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성의 사내>(1962)는 대체역사소설 장르에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있는 대표작이지만 추축국이 승리한 이후의 세계라는 설정이 주로 회자되는데 비해 구체적인 내용 해설이나 주제에 대한 비평, 해석을 찾아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개별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펼쳐지다가 마지막까지도 합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끝나는 결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읽은건 대체 뭐였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걸까. 읽기 전보다 오히려 더 궁금한게 많아졌다. 

연합국이 패배하고 추축국이 승리한 세상, 독일과 일본이 각각 미대륙의 동, 서부를 분할 점령중인 가운데 주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가 계속 병렬 진행된다. 일본 점령지역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산 앤티크 및 빈티지 골동품을 파는 칠던, 태평양연안 무역대표부 관리인 일본 관료 다고미, 친구와 함께 직접 빈티지 소품을 수공업으로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한 유태인 프랭크 프링크, 그리고 프랭크와 이혼 후 독일과 일본 점령지 사이의 중립지역인 콜로라도에 머물고 있는 전처 줄리아나 프링크와 그녀와 우연히 만난 뒤 함께 여행길에 오른 이탈리아 출신 남자 조까지 이렇게 다섯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서로 한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무관하거나 작은 접점만을 가진 타인에 가깝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있는 이들 각자의 이야기가 한 챕터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옮겨다니며 병렬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렇다 할 중심 줄거리는 잘 보이지 않으며 자연히 저자의 의도나 주제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조와 줄리아나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같이 여행길에 오르는데 그러다가 장안의 화제인 소설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의 저자 호손 아벤젠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소설 속 또다른 소설인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세계사와 유사한(그러나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세계상을 그리고 있다. 독일과 일본이 패전했다는 '설정'의 이 대체역사소설은 독일이 점령한 동부에서는 당연히 금서로 지정돼있고 저자 아벤젠은 위협을 피해 은둔중이라는 소문이 떠돈다. 두 사람은 그가 어떻게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알고 싶어서 직접 그의 집, 바로 '높은 성'으로 향한다. 

한편 일본 무역대표부 관리인 다고미의 이야기는 그가 스웨덴에서 건너온 사업가 바이네스를 만나는데서 출발한다. 사업상 미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왔다고 하지만 사실 바이네스는 정체를 감춘 독일 정부의 요원으로서 일본 정부의 한 고위 관리를 만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독일이 일본을 침공하려는 계획, 한마디로 핵을 이용한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물론 다고미는 거의 종반에 이를 때까지는 바이네스의 이런 숨은 의도를 몰랐고 결국 둘의 만남을 성사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몰랐던 숨은 진실을 알게되면서 어떤 각성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 

칠던은 다고미가 자주 찾는, 미국 골동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의 주인이다. 주요 캐릭터이긴 하지만 칠던의 역할은 살짝 군더더기에 가깝다. 그는 소설 내에서 일본이 미국을 점령했다는 설정을 계속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패전국 미국을 향한 승전국 일본인의 온갖 페티시적 집착(이는 지금도 여전한 서양인의 일본 문화 페티시에 대한 정확한 거울상이자 비꼬기임을 알 수 있다)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자신들이 쓰러뜨린 미국인이 전쟁 전에 쓰던 온갖 물건들을 집에 수집해놓고 즐기는 승전국 국민의 여유와 호사스러움을 충족시키기위해 그들에게 물건을 공급하거나 소개하는 패전국 상인이라는 구도가 설정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칠던의 내면에서는 동요가 계속된다. 승전국 국민에게 굴종한다는 자괴감,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본인보다는 문화적으로 더 교양있고 우월한 백인종이라는 정신승리가 그것인데 여기서 아예 더 나아가 칠던은 결국 (유사)인종차별주의로까지 이른다. 

 

백인종만이 창의력을 갖고 태어났어. 칠던은 생각했다. 그런데도 백인의 피를 가진 내가 이 두 사람을 위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다니. 만일 우리가 이겼을 경우를 생각해 봐! 저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못했을거야. 일본은 사라지고 미합중국은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빛나겠지. 


프랭크 프링크는 저러한 일본인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 빈티지처럼 보이는 위조품을 만들어 칠던의 가게를 포함해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가 적발되어 체포되지만 유태인인 그를 독일로 직접 데려가 처형하려는 독일 정부의 협조 요청을 다고미가 거부하고는 훈방시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다시 제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프랭크 부분의 결말이다. 

최종적으로 딕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진짜 하고 싶었을 이야기는 그래서 줄리아나와 조의 몫으로 돌아가는데, 그녀는 조가 사실은 정체를 숨긴 나치로서 아벤젠을 죽이려는 계획임을 알고는 머물던 호텔방에서 그를 살해하고 빠져나와 홀로 파벤젠을 만나는데 성공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파벤젠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사실은 주역으로 점을 쳐서 썼음을 알아내고는 가장 중요한 최종의 질문, 즉 왜 아벤젠으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게 했는가를 다시 한번 주역에게 묻고 마찬가지로 점괘를 통해 그 대답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답이란 그 소설이 바로 '내면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책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래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아벤젠이 화를 내며 말했다.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고요?"
"그래요."
아벤젠은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외면하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한참동안 그는 생각에 잠겼다. 줄리아나는 그의 눈빛이 공허해지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줄리아나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혔어. 그러더니 그의 눈이 다시 빛났다. 그는 툴툴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군."
아벤젠이 말했다.
"믿으세요."
줄리아나가 말했다.
그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믿지 못하시겠어요? 정말로요?" 

 

<유빅> <파머 알드리치와 세 개의 성흔> <기억을 도매가로 팝니다>등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수차례 변주해온, 필립 K 딕의 머리에서 늘 떠나지 않던 주제, 즉 실재하는 가상 세계(평행 우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도 허수아비일지 모른다는 정체성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혼란이 여기서 또 한번 반복된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에서 그 사실을 모른 채 일상을 영위하던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헐리웃 영화처럼 적극적으로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뭔가를 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초월, 각성, 환각 등 무엇이라 부르건 그러한 영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본작에서도 맨마지막에 저렇게 암시만으로 끝내는 것이 모자라다고 여겼는지 후반부에 총격전을 벌인 뒤 도주하던 다고미가 짧게나마 느닷없는 시공간 이동을 체험한다. 분명히 전부터 알던 장소였건만 그동안 알고있던 것과는 풍경도, 사람들의 외양도 달라진 것이다.

 

주요 인물들은 서로 외떨어져있고 필립 K 딕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격렬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다. 다고미가 독일 공작원들을 사살하거나 줄리아나가 조를 살해하는 장면이 그나마 액션이라 할 수 있으나 서술은 건조하며, 그래서 향후 두 국가간 핵전쟁이 벌어졌는지의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체 뭘 할까. 그들은 생각을 하고 독백을 한다. 그리고, 점을 친다. 인종, 국적, 직업 등 천차만별이지만 고민과 결정의 순간마다 그들은 주역에 의존한다. 주체적 결단을 미루는 회피적 성격은 그들이 사실은 가상의 세상을 사는 꼭두각시들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일견 이해가 된다. 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긴 누가 만든 어떤 세상인걸까.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필립 K 딕이라는 작가의 <높은 성의 사내>라는 소설 속 세상이라는 답은 가장 즉각적이면서 또 시시하지만 동시에 최종적인 답일 수 있다. 이 소설 자체가 소설 쓰기에 대한, 그리고 소설을 쓰는 작가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세상이 누군가가 만든 세트나 소설이고, 나는 다른 사람이 꾸는 꿈 속의 나비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어쨌든 짜릿함을 선사한다. 현재의 삶이 비루하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그럴테고. 값싼 자기 위안이기 십상이지만 적어도 필립 K 딕에게는 그렇지 않았던가보다. 줄리아나에게는 가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깨달음이 '내면의 진실'이었고 자신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돼지나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면의 진리'를 다고미는 담담히 받아들인다. 주역, 약물, 계시 등 딕이 생전에 탐닉하고 경험했다는 것들 그리고 줄기차게 그가 반복했던 소재와 플롯은 적어도 딕이 어지간히 현세로부터 벗어나거나 눈 앞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했음을 짐작케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다른 (대체) 역사소설의 작가들처럼 거대하고 치밀한 세계관을 설정하거나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재미를 위해 이 소설을 쓴 건 아닌듯하다.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휘어나갔을지를 외삽하거나, 혹은 속류 대체역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밀리터리 매니아처럼 지엽적이거나 도착적 관심보다는 그저 내가 안다고 믿었던 세상의 실재성 그 자체를 뒤흔드는데서 오는 즐거움과 충격에 독자보다도 그 스스로가 더 깊게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 딕이 집필할 당시의 현실 정치에 대한 암시나 코멘터리, 혹은 풍자가 있을까.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재미는 그런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풍부하고 상세한 설정 같은 것 없이도 이 소설은 얼마든지 그 배경을 1차 대전으로, 남북전쟁으로, 독립전쟁 등으로 쉽게 바꿔 쓰는게 가능하다. 대략적이고 거시적인 설정만 정해놓은 다음 그 안에 접점이 별로 없는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들을 병렬로 늘어놓다가 결국 맨마지막에 알고보니 이게 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가짜 세상이었구나하면서 뒤집어버리는 썰렁한 반전에 이 소설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즐길 것은 스토리텔러의 특권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고전을 쓴 대문호들처럼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지도, 판타지 소설가들처럼 장구한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지만 그 대신 딕은 인물들이 뛰노는 무대를, 그리고 자신이 쓰고 있는 글 자체를 자꾸 뒤집어 엎는다. 자신이 만들어놓고는 곧바로 다시 그것을 부수어버리는데서 오는, 창조주만이 독점하고 있을 쾌감과 재미에 그는 '중독'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남이 만든 물건을 중개하고 판매할 뿐인 칠던은 이렇다할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 본문에서 사라진 반면 가짜일지언정 두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프랭크에게는 다시 작업대 앞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결말로 주어진다. 가짜 골동품을 만드는 창작자라니, 너무 직접적이긴하다. 그에 반해 정작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벤젠은 알고보니 주역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아니 맡겼다기보다는 그저 타자 기계에 지나지않은 또 한마리의 나비였을 뿐이다. '높은 성의 사내'라는 별명과 함께 은둔한다는 소문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사실은 평지에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있었듯이 아벤젠에게는 진실된 것이 거의 없다. 이렇듯 창조주로서의 창작자만이 갖는 쾌락은 또한 등장인물들에게 저마다 딕 본인의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각기 부여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점차 인지적 각성을 겪는 다고미와 인물들 중 거의 유일하게나마 마지막에 통찰력을 보여준 줄리아나는 당연하다. 그러나 역시 다른 세 인물과는 별다른 연결점이 없고 비중도 작으며 거기에 묵묵히 다시 작업대 앞에 서는 심심하고 쉬이 잊힐법한 결말을 맞는 프랭크야말로 또 한 명의 진정한 창작자로서 딕의 그림자가 제일 넓게 드리워져있다. 아침이 되면 오늘 주어진 일을 시작하는 노동자의 루틴을 유지하는 그런 창작자의 그림자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스스로 비틀고 뒤트는 고약한 재미에 푹 빠져있다한들 완전히 부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한가지 확실한, 바로 그것을 딕은 찾고 있었던게 아닐까.

 

프랭크는 코트를 의자 위에 걸쳐 두고 절반쯤 완성한 은제품들을 들고 작업대로 향했다. 굴대에 연마용 양모를 끼우고 모터를 켰다. 프랭크는 연마기에 연마제를 바르고 안구보호용 마스크를 착용하고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제품들을 차례로 연마기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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