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아내의 정조를 시험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목만 보면 마치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에도가와 란포처럼 보이지만 <행인>은 음습한 성적 욕망에 매달리는 정신병리의 해부 수준을 넘어 작품이 쓰이던 당대에 새로이 나타난 어떤 풍경을 포착하고 있다. 관찰자이자 화자인 지로가 바라보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그의 형 이치로는 학문에 헌신하느라 평범한 일상은 커녕 한 집에 살고있는 가족 구성원 전체와 불화를 겪는 중이다. 표면적으로 불거지는 사건도 없고 일상은 그런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부모, 아내, 동생 모두 뒤에서 그를 걱정하는 동시에 불편해하는 가운데 특히 형제와 이치로의 아내 세 사람간의 내적 긴장은 내내 팽팽하다. 문제의 핵심은 겉으로 봐서는 존경받는 학자이자 선생인 이치로에게 그래서 정확히 무슨 문제가 생긴건지를 알 수 없다는데 있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눈으로 이치로를 판단하는데 형의 이상 성격에 대해서는 지로도 이미 일찌감치 나름의 가설을 갖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책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형을 평소보다 배나 딱하게 여기는 일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형님이 학문 이외의 일에 시간을 쓰는걸 아까워하고 모든 일을 남한테 맡겨둔 채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않고 화족인 양 행세하는 것이 애초에 잘못이에요. 아무리 연구할 시간이 소중하고 학교 강의가 중요하다고 해도 평생 한곳에서 함께 생활해야 할 자기 아내 아닌가요?"
지로가 보기에 형은 공부를 너무 많이 탓에 성격이 이상해졌다. 그럼 다른 가족의 관점은 어떨까.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들려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에도 장남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숨어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한즉슨 이십여년 전, 약혼까지 했음에도 이후에 일방적으로 실연당했던 여인이 세월이 그렇게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같이 이야기를 듣고있던 사람들 중 이치로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자신과 이야기 속 여인이 같은 처지라고 믿기 때문인데 여인의 한마디는 곧 그의 속내이기도하다. 
"다만 양쪽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도 남의 마음을 알 수 없는게 가장 괴롭습니다."
 
높은 학식을 쌓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이치로는 단순히 의처증을 앓는게 아니다. 그가 품은 근심에는 더 깊은 뭔가가 있는데 가족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 혹은 볼 수 있는 것만을 볼 뿐 누구도 정확하게 그 근심을 짚어내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할 뿐이다. 결국 이 과업을 이뤄내는 이는 이를 알아내기 위해 이치로와 함께 여행을 떠난 그의 친구인데 여행지에서 그가 지로에게 보낸 긴 편지에서야 비로소 그 해답을 유추해볼 수 있는 나름의 단서가 흩어져있다.
형님은 바둑을 두는 것은 물론이고 뭘 하든 다 싫었다고 하네. 동시에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고 하네. 그 모순이 이미 형님에게는 고통이었다네.

형님은 책을 읽어도, 사색을 해도, 밥을 먹어도, 산보를 해도 스물네 시간 뭘 해도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고 하네. 뭘 해도 이런 걸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기분에 쫓기게 된다고 하네."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네"하고 형님은 말했네. ......형님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뭘 해도 그게 목적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단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네. 그냥 불안한거지.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거네. 

형님의 머리는 지나치게 명민하여 자칫하면 자신을 내버려두고 앞으로 가고 싶어하네. 마음의 다른 도구가 그의 이지와 보조를 맞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데에 형님의 고통이 있는거네. 인격에서 보면 거기에 빈틈이 있는거지. 인격에서 보자면 거기에 파멸이 숨어있네. 형님을 위해 이 부조화를 슬퍼하는 나는 모든 원인을 지나치게 작동하는 이지의 죄로 돌리면서도 역시 그 이지에 대한 경의를 버릴 수가 없네.

형님 입장에서 보면 반듯한 머리가 곧 흐트러진 마음이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럽네. 머리는 확실하지만 정신은 어쩌면 좀 이상할지도 모른다, 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신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성과 감성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한 채 한쪽이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조금씩 정신이 분열되어가는 이치로는 근대적 인간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머리'와 '마음'간의 균열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상해져버린 '정신'. 머릿속에 다 집어넣기도 힘들만큼 서구로부터 지식이 쏟아져들어오던 시대, 그 지식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의 생각이, 사상이 바뀌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으로 대표되는 내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산시로> 속 문장을 빌리자면 '먼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정치, 경제, 사상 등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문물을 알아가(고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감각은 둔해져가는 탓에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속을 몰라 애를 태운다. 뿐만 아니다. 아는게 많아질수록 모르는게 더 많다는걸 깨달으며 생긴 초조함과 조급함, 불안 때문에 인간에는 더욱 소홀해지고 그렇게 자신으로 인해 인간 관계가 파열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상대를 의심하고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부조리를 가한다. 원인 모를 불안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가는 인간의 등장이라는 전환기의 풍경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동시대 서구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동시대 서구 작가들의 장황한 사변적 서술이 아닌 소박한 가족 드라마의 외양을 취한 점은 소세키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을 근대 시기를 살아가던 인간의 내면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정작 장편소설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알게된거라곤 시대에 적응하려다 내파된 인간의 고통이라는 외양뿐이고, 그래서 대체 이치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다른 누군가의 또 하나의 잠정적 가설만 남는다. 그래서일까. 이토록 알기 어려운 한 길 사람 마음속에 대한 소세키의 본격적 탐구는 차기작 <마음>으로 이어진다.

유럽인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면 톰 리플리는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한다.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이렇듯 시리즈의 시작부터 그는 사실상 도피중이었다. 도주야말로 리플리의 삶의 본질이고 범죄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36년간 범죄자이자 반쯤은 예술가같은 리플리가 유럽 각지로 도망치며 벌이는 범죄 행각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리즈의 첫번째 소설은 후반부 그러니까 프레디 마일즈 살인 이후부터 그런 리플리가 도주를 하지않고 이탈리아에 계속 머무르면서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태양은 가득히>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도 마찬가지다.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위한 리플리의 몸부림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액션이 없이 느리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몇 번의 이동 그리고 경찰, 디키의 아버지, 탐정과의 대면 등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도망가지 못한 채 정체되고 답답한 상황에서의 조마조마함은 아직은 초보 범죄자였던 리플리를 미치기 일보직전으로 몰고간다. 후반부의 핵심은 이런 가운데 두어번 이어지는 위기-해결 패턴의 반복인데, 그 해결이 리플리의 영리함 때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스릴러 소설로서 현재 시점에서보면 점수가 깎일만하다.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다한들 이십세기 중반에 이렇게 우연만으로 심지어 지문 대조 한번 없이 위기를 탈출하는 방식은 너무 손쉬워 보일 수 밖에 없고 하이스미스 본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두 달 동안 수사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건 헤아릴 수 없을만큼 계속 이어진 행운 덕분이었다. 디키인 척 가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행운이었다. ... 그의 행운은 지나치게 오래 계속되었다. 

거기에 이 소설의 가장 급박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마지의 우둔함으로 해결된다는 점도 되짚어볼만하다. 본문 내내 리플리는 마지를 향한 혐오감을 내비칠 뿐 아니라 자칭 작가라곤 하지만 그러기엔 지성보다 감성만 지나치게 앞서있는 그녀의 우둔함을 시종일관 조소한다. 거의 유일한 주요 여성 배역을 이렇게 설정한건 하이스미스 본인의 단편집 제목처럼 '여성혐오' 내지는 비하처럼 보일만하다. 실제 자신과는 정반대 타입의 여성 작가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하이스미스는 그와 대비되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한건 아닐까.  

리플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직접적 언급이 없긴하지만 그 점을 괄호친다면 이 소설은 호모소셜의 유지를 위해 여성이 배제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리플리와 디키가 모종의 호모소셜한 관계를 짧게나마 유지했다고 본다면 이제 그 방해자가 된 마지는 디키와의 연인 관계만 끝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 결정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에 그 누구보다 가장 가깝게 다가갔음에도 끝내 그를 통한 합리적 추론(이라는 지적 작업)에 실패함으로써 진실을 알고있는 유일한 두 사람 리플리와 디키 사이에 끼지못하고 떨어져나오기 때문이다. 

이브 세지윅이 주창했던 '호모소셜'이란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로서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러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차별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데 이 관점에서 볼 때 디키와 프레디라는 피살자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남성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냥 남성이 아니라 영민하며 예술가적 기질까지 갖춘, 지금봐도 여전히 선구적인 캐릭터인 리플리에 비하면 현저히 어리석은 마지의 등장과 농락 그리고 배제 과정은 이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동성간의 내밀하고 강고한 연대라는 세지윅의 가설을 일부 증명해내고 있다. 본격적인 여성인권운동의 부흥과 맞물리는(혹은 그보다 조금 이전이었던) 집필 시점에서 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활동적이며 그렇지 않은 여성을 상상하기는 힘들다는 식으로 말한걸 보면 하이스미스도 나름의 호모소셜 가설을 갖고 있었던듯하다. 다만 남성우월주의를 내면화했다기보다는, 이성은 결코 이해할 수도 그래서 인지할 수도 없고 따라서 입장 자체가 불가한 동성간의 긴밀하고 점성력 높은 유대와 사교 관계를 재현하려 한 것 같다.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을뿐.

나는 여자들이 남자들만큼 활동적이거나 무모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바에 따르면 여자들의 활동이 육체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원동력으로 보자면 분명히 남자들을 앞서기까지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자들이 사람들이나 상황을 이끌기보다는 거기에 떠밀리며, "하겠다"나 "할 작정이다"보다는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싶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중 161p

내밀하지만 단단한 유대가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 해체되고 파국을 맞는다는건 그래서 흥미롭다. 디키와 톰의 껄끄러웠던 첫만남 그리고 서서히 갈등이 쌓이던 끝에 벌어진 살인 장면은 배타적 젠더라는 유일 요소만으로는 호모소셜한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디키와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회화를 감상하기 시작하던 리플리처럼 취향은 노력을 통해 곧잘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엔 이미 계급이라는 높은 벽이 있고 이는 젠더만으로는 애초부터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향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도 심지어 나이까지 불문한(<리플리를 따라간 소년>) 남성간의 연대와 그 해체로 인해 리플리는 계속 도주한다.

<높은 성의 사내>(1962)는 대체역사소설 장르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있는 대표작이지만 추축국이 승리한 이후의 세계라는 설정이 주로 회자되는데 비해 구체적인 내용 해설이나 주제에 대한 비평, 해석을 찾아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개별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펼쳐지다가 마지막까지도 합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끝나는 결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읽은건 대체 뭐였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걸까. 읽기 전보다 오히려 더 궁금한게 많아졌다. 

연합국이 패배하고 추축국이 승리한 세상, 독일과 일본이 각각 미대륙의 동, 서부를 분할 점령중인 가운데 주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 병렬 진행된다. 일본 점령지역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산 앤티크 및 빈티지 골동품을 파는 칠던, 태평양연안 무역대표부 관리인 일본 관료 다고미, 친구와 함께 직접 빈티지 소품을 수공업으로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한 유태인 프랭크 프링크, 그리고 프랭크와 이혼 후 독일과 일본 점령지 사이의 중립지역인 콜로라도에 머물고 있는 전처 줄리아나 프링크와 그녀와 우연히 만난 뒤 함께 여행길에 오른 이탈리아 출신 남자 조까지 이렇게 다섯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서로 한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관하거나 작은 접점만을 가진 타인에 가깝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있는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한 챕터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옮겨다니며 병렬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렇다 할 중심 줄거리는 잘 보이지 않으며 자연히 저자의 의도나 주제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조와 줄리아나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같이 여행길에 오르는데 그러다가 장안의 화제인 소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의 저자 호손 아벤젠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소설 속 또다른 소설인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세계사와 유사한(그러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세계상을 그리고 있다. 독일과 일본이 패전했다는 '설정'의 이 대체역사소설은 독일이 점령한 동부에서는 당연히 금서로 지정돼있고 저자 아벤젠은 위협을 피해 은둔중이라는 소문이 떠돈다. 두 사람은 그가 어떻게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알고 싶어서 직접 그의 집, 바로 '높은 성'으로 향한다. 

한편 일본 무역대표부 관리인 다고미의 이야기는 그가 스웨덴에서 건너온 사업가 바이네스를 만나는데서 출발한다. 사업상 미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고 하지만 사실 바이네스는 정체를 감춘 독일 정부의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리를 만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독일이 일본을 침공하려는 계획, 한마디로 핵을 이용한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물론 다고미는 거의 종반에 이를 때까지는 바이네스의 이런 숨은 의도를 몰랐고 결국 둘의 만남을 성사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몰랐던 숨은 진실을 알게되면서 어떤 각성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칠던은 다고미가 자주 찾는, 미국 골동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의 주인이다. 주요 캐릭터이긴 하지만 칠던의 역할은 살짝 군더더기에 가깝다. 그는 소설 내에서 일본이 미국을 점령했다는 설정을 계속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패전국 미국을 향한 승전국 일본인의 온갖 페티시적 집착(이는 지금도 여전한 서양인의 일본 문화 페티시에 대한 정확한 거울상이자 비꼬기임을 알 수 있다)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자신들이 쓰러뜨린 미국인이 전쟁 전에 쓰던 온갖 물건들을 집에 수집해놓고 즐기는 승전국 국민의 여유와 호사스러움을 충족시키기위해 그들에게 물건을 공급하거나 소개하는 패전국 상인이라는 구도가 설정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칠던의 내면에서는 동요가 계속된다. 승전국 국민에게 굴종한다는 자괴감,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본인보다는 문화적으로 더 교양있고 우월한 백인종이라는 정신승리가 그것인데 여기서 아예 더 나아가 칠던은 결국 (유사)인종차별주의로까지 이른다. 

 

백인종만이 창의력을 갖고 태어났어. 칠던은 생각했다. 그런데도 백인의 피를 가진 내가 이 두 사람을 위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다니. 만일 우리가 이겼을 경우를 생각해 봐! 저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못했을거야. 일본은 사라지고 미합중국은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빛나겠지. 


프랭크 프링크는 저러한 일본인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빈티지처럼 보이는 위조품을 만들어 칠던의 가게를 포함해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가 적발되어 체포되지만 유태인인 그를 독일로 직접 데려가 처형하려는 독일 정부의 협조 요청을 다고미가 거부하고는 훈방시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다시 제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프랭크 부분의 결말이다. 

최종적으로 딕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진짜 하고 싶었을 이야기는 그래서 줄리아나와 조의 몫으로 돌아가는데, 그녀는 조가 사실은 정체를 숨긴 나치로서 아벤젠을 죽이려는 계획임을 알고는 머물던 호텔방에서 그를 살해하고 빠져나와 홀로 파벤젠을 만나는데 성공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파벤젠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사실은 주역으로 점을 쳐서 썼음을 알아내고는 가장 중요한 최종의 질문, 즉 왜 아벤젠으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게 했는가를 다시 한번 주역에게 묻고 마찬가지로 점괘를 통해 그 대답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답이란 그 소설이 바로 '내면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책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아벤젠이 화를 내며 말했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고요?"
"그래요."
아벤젠은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외면하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한참동안 그는 생각에 잠겼다. 줄리아나는 그의 눈빛이 공허해지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줄리아나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혔어. 그러더니 그의 눈이 다시 빛났다. 그는 툴툴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군."
아벤젠이 말했다.
"믿으세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못하시겠어요? 정말로요?" 

 

<유빅> <파머 알드리치와 세 개의 성흔> <기억을 도매가로 팝니다>등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수차례 변주해온, 필립 K 딕의 머리에서 늘 떠나지 않던 주제, 즉 실재하는 가상 세계(평행 우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도 허수아비일지 모른다는 정체성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혼란이 여기서 또 한번 반복된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에서 그 사실을 모른 채 일상을 영위하던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헐리웃 영화처럼 적극적으로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뭔가를 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초월, 각성, 환각 등 무엇이라 부르건 그러한 영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본작에서도 맨마지막에 저렇게 암시만으로 끝내는 것이 모자라다고 여겼는지 후반부에 총격전을 벌인 뒤 도주하던 다고미가 짧게나마 느닷없는 시공간 이동을 체험한다. 분명히 전부터 알던 장소였건만 그동안 알고있던 것과는 풍경도, 사람들의 외양도 달라진 것이다.

 

주요 인물들은 서로 외떨어져있고 필립 K 딕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격렬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다. 다고미가 독일 공작원들을 사살하거나 줄리아나가 조를 살해하는 장면이 그나마 액션이라 할 수 있으나 서술은 건조하며, 그래서 향후 두 국가간 핵전쟁이 벌어졌는지의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체 뭘 할까. 그들은 생각을 하고 독백을 한다. 그리고, 점을 친다. 인종, 국적, 직업 등 천차만별이지만 고민과 결정의 순간마다 그들은 주역에 의존한다. 주체적 결단을 미루는 회피적 성격은 그들이 사실은 가상의 세상을 사는 꼭두각시들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일견 이해가 된다. 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긴 누가 만든 어떤 세상인걸까.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필립 K 딕이라는 작가의 <높은 성의 사내>라는 소설 속 세상이라는 답은 가장 즉각적이면서 또 시시하지만 동시에 최종적인 답일 수 있다. 이 소설 자체가 소설 쓰기에 대한, 그리고 소설을 쓰는 작가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가 만든 세트나 소설이고, 나는 다른 사람이 꾸는 꿈 속의 나비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어쨌든 짜릿함을 선사한다. 현재의 삶이 비루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그럴테고. 값싼 자기 위안이기 십상이지만 적어도 필립 K 딕에게는 그렇지 않았던가보다. 줄리아나에게는 가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깨달음이 '내면의 진실'이었고 자신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돼지나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면의 진리'를 다고미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주역, 약물, 계시 등 딕이 생전에 탐닉하고 경험했다는 것들 그리고 줄기차게 그가 반복했던 소재와 플롯은 적어도 딕이 어지간히 현세로부터 벗어나거나 눈 앞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했음을 짐작케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다른 (대체) 역사소설의 작가들처럼 거대하고 치밀한 세계관을 설정하거나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재미를 위해 이 소설을 쓴 건 아닌듯하다.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휘어나갔을지를 외삽하거나, 혹은 속류 대체역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밀리터리 매니아처럼 지엽적이거나 도착적 관심보다는 그저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상의 실재성 그 자체를 뒤흔드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충격에 독자보다도 그 스스로가 더 깊게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 딕이 집필할 당시의 현실 정치에 대한 암시나 코멘터리, 혹은 풍자가 있을까.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재미는 그런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풍부하고 상세한 설정 같은 것 없이도 이 소설은 얼마든지 그 배경을 1차 대전으로, 남북전쟁으로, 독립전쟁 등으로 쉽게 바꿔 쓰는게 가능하다. 대략적이고 거시적인 설정만 정해놓은 다음 그 안에 접점이 별로 없는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들을 병렬로 늘어놓다가 결국 맨마지막에 알고보니 이게 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가짜 세상이었구나하면서 뒤집어버리는 썰렁한 반전에 이 소설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즐길 것은 스토리텔러의 특권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고전을 쓴 대문호들처럼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지도, 판타지 소설가들처럼 장구한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지만 그 대신 딕은 인물들이 뛰노는 무대를, 그리고 자신이 쓰고 있는 글 자체를 자꾸 뒤집어 엎는다. 자신이 만들어놓고는 곧바로 다시 그것을 부수어버리는데서 오는, 창조주만이 독점하고 있을 쾌감과 재미에 그는 '중독'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남이 만든 물건을 중개하고 판매할 뿐인 칠던은 이렇다할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 본문에서 사라진 반면 가짜일지언정 두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프랭크에게는 다시 작업대 앞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결말로 주어진다. 가짜 골동품을 만드는 창작자라니, 너무 직접적이긴하다. 그에 반해 정작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벤젠은 알고보니 주역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아니 맡겼다기보다는 그저 타자 기계에 지나지않은 또 한마리의 나비였을 뿐이다. '높은 성의 사내'라는 별명과 함께 은둔한다는 소문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사실은 평지에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있었듯이 아벤젠에게는 진실된 것이 거의 없다. 이렇듯 창조주로서의 창작자만이 갖는 쾌락은 또한 등장인물들에게 저마다 딕 본인의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각기 부여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점차 인지적 각성을 겪는 다고미와 인물들 중 거의 유일하게나마 마지막에 통찰력을 보여준 줄리아나는 당연하다. 그러나 역시 다른 세 인물과는 별다른 연결점이 없고 비중도 작으며 거기에 묵묵히 다시 작업대 앞에 서는 심심하고 쉬이 잊힐법한 결말을 맞는 프랭크야말로 또 한 명의 진정한 창작자로서 딕의 그림자가 제일 넓게 드리워져있다. 아침이 되면 오늘 주어진 일을 시작하는 노동자의 루틴을 유지하는 그런 창작자의 그림자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스스로 비틀고 뒤트는 고약한 재미에 푹 빠져있다한들 완전히 부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한가지 확실한, 바로 그것을 딕은 찾고 있었던게 아닐까.

 

프랭크는 코트를 의자 위에 걸쳐 두고 절반쯤 완성한 은제품들을 들고 작업대로 향했다. 굴대에 연마용 양모를 끼우고 모터를 켰다. 프랭크는 연마기에 연마제를 바르고 안구보호용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제품들을 차례로 연마기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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