한 결과라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소설쓰는 일이 사실 그리 남자다운 일이 아니라니. 이 얼마나 솔직하면서도 놀라운 통찰력이란 말인가. 그럼 맞는 말이긴하다. 아닌게아니라 어찌보면 남들 이리저리 뛰어다닐때 책상에 앉아 깨작깨작 종이를 채워나가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풍경은 밥벌이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는 풍경과는 거리가 살짝 멀어보인다. 길게 써야한다면 길게 써야지 그걸 편집과정에서 굳이 또 줄이고 줄일건 뭐냐. 또한 이건 작가의 자존심의 문제와도 결부되는데 죽어라고 고생고생해가며 쓴 글을 듬성듬성 쳐내면서(혹은 족족 뽑아내면서) 편집자들은 겨우 냉혹한 시장논리를 들이민다. 그 시장논리중에는 요즘 독자들은 긴 글을 읽어내지못한다는 푸념도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그 주범으로는 영화와 tv 그리고 새로운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인터넷이 용의선상에 올라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 독자들의 인내심이 약해진건 어느 정도 사실인듯하고 그런 바람에 인터넷상에서 요즘 시쳇말로 '난독증'에 의한 살풍경을 자주 목격하기도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인터넷상에서 그렇게 치고박고 할때의 '난독증'은 의학용어로서의 난독증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저 자기가 읽고싶은대로 읽고 남의 말은 그냥 무시하는건데 이건 난독 자체가 문제라고는 결코 할 수 없고 그저 문해력 (literacy)의 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책 자체는 재미있기도하고 없기도한데 우선 재미가 없는건 혼비가 소개한 책의 절반쯤은 우리나라에서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책들이어서 책 내용이 어떻다고 말해도 와닿지가않아서, 둘째는 역시 번역상의 문제인데 저자의 문체를 제대로 못 살린건지 아니면 아예 엉뚱하게 오역을한건지는 원문을 보지않았으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건지 문맥을 쫓기 어려운 문장들이 더러 눈에 보였다.(이것도 내 '난독증'때문인가?)

그의 독서취향은 아무래도 문학에 쏠려있다. 그리고 나는 요즘 좀처럼 문학을 읽어내지못하고있는데 이 책을 보니 영어권에서는 그야말로 재미있(어보이)는 문학책이 여전히 쏟아져나오고있나보다. 그쪽 출판계의 특징이 논픽션도 픽션처럼 써서 딱히 어느 쪽으로 분류하기힘든 책들이 많고 대개는 그런 책들이 더 재미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책들도 그런 류가 많고 다 읽고싶었다. 앞서말했듯 혼비도 '문예 소설'에서는 재미를 찾지못하고 장르소설과 논픽션들을 높게 쳐주고있다. 영미권이야 워낙에 장르소설과 논픽션의 전통이 유구하고 그렇다보니 좋은 책들도 많이 나오고있을테고 우리는 여전히 문학하면 본격문학이고 거기에 동시대의 현대문학은 도서 정보나 수요를 감당해낼 번역자의 부족같은 것 등이 겹쳐 소개가 덜되지않나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며 놀란건 의외로 혼비가 언급하는 책들이 적지않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있다는 점이었다. 몇 권은 적어놓았으니 향후 읽을 기회가 있겠지.

'레예스의 30미터짜리 캐넌슛보다 더한 감격을 전해준 책은 이번 달에 없었다'거나, 서포팅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한데 대한 흥분을 떡하니 독서칼럼에 적는 열혈 구너 인증도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였음을 밝혀둔다. 지난 시즌 3년만에 두번째 챔스 준결승에 올랐으니 5월에도 책은 덜 읽었겠군.

1968년, 영국프로축구 2부리그 최하위를 달리던 더비카운티의 새감독으로 부임한 브라이언 클러프는 리그 우승으로 팀을 승격시킴은 물론, 71-72시즌에는 급기야 1부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지만 보드진과의 불화 끝에 라이벌인 리즈 유나이티드로 옮긴다. 그러나 시즌 개막후 충격의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끝에 단 44일만에 감독직에서 해임된다.

위대한 영국인 축구감독 중 한 명인 브라이언 클러프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겪은 44일을 사실과 픽션을 섞어 구성한 데이비드 피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the damned united>는 또 한편의 영국산 축구 영화이지만 피치 위가 아닌 터널 뒤의 또 다른 전쟁을 조명한다.

화려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뒤에서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감독과 보드진간의 갈등, 감독과 선수간의 불화, 그리고 라이벌간의 경쟁까지 여러 층위의 갈등이 겹쳐지고 이 알력다툼 속에서 클러프는 결국 홀로 남겨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무시한(혹은 그랬다고 굳게 믿는)리즈의 감독 돈 레비를 향한 막연하고 원초적인 적의가 그를 위태롭게 만든 주범이다. 국가대표팀으로 옮기면서 클럽을 떠났다고는하지만 리즈 유나이티드는 여전히 레비의 소유물이다시피한데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않은 라이벌 팀으로 옮겼으니 클러프로서는 제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격이다. 입심좋고 영리하며 유능하지만 그 능력 이상만큼의 야망을 품은 독불장군 클러프는 그렇게 값비싼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겨우 현실감각을 되찾는다.(그리고 그의 진정 위대한 업적은 사실 이 이후에 이루어진다.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 재임기간동안 만들어진 47경기 연속 무패기록은 훗날 아스날에 의해 깨지지만 지금의 챔피언스리그격인 유로피언 컵 2연패는 지금껏 그 어느 팀도 깨지못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맡기도했다.) 

원작은 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기록과 사실에만 기반하지않고 당시의 소문들, 관련된 이들의 의견 그리고 무엇보다 클러프라는 캐릭터를 무척 입체적으로 그려냈는데(아직 읽어보지못했고 기사에 따르면 그렇다고한다.) '실화 중독자' 피터 모건은 영욕이 확연히 대비되는 68년 더비카운티 시절과 74년 리즈에서의 44일이라는 두개의 시간대를 시종일관 교차함으로써 이야기에 탄성을 부과하며 논픽션을 픽션화해내는데 성공하고있다. 이미 시작과 끝을 다 알고있는 이야기임에도 두 시간대의 극명한 이야기 대조가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게만드는 것이다.

마이클 쉰의 연기는 리차드 프로스트와 토니 블레어 그리고 이번에 브라이언 클러프까지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인물들임에도 서로 어느 정도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이게 피터 모건과의 합작 때만 그런건지 잘 모르겠다.(모건과 함께하지않은 쉰의 출연작을 아직 본 적이 없으므로.)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고 유머러스하지만 속으로는 원대한 야망을 갖고있는 불같은 성격의 이상주의자로서의 실존인물 연기라는, 결코 흔치않은 독창적이고 꽤나 도전적인 자신만의 연기 영역을 스스로 개척한 셈이다.

시장에 걸린 판돈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는만큼 요즘보다 과거의 축구계가 더 관대했노라고 그동안 막연히 짐작했지만 클러프의 44일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비즈니스의 차원을 떠나 맹목적인 승부 집착으로 축구판이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겠구나라는 인식교정과 함께 자연스레 지난 08-09시즌 초반의 토트넘과 후안데 라모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나를 비롯한 안티토트넘팬들은 라모스를 내쫓기위해 토트넘 선수들이 의기투합한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들을 놀려댔는데 영화에서 리즈 선수들이 구단주에게 클러프를 씹어대는 장면을 보고있자니 어쩌면 그때 우리가 떠든게 괜한 유머나 음모론만은 아니겠구나싶었다.

사실 이 영화는 경기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경기 전후의 라커룸이나 경기시작전 터널 안까지만 보여주고 가장 궁금한 경기결과는 자막처리하거나, 당시 자료화면과 배우들의 연기를 포레스트 검프식으로 합성해 후딱 지나가버린다. 

지난 한 주동안 <야구란 무엇인가>와 <머니볼>을 읽으면서, 또 지난 몇년간 지치지않고 아스날 팬질을 하는동안 천문학적 판돈이 걸린 거대스포츠시장에서 성공과 실패의 성과는 결코 어느 한두가지의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했다. 사실 그전까지 스포츠에 철저하게 무지했던 시절에는 아무리 그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해도 역시 스포츠는 두뇌보다는 어디까지나 육체와 육체의 물리적인 충돌이며 최종 심급에서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거기에 더해지는 약간의 운이었노라고 넘겨짚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피터 모건도 스포츠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클러프의 실패일지 명세서를 복기하면서 스포츠 기자나 감독같은 업계종사자의 시각보다는 여전한 실화중독자로서의 면모와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하는데 매진하고있다. <더 퀸>과<프로스트/닉슨>의 작가 아니랄까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않는 두 중심인물간의 미묘한 긴장과 갈등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고(꽤 영국적인 방식) 경쟁자를 향한 적개심을 연료로 삼아 주인공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또 한편의 살리에리 증후군 영화처럼 만들었다. 원작소설의 관점이 크게 다르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클러프의 실패원인은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을게다. 일단 44일이란 기간은 적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 아닌가. 두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쓴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긴하지만 그래도 매작품마다 이렇듯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고있는 피터 모건의 극작술은 (파트너인 마이클 쉰처럼)연출자보다는 작가인 자신을 훨씬 도드라지게한다.(스티븐 프리어즈와 론 하워드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려는건 아니다.) 마치 "이거 내가 쓴 시나리오야'라며 낙관을 떡하니 찍는듯한 레비와 클러프의 마지막 tv토크쇼 장면이라니.

마지막으로 딴소리 한마디, 당시의 리즈 유나이티드는 사실상 돈 레비의 수렴청정이 여전히 진행중인 클럽이었다. 이적하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해도 동료라기보다는 적에 가까운 이가 맡았던 클럽으로 향하는 그 심정이 나로서는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다. 클러프의 행보를 최근시점으로 끌어와 비유하자면 2000년대 초반 리그 자체를 양분했던 벵거와 퍼거슨이, 혹은 05-06시즌 무리뉴와 퍼거슨이 당시 최대라이벌이었던 상대방 클럽으로 이적하는 정도 되려나.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너무 지쳐있었다. 하루빨리 런던으로 돌아가고싶었지만 유로스타 기차표는 아직 일주일가량이나 남아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에 묵었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여행은 조금씩 일상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 다음날 스케줄을 정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느지막히 일어나 발길닿는대로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일찍 잠드는. 때로 어떤 날은 오후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못하고있었다.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이 없었고 심신은 지쳤으며 무엇보다 지갑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있었다.  

그러다 서서히 몸이 리듬을 되찾을 무렵, 다시 파리 시내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시작은 파리 한가운데쯤 되는 샤틀레 역. 출구 밖으로 빠져나와 센 강변으로 나가보니 갑자기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전에 봤던 거기가 맞나. 강변을 따라 비치 파라솔이 쭉 늘어서있고 그렇지않으면 어디서 퍼왔는지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위로 그 위에 누워있는 사람, 걸어가며 구경하는 사람, 아크로바틱 묘기를 펼치는 사람, 악기 연주하는 사람 등등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 눈을 돌려 옆에 서있는 입간판을 보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Paris Plages, 바캉스를 떠나지못한 파리 시민들을 위해 파리 시청이 센 강변에 인공 모래 해변을 만들어놓은, 말 그대로 ‘파리의 바닷가’였다.

그러고보니 8월로 접어든 파리의 여름햇살은 서울의 그것 못지않게 뜨거웠다. 내가 갔던 그 전 해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로 인해 혼자 살던 노인들이 여럿 사망했다고하니(그러고도 혼자 살기 때문에 한동안 발견되지도 않았다고한다.) 파리 시청으로서도 이번 행사에 적지않이 신경을 썼을 듯 했다. 아이들은 샤워기 아래서 물놀이를 즐기고 어른들은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유유히 선탠을 하거나 인공암벽등반을 즐기고있었다. 그늘 밑에는 클래식이나 재즈를 연주하는 거리 뮤지션들이 한 자리씩 잡고있었다. 나도 기분을 내볼까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봤지만 수영복을 안입고있어서인지, 아니면 한강에 비하면 턱없이 폭이 좁아 의외로 즐길만한 풍경이 없는 센 강의 지형 탓인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마도 내 옆에서 같이 즐길 친구가 없었고, 난 이 사람들처럼 바캉스를 떠나지못해 유사 체험을 즐기는 파리 시민이 아니라 이미 ‘배케이션’을 즐기러 파리에 온 관광객 신분인지라 더 이상 즐기고말고할게 없어서였을 것이다.

파리 플라주는 어떻게 말하더라도 궁여지책이고 해변을 흉내낸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팍팍한 도시 안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휴가를 즐길 권리를 찾으려는 파리 시민들과 그것을 공공정책화하여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낸 파리 시청의 노력을 보고있자니 프랑스인들이 견지하고있는 어떤 삶의 태도를 엿본듯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다른 유수의 도시들이 그토록 파리를 벤치마킹하느라 열심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여가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넘치치않는 자유로움, 적극적인 시민의식 등이 어울린 결과라고 해야할까. 언젠가는 뜨거운 한여름철, 우리 한강에서도 인공모래사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색다르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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